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소리
백종성
그대여
바람 한 줄기 햇볕 아니 닿는 곳
비좁은 방 한 칸 이부자리 반 접어
허리 숙여 누우면 차디찬 벽을 마주하고
반은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하얀 안색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만 같은 쇳소리
그 소리가 정적에 고동치며
멎을 듯 말 듯 불규칙한 울음으로
새벽 내내 이어지면
몇십 배가 되어 내 귀에 쏙쏙 박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자식으로서
나의 그대여
어릴 적 그 고운 얼굴이
둘을 낳고 가슴으로 키우시는 동안
속이 썩어 문드러져
온몸을 쇠사슬로 옥죄는 것 같은 느낌과
위액이 역 솟구치는 순간을 견뎌내시지만
우리 둘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누구보다 단단한 기둥으로 뿌리 깊게 내려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행복해하셨다
자식 자랑 다 담지 못하여
옆집에 흘리고 친척에 흘리고
주변사람들 귀가 닳도록 자랑하시는 모습
울 어머니 기 세워 주기는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자식으로서
그리운 나의 그대여
아픈 몸에 견딜 수 없던 회사를 탈출하시고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젠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시라 해도
완강히 거부하며 아직 젊다고
다시 한 번 일어서보자고 다짐하시며 만든 죽집
2월 어느 추운 날 그렇게
어머니의 제 2의 인생이 막을 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9시가 되기 전에 출근하셔서
어두웠던 골목 거리에 가장 먼저 빛 한줌 주며
자신보다 더 아프고 힘든 분들에게
정성껏 죽을 쒀서 손님상에 대접하고 나면
당신은 고구마 두 조각
그게 식사의 전부시었다
전역을 하고 나니 당신의 그 모습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나 또한 자전거를 이끌고 장사 길에 올랐다
자식으로서
사무치도록 그리운 나의 그대여
멎을 듯 말 듯 불규칙한 울음으로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만 같은 쇳소리
이젠 그 소리가
영원할 것 같은 정적을 깨고 새벽 내내 이어져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시면 얼마나 행복할까
귀가 닳도록 자식 자랑하시던
행복한 웃음소리 너무나도 듣고 싶은데
참을 수 없는 고통 이였던 그 쇳소리마저 사라지니
정적에 내 울음소리만 고동치게 할 자신이 없어
서럽게 울고 싶어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였다
자식으로서
집으로 가는 길
백종성
눈길을 밟으며 그들의 자취를 밟아본다
머나먼 과거 함께 놀았던 추억 속의 그 길
오르막 지나고 나오는 개구멍을 통과하면
우리의 철없던 시절을 같이한 추억의 놀이터
같이 걸어서 행복했던 길에
혼자서 외로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 온몸으로 쏟아지는 눈발과
고독에 맞서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어본다
집으로 가는 길
눈 뜨자마자 아침 댓바람부터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허겁지겁
친구들 만날 생각에 정신없이 집을 나온다
맨날 걷는 똑같은 길
개구멍을 통과하고 오르막을 내려오면
눈발에 파묻혀 누런 이빨만 드러내고 있는
열세명의 친구들
오늘은 우리 집에서 놀자
함께 걸어서 행복했던
집으로 가는 길
해가 여러번 바뀌며 서로 다른 학교로 흩어지고
같이 걸어서 행복했던 길에
홀로 남겨지는 일이 많아졌다
개구멍을 통과하고 오르막을 내려오면
열세명이 바글바글 뭉쳐있어야 하는데
남아있는 건 그들이 남기고 간
허연 눈 속의 모래흙 묻은 자취 뿐
나보다 먼저 왔다갔구나
공허함이 나를 감싸고 왠지 모를 외로움이 북 받친다
맨날 걷던 똑같은 길인데
그 시절이 불러내는 추억의 향기에 젖어
오늘도 혼자 외로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 온몸으로 쏟아지는 눈발과
고독에 맞서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어본다
집으로 가는 길
경고장
백종성
여느 때와 같이 행복한 하루
갑자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경고장
입과 코를 막아라
절대 누구와도 마주치지 말아라
당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도 안전하지 않으니
가능한 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라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당신은 심각한 바이러스
그 중심에 놓여있다
절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라
내가 잘못한 것인가
우리가 잘못한 것인가?
