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작
한가로운 평일의 오후, 서점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 중 한 여자가 서점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책에 집중하여 읽고 있었다. 이미 두꺼운 소설을 두 권 다 정독한 뒤, 세 번 째 책을 삼분의 일 정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배에서 배고픔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고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이제 책을 놓고 나가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다 읽지 못한 세 번 째 책이 못내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다가 원래 진열되어 있던 곳에 책을 놓았다. 그리고 목도리를 여미고 서점 밖으로 나왔다. 3월이 다 되가는 데도 바깥 날씨는 여전히 찼다. 여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나섰다. 여자는 종종 걸음으로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컵라면을 구입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을 뜯은 뒤, 라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은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분주하게 제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었다. 라면이 다 익진 않았지만 컵라면을 휘휘 저으며 그녀는 한 젓가락 떴다. 라면을 몇 입 먹다가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쩍 본다. 유리창으로 자신이 게걸스럽게 컵라면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편의점 유리창이 좀 더 더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컵라면을 열심히 먹는 못생긴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희뿌연 얼룩이 더 보기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여자는 자신의 작은 자취방에 들어왔다. 외투를 벗으며 화장대에 놓인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못생긴 매부리코의 여자가 있다. 객관적인 미의 기준을 놓고 보면 여자는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고 귀엽거나 호감이 가는 인상도 아니었다. 일단 그녀의 눈은 심한 짝짝이 눈이고, 한 쪽 눈만 부자연스럽게 쌍꺼풀이 진했다. 입술은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훨씬 두껍고, 입 꼬리는 아래로 한없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코, 코는 얼굴에 비해 심하게 큰 매부리코였다. 키는 큰 편이었지만 허리와 목이 구부정하고, 어깨가 좁아 초라해 보였다. 머리 결은 푸석했으며 피부 역시 칙칙한 톤에 큰 모공이 멀리서도 보였다. 외모 면에 있어서 신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여자는 늘 생각했다. 자신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외모에서 비롯된 콤플렉스라고 여겼다. 여자는 자신에 대해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여기며, 겉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한 친구가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낙은 책, 일기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는 더 이상 딱히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여자는 침대에 앉아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의 표시해둔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를 빼고 보면 사실 여자는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도 아니었으며 손재주가 좋았다. 뜨개질이나 바느질, 그 외에 손으로 하는 잡다한 것들은 매우 빨리 익히는 편이었으며 요리도 꽤 잘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여자의 재능은 남달랐다. 여자를 평소에 무시하던 동네 친구들도 유일하게 그녀 앞에서 조용히 넋 놓고 있을 때가, 여자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였다. 자신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 걸 여자는 알고 있었지만 딱히 그런 재능을 활용하진 않았다. 글 쓰는 일이 크게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들이 그저 인생에 있어서 큰 도움 안 되는 것들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유일하게 자신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직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20대 초반의 여대생으로 보지 않았다.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등록금 문제 때문에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대학에 진학한 여자는 학교가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업만 끝나면 학교 근처의 큰 서점으로 가거나 자취방으로 와서 과제를 하곤 했다. 여자는 학교 내의 오순도순 떠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신과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동아리 부스들이 죽 서있는 날이었다. 여자는 혼잡한 동아리 부스를 지나 큰 길로 가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와서 말을 걸었다. “영화 관심 없어요? 우리 영화 감상 동아리인데” 라고 하며 그는 동아리 홍보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자는 종이를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홍보 종이를 건네준 남학생은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갖고 크고 흰 손으로 그녀에게 여전히 동아리 홍보 종이를 건네고 있었다. 눈썹은 진했고 앞머리가 눈썹을 살짝 덮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에 여자는 현기증이 났다. 어떤 섬광이 자신을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여자는 그 섬광에 못 이겨 동아리 홍보 종이를 받았다.
