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悲)
1.
하늘이 말없이 성을 내며 꾸물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비는 올 것만 같다.
아니지, 오늘도? 최근 몇 주 동안 비는 내리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오늘도 란 말이 나와 버렸다. 기분도 우중충해서였을까.
이런 날씨는 언제든 나에게 이유모를 편안함을 준다. 모든 사물들이 다르게 보인 달까, 미묘한 동질감이 내 안에 스며든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날씨를 좋아 했었다. 매일 똑 같은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무채색의 공포감을 가지고 눅눅한 침대에서 눈을 뜰 때, 창 밖 으로 참 구슬프게도 흐르는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을 보면 부질없는 위로 같은 것을 받았는지도. 위로? 그렇다. 위로. 천진하게도 그 땐 비를 하늘이 주는 위로라고 여겼었나 보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비를 위로라고 믿고 싶다. 헌데 이상한 건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더 심각하게 우울의 늪에 빠지곤 했던 것... 이다.
숨 막히는 집구석에 들러붙고 앉아있긴 싫다. 더구나 이런 날씨에는 특히. 무작정 나갈 채비를 한다. 어디를 가야할까... 사실 이런 불필요한 생각은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사람 많은 번화가로 정해져 있었기에.
번화가. 온갖 휘황찬란함과 음울한 빛이 나부끼는.
왜 하필... 까지 생각하다 알고 싶지 않아졌다. 생각을 그만 둔다.
어두침침한 집에서 나와 보니 언제부턴가 비가 세상을 간질이듯 엉성하게 내리고 있었고 뿌연 입김이 안개처럼 나올 정도로 꽤 추웠다. 순간 옷을 더 껴입지 않고 나온 것을 짧게나마 후회했으나 이도저도 아닌 집으로 다시 돌아가긴 싫진 않아 곧장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랬다. 잠시 가만히 서 생각해보니 집이란 곳은 나에게 말 그대로 이도저도 아니 였던 것이다. 집이라. 흔히들 생각하는 따듯한 가정과 편안한 쉼이 있는. 나에게 있어서 집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엄청난 증오와 온갖 불만으로 저주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집은 - 나는 나의 가족 되는 사람들 에겐 아무런 원한이 없다는 것 또한 밝혀두고 싶다. - 정말로 어긋난 장난 같은 운명의 뜻하지 않은 결과물. 이 정도의 초라한 의미 말곤 그 의상의 가치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 이유야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러했듯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이유는 어찌되었든 간에 중요한 게 아니었지 않나? 이러한 충격적인 모든 사실들은 헤픈 감정의 벽을 넘어 저주스러울 뿐이다.
구슬프게 내리는 비는 언제나 지친 도로를 쓰라리게 한다. 굴러가는 바퀴들은 그 쓰라림을 견디지 못 하고 미끄러지게 되고, 그 때문에 비오는 날엔 사고가 더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비 때문인지, 움츠러들게 만드는 스산함이 평소보다 더 배어있는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교통사고가 나 있다. 꽤나 심각해 보이는 이 사고는 벌써 주변에 사람들이 마치 죽어있는 벌레를 에워싼 음침한 개미들처럼 에워싸고 있었고 사고가 난 두 차량을 보아하니 하나는 누가 봐도 제법 비싸 보이는 거만한 승용차 한 대와 사람이 꽤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날은 교회 봉고차였다. 그들의 바퀴는 그들이 싣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 혹은 죄의 무게를 -빗길의 쓰라림이 더해져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절묘했다.
부와 종교의 충돌. 물에 섞여 빛나고 있는 흩어진 차의 내장들과 한때 가벼운 정적만이 지키고 있던 버스정류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사이렌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비웃는 건지 애도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비. 이모든 것은 절묘하고도 의도된 메타포가 숨겨져 잇는 운명이라는 감독의 한편의 영화인 것만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우습게도 씁쓸한 미소가 입 자락을 열고 새어 나온다. 실론 운명은 언제나 이러한 연출이 원하는 대로 바로 나올 수 있게 만드는 변덕스런 고양이 같은 것 이다...
갑자기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다소 험악한 인상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내게 다가온다.
「 이 자식아, 웃음이 나와 임마! 사람 죽은 게 그래 우스워! 」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씁쓸하다 생각했던 웃음은 남에겐 그저 비웃음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던 것 일까.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날 구해준 건 그 남자를 말리는 주변 사람들과 때 마침 찾아와준 버스였다.
참을 수 없이 서글펐다. 나의 잘못 이였던가? 아니라면 그의 잘못은 더 더욱 아니었기에. 왜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 인가. 아니, 말을 한들 그 남자를, 세상을, 납득시킬 순 없었다는 것을 안다. 애시 당초 내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장식품 같았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묘한 믿음이 있다.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나 역시 이 구절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이 것을 사실이라 생각하게 되자 내 웃음이, 그 사건에 담겨있는 <상징>에, 그 비밀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었던 걸까?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된다. 애초에 웃음은 나에게 너무도 과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분함을 감당하기엔 참으로 무기력한 세상이었다.
