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잠

by 개구리A posted Jan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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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잃어버렸다. 항상 숄더백 속에 넣어 다니는데 지난주부터 집에 들어가기 위해 열쇠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문손잡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머리를 살짝 움직여 남은 무의식을 떨쳐냈다. 그리고 병든 짐승 마냥 힘없이 손목의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가 소지하고 있는 시계는 물론이고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시계에는 시침, 분침 따윈 없다. 그저 숫자들이 동그란 원판에 말없이 줄지어 앉아 자신의 차례를 가리켜줄 시계바늘을 기다리고 있는듯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기다림 이었다. 


앞으로 숫자를 가리킬 침 따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숫자들을 향할 침들은 없지만 나는 지금이 몇 시 몇 분 몇 초 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어떻게 시간을 아는지는 몰랐다. 그저 이곳의 시계를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 그 완벽한 섭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으면 물건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었는데 지난주부터 열쇠가 사라지기 시작 했다. 하지만 더 이상한 점은 아침이 되면 머리맡에 항상 열쇠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벽을 통과 하여 열쇠를 머리맡에 두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열쇠가 없는 것이다. 이제 곧 취침시간이 나를 엄습해 잠들게 할 것이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없다. 마침 경고라도 하듯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9시 35분 46초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25분후면 철판과 다정하게 볼을 비빌 것이다. 어떻게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숄더백에 손을 넣었다. 역시 열쇠 같은 것은 없다고 숄더백 안의 손이 투덜거렸다. 숨을 불어내며 숄더백안의 손을 빼려고 할 때였다. ‘짤랑’ 차가운 금속이 무엇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하고는 다시 숄더백 안으로 손을 넣어 휘저었다. 그리고 곧 무언가 차가운 금속이 잡혔고 그것이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열쇠를 문손잡이에 넣고 돌려 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잘못되었고 자신이 그것에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또 다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항상 욱신거리는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허리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매일 어떻게 잠이 드는지 알 수 없다. 항상 10시에 잠들어 7시에 일어난다.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깨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떻게 의식을 잃고 잠에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 누워 있는 곳을 살펴보면 옷은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고 이불과 베개가 놓여있었으나 옷과 이불과 베개를 언제 갈아입고 두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마치 10시가 되면 누군가 내 정신의 건전지를 가차 없이 빼버리고 난후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과 베개를 두어 눕혀놓고는 아침 7시가 되면 빼었던 건전지를 되돌려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꿈같은 건 꾸지도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여기서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었다. 왜냐면 어차피 매번 이렇게 생각 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을 접고 이불과 베개를 걷어 방구석에 고이 두었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니 7시 1분 36초 이었다. 일하러 가기위해서는 앞으로 2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몸을 기지개를 켜 깨웠다. 그러자 몸이 이곳저곳에서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었다. 위에서도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아침을 준비하려 냉장고를 열어보니 요 며칠간 장을 보지 않아 반찬들이 변변치 않다. 나는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오늘 저녁에 장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끓는 물에 남은 된장과 며칠 전 마트에서 사온 조개를 넣었다. 그리고 선반 아래에 있던 간장을 꺼내 밥을 비벼먹었다. 어릴 때부터 즐겨 먹었던 방법 이었다. 어머니가 항상 간장에 밥을 비벼 주시니 어느 샌가 그것이 나의 기호식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 때에는 이곳에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말과 함께 나는 이곳 온 시기와 이유를 골똘히 생각했지만 이내 아침의 생각처럼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한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기억은 자세히 생각하면 머릿속에 당연하다는 듯이 떠올랐고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바람이 지나가듯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내가 언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는 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다 먹은 그릇을 대충 싱크대에 던져 넣고 양치질과 동시에 감은 머리를 말리며 장롱을 열었다. 장롱을 한번 훑어보고는 회색 블라우스와 얇은 갈색 카디건을 걸치고 블루진을 입었다. 그리고 항상 들고 다니는 숄더백을 챙겼다. 평상시 내가 즐겨 입는 옷들이었다. 전신거울 앞에서 한 번 더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머리까지 빗으로 손질했다. 나는 빈틈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무엇을 신고 갈지 고민했지만 오늘은 가볍게 운동화를 신고 나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옷하고도 잘 어울리니 말이다. 문을 열고나오니 쌀쌀한 바람이 많은 인파 속에서 옆 사람과 부딪치듯 내 몸을 지나갔다. 봄이지만 아직은 겨울이 자신의 계절이 가는 것이 아쉬워 남겨둔 으스스한 흔적이 남아있어 그런지 아직은 날이 추웠다. 


나는 몸을 움츠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바람에 흔적이 묻어 나와 내 감각을 더 괴롭힐 뿐이었다. 애써 괴롭힘을 뒤로 한 채 나는 문을 잠그고 차가운 금속을 만져 차가워진 손을 비벼 온기를 되찾았다. 계단을 내려와 태양의 따스함이라도 얻기를 원했지만 태양마저 겨울의 아쉬운 흔적에 가려 졌는지 미지근했다. 나는 내심 실망했지만 알고 있었다. 곧 이모든 것들이 겨울의 흔적을 떨쳐내고 따뜻해 질것이라는 것을.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나는 아쉬운 대로 미지근한 태양을 온몸에 받으며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걷고 나니 역시 운동화를 신고 나온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새삼 느꼈다. 집 앞 거리를 빠져 나와 사거리 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큰 거리로 나오니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많아졌다. 나는 걸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회색 정장 슈트를 입고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침, 분침 없는 시계를 바라보며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바쁘게 걸어가는 샐러리맨에게서 눈을 떼고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해 생각했다. 굉장히 평범한 출판사였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직장에는 등록번호가 있어 사원들이 그 번호로 이름이 불려 진다는 것이다. 실명을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다들 등록번호를 부르는 것을 즐겨했다. 이내 나의 머릿속에는 왜 등록번호로 부르는 것을 부르는 것을 선호할까 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고 좀 더 생각을 깊숙이 해 어째서 나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라 다를까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미끼를 물은 낚싯대를 끌어 올려 물고기를 낚으려고 하지만 이내 미끼만 쏙 빼서 먹고는 도망쳐 아무것도 없는 낚싯대를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허탈함만 남긴 생각이 끝날 때 즈음 회사 앞에 도착했다. 

“어찌되었든 이 삶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나는 회사건물 앞에서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는 말했다. 그렇다.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내가 왜 출판사에 다니는 지를, 왜 아침마다 정신을 잃는지를, 왜 이곳에 있는지를 생각해내도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을 수긍하고 살아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로비 중앙을 바라보았다. 로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 안내 데스크에서 무언가를 물어 보는 사람들 다른 사원과 얘기하며 회사복도를 걷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알 수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내가 로비에서 갈 곳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서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의식이다. 요즘 들어 자주 이렇게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예전에도 무의식에 세계로 빨려 들어간 적이 없이 않아 있었지만 연속으로 이틀을 무의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의 간섭도 받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이지만 선택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반강제적으로 무의식에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블랙홀이 다른 행성을 집어 삼키듯이. 하지만 나도 무의식에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썩 싫지는 않았다. 나만의 생각을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무의식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싫었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무의식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조절을 해야만 한다.

“안녕하세요. 353사원님 여기서 뭐하세요?”

내가 앞으로는 무의식을 자신이 컨트롤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는 동안 누군가 내 등록번호 이름을 가냘픈 목소리로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작은 체구에 눈이 큰 귀엽게 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재빨리 기억을 되새겼다. 등록번호 이름은 456 이였다. 실명은 이은이 거꾸로 해도 이름이 같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는지 꽤나 빨리 기억이 되새겼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디가세요?”

물론 업무실로 향하는지는 알겠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것이다.

“업무실로 가야죠.” 차마 어디 갈 때도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뒷말을 꾹 참으며 말했다.

