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억이라 부르던 상자에는
글쎄,
힘들고 고단했던 저녁하늘이 담겨있어
그 하늘에는 별도 없고 꿈도 없었지
그럼에도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억지로 끼워 맞춘 별자리를 말했고
친구는 당당히 태양을 말했지
나는 그 날 태양의 조각난 파편을 주웠어
지금 돌아보면, 그래
졸업하며 묻어두고 온 화단 아래 낡은 상자를 열어 보니
이런,
수능 끝내고 넣어둔 수험표와 볼펜,
구겨진 설문조사지
피곤함과 우울함과 분노와 조금의 노력이 담겨있었지
꼭꼭 잠겨져있던 상자의 자물쇠를
모래가 낀 손톱으로 힘겹게 돌렸는데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별자리가 나를 반겼어
아니 별똥별 이었나, 그래
때 탄 상자를 선반 위 방구석에 밀어 두다
문득,
상자를 뒤집어 속에 있던 구정물들을 비워냈지
악착같이 붙어 있던 그것들을 탈탈 털곤 상자를 던졌어
그렇게 찌그러진 상자의 맨 밑바닥에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태양을 꿈꾸던 친구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어
그건 바라진 추억 대신 온전한 그 시절의 기억을 품고 있었지
즐겁고 파릇파릇했던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지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 그래
내 끝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꽃을 피워 너에게 전하고
보이는 꽃잎을 따가며 나의 사랑을 시험해
좋아해
좋아하지 않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점을 보며 운명을 확인하고
부모님이 정해준 운명의 작대기를 믿으며 우리 사이를 의심해
선연
악연
너와의 모든 날이 행복하다 말하며 특별한 기념일을 계산하고
너와의 기념일을 빌미로 싸움을 시작해
만남
이별
뒤늦게
후회의 산물인 눈물이 볼을 타고
내가 뜯어낸 꽃잎에 떨어져 내려
이미 의심의 씨앗들은 모두 발아해
내 꽃은 보이지도 않게 돼 버렸는데
그렇게
짓밟혀버린 너의 사랑과
새겨져버린 너의 이름과
네가 버리고 간 꽃이
나를 비난해
나의 시간은 그곳에
그 아이는
무서운 걸 보고도 웃을 줄 알았고
친구가 없어도 외로워하지 않았고
고통스러워도 참을 줄 알았지
아이는
푸르게 멍 든 이마를 덥수룩한 앞머리로 가리고
비난하는 손가락들을 피해 자신의 안식처를 찾고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어른이 되고 싶다 말했지
그런 아이가 붉은 노을과 함께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나는 입술을 떼어
너를 불렀어
나는 네게 내 두 손을 주기 위해 달려갈 거야
나는 네게 내 등을 내어주기 위해 다가갈 거야
어느 봄날, 너를 만나러 가는 길
떠오르는 여명을 담은 바다는 검은 그림자를 수면 아래로 숨기고
하늘과 같은 색으로 탈바꿈하여 나를 유혹했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지고 너를 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도
어제 내가 보았던 낙원 같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등을 짓누르던 무거운 산소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감정을 찍어 누르고
나를 바다의 이면 속으로 끌어내렸다
평온해 보였던 바다는 이면 속으로 들어온 내게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들이밀며
거센 물살로 내 멱살을 잡고 휘둘렀다
빛을 거부하는 어둠을 뚫고 일직선으로 뻗은 라이트에 의지해
차가운 숨을 뱉어냈다
물거품은 오늘과 다른 지난날의 일상을 무참히 터트리고는
수면 위로 사라져갔다
나를 잡아 내리기도 밀어올리기도 하는 해류와
내 시야를 차단하는 두려움과
온 몸으로 앞을 막는 장애물들을 해쳐가며
너를 만나러가는 길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맨발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신발 한 짝 신지 못한 너의 발은 방금까지 나를 떨게 만든 수온보다 더
차가웠다
나를 애타게 찾았을 손에 난 상처를 보듬어 가슴에 묻고
온 몸으로 너를 감싸 안았다
내가 왔음을, 토닥이는 손길로 전했다
내가 늦었음을, 심장의 고동소리로 전했다
그리고 나는 네게 이렇게 말 했다
“이제 돌아가자”
나는 네게 좋은 어른이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그러니 그 곳에서
나를 기다려줘
발송인: 가해자가 된 피해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길 당신들은 기다렸던 게 아닌가요?
내 삶의 이유를 무참히 죽여 버린 뒤에도
내가 여기 숨 쉬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내가 이곳에 살아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냥 여기 떠다니는 먼지 한 톨이 아니라
나를 보는 당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살았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이제야 내가 불쌍해 보이나요? 안쓰러워보이나요? 도와주고 싶나요?
나는 더 이상 이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세뇌하지 않을 거예요
아프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난 죽었다고 말 했잖아요.
나를 외면했던 당신들은 이제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했는지 알게 되겠죠
뭐, 그렇지만 계속 살아가겠죠
어쩌겠어요
나처럼 순응하고 고개 숙이고 버티다가 벼랑에서 떨어지세요
그럼, 그 순간 내가 손 잡아줄게요
그리고 이렇게 속삭여 줄게요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산 당신이.......
나처럼 세상에게 버림받길 간절히 원했다고
이름: 박 미현
이메일:almus9597@gmail.com
전화번호: 010.5527.0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