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회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붉은 방 외 2편

by 한너울 posted May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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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방




[나를 지나쳐간 모든 나에게 바치는 서사시 中에서 발췌]


하나의 발로도 이다지 유쾌할 수 있을까,

빛이 부재한 길은 당신네들 말고는 알 도리가 없기에

유쾌할 노릇이다

얘야, 땅 꺼지겠다, 왜 그리 한숨을 내뱉냐,

거참, 당신들을 살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네들이요?

여간 미쳤어야죠, 밤마다 찾아와서는, 깽판을 치지 않나,

그만, 불을 꺼주세요

-

나는 아직 사랑을 논할 수 없다

칼이 예리하지 않다면 몇 파운드의 쇳덩어리로 전락하듯

그렇게 깊은 지하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당신들은 문을 걸어 잠구었다

나를 그만, 자책과 책망의, 그물에서, 열어주시오,

나를 그만, 내버려 두시오, 이 두 눈에서, 흐르는 건,

거짓이, 아니란 말이오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보고도

두렵지 않게 된 자신이

너무나도 두렵다

당신들은 매일 밤마다 의식을 위한 횃불을 들고 찾아온다

여기 이 횃불은 하늘과 땅을 이어준닥도들 말한다

태어난 것이, 죄라면,

눈을 감는 것이, 우리의 길


(당신들이 누구냐고 그네들이 묻는다면, 그저 비겁하게 숨어버린 무지들이라고 대답하거나 주입된 권태라고 대답할 것이오)




회색



점점 수가 자랄수록 구릿빛이 맴도는 게 썩 보기 좋고는 매달아 놓은 괘종시계는 곧 잿빛 소리를 게울 것이다 벽을 타는 것이 괴팍한 아우성의 속성인지 비 온 뒤 거미줄 치듯 점점 물들어지는 벽면들을 보고는 축 늘어진 낚싯줄에 남은 숫자들을 꿴다 내 심장에는 이제 철근 기둥만 덩그러니 박혀있는데 흡사 예수의 머리맡에 심긴 피뢰침처럼 침전된 온갖 것들을 그러안으려 하늘을 내다본다 마지막 명맥을 수제비 때어내듯이 그렇게 하여 여전히 순환하는 짧은 바늘에 널어두고는 이제는 머리가 충분히 무거워졌으니 고개를 떨군다



통의 부재


홀로 기울이는 잔에는

나지막이 귀뚜라미의 날개소리가 젖어듭니다


날이 맑았으면 좋았을 듯합니다


입술은 젖어드는데

오후를 적시지 못할 까닭은 

그저 부재의 이유일까요


술과는 소통이 불가합니다

그래도 좋은 벗이죠

말을 하지 못하는 조용한 벗입니다

-

내가 어떡하면 좋을 것 같아?

(꼴깍꼴깍)

-

얼굴이 달아오르고 

달이 차오릅니다

다시 빈 잔을 채웁니다

탄식을 해도 멀고 먼 바다입니다

그저 그렇다면 하늘을 두지 않았을 겁니다

내일은 갤 테니

다음에 물어보도록 하죠

-

고마워

(꼴깍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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