여자가 침대에 눕자 그녀의 심장은 진한 커피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쿵쿵 뛰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낮에 본 그 남자의 긴 속눈썹, 섬세한 콧날, 도톰한 입술, 날렵한 턱 선, 넓은 어깨가 계속 생각났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여자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여자는 그 남자의 속눈썹이 달싹거리는 모습만 백 번은 넘게 생각하다가 날이 거의 밝아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여자는 그 남자가 홍보했던 동아리 부스 근처를 맴돌았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가 여자는 동아리 가입 신청서를 작성해서 냈다. 여자는 동아리의 새로운 회원 맞이 회식에서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보지도 않고 다른 자리에 앉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다시 보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동아리 활동은 여자에게는 고역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나갔다.
남자는 동아리에서 임원 중 한 명이었다. 여자를 보면 살짝 인사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여자의 일기장에는 온통 남자에 대한 묘사,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대한 걱정 등, 모든 이야기가 남자와 남자에 대한 감정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사소한 남자의 행동도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 지, 그가 커피를 마실 때는 담배를 몇 개비나 피는 지 등 사소한 모든 것들이 그녀의 일기장에 가득 찼다. D.여자는 남자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찼지만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면 더욱 우울해졌다. 남자의 큰 눈과 긴 속눈썹에 비해 자신의 얼굴은 너무 초라했다. 실제로는 자신보다 남자가 한 살 위였지만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10살은 많게 느껴졌다. 그의 주위에는 예쁘고 날씬한 여자들뿐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해보기 시작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그와 단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신은 가끔 존재하는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종강 기념 동아리 회식이었다. 동아리 회식이 3차까지 진행되어 막차가 끊기고 다들 기절상태가 되거나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남자 때문에 끝까지 남아있다가 술 취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취방으로 가려 했다. 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자가 여자를 따라 나왔다. “나 택시 좀 잡아줘, 집 주소가……” 라고 하더니 남자는 그녀에게 어깨동무 한 채 정신을 잃었다. 여자는 당황했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자는 무겁게 늘어진 남자의 팔을 잡고 부축하여 자신의 자취방에 내려 놓았다. 여자는 남자를 자신의 침대에 뉘었다. 마땅히 누일 곳도 없고 바닥에 눕힐 순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당황했지만 남자와 함께 된 것이 좋기도 하였다. 여자는 찬찬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술 냄새가 온 몸에서 심하게 나지만 섬세한 콧날,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은 그대로였다. 여자는 일단, 남자를 침대에 재우고 자신은 여분의 담요와 이불로 바닥에서 자야겠다고-자는 게 가능하다면-생각하며 해장국 재료를 사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일어난 남자를 위해 해장국을 끓여준다면 남자도 어느 정도 감동하지 않을까 하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여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심술쟁이 난쟁이들이 여자의 심장 위에서 마구 뛰는 것 같이 심하게 심장이 뛰었다.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불이 꺼져 있었다. 누군가 여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여자는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히듯 안기게 되었다. 남자의 니트에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한 땀 한 땀 새겨진 듯 깊게 났다. 여자의 입 안으로 비집듯이 술에 담뱃재를 섞은 듯한 냄새가 확 풍겨지는 혀가 들어왔다. 억지로 들어온 혀는 무차별하게 여자의 입을 훑었다. 여자는 맨 정신이었고 남자는 맨 정신이 아니었다.
창문 틈으로 참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그 날을 나중에 그렇게 회상했다. “무섭고 두려운 천국이었어, 황홀했지만 그만큼 두렵기도 했었지. 멍청하게도 그 때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남자가 깨어났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뱃속에는 뱀장어가 기어 다니는 듯 했다. 몸의 불편함 때문에 그는 주변을 처음에는 미처 둘러보지 못했다. 남자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딘지 모를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동아리에서도 말도 많이 안 해본, 심지어 평소에 가장 못생겼다고 생각한 여학생이 자신의 옆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둘 다 벌거벗은 상태였다. 남자는 순간적 충격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는 얼어붙어 차마 옆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침대 옆에 떨어진 남자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나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여자는 어색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해장국은 먹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남자는 “아니야, 아니야.”라는 말만 반복한 채 도망치듯 여자의 자취방을 나갔다.
남자는 여자를 계속 피해 다녔지만 여자는 남자를 더 따라다녔다. 남자는 여자를 피하기 위해 동아리 방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하필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여자와 마주쳤다.
