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의 초인종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유리창 너머로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문이 열리기 전, 해주는 고개를 숙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맞는 건 잠깐이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아저씨는 해주의 머리를 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한 번 더 반복되지 않았다. 아저씨는 해주를 만날 때마다 한 번 때리고 만다, 딱 한 번뿐이니 해주는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때리는 이유는 해주도 모른다. 아저씨는 해주의 동네로 이사 왔던 날부터 해주를 보자마자 머리를 내리쳤다. 그때 해주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용케 참았다. 그러나 애써 참았던 눈물은 그날 저녁, 아버지의 손찌검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해주의 아버지는 해주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머리 천장을 때리곤 한다. 그날도 해주는 아버지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아빠 출장 언제가?
-다음에
-다음?
-.......
-다음이라고?
-그래
인상을 찌푸린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해주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웠지만 궁금한 것을 못 참아, 또 입을 열었다.
-‘다음’이 뭐야?
아버지는 해주의 물음에 대답 대신 머리를 쳤다. 해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까 아저씨에게 맞은 것이 떠올려 설움이 터졌다. 콧물 다음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가 커지면 또 아버지에게 맞을까봐 입을 막고 이불에 누웠다.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이불을 머리의 끝까지 덮었다. 그날 밤 해주는 두 사람에게 맞았던 일을 수차례 떠올렸다. 어쩌면 아저씨도 답답해서 자신을 때린 것이라고 해주는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저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행동을 했었을 거다. 그런데 아버지의 경우는 이번엔 억울했다. 아버지의 말을 이해를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음’이라는 뜻을 몰랐을 뿐이었다. 차마 아버지에게 항의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머리를 더 세게, 여러 번 맞을 수도 있다. 그냥 한 대 맞고 끝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그 이후 해주의 머리는 괜찮았다. 아저씨의 손힘은 아버지보다 세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맞을 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해주는 아버지에게 맞는 일이 없어졌다.
익숙하게 맞은 해주는 자신의 집 703호로 걸어갔다. 집에 들어선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해주가 좋아하는 만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게다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 좋은 것은 오늘 아버지가 출장을 갔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으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지 않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시계를 보니 오후 두시 되기 십분 전이었다. 해주는 십분 만에 손을 씻고 그릇에 밥을 퍼, 거기에 간장과 식초를 부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골고루 비비니 간장의 짠 내와 식초의 시큼함이 해주의 침샘을 자극했다. 채널을 트니 광고가 한창이었다. 배가 무척 고픈 해주는 밥 한 숟갈을 수저에 넘치게 퍼서 입안에 쑤셔 넣었다. 밥을 골고루 맛있게 씹고 먹고 있을 때, 해주의 기분을 망친 건 바로 초인종 소리였다. 해주는 ‘누구세요’라고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별수 없이 현관문까지 달려가 외시 경으로 밖을 보았다. 문 밖에는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짜증이 났지만 만화를 볼 생각에 금방 풀렸다. 해주는 얼른 티비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또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현관문으로 달려가서 보니, 거지가 급하게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거지의 장난이었다. 그깟 장난쯤이야 해주는 무시하기로 했다. 티비의 음량을 평소보다 세배나 올렸다. 덕분에 일정한 틈으로 계속 울리는 초인종의 소리는 미비했지만 해주는 여전히 그 소리가 거슬렸다. 점점 열이 받기 시작한 해주는 한 번 더 초인종이 울렸을 때 조용히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구멍으로 그 거지가 다시 와서 초인종을 누르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거지는 조심스럽게 초인종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거지가 너무 얄미웠다. 거지가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해주는 문을 잽싸게 열어 도망치려는 거지의 옷깃을 잡았다. 옷이 늘어나 거지의 쇄골이 훤히 드러났다. 해주는 거지의 옷을 더욱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거지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치고는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해주는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렇지만 분이 풀리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 대 더 때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까지 생겼다. 자신은 아저씨에게 여러 번 맞았으니 그 자식은 한 대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데 때마침 거지가 또 초인종을 눌렀다. 해주는 기회다 싶어 문을 바로 열었다. 이번엔 그 거지도 만반의 준비를 하였는지 아까보다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해주는 계단 3층까지 내려가서야 그 애를 잡을 수 있었다. 해주는 거지의 옷을 계속 잡아당기다가 결국 옷을 벗겨버렸다. 그 옷으로 거지의 얼굴을 양쪽으로 번갈아 내리쳤다. 거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재밌는지 활짝 웃기만 했다. 해주는 그 얼굴이 너무 얄미워 거지의 머리를 오른 손으로 왼손으로 여러 번 때렸다. 때리면 때릴수록 해주의 손바닥은 뜨거워졌다. 해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상반신이 알몸인 거지를 보았다. 거무스레한 피부에 기름진 머리칼을 가진 애가 알몸인 상태니 진짜 거지같았다. 혹시나 아저씨가 계단으로 올라올 수도 있으니 해주는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거지가 해주의 발목을 붙잡았다. 해주는 또다시 거지의 머리를 때렸다.