“오늘 점심 같이 드실래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은이가 나에게 아니 ‘다른 사람’ 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들린다는 것은 내 귀를 의심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은이는 항상 점심밥을 먹을 때가되면 다른 사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끔 다른 사원들이 다가와 밥을 같이 먹자고 권유 했지만 그녀는 정중히 거절해왔다. 그런 이은이가 나와 함께 밥을 먹자고 권유한 그 말을 들은 것이라면 정말 내 귀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죠. 은이 씨가 제 업무실로 찾아와 주세요. 제가 바쁠지도 모르거든요.”

오늘 업무량이 적지 않아있지만 그리 바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은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시간에 맞춰서 업무실로 가죠.”

이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를 살짝 톡 치고 로비를 걸어 나갔다. 나는 한동안 이은이가 지나간 앞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잡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어제 까지만 해도 혼자서 밥을 먹던 그녀가 자신에게 밥을 먹자고 권유 했다. 나는 이은이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은이의 외형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내면은 하루아침 사이에 돌변 하였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그것은 물에 들어가 가볍게 튕겨 파동을 만들어 낸다. 그 파동은 작은 것일지는 모르지만 호수는 변해있다. 순간 나는 어젯밤 열쇠를 찾았던 순간과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같은 것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방에는 없던 열쇠가 갑자기 생겨나고 한사람의 습관이 갑자기 변하였다. 무언가 뒤틀려지고 있다. 


나는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두려움은 나의 뇌가 만들어낸 두려움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내 머릿속에 두려움을 새겨 넣는 것 같았다. 익숙하던 것들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나는 그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이미 그것은 내 몸속에 슬그머니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아 마음속을 조금씩 갈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몸을 떨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나는 헛구역질을 할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리고 몸의 떨림을 거부한 채 앞을 향해 걸었다. 내안 속에 똬리를 튼 두려움을 외면하고 사람들의 시선들도 외면 한 채 난 그저 앞을 향해 걸었다.

 

어느 샌가 나는 내 방 앞에 서있었다. 353 이라는 문의 팻말이 나를 반겼으나 인사를 무시 한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화장실로가 아침에 먹은 음식을 토해냈다. 겨우 없어졌던 열쇠가 가방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고 한사람의 습관이 바뀐 것 가지고 두려움에 떠는 나를 알 수는 없었지만 계속 토를 해대었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뱉어내기 위해서

한참동안 아침밥을 뱉어낸 나는 약간의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량의 어지러움은 내 몸속에 남아 흐르고 있었다.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계속 무결근 이였던 기록을 상실시키기는 싫었다.(언제 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의자에 앉았다. 오늘 안에 다음 달에 출판할 책을 선별해 편집장님께 드려야한다. 모니터를 켜 소설들을 분류해나갔다. 나는 어지러운 탓에 느리게 업무를 해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의 소설들을 처리해 나가자 몸에 리듬감이 생겨 좀 더 업무를 빠르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한창 일을 진행 하고 있을 무렵 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량의 어지러움과 함께 빠르게 쳐가던 키보드를 멈췄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이은이 이었다.

“353사원님 점심시간이에요.”

이은이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나는 시계로 눈을 돌렸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 25초였다.

“아 벌써 그렇게 됐네요.”

“353사원님 뭐 드실래요?”

이은이가 방을 둘러보며 나에게 말했다.

“아 저야 은이 씨가 원하는 거로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이은이는 고민하는 듯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이은이가 왜 밥을 같이 먹자고 했는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물어보자는 생각을 가지자마자 똬리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저 은이 씨는 저를 왜 사원 번호로 부르세요? 안 불편하세요?”

이은이는 표정을 풀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음 저는 이게 편하더라고요. 숫자로 부르는 거 이름보다는 숫자가 편해요. 저는”

이은이가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녀는 이 회사 사람들이 등록번호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똬리 때문인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우리 김치찌개 먹으러 갈래요? 제가 잘하는데 아는데”

“아 그러시죠. 저도 김치찌개 좋아하거든요”

나와 이은이는 회사 밖으로 나와 걸었다. 5분 즈음 걷자 김치찌개 집이 나왔다. 김치찌개를 먹고는 커피를 사 회사로 돌아갔다. 계산은 먼저 점심을 먹자고 했던 이은이가 냈다. 회사에 도착한 나는 이은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353호로 돌아왔다. 그녀와의 식사는 금방이었다. 하지만 이방을 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달라진 이은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업무는 끝내야 했다. 나는 잠시 의문의 스위치를 끄고 의자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쳐내려갔다.

 

6시가 되었고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이 회사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이다. 야근 추가업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침 분침 초침 없는 시계에서 6시가 되면 퇴근 하는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은이가 나에게 밥을 함께 먹자 하였고 나는 그 말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 이은이가 함께 밥을 먹자 그랬을까? 왜 두려움을 느낀 걸까? 나는 꺼뒀던 의문의 스위치를 켰다. 하지만 스위치의 버튼의 누름이 쓸모없는 행동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똬리를 튼 두려움이 잠들었던 눈을 뜨려고 했다. 잠시 동안은 이 생각을 안 하는 게 좋겠다. 

회사 생각을 접고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심이라 별은 몇 개만 보이기만 할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이 검은색 도화지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머릿속도 저런지 모른다. 도화지속에 반짝이는 별들은 나에게 허락된 생각이고 그 뒤의 어두운 배경은 허락되지 않은 생각이다. 나는 집까지 걸어가며 도화지를 바라보았지만 도화지는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못했고 생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었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숄더백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추슬러 낸 뒤 열쇠를 숄더백에 넣고 나갔다. 문을 닫으며 문득 지금은 숄더백 안에 열쇠가 들어있지만 장을 보고 난후 열쇠가 어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잠갔다.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봤다. 내일 아침을 만들어 먹을 재료들과 회사에 챙겨갈 약간의 과일들 그 정도였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해보니 9시15분35초였다. 집까지 걸어가는데 15분이 걸리니 열쇠만 있다면 취침시간까지는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숄더백에 열쇠를 확인했다. 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이건 분명 열쇠이다. 나는 안심하며 밝은 걸음으로 밤거리를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또 회사 생각이 슬금슬금 올라왔지만 이내 정리했다. 괜히 떠올려서는 안 된다. 이 똬리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 다잡았다. 대신 나는 내일 아침반찬으로 무얼 해먹을지 고민하며 장을 본 봉지 안을 쳐다보았다. 계란을 너무 많이 샀다. 세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란위주로 먹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세일에 혹한 자신을 꾸짖으며 일주일 내내 계란만 먹는 상상 속 모습을 떠올리며 질색을 했다. 표정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자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 앞을 보자 규탄과 질색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이미 내 머릿속은 긴장감으로 감돌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긴장감이라는 것은 똬리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가 부화해 이미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날갯짓을 충분히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다. 운동화와 철판이 만나 소리를 내어 신경이 쓰이게 했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현관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문 앞에 도착했다. 장보러 나가기 전과 같은 문 이였지만 지금 그곳에는 나가기 전과 다른 긴장감이 스며들어있었다. 숄더백에 손을 넣어 열쇠를 찾았다. 눈은 숄더백 쪽으로 향해있지 않았다. 내 손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찾기 위해서 숄더백 안을 지나다녔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차가운 금속의 촉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시야를 숄더백으로 옮겼다. 손과 눈이 힘을 합쳐 숄더백 속을 지나다녔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와 동시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시 35분 32초였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들고 있던 숄더백을 쏟았다. 철판에 물건들이 떨어져 닿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주저앉아 떨어진 물건들을 살폈다. 꼼꼼히 두 번 살폈지만 그중에 열쇠는 없었다. 나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9분 47초였다.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어느 정도 남아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어제와는 다르게 열쇠를 못 찾을 것 같았다.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흐트러진 물건들을 빠르게 숄더백 안으로 쓸어 담았다. 번뜩 어제처럼 행동하면 그렇게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어제와 최대한 똑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문손잡이를 뚫어져라 쳐다본 후 숄더백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열쇠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45분 12초였다. 시간이 엄청 빨리 간다고 느꼈다. 초조함은 더해져 갔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무리 생각을 해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마치 두뇌가 고장 난 자전거처럼 헛돌기만 할뿐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를 못했다.