“오빠”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당황해서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복도를 걸었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남자는 여자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다음에 바로 또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아. 다음에 얘기하자.” 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그때서야 남자는 결심한 듯 멈춰 선다. 이미 한 달 동안 여자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지겹도록 여자는 자신 근처를 빙빙 돌고 귀신처럼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기억도 안 나는 하루의 실수 때문에 이렇게 시달려야 되나 싶었다. 처음부터 이 못생긴 여자애가 계획하고 자신을 자취방으로 끌어들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남자는 갑자기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보고 여자에게 고함치듯 말했다.
“야, 나 좀 그만 내버려둬. 그 날 때문에 그래? 그게 내 잘못이야? 내가 네 방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네가 끌고 간 거잖아. 상식적으로 택시 태워서 보내는 게 정상 아니야? 여자애가 자기 자취방 데리고 간 것부터 문제였지. 난 그 날 기억 하나도 안나. 나 좀 내버려둬. 네 면상 계속 보는 것도 짜증나니까.”
남자는 멍하니 서있는 여자를 내버려두고 욕설을 내뱉으며 가버렸다.
여자는 나중에 그 때를 이렇게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 사람 속눈썹을 보고 있었어. 여전히 길고 예쁘더라고. 그 사람 언행이 그 사람 속눈썹만큼만 예뻤어도 완벽했을 거야.”
여자는 빛이 나가려고 깜빡이는 전구를 보듯 남자를 멍하니 보았다.
여자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여자의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이 남기고 간 흔적은 계속 되었다. 여자가 뱃속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아이를 없앨 수 없는 때였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것이 무서웠지만 아이를 없애는 것이 더 무서웠다. 여자는 무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려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이를 낳으면 시설에 맡기면 된다, 자신은 전처럼 지낼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련하고 멍청하게도 여자는 남자를 아직 사랑했다. 남자는 몇 달 안되어 여자를 완전히 잊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갑작스런 고통이 그녀를 강타했고 그녀의 다리 밑으로 뜨거운 물이 흘렀다. 여자는 쓰러졌고 일어나보니 병원이었다. 배가 갈라지는 아픔이 시작되었고 여자는 지옥 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눈물로 모든 것이 흐릿해졌을 때, 간호사가 검붉은 살덩어리를 들고 와 여자의 눈 앞에 보여주며 말했다. “왕자님입니다!” 하나도 안 예쁜, 심지어 끔찍하기까지 한 작은 살덩어리를 보며 이상하게도 여자는 죽음 속에서 빛을 보았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아이에 손에 갖다 대보았다. 아기가 자신의 손가락을 쥐었다. 눈물 때문에 여자는 속삭이듯 간호사에게 말했다. “아이가 아빠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자는 기절했다.
여자는 아이를 시설에 맡기고 하룻동안 일을 하고 저녁에 데리러 갔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보육시설 교사들은 모두 “아기가 정말 잘생겼어요.” 라고 입을 모았다. 여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어깨가 으쓱해지며 여자는 아이를 받아 안고 말했다. “아빠를 닮았나 봐요.”
