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소돔 1일

by 하인리히 posted Jan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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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 1일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곳에 들어가면 항상 먼지 그득한 공기와 곰팡이 슬은 책 냄새가 풍긴다. 답답한 기운 때문에 들어가기가 꺼려지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생각은 달라진다.

회색 개미는 신전 기둥처럼 양옆으로 우뚝우뚝 솟은 책 더미들을 피해 현관문으로 돌진한다. 자칫 방심하면 허공 위 신발에게 쥐도 새도 곤충도 모르게 밟혀 죽을 수 있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회색 개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헤르만 헤세, 이청준과 황순원을 지나쳐 내 집으로 들어온다.

“이봐, 검정 개미! 오랜만이야! 내가 왔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와? 큰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걸 봐. 정말…… 울 뻔했다니까.”

그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 두툼한 것을 꺼낸다. 회색 개미는 방금 전까지 백과사전 구역에서 두꺼운 소설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얼굴에 장판처럼 열이 나 있다. 식식거리는 콧김이 내 눈앞까지 퍼져온다. 그는 천만 분의 일 확률로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소돔 120일> 초판을 발견했노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자랑했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구하기 힘든, 희귀본도 아닌 초 희귀본 <성처녀의 욕망> <안방철학> <사랑의 죄악>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 등 유명 사드 소설은 모두 발에 넣었지만 국내 초판 <소돔 120일>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운 좋게, 운명적으로 <소돔 120일>을 찾아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큼지막한 소설 두 권이 그의 발톱에 들려있었다. 나는 이런 희귀본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살면서 두 눈으로 구경하기도 힘든 책을 일일이 수집하는 그의 열정과 긍지가 감명 깊었다. 그에게 고서 수집은 취미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웠다.

나야 다 쓰러져가는 책방에서 워낙 오랫동안 성인잡지만 읽어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지만, 그는 유독 세계고전만 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새 책을 발견했다는 충격과 쾌감에 젖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일단 내 집에서 한밤 자고 가기를 권했다. 시간이 늦은데다 책방도 곧 문을 닫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주인이 문을 걸어 잠가서 온전히 곤충들의 세계가 되지만, 불빛도 꺼지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간대가 되면 개미 꽃무지 나비 무당벌레 등은 피곤한 눈을 쉬게 하고 각자 발을 씻거나 야식을 먹고 숙면에 접어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주인이 문을 닫지 않는다. 곤충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트폰을 켜서 시시한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저대로 있으면 새벽 두 시가 넘어도 잠이 드는 법이 없다. 대체 무슨 대단한 영상인지 한번 붙잡으면 다섯 시간도 넘게 본 적 있다.

나는 서둘러 회색 개미를 깨웠다.

“이봐, 회색 개미! 얼른 일어나서 저것 좀 봐!”

회색 개미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 창문을 통해 책방 주인을 바라봤다. 나는 회색 개미의 눈알이 물을 먹은 듯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저게 뭐하는 짓이야?”

“가끔씩 주인이 저런 행동을 하더라고. 근데 딱히 놀랄 일은 아니잖아?”

“아니야…… 내 책!”

회색 개미는 황급히 책장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 상 · 하 로 나뉜 <소돔 120일>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나도 그를 뒤따라 책을 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가져갔거나 그새 손님이 들어와 사갔거나 둘 중 하나다. 아니면 회색 개미가 다른 곳에 두었는데 잊어버리고 엉뚱한 구역에서 뒤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회색 개미는 혈안이 되어 땀을 들기름처럼 줄줄 흘리면서 서가를 헤집어놓고 있다. 20분 넘게 뒤져도 나오지 않자 종이를 북북 찢어 이리저리 흩날린다.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나는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지금은 밤이고, 이런 한밤중에 헌책방에 들어와 책을 사가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산다 해도 그 잡지를 딱 골라 가져가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소돔 120일>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방법은 있었지만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었는데 회색 개미는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골목골목 집마다 돌아가며 문을 두드렸다.

“어이! 사마귀! 문 열어봐, 당장!”

왕사마귀가 졸린 눈으로 삐걱 문을 연다.

“무슨 일인데 이리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잠 좀.”

회색 개미는 이웃 간의 예의범절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으로 쳐들어가 서랍이며 옷장이며 아무렇게나 파헤친다.