두려움에 떨며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자 9시 56분 35초였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결국 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런데 철컹 소리가 나지 않고 손잡이는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옆으로 돌려졌다. 문이 열려있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재빠르게 집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꿈을 꾸었다. 어떤 한 남자가 나왔고 내가 있었다. 그는 나와 함께 팔짱을 끼고

웃고 떠들며 저녁노을이 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와 그는 어느 한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나와 어느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곳은 2층 복합 주택이었고 그의 집인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우리 둘은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곧바로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내가 화를 내기 시작했고 몇 번의 말다툼을 끝으로 그의 눈은 이미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깊고 어두워 그녀는 움찔했다. 그는 슬픔과 분노의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고 나갔고 문이 닫혔다.

 

눈을 떴다. 눈을 뜬 채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꿈을 꾸었다. 이곳에서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 또한 이곳의 섭리였는데 꿈을 꾸었다. 열쇠분실에 이어 또 다른 섭리가 틀어진 것이다. 나는 어떤 남자와 저녁노을을 함께 걸었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그의 집으로 보이는 곳으로가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그 행복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나의 분노로 인해 싸움이 났다. 그리고 몇 번의 말다툼으로 그가 나가버렸고 꿈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꿈을 정리한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뜨고 백지인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꿈을 꿨다는 사실과 꿈의 느낌에 대해 약간의 충격이 들어와서 그런 것이다. 그 꿈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그것이 허구가 아닌 실제로 겪은 일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되찾았고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샤워부터 해야 한다. 나는 몸을 일으켜 땀에 젖은 이불과 베개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옷을 벗었다. 굉장히 찝찝하고 불쾌했다. 어서 이것들을 때어내고 싶었다. 옷을 다 벗고는 바로 샤워실로 뛰어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온수가 나의 몸을 타고 내려가자 몸속의 찝찝함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샤워를 하며 꿈에 대해 생각했다. 꿈속의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최대한 그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지만 쉽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우선은 그녀의 회사에는 그런 사람은 없다. 길가다 만날 수도 있겠지만 꽤나 훌륭하게 생겨 쉽게 잊어버릴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샴푸를 짜내어 거품을 만들어내 머리를 감았다. 


샴푸로 머릴 감으며 나는 다른 방면으로 생각을 시도했다. 그가 왜 내 꿈에 나왔는가. 그전에 왜 나는 꿈을 꾸었는가. 문득 나는 열쇠와 이은이의 사건을 떠올렸다. 갑자기 무언가 뒤틀린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조금씩 뒤틀린 느낌. 똬리가 반응했다. 불쾌감과 찝찝함을 없애주던 따뜻한 온수는 방울 하나하나가 나의 몸을 때리는 쇳덩이 같았다. 나는 물을 틀어놓고는 젖은 상태로 샤워 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맹수를 본 한 마리의 작은 짐승처럼 샤워 실을 되돌아보았다. 저곳에서 꿈에 대한 근원지를 찾아 헤맸고 그러자 무언가가 뒤틀렸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 물을 틀어 논 샤워실의 문을 닫고 불을 껐다. 수도세가 많이 나오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나는 쇳덩이에 혐오감을 가진지 오래였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로 검은색의 가벼운 트레이닝 복을 꺼내 입었다. 물기의 축축함이 옷에 묻어 조금 찝찝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나는 방안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주변이 조용해 졌고 샤워기에서 나온 쇳덩이들이 떨어져 욕조에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왜 자꾸 이러는 걸까. 그저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인데 그 생각을 하는 것을 이곳은 허락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은이 열쇠 꿈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모든 걸 때려 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의 방에서는 그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 방의 팻말의 이름은 본능이었다. 그 방에 있는 것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심어주었다. 알고 싶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 방의 문을 잠그려 한다. 왜일까. 

 

나는 방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이유를 생각하다 회사생각에 눈을 떴다. 이것 또한 그렇다. 어째 생각을 하면 그것과는 다른 것이 떠오르니 문제다. 이것도 아마 이곳의 계략일 것이다. 나는 자연스레 시계로 눈을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8분 이였다.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해도 이미 늦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나는 회사 갈 기분이 아니었다. 기분이 정리되자 전신 거울 옆에 있는 집전화기로 다가갔다. 회사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대자 신호음이 들렸다. 3번의 신호음이 지나자 누군가 받았다. 아마 안내데스크일 것이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회사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덤덤하게 알았다고 하였고 언제 즈음 나오나 물었다. 나는 조금 고민을 했지만 이왕 쉬는 김에 오래 쉬고 싶었다. 한 달 정도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더니 안내원은 그러면 이번 달 월급은 없는 걸로 하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대신 다음 달 1일 부터는 나와야 한다 말하고는 끊어버렸다.


나는 자신의 회사가 독특해 다행이라 느꼈다. 어느 나라에도 이런 회사는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다짜고짜 나가지 않겠다고 일순간 말을 해버린 나에게도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는데 회사 쪽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니 나는 더욱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동안 수화기를 바라보다 전화기를 놓고 뒤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고 눈을 떴을 때와 같은 천장이다. 나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천장을 노려보았지만 내가 먼저 눈을 감아 눈싸움에서 져버렸다. 눈싸움에진 나는 몸을 일으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선택지를 줄여나갔다. 밥을 먹을까 생각했지만 뒤틀린 느낌과 똬리 때문인지 밥맛은 없었다. 샤워를 다시 할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결국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산책이 자신의 기분과 잡생각을 그나마 낫게 해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트레이닝 복을 잠시 벗어두고 속옷을 입은 후 옷을 다시 입었다. 그리고 숄더백은 챙기지 않았다. 그저 이쪽 주변만 돌아다닐 거니 숄더백은 필요 없다. 다만 약간의 현금을 챙겼다. 밖에 나갔을 때 어떤 것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전신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체크한 후 신발장 위에 올려 두었던 열쇠를 챙겨 나갔다. 문을 열자 조금은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이틀 전만 해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어느새 봄이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 나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어딜 가든 열쇠를 놓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주머니에 든 열쇠를 꼭 쥐며 집 앞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을 때 바람이 불어 기분을 좀 더 완화 시켜주었다. 집 앞거리를 나와 골목길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내가 살고 있는 복합 주택이 자리 잡은 곳은 사이사이 골목길이 나있어 미로와 비슷했다. 나는 산책할 때 그런 미로 같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큰 골목길이 있는데 그곳에서 쭉 들어가면 작은 공원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항상 산책을 나갈 때마다 공원에 들렸다. 


이번에도 역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해 그네에 앉아 그네를 탔다. 그네를 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이 슬은 미끄럼틀, 작은 모래사장에 삐거덕 거리는 시소, 낡아 빠진 공원의자 그중에서 그네가 제일 나았다. 조금 오래 쥐면 손에서 쇳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공원에 있는 것들 중에서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네까지 타며 즐거움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나는 앞뒤로 그네를 움직이며 그네를 선택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에 생각에 힘입어 그네를 좀 더 세게 타기로 하고 허리에 힘을 주어 그네를 움직였다. 반동에 의해 그네는 앞으로 나갔다 뒤로 오며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무엇의 형체가 보였지만 그네는 금방 내려가 버렸다.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올라가 형체를 확인하자 사람이었다. 


