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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이야기


[제1화]

그녀의 이름은 참다래(ckaekfo)


- 은유시인 -





1



  대구 산동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는 K씨는 이미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은 만큼 일체의 경제적 능력을 상실해 버린,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된, 그야말로 별 볼일 없고 오갈 데마저 없는 마흔여덟 된 중년의 남자이다.

  그는 몇 년 전, 20년 가까이 자신이 직접 경영해 왔던 중견사업체 명의의 당좌를 통해 30억 원이 넘는 거액의 부도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었었다. 부도 이후론 찰거머리같이 악착스럽던 빚쟁이들을 피해 2년여 산중을 헤매고 다니는 등 도피행각을 벌였었으나 춥고 배고픔은 물론 간첩으로 몰리는 등 그 산속 생활이 하도 고달프기도 했지만, 또한 외롭기도 하였기에 이후 자수하여 경제사범으로 1년여 교도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냈던 바도 있었다.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영업용 택시의 땜빵 기사로 생활비를 벌어왔던 그의 마누라는 어느새 동료인 젊은 택시기사와 정분이 나서 어린 자식들을 팽개치고 집을 나갔으며, 자식들 역시 빗나가기 시작하여 그를 아비처럼 대하지 않았고 경제적 위기가 한계에 이르자 그의 품을 훌쩍 떠나 가출해 버렸다.

  적이 외롭기도 했겠으나 생계의 대책마련을 위해 친구든 친척이든 그 어느 누군들 큰 맘 먹고 찾아 나섰기로서니 예전과는 달리 그를 살갑게 대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성의 없는 값싼 동정은 분노마저 자아내게 하였다. 따라서 그는 과거 알아오던 숱한 사람들과 어언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런 그가 무료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피씨(PC)방에 들러 소일삼아 온라인게임 고스톱이나 포커 따위를 즐기다가 무심코 인터넷 여기저기 클릭하는 와중에 우연히 들르게 된 어느 채팅사이트에서 채팅이란 감칠맛 나는 낙을 찾게 되었으니, 이후 푼돈만 생기면 피씨방에 틀어박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채팅에만 몰입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얼굴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싱거운 대화들이 암담한 현실을 깡그리 잊게끔 그에겐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으며, 비록 사이버 상에서 일지언정 그를 잊지 않고 반겨주는 사람들과 교우할 수가 있어 좋았다.

  그는 여러 가지 대화명을 거쳐 마침내 ‘독불장군’이란 대화명으로 채팅 대화방을 누비고 다녔다. 이 독불장군이란 대화명은 현실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그가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대로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괴팍스런 인물로 자신을 침소봉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붙인 것이다.

  처음 이 대화명으로 대화방에 들어섰을 땐 많은 사람은 그의 그런 파렴치한 대화명에서 오는 강한 거부감으로 그를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그가 내뱉듯 쏟아내는 말 알들은 그의 과거 화려한 이력에 맞물려 거침없으면서도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배어있어 나름의 묘한 설득력을 지녔으며, 일견 대화방의 고루한 분위기를 쇄신시키는 유머로 넘쳤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여성들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그 역시 사이버에서일망정 자신이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마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재작년 여름의 막바지였던가,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한 고삐 물러 갈 즈음인 8월 중순이었다. 그날도 그는 자신의 대화방을 개설해 놓고 현란한 그림태그와 달콤한 음악태그를 뿌려가면서 넉살 좋은 우스갯소리를 퍼붓는 등 그의 대화방을 그득 메운 30여 여성 손님들을 꽉 휘어잡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서거나 말 한마디 주고받은 바 없었기에 대화방에 자리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한 20대 후반의 여성이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그에게 일팅(1:1대화)을 요구하는 쪽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승낙도 거부도 아닌 쪽지창을 닫음으로서 그녀의 쪽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한 쪽지들은 대화방 개설 이래 많은 여자들로부터 늘 받아 왔으며, 대화창에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러한 쪽지들이 오히려 대화를 중단시키는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번인가는 쪽지에 일일이 대거리를 하며 쪽지에 신경을 쓰다 보니 결국 대화방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터득한 요령이 거부도 아닌 쪽지창 자체를 닫아버리는 것이 그나마 상대방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로도 여겨졌고, 상대의 자존심을 나름대로 지켜주는 무난한 방법이라는 판단에 계속 그런 방법을 써왔다.

