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굼벵이
- 은유시인 -
1
나, 굼벵이
땅속 깊은 곳에 틀어박혀 꼼짝 못하는, 그러나 생각은 많은
어미가 누군지 모른 채 나무껍질 속 알로 태어나
애벌레 되면 땅 밑으로 기어들지
개미에게 먹히고 두더지에게 먹히고, 이놈 저놈에게 먹히지
나무뿌리 수액 빨며 몇 년을 몇 년을, 참으로 오랜 세월
오로지 깜깜한 땅속 스스로 가둔 채
그렇게 번데기로 살아가는
빛이 아름답기로 이보다 더 안심일 순 없을 테니
2
아름답기론 빛이 있는 세상, 어둠 속에 자신을 속박하고
있음은 때를 기다릴 뿐이라고, 아직은 나
세상에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살아있으되 움직일 수 없으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
지룡자(地龍子) 스쳐가며, 안타깝게 여긴들
살아있으되 찍소리도 낼 수 없으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
귀뚜리 스쳐가며, 안타깝게 여긴들
때가 되면 하늘높이 솟구치며 세상을 굽어보게 되리
때가 되면 내 몸이 파이프오르간이 되어 세상을 진동케 하리니
3
어둠은 포근한 안식, 속박은 마지못한 체념
기다림은 끈질긴 생명
어둠이 있기에 찬란한 빛을 꿈 꿀 수 있으니
속박이 있기에 훨훨 자유로움을 꿈 꿀 수 있으니
기다림이 있기에 긴 세월 생명을 지닐 수 있으니
나, 굼벵이
생각이 너무 많아 긴 세월이 도무지 지겹지 않으니
흑단(黑檀)에 이슬로 새긴 영롱한 꿈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이 두렵지 않으니.
2004/07/07/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