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문 ━ 백화점
어린 하나가 백만 가지 꽃 향의 상자 앞에 있다
어미 따라 왔지만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있다
어미는 기다리라는 말만 두고 어디론가 향했다
원체 말을 잘 듣던 하나는
투명한 벽에 비치는 사람들을 보며 기다린다
어미와 닮아 코가 찌릿한 향을 입고
남의 거죽을 걸친 사람들
어미보다 컸지만 다른 이의 뒤를
졸졸 쫓아만 다니는 사람들
어미보다 작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그래도 하나보다는 큰 사람들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때론 간드러진 구애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
하나도 거기에 뒤섞이고 싶었지만
홀로는 투명한 벽을 드나들 수 없었다
멀리 해가 노란 정수리만 빼곰 내밀다
이내 땅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하나가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향기의 상자를 떠나간다
마침내 아무도 없어진 상자는
안을 비추는 불도 꺼트린다
투명한 벽이 보여주는 어둠이 하나를 비춘다
홀로 남은 개만 있다
어미는 아직 오지 않는다
날벌레의 빛
당장 닿지 않을 수 있는 너가 있다
널 담은 사진을 들락거리는 동반자들이
거슬렸지만 그 또한 애틋했다
너가 차갑게 식어버린다면
이토록 가슴이 뛰지 않았으리라
사진 속 너의 손을 잡는다면
이미 다음 생의 나
너에 대해 앎은
너를 가리는 어둠이 되지 못하고
너로써 날 감싸게 한다
닿지 않을 수 있음을 포기한
나는
수많은 다음의 나를 기다린다
시멘트 위에 펼쳐진 동화
작은 도서 대여점
안에는 첫인상도
헌책의 표지가 되어버린 주인 할아버지
책을 찾는 손님에게
닳고 닳은 기억 속 책갈피를 집어주는 할아버지
남의 맘 속 책장 채우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내 맘에 꽂은 책은
어릴 적 뭍은 타임머신
가벼운 회색 세월의 흙을 털어 펼치자
숨통이 트여 낡은 한 덩어리를 내뱉는다
바다 속에 들어가 모험을 떠나는 어린 나
바다를 나아가느라 분주하던
손이 친 커피 잔이 바다를 물들였다
그물에 낚아 채인 나는 안절부절
흙탕물이 되어버린 바다를 되돌리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울상으로 간다
수북한 책을 옮기는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려하니
옆에 쌓인 또 다른 타임머신들이 보였다
안보면 버려야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 숨겨놓은 게
시멘트 바닥 위로 떨어져 펼쳐졌다
나는 바다 속 모험을 끝마치고
개운하게 웃고 있는 나를 봤다
모기가 꾼 꿈
고인 물에서 둥둥 노는 아이들
여기저기 분을 뭍히고 냄새에 전 사내
서로 굶기지 않으려 이 땅에서 발을 땐다
치덕치덕 빨간 생명에 범벅이 된 아내
날아드는 날벌레에게 무심한 박수를 치니 검붉은 꽃이 핀다
아낙은 매마른 절벽에 핀 꽃을 보며
나
였구나
꿈에서 깬다
낙사한 웃음
침대 낭떠러지에
온 몸으로 매달려 쉰다
침대 옆 붙어있는 서랍의
아랫 입이 벌려지니
내 눈 앞에 모서리라 불리는
우연의 원수가 뾰족히 날을 세운다
이대로 온 몸을 놓으면
내 눈은 찌그러진 탁구공마냥
구역질나는 쓰레기가 되겠지
그래도 좋으니 몸을 던졌다
바보같이
두 눈을 감고 목을 움추린 자라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눈 대신
이맛살이 찌그러져
아파 눈물이 흐른다
눈물만 웃었다
더욱 분발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