  그는 거의 일 년이 넘도록 채팅을 해오면서 숱한 여자들로부터 만나자는 제안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여자와도 개인적 친분을 쌓거나 만나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어떤 여성에게는 유달리 호감이 가고 궁금증이 일어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없잖아 있었지만, 자신의 입장을 돌이켜보면 만나봐야 상대에게 커다란 실망감만 안겨 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 때문에 그런 충동을 애써 눌러왔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쪽지를 보내왔다.

  ‘저는 3개월 넘도록 단 한마디 말도 않고 오로지 독불장군님만 지켜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독불장군님만 지켜보는 것이 제 유일한 낙이랍니다.’




2



  채팅을 해오면서 대화중에 상대 여성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 농담이요, ‘좋아 한다.’라는 차원의 의례적인 인사말에 불과한 것이지 절실한 사랑의 감정이 가미된 고백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화방을 운영해 오면서 많은 여자들로부터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라든가 ‘한번 만나자.’ 라든가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일종의 농지거리로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실제로 그에겐 전화나 휴대폰이 없기에 알려 줄 수도 없었지만 막상 만나려 해도 당장 차리고 나갈 행색도 변변찮거니와 무엇보다도 차비며 교제비며 그런 경제적 여유마저 없어 그때마다 애매한 이유를 들어 거절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쪽지를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뭉클하면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무리 사이버일지라도 도대체 어느 여자가 3개월이 넘도록 그의 대화방에 들러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그를 쭉 지켜 봐 오는 것만을 유일한 낙으로 삼을 수 있더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녀는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가 아니던가?


  그녀가 다시 쪽지를 보내왔다.

  ‘제발 부탁인데요. 시간 좀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대화창에 뜬 수많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찍이 그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았던 바로 그 여자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먼저 사랑을 고백 받았을 때처럼 황홀함과 충격, 그리고 긴장감이 뒤섞인 그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지난 3개월여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던 그녀였지만 사실 그동안 그는 그녀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대화방에 줄곧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수백 명에 이르니, 특별히 수다스럽거나 ‘오빠’라는 호칭을 예사로 구사하며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몇 십 명 안팎의 여성들 외엔 아이디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함은 물론, 대화명을 바꿔서 들어오면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대화방에 들어 온 사람들 중에 어쩌다 그가 먼저 말을 건넨 경우는 대화명이 특이하거나 앙증맞고 깜찍해서 호감이 가는 경우였다. 평범한 대화명이나 또는 의미를 언뜻 짐작할 수 없는 영문 철자의 나열로 구성된 아이디를 대화명으로 사용하고 게다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아무리 오랜 기간을 그의 대화방에 드나들었다 해도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대화명은 아이디와 동일한‘ckaekfo’로 언뜻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뜻인지 영문 철자에 해당하는 한글 자판을 찍어보고 나서야 ‘참다래’란 이름을 키보드에서 영자 키로 지정하고 한글로 워드 표기했음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정을 자제하며 답장을 보냈다. 

  ‘그래여? 그럼 10분 후에 제가 님께 일팅 신청할게여.’

  그리고는 서둘러 대화방을 닫고 그녀와 일팅에 들어갔다. 그는 그날, 그녀와 거의 밤잠을 설쳐가며 문자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고급주택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박사과정을 거치는 중이라며, 몇몇 지방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노라 하였다. 위로 오빠 한 분과 언니 한 분이 있으며, 두 분 다 결혼을 하였고 자신은 막내라 하였다. 오빠는 자그마한 무역회사의 오너이고 언니는 웨딩숍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고위관리로 정년퇴임하고 집에서 쉬고 있노라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상과 몸매 그리고 성격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172센티의 키에 몸무게는 52킬로그램이라 조금 마른 체형이며, 얼굴은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빠지지는 않고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며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듣노라 하였다.