덩치로 보아 남자인 것 같았다.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네는 다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그네는 진자운동을 한다. 그네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얼굴을 확인했다. 그다. 꿈에 나온 그다. 나는 시간이 멈추는 걸 느꼈다. 그네는 내려가지 않고 걸어가던 그도 멈춰있었다. 어느 것도 움직이지 못했고 멈춰져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있게 되어있다. 그렇게 세상은 설정되어있다. 아무리 이곳이라도 세상이 맞춰놓은 설정을 거부하거나 바꿀 수 없다. 설정이 다시 조작되어 시간이 움직이자 나는 당황거리다 그네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하지만 엉덩이는 아프지 않았다. 대신 머리가 아파왔다. 그가 살아있다. 게다가 내 옆을 지나갔다. 솔직히 나는 그가 이곳이 나의 생각을 억제시키기 위한 창조물에 불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숨을 쉬며 작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모래가 묻은 엉덩이를 털지도 않고 그 골목길로 뛰어갔다. 골목길에 도착하자 길의 끝에서 그가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그에게 뛰어갔다. 바지 속에 들어가 있는 모래 알갱이가 바지 안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따끔거렸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내가 오른쪽 골목길로 돌았을 때 그는 이미 그 골목길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보통 걸음걸이로 걷는 것 같지만 속도는 보통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가 왼쪽으로 돌아 그를 확인하니 그는 3차로의 길의 갈림길의 중간에서 서있었다.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좁혀져갔다. 하지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똬리가 반응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간 뒤틀림이 시작될 것 같았다. 어느새 발은 이미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굳어 있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손발이 저려왔다.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완벽하게 막아 놓은 상태였다. 멈춰있던  그는 3차로에서 왼쪽 골목길로 걸어갔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똬리는 썰물 빠지듯 뒤로 밀려나갔다. 그제야 굳었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거친 숨을 뱉어내던 나는 아차, 싶어 왼쪽골목길로 달려갔으나 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숨을 헉헉거리며 한동안 그가 사라진 거리를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한 나는 그 와중에도 꼭 쥐고 있던 열쇠를 꺼내들었다. 열쇠에는 손에 난 땀이 묻어 미끌미끌 거렸다. 미끈거리는 열쇠로 문을 열고 손잡이를 돌리려고 하자 아직 손에 땀이 남아있어서 손잡이는 제대로 돌려지지 않고 헛돌았다. 나는 열쇠를 빼 주머니에 넣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들어가자마자 먼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집안에 있던 답답함 들이 나가고 대신 신선한 공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숨이 트이자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불쾌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고 꽤나 빠르게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내 몸이었다. 식은땀이 옷과 속옷에 스며들어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쇳덩이를 맞아가면서까지 할 정도의 냄새는 아니었다. 나는 트레이닝복을 벗어 던졌다. 


옷을 벗자 열어놓은 창문에 의해 바람이 들어오면서 맨살에 스치며 지나갔다. 몸에 매달려있는 땀들이 빠르게 식어갔다. 추위를 느낀 나는 아침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베개와 이불을 가져왔다. 땀이 말라 이불과 베개에서도 약간의 불쾌한 냄새가 났지만 방구석에 뭉쳐져 있는 저 트레이닝복보다는 참을 수 있었다. 나는 이불을 깔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그걸 막아주는 이불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를 맞췄다. 나는 알맞은 온도에 누워있자 천장을 바라보던 눈이 점점 감겨 져 오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를 뒤쫓기 위해 움직였던 근육들의 긴장이 풀리자 나른하고 축 처지는 기분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결국 그것들이 만드는 포근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낮인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로 잠을 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깊고 어두웠다. 사방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깊은 곳의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무기력감이었다. 그 느낌이 나를 잡아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자 발버둥을 쳐댔다. 

 

눈을 떴다. 나는 어두운 곳에서 드디어 해방이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곧 이상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어둡다. 나는 일순간 자신이 눈을 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뇌의 통제에 의해 그 바보 같은 생각은 기각되었다. 꿈속의 어둠에서 도망쳐 눈을 떴으나 그곳에도 어둠이 도래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아직도 꿈속인가 생각했지만 문득 그녀는 이게 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것이 밤이라는 걸 깨달았어도 내가 이불 속에 누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둠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열려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밤의 바람은 이불과의 호흡을 무시하고는 적당하게 유지해오던 온도를 파괴해버렸다. 균형이 흔들리자 밤의 바람이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와 나를 은근슬쩍 콕콕 찔러대어 쌀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밤바람의 괴롭힘 말고도 한 가지 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무기력감이었다. 꿈에서 느꼈던 갑자기 힘이 빠지는 무기력감이 아닌 공포에 눌려 생기는 무기력감, 즉 밤의 어둠은 그녀가 마치 굶주린 사자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 상황을 연출한 것이었다. 게다가 똬리까지 합세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었다. 


누워있던 나의 머릿속에서는 경보음이 작동했다. 위기감을 느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무기력감과 똬리의 기습에 당황한 나의 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거미줄과 나비 같다고 생각했다. 나비는 꿈을 꾼다. 거미줄에 걸리는 꿈을 그러나 그것은 꿈에 불과할 뿐 나비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뜬 나비는 날갯짓을 해 날아가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나비는 거미줄에 걸린 채 거미줄에 걸린 꿈을 꾼 것이었다. 그리고 나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버둥 치지만 이미 거미는 줄의 움직임을 느끼고 다가오고 있다. 현재 내가 그런 상황인 것이다. 나는 거미줄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거미줄은 몸을 휘감았고 거미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비에게 도착한 거미는 다가가 양분을 먹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아무것도 못한 채 무기력감과 똬리에게 먹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런 고통 속에서 거미가 나를 거의 먹어 치웠을 무렵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그였다. 그를 만나러 가야한다. 이 방을 떠나 밤거리로 나가 그를 찾는 것이 생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 일이 떠오르자 나가기위해 거미줄을 조금씩 뜯어냈다. 몸을 일으켜 쭈글쭈글해진 트레이닝복을 다시 입고(가장 먼저 눈에 띈 옷이 트레이닝복이었다.)열쇠를 찾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재빨리 돌아서 열쇠로 문을 잠그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현관문에 기대어 앉았다. 나비는 공포와 무기력감속에서 탈출한 것이다. 나는 아니 나비는 자신을 먹으려던 거미를 뒤로한 채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나비는 어느 정도 도망치자 철판에서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기 위해 이곳저곳을 살폈다. 바짓단이 돌돌 말려 올라가 있었고 져지는 지퍼를 반밖에 올리지 않아 속옷이 비쳤다. 머리카락은 산발을 뛰어넘어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나는 재빨리 지퍼를 올리고 바짓단을 내리고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 누군가 있는지 확인했다. 원래 낮에도 사람이 적은 거리지만 혹시 밤의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 나의 해괴망측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느끼며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또다시 누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게 아닌 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의 밤의 거리는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어둡지는 않았다. 달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노란색의 페인트가 거리 전체에 칠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달은 밤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빛이 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달은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구름 뒤로 살짝 숨어버렸다. 나는 달이 구름 뒤로 숨어버리자 장난감을 빼앗겨 버린 어린아이처럼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거리로 옮겼다. 애초부터 거리로 나온 이유는 달이 아닌 그를 찾기 위해서였다. 공포와 무기력감이 나를 지배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 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 덕분에 거미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를 찾으러 나서야한다. 나는 거리에서서 잠시 생각하다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원에 도착하자 바로 그네로 향했다. 집밖으로 나와 막상 그를 찾으려고 하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를 처음으로 발견했던 곳이 공원이었고 그네를 타다가 발견했으니 그 방법 그대로 하는 것이 지금 그를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공원으로 향한 것이었다. 나는 공원 끝자락 있는 그네로 가 천천히 그네를 탔다. 처음에는 작게 움직이던 그네가 허리에 힘을 주고 타자 크게 진자운동을 하며 바람을 갈랐다. 높이가 꽤 높아졌을 때 나는 고개를 골목길 쪽으로 돌려 무언가 있는지 확인했다. 나의 눈에 포착된 것이라곤 하얀색의 물체였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더 올라가 확인하지 않고 그네가 내려가던 도중 뛰어내렸다. 완벽한 착지를 하고 골목길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나는 그라고 확신한 것이었다. 확신이 찬 이상 기꺼이 다시 올라가 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골목길에 도착하자 나의 확신이 증명되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블루진을 입은 그는 역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것이라곤 낮보다는 걷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은 빠르게 걸으며 나는 그를 따라갔다. 나는 초조해 하지 않았다. 낮이 아닌 밤이 된 이곳의 환경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마음이 들뜬상태였고 그를 지켜봐주는 달이라는 조력자가 있어서 그런지 든든했다. 그는 낮과 같은 거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레 그를 뒤쫓아 갔고 결국 그를 잡지 못했던 3차로 골목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역시 낮과 마찬가지로 그는 3차로 중간에서 서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움직이던 발을 멈추었다. 괜찮다. 그리 급하게 쫓아가지 않아도 된다. 괜히 낮처럼 이때다 싶어 쫓아갔다간 똬리가 이 들뜬 마음을 제치고 튀어나올 것이다. 한동안 서있기만 하던 그는 왼쪽으로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도 멈춰있던 발을 떼 뒤따라갔다. 


