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여행

by 배가고픈사람 posted Jan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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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무엇인가에 홀린 듯 무작정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집안 곳곳에 빨간색의 압류 스티커와 노란색 메모지가 뒤섞인 채 붙어있다. 노란색 메모장에는 날짜로 보이는 숫자들과 그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적혀 있지만 나는 오늘이 몇 월 몇 일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날짜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 지금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지만 떠나야 한다.

/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내가 대치해 있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고 뭐라 주저리 떠들고 있지만 저 사람의 입에서는 희망적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필요한 말만 듣고 귀를 닫는다. 지금 나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들어와 기억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 이 사실만 알면 되지 무엇이 또 필요 하단 말인가. 나한테 닥친 일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맞은편의 그는 열변을 모두 토했는지 고생하셨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의 작별을 고하며 뒤편에 있는 문을 향해 손을 올린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좋다고 쫓아다니던 소독차 뒤에서 나던 냄새였다. 트럭 뒤에서 내뿜어 대던 짙은 연기를 친구들과 같이 미친듯이 따라갔었다. 하지만 지금 이 냄새는 내 몸이 아프다는 자각을 하게 만든다. 빨리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이 곳을 빠져 나가야겠다. 그렇게 로비로 나와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맞은편 전신 거울에 비춰진다. 나는 잠시 멈춰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본다. 크지 않은 키에 뚱뚱한 것에 가까운 체형, 어디에 가더라도 돋보이지 않은 옷차림의 한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을 한 채로. 거울 속의 그는 초조한 모습을 감추려 나의 눈을 피하고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아니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병원을 빠져나와 주위를 돌아보니 세상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면서 잘 돌아가고 있다. 신호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빨간색과 초록색을 오고 갔고, 그에 맞춰 사람들과 자동차는 순서에 맞게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다. 바쁜 업무 때문인지 태블릿PC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앞을 보지 않는 사람,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하고 있는 사람, 모두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쓸모 없이 버려진 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하긴 세상이 도움을 청할 때 나 또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가 다 자업자득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교보문고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나에게 책이라는 물건은 잠을 청하기 위한 수면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한 번쯤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커다란 유리로 된 문을 여니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쏟아진다. 찜통 같은 밖과는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들어오긴 했지만, 역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디를 보아도 지루함이 묻어나는 책들이 사방에 진열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 책들을 집어 들고 집중해 읽고 있다.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들 같다. 그렇지 않고 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일단 서점에 들어왔으니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조금은 심오해 보이는 제목의 책이다. 어두운 책 표지는 이 책은 지루해요.” 라며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첫 장부터 잠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라는 대목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역시는 역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첫 장을 다 읽지도 않고 덮어버렸다. 빨리 나가서 술이나 먹어야겠다. 그렇게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계산대 옆에 진열된 수첩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첩을 보니 방금 전 의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기억하시는 모든 것들을 적고 몸에 지니고 다니셔야 합니다.

 기록하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억을 잃는 병에 걸렸으니 무엇인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수첩이 진열된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수첩들 앞에서 고민을 한다. 이 와중에 무슨 색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동물이 참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구나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갈색 수첩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서점에서의 지출이 익숙하지 않아 조금은 긴장한 채로. 수첩은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나는 본능적으로 만 원이면 소주가 몇 병인지를 계산해본다. 술 값은 별로 아깝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점원에게 카드를 내미는 손은 마치 아령을 든 것처럼 너무 무거울 따름이다. 점원은 수첩을 봉지에 넣어 나에게 건내 주었다. 수첩이 든 봉지를 받아 들고 뜬금없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이 수첩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 문 앞에 서니 압류 물품이라고 쓰여져 있는 빨간딱지가 나를 맞이하고 있다.

 -씨발 새끼

 문에 붙여진 빨간딱지를 보며 힘 없이 내뱉었다.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사람은 절대 쉽게 믿는게 아니라고, 나는 그때 마다 분명히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도 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개뿔이나, 아니었다.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표현은 등쳐먹기 좋은 사람이다. 생각 없는 호구, 그놈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기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의 삭막한 기운이 나의 몸을 얽매는 것이 느껴졌다. 집안은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다. 방 정리하는 것을 보면 방 주인의 머릿속을 알 수 있다고들 하는데, 내 머릿속 또한 아무 생각없이 뒤죽박죽인 걸 보면 꽤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 같다. 신발을 벗고 집안에 발을 내딛는다. 바닥은 얼마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을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켜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내일 생각하자. 그렇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

심상치 않은 느낌에 정신이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딘지 모를 횡단보도 앞이다. 무언가 허전해 시선을 밑으로 옮기니 피 투성이가 된 발이 보인다. 신발을 신지 않고 나온 건지, 어디에 버려두고 온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지금 나의 발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않은 채 아스팔트 위에 서있다. 그저 피 투성이의 발을 보면서 신발의 부재를 원망할 뿐이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빵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를 자극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배는 고프다. 하지만 일단 지금 이 곳이 어딘지 알아야 했다. 도움을 하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나를 향해 경멸, 멸시 그리고 두려움의 기운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범죄자 보듯 보고있다. 아무리 등신 같은 나라도 알 수 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은 다가간 만큼 뒷걸음쳤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심지어 다가오는 나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아이를 자신의 뒤 편으로 옮기는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나의 결백과는 무관하게 나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슨 말이든 해야한다. 나의 결백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저기….