어느 샌가 버스는 날 밖으로 떨궈 냈다. 그리고 이 곳. 그 웃음위로 떠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곳.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비 사이로 나도 사람들과 똑같이 우산을 쓴 채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비와 사람. 사람과 비. 비는 비극의 비(悲)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우산을 머리위로 치켜든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난 또 죽음을 마주한다. 황량하게 입을 버티고 선 지하철 입구에 사람 두 셋이 시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노숙자다. 이 늙은 노숙자는 위로는 간단한 바람막이 하나 밖에 걸치지 않았고 그를 덮고 있던 너덜너덜한. 한 달 전쯤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ㅈ’ 신문 말고는 이 추의를 이길 만한 마땅한 도구가 없어 보인다. 그의 손에는 꼬깃꼬깃 접혀진 천 원짜리 두 장이 마치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아이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엄마처럼 절박하게 쥐어져 있었고 그 것을 본 옆의 중년의 남자가
「 노잣돈이라도 잃고 싶지 않았나 보구먼 」
하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 거렸다.
더 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 너무나도 잔인하다!
잔인해?
무엇이?
사람하나가 이렇게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무심하게 방관하는 세상?
비극적이고도 뻔한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운명이 보여준 이 또 다른 <상징>?
혹은 어쩌면 내가 진작 알아 차렸어야만 했던, 위로가 아니 였던, 이 비?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정말 견딜 수 없긴 한 건가? 나는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역겹게도 말이다...
세상은 마치 거미줄 같다. 보이지 않고 빠져 나갈 수 없는 거미줄. 그 거미줄 위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만족스럽게. 혹은 불안하게. 아니면 슬프게. 가지각색의 형태로 꾸역꾸역. 이런 여러 형태로 살아가지만 모두들 언젠가 그 거미줄 주인의 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긴 하지만 모두들 망각한 채로. 허나 그 주인은 (정말 슬프게도) 우리 먹잇감을 먹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우리는 정말 뜬금없이 거미줄의 위에서 한 줌의 재가 된다. 거미줄위의 삶이 싫었던 누군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화려하고도 매혹적인 이상의 빛을 우리를 데려가는 이빨에게서 발견하곤 스스로를 버리기도 하는데, 그렇다. 그 '주인' 에게는 역설적이게도 달콤하고도 두려운 무언가 - 모두들 한 번쯤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하는 - 그 무언가 가 존재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핏빛의 태양을 보고 느꼈던 그 무언가. 그리고 -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 위로가 아니었던 이 장난스런 비가 주는 암시의 그 무언가. (허나 그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 것이어서 내가 느낀 아까의 잔인성과 우울함의 색채 때문에 그 것이 더욱 치명적이고도 달콤한 색을 띄는 것이 였다.)
어쨌거나 내가 겪은 두 번의 죽음으로 나는 더 이상 이 박쥐같은 도시에 있고 싶지 않아졌다. 바로 떠날 것 이다. (누구나 이런 일을 겪고도 머물고 싶어 하진 않는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비는 여전히 조롱하듯 웃었고 땅마저 날 밀어내는 것 처럼 발걸음이 빨라지게 만든다.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기에. 그리고 나 역시 이런 기분으론 누구든 반기고 싶지 않았기에 피차 일반이라는 식으로 나도 성을 내며 지하철로 들어간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이 데리고 온 빗물에 의해 바닥은 질척거렸고 이 곳에는 흔히들 있는 추락 방지용 문이 아직 없었다. 이 또한 하나의 비극적인 암시인 것일까. 모르겠다. 더는 겪고 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비가 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두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다리가 후들 거린다. 몸에 진도 다 빠져 버렸고. 어딘가로 숨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는 죽음을 희극 명사라 말하기도 한다. 그럴까?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와 운명은 비극 명사라는 것이다.
같잖은 안내 방송과 함께 지하철이 들어온다. 그런데 저기. 저 멀리 보이는 한 아이가 가장자리에서 얼쩡거리더니 빗물에 발을 헛 딛인 듯 휘청 거리며 선로 아래로 픽 쓰러진다. 급 정거 하기엔 너무나도 가깝다.
아아. 어느새 지하철은 내 앞에 서 있어 버렸다. 기어이, 기어이...
알 수 없는 구역질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고, 그대로 뛰쳐나와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너무나도. 너무나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저주스럽다. 정말로 저주스럽다! 웃으며 걷고 있는 사람들도. 나도.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쉽게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허나 원래 부정적이었던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하다. 내게 결단을 내릴 기회를 주는 것이. 가끔은 웃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도 큰 것이었나?
어리석게도 누군갈 원망하고 있다.
「미안하게 됐다.」
어떻게 - 이 단 한마디였다. 그리고 이 한마디엔 참으로 많은 의미들이 있었고 - 이리도 잔인하고도 다정 할 수 있는지!
「이젠-」
무력했다. 하지만 난 절대로 무력하다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어쩌면 난 순진하게도 많은 것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의 차례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법은 참으로도 다양했다. 점점 미쳐가는 것 같지만 이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자 복수라 생각하고 싶다. 이 것 뿐이다...
한참을 정처없이 떠돌다 발 밑으로 모든 것이 내려와 있는 세상을 본다. 아직도 표독스레 빛나고 있는 저 웃음기 가득한, 아니, 이 순간 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웃고 있는 것 일까? 정체모를 빛들에게 몸을 기댄다.
2.
「원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데?」
딱 봐도 책임자 같아 보이는 조금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늙은 경찰관이 말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랬답니까? 」
「그게, 알 수 가 있어야지 말이야, 날씨도 우울한 게 꼭 우울한 일만 생기네 그래.」
「맞다, 이 부근에서 사람 죽은게 이 것 뿐만이 아니라면 서요?」
늙은 경찰관이 아무런 말없이 빗 속을 바라본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 시도하지만 비바람 때문에 쉽사리 불이 붙질 않았다.
「제길, 날씨 한번...」
두 경찰은 같이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