왼쪽 골목길에서 그를 뒤따라가 나온 곳은 번화가 쪽 거리였다. 하지만 번화가에는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동차는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건물들은 조용했다.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오직 이 밤의 이곳에 있는 것은 그와 나뿐이었다. 왜 밤의 이곳에는 그와 나뿐인가. 그 많던 사람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나의 머릿속에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번화가거리로 나온 그는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새롭게 나타난 이 의문들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헤집고 다니는 두 녀석을 붙잡고 한쪽 구석에 묶어두었다. 묶인 녀석들은 밧줄을 풀려고 했지만 묶은 밧줄인 그라는 밧줄이 생각보다 단단해 풀 수 없었다. 녀석들은 밧줄을 풀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얌전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둘에게 말했다.

‘얌전히 있어 나중에 생각해 줄 테니까 우선 그가 먼저야.’

그러자 녀석들은 알아들었는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머릿속의 어지러움을 해결하고 멀어져 가는 그를 다시 뒤쫓아 갔다.

그는 번화가를 걷다가 또다시 다른 골목길로 들어갔다. 나는 그를 뒤쫓아 가며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거리였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그가 골목길로 들어갔고 골목길로 들어간 그를 따라가자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꿈에 나온 거리였다. 꿈속에서 그와 내가 함께 웃고 떠들며 걸었던 거리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걸어가고 있는 이 거리의 종착역은 그의 집일 것이다. 내가 마지막 종착역이 그의 집이라는 걸 깨닫자 똬리가 사슬을 내뿜어 다리를 휘감았다. 나는 낮처럼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라가면 나오는 곳이 그의 집이라는 걸 알았을 뿐인데 똬리가 갑자기 반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여기는 절대로 안 된다는 듯 확고하고도 양보할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또다시 그를 놓쳤다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똬리의 제어를 저항하며 발을 조금씩 움직여갔다. 똬리는 당황했다. 자신이 나오면 항상 공포에 떨더니 저항의 태도를 보이자 주춤한 것이었다. 그런 똬리의 주춤거림이 나의 발에 걸린 사슬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발을 묶어두는 사슬이 느슨해지자 더욱더 힘을 가해 발을 움직였다. 힘이 들고 몸은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내 사슬을 떨쳐 내었고 그것이 처음으로 똬리를 통제한 순간이었다. 똬리는 나의 저항과 끈기에 물러났지만 마지막에 경고를 주었다.[나는 분명 너를 막으려고 했다. 이이후로 생기는 일에 후회하지 마라. 그렇게 똬리는 뒤로 물러났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뒤로 물러난 채 나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똬리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거리의 어둠속으로 사라진 그를 재빨리 뒤쫓아 뛰어갔다.


골목길의 끝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것은 주택의 2층 계단을 올라가는 그였다. 나는 주택으로 달려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문을 닫고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 개씩 열어봐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복도 맨 끝 집에서 가냘픈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발을 움직여 비명소리가 들렸던 복도 맨 끝 집으로 달려가 문 앞에 섰다. 비명소리가 난 집 치고는 안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좀 더 소리를 듣기위해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손은 자연스레 손잡이로 향했다. 닫혀있는 줄 알았지만 문을 매끄럽게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했다. 지금은 조용하다지만 비명소리가 들렸던 집이다. 문을 열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내가 마치 TV채널 쇼에서 하는 물건 맞추기 게임을 하는듯했다. 검은 상자에 든 물건을 맞추는 쇼였다. 그 쇼에 나온 게스트들이 검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맞추려고 하지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 공포를 떤다. 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호들갑을 떨었던 게 창피할 정도로 상자 안에든 물건은 한심하다. 물건이 공개되면 쇼는 호들갑을 떨었던 게스트를 놀리고 웃고 떠들며 쇼를 끝맺는 그런 TV쇼였다. 나도 그런 쇼처럼 자신이 맞추고 있는 이 상자 안에 든 물건이 별것 아니기를 바랐다. 창피를 당해도 되고 놀림을 당해도 되니까 그저 안에 든 것이 한심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나는 상자의 막을 열었다.

 

나는 상자의막을 열어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허리에 칼이 박힌 채 다량의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여자와 하얀 와이셔츠에 가득히 피를 묻히고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였다. 나는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목이 시큰거렸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절대로 한심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웃고 떠들던 TV쇼는 정지 버튼이 눌러진지 오래였다. 그가 문이 열린 쪽을 바라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공포에 떠는 얼굴이었고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걸 봤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은 서로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하면서 정적이 흘렀고 먼저 정적은 깬 사람은 그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내가 있는 현관문 쪽으로 다가오려고 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느끼자 문을 세게 닫아버리고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생존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무작정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듯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온몸의 근육들은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나는 몸이 질러대는 비명소리에 멈춰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가쁘게 숨을 내쉬었고 들이마셨다. 심장은 마구 펌프질을 해대며 몸 이곳저곳으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힘을 썼고 얼굴에서는 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뒤에서 그가 쫓아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피에 젖어있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똬리가 나를 비웃는듯했다.[난 분명히 너를 말렸었다. 그러나 네가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만들어낸 결과가 이거다.] 나는 애써 똬리의 비웃음을 못들은 척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피해 무작정 달려오느라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공원이었다. 달리다보니 몸이 익숙한 곳으로 온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제 곧 집으로 갈수 있다. 나는 다행이라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들이 또 움직이는 것이냐며 화를 냈지만 나는 이제 곧 집으로 갈수 있다며 근육들을 달래었다. 그렇게 몸들을 달래며 공원을 가로 질러 집으로 향했다.

 