-놔, 이거 놔라고
-나랑 조금만 더 놀아줘
거지는 맞고 있는 와중에도 끝내 말을 다 이었다. 해주는 이 아이가 거지인 것도 모자라 바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였다. 자신은 맞는 것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기지만 거지는 그것을 놀이로 여기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애가 더 얄미웠다. 그리고 그런 애랑 노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너 같은 애랑은 안 놀아
힘껏 그 애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뒤에서 그 애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해주는 집 문을 열고 이중으로 문을 닫았다. 숨이 쉴 틈 없이 차올랐다. 심장이 안정을 되찾자 해주는 외시 경을 보았다. 다행히 거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 애 때문에 한 시간이나 시간이 흘러버렸다. 만화는 이미 끝나 있었다. 해주는 벌겋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의 시원한 느낌이 해주의 머리끝으로 전해졌다. 체력이 급 소모된 해주는 위가 급격하게 수축하는 느낌을 받았다. 얼른 티비 앞에 앉아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어느새 티비에는 어른들이 나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정말 재미없는 방송이지만 해주는 체념한 채로 그들의 연기에 집중했다. 화면에는 수많은 장면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 사람들은 즐겁게 웃다가 갑자기 울고 화내고 어쩔 때는 쓰러지기까지 했다. 티비 속의 사람들은 감정기복이 심했다. 그리고 누구한테 맞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맥없이 쓰러지는 걸 해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주를 이해시켜줄 누군가는 있지 않았다. 궁금한 것을 물어볼 사람이 없어 해주는 티비 보는 내내 답답함을 느꼈다.
날이 어두워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주는 엄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소리는 반갑게 들렸다. 어머니는 해주에게 불 좀 켜라고 하였다. 고된 일에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해주는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해주는 이야기 거리를 생각하다, 그 거지를 얘기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처럼 아빠가 없는 날이니 엄마의 기분은 금방 풀릴 거라 여겼다. 해주는 오늘 거지와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순간, 해주는 이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착한 딸이니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을 엄마가 알면 분명 자신에게 큰 실망을 품을 것이다. 만약 그 거지를 다시 만나더라도, 그 애가 또 짜증나는 장난을 치더라도 패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거지 얘기를 안 하려니 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그 외에 다른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해주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오늘 티비 속의 사람들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면 되겠다 싶었다.
-엄마, 오늘 티비를 봤는데, 거기서 여자가 남자친구 집을 구경하러 갔는데 갑자기 삐진 표정을 하고는 남자한테 헤어지자고 말했어. 그 여자는 왜 멋대로 행동해? 사람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건 옳지 않잖아 그지? 분명 남자친구 집에 가기 전까지는 그 남자한테 뽀뽀도 하고 웃고 귀여운 척 하고 그랬는데,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는지, 자기 기분 나쁘다고 남자친구한테 헤어지자 그러고 그 여자 엄청 못됐더라. 그렇지 엄마? 응? 엄마?
엄마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해주가 엄마를 부르자 엄마는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땅바닥에 누워버렸다. 눈을 감은 엄마는 해주를 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덮은 엄마의 얼굴에는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해주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 못된 여자를 설명할 때, 자기는 착한 사람이 될 거라고, 누구보다 엄마 말을 잘 듣는 효녀가 될 거라고 말할 걸. 그러면 엄마는 기뻐서 자신에게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엄마를 위해 티비를 꺼주었다. 혹시 불빛 때문에 엄마가 불편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닐까 싶어, 곧바로 불도 꺼주었다.
-잘 자, 엄마
벌써 꿈나라로 간 건지 해주의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해주는 벽 모서리 쪽으로 붙어 누웠다. 할 것이 없어 잠을 시도했지만 쉽게 잠들지 않았다. 심심한 탓에 손톱으로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색연필로 낙서를 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기분이 상해질 것을 염려하여 참았다. 몇 번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니 나름 재밌었다. 매끈한 벽지에 손톱을 긁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시끄럽지도 않아, 엄마의 잠을 깨우지도 않았다. 해주는 보이지 않는 벽에다 거지의 얼굴을 천천히 그렸다. 만일 이 그림이 보였다면 꽤나 잘 그려진 작품일 것 같았다. 평소에 그림에 솜씨가 없던 해주는 지금만큼은 그리기에 자신만만했다. 티비에서 본 길거리 화가 아저씨들처럼 손톱을 붓 삼아서 곱게 선을 그려냈다. 거지의 얼굴은 해주의 상상으로 완성했다. 이제 거지의 상반신을 그렸다. 얼굴을 그릴 때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거지의 얼굴보다 벗겨진 몸이 해주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다. 굶고 사는지 거지의 몸은 심하게 마른 상태였다. 자신처럼 뱃살이 나오지도 않았으며 갈비뼈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해주는 그런 힘없는 아이의 옷을 벗긴 게 미안해졌다. 자신이 그렇게 때렸는데도 바보같이 웃었던 거지가 이제 얄밉기 보다는 불쌍했다. 벽에 그려진 거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해주는 거지의 눈빛이 불편해 벽을 외면해서 누웠다. 몇 시간 째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의 소리에 해주는 잠이 깼다. 반쯤 뜬 눈으로 부엌에 가보니, 엄마는 밥 먹을 준비를 하였다. 