복학에 대한 기대감과
새로운 동기들에 대한 설렘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하루였는데
헛웃음이 나온다
경고?
경고장은 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였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서울 사는 동기들도
미국 사는 교수님도
온 지구촌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경고장
절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라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여느 때와 같이 행복했던 하루
갑자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앞으로 몇 번의 경고장이 더 날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이 거지같은 경고장들에 응해야한다
살고 싶으면
마스크
백종성
갑작스럽게 날아온 경고장
코로나바이러스
가볍게 무시한다
설마 내가 걸리겠어
방에서 나와 부모님과 동생을 마주한다
내 귀엔 마스크가 걸려있지 않다
3명
버스정류장에서 출근을 준비한다
오늘따라 붐빈다
잔기침이 나온다
겨울이라 그러겠지
내 귀엔 마스크가 걸려있지 않다
버스정류장에 18명
버스 안에서 기침이 끊이질 않는다
공포에 질린 주위 사람들 시선
휴대폰을 들고 촬영하는 아이
당장 내리라고 소리치는 버스 기사
감염된 것인가??
내 귀엔 마스크가 걸려있지 않다
버스 안 58명
병원부터 가야하는데
숨쉬기가 힘들다
식은 땀이 흐른다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기침에 피가 섞였다
내 귀엔 마스크가 걸려있지 않다
병원 안 45명
3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내 차례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지럽다
의사가 진찰을 하는데
그의 손이 흐려진다
더욱 숨이 가빠온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피를 토해내며 쓰러진다
씨뻘건 물이 의사와 간호사 몸에 칠해졌다
내 귀엔 마스크가 걸려있지 않다
직접 접촉자 8명
2020년 1월 29일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 누적 132명
바이러스
백종성
태어난 지 15분 째
산소를 받고 이산화탄소를 내준다
나는 나의 2398마리 형제 중 2020번째
이곳은 폐
오늘도 난 숙주의 양분을 받아먹는다
얼굴 모를 나의 숙주
자신의 폐와 모든 기관에
매일같이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바보
온몸을 돌아다니는 저 적혈구란 녀석
숙주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놈
정해진 길로만 다니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한 계산으로 산소와 양분을 공급하는 기계
뼈 속부터 나랑 다른 종자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재수없다
오늘도 난 숙주의 영양분을 씹어 먹는다
태어난 지 10시간 째
허파의 증폭과 축소의 반복
내게 영양분을 배달해주는 최적의 리듬
그런데 밤만 되면
이 얼굴 모를 나의 숙주는 휴식을 취한다
우리는 아직 허기지다 이것아
밥 달라고 외쳐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취침시간
눈치를 주며 쉬라고 명령하는 적혈구
내 형제들이 몇 천 마리인데
우릴 이해하지 못하는 저 녀석
너는 내 상사가 아니야
숙주가 휴식 중단하기 전에 간으로 넘어간다
우리의 요구조건을 묵살시킨 본체
불침번을 세우고 경계에 들어가자
긴장감이 고조되는 1일차
서로 다른 종자가 견제를 시작한다
우리는 저장된 양분을 뜯어 먹는다
급작스런 백혈구의 공격
그러나
이미 불어날 대로 불어난 상대의 개체 수
하루가 지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나의 새끼들
허파를 공격해서 내 새끼들을 먹여살려야겠다
더 강하게
쓰러질 때까지 공격한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각혈하는 숙주
우리의 요구조건을 묵살시킨 본체
내게 양분을 주지 않으면
그때 너는 변사체가 되는 거야
어서 일을 해라
숙주의 모든 양분을 뺐어먹는다
멈추지 않는 얼굴 모를 숙주의 기침
지금이 기회다
내 새끼들아 당장 나가거라
나가서 더 건강한 숙주를 만나
너희들의 왕성한 번식을 위해 노력하거라
온몸을 한 바퀴 돌고나니 쓰러지는 숙주
이만하면 됐다
나는 내 새끼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얼굴 모를 숙주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오늘도 우리는 숙주의 모든 양분을 뜯어먹어버렸다
백종성
010-3913-3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