집 앞거리에 도착한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듯 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몸들도 뇌의 안심에 축 늘어졌다. 마지막으로 뒤를 확인하며 2층 계단을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달빛이 짙은 구름 뒤로 숨어 거리에 빛이 비추지 않았다. 대신 어둠속에서 작게 뛰어오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발자국 소리는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급격하게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에 얹혀져있던 발과 난간을 잡고 있던 손, 나의 모든 것이 굳어져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굳어져 가던 정신을 되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석고상처럼 굳어져 가는 몸을 움직여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 발자국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을 때 그는 어둠속을 헤치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달도 짙은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노란색 빛이 거리를 강타했고 그의 모습이 좀 더 밝게 들어났다. 그는 아까전보다 다량의 피를 온몸에 바르고 있었고 손에는 그 여자를 찔렀던 칼이 들려져 있었다. 아마도 나를 쫓아오기 전에 그 여자의 몸속에서 칼을 빼낼 때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는 멍한 눈으로 2층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나와 그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정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비명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손잡이의 열쇠구멍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은 이미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계단의 중반까지 올라와있었다. 더욱더 당황해 하며 열쇠를 넣으려고 했지만 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을 느끼다 눈을 감고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다듬고는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열쇠를 넣고 돌렸고 ‘철컥’이라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이 풀렸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며 문을 열려고 했지만 어느 사람의 그림자가 눈앞을 뒤엎었다. 나는 벌벌 떨리는 고개를 겨우 들어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했다. 그였다. 그는 피 묻은 칼을 든 채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맨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못 볼 것을 봐버렸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 깊고 어두웠다. 그때 나에게 익숙하게 다가온 것이 하나있었다. 무기력감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겪어왔던 무기력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숨을 쉬기에도 벅찬 그런 느낌이었다. 발악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이미 또 다른 거미줄에 걸려있던 것이었다. 나비는 거미에게 도망쳐 날아갔지만 날아가던 곳의 종착역은 또 다른 거미줄이었다. 게다가 그전의 거미줄보다 두세 배는 큰 거미줄이었고 그 거미줄에 사는 거미 역시 더욱더 무서웠고 잔인했다. 결국 그 나비는 거미에게 먹혀버릴 것이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칼을 들고 있던 손을 들었다. 칼날이 달빛에 비추어 노란색으로 반짝거렸다. 노란색으로 빛이 나던 칼은 나를 향해 내려왔다. 나는 최대한 막으려고 팔을 들었지만 칼은 냉혈하고 무자비하게 허리에 박혔다. 허리에 칼이 꽂힌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박혀있는 칼을 만지었다. 아프지 않았다. 분명 칼이 허리에 박혀져 있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피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리에 칼이 박혀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감정도 전해주지 못했다. 다만 잠이 올뿐이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졸음이었다. 수면제를 먹은 듯 정신은 몽롱했고 눈꺼풀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결국 눈이 감겨오기 시작했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달빛에 비치던 그의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은 웃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그녀는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그와 내가 싸우기 시작할 때부터의 내용이었다. 내가 그에게 화를 내다가 그는 절망의 눈빛을 보내었고 슬픔과 분노의 표정으로 방문을 나갔다. 문이 닫혔고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와 사랑을 나눴었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문이 다시 열렸고 나는 그가 다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을 걸려했지만 허리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동공이 확대되었고 나는 시야를 아래로 내려 허리를 확인했다. 칼이 박혀있었다. 그가 나의 허리에 칼을 찌른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던 침대에서 하얀색 카펫위로 쓰러졌다. 하얀색 카펫이 빨간색이 묻었다. 피는 그 카펫에 자신의 영역을 점점 확장해갔다. 나는 감기는 눈을 위로 향하였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웃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힘은 빠져갔고 결국 또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다. 눈앞이 흐릿했다. 앞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흐릿했던 눈앞이 보이자 가장 맨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형광등이었다. 형광등 두 개가 반짝거리며 눈을 뜬 나를 반기었다. 두 번째로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것처럼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모습을 살폈다. 약간의 약품냄새와 내 입 주변에 쓰여 있는 산소마스크 그리고 팔에 연결되어 있는 링거로 보아 병원인 것 같았다. 아마 그에게 찔린 칼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확실하게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게 느꼈다. 그러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했다. 경찰에게 잡혔을지 아님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을지 하지만 결국 그는 잡힐 것이다. 잡힌다면 피해자 한명을 살해하고 한명은 흉기로 찌른 채 도망갔으니 꽤나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드르륵’이라는 소리와 함께 병실의 문이 열리며 어떤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그 인줄 알았지만 전혀 다르게 생긴 남자였다. 다부진 몸에 얼굴은 평범하다. 게다가 상당히 젊은 것 같았다. 그는 병실로 들어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와 그는 눈이 마주쳤고 그 젊은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김창수 살인 사건 용의자가 눈을 떴습니다. 반장님!”

김창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나저나 저 젊은 남자는 왜 날 용의자라고 부르는 걸까. 칼에 찔려 병원에 쓰러져 있는 것은 정작 나인데 말이다. 아마 잘못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젊은 남자가 소리치자 중년의 늙은 남자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역시도 약간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인가?”

중년의 남자가 내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남자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년의 남자는 조금씩 다가오더니 깨어있는 나를 보고는 말을 걸었다.

“정신이 좀 드는가?”

중년의 남자의 말투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아직 정신은 몽롱 한 상태였다. 중년의 남자는 내가 애써 대답하려는 자세를 보이자 움찔하며 나를 말렸다.

“아 됐네. 무리하지 말게 천천히 하게 정신이 좀 들면 말해도 되네.”

그러자 젊은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년남자에게 다가갔다.

“지금 사건해결이 시급한데 어째서 더 추궁을 하지 못할망정 그냥 내버려 두시다니요.”

중년의 남자는 오히려 젊은 남자에게 화를 냈다.

“혹시 지금 압박이라도 가해 용의자가 쇼크라도 먹어서 다시 쓰러지면 자네가 책임 질 텐가?”

중년남자의 질문에 젊은 남자는 당황스러워 하며 대답을 못했다. 이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담배 한 개비 피러 갈 테니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부르게”

중년의 남자는 병실을 나갔고 젊은 남자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중년의 남자가 사라지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방금 저 둘이 만들어낸 상황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들이 자신에게 용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피해자다. 밤에 처음으로 일어나던 날 나는 달빛아래 그가 휘두른 칼에 허리를 맞고 쓰러진 피해자다. 그런 피해자인 나를 용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두통이 심해져 왔다. 똬리의 느낌도 아니고 무기력감도 아닌 그저 두통이었다. 그러나 그 두통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심해져 갔고 나는 침작하자고 자신에게 말하며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으로 조금 두통이 정리가 되자 나는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을까 해서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캐비닛이 여러 개가 보였고 위쪽에는 아직은 사용할 때가 아니라 그런지 약간먼지가 쌓여 있는 에어컨이 보였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가 보였고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커튼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좀 더 시야를 위로 올리자 시계가 보였다. 1시 32분 14초를 지나가고 있었다. 애써 힘을 들여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떠한 정보도 얻어 내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병실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숨을 불어내며 낙심을 하려고 할 때 이때까지 살폈던 물건 중에서 위화감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는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다시 쳐다보았다. 물론 시계는 시간을 말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시계에는 침들이 박혀 숫자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화감은 이거였다. 시계에 시침 분침 초침이 정확하게 박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곳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문득 나는 진정 시켜 놓았던 두통이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강한 두통이었다. 


나는 느껴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움켜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병실 문이 세차게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는 나를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복도를 향해 의사를 불러댔다. 그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난장판을 피우는 나를 제어하려고 팔과 다리를 잡았다. 하지만 나는 들썩거리며 팔과 다리를 뿌리치려고 했다. 젊은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중년의 남자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중년의 남자가 10분 뒤에 도착하고서야 두통의 발작을 멈추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한숨을 돌리고 의사가 간호사들에게 말을 걸었고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는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에 대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통을 끝으로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대해서 그리고 이곳에 오기전의 그곳에 대한 전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입 꼬리는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나의 괴상망측한 표정을 그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숨죽여 지켜보았다. 한참동안 그런 괴상망측한 표정을 짓던 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 눈을 감았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수면제.......수면제 좀 주세요.”

내 목소리는 마치 가뭄이 찾아와 다 갈라진 밭처럼 말랐고 퍽퍽했다. 그런 목소리를 힘겹게 내는 듯 했다. 하지만 나의 그 안쓰러운 목소리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면제 내놓으라고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나는 절규하듯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움찔거렸다.

“수.,,수면제요?”

어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의사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래요.......수면제요.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잠들 수 있게 수면제 좀 주세요. 자지 않았다간 죽을 것 같아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나의 눈에는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물어 볼 것도 많고 대답해주셔 할 것도 많습니다.”

의사가 수면제를 가지러 가는듯한 행동을 보이자 젊은 남자가 그를 막으며 말했다.

“제발.......제발 부탁이니까 잠자게 해주세요. 일어나면 뭐든지 대답해 드릴게요.”