 힘겹게 입을 뗐지만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저기 여기 라는 말만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범죄자 또는 괴물로 보이기에 딱 적당한 모습과 언변 능력이다. 생각처럼 모든 것이 따라주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순간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다가와 나의 팔을 붙잡고 넘어트렸다. 얼굴은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팔은 등과 마주했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나에게 소리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뱉어댔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이 타고 온 차에 구겨 넣었고는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살았다고,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

 번쩍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발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사라져버린 기억의 조각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이렇게 정신이 들 때 마다 모르는 놈의 뒤처리를 해야하는 기분이 든다. 아주 거지 같다. 일단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익숙한 풍경은 아니지만 그다지 낯선 느낌의 장소는 아니었다. 경찰서인 것 같았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풍경과 흡사한 느낌이다. 이 곳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힘든 표정을 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하긴 경찰서라는 곳이 좋지 않은 일이 생겨야 돌아가는 집단이다. 뉴스에 행복한 이야기보다 불행한 이야기가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정면을 바라보니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남자 또한 경찰서의 풍경과 어울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게 삭발한 머리의 그는 경찰서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마주했다면, 경찰인지 조폭인지 헷갈릴 정도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저기요 L L

 위협적인 인상의 그는 난처하다 못해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계속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위협적인 모습을 한 채로 난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들었다. 표정을 보니 내가 어지간히 아무 말도 안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여기가어디..

-정신이 드세요?

 나는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들어 보이며 맞은편 형사에게 물었다. 형사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면 기뻐하기 보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먼저 짓곤 한다. 냉탕에 있다가 갑자기 온탕으로 옮겼을 때의 충격 같은 걸까? 내 모습의 온도 차가 그를 당황하게 한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물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12시경 경찰서로 신고 하나가 들어왔다고 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신고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자세한 상황을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선 이렇게 전했다. 일단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어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 같다. 발걸음의 보폭 또한 일정치 않아 심각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그리고 고함소리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 중에 분명히 들리는 말이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빨리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해보니 남자의 모습은 신고의 내용보다 더욱 가관이었다. 오른손에 든 이상한 막대기를 쥔 채로 이리저리 휘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바쁜 모양인지 모여있는 사람들 틈을 인상 찌푸리며 뚫고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왜 하필 이런 인간이 난동 피우는 곳이 내가 지나가는 길인 건지 원망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경찰들은 잠시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남자는 계속 같은 자리를 휘청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차가 지나다니는 대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차도 한가운데로 가야하지만 그것을 심각히 망설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경찰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은 남자를 제압하고 경찰서로 데려왔다. 남자는 회색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것을 뒤져보니 남색 지갑을 발견했다. 지갑 속 신분증은 그의 이름이 L 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고, 계속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어 모두를 고생시켰다. .

  눈 앞의 경찰은 열변을 토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경찰의 말에는 나에 대한 원망과 답답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위로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둑이 든 집에 도둑이 다시 찾아와 사과만 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섣부른 위로는 비참하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오늘도 죽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죽음을 결심했을 때부터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 놈이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의지가 더 강했기에 이 놈의 계획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여기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오늘도 죽음이라는 놈은 힘차게 고개를 들었지만 서서히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 같다. 근성 없는 놈이다. 언제나 포기하는 한심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손목을 감싸고 있는 수갑이 너무 불편했다.

 -저기.. 이것

 수갑을 말하려 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이것 이라는 대명사를 말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름들은 어느새 나에게는 이것 저것이라는 두 단어로 대치 되고 있었다.

 -보호자 분이 지금 오고 계시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찰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큰소리로 나에게 전했다. 그나마 정신이 돌아온 나에게 지금 상황을 확실히 설명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 오고 있다고 했다.

-K라는 분이 오고 계세요.

가방 속에 있던 핸드폰에서 가장 최근에 통화한 사람에게 전화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경찰이 말해주었다. K?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가 누구이기에 나를 위해 경찰서로 온다는 말인가? 경찰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졌기 때문에 입을 떼지 못했다. 생각나는 단어들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금껏 살면서 나의 의견이 중요한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 나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나의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K 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었다.