해주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하였다. 엄마는 재빠르게 해주의 밥을 퍼, 김칫국물에 비벼주었다. 엄마와 함께 밥 먹는 시간은 짧았다. 해주가 급하게 먹어도 밥을 물에다 말아서 먹는 엄마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엄마는 체하겠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 분도 안돼서 밥을 해치운 엄마는 해주의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해주는 한숨을 쉬고 입 안에 미처 다 씹지 못한 음식물을 그대로 밥그릇에 뱉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숟가락으로 퍼서 꼭꼭 씹어 먹었다. 마치 김치 죽 맛이 났다. 그런대로 맛있어서 해주는 남은 밥들을 입안에 조금 씹다가 뱉어내, 다시 수저로 퍼먹었다. 소화도 잘되는 느낌이고 밥이 훨씬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밥을 다 먹고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해주는 학교가기가 무척 싫었다. 학교에서 지루한 수업을 견디는 것은 해주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학교 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소리 내어 쉬었다. 해주는 화장실로 힘든 걸음을 한 후 양치질을 하였다. 거울 속 자신의 뒤에 보이는 것은 달력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아, 토요일이지. 이러다 학교 늦겠다. 얼른 씻어야지. 해주는 잠시 멈칫했다. 속으로 토요일을 몇 번이고 외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토요일은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었다. 해주는 그 사실을 깨닫고 감격스러워 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집안을 점프하며 뛰어다녔다. 더 뛰면 밑 층 아줌마가 올라올지도 모르니 자제를 하였다. 활기차게 뛰는 심장박동을 점차 가라앉힌 뒤 이불위에 누웠다. 한 쪽 팔로 턱을 받치고 티비를 틀었다. 운 좋게 해주가 못 봤던 만화가 재방송하는 중이었다. 하필 그때 또 누군가가 해주의 집 초인종을 눌러댔다. 해주는 지금 이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안 들려, 안 들려’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몇 번 누르다 말 줄 알았으나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 거지가 장난을 거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초인종의 소리가 시끄러워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이번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거지일 것 같은 사람은 고단수였다. 해주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챈 듯 쉼 없이 초인종을 눌러댔다. 결국 다른 집 사람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아저씨였다. 초인종 소리는 잠잠했다. 해주는 현관문으로 달려가 바깥 상황을 보았다. 해주가 바라 본 세상은 조용했다. 해주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아저씨는 수차례 고함을 질렀다. 아저씨의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해주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얼굴을 내밀 만큼의 간격으로 열었다. 704호의 문 앞에 거지가 새우처럼 누워 있었다. 거지는 어디가 불편한지 얼굴에 인상이 가득했다. 미세하게 거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해주는 초인종 소리를 무시한 것에 대한 후회감이 밀려왔다. ‘누구세요’하고 문을 열었다면 거지가 저렇게 거지 같이 더러운 바닥에 누워져 있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워 있는 모습이 거지와 잘 어울렸다. 해주는 거지에게 다가가, 거지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주었다. 지금은 거지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거지는 그 답지 않게 슬픈 표정이었다. 해주는 그런 거지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앞으로 이 아이가 얄밉더라도 짜증나는 장난을 계속 치더라도 얘를 때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를 하였다. 거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놀자
거지는 천진난만했다.
-뭐하고?
-어제 하던 거 할까?
-너 패는 거?
거지는 고개를 양 옆으로 돌렸다.
-잡기 놀이.
거지는 어제 잡기놀이를 한 줄 아나보다. 뭐, 그 애가 도망치고 자신은 잡으러 다녔으니 잡기 놀이가 맞긴 맞았다.
-이번에도 네가 술래 해. 그럼 시작.
거지는 순식간에 뛰기 시작했다. 해주는 본능적으로 거지를 잡기 위해 똑같이 뛰었다. 거지와 해주는 웃음 섞인 고함을 지르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더 이상 내려갈 계단이 없자, 거지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차와 차의 틈 사이로 지나가는 거지를 본 해주는 다른 차와 차의 틈 사이로 들어갔다. 해주는 차에 몸을 숨기고는 숨소리를 죽였다. 거지는 해주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틈 사이로 조심히 나왔다. 해주는 차의 창문을 통해 두리번거리는 거지를 몰래 지켜보았다. 해주는 거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에 신이 났다. 발을 땅에 조심히 닿으며 거지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점점 긴장감이 고조된 해주는 똥까지 마려운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거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극도로 흥분하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과 동시에 해주는 두 손으로 거지의 어깨를 힘줘서 잡았다. 예상대로 거지는 놀라서 움찔했다.
-잡았다
-방금, 놀랐지? 무서웠지?
해주는 방금 전의 짜릿한 기분을 거지를 놀려대면서 만끽했다. 그런데 거지가 울상을 짓더니 곧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해주는 어쩔 줄 몰랐다. 혹시 얘가 자기 아빠한테 가서 고자질을 하면 어쩌나 무서웠다. 얼른 거지를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주는 거지에게 계속 미안하다며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 하였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 거지한테 빌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거지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거지는 몇 차례 호흡을 하더니 진정을 찾았다.
-아빠가 오는 줄 알았어.
-네 아빠? 내가 네 아빠랑 닮았니?
