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 매핵기 외 4편

by 이승혜 posted Apr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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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핵기(梅核氣)





시간을 건너

당신에게 오늘을 건넨다

말없이 차가워져

당신의 어제가 밟힌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볼 수 없어

매일 밤 당신은 얼굴을 지웠다

목에 매화나무 열매가 열렸다

인간은 12쌍의 늑골을 가지고 있다

6쌍의 들숨과 6쌍의 날숨이 가쁜

쇠약한 가로막을 빚내어 사는 하루살이

하루쯤 살고

또 하루쯤 죽는다

그것은 유리벽이 철벽이고

철벽이 하루인 외딴곳 아니 어떤 곳

당신은 떨어지기 직전의 열매를 기다려본 적이 없다

시큼털털한 맛이 날개를 적시기라도 할까

안간힘을 다해 젖지 않는다

얇아진 얼굴은 느닷없이 표정을 찾고

기웃기웃 매우 낯설게

하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표정을 굴리고

냉가슴이 며칠쯤 밟혀도

미끄덩한 고깃덩어리가 쑤셔와 박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바람의 냄새와

숨의 향기

공기의 질곡

내일의 기후를 잊는 법만을 배운다

하루를 닫고 또 닫을 뿐이다 오늘도




노린재나무


어둠의 아가리를 찢고 나오렴

곰팡이 핀 바이올린의 울림을 들으렴

무서워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겠니

오렌지 향기를 맡으며 춤을 춰봐

코끝을 찡그리면서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네 안의 우울을 껴안는 거야

풍선껌을 씹으면 세상이 부풀어 진댔지

설움마저 으스러진 풍경도

잠깐의 매서움마저도 사라질 거야

유리 물병을 떠올리며

'카라페'라고 읊조리는 네가 살가워

차가운 미지의 결을 마시는 기분이야

다정도 병인 사람이 있다면

그이의 우물은 글쎄, 얼어서 글썽이겠지

노란 잠수함이 거대한 방귀를 끼고 지나가는 거겠지

시계의 하품이 늘어지고

세계의 초침이 분침을 벌컥 삼킨대도

관속에 누워 새그러운 오렌지 향을 맡는 거지

관속의 목소리가 들리니

너울대는 관목 노린재나무 잎을 곰곰 따면서

낫는 거야 어둠을 낳는 거야




데칼코마니



가슴에 핀 열꽃 식히러

그대가 지난밤 다녀갔는지

누운 자리 반을 접어보니

그대가 앉았다


접힌 밤을 쪼개고 쪼개어

발등에 펼쳐보니


그대가 다녀갔던 무수한 밤들이

눈송이를 안고서

이불 속에서 곡소리를 핥는다


휘움한 그대의

갈비뼈 하나를 안고서

잠자코 안부를 묻는 밤


그대는 참빗을 물고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외로운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다


울다 만 자장가를 부르는 그대

'내내코 코코자'


새벽 별을 마주 안고

마주 웅크려 자자


잠자코 뜬 눈으로

그대 이마 위에 첫눈을 기다린다


지난밤 그대가

무심코 다녀갔는지

발등 위로

열꽃 하나 가지런한 비밀을 피운다


설피를 신고 그대 맞으러

눈을 핥는 밤


뼈를 안은 품속에 그대를 품고

'내내코 코코자'

호두알처럼 웅크리고 잠이 든다




나무의 눈


나무의 무릎을 열어보면 나이테가 숨어있다

무릎의 소리는 빙그르르

고요한 멜로디에 취해 몸을 흔든다

유난히 무릎에 멍이 자주 들던 아이

살굿빛 멍이 들면서 한 살을 먹고

멍이 빠지면서 또 한 살을 먹었다

어색함을 간직한 발목과 한 쌍인

선홍빛 복숭아 뼈

구부린 자세로 앉아

매번 끝을 생각해 보지만

나무의 눈은

사라지는 게 살아지는 거라고 말할 뿐

무릎에 이어폰을 꽂고 차분히 들어본다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 가냘픈데

무릎의 뚜껑을 열었다 닫는다

한 숟갈의 오명도

두 숟갈의 연명도

모포로 감싸 안아 뜨듯한 아랫목에 묵혀두면

말린 혀를 도르르 풀면서 안내를 한다

처음으로 침샘의 분비가 왕성해질 때

최초의 기억이 분명해질 때

맞부딪히는 소리 더욱 가볍다

나이테의 굵기가 점점 가늘어진다

숨어 있을 곳이 더는 없다는 듯 안으로 천착한다




달리다굼



시침질이 희미하게 남은 오래된 일기장을 보았느냐고

보풀진 안감에게 물었다

안감은 예각만이 살아있는 빗각으로

조각가를 닮은 손놀림으로

청동기시대를 산다 했다


호주머니에는

장미가시로 만든 단추들을 넣어두었다


밤마다 단추들을 똑딱

따는 일로 셈을 마치는 하루

후미가 간지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이는 낮의 기운과 함께

흔들리는 안감에게

구멍의 구명에 대해

땜통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 물었다


그럴 때면 대답은

황량한 빈자리로, 황무지의 노래로 돌아왔다


푸른 잔디가 돋아났으면

땜통이 마르지 않기를 구름의 문장은 빌고 있다


비로소 가봉을 시작한다

잔잔한 물결무늬 치마에 연꽃으로 수를 놓는다


풀잎이 내린다

이쯤에서 등장하는 번개의 역할은

천둥이거나 우르릉 쾅쾅 이거나

상대역으로 둔갑한 번개가 어느 틈에 풀잎들을 끊어놓는다


청동 열차 속으로 구름의 문장은 흘러간다

아로새겨진 시침질의 흔적을 비워내면서


문과 손잡이가 하나 될 수 없는

토르소의 춤으로 일어선다






이름        이승혜

이메일     lyn437686@gmail.com

연락처     010.9711.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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