“어디 숨겨놓은 거야? 얼른 내놓지 못해!”

결국 회색 개미와 왕사마귀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고 결과는 당연히 회색 개미의 패배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린다.

“야, 오색나비, 문 열어! 꿀벌들아, 노린재야, 하늘소야, 문 열어보라고!”

이런 소란에 참다못한 주민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회색 개미에게 항의한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이 난리를 피워요? 정 못 찾겠으면 다같이 찾으면 되잖아요?”

꽃매미 부인이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자 회색 개미는 그제야 수그러져 주눅 들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에이, 진즉에 그리 말해줬으면 될 것을…… 그럼 같이 찾아봅시다.”

화날 대로 화난 곤충 주민들은 차마 분을 풀지 못하고 흩어져서 <소돔 120일> 두 권을 찾기 시작했다. 나도 주민들을 도와 구석구석 청소하며 책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책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금방 어디론가 휙 없어질 수 있을까? 이건 아무리 봐도 누가 훔쳐간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이유로, 누가, 왜?

유력한 절도범은 윗집 사는 달팽이 영감이었다. 이 끈적끈적하고 느린 노인(노파)은 구부러진 숟가락 깨진 접시 조각 엉킨 실 뭉치 등 각종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일이 취미인 동물이었다. 늙었고 동물이다 보니 우리 곤충들은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소돔 120일>을 슬쩍 가져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달팽이 영감 현관문을 두드렸다.

“할아범 아니 할멈, 아니 할아범 에잇 어르신, 잠깐 방문할 수 있을까요?”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야? 내 물건을 훔쳐가려고 하는 놈이.”

“물건 훔친 놈은 당신이잖아요, 어르신.”

“뭐? 어느 놈이 바락바락 말대꾸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더 말할 거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뒤에서 달팽이 노인이 소리치는 것도 무시하고 창고로 내려가 책을 찾는다. 이상하다. 여기에도 없다. 주민들이 몰려와 한 시간을 넘게 파헤쳤는데도 책은커녕 종잇조각 하나 나오지 않는다. 회색 개미는 울부짖는다.

“이 영악한 놈! 아니, 년! 어디다 숨겼어?”

“숨겼다니…… 난 책 같은 것 보지도 못했다고.”

“거짓말하지 마! 네가 안 숨겼으면 대체 누가 숨겼다는 거야? 책이 있는 곳을 밝히란 말이야!”

달팽이 노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애꿎은 늙은이만 잡은 셈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집안을 샅샅이 훑었지만 나오는 건 갖가지 쓰레기와 먼지 뿐, <소돔 120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회색 개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지쳐있었고 주민들도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두들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책방 주인이 문을 열 테고 손님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회색 개미는 미쳐버릴지 모른다. 자기 혼자 미치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탐색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힘이 빠진 상태였다. 쓰레받기로 걸레로 청소를 해서 그런지 콧속에 뻑뻑한 먼지가 가득 끼어있었고 얼굴도 거무튀튀하게 검댕이 묻어있었다. 나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곤충이 그랬다. 다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씻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주민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제 친구 회색 개미 때문에 열심히 책 찾으려 노력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안 찾으셔도 되니(회색 개미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민들은 내 말을 듣고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투덜대며 회색 개미를 나무라면서. 나 같으면 도와주지도 않고 쌍욕이나 퍼부은 다음 늘어지게 잠이나 잘 텐데 참 성품도 좋은 분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서있는데 대뜸 회색 개미가 다가와 시비를 건다.

“야, 검정 개미. 너 방금 뭐랬냐? 나 때문에 뭐가 어째? 너 지금 책 못 찾은 게 나 때문이라고 했냐? 하, 참나 어이가 없어서. 야 이 새끼야. 내가 이때까지 너한테 해준 게 얼만 줄 알아? 매일 집 찾아갈 때마다 진딧물 열 마리에 설탕 한 봉지까지 안 가져간 게 없어. 그리고 하루 종일 네 하소연 듣느라 얼마나 진을 빼는지 알기나 해? 기껏 이야기 들어줬더니 친구라는 게 배신 때리고 자빠졌네. 이 진드기만도 못한 새끼야.”

나는 그의 거친 언행에 살짝 놀랐지만 당당히 대응했다.