어느 날, 아들의 담당 보육교사가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시기에 절차를 밟으시는 게 좋아요. 이 때 가장 좋은 가정으로 입양하기 좋은 나이라서……………”
여자는 잠 든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과 다른 얼굴, 긴 속눈썹이 눈에 보였다. 다른 곳에 보낼 수 없었다. 삶의 이유가 없던 여자에게 삶의 이유가 생겼다. 아들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큰 눈과 오뚝한 코, 긴 속눈썹까지 자신은 하나도 닮지 않은 예쁜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모든 게 힘들었고 여자는 아이가 클수록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여자는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학습지 판매원, 전화 안내원,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지만 늘 경제 상황은 빠듯했다. 힘든 상황에도 여자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미술, 음악, 체육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노력했다. 하지만 아들은 어느 것 하나 재능이 없었다. 여자는 빠듯한 생활에 힘들다가도 아들의 긴 속눈썹을 보면 힘을 냈다. 청소년이 되자 아들은 하루가 멀다 않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약한 애들을 때리고 괴롭혀서 학교로 여자는 불려가야 했다. 심지어 경찰서에도 자주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아들은 성적도 좋지 못했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여자의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은 전문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뒤에도 아들은 집에만 틀려 박혀 있다가 여자에게 돈을 받아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들의 재능을 찾아주기 위해 수도 없이 노력했던 여자였지만 성인이 된 아들을 보며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아이는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여자는 나이가 들었다. 전처럼 일하기에 몸도 너무 쇠약해졌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여자는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여자는 과거에 긴 속눈썹을 가진 남자에게 느꼈던 사랑의 백 배, 아니 천 배를 아들에게 쏟고 있었다. 여자는 전에 갖고 있던 일기장과 공책을 꺼냈다. 생각나는 이야깃거리들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여자는 그 날부터 밤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자는 쓴 글들을 각종 공모전에 보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들의 이름으로 제출했다. 한동안 연락이 없었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쓴 몇 원고들을 또 공모전, 출판사 등으로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 집 전화 벨이 울렸고 아들은 등을 긁적이며 전화를 받았다. 왠 까마귀 같은 목소리의 남자가 깍깍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씨 되시죠? “ 아들은 코를 후비적 대며 대답했다. “네, 전데요.” 전화 속 까마귀 남자는 말을 이었다. “ 축하합니다. 우리 여우비 출판사에서 주최한 21회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셨어요. 원고를 출판시켜드려서 바로 작가 등단의 길로 가실 수 있고 상금은……” “여우비 출판사요? 공모전? 그런 거 낸 적이 없는데요.” 그 때 여자가 화장실에서 뛰쳐나와서 아들이 받고 있는 전화를 가로챘다. 여자가 낸 작품 중 하나가 1등을 한 것이었다. 공모전 주최 출판사 측에서는 이야기의 독특한 문체와 섬세한 감정 묘사가 전혀 남자가 쓴 글 같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며 1등을 축하한다고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예쁜 표지 속에서 여자의 원고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공모전에서도 여자의 작품이 1등을 받았다. 여자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자의 이름 대신 공모전에 제출한 아들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여자의 아들은 유명한 신인 작가가 되었다. 한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여자가 쓴 소설들은 더욱 유명해졌고, 출판사에서는 더 많은 책을 계약하기를 원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과 밀려오는 인터뷰 요청에 아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유명세와 원고료로 들어오는 돈을 즐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덤덤히 아들의 이름으로 더 많은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가끔 획기적인 스릴러 소설을 쓰기도 하는 다양한 장르의 대중소설가로 아들은 이름 높였다. 여성의 시각을 잘 아는 남성 작가로 그는 많은 여성 팬이 생겼다. 아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끔씩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을 영화화나 드라마화 하려는 관계자들과 계약해야 될 때 나타난다던가 출판사 직원들의 전화를 받는 정도였다. 아들은 여자의 책이 벌어들인 돈으로 유흥업소를 마음껏 다녔다. 가끔씩 자신의 이름을 대면 알아보는 여자들에게 거들먹거리며 사인을 해주는 것도 그의 한 즐거움이 되었다. 아들의 주변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그를 소설가라고 존경하여 문하생으로 받아달라는 여자, 팬이라고 따라다니는 여자, 돈을 보고 접근한 여자 등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가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여성의 시각에서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이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의 잘생긴 외모는 여성 팬들을 불러모았고 그의 모든 행동은 연예인처럼 이슈가 될 정도였다. 그의 괴팍한 성격은 예술가적 기질과 개성으로 인정 받았다. 아들은 30대 초반에 결혼을 했지만 얼마 못 가 이혼했다. 그 후에 30대 후반이 되어 12살 어린 여자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두 번째 결혼한 여자는 아들의 소설가 자질을 존경하고 그를 소설가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결혼 2년 만에 자신이 존경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망설임 없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유명 작가의 두 번의 이혼은 대중들에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유명한 작가였고 두 번의 이혼 끝에 아들은 결혼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더욱 많은 여성들과 향락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어머니, 여자는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아들은 40대 중반이 되어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세 번째 아내는 똑똑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딸도 한 명 낳았는데 딸은 다행히도 엄마의 성품과 외모를 닮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재능을 닮았는지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할머니에게 이야기 듣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세 번 째 부인 역시 남자의 괴팍한 성격과 무식한 태도에 못 이겨 결혼 7년 만에 이혼을 요구했다. 일단 합의 별거를 한 뒤 남자는 양육비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 때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게 굽실거리는 출판사였다. 출판사 측에서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아부의 말을 죽 늘어놓더니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그런데 계약대로라면 내년 1월까지는 작품이 나와야 하는 거 잊지 않으셨죠?”