  그녀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녀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등 규수인 것이다.




3



  그와 그녀와의 대화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그는 거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바싹 붙어 앉아 대화방을 개설해 놓고 그녀를 기다리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수시로 그의 대화방에 나타나서 방금 전에 그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그에게 들려주었다.

  좀 전엔 대학 동창들과 만나 점심을 같이했다는 둥, 또 좀 전에는 리포트 작성 때문에 대학 도서관에 들렀다가 정년퇴직한 교수 아무개 시인을 만났다는 둥, 또 오늘 저녁에는 몇 분의 교수님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해야 한다는 둥,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대개는 문인들이거나 언론계 인사, 대학교수 또는 대학동문이었다.

  그녀는 밤 11시가 지나서 때론 새벽 1시쯤 되어 그의 대화방에 들어서면서 ‘이제 집에 돌아왔다.’라며 늦은 귀가를 알렸고, 자신이 샤워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고 있어 달라고 주문했다.

  장시간에 걸쳐 그녀와 채팅하는 동안 그녀는 수시로 즉흥시를 올리고는 그에게 답시를 요구해 왔다. 그는 비록 지방대학이지만 명문으로 알려진 대구 경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4학년 때는 학보사 편집장까지 맡을 만큼 시사에 밝고 남다른 글재주도 있었다.

  그가 읽기에도 그녀의 문장력은 사실 기대 이하의 미흡한 수준이었다. 어린 나이라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고 작문의 연륜도 짧은 탓이려니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시 구절마다 그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연정이 철철 넘쳐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졸리다.’라며, ‘사랑한다.’라는 다짐을 몇 번이고 거듭 받고서야 대화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과 관련된 신상과 형편을 비교적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나이라든가 생긴 모습은 물론 과거 경영해 왔던 사업체의 도산, 마누라의 불륜과 가출, 그리고 아이들의 가출까지도…….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속인 것이 하나 있었으니, 일정한 직업과 일정한 수입이 없음은 차마 밝히지 못하고 대신 자그마한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에 대한 호칭을 ‘독불장군님’에서 ‘아빠’라며 자연스럽게 바꾸었고, 그 역시 어리고 똑똑한 데다 가정환경도 좋은 여자를 애인으로 얻게 되었다는 실감을 만끽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닥쳤던 불행들을 안타깝게 여긴다며 얼마든지 다시 시작하면 재기할 수 있을 거라 위로해 주었고, 뭐든지 도와주고 싶다며 당장에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구하라고 하였다. 

  사실 그의 형편으로서는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부터가 걱정이었고, 밀린 방세며 전기료니 수도료니 각종 공과금도 문제였다. 그렇지만 꼴에 체면이란 것이 있다 보니 차마 그런 것들을 도와 달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녀는 그에게 그의 집, 그리고 회사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해 왔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워주는 것부터 제때에 밥은 챙겨 먹나 까지 그의 일과를 그녀가 직접 매일매일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마운 배려라지만 전화나 휴대폰이 없던 그로서는 전화번호나 휴대폰 번호를 선뜻 알려 줄 수 없으니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도 그는 ‘채팅은 주로 어디에서 하고 있는가?’란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낮에는 직장인 출판사에서, 밤에는 집에서 채팅을 하고 있노라.’며 엉겁결에 둘러대긴 했으나 그때도 그녀가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하여 얼버무리려 곤욕 꽤나 치렀다. 그의 단칸 셋방에는 전화기는커녕 컴퓨터조차 없었다. 그는 겨우겨우 손에 몇 푼 거머쥐면 득달같이 집 근처 피씨방에 달려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자신의 몰골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순간 떠오르는 기지대로 피씨방의 전화번호를 출판사 전화번호라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출판사의 업무량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집에는 전화를 하지 말라.’며 대신 집 전화번호라며 엉터리 번호를 알려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수일 내로 집에 전화만은 들여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로서는 그녀에게 왜 그런 새빨간 거짓말까지 해야 하며, 또 그로인해 가슴을 졸여가며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참으로 입맛이 씁쓸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4