나는 목숨을 구걸하듯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안됩니다. 저희가 당신을 맨 처음 발견했을 때도 당신은 수면제를 먹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것이 오늘, 발견 했을 때부터 약 두 달 만입니다. 또 수면제를 먹고 정신을 잃으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젊은 남자는 내 구걸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나는 선반위에 올려져있던 과도에 목을 댔다.

“수면제! 수면제를 가져오란 말이에요! 안 그러면 여기서 죽어 버리겠어.” 

내가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자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려고 다가왔으나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나는 과도를 목에 가깝게 대었다. 이내 과도에 살짝 베였는지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어서 수면제를 가져와 저러다 진짜로 자살하겠어!”

중년남자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중년 남자의 외침에 놀란 의사가 간호사들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자 지금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시켰으니 진정하고 그 칼 내려놓으세요.”

중년의 남자가 조금씩 나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다가오지 마! 빨리 수면제를 달란 말이야!”

나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소리치며 과도를 목에 깊숙이 댔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많은 피가 흘려 내렸다. 내가 소리치며 칼을 가져가 대었을 때 간호사가 병실 문을 다급하게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수면제통이 들려있었다. 간호사는 침대위에 앉아있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떨면서 통을 건넸다. 나는 수면제통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통을 입에 대고는 통속에 있는 모든 수면제를 들이부었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 놀라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물로 약들을 억지로 넘겼다. 말려도 최소 약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약들을 모두 넘기자 바로 뒤로 쓰러졌다. 내가 침대위로 쓰러지자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들어 수면제를 뱉어내게 하려고 했지만 입을 굳게 다문 나에게서 약들을 다시 뱉어내려고 하는 짓은 통하지 않는다. 다량의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어서 그런지 효과가 금방 드는 것 같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나의 몸을 만져대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시야에서 흐려지기 시작했고 뇌는 젤리가 된 듯 말랑거렸다. 나는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서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창수씨. 곧 갈게요.” 

나는 눈을 감았고 기분은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행복했다. 그런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몽롱한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도 아니었고 나를 살리려고 하는 병실 사람들의 다급함도 아닌 침들이 박혀있는 시계의 째깍거림이었다. 그리고 점점 느리게 뛰어져가는 나의 심장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그가 웃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고 나는 그의 품속으로 안겼다. 그리곤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잠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제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고 있을 때 느낀 것은 그의 품에 안겨 웃고 있지만 눈물을 흘리는 괴상망측한 표정이었다. 

 

[에필로그]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잠시 동안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다 아직 자고 있는 몸들을 일으켜 깨웠다. 약간의 신음소리가 입에서 흘렀다. 나는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2분 정도였다. 회사에 출근하기 까지 2시간 정도 남아있다. 시간을 확인한 난 하품을 해대며 부엌으로 갔다. 몸을 깨우자 배에서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향하며 서랍장 위에 있는 액자에게 인사했다. 액자 속 사진에는 나와 남자친구인 김창수가 다정하게 찍혀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냉장고 안은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휴일인 내일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을 끓였고 끊는 물에 남은 된장과 마트에 가서 사온 조개를 넣었다. 그리곤 밥솥에 들어있던 밥을 퍼 담은 후 간장을 한 큰 술 넣어 비벼 먹었다. 어릴 적 엄마가 바쁘실 때 마다 자주 만들어 주시던 거라 어느새 기호식품이 되어버렸다. 


남자친구인 창수에게도 이렇게 먹는 것을 권했지만 그는 어떻게 이렇게 짜게 먹을 수 있냐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밥을 다 먹고는 양치질을 하며 감은 머리를 말리었다. 머리카락과 양치질을 끝낸 다음 화장까지 다한 그녀는 장롱을 열어 한번 훑어보고는 회색 블라우스와 얇은 갈색 카디건을 걸치고 블루진을 입었다. 내가 평소 자주 입던 방식이었다. 나는 전신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카락은 빗으로 가지런히 빗었고 옷은 매일 보던 거지만 정말 예쁘다. 나가기 전 나는 숄더백과 열쇠를 챙겼다. 신발은 무엇을 신고 나갈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내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봄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봄바람의 괴롭힘에 몸을 움츠리며 문을 잠갔다. 열쇠는 숄더백 안으로 넣었다. 잠가진 문을 뒤로 2층의 계단을 내려가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내심 따뜻한 태양을 원했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태양은 미지근했다. 내심 아쉬웠으나 아직 2월 달이니 태양도 바람도 겨울이 남겨두고 간 흔적에 가려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었다. 그리고 4월 달 즈음이 되면 그 흔적들을 떨쳐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믿음을 가진 계단을 내려와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큰 거리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출근길을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고 도로변에는 정체되어있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회색 정장 슈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시간을 확인하며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그를 바라보다 아차 싶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이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출판사까지 와의 거리는 뛰어가면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었고 지금 속도로 걸어가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뛰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아슬아슬하게 맘 졸이며 걸어가는 것보다는 뛰어가서 확실하게 지각을 면하는 게 낫다. 


나는 뛰어가며 운동화를 신고 나오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출판사 앞에 도착하자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5분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로비로 들어갔다. 내가 로비를 가로 지르며 엘레베이터로 향하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건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이은이가 서있었다. 이은이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였으며 성적이 비슷하고 꿈이 같아 같은 대학 같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오늘 점심 뭐먹을까?”

이은이가 대충 던지듯이 말을 걸었다.

“몰라 너 먹고 싶은 걸로 정해.”

나도 귀찮듯 대답했다.

“어 그러면 김치찌개 먹으러가자 나 맛있게 하는 집 알아 저번에 아는 오빠랑 같이 갔었는데 맛있더라고 우리 회사 랑도 가까워.” 

이은이는 원래부터 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이었다. 아마 내가 무엇을 먹을까 라는 질문에 어떤 음식을 대답했었더라도 이은이는 내 의견을 묵살하고 김치찌개로 밀고 나갔을 것이었다.

“어 알았어. 그러면 네가 나중에 점심시간 즈음 되면 내 자리로 와. 나 오늘 조금 바쁠지도 모르거든.”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응 그러면 내가 점심시간 맞춰서 내려갈게”

그렇게 대화를 끝낸 나는 3층에서 내리고 이은이는 4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리까지 나있는 긴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자리에 도착해 앉아 책상의 모서리를 쳐다보았다. 책상 모서리에는 353이라는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이 모서리에 붙어있는 스티커는 우리 회사만의 명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사원들의 책상마다 숫자 스티커가 붙여있는데 이는 회사원들의 능력순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매년 말에 순위가 500위아래 있는 사람은 다 해고당하는 방식으로 이회사의 연봉이 높은 이유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봉이 높은 것에는 만족해했지만 해고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이 시스템이 현재 사회의 양육강식의 잘 표현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방 보다 능력이 있어야한다. 그게 사회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 회사는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해고당하는 시스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은이가 떠올랐다. 저번에 이은이의 자리에 가보니 456이라는 숫자가 모서리에 떡하니 있는 것을 생각해냈다. 아직 2월 달인데 벌써 456위라니 심각하다. 나는 해고위기의 이은이를 걱정하며 컴퓨터를 켰다.

 

내가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책상에 노크를 했다. 빠르게 쳐내려가던 키보드를 멈추고 위를 쳐다보자 이은이가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0반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은이와 함께 김치찌개 집으로 향하였다. 김치찌개를 먹으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고 다 먹은 후 카페에 들려 커피를 사 회사로 돌아왔다.

 

밥을 먹고 돌아온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업무의 마무리를 지어갔다. 빠르게 키보드를 쳐내려가는 소리가 사무실 가득 퍼졌다. 이내 시간이 흘러 6시가 되었고 오늘은 야근 없이 모든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숄더백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며 김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일이 끝났으니 데리러 오라는 전화였다. 마침 창수도 회사 가까이에 있다하여 회사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보니 로비에는 창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업무는 어땠어.”

창가 내 손을 잡고 로비를 빠져 나가며 말했다.