남자는 불룩 나온 배 위에 한쪽 손을 올려 놓은 채 전화기로 말했다. “그럼, 알다마다.”
‘엄마한테 내년 1월까지라고 말을 해야겠군’ 남자는 생각하며 새로 나오기로 계약한 로맨스 소설 마감 날짜를 체크했다. 남자는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피며 재떨이를 가까운 곳으로 당겼다. 그런데 그 때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병원의 연락이었다. 남자의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남자는 급하게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서둘러 어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의 어머니의 심장이 많이 약해져서 발작이 온 것이다. 그리고 손쓰기는 힘들다는 게 병원 측 입장이었다. 남자는 의사의 가운을 멱살 잡듯 쥐고 말했다. “안돼, 어떻게든 살려내! 어떻게든! 적어도 몇 개월이라도!”
의사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남자가 자신을 흔드는 방향대로 움직였다. 묵묵부답의 가만히 있는 의사의 가운을 움켜잡고 있던 남자는 지쳐 이제는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살려야 돼요. 선생님, 몇 개월이라도……”
남자는 망연자실하여 그의 어머니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았다. 그의 어머니가 힘겹게 눈을 떴다.
여자가 눈을 뜬 것을 보고 남자는 다급하게 말했다. “엄마, 안돼! 내년 1월까지 내야 되는 책이 있어. 지금 쓰고 있는 그 로맨스 소설 원고, 그거는 마무리 해 줘야 돼. 계약이 깨지면 위약금을 엄청 물어야 한단 말이야.”
여자는 자신의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아들 역시 얼굴 곳곳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중년의 얼굴이었다. 아들은 여자의 손을 애타게 만지며 나지막이 혼잣말로 욕을 내뱉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여자는 힘겹게 숨을 내 쉬며 아들을 향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아들은 애타게 여자를 향해 말했다. “엄마, 혹시 대강 적어놓은 줄거리는 없어? 그런 것만 있어도 보조 작가들한테 맡기면 되니까. 혹시 있으면……”
여자는 자신의 힘없이 자신의 손을 아들의 얼굴 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네가 날 좀 더 닮았더라면 좋았었을 텐데…….” 여자의 손이 아들의 얼굴에 채 닿기 전에 침대로 떨어졌다.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떤 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례식 내내 그는 엄청난 눈물을 쏟아 부었다. 남자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자신은 일단 계약된 소설부터 내야 된다. 아들은 어머니의 작업실, 개인 방 등을 샅샅이 뒤졌다. 온갖 파일들을 뒤졌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적어 놓은 세 페이지의 초반 줄거리 분량 외에 뒤의 내용을 보충해줄 줄거리는 한 줄도 찾지 못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폭포수 같은 눈물을 터뜨렸다.
“이 노인네가 제정신이 아니었네. 이런 것도 하나 안 준비하고.”
아들은 술을 퍼 마시며 곧 망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좌절했다.
“아빠 왜 울어?” 남자의 어린 딸이 자신의 앞에 다가 왔다. 남자는 자신의 딸에게 저리 가란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딸은 그 말을 거역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낡은 공책이었다. 낡은 공책…… 낡은 공책……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술로 인해 얼굴은 빨개진 상태였지만 눈은 술이 다 깬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는 딸에게 물었다. “너 이거, 네 공책이야? 이거 누구 거야?”
딸은 살짝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할머니가 전에 주신 건데.”
