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효과

by 비커밍제인 posted Feb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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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효과 

   

  2년 전. 정확히 2년하고도 30일 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현실성이 없고 사회성도 없으며 자상하지 않고 신경질적이며 폭력적이었다.

한번 화가 나면 그가 무릎을 다치기 전까지 선수생활을 할 때 썼다던 야구방망이로 집안 여기저기를 부숴대며 화풀이를 해댔고 그것이 충분하다 느껴지면 나를 향해 그 방망이를 휘둘렀다.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군가에게 맞아보기 전까진 절대 알 수가 없다.

그에게 맞아 기절을 하고 난 다음 눈을 떴을 때는 늘 같은 상황이었다.

짜증 섞인 얼굴로 집안 여기저기를 치우는 시어머니의 모습. 담배를 입에 물고 일 년 중 364일을 입고 있는 무릎 나온 회색 추리닝 복장으로 컴퓨터방 안에 들어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남편.

내가 눈을 떴다는 걸 안 시어머니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바닥에 던져놓고 내게로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바라볼 때의 눈빛. 그 눈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남편보다 싫을 때도 있었다.

"넌 어찌된 게 그거 몇 대 맞았다고 만날 기절을 하냐. 비리비리 해가지고. 얼른 가서 밥 차려라. 배고프다."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질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문득 그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 내가 아니었나 싶을 때가 그렇게 종종 있었다.


시어머니의 자랑인 월세 잘 나오는 건물로 인한 수입으로 살아가는 덕분에 회사를 다니기는커녕 집밖을 나서는 일 조차 거의 없는 그가 일 년 365일중 단 하루 양복을 빼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날이 있었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회 날이었다. 양복에 붙은 먼지를 먼지솔로 털며 그는 말했다.

"내가 무릎만 안 다쳤으면 너 딴 거랑 결혼해서 이렇게 안 살았어. 은주는 말이야. 너 은주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너 딴 거랑 비교가 안 돼. 예쁘다는 말로 부족해. 여신이지. 여신.

개 같은 년. 넌 은주 발톱 밑에 때만도 못해."

동창회를 가기위함이라기 보단 그의 첫사랑인 미모가 여신급인 은주라는 여자를 보기위한 외출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이쁘길래 사람을 딱 발톱의 때로 취급하는지. 몰래 따라가 보고 싶었지만 눈가에 남아있는 멍 자욱 덕분에 외출은 불가능했다.

동창회를 다녀온 날은 야구방망이의 움직임이 더 활발해진다.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며 울고 부는 남편의 춤추듯 움직이는 방망이는 어떻게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남편을 너무도 사랑하는 시어머니 조 차도 그날만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시질 않는다.

그가 돌아올 시간 즈음 나 역시 사랑하는 티비를 끄고 잽싸게 작은방으로 뛰어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남편은 좀 이상했다. 집에 오자마자 야구방망이를 찾기는커녕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꼴로 눈물 머금은 눈을 한 채 아무 말도 없이 현관에 서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은주 씨가 안 왔어요?"

그의 다음 행동이 어떻게 나올지 무서워 죽겠으면서도 그 와중에 또 그게 궁금했다.

"은주가 죽었대."

남편의 하나뿐인 여신 은주 씨가 죽었다고 했다. 교통사고였다고.

세상이 끝난 얼굴이었다. 죽도록 미워하는 인간이지만 없던 동정심도 생길만큼 그는 슬픔으로 가득 차 보였다.

이렇게 은주라는 여자가 실제로 미의 여신인지 어쩐지는 두 번 다시 확인할 방법이 없어져버렸다. 그는 그렇게 풀죽은 꼴로 컴퓨터 방으로 향하더니 찰칵하고 문을 잠궈 버렸다.

며칠째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질 않았다. 밥도 물도 화장실도 우리가 잠든 사이 몰래몰래 해결하겠거니 생각했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게 남편의 얼굴을 못 본지 일주일 가까이 지나갈 무렵 뭔가 썩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환기를 아무리 시켜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그날도 눈 뜨자마자 뿌리는 방향제를 열심히 뿌려대고 있을 때 아들이 보고 싶어 못 견딘 시어머니가 본인만 갖고 있는 남편방의 열쇠로 문을 연 다음에서야 그 냄새의 원인을 알 게 되었다.

남편이 죽어 아니 썩어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다.

뭐야. 나처럼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도 아니면서 이런 걸로 쓰러지나. 너무 비실비실하잖아.

