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연기> 외 5편

by 여리여리 posted Apr 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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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시간이 건너다니고

장소는 뒤바뀌어 섞이고

덥고 검은 연기가 목을 감았다.

그 연기를 잡아다 

상자에 집어넣어 뚜겅을 닫으려고도 해보고

휘휘 몰아 산 저편에 실어보낼 생각도 하였으나

여전히 연기는

팔다리를 묶고선 목 근처에서 혀를 낼름거렸다




눈먼자의 걸음


끝없는 어둠속에서 목적지를 상상하고

신중하게 지팡이를 휘둘러대며

걸음

걸음

그렇게 숨막히게 걸어간다


그러다 문득

발 밑의 물컹한 감각

아, 여긴 진창이구나

지팡이를 옆으로 살살 휘두르며 진창을 빗겨간다


두 눈을 괜시리 뜨고 있는 난

진창을 휘저으며 울먹이는데.




발끝


흐드러지던, 

언젠가였던 꽃밭을 지나

초라한 자갈밭을 걸으며

다시 나타날 꽃을 찾는다

하지만 걸음은 이미 의미를 잃었음을 안다

꽃밭에 닿기도 전에 스러져 버릴 더러운 몸뚱아리는

거름조차 되지 못할 것을.





매스꺼움


악취였다.

아니, 훙물이었나.

눈꼽이 낀 것 뿐 아닌가.

그렇게 혐오라도 간직해야 했구나.

그래 그것이라도 받아들이고 기록해야 하겠지.

사람, 사람뿐이걸.

당신도 결국 사람이 아닌가요.

역겹다. 혀가 달싹거리고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그렇습니다. 내 옹졸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코는 악취를 맡고 눈에는 눈물이 흐르는데

결국에는 뒤틀린 속이 꿈틀거린다.





음굴


그때는 아마

퍼랬을 때이다. 하늘이.

구름도 두어조각 맛깔나게 떠있고

난 시커먼 동굴 앞에서

짐을 추스렸다.

그때도 뒤통수는 제법 근질거려

슬거머니 뒤를 흘겨보고

영롱한 빛을 뽐내는 저 멀리 하늘에게

언젠간 닿지 않겠느냐고 말하여도 보고

땅에 꼭 붙은 발을 쳐다보고 한숨을 뱉고선

동굴에 시선을 주고

한쪽발을 내어주고

끝내 몸을 던져버리고.





양계장


닭은, 암탉은 오늘도 알을 순풍순풍 낳아댈 것이지만

그 날갯죽지 한켠은 언제나 불안한 듯 꿈틀거린다.

그것은 아무리 알을 낳아대어도

알이 어찌될지는 무자비한 인간의 손이 점찍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계속 알을 만드는 것은

그들도 전부 알기 때문이다.

철장과 두꺼운 몸뚱이를,

새 구실 하기엔 진작에 글러먹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한열 

010-9449-2830


abaf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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