“뭐? 새끼? 야, 진짜 족보 더러운 회색 개미새끼가 나보고 새끼란다. 그러니까 누가 소돔 120일 같은 쓰레기 변태 소설 찾아내래. 그딴 싸구려 찾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할 일 없었잖아 안 그래? 넌 네 스스로 일거리를 만드는 거야 이 멍청한 개미새끼야. 알았어? 알았으면 집에 돌아가서 발 씻고 잠이나 처 자 새끼야.”

회색 개미는 적잖이 놀랐는지 가만히 내 눈만 쳐다보다 이내 씨부렁대며 물러갔다. 궁시렁 궁시렁, 지가 뭘 안다고.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린 채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정말 힘겨운 날이다. 괜히 소돔이란 책 때문에 이런 소동이 일어났으니. 사마귀를 비롯한 곤충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지, 미안해야할 건 내가 아니라 회색 개미인 거야. 암 그렇고말고……

내가 상념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회색 개미였다.

“또 뭐야? 왜 찾아왔어?”

문을 열자 회색 개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오줌을 지리면서 말한다.

“거… 검정 개미야… 큰일 났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생쥐였다. 생쥐가 앞발로 내 집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회색 개미는 벌벌 떨면서 내게 매달렸다.

“저것 좀 쫓아줘! 검정 개미야! 넌 나보다 힘세잖아! 빨리!”

나는 아기처럼 울어대는 그가 꼴불견이었지만 내 집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였다. 집이 잿더미로 변해버리기 전에 망할 놈의 생쥐를 쫓아내야 했다. 나는 지하 창고로 내려가 미리 모아놓았던 폭탄먼지벌레 산(酸) 세 병을 꺼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생쥐는 더러운 음식 찌꺼기가 묻은 코를 킁킁대며 식량을 찾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머리 위에 산을 뿌렸다. 세 병 다 빠짐없이. 생쥐는 비명을 지르고는 우스꽝스럽게 폴짝폴짝 뛰면서 벽 구멍 너머로 줄행랑 쳤다. 역시 생쥐까지 물리치는 나는 대단하다. 자만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니 독자 여러분은 읽으면서 눈살 찌푸리지 마시길. 내가 잠깐 생쥐를 몰아낸 사이 회색 개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외침소리가 들렸다.

“이걸 봐! 이걸 보라고! 드디어 찾은 것 같아!”

그는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화색이 되어있었다. 생쥐 보금자리에서 책을 찾은 모양이었다. 나도 뒤따라갔는데 이내 실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책이 아니라 신문지였어.”

이제 그도 나도 지쳤다. 어디를 봐도 책장에는 없고 주민들 집에도 달팽이집에도 없고 생쥐 집에도 없으니 <소돔 120일>은 하늘로 날아갔거나 땅으로 파묻힌 게 틀림없었다.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회색 개미야, 아까 화내서 미안했다. 그만 관두고 들어가서 쉬어. 내일 다시 찾도록 해.”

그러나 그는 표정이 달랐다. 마치 금방이라도 한강에 뛰어들 얼굴이었다. 눈알은 벌겋게 충혈 되고 볼 살은 쭉 빠져서 광대뼈가 들어났으며 배는 볼품없이 쪼그라져서 노인의 주름살 같이 되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진작 포기하는 건데… 내가 멍청했다.”

나는 아니라고 수고했다고 위로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신없는 하루였다. 내일은 제발 그놈의 망할 책이 나타나 회색 개미의 입을 틀어막아주길.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바깥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생쥐가 찾아왔나 싶었지만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는 아니었다. 뭔가 작은 것이 찌그러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책방 밖 도로를 내다보았다. 회색 개미가 보였다. 납작하게 뭉그러져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누워있었다. 차바퀴에 깔려 죽은 것이다. 그의 표정이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책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나 보다. 그렇다고 자살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회색 개미는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서가를 조금만 더 뒤지면 나올지도 모르는데.

바로 그때 책방 현관문이 열렸다. 손님이 온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아 일곱 시가 된 게 틀림없었다. 손님은 서가를 두리번두리번 훑어보다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소돔 120일> 상 · 하 였다.

“저기 아저씨, 이거 얼만가요?”

“책이 많이 상했네. 오천 원만 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침대에 앉아 책을 들고 가는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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