목에 넥타이가 감긴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걸 보니 넥타이로 목을 매달고는 무거워서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쓰러진 시어머니를 폴짝 뛰어넘어 코를 막고 남편 곁으로 다가갔다. 입 밖으로 길게 드리워진 혓바닥은 이미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어디하나 남편다운 곳은 없었다.

‘좋겠네. 은주씨랑 같이 있어서.’

남편의 얼굴에 바닥을 닦던 걸레를 펴서 덮어준 후 112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 말로는 사망한지 8일째라고 했다. 동창회를 다녀온 그날 밤 죽은 거였다. 그 만의 여신 은주 씨를 혼자 보내기 싫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정신병원에서의 상담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충격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라거나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다른 가족이 없는 정신이 나간 시어머니를 계속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불안정 같은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두통 때문이었다.

문득 문득 생각나는 지난시절 부끄러운 기억들처럼 몸서리 쳐지게 갑자기 얼굴을 들어내고는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 그런 두통이었다. 한번 시작되면 몇 시간이고 나를 괴롭혔다. 약을 먹어도 한 두 시간 뿐 효과가 없었다.

용하다는 병원은 모조리 다녀 보고 존재하는 검사라는 검사는 다 해봐도 원인을 찾기 힘들 자 나의 주치의는 명함을 하나 내 앞에 들이 밀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명함을 들어 눈 앞 에 가져댔다.\

‘김서현정신과의원’

“아마도 심리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곳이 수정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친절한 의사가 나에게 미쳤다는 말 대신 건 낸 명함을 들고 병원을 찾아 나섰다.

김서현 이라는 이름을 듣고 난 당연히 여자인 줄 알았다.

“남자라서 실망하셨나요?”

그는 길을 가다 마주쳤을 때 뒤돌아 볼만큼의 미남은 아니었지만 한 번 마주쳤다면 쉽게 잊히진 않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검은 뿔테가 무척 잘 어울렸다.

많은 여자환자들이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왕이면 할아버지 의사선생님 보단 이런 훈 남 의사선생님이 치료효과는 더 높여줄 것 이다.

그는 나에게 어릴 때 이야기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걸 왜 물어보냐고 했더니 이 모든 게 다 치료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어릴 때라. 별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 엄마 아빠는 이혼을 하시고 난 엄마랑 살다가 엄마가 또 시집을 가셔서 난 결국 외할머니와 살다 결국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부터 난 계속 혼자였다. 흔치 않은 것 같지만 아침 드라마엔 너무도 흔한 레퍼토리.

그는 나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어했다. 다른 환자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듯 보였다. 처음 몇 번은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치료가 거듭될수록 난 매우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늘 같은 얼굴로 내 이야길 모두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두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급격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조금 줄 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병원에 돈을 갖다 바친 지 3달째 된 날이었다.

병원을 나서려는 내게 시어머니가 다가왔다.

“용돈 좀 주세요.”

그녀는 아들이 죽고 난 뒤 5살 정도의 정신연령이 되었다. 같이 다니면 누가 봐도 그녀가 엄마 내가 딸처럼 보이겠지만(그렇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실상은 반대였다. 그녀는 내가 없으면 불안해했고 내게 잘 보이려 노력했고 그녀의 유일한 행복인 듯 보이는 500원짜리 팥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일주일에 두어 번 용돈을 달라고 했다.

그녀에게 자식은 죽은 남편 단 하나였다. 친척도 친구도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놓고 난 다음부터 내가 그녀의 법정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랑인 월세며 그녀가 남모르게 갖고 있던 목돈들을 내가 관리했다. 난 그녀의 돈으로 아무렇지 않게 명품 백을 사고 외제차를 뽑았다.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가 뭐라 든 난 그녀의 돈을 쓸 권리가 있었다. 7년간 그녀에게 개 취급을 받았으니 더한 것을 요구한 들 그녀는 내게 주어야 마땅하다.

동전지갑에서 500원짜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 내주고 돌아서자 그녀가 일찍 오라고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그녀는 살고자 모든 걸 잊은 걸지도 모른다.

운전대를 잡자마자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병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채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앉아있자니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랑 자요."

상담 자리에 앉자마자 생각하고 있던 말이 토하듯 튀어나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난. 도대체. 내가 말하고도 내가 당황하고 있었다.

의사가 당장 나가라고 할지 몰라 루이비통 네버풀 가방끈을 슬쩍 어깨위로 올리려는 찰라

그는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선 이내 내 앞에 내밀었다.