  그녀가 그에게 휴대폰 번호까지 재차 알려 달라 요구해 왔을 땐 그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휴대폰은 별로 쓸 일이 없어서 안 갖고 있다.’라고 했더니 ‘아빠 지금 화났어? 내가 휴대폰 하나 사서 보내주면 안 될까?’라며 되묻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뭐 하러 그런 쓰잘 데 없는 신경을 쓰냐?’

  ‘아빠! 그게 왜 쓰잘 데 없는 거야? 아빠한테 뭔가 해주고 싶어 그러는 건데.’ 

  ‘어쨌든 말이라도 고맙다.’

  ‘그럼 아빠! 지금 전화해 볼게,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

  그는 허겁지겁 피씨방 카운터의 전화기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은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대었다. 순간 앳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어찌 들으면 열 살 남짓 계집아이 목소리처럼 ‘앵앵’ 거렸다.

  “아빠야? 아빠! 나 다래야, 참다래!”

  “엉? 다래니? 그래, 나 아빠다.”

  졸고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이 머리를 젖히며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에 대화하기엔 다소 어색하기도 했으나, 수화기를 든 채로 최대한 몸을 구석으로 다가서며 그녀와 통화를 계속하였다.


  “아빠랑 이렇게 말로 얘기하니 참 좋다. 아빠도 그렇지?”

  “응, 나도 좋구먼.”

  “아빠, 아빠!”

  “응, 와?”

  “아빠, 아빠! 나 아빠랑 뽀뽀하고 싶어, 뽀뽀해 줄 수 있지?”

  “응, 어떻게?”

  “뽀…… 이렇게”

  “응, 뽀…… 이렇게?”

  “엉, 뽀뽀뽀뽀!”

  “그래, 우리 이쁜 다래, 뽀뽀뽀뽀!”

  “아빠! 나 잘래, 자장가 좀 불러 줘!”

  “자장가를?”

  “엉, 아빠의 애기 다래한테 자장가 좀 불러 줘, 엉?”

  “잘 자라…… 우리 애기…….”

  그렇게 곤욕스런 통화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자연스레 카운터의 눈치까지 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그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로부터 몇 시간이고 전화가 없으면 또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쪽에서 전화를 걸어 주마고 몇 번씩이나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해도 들은 척을 하지 않고 딴청만 피우는 것이 한편으론 미심쩍기도 했고, 자꾸 그녀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들어 언짢은 맘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큰 것을 바라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못해 끌려가면서도 은근히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또한 자신이 어린 철부지를 상대로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가를 생각할 때 이렇듯 타락한 자신의 부도덕하고 철면피한 양심에 대해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일견 자신이 현재 처한 입장으로서 올바른 것만 추구하기에는 참으로 제어하기 힘든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유혹이었던 것이다.


  한 날은 돈을 마련하려다 오전 11시경에 피씨방에 들어섰는데,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까 몇 번씩이나 전화했는데 어떤 남자가 이상한 소리만 하더라고……. 대체 거기가 어디야?”

  대답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다시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아빠! 거기 출판사 아니지? 그럼 어디야?”

  “…….”

  “아빠! 말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 하지만……, 거짓말하는 건 싫어.”

  결국 그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프리랜서 작가로 몇몇 잡지사에 원고를 써주고 있노라고 변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급기야 몇몇 친구들한테 구걸하다시피 돈을 빌려 집에 허름한 중고 컴퓨터와 전화를 들여놓고 인터넷도 깔았다.




5



  이후로도 그녀와의 대화는 4개월이 넘도록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밖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주로 전화기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녀가 귀가한 이후인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컴퓨터를 통한 채팅으로 이루어졌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그녀에게서만, 그것도 수시로 걸려왔다. 그 또한 그녀에게 몇 번인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번번이 얼버무리고는 끝내 가르쳐주려 하지 않아 더 이상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사실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도 넘게 이어지는 시외전화 요금이나 이동 전화에 거는 전화 요금은 그에게 있어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 점에선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녀는 이른 새벽에 전화질을 해대어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수시로 자신의 위치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시시콜콜하게 보고하였다.