해주의 물음은 공격적인 어투였다. 거지는 손과 고개를 급하게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조용해지니깐,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깐, 그럴 때마다 갑자기 아빠가 나타나. 마구 때려. 아 너라서 다행이다.
그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난다고? 순간이동의 능력을 가진 사람인가. 해주는 생각보다 그 아저씨가 꽤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자신과 만났을 때도 주위엔 항상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아저씨는 그 때를 노려 나타나는가 보다. 해주는 이제 아저씨와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 이 거지가 나름 해주에게 도움을 주었다.
거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비쩍 마른 애가 휘청거리니 참으로 생긴 거랑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거지는 해주와 마찬가지로 그 아저씨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해주보다 더 공포에 떠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안 숨을게
해주는 거지에게 맹세를 하였다. 거지는 이가 훤히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서 해주는 거지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제 네가 술래
해주는 거지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술래를 번갈아 하면서 놀았다. 손에는 검은 때가 득실거렸고 땀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몇 시가 됐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뛰어 놀았다. 경비 아저씨가 내려와 주의를 준 다음에야 그들은 잡기 놀이를 멈출 수 있었다.
*
그 후로 거지는 매일 해주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해주는 학교 갔다 와서 매번 초인종 소리를 기다렸다. 해주가 문을 열 때면 항상 거지는 도망쳤다. 해주는 그런 거지를 잡으러 다녔다. 잡기놀이를 하다 지칠 때면 주차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경비아저씨가 내려오면 그들은 차 뒤에 숨어서 몰래 웃음을 참거나 재빨리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해주는 학교 친구들이랑 노는 일이 줄어들었다. 학교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면 집으로 항상 뛰어갔다. 해주는 거지와 매일을 어울렸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해주는 그 전날에 옷을 얇게 있고 밖에 뛰놀았던 탓에 감기몸살이 걸렸다. 전날 밤부터 해주의 앓는 소리를 들었던 엄마는 아침에 죽을 끓여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아빠가 해주가 좋아하는 복국을 사올 거라고 말하였다. 그날따라 엄마는 해주에게 부드러웠다. 그리고 오늘은 엄마와 아빠가 다투지 않을 것 같았다. 해주는 아픈 자신이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밖에 나가지 말라는 당부를 한 뒤 출근을 했다. 해주는 애벌레처럼 이불을 말아 그 속에 몸을 넣었다. 그리고 얼굴 만 꺼내 티비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오랜만에 티비를 보는 것이었다. 간만에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다. 곧바로 잠이 든 해주는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잠에서 깼다. 그런데 따뜻한 이불 속에서 벗어나기가 싫었다. 게다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오늘은 거지랑 놀면 안 되었다. 해주는 초인종 소리를 무시했다. 또 여러 번 거지가 초인종을 눌러대겠구나 체념하며 누워 있었다. 그런데 초인종은 한 번 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누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주는 거지가 언제 오나,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은 달아났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엄마와 아빠가 둘 다 있었다. 떨어진 물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화분이며 티비며 액자까지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물건들을 던졌을 거라 확신했다. 아빠는 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표정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욕설은 해주의 엄마를 향한 것이었다. 엄마는 물건을 던지는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빠에게 욕을 했다. 이제는 아빠가 엄마를 던져버릴 것 같았다. 해주는 그 사태를 막기 위해 엄마에게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더 크게 계속 지르고 싶었지만 기침 때문에 쉽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그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욕을 했다. 아빠는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현관문으로 엄마를 끌고 갔다. 엄마는 아빠의 힘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을 뒤쪽으로 기울였지만 엄마의 몸부림은 소용이 없었다. 해주는 현관문까지 간 아빠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안아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해주의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었고 오줌을 참지 못했던 나머지 해주는 바지에 오줌을 싸버렸다. 다행히 해주의 부모는 오줌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줌 냄새도 아빠의 술 냄새에 가려 나지 않았다. 아빠는 해주의 힘으로 몸이 비틀거렸다. 해주가 아빠의 힘을 막은 건 아니었다. 술에 취해 힘이 저절로 빠졌던 것이다. 아빠는 엄마의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엄마한테 뭐라고 했다. 해주는 아빠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이 오줌을 싼 것을 볼까봐 마음 졸였다. 다행히 그들의 시선은 해주의 오줌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를 노려보고 있었으며 엄마는 아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머리카락 뭉치를 줍고 있었다. 해주는 그 틈을 타 얼른 윗옷으로 바닥에 흘러내린 오줌을 닦았다. 상황은 종료됐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거기서도 욕을 했다. 아까보다는 소리가 작았다. 해주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맥없이 현관 문턱에 걸터앉은 엄마를 보았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해주에게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하였다. 해주는 엄마 곁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엄마의 눈은 초점이 없어 해주의 축축한 옷을 발견하지 못했다. 해주는 얼른 옷과 팬티를 벗어 베란다에 던졌다. 찝찝한 몸을 씻고 싶었지만 자신이 화장실에 있는 도중에 아빠가 다시 엄마에게로 갈 수도 있으니 참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해주는 아빠 옆에 누웠다. 역겨운 술 냄새에 헛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아빠를 감시하기 위해 참고 밤을 샜다. 다행히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해주는 자는 척 하는 내내 부엌에서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가 코까지 거는 걸 보니 엄마의 소리를 듣고 깨진 않을 것 같아 안심했다. 해주의 양쪽 귀는 괴로웠다. 갑자기 거지의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일요일 새벽이 그렇게 흘러가고 낮이 되었다. 엄마는 일하러 가고 아빠는 목욕탕을 간다고 하였다.
