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회 창작 콘테스트 시부문 - 오감의 시 ( "보다" 외 4편)

by 댐연 posted Apr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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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고영일


본다는 것은

너를 본다는 것은


나의 눈에 만들어낸 너를 보는 것이다

나의 망막에 내가 맺어낸 너를 보는 것이다.


내가 너의 허물을 본다면

 

그 또한 너가 아닌 나의 것이었음을


내 눈 속 왜곡된 거울에 


너는 그저 가만히 멈추어 비춰졌을 뿐이었음을,


너가 앞에 있을 땐 알지 못하였다.



내가 보는 너는 초라한 나의 모습이었음을.



너를 망막 저편으로 떠나보낸 뒤



눈을 감고


빛을 닫고


깊은 어둠속 침전하여 거울을 닦아내었을 때


받아 들이었을 때


나는 비로소 너를 보았다.



본다는 것은


너를 본다는 것은.










듣다

            -고영일


어쩌면 너무도 큰 욕심일지 모른다.


자유로이 퍼지는 파장

공기를 날개삼아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소리의 새들을

작은 두 귀로 잡아내어 간직하려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 큰 꿈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연주하는 선율

끝을 모르고 바람결에 흐드러지는

음색의 실들을

두 귓바키에 감아매어 담아두려 하는 것은.


그러나

꿈을 꾸고 욕망함은

살아있다는 징표와 같으니


우리는 욕망한다

우리는 꿈꾼다


우리는  듣는다

우리는 살아 있다.


듣는 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맡다

            -고영일


머나먼 이국의 거리

고향의 따스함은 먼거리를 오다 지쳐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이질(異質)의 도시



눈에 담긴 풍경도


귀에 울린 소리도,


그 어떤 것 하나도 낯설은


서러운,



이 땅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린 것은



이국 거리에 희미하게 맴돌던


어머니의 향수(香水) 내음을 맡았기 떄문이리라.



나의 코끝에 잠자코 매달려 있던


어머니의 향수(鄕愁)를 맡았기 때문이리라



아아,


부리부리한 두 눈도


장승같던 나의 두 귀도


해내지 못하였던 것을


나의 못생긴 코는 해내이었다.











       -고영일


내 몸속 깊은 곳

축축하고 어두운 골짜기 깊은 곳에는

혀라는 놈이 산다


이 혀라는 놈은 본래 할 일이 있어

그 무언가 하니,

쿰쿰하고 꿈틀거리며

내 몸속에 들어오는 온갓 것의 맛을 본다.


단 맛 짠 맛 쓴 맛 


이것이 혀라는 놈의 본디 주어진 일이다.



그런데 혀라는 놈이 제 할 일은 안하고


내 할 일을 탐내어 내 행새를 하니,



꿈틀꿈틀, 내 애인을 꾀어내어


입맞춰 사랑을 나누고



꿈틀꿈틀, 어머니께 전화 걸어 


마음속에 숨긴 말 한마디 냉큼 전하고


꿈틀꿈틀, 어린시절 친구에게

나 대신 약속을 덜컹 잡아낸다.


나 원 참


이놈이 제 할 일 안하고 내 할 일을 해버리니


나는 쩔 수없이 이 놈 일을 할 밖에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에서 달콤함을 맛보고,


슬피 우는 친구의 뒷모습에서 짭짤함을 맛보고,


아버지의 하얗게 샌 머리칼에서 씁쓸함을 맛본다.




이게 다 혀라는 놈 때문이다



혀는 내 몸속에 사는 내가 되었다.


나는 세상을 맛보는 혀가 되었다.










느끼다

                  -고영일


두 손 한데 모아 고운 그릇 만들어

푸르게 고여 억겁을 견딘 바다를 느꼈을 때,


그 푸름 맑음 차가움을

손 끝에서 피어내어

바다를 겨우 두 손만큼 느끼었을 때


나는 만나는 중이었다.

온 세상의 두손 가득 뜬 바다를 만나는 중이었다.


내가 느낌 푸르름은

난생 처음 바다를 떠낸

여린 소녀가 느낀 푸르름과 만나

커다란 푸르름이 되었고,


내가 느낀 차가움은

지아비를 바닷길로 떠내 보내고

바닷가에 걸터앉은

한 맺힌 여인이 떠낸 차가움을 만나

더욱 커다란 차가움이 되었다.


느낌은 

만남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녀와 여인과 나는

손 끝에서 피어난 촉각을 따라

느낌의 회당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느끼기에 만났고

만났기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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