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고영일
본다는 것은
너를 본다는 것은
나의 눈에 만들어낸 너를 보는 것이다
나의 망막에 내가 맺어낸 너를 보는 것이다.
내가 너의 허물을 본다면
그 또한 너가 아닌 나의 것이었음을
내 눈 속 왜곡된 거울에
너는 그저 가만히 멈추어 비춰졌을 뿐이었음을,
너가 앞에 있을 땐 알지 못하였다.
내가 보는 너는 초라한 나의 모습이었음을.
너를 망막 저편으로 떠나보낸 뒤
눈을 감고
빛을 닫고
깊은 어둠속 침전하여 거울을 닦아내었을 때
받아 들이었을 때
나는 비로소 너를 보았다.
본다는 것은
너를 본다는 것은.
듣다
-고영일
어쩌면 너무도 큰 욕심일지 모른다.
자유로이 퍼지는 파장
공기를 날개삼아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소리의 새들을
작은 두 귀로 잡아내어 간직하려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 큰 꿈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연주하는 선율
끝을 모르고 바람결에 흐드러지는
음색의 실들을
두 귓바키에 감아매어 담아두려 하는 것은.
그러나
꿈을 꾸고 욕망함은
살아있다는 징표와 같으니
우리는 욕망한다
우리는 꿈꾼다
우리는 듣는다
우리는 살아 있다.
듣는 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맡다
-고영일
머나먼 이국의 거리
고향의 따스함은 먼거리를 오다 지쳐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이질(異質)의 도시
눈에 담긴 풍경도
귀에 울린 소리도,
그 어떤 것 하나도 낯설은
서러운,
이 땅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린 것은
이국 거리에 희미하게 맴돌던
어머니의 향수(香水) 내음을 맡았기 떄문이리라.
나의 코끝에 잠자코 매달려 있던
어머니의 향수(鄕愁)를 맡았기 때문이리라
아아,
부리부리한 두 눈도
장승같던 나의 두 귀도
해내지 못하였던 것을
나의 못생긴 코는 해내이었다.
혀
-고영일
내 몸속 깊은 곳
축축하고 어두운 골짜기 깊은 곳에는
혀라는 놈이 산다
이 혀라는 놈은 본래 할 일이 있어
그 무언가 하니,
쿰쿰하고 꿈틀거리며
내 몸속에 들어오는 온갓 것의 맛을 본다.
단 맛 짠 맛 쓴 맛
이것이 혀라는 놈의 본디 주어진 일이다.
그런데 혀라는 놈이 제 할 일은 안하고
내 할 일을 탐내어 내 행새를 하니,
꿈틀꿈틀, 내 애인을 꾀어내어
입맞춰 사랑을 나누고
꿈틀꿈틀, 어머니께 전화 걸어
마음속에 숨긴 말 한마디 냉큼 전하고
꿈틀꿈틀, 어린시절 친구에게
나 대신 약속을 덜컹 잡아낸다.
나 원 참
이놈이 제 할 일 안하고 내 할 일을 해버리니
나는 쩔 수없이 이 놈 일을 할 밖에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에서 달콤함을 맛보고,
슬피 우는 친구의 뒷모습에서 짭짤함을 맛보고,
아버지의 하얗게 샌 머리칼에서 씁쓸함을 맛본다.
이게 다 혀라는 놈 때문이다
혀는 내 몸속에 사는 내가 되었다.
나는 세상을 맛보는 혀가 되었다.
느끼다
-고영일
두 손 한데 모아 고운 그릇 만들어
푸르게 고여 억겁을 견딘 바다를 느꼈을 때,
그 푸름 맑음 차가움을
손 끝에서 피어내어
바다를 겨우 두 손만큼 느끼었을 때
나는 만나는 중이었다.
온 세상의 두손 가득 뜬 바다를 만나는 중이었다.
내가 느낌 푸르름은
난생 처음 바다를 떠낸
여린 소녀가 느낀 푸르름과 만나
커다란 푸르름이 되었고,
내가 느낀 차가움은
지아비를 바닷길로 떠내 보내고
바닷가에 걸터앉은
한 맺힌 여인이 떠낸 차가움을 만나
더욱 커다란 차가움이 되었다.
느낌은
만남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녀와 여인과 나는
손 끝에서 피어난 촉각을 따라
느낌의 회당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느끼기에 만났고
만났기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바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