[시카고 모텔 501호 오후 9시]

내 시선이 그 메모지 위에 머물 동안

그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인터폰을 눌러 간호사에게 상담을 일찍 끝마쳤으니 다음 환자를 들여보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뵙죠."

간호사의 노크소리도 듣지 못한 채 멍해있는 내게 그는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나를 보고 웃어보였다. 나 역시 입 꼬리를 억지로 올려 그 웃음에 답했다. 메모지를 낚아채듯 잡아들고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환자하고 잠자리를 하는 건 이번이 3번째에요."

시카고 모텔 501호 문 앞에 도착 했을 때 시계바늘은 정확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번째 노크를 하려는 찰라 문이 열렸고 가운을 벗은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은 낯설은 그가 서 있었다.

우린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각자의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가 섹스를 했다.

난 2년만의 섹스였다. 그래서 숫처녀처럼 서툴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남자도 적극적인 내 모습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내 템포에 맞추고 이따금 리드해가며 2번의 오르가즘을 선물해 주었다.

그 역시 2번의 사정을 즐기는 듯 했다. 섹스가 끝난 후에도 우린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물건을 세워보려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환자와의 세 번째 섹스라는 고백을.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나는 이불 속으로 가려던 손을 급히 테이블 위 생수병으로 옮겼다.

"선수라고 생각했죠?"

꿀꺽꿀꺽 물을 쉼 없이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환자들 중 99번째 잠자리 상대인줄 알았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처음 같이 잤던 환자는 정말 너무 미인이었어요. 유명한 모델이었거든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겨우 27살이었는데 머릿속도 몸속도 썩을 대로 썩어있었죠. 하지만 너무 예뻤어요. 내가 미모를 칭찬했더니 비웃으며 나를 쏘아붙이더군요. 내가 아무리 예쁜 들 나랑 나보다 7살쯤 어린 어린 파릇파릇한 모델 년이랑 둘 중 고르라면 그년을 택할게 아니냐면서요. 절대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자기랑 자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버렸어요. 우습게도.

뿌리치기 힘들었어요. 정말 너무 예뻤거든요."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가늘게 빨아 당기고 내 얼굴 쪽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이 한번쯤은 꿈꿨을법한 일을 이루셨네요. 축하드려요."

"그렇죠. 그런 일이 처음이라 엄청 떨리고 뭐랄까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흥분이 되더군요. 그래서 미리 화장실에서 휴대폰으로 야동을 틀어놓고 사정을 한번 하고 나갔더랬죠. 혹시라도 실수를 할 까 봐요."

그 장면을 상상해보니 웃기기보단 뭔가 불쌍했다.

"하지만… 뭐랄까 생각보다는 별로드라고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말 아니었어요. 내 생에 최악의 섹스 베스트 3에 꼽힐 정도로 정말 별로였어요. 아무 느낌이 없더군요. 그래서 결국 사정도 하지 못한 채 끝났어요. 그녀로써도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붓더니 먼저 가버리더군요."

"미리 화장실에서 사정한 게 잘못이에요."

그는 옅은 소리를 내며 웃어보였다. 눈 주위에 잡히는 주름이 꽤나 귀엽다.

"그 후로 그녀의 소식은 신문으로 접했어요. 자살을 했더군요. 유명한 클럽 화장실에서."

"아 그럼 혹시 그 모델?"

"생각하신 그분이 맞을 거 에요. 제가 실수를 한 거죠. 그녀는 제 몸보다 제 말이 필요했을 거 에요. 남들 눈이 중요시되는 직업이라 정말 큰맘 먹고 병원에 온 걸 텐데 정신과에 상담하러 가봤자 나보다 더 미친 인간이 앉아 있더라 그것도 사정도 못하는 조루증 걸린 놈이 라고 생각 했겠죠."

"슬프군요."

"그렇죠. 다시 그녀가 찾아온다면 절대로 미모칭찬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이제 없겠지만요."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며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속옷 더미 중 팬티를 찾아 다리를 넣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꽤 나이가 있는 중년의 주부였어요. 음 마흔다섯쯤 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나 혼자 알몸으로 있기 머쓱해 슬립을 머리부터 뒤집어 쓰 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다양하네요. 평균이 없군요. 당신의 리스트에는."

"그렇죠? 참 의외에요. 거기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못생긴 여자였어요. 어딘가에서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할 그런 얼굴이었죠."