  오늘은 오빠가 싱가포르를 다녀오면서 프랑스제 피에르가르뎅 오리지널 머플러를 선물로 사다줬는데 머플러 한 장 가격이 무려 30만 원 가량 한다는 둥, 오늘은 오빠네 큰아들 즉 큰 조카 다섯 돌 생일이라 저녁에 남산 타워호텔 중국관에서 모처럼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한 자리에 모였었다는 둥, 오늘은 자신의 지도교수 세미나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었다는 둥, 오늘은 대전의 모 대학에 강의하러 갔다가 갑작스레 내리는 소낙비를 흠뻑 맞았고 몸이 떨리고 열이 나는 것으로 보아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둥, 오늘은 언니랑 함께 백화점에 쇼핑 갔다가 언니가 48만 원짜리 구찌 핸드백을 사 주더라는 둥……. 어쩌면 그녀 자신의 자랑거리 같기만 한 얘기들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해주고 싶다는 것도 그리 많았다.

  “아빠, 아빠!”

  “왜? 다래야!”

  “아빠! 필요한 거 있음 뭐든 말해 봐. 다래가 다 들어줄게.”

  “아빤 당장 필요한 거 하나도 없어.”

  “그래도 함 생각해 봐. 다래는 아빠한테 뭐든 다 해주고 싶어.”

  “글쎄……, 필요한 거야 많지만 없어도 큰 불편 없는데 뭐 하러 다래한테 폐까지 끼치냐?”

  “그럼 다랜 아빠한테 넘 섭섭해. 그 정도 가지고도 폐라고 한다면…….”

  “…….”

  “아빠, 아빠!”

  “응?”

  “있잖아……, 내가 아빠 양복 한 벌 해주면 어떨까?”

  “응…… 나 양복 여러 벌 있는 걸.”

  “그래도 내가 해주는 건 다르잖아.”

  “글쎄…….”

  “아빠, 낼이라도 근처 양복점에 가서 몸 치수 좀 알아와 봐.”

  “…….”

  “아빠, 아빠!”

  “응?”

  “나, 오늘 백화점 갔다가 시계 하나 봐 놨다.”

  “뭔 시계를……?”

  “응, 아빠한테 선물하려고……. 까르띠에라고…… 좀 고급인 거 같더라.”

  “얼마나 하는데?”

  “응……, 200만 원이 조금 넘는 거 같애.”

  “말아라. 나같이 쫄딱 망한 놈이 뭔 고급시계냐? 그리고 시곈 없어도 시간 보는 덴 아무 상관없어. 또 도처에 시계가 수두룩한데 뭘…….”

  “아빠, 아빠!”

  “왜?”

  “내가 어느 잡진가에서 봤는데. 한 달에 얼마씩만 내면 매끼 메뉴를 달리해서 배달해 주는 도시락 전문업체가 있는가 봐.”

  “응, 시내에 도시락 배달업체가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운영되는가 보더라.”

  “아빠가 끼니마다 직접 해먹기도 어렵고 또 일일이 사먹기도 힘들 테니 도시락을 대놓고 먹으면 안 될까? 그 돈은 내가 대줄 테니까.”


  그는 그녀의 그런 제안들에 대해 번번이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그녀에게 신세지기도 싫었지만 그녀와의 결혼, 그리고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업자금 등 내심 그녀에게서 더 큰 것을 얻을 욕심이 동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당장 먹을 쌀도 라면도 부식거리도 필요했고, 밀린 방세며 전기료 수도료도 만만찮았다. 또 여기저기서 빌린 돈이며 식당이나 구멍가게 등에 밀린 외상값도 가슴을 짓누르듯 압박해 왔다. 또한 다래를 만나게 될 경우, 그 때를 위해 입고 나갈 옷이나 신발도 변변한 게 없었다. 그야말로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오히려 수중에 지녔다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따라서 다래한테 무엇을 해달라고 해야 할지 궁리를 해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를 기다리면서 하릴없게 된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설계에 할애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회를 동하는 말들이 건네 왔다.