“오늘 야근을 안 한 것 빼고는 평소랑 똑같았지. 자기는 어땠는데?”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뭐 똑같았지.”

간단한 대화 아닌 대화를 끝으로 회사 밖으로 나온 나와 창수는 저녁을 먹기로 하고는 자주 가던 레스토랑으로 향하였다. 마침 저녁노을이 지고 있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대화하며 걸어갈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창가자리에 앉았다. 값비싼 스테이크에 오랜만에 와인까지 마셔 괜찮은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 둘은 나의 집으로 향하였다.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창수와 함께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이라 그런지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검은 도화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이는 별들 없이 그저 검은색만이 칠해져 있는데 이를 누가 밤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넒은 검은색 도화지에 불과 할뿐이다. 그렇게 도화지를 바라보며 걷다가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창수는 계단 앞에서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집으로 향하였다. 창수는 제자리에 남아 집으로 들어가는 나를 지켜보려는 듯 했다.  문 앞에 도착해 열쇠를 찾기 위해 숄더백 안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열쇠는 나올 생각을 안했다. 한참을 찾아도 나오지를 않자 나는 숄더백 안에 든 물건들을 철판위로 엎질렀다. 현관문 앞에 앉아 엎질러진 물건들을 꼼꼼히 살폈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잃어버린 듯 했다. 나는 숄더백 안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 담고는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열쇠 잃어버린 것 같아.”

나는 창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달빛이 우리 둘을 비췄다.

“어 그러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어떻게든 해보자.”

창수는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나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해결책을 내놨다. 나도 그의 해결책에 흔쾌히 승낙하였고 결국 창수의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내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창수의 집이 있었는데 낡은 공원하나를 거쳐 걸어가면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창수의 집 앞에 도착하자 내 집과 비슷한 2층의 복합주택이 나와 창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복도 맨 끝의 집으로 향하였다. 창수는 문을 열었고 내가 그의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우리 둘은 뜨겁게 키스를 나눴다. 


사실 열쇠는 주머니 안에 넣어 놨었다. 오늘은 창수의 집에서 자기위해 거짓말을 친 것이었다. 아마 창수도 눈치를 채 이런 해결책을 냈을지 모른다. 문 앞에서 뜨거운 키스를 해대던 우리 둘은 침대로 향하였고 이내 사랑을 나누었다. 한동안 서로 바빠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거짓말은 좋은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랑을 나누고 침대위에 쓰러져 있을 때 창수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울리었다. 창수는 착신을 보낸 사람을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회사일 에 관한 통화라고 생각하고는 관심을 껐다. 15분정도 지나 창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래 창수가 통화를 할 때를 비교하면 꽤나 오래 걸린 시간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전화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창수는 회사사람이라고 대답했지만 나의 눈을 회피 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괜히 의심했다간 지금 좋은 사이가 나빠 질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 신경 안 쓰는 척 대화를 나누다 창수가 화장실에 간다고 그러면서 휴대폰을 두고 나갔다. 창수가 방문을 나가자 내 머릿속에는 휴대폰을 열어 통화 목록을 확인해 보라는 신호가 들어왔었다. 나는 그 신호를 참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은 억제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나의 손은 휴대폰으로 다가갔다. 휴대폰에는 잠금이 걸려있었지만 저번에 몰래 봐두어 알 수 있었다. 나는 잠금을 풀고 통화목록을 눌러보았다. 그곳에는 결혼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나와 통화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한 것인데 그 사람의 이름이 결혼이다. 나는 울렁거림을 참아내며 퇴근할 때 나와 통화 했던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 통화목록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내려가자 자신과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나는 김대리라고 되어있었다. 김대리라니. 나의 울렁거림은 그전보다 두 배로 높아진 울렁증으로 밀려 왔다. 그 덕분에 위액과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최대한 참아내며 다시 내려 보냈다. 참아낼 수는 있었지만 대신 위액 때문에 목이 시큰거리고 따끔거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창수가 들어왔다. 창수는 웃으며 들어왔지만 내 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휴대폰과 나의 얼굴을 보더니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버렸다. 창수는 정색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들려져 있던 휴대폰을 강제로 뺏어내며 화를 냈다.

“왜 마음대로 남의 휴대폰을 보는 건데!”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창수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좌절감과 실망감 때문이었다. 

"너 뭐야?"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와 슬프고도 깊은 눈으로 창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주춤거리며 내 눈을 피하였다.

그때였다. 창수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 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재빠르게 착신인 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결혼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창수는 당황해 하며 전화를 받지 않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창수가 당황해 있는 틈을 타 휴대폰을 뺏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벨소리가 사라지고 “여보세요”라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기 전에 창수가 휴대폰을 나에게서 뺏어냈다. 그리고 나와 조금 멀리 떨어져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다시 걸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창수는 나에게 빠르게 다가와 나의 뺨을 후려 갈겼다. 

“야 미쳤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창수는 씩씩거리며 뺨을 맞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뺨에 손을 대고 한동안 돌아 볼 수 없었다. 엄청난 배신감과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내 아무 말이 없자 창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결혼이 누군지 물어봤었지? 이 여자 나랑 결혼 할 여자야 너보다 돈도 많아 그래서 내가 오늘 너한테 그 비싼 스테이크에 와인까지 사줄 수 있었던 거야. 이제 슬슬 널 정리하고 그 여자한테 확실하게 가려고 했어. 솔직히 내가 지금까지 널 정리 안하고 만나준 이유는 넌 방금 전화 온 돈 많은 여자보다 잘하거든 너랑 할 때면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도 욕구 충족은 해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널 만나준거야 이때까지. 야, 그리고 너도 솔직히 좋았잖아? 아무튼 이제 슬슬 정리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됐네.” 

창수는 나에게 울분을 토해내듯이 말하며 마지막에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한동안 그 얘기를 들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창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내 가슴안에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듯 한 느낌이었다. 어둡고도 차가운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창수는 아무 말 안하는 날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이내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창수는 방을 나가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대 앉았다. 오히려 잘됐다. 혹시나 자살을 하겠다거나 같이 죽자 거나 하는 것보다 이렇게 쉽게 나가주니 그에게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창수는 휴대폰을 켜 결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미안 어떤 술 취한 여자가 내 휴대폰을 뺏어가서 경찰서에 데려다 주느라. 미안 많이 당황했지?”

창수가 웃으며 통화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창수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이내 허리에 욱신거림이 느껴졌고 고개를 내려 보자 창수의 허리에는 칼이 박혀있었다. 창수는 다시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창수는 그대로 하얀 카펫 위로 쓰러졌고 그의 피는 카펫위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창수가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 힘겹게 눈을 굴려 내 얼굴을 쳐다보려고 했다. 내 얼굴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입 꼬리를 올라가져 있는 괴상망측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창수는 몽롱한 정신 속에 눈을 감았고 엎어진 휴대폰 속에서 창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창수를 칼에 찌르고 난 뒤 물건들을 챙겨 집을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내가 그를 죽인 것 창수가 바람을 피운 것 그냥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뛰어가는 길이 매우 멀다는 생각을 했다. 낡은 공원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자 집이 나왔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열쇠를 꺼내 문 열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신은채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방구석에 앉아 울었다. 방구석에 우는 나의 울음소리는 그 어떤 것 보다 슬픈 소리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던 나는 고개를 들어 이내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곤 서랍장 안에 들어있는 수면제를 꺼내들었다. 수면제와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다시 나는 방안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를 죽인 이 옷들을 입고 있기는 싫었다. 옷을 다 갈아입는 나는 망설임 없이 수면제통에 들어있던 수면제를 모두 입속으로 들이부었고 물로 그 약들을 억지로 넘기었다. 그러자 다량의 약을 복용해서 그런지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시야가 흐릿해져 오기 시작했고 뇌수가 젤리가 된 듯 말랑거렸다. 이내 나는 모든 것이 왜곡되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그곳의 방문을 열었다. 그렇게 기나긴 잠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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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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