 -가장 최근에 통화기록을 살펴보니까 K씨랑 마지막으로 통화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전화 드렸더니 바로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K라는 사람은 치매지원센터에서 나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라고 했다. 나는 누구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빨리 나갈 수 있게 해 준다면 말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주위를 살피며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확신이 들었다. 나를 찾아 왔다는 것을.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친 후 내 맞은편 경찰에게 자신이 K라고 말했다. 하나로 묶은 갈색머리에 초록색 가디건 그리고 헐렁해 보이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마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온 모양이었다. 저절로 눈이 가는 미녀는 아니었지만 수수한 매력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급하게 나온 지금이 아닌 적절한 화장과 의상을 입었다면 나는 절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증을 건넨 후 팬을 들고 경찰이 내민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경찰은 이내 나의 손목에서 수갑을 떼어내 주었고, 그녀는 나의 옷가지와 가방을 챙기고 깍듯이 인사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믿고 따라가도 될 것 같았다. 뭐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 어쩌다가 저런 병에 걸려서” “그러게 말이야그녀를 따라 돌아설 때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저 대화의 주인공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어쩌면 저 사람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순간을 저들은 기억할 테니까.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경찰서 밖은 어두운 하늘이 서늘한 바람을 내뿜고 있었고, 달은 구름에 가려 뿌옇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이 멈춘 곳은 시장 골목에 있는 순대국집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겨주었다. 그녀도 이곳을 잘 아는 듯 아주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들이 서로 전하는 인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직 어떤 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어야 했으며 내 앞에 있는 이 여인이 누군인지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할 단어들을 떠올리려 했지만 단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한참을 생각 후에 비교적 정확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고작 생각해낸 말이 이곳이 어디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왜 경찰서에 갔는지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지금의 나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소리의 형태로 형상화 되기 전에 담배연기처럼 날아가 버리니까. 그녀는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에선 짜증, 연민 그리고 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며 나에게 말했다. 내 생각을 읽은 듯 비교적 상세하게.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한 달 전이라고 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내가 치매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의 사회복지사로서 그녀는 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의 앞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처럼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온 것이 5번째라고 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 또한 5번째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5번이라는 말과 함께 지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지금껏 그녀의 고생이 조금은 나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그저 잠에서 깨었을 뿐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런 나를 지금 그녀가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어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고맙다. 라는 단어는 어느새 휘발되어 버렸다. 나는 달아나는 단어를 어떻게든 잡아보려 입을 떼었다.

 -……

 -알겠어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대답했다.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서 나 같은 사람의 말을 미리 알아듣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고마움이 제대로 전달되었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우리가 대화 아닌 대화를 하는 사이 순대국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 먹음직스럽고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울려 퍼졌고, 나는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입에 넣기 시작했다.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듯한 모습을 하면서. 많은 것을 먹었지만 기억의 조각들이 사라져 버린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뚝배기에서 순대국이 사라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치 내 머릿속에 든 기억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다 먹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보며 이제 일어나자는 눈빛을 보냈고,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왠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그녀는 다시 나에게 다가와 내 옆에 있던 가방을 자신이 메고 길을 나섰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계속 걷던 발걸음은 자그마한 빨간색 차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보았다. 아마 이곳에 타라는 표현일 것이다. 차 안에서는 방향제 향기가 그윽하게 나고 있었고, 향기를 맡고 있자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아로마 향이 마음을 진정 시켜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아로마 향이겠거니 했다. 내가 생각한 단어들은 거의 다 입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에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운전석에 탄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로 향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역시나 우리 사이에는 어떤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거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가 메우고 있었고, 나는 노래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것 중 또렷하게 생각나는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였다. 이상하게 이 노래만큼은 가사 또한 입 밖으로 나와 비교적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마치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정성스럽게 연습해서 머리가 기억 해내기 전에 나와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탁 소리와 함께 노래가 꺼졌다. 고개를 돌려 본 그녀의 얼굴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고, 눈가에는 물방울이 조금 맺혀있는 것 같았다. 아니다 잘못 봤을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지금 뭔가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아로마 향 때문일까?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는 것이 느껴진다.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다. 꿈인 게 느껴진다. 또한 생각한대로 몸이 움직여지고 있다. 말로만 들었던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확인한다. 아래를 바라보니 누군가 책상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모니터에 쓰여진 글자들을 바라본다. 그대를 사랑한다. 떠나지 않겠다. 사랑이 주제인 이야기 들인 것 같았다. 무슨 노래가사 인 것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찰나, 더는 엿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뒤에서 끌어당겨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힘이었다. 나에게 이 이상의 자유는 사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깨에 흔들림이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창 밖의 나무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제자리에 정지해 있는 것을 보니 차가 멈춘 모양이었다. 차가 멈춘 곳은 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주차장이었다. 그녀는 운전석에서 내린 후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보았다. 내리라는 무언의 말이었다. 내가 내림과 동시에 그녀는 문을 닫았다.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있었고, 말 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를 따라가고 있지만 나의 발걸음은 목적지를 아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 앞에 서자 나의 손은 저절로 도어락으로 향했고, 네 자리의 숫자를 누르자 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이 기억하는 숫자는 0321 이었다.