  “아빠! 나, 아빠랑 결혼하고 싶어.”

  “그래?”

  “아빠! 나, 아빠 애기를 낳고 싶어.”

  “그래?”

  “나, 아빠한테 잘해 줄 수 있어.”

  “그래?”

  “그리고 아빠 애기들한테도 잘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래?”




6



  그녀는 걸핏하면 그에게 어떤 물건을 선물하겠다든가 뭘 어찌해 주겠다는 약속은 수월하게 잘만 내뱉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막상 얻은 것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전화번호도 알려주려 하지 않듯이 몇 번인가 만나자고 요구했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뿐 도무지 만나 줄 생각이 없는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섹스와 관련된 대화를 유도하였고, 또한 표현도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그녀의 그런 천연덕스러운 태도가 마치 예고된 것처럼 직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그런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적잖이 당혹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어쩌지 못한 채 계속 끌려 다니는 꼴이 되었다.

  그의 예전 성격대로라면 그녀와의 그런 지지부진한 관계를 진작 끝냈으련만, 그러기에는 그가 그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게끔 그의 불우한 입장을 교묘히 담보로 이용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가 마땅찮았으나 행여 그녀와의 관계에 금이 갈까 불안을 느끼면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처음에는 키스를, 얼마 후엔 자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을 애무해 달라더니 갈수록 점점 더 노골적인 성적표현과 음란한 욕설을 요구하였다. 물론 그 모든 행위들은 실제 만나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닌 전화로 주고받는 대화나 채팅사이트의 대화방을 통한 문자대화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농도 짙은 폰섹스, 컴섹스를 요구해 온 것이었다.

  그녀의 오르가즘을 위해 음성이나 문자로써 온갖 음담패설과 욕설을 들려줘야 하는 그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의 성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느 젊은 놈 못잖게 정력과 테크닉에 자신이 있다던 그였다. 그렇지만 말이나 글로써 성행위를 묘사해야 하고, 성행위 때 저절로 나는 여러 소리를 재현해야 하며, 게다가 입에 담기도 거북한 지독스런 쌍욕까지 내뱉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쑥스럽고 어색한 것인가. 그녀의 고조되는 신음소리와는 전혀 아랑곳없이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정신적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폰섹스나 컴섹스로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곤혹스러웠다. 예컨대 애정이나 성적흥분을 느끼기는커녕 차라리 혼자서 음화(淫畵)나 포르노 비디오를 보면서 하는 마스터베이션보다 훨씬 못했다. 나중엔 그녀의 그러한 농도 짙은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실제론 아예 다른 생각이나 다른 짓거리를 하며 그녀의 오르가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폰섹스나 컴섹스를 즐기는 장면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기억이 있었으며 또 적잖은 사람들이 그러한 폰섹스나 컴섹스를 즐긴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마저 그런 것을 즐기려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고개를 도리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비롯하여 그런 가상의 섹스행위로도 오르가즘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래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나름대로 내 체취를 느끼고 싶어서 그럴 거야.’

  그는 그런 해석을 해서라도 그녀의 그런 행위들을 자신에게 변호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당장 만나줄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폰섹스, 컴섹스도 좋지만 실제 성관계를 맺게 되면 더 큰 행복과 쾌락을 줄 수 있노라고 부단히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부모님과 오빠 언니한테 모든 사실을 밝히고 허락받은 다음 당당하게 만나길 원하니 그때까지 비록 보고 싶어도 참고 견디라 하였다.

  “아빠! 나도 지금 당장에라도 아빠랑 만나고 싶어. 그리고 아빠 품에 안겨서 귀염도 받고 싶고…….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잖아. 지금 아빠랑 만나봐야 불륜밖엔 더 되겠어? 그러니 보고 싶어도 우리 당분간만 참자. 응?”