-아빠 언제와? 엄마랑 만나서 와?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가 잠시 아침에 잔 사이에 아빠의 분은 다 풀렸나 보다. 그래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오늘 저녁엔 무사히 넘어가리란 확신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다 나가고 집에 해주만 남았다. 해주는 정말 토가 나오려고 했다. 어제 아침에 먹은 죽이 하루 식사 다였다. 혹시나 해서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냉장실과 냉동실을 다 뒤져봐도 복국은 없었다. 별수 없이 냄비에 남은 죽을 마저 먹었다. 밥 먹는 일을 끝내니 심심했다. 아빠 때문에 티비가 고장 나서 티비도 볼 수 없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갈까 생각해 봤지만 먼데까지 가기는 귀찮았다. 원래 지금 때보다 훨씬 전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야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거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제 들린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줄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먼저 거지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계실까봐 무서웠다. 문득 해주는 좋은 생각이 났다. 거지가 했던 장난처럼 자신도 똑같이 거지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튀는 것이다. 그러면 문을 여는 사람이 아저씨더라도 자신이 도망치면 문제가 없었다. 한동안 달리기가 훈련된 상태라 아저씨보다 빨리 달리는 건 자신 있었다. 해주는 밖으로 나갔다. 마음을 가다듬고 704호의 문 앞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살짝 열려져 있었다. 해주는 그 틈으로 거지의 집 안을 보았다. 안은 조용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은 물건들이 엎질러진 해주의 집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심지어 벽지도 집에 붙여져 있지 않았다. 해주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집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문을 조금 더 열고 조용히 그 집을 들어가 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겁도 없이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해주는 여기 사람들이 문단속 하는 것을 잊은 것이라 추측했다. 해주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저씨가 오기 전에 얼른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미세하게 사람 숨소리가 들렸다. 해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베란다로 가보니 숨소리가 더 자세히 들렸다. 거지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은 해주는 베란다의 창고 문을 열었다. 거기엔 정말 거지가 새우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해주는 반가워서 거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거지는 발작을 일으키며 깼다. 그때의 거지는 새우가 파닥거리는 모습과 흡사해서 해주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놀자
거지는 창고에서 나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몇 분 동안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해주는 자신에게 업히라고 권했다. 외관상 거지의 체구가 해주보다 2배는 작아보였기 때문에 해주는 거뜬히 업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주도 어린 몸이라 자신과 또래의 남자 아이를 업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센 척을 하기 위해서 힘든 것을 티내지 않았다. 거지는 현관문에 이르자 내려달라고 했다. 거지의 다리는 떨렸지만 곧바로 걸어갈 수 있었다. 거지의 상태를 보니 오늘 술래잡기는 무리였다. 해주와 거지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거지와 아무 놀이도 하지 않았지만 해주는 안 심심했다. 저녁이 오지 않고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었다.
-어제 왜 안 놀아줬어?
-나 감기 걸렸었거든 아파서 하루 종일 잤어. 어제 우리 집 왔었어?
-응
해주는 거지가 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일부러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거지가 알면 상처 받을 것 같아 모른 척 했다.
-근데 진짜 왔었어?
-응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초인종 몇 번 눌렀어?
-한 번.
-한 번? 원래 짜증나게 많이 누르잖아
-집에 아빠가 있어서, 시끄러우면 안 되니깐
-너 근데 왜 추운 창고에서 잠을 자? 재밌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아니, 아빠가 고함을 하도 질러서 창고가면 나름 조용하거든.
안타깝게도 해주의 집 베란다에는 창고가 따로 없었다. 아빠의 고함 소리를 피할 수 있는 거지가 부러웠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자신의 아빠도 고함을 질렀다. 거지도 자신만큼이나 무서워했을까.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싼 적이 있을까. 만일 거지는 그런 경험이 없다면 거지의 얼굴을 보기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너 매일 아빠한테 혼나는 거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매일 아빠가 너를 혼내는 거냐고
-혼난다는 게 뭔데?
-아, 씨 그러니까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아빠가 그것을 야단치는 거. 그게 혼낸다는 말이야.
거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해주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 소리를 냈다. 해주는 방금 자신이 무척 똑똑해 보였다. 단어 뜻을 몰라 아빠에게 맞았던 일이 자자한 해주가 누군가에게 아주 상세히 단어 뜻을 가르쳐주었다. 해주는 괜히 우쭐했다.
-나 잘못 같은 거 안 하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실은 잘못일 수도 있어.
-아냐 그냥 있는데 때려
-엄마는 뭐라 안 해?
-엄마 없어.
-그러면 아빠랑 둘이 살아?
-응 엄마는 먼 데 혼자서 살아.
