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날

by mihan posted Feb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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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날




집을 나서면서 본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근처에 높은 건물이 없다보니 고개를 들고 있기만 해도 시야가 온통 하늘빛으로 가득했다. 특히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리도록 파란 그 빛깔이 금방이라도 눈앞으로 쏟아져 내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킬 것 같았다.

파란색.

정말 끔찍하게도 싫은 색이었다.

좁고 더러운 언덕길을 한참 내려가야 있는 버스 정류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사람들 틈에 끼여 문자를 확인했다.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온 문자였지만, 내용은 기다리던 것과는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OO 증권 인사팀장 OOO입니다. 귀하는 금번 채용에 불합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지원과 관심에 감사드리며.......]


16번째. 이쯤 되면 기대하기도 지친다. 나날이 늘어나는 불합격 통보 문자 덕에 신경이 다 닳아 없어졌는지 어지간한 일엔 실망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붙겠지. 라고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학교까지 가는 것만 50분이 넘게 걸렸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새삼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햇빛이 들지 않는 건물 안은 밖보다 서늘했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 해 교수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난로를 쬐던 교수님이 흘끗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 꼬라지를 보니 또 안됐구먼. 쯧, 옛다. 이거나 먹어라.”

교수님이 던지듯 건네준 캔커피는 언 손이나마 겨우 녹일 정도로 미지근했다. 뚜껑을 따니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게 저번에 그 공모전 나가 보라니까....... 이젠 나도 모른다, 이 녀석아.”

“그땐 토익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니까요?”

“변명은.......”


교수님은 샐쭉하니 눈을 흘기며 난로 앞에서 두 손을 비볐다. 주름진 손이 맞닿아 마른 천이 스치는 소리를 냈다.


“토익 900점에 4년 장학생이 다 무슨 소용이냐. 취직이 안 되는데.......”

“내년에 더 열심히 해 봐야죠.”

“당연한 소리.”


나는 콧방귀를 뀌며 단호하게 말하는 교수님 뒤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서류와 출석부의 이름대로 파일을 정리하고 인쇄해서 종류별로 분류했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단순작업이 좋았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동안 고민하던 것들은 저 멀리 사라지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단순한 일을 하는 데도 시급은 딱딱 맞춰 나왔다. 어차피 취직도 안 됐는데 이대로 교수님의 조교로 학교에 붙어 있을까란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교수님의 역성 덕에 이루지 못할 꿈이 된 지 오래였지만.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눌러 앉겠다는 놈은 나도 필요 없다!’


라고 단 칼에 잘라 말하던 교수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취직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못난 제자가 눈에 밟혔는지, 취직이 결정될 때까지 아르바이트 겸 연구실 일을 돕게 해주신 걸 보면 참 정이 많은 분이었다. 검은 봉지에 담긴 귤을 하나하나 꺼내 난로 위에 올리던 교수님이 마지막 귤을 내 쪽으로 던지며 운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정훈이는 아직도 너희 동아리방에 있냐?”

“네. 오늘로 딱 2주째예요.”

“그 놈은 취직을 했으면 냉큼 회사나 나갈 것이지 뭐 하러 거기서 그러고 있대냐?”

“글쎄요? 그 선배 속을 누가 알겠어요.”

“참, 세상 요지경이야. 그 천방지축에 재수강이나 안 하면 다행이던 놈은 좋은 회사 떡하니 붙어서 놀러 다니고, 공부 잘하고 얌전하던 놈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다 늙은 교수 잡일이나 돕고.......”


한탄이 섞인 말에 쓰게 웃으며 귤을 집어 입에 넣었다. 차가운 귤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시고 떫었다. 웬일로 일기예보가 맞았는지 서서히 어두워지던 하늘이 이내 하얀 눈송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캠퍼스의 황량한 잔디 위로 하나 둘 쌓인 그것은 점점 더 하얗게 풍경을 물들였다. 그걸 보던 교수님은 눈도 오는데 일찍 들어가라며 열쇠를 맡기고 나가 버렸다.

남아있던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오랜만에 동아리방에 들렀다. 청소를 안 해 먼지가 쌓인 창 밑으로 이미 하얗게 덮인 운동장이 보였다. 저 눈이 녹으면 진흙이 될 테고, 분명 새로 산 구두가 엉망이 될 터였다. 한숨을 내쉬면서 문득 ‘눈이 더 이상 예쁘기만 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렇게 하나의 기준으로 딱 떨어지는 거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방학인데 학교엔 웬일이야?”


정훈선배가 대충 휘휘 저은 믹스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하얀 종이컵에 반 정도 담긴 믹스 커피의 진한 향이 코 속으로 밀려들었다.


“교수님 일을 돕고 있거든요. 노동하러 왔어요, 노동.”

“저런. 취업준비생이라고 막 부려먹는구나, 그 영감.”

“뭘요, 제가 부탁드려서 된 건데요. 취직도 안 되는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죠.”