  “만났다고 무조건 불륜이라 할 수는 없잖아. 그냥 커피숍이나 레스토랑 같은 데서 만나 서로 입장을 확인만 하자는데, 그게 어째서 불륜이라 할 수 있니?”

  “아빠! 지금 다래를 당장 만나서 뭘 확인하자는 거니? 혹시 다래가 병신일 거란 생각이 들어? 아님 다래가 이상하게 생긴 여자일 거란 생각이 드니?”

  “우리가 그동안 자신의 얘기를 서로에게 많이 들려줘서 대충이야 감은 잡았겠지만, 그렇다고 서로 얼굴도 모르고…….”

  “아빠! 아빠는 지금 내가 그리도 못 미더워서 그런 거야? 때가 되면 아빠가 그런 말 안 해도 다래가 다 알아서 할 텐데, 그때까지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그때가 언제쯤인지 그것만이라도 미리 귀띔해 주면 안 될까?”

  “아빠! 그리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줘, 응?”

  “그럼, 니 사진이랑 전화번호만이라도 내게 보내 줄 수 있잖니?”

  “응 알았어. 아빠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녀는 사진을 보여주거나 또한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믿을 바가 못 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간 그녀에게 공들인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꼭두각시놀음에 휘둘려온 자신이 지지리 못난 놈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도 그간 꿈꿔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에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으며, 대화방에 들어온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빠! 아빠……! 다래 왔어, 아는 체 좀 해주면 안 될까?’

  ‘아빠! 나 때문에 속상한 일 있어?’

  ‘아빠! 미안해, 아빠 마음을 상하게 해서…….’

  ‘아빠, 나도 괴로워. 그러니 다래 좀 아는 척 좀 해 줘.’

  ‘그리고 전화 좀 받아 줘. 다래 아빠한테 할 말이 많아.’

  그녀로부터 귓속말과 쪽지가 수도 없이 날아왔지만 그때마다 무시해 버렸다. 그러길 며칠이 지나자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그녀가 그의 대화방에 들어오는 것도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들어온 그녀에게 더 이상 이런 터무니없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으니 이쯤에서 관계를 끝내자는 통고를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 뒤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그의 대화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잊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미련을 결코 끊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주고받았던 많은 대화들이 떠올려지면서 그녀를 더욱 그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렇게 만나자는 것을 묵살해 버렸을까?’

  ‘그녀가 내게 드러내길 꺼려하는 무슨 커다란 결함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내게 들려줬던 자신에 대한 얘기들 모두가 사실이 아닌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는 그녀가 심각한 장애인으로 어쩌면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혹은 꼽추일지도 모를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의 생각엔 신체적 불구가 이성간의 만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곤 만일 그녀가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만나길 꺼린다면 그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라며, 그녀가 가엽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는 여전히 채팅사이트에 대화방을 운영하면서 여성손님들에게 현란한 그림태그와 달콤한 선율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대화방에서 주고받는 대화에는 관심을 잃고 기분마저 심드렁해졌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을뿐더러 사이버에서의 일들이 모두 허깨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란 시간이 긴 잠으로 소요된 듯 기척 없이 흘러갔다.




7



  그의 대화방에 참다래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그가 그녀에게 단절을 선언한 이래 거의 반년이나 더 지난, 그녀에 대한 감정이나 기억이 거의 퇴색될 무렵이었다. 계절 또한 겨울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6월 하순이었다. 연일 습기 하나 머금지 않은 무더위가 때 이른 기승을 떨어댔다. 

  땡볕에 납작하니 눌러 붙은 삼라만상처럼 국내경기는 더욱 침체의 늪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고 모든 시장이 활기를 잃었으니 돈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려드는 것만큼이나 더욱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일자리를 잡지 못한 채 힘겹게 그날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수입이란 게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치 기적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던 그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을 잊기 위해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채팅하면서 그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의 대화방에 줄곧 드나들던 몇몇 여자들과 실제로 만나 정분을 통해 왔고, 때론 그녀들로부터 몇 푼 안 되는 돈을 얻어 쓰기도 했다.


