< 아름다운 구두 >
허 대 현
오래 걸어서 다다른 길 끝
덩그러니 길바닥에 남겨져
여기저기 긁히고 갈라터진 채
세상 궂은 일 온몸으로 겪으면서
오래 자리 잡혀 다시 펴지지 못할
깊이 패인 내 아버지 주름살과 같은
그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을 아름다운 상처.
< 황 태 >
허 대 현
고향 떠난 지 오래
속 잃은 허기를 채운
바람소리가 밀려 나온다
너른 골마다 빼곡하게 널려
칼바람에 물기 죄다 뺀 채
세상을 펄럭이다
홀로 야위어 속만 퍽퍽해 지면서
낮과 밤 가로질러 온
별 빛이 내리박혀
이름도 몸도 금빛 속살이 되다.
< 곶 감 >
허 대 현
어느 집 처마 아래
껍질 벗고서야
허공에 달려
발갛게 열꽃을 피어내고
싱그런 바람과 햇살 아래
시나브로 늙어가며
수줍게 분 바르던 지독한 기다림
쫀득한 달콤함에
나 어릴 적 울음 그치게 하던
깊이 아껴두었던 사랑
누가 볼 새라 살며시 쥐어 주시던
외할머니의 미소가 떠올랐다.
눈 꽃 허 대 현
겨울바람의 뒷발질에
소리 없이 펑펑 울며
밤새 지천으로 뿌려지던 날
그리움에 굽 자란 나뭇가지마다
눈부시게 하얗게 내려앉는
울며 피는 찬란한 눈꽃.
<미세 먼지 >
허 대 현
희뿌연한 세상이 밀려온다
하늘이 내린 형벌인가보다
말을 삼가라
마스크에 입이 가려진다
보이지 않은 먼지가 떠돈다는 이유로
어김없이 우리에게
아침마다 마스크를 강요한다
가끔은
마치 침묵 명상을 하라는 듯
그럴수록 사람들은 할 말이 많은가 보다
여기저기 아랑곳하지 않는
지그럭대는 세상 속 하루
로봇주둥이 같은 모양의 세상 입이 막힌다.
< 어느 날 >
허 대 현
멍하니 초저녁이 서 있었다
때 이른 별 하나
넌지시 나와 반짝인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에게
저도 그냥 가만히 내려다본다
눈물겹도록
하기는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 때 나는 행복했었다.>
허 대 현
그 때 그대와 나는
밤이 깊어지고서야
머물렀던 자리를
달빛에게 내 주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지나간다
새벽마다 거리에는
다른 하루가 쓸려간다
별이 가득한 그 때
너와 함께 나누던 이야기보다
별들이 지던 날
스스로 간절히 기원했던 말들이
입술에 고여 오래 남아 있었다.
< 지나가면서 세상을 >
허 대 현
세월의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세상을 뒤집어놓는다
우리들은 왜
같은 방향만 바라볼까
잃어버린 인연을 추억하는
몸짓이 저런 것일까
계절이 지나가는데
눈물겹지도 않은 것들조차
모두 함께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바 람 >
허 대 현
새벽빛 창밖
지고 메마른 풀섶에서
시린 바람 찬 서리가 속살거린다
칼바람 속에서
가장 사나운 숨탄것은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침
하늘을 날아오르는
파들거리는 날 것들의
날갯짓이 눈부시게 흩어진다.
< 바 람의 흔 적 >
허 대 현
하얀 속살 들어낸 채
온 몸으로 부딪쳐 와도
껴안을 가슴이 없어
어디론가 떠나보내고
누군가에게 달려가야 하는 너는
푸르른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하늘 속 깊이 날아오르다
날마다 밤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안에 들어와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다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연신 무심한 날갯짓으로
지나온 흔적을 되 지우며
홀연히 먼 길 떠나가는 너, 바람
저만치 그리움 하나가 서 있었다.
<내 마음 >
허 대 현
빗장 풀리던 날
깊이 숨어 있던 것들조차
다가와 연신 온몸을 부벼댔다
모두가 아득히 떠나간 후
문이 걸어 잠기자
긴 외마디가
내 눈썹 위에 얹힌 채
오래 쓸쓸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