어쩐지 해주는 거지가 이사 온 날부터 지금까지 거지의 엄마를 본 적이 없다. 아마 거지의 엄마는 아빠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을 것이라 여겼다. 거지도 같이 데려가려 했으나 거지는 아저씨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해주는 엄마가 자신을 데리고 아빠가 없는 곳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더 이상 맞을 일도 없고 집에 늦게 와도 상관이 없었다. 그나저나 거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아무 이유 없이 그 아저씨에게 맞은 것이다. 왜 아저씨는 자기 자식과 나를 때리는 걸까.
-네 아빠는 왜 널 때려? 고함은 왜 질러?
-몰라, 원래 그래
해주의 아빠는 엄마를 패더라도 매번 자신을 때리진 않는다. 때려도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 끝이다. 그런데 거지는 매일 맞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때 자신이 거지를 패던 날, 거지는 그것에 무감각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해주의 힘은 그 아저씨보다 약하다. 거지에게는 그저 놀이일 뿐이었다. 해주는 거지나 자신이나 맞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암울해졌다. 해주의 집에는 창고도 없으니 엄마를 향한 아빠의 폭행을 듣고 볼 수밖에 없다.
-네 엄마는 네 아빠랑 같이 안 살아서 안심이야.
-난 엄마랑 둘이서 살고 싶어.
-네 엄마가 미처 너까지 못 데려 갔나봐. 다음에 탈출해.
해주는 거지에게 귓속말을 했다. 거지는 귀가 가려웠는지 몸을 움츠리며 손으로 귀를 후볐다.
-어떻게 탈출해?
-넌 남자잖아. 남자가 그럴 용기도 없어? 그럼 남자가 아니지.
-무슨 소리야, 나 곧 탈출할 거야. 집나가서 엄마 찾으러 갈 거야.
-뻥 치네, 거짓말쟁이야.
-뻥 아니거든
거지는 분개했다. 해주는 그럴수록 거지에게 더 얄밉게 굴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 건데?
거지는 말문이 막혔다. 다짜고짜 말을 밀어 붙이는 해주에게 반격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응? 말해봐, 응?
-다음 금요일에 갈 거야 그때 우리 아빠 없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응 진짜로
-그럼 내가 지켜볼게, 만약 거짓말이면 네가 집나가려 했다고 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본래 고자질을 좋아하지 않는 해주지만 거지에게는 유난히 유치하게 대하고 싶었다.
-진짜 이를 거야?
-응 다 말할 거야.
해주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거지는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해주는 그런 거지의 모습을 보니 신이 났다.
-우리 같이 갈까?
-나도 도망가자고?
거지의 제안은 달콤했다. 해주는 아빠가 한바탕 난리를 치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불시에 닥친다. 그래서 해주는 늘 불안하다. 엄마가 맞는 모습은 해주를 매번 불행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집을 나간다면 엄마를 못 지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있으나 마나 엄마는 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해주의 힘으로는 아빠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번에는 힘으로 안 되니 아빠의 팔을 세게 깨물었었다. 아빠는 엄마에 대한 발길질을 멈추고 자신의 팔을 물고 있는 해주를 보았다. 그리고 팔을 들어 올려 해주를 밀었다. 그대로 해주는 뒤에 화장실 바닥에 자빠졌다. 머리 뒤통수가 땅바닥에 꽤나 세게 부딪혔다. 그 당시에는 엄마를 보호해주는데 급급해 머리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종료되자 그 충격이 뒤통수로 전해지고 통증은 오래갔다. 그 뒤로 아빠를 깨물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엄마를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출은 해주에게는 사춘기의 방황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해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출은 자신의 인생을 위한 중요한 도전이었다. 또한 그것은 엄마를 지켜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신이 실종된 것을 부모가 알게 되면 당분간은 아니, 꽤 오랫동안 아빠는 엄마를 때리지 않을 거다. 적어도 부모라면 실종된 아이를 찾는 데 정신없기 마련이다. 해주는 자신이 가출을 해야 할 필요성을 만들어내면서 묘하게 흥분되었다.
-응 같이 가자 몇 시에 만날까?
-내가 딩동할게
-바보야, 가출하는데 몰래가야지 아무도 모르게 도망가도록 작전을 짜야해 작전을, 우린 이제 비밀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거라고
거지는 해주의 말을 듣고 들떴다.
-그럼 우선 무얼 해야 해?
-일단, 몇 시에 만날 건지 정하자 그리고 장소는 우리만 아는 곳으로 정해야 해. 준비물은, 잠시, 너 설마 빈손으로 간다는 건 아니지?
-거지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해주는 한숨을 내쉬고는 가출시 챙겨야 할 짐들을 거지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까먹으면 안 돼. 잘 기억할 수 있지? 한 번 읊어봐
-사복, 잠옷, 비상식량......
-아, 이불도 필요해. 근데 우리 어디서 자? 길바닥에서 자?
-엄마 집으로 갈 거야
거지의 비장한 표정은 해주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네 엄마가 나도 재워주실까?