  그녀가 그의 대화방에 들어오고 한참 지나서야 그는 그녀의 아이콘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오래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아이콘을 보자 너무나 반갑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듯 감정이 격해지기까지 했다. 그가 그녀에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다래야! 그동안 어찌 지냈니?’

  ‘응, 다래 그동안 많이 아팠어.’

  ‘왜? 무슨 일 있었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어제 퇴원했어.’

  ‘어디가 아파서?’

  ‘다래, 그동안 너무 아파서 죽으려고까지 했어.’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6개월 가까이 그녀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 자신이 내뱉었던 결별선언 때문이라 여겼다. 결별선언은 그녀에게 꽤 깊은 충격을 줬으며, 그로 인해 그녀가 중병을 앓았으려니 생각하니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마나 가엽고 불쌍한 여자란 말이더냐.’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나, 내일 대전에서 강의가 있거든……. 아빠, 낼 오후에 대전에 올라올 수 있어?”

  그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래? 그럼,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

  “응, 오후 5시 정각에……, 대전역 시계탑 앞에서…….”

  “시계탑 앞에서?”

  “응, 그래야 아빠 기차에서 내리면 쉽게 찾을 수 있잖아.”

  “웬일일까? 다래가 아빠를 만날 생각을 다 하고……?”

  “응, 몰라, 아빠를 한번 만나봐야 할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나, 내일 오후 5시 정각에 대전역 시계탑 앞으로 나갈게. 어쨌든 만날 결심을 했다니 고마워.”


  다음날 그가 대전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45분경, 아직 15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어 역사 안쪽 출구에 놓여있던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빼어들고 창문을 통해 대전역 광장 앞을 한 눈에 쭉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주위는 훤하게 밝았으며 사람들도 얼마 없어 너른 광장은 꽤 한산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녀가 미리 나와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시계탑 앞쪽을 유심히 살폈다. 시계탑 앞에는 나무들이 제법 우거진 둥근 화단이 보였고, 그 둘레에 사람들이 걸터앉을 수 있는 화강암 반석들이 놓여있었다. 주변에는 젊은 남녀 한 쌍과 40대 후반의 남자 하나만 보였을 뿐, 그가 찾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하도 입구를 빠져나오거나 택시에서 내리는 여자가 있는가 하여 광장 앞 지하도 입구와 택시 승강장 앞쪽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끼리끼리 모여 잡담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으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나, 여기 있소.’라며 눈길을 주는 여자는 없었다.

  시계탑의 대형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그로부터 또 10여 분이 지나도록 그의 눈에는 참다래로 여겨질 만한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기가 약속시간과 장소까지 정해 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고 조급증이 나려 할 즈음, 좀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웬 추레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언제 나타났는지 시계탑 언저리의 반석 위에 자그마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얼굴의 윤곽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창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짙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왠지 그녀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혹시……?”

  “독불장군님?”

  “예, 독불입니다.”

  “아, 아빠……!”

  “아, 다래……!”

  “아까부터 아빠를 쭉 지켜봤어요.”

  “그래? 그럼 아까부터 와있었단 말여?”

  “응, 첫눈에 아빠인지 대번에 알아보겠더라고…….”

  “허, 그랬어?”


  가까이 다가가 마주 본 그녀의 모습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아주 자그마한 키에 마치 틀니를 착용하던 사람이 틀니를 빼고 나온 듯 유난히 입부분이 움푹 꺼져 보여 그의 눈에는 어림잡아 예순은 훨씬 넘긴 노인의 모습이었다.

  “……”

  “……!”





[채팅이야기 제1화]


그녀의 이름은 참다래(ckaekfo)




- 끝 -





2003/09/09


  • ?
    박하늘 2016.02.11 21:14
    재미 있습니다. 60대여성이 20대 목소리를 가질 정도면 역시 처녀같은 할멈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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