내 대답에 선배는 아, 그래? 하고 되물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선배는 내년 봄에 나와 함께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나와는 달리 취업준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청춘을 불태우겠다며, 동아리방에 눌러앉아 매일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럴 시간과 돈을 다른 곳에 쓰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데도 참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럼 선배는 이제 뭐 할 거예요? 여행?”


선배는 동아리 방에서 먹고 자면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안에 들어오는 사람과 술을 마시겠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마침 교수님과의 일을 끝내고 잠시 동아리방에 들른 내가 걸린 것이었다. 선배가 정한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혹시 있을지 모를 두 번째 희생자를 기다리는 동안, 선배는 내게 슬슬 여기도 떠날 때가 됐다는 얘기를 넌지시 꺼냈다.


“글쎄? 여행도 괜찮고, 집에서 쉬는 것도 좋겠지. 그래도 최근에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뭔데요?”


내 물음에 선배는 특유의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활짝 웃을 때 보이는 덧니 때문인지 유독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선배는 어디서 구한 건지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 들더니 두 곳을 각각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걸어서 다녀 올 거야.”


나는 선배의 손이 짚은 곳의 지명을 확인했다. 서울과 부산. 결국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다녀오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 나이에 그런 도전을 하는 젊은이가 아주 없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선배의 경우는 그 이유가 조금. 아니, 많이 특이했다.


“겨울엔 역시 어묵이지. 너도 같이 갈래?”


고작 어묵 하나 먹겠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무모하니까 젊음이라지만, 선배의 경우엔 정도가 심했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며 시험 전 날 밤새도록 달려 바다에 다녀온 적도 있었고, 마을 축제 때 썰매 대회에서 쓸 거라며 집 옥상에 커다란 썰매를 만든 적도 있었다. 그 덕분에 학점이나 토익 점수는 늘 바닥을 기었지만, 선배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좋게 말해 대범. 나쁘게 말해 무계획이 선배의 본질이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해서 입학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성적에 연연했던 나와는 정반대였다. 300만원. 사립대학 등록금치고는 적은 편에 속했지만,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40만원을 벌까 말까 한 학생에게는 충분히 까마득한 액수였다.


“시간이 아깝다, 인마.”


아르바이트와 공부로 정신없는 내 모습을 보며 질린다는 듯 내뱉던 정훈선배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누가 봐도 시간을 낭비하는 건 선배 쪽이지 않은가. 4년 장학생에 토익 점수도 상위권인 나와 허랑방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선배.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에 비해 내 쪽이 훨씬 반듯하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물론 나의 경우엔 가난한 집안 사정상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배가 부잣집 도련님인 것도 아니었다. 선배는 나와 똑같이 아버지가 없었다. 집도 굉장히 가난하고 밑으로는 아직 대학도 안 간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하지만 학자금대출로 들어온 학교에서 1년 휴학을 하고 돈을 모아 아프리카와 아마존 등 온갖 오지를 탐험하다가, 2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단숨에 학자금을 갚게 된 선배는 남은 돈으로 어머니께 작은 식당을 선물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선배는 우리 과 모두의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몇몇 후배들은 선배를 본받겠다며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고생만 실컷 하고 얻는 것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너도 한 번 다녀오지 그러냐? 거기 경치가 얼마나 끝내주는데!”


선배는 늘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늘 ‘다음에요.’라며 대수롭잖게 넘겼다.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든 와중에 나 혼자 해외여행 같은 호화로운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불빛 하나 없는 밤에 절벽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하다. 언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지만 내딛는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어, 해 졌다. 좋았어! 오랜만에 곱창이나 먹으러 가자. 이 형아가 쏘마!”


나는 곱창이 끝내주게 맛있는 집을 안다며 앞장서는 선배의 등 뒤에 따라 붙었다. 선배가 단골이라는 식당은 낡고 허름한 곳이었지만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모! 나 왔어! 여기 소금구이랑 양념으로 4인분 같은 2인분!”


선배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주방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주방에서 상추를 담던 아주머니는 선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인상을 팍 구겼다.


“니미, 어떤 놈팽이가 들어오나 했더니 네 놈이었구마. 4인분 같은 2인분은 무슨 얼어 죽을........ 그래, 오늘은 또 얼마나 처마시려고? 으잉?”

“에이, 또 그런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 좋아하면서.”

“이게 또 무슨 개소리여! 바쁘니께 냉큼 자리에 앉기나 혀!”


상냥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대답에 선배는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선배와 주인아주머니의 말싸움에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했지만, 막상 나온 음식을 보니 정말로 4인분은 될 양이었다.


“봤지? 이러니 저러니 욕은 해도 나 좋아한다니까?”

“에라이 썩을 놈아! 누가 네놈 예뻐서 준다냐! 여기 이 청년이 참하니 잘 생겨서 준겨!”

“그래그래, 이모. 나도 이모 좋아해.”

“저, 저 썩을 놈!”