-걱정 마, 나만 믿어
해주는 거지가 든든했다. 자신이 이런 애한테 남자다움을 느꼈다는 것이 스스로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거지는 바보처럼 웃는 애가 아닌 의젓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둘은 꼭 만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날 저녁, 해주의 엄마와 아빠는 같이 집에 들어왔다. 그들은 유한 분위기였다. 밖에서 화해를 했나보다. 해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해주는 부모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중간에는 엄마와 아빠 칭찬도 해주었다. 사실, 해주는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이유를 모른다. 말다툼을 할 때는 반이 욕이라 뭐 때문에 싸우는지 알기 힘들다. 왜 싸우는지 항상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묻지 않았다. 자신이 묻는 순간, 싸움은 더 커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해주는 그 잠시 뿐인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해주의 엄마는 해주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였다. 뭔 지 모르지만 해주는 기대가 컸다. 엄마가 먼저 얘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해주에게는 특별하다.
-뭐야? 뭔데? 좋은 거야?
-응 좋은 거야 우리 이제 여기 안 살아
-그럼 이사 간다는 말이야?
-응 여기보다 훨씬 큰 집으로 거기는 엄마아빠 방, 해주 방 따로 있어. 그리고 거실도 있어
-내 방? 나 그럼 혼자서 잘 수 있는 거야?
-응 네 방 크기가 지금 이 방 크기랑 비슷해. 근데 너는 엄마 아빠랑 같이 자기 싫어?
-아니, 아니 엄마 아빠랑 같이 자기 싫은 게 아니라 비좁아서,,. 막 다리도 뻗어서 벌려서 자고 싶단 말이야.
-해주야, 내일 엄마 일 마치고 거기 집 한 번 가볼래? 엄마가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갈게
-응, 갈래
해주의 꿈은 이사를 가는 것이다. 더 넓은 집으로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도록. 자기만의 방이 따로 있다면 그만큼 기쁠 수가 없다. 방에서 혼자 있을 수도 있고 같이 집에 있지만 엄마 아빠를 안 볼 수도 있다. 해주는 들떠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엄마가 학교 앞에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학교를 마칠 때면 항상 정문 앞에 다른 친구들 엄마들이 아이를 마중했다. 내일은 자기의 엄마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된다. 해주는 얼른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엄마의 말대로 이사 올 집은 지금의 집보다 배로 넓었다. 거실은 따로 있었고 방은 세 개나 있었다. 베란다는 두 개였다. 한 쪽 베란다는 고층의 건물들이 보였고 다른 쪽 베란다에는 차도와 산이 보였다. 고층의 건물들이 보이는 베란다에는 따로 창고가 있었다. 해주는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기 전에 창고에 먼저 가보았다. 창고는 거지 집의 창고보다 훨씬 공간이 넓었다. 해주가 새우잠을 잘 정도로 공간은 충분했다. 다음으로 해주가 쓸 방을 구경했다. 엄마가 집을 청소할 동안 해주는 방문을 닫고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는 자신이 방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해주는 두 팔과 다리를 벌려 누웠다. 나른하고 편안해서 하마터면 잠 들 뻔했다. 이사는 다음 주 중에 할 계획이었다. 해주는 다음 주가 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사 집을 돌아보고 좁은 집으로 돌아온 날 밤, 해주는 벽면에다 손톱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늘 구경했던 좋은 집을 떠올리며 자신의 방과 창고를 그렸다. 창고에 누운 자신을 그리자 그제 서야 거지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 해주는 마음이 바뀌어 거지와 함께 도망가기가 싫었다. 이제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미 거지와 손도장까지 찍었다. 약속을 깨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해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거지와 마주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음 주까지만 거지를 피하면 문제는 해결이 된다.
해주는 학교를 나갈 때 항상 뛰어갔다.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주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해주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초인종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쓰려서 고통스러웠다. 용케 그 고통을 참아냈다.
거지와 약속을 하기 전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탄 해주는 7층에 거지와 마주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전에 이미 그들은 눈이 마주쳤었다. 해주는 시선을 복도의 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거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해주는 앞만 보고 걸어갔다. 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미 내려간 것일 수도 있었다. 가슴이 조여 오고 침은 메말라 갔다. 해주는 현관문을 열고 부엌으로 달려가 물 한 잔을 한 번에 삼켰다.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으로 흉 골을 두드렸다. 그런데 거지는 왜 자신을 붙잡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잡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해주의 신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해주는 이런 찝찝한 기분을 날려버리고자 했다. 내일이면 상황은 저절로 종료가 된다. 불편한 것은 잠시였다. 이제 거지를 볼 일이 없으니 금방 이 아픔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거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해주는 얼른 거지를 잊고 싶었다. 티비 없이 집에서 혼자 지내야하지만 오늘만 그러면 되었다. 해주는 벽에 그림을 그리면서 오늘 하루를 버텼다.
*
드디어 해주가 기다리던 이사하는 날이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짐을 싣는 사람들은 해주의 집과 밖을 왔다갔다 거렸다. 때문에 해주의 집 현관문은 완전히 열려져 있었다. 거기에 거지가 서 있을까봐 그쪽으로 가보지 않고 구석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때 705호 아줌마와 엄마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저씨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사 가서 좋겠어. 아휴, 나도 이사를 가던가 해야지 여기서 못 살겠어. 왜 옆 집 남자 있잖아.