“할머니? 할머니가 주신 거라고? 이리 줘봐.” 남자는 딸의 공책을 낚아챘다. 그리고 공책의 내용을 쭉 읽었다. 여자의 젊은 시절 일기장이었다. 남자는 공책 종이를 휙휙 넘겼다. 중반부부터 사랑에 빠진 내용, 긴 속눈썹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일기장을 그 자리에서 읽은 남자는 기쁨에 가득 차서 소리쳤다. “그래, 이걸로, 이걸로 쓰면 되겠네! 로맨스 소설, 이걸로 해결하면 되겠어!” 남자는 공책을 들고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딸이 뒤따라왔다. “아빠, 그걸로 뭐하게? 그건 할머니가 나 준 거란 말이야.” 남자는 딸에게 대충 대꾸했다. “그래, 그래. 아빠가 좀 중요한 일 때문에 이걸 써야 될 일이 있어. 다 쓰고 돌려줄게.”
남자는 일기장의 전체 내용을 조금씩만 수정하여 보조작가들에게 넘겼다. 순조롭게 작품은 진행되었고 계약 기간에 맞게 원고는 넘겨졌다. 그리고 곧 남자의 로맨스 소설은 출간 되었다. 소설은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로 그의 위상에 맞게 단박에 베스트 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출판사 직원은 남자에게 또 다른 소설을 계약하자고 제안했지만 남자는 자신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고 구변 좋게 둘러대며 앞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별거중인 남자의 아내와 2주 지낸 딸아이가 남자와 지낼 시간이 되어 가방을 든 채 집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기분이 좋아 딸아이가 좋아하는 함박 스테이크 집에 가기로 했다. 음식을 다 먹고 차에 타며 남자의 딸이 물었다. “아빠, 그 공책은 언제 돌려줄 거야?” 남자는 운전대를 잡으며 대답했다. “아, 그거. 알았어. 집에 가서 줄게.” 남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딸에게 공책을 건네줬다. 딸은 낡고 두꺼운 공책을 건네 받아 소중히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뒤, 남자의 딸은 새로 출간된 남자의 책을 읽었다. 어린 딸은 몇 장 읽다가 서랍에서 낡은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두 내용을 비교해보았다. 저녁 늦게 들어온 남자에게 어린 딸은 출간된 새로운 베스트셀러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빠, 이 책 할머니 공책 이야기랑 같은 이야기 아니야?” 남자는 외투를 벗으며 대꾸했다. “어? 어어…… 비슷한 내용이지. 할머니 이야기가 아빠 이야기고 아빠 이야기가 네 이야기지. 다 읽었어? 그래도 결말은 좀 달라. 아빠 꺼가 낫지?” 딸이 대답했다. “아니 아직 다는 안 읽었어.” 딸이 뒤돌아서 방으로 다시 갈 때, 남자는 컵에 물을 따르며 딸의 등 뒤로 말했다. “야, 근데 네 나이에 무슨 그런 소설을 읽어. 가서 동화책이나 읽어.”
딸은 방으로 들어와 감각적인 표지의 책을 펼쳤다. 그리고 앉아서 계속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공책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이야기였고, 결말은 남자가 곧 떠나고 여자 혼자 아들을 낳아 키우기 시작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책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확인하고 둘이 껴안는 것으로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다. 책을 다 읽은 딸은 남자에게 또 가서 물었다. “아빠, 근데 왜 남자가 떠나지 않게 책에는 나와?” 남자는 캔맥주를 따며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로맨스 소설인데 그렇게 쓰면 팔리겠냐? 저리가, 아빠 야구 경기 봐야 돼.”
딸은 방으로 들어가 공책과 책을 책꽂이에 넣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주신 또 다른 공책을 꺼냈다. 역시 낡고 두꺼운 공책이었다. 아이를 홀로 낳은 뒤 아이에 대한 이야기, 미혼모로서 살아온 이야기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딸은 두 번째 공책을 들고 남자에게 찾아갔다. 남자는 이제 격투기 경기를 틀기 시작했다. 딸은 공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얘기, 누구에 대한 이야기야?” 남자는 딸을 흘끗 본 뒤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딸은 물끄러미 남자를 보다가 대꾸했다. “아니야.” 딸은 다시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두 번째 공책의 이야기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아이가 나의 인생 중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중에야 깨달은 것은 졸작을 가슴에 품고 다녔구나 하는 것이었다.’
딸은 매일 학교에 숙제로 내야 하는 일기장에 첫 줄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가 되기로 했다.’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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