결국 선배는 주인아주머니께 옴팡지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문득 선배가 말도 통하지 않는 오지에서 잘도 살아남은 이유가 저 능글능글하고 넉살 좋은 성격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을 뒤집는 내게, 선배는 가볍게 물었다.


“그래, 여자친구는 있냐?”

“없어요, 그런 거. 만들 시간도 없고.......”


선배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만들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너 교수님 일 도와 드리고, 나랑 곱창 먹을 시간은 있잖아. 근데 여자친구 만들 시간이 없긴 왜 없어! 변명하지 말고 하나 만들어 인마. 설마하니 너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거 기대하는 거면 그딴 거 영화 속 얘기라고 해 주마. 내가 아는 후배 중에 하나 소개해주리?”

“됐어요. 여자친구 있어도 만날 시간도, 돈도 없어요.”


선배는 단칼에 거절하는 내 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과 내 술잔 가득 술을 따랐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찰랑이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 선배는 내게서 집게를 빼앗아 가더니 익숙한 솜씨로 곱창을 뒤집었다.


“자고로 곱창은 말이지, 안에 곱이 꽉 차서 씹는 순간 기름과 함께 뜨거운 곱이 팍 쏟아져야 진짜 맛있는 곱창이라고. 그러려면 곱창 자체도 신선해야 하지만, 곱창을 굽는 기술도 중요해. 너처럼 언제 익을까 초조해 하면서 계속 뒤적거리면 안에 있던 곱이 다 빠져나와. 봐, 이렇게. 곱이 하나도 없는 비쩍 곯은 곱창이 되는 거라고, 인마. 이렇게 굽는데 신선한 곱창이 다 무슨 소용이냐.”

“거 못 구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잠자코 들어, 자식아. 초조해 하면서 계속 뒤집어 봤자 안에 든 곱만 다 쏟아지고 아까운 곱창만 다 버리는 거야. 잠자코 한 쪽 면이 다 익을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진짜 맛있는 곱창을 먹을 수 있는 거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못 해본 것도 좀 해보고, 여자친구도 좀 사귀어 보고, 오랜 친구네 집에 술 들고 쳐들어가 보고, 인생에 길이 남을 미친 짓도 해보고 그러는 거지.”


불판 위의 곱창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갔다. 흘러나온 곱은 달궈진 불판에 눌러 붙어 그대로 타버렸다. 거무죽죽하게 변한 곱이 누린내를 풍겼다.


“.......그렇게 맘 놓고 기다리다가 한쪽이 다 타버리면요?”

“그럼 버리고 다시 구워야지. 네 덩치가 얼만데, 곱창 한 조각으로 배가 채워지겠냐? 너한텐 이 접시 가득 있는 곱창이 안 보이냐고. 하나를 태워 먹었으면 또 멀쩡한 걸 하나 더 올리면 되는 거야. 그렇게 몇 개 정도 태워도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잖냐. 그리고 몇 개 태우다 보면 적당한 타이밍을 잴 수 있는 힘이 생겨. 그 뒤론 엔간해선 잘 안태우게 되지. 그러면 이 불판 위에 곱창을 하나만 올리는 게 아니라 여러 개를 동시에 올려서 구울 수 있게 돼. 그러면 그 곱창을 너 혼자 먹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눠 먹을 수 있게 되지.”


선배는 젓가락으로 내 접시에 곱창을 옮겨주며 말을 맺었다. 나는 그 곱창을 내버려둔 채 소주잔을 비웠다. 알싸한 향과 함께 빈속이 찌르르 울렸다.


“그럼 만약에, 그렇게 잘 굽는 노하우가 생겨서 나는 준비가 다 되었는데 갑자기 불이 꺼진다거나, 비가 와서 불판이 식는다거나 하면요?”

“너 바보냐?”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선배의 말에 울컥해서 올려다보자, 선배는 불판 밑에 기름때로 진득거리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툭 쳤다.


“그럴 땐 이모를 불러야지. 너 가스 떨어지면 네가 만들 거냐? 여기 이모는 가스 같은 거 넘치게 가지고 있고, 비가 오면 가려줄 야외 천막도 있다. 너한텐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런 거 이모한텐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 힘으로 안 된다 싶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 거야. 물론 별 것도 아닌 일로 계속 부르면 이모도 짜증이 나서 널 쫓아낼 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무리하다가 가스레인지를 박살내는 쪽이 더 민폐일걸?”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선배는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나는 잠자코 그것을 마셨다. 독한 술 때문에 코가 찡했다. 빈속에서 올라오는 술기운에 목이 메여 불판 위의 곱창 중 제일 큰 것을 집어 바로 입에 넣었다. 뜨거운 곱이 쏟아져 혀를 데었다. 욱신거리는 혀가 너무 아파서, 나는 곱창을 씹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파란 청바지 위에 점점이 얼룩이 그려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나는 질긴 고기를 씹고 또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