아줌마의 음성은 갑자기 작아졌다. 엄마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네 그 사람 좀......
-그렇지? 아무래도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자식도 있던데 학교를 안 보내나봐 그 애는 불쌍해서 어쩌나 한 번씩 그 사람 친척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오던데 병원 간다는 얘기를 들었어. 정신병원인 것 같아.
해주는 아줌마의 말을 곱씹다가 그 말을 이해했다.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머리를 그토록 때린 것이었다. 해주는 나름 자신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자신의 아빠도 정신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해주는 이 사실을 알아낸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해주는 은근히 자랑하기 위해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우리 아빠 정신에 이상 있는 거지? 그래서 때리는 거 맞지?
그때 아줌마와 엄마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줌마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줌마가 놀랄 만큼 자신이 똑똑한 말이 했다는 생각에 얼른 엄마의 칭찬을 기다렸다. 그런데 칭찬과는 거리가 먼, 엄마의 손 따귀가 해주의 머리천장을 쳤다. 예상외의 반응이라 해주는 당황했고 그것이 엄마의 야단인지 과격한 칭찬인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곧 엄마는 그런 말버릇 어디서 배운 것이냐고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라고 일렀을 때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주는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어떤 게 잘한 행동이고 못한 행동인지 스스로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잘못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줌마는 급히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엄마는 해주를 보며 오후 4시에 출발예정이라고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 해주는 다시 방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엄마와 있는 것이 어색하니 나중에 잘못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거지와의 약속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만일 자신이 거지와의 약속을 지켰더라도 거지가 어겼을지도 모른다. 거지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것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 그러니 자신이 지금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엄마는 가자고 해주를 불렀다. 해주는 엄마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현관문을 나갔다. 거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차를 타고 해주는 고개를 숙였다. 해주가 탄 차와 그 뒤의 이사 트럭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차는 한 시간 넘게 달렸다. 해주는 어제 잠을 설쳤던 탓에 곧장 잠이 들었다. 해주가 잠에서 깼을 때 막 이사 집에 도착했다. 해주는 엄마와 아빠가 물건을 옮기는 것을 돕고 자기만의 방이 될 작은 방을 청소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엄마와 아빠의 지인들이 놀러왔다.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회, 치킨, 주스, 두루마리 휴지 등을 하나씩 손에 쥐고 왔다. 엄마는 그 사람들을 위해 거하게 저녁상을 차렸다. 덕분에 해주도 과식을 하였다. 취기가 오른 아빠와 다른 사람들은 웃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빠의 소리는 너무 커서 해주의 귀에 거슬렸다.
해주는 거실에 있는 것이 지루해 베란다로 갔다. 베란다 문을 닫으니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그나마 적게 들렸다. 해주는 창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의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창고의 공간은 여러모로 좋았다. 일단 조용하고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찾기 힘든 곳이다. 만일 아빠가 소리 지르는 날이 있더라도 해주는 이제 그 소리를 피할 수 있다.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불을 덮으면 잠자는 공간도 된다. 지금 거지는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거나 아니면 이미 자신이 안 올 것을 예상하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자신과 같이 창고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빠 몰래 거지를 여기로 데려오면 될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집도 넓으니 거지가 숨어 있을 곳은 많았다. 자신은 방에서 자고 거지는 창고에서 자면 되었다. 왜 그 생각을 못하고 거지를 버리고 왔는지 해주는 자신을 한탄했다. 여기 창고가 거지의 집 창고보다 훨씬 넓고 좋은데 말이다. 해주는 손톱으로 창고 문을 긁었다. 문의 나무 가시들을 뜯겨져 해주의 손톱을 파고들었다. 해주는 자신의 손톱을 파는 가시들 때문에 아파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겨우 하찮은 가시 따위에 굴복하기 싫어서 더 세게 문을 긁었다. 해주는 가시가 박힌 손톱으로 가슴을 깊게 눌렀다. 조금씩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거지가 생각날 때의 고통을 이기지 못했다. 거지가 자기 때문에 자기 아빠에게서 도망치지 못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해주는 그때 엄마에게 맞았던 것이 생각났다. 갑자기 서러워지고 속에 내재된 분을 풀고 싶었다. 아니, 그 거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자신도 잘못이 없는데 맞는다고, 나도 너처럼 그냥 맞게 되었다고. 해주는 거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현관문으로 나가려 하니 그건 안전한 방법이 아니었다. 분명 엄마와 아빠에게 들켜 해주를 못 나가게 할 것이다. 해주는 창고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왔다. 밤이 되어 화려한 야경이 비치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파트의 높이는 생각보다 높았다. 해주는 여기가 17층이라는 것을 그제 서야 실감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높이는 무섭지 않았다. 매일 거지와 계단 높이뛰기를 했는데 계단 10개는 거뜬히 뛰어내린 해주였다. 착지까지도 완벽했다. 계단을 뛰어내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여기를 뛰어 내리면 당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해주는 심호흡을 하고 베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얼른 거지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해주의 마음이 드러났는지, 해주가 떨어지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아까 느꼈던 가슴의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는 가려웠다. 해주의 발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가시 박힌 해주의 손톱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해주는 눈을 감고 거지의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이름: 김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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