미니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캔 두개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 내며 그가 찡긋 웃어 보였다.

별로 마시고 싶진 않았지만 고맙다며 맥주를 받아들었다.

"이혼을 하고 난 뒤였어요. 남편이 모델 같은 여자랑 바람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홧김에 성형수술을 하려고 성형외과를 갔더니 저를 소개해주더랍니다. 참 머쓱하더군요. 쉽게 견적이 안 나오는 외모를 지닌 환자를 만나면 종종 저에게로 보내는 성형외과 의사 친구가 있거든요. 외모보단 정신건강이 우선이라나."

정말 크게 웃었다. 나를 웃겨주려고 일부러 말을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달변이 놀라웠다.

"성형외과의사도 포기한 나를 누가 다시 사랑해줄까요 하며 얼마나 우시던지. 1시간은 울었을 거 에요. 쉬지도 않고 눈물 콧물 침 다 흘려가면서 말이죠. 뭐 그런 일이야 많죠. 정신과니까요. 5시간 울던 환자도 있었어요. 대부분의 환자들이 눈물을 흘리죠.

그런데 왠지 좀 측은하더군요. 직업상 환자든 누구든 아무리 울어도 잘 동요되지 않는 편인데 그땐 예외였어요. 처음이었죠.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일은 없었어요. 왠지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제가 먼저 권했죠. 섹스를."

순진한 구석에 다정다감한 면까지 있구나 세삼 감탄하고 있자니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조금은 아련해진 눈빛이 된 그가 말을 이었다.

"좋더군요. 그녀도 나도. 참 좋은 섹스였어요. 사심 없이 서로의 몸만을 탐하는. 그녀에게는 그 어떠한 상담보다 그게 최고의 해답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전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도 무척 고마웠다고 덕분에 자존감을 많이 회복했다는 편지도 몇 번 보내오신걸 보면 말이죠."

"명의시군요. 뭐가 필요한지 콕콕 집어내시는 걸 보면. 여기보다는 돗자리를 펴시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내말에 그가 껄껄 거리며 웃었다.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라며. 점점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럼 저도 백 번의 상담보다 이게 그러니까 섹스가 답이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는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삼킨 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수정 씨는 뭐랄까. 모르겠어요. 어떤 것도 답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그저 동정인가요? 몇 년을 섹스에 굶주렸을 여자에 대한?"

"아니요. 남편이 없다고 섹스를 안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다만. 당신은 좀 특수한 케이스 같아요. 대뜸 상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자고 외치는 환자는 흔하지 않죠. 확실히."

찡긋 웃어 보이고는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서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나오지 않아 나는 잠깐 잠이 들었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내게 찰나의 순간 꿈이 찾아들었다. 남편이었다. 평소의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364일 입는 무릎 나온 면 추리닝 대신

올 블랙의 세미정장차림이라 나를 향해 여보라고 부르기 전 까지 전혀 남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예약해둔 곳이 있다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고르라며 메뉴판을 건 내 받았는데 희한하게도 메뉴는 단 한 가지 뿐 이었다.

‘까르보나라.’

왜 메뉴판에 다른 메뉴는 없는 거냐고 묻고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정 씨. 수정 씨. 잠시 두리 번 거린 후 남편을 바라봤을 때 남편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황한 채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을 때 메뉴판에는 까르보나라 라는 글자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괜찮아요?"

꿈에서 깼을 때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드는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방금 샤워를 하고 온 깨끗한 그의 가슴에 파묻혀 계속해서 눈물을 토해냈다.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쓸어주며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이날 내가 지금까지 납부한 병원비 200여만 원 치에 해당하는 혹은 그보다 더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무언가를 해주었다.

그의 품에 안겨 나는 꿈도 뭣도 잊은 채 내리 8시간을 잤다. 그렇게 오랜 시간 푹 잔 건 2년만의 일이었다.

아니다. 난 남편이 죽기 전에도 8시간을 내리 푹 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 평생의 유일한 숙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아침이 되었을 때 의사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출근준비를 위해 먼저 나섭니다.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 깨우질 못했습니다. 혹여 이제부터 제가 불편해지신다면 다른 병원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김서현.]

그가 적어놓은 메모지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샤워기를 머리위에 갖다 대고 차가운 물을 틀었지만 별로 차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진정한 명의였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티비가 틀어져 있었고 시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시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얼굴이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워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 갈 만한 주름들이었다.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1초도 쉬지 않고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을 땅에 묻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미안해."

사과를 깎으려고 과도를 들었다가 그녀의 말에 놀라 식탁위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뭐라고요?"

"미안하다고."

“저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하시더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날 선 나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지 너 때문이 아니라는 건 나도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난 다시 과도를 들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그 앤 애초부터 병들어 있었어. 나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어. 그래서 너를 아무 잘못 없는 너를 그 애가 아니 우리가 괴롭혔던 거지. 이제 자유야.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시어머니는 5억이 들어있는 통장을 식탁위에 내려놓고 안방으로 사라졌다.

울기 싫었지만 눈물이 났다. 슬퍼서도 기뻐서도 화가 나서도 행복해서도 아닌 그냥 눈물이었다. 엉망으로 깎인 사과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며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댔다. 5억이 들어있는 통장 첫 장에는 이수정 이란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불을 가져와 소파 위 시어머니의 몸 위에 올려두었다. 티비 앞 선반에 500원짜리 동전을 두 개 꺼내 올려놓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날만은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 후로 난 김서현신경정신과의원을 가지 않았다. 물론 추천해준 다른 신경정신과의원도 가지 않았다. 두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머리가 터질 듯 한 고통은 더 이상 없었다. 김서현신경정신과의원의 김서현 씨는 종종 내게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난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왠지 답장을 해버리면 다시 그에게 자고 싶다고 말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 날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는 데 그의 문자가 왔다. 잠시 멈춰서 메시지를 여는 순간.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너무 놀라 뒤 돌아 봤을 때 거기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김서현 씨가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저 이 동네 살고 있어요. 주말이면 마트에서 장도 보면서 말이죠.”

정말로 그의 손엔 천으로 된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절 보시고 문자 보내신 거 에요?”

“아니요. 마트를 나서는 데 문득 수정 씨 생각이 나서요. 문자를 보내고 고개를 들었더니 거짓말처럼 수정 씨가 눈앞에 보이 길래 몰래 따라온 거죠.”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 속 무언가가 같이 웃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두통이 많이 사라졌단 이야기와 아직도 시어머니와 살고 있다는 이야길 했다.

“요양원에 보내는 방법도 나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그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내 말도 잘 듣고. 언젠간 그래야 되겠지만 지금은 나쁘지 않아요. 이 생활이.”

“수정 씨 답군요.”

“저 답다 구요?”

“착한사람.”

“그런 말 마세요. 이미 저희 동네에선 정신 나간 시어머니 등쳐먹고 사는 며느리로 유명해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것도 나쁜 걸로 만들어 버리죠.”

“그래서 선생님은 또 다른 환자와 잤나요?”

그가 껄껄거리며 웃어보였다. 나도 웃어보였지만 그가 그렇다고 말할까봐 약간 겁이 났다.

“아니오. 절대. 이제 그럴 일 없을 거 에요.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의사를 그만 둘 겁니다.”

“저랑 자고나서 너무 실망하셨나보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다른 환자와 잤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다.

“내 자신에게 실망을 했어요. 수정 씨가 아니라.”

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이토록 부족한 데 수정 씨에게 뭔가를 일깨워주려고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자꾸 수정씨 생각이 났어요. 밥을 먹을 때도 쉬는 시간에도 왜 그럴까요? 누군가 앞에서 솔직해 지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네요.”

“지금 그 말은 절 좋아하신단 말씀이신가요?”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수정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우린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될 거에요.”

“아직 좋아한다고 말하진 않았는데요?” 그가 다시 웃어보였다. 그는 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타입인 듯 하다.

“전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래서 피한 거 에요. 혹시라도 내가 당신에게 폐를 끼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가 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아직 뭔가가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남편을 죽인 여자와 사귄다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어요.”

“너무 앞서가네요. 난 사귀겠다고 한 적 없어요.”

“제가 좀 미래지향적이라 그래요.”

“수정 씨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에요. 그건 잊지 말아요. 나랑 사귀지 않더라도 말이죠.”

“거절하는 방법이 매우 잔인하시군요.”

“비가 올 것 같은 날씨군요.”

우린 그렇게 한동안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 손들을 들여다봤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린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건가.

그의 말대로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집에서 기다릴 시어머니를 위해 산 팥이 듬뿍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이미 다 녹았을 것이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이 신경이 쓰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빗방울이 이마 언저리에 내려 앉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지만 우산을 쓸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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