 -이 번호는 까먹지 않네요.

 말이 없던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가방을 내 손에 쥐여준 다음 문을 열어주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아로마 향기를 남긴 채 흔적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아늑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침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침대로 다가가 그대로 누웠다. 눈을 감은 채 오른팔을 감은 눈 위로 가져갔다. 그 순간 침대는 나를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깊은 물 속 같기도 했고, 높은 구름 위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끌려 다녔을까? 침대는 숲 한 가운데서 멈춰 섰고, 빨리 내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 햇빛은 적당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고, 울창한 나무는 그늘을 선물해 주었다. 정신 없이 걷다 보니 침대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햇빛은 따사롭고 바람은 서늘한 기분 좋은 이곳에서도 난 돌아가야 할 길을 잊어버렸다. 그래도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걸음을 옮기다 저 멀리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인다. 기쁜 마음에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갔지만, 절벽 끝자락 힘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딘가 외로움이 묻어있는 뒷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일까? 손을 그의 어깨 위로 가져갔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고 나는 물어 보고 싶었다,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를.

 눈을 뜨니 천장이 보인다. 등가의 땀이 느껴지고 축축한 기분이 든다. 몸을 일으켜 곰곰이 떠올려 본다. 방금 꾸었던 꿈과 그곳에 외롭게 앉아있던 사람의 얼굴을.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은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점점 알아볼 수 없는 형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생각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인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뭔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갈색 수첩이었고 나는 수첩을 집어 들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은 어느새 우리를 보고 비웃으며 달아나고, 지나간 세월이 아쉬울수록 더욱 큰소리가 되어 다가온다. 과거를 붙잡으려 할수록 미래는 현재가 되어 아쉬움이 된다. 돌이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미련하리만큼 과거를 회상하고 아파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어떤 시간에 살고 있을까? 

 오늘 나는 어딘지 모를 곳에 서있었다. 주위에는 높은 나무들이 감싸고 있고, 자연은 각자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새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고, 나무와 풀들은 각자의 향기를 내뿜고 있어 너무나 조화로운 풍경을 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왜 이곳에서 정신이 들었을까? 어째서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서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목적지를 모른 채 그저 걷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행복하게 대화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틈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내 마음의 여유는 너무 작았다. 그렇기에 항상 그렇듯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척 걸었다. 무섭고 초조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참을 걸어도 보이는 것은 나무들뿐이다. 갈증과 허기는 심해져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즈음 저 멀리 빛 한 줄기와 함께 숲의 끝이 보였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서 숲의 끝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왠지 저 끝에는 바라는 모든 것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곳에 떨어져 처음으로 목표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알 수 있었다. 저 끝에는 내가 원하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을. 걸음을 옮길수록 보이는 것은 눈부시도록 푸른 바다. 그리고 바다와 나를 막고 있는 절벽이었다. 더는 갈 곳이 없어졌다. 벼랑 끝에 털썩 주저앉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앉아있었다. 예전부터 많이 그려보았던 그림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기분이었다. 항상 꿈꿔왔던 상황이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딛는 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뛰어내려야 할 이유는 100개라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뛰어내리지 못했다. 살고 싶다는 아주 조그만 마음이 죽어야 하는 모든 이유를 눌러버렸다. 이렇게 죽지 못해 살아있는 나는 용감한 놈일까? 아니면 비겁한 놈일까? 이런 나의 마음을 한 명에게 만이라도 터놓고 말 할 수 있다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났다. 헛되게 살아왔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세상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친듯이 눈물이 났다. 이 넒은 지구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떠나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외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숨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지만 서러웠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참 더럽게 이기적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리낌 없이 가면은 바꿔 쓴다. 이기적이 새끼(나한테 하는 말이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깨에 뭔가 내려앉았고, 어깨를 보니 손이 올려져 있었다. 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수첩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아마 이 뒤의 이야기는 오늘의 내가 적어야 할 것이다. 내가 방금 꿈을 꾸었는데, 당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이런 거지 같은 일을 해야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내방의 모습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일까? 수첩에 적힌 일들은 사실일까? 내가 방금 꾼 꿈처럼 그저 꿈을 적어 놓은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라고 기억하고 느끼는 지금 이 순간도 그저 꿈일 뿐일까? 아무것도 확신 할 수가 없다. 방 안의 모든 것들은 나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비웃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떠올랐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수첩에 오늘의 나를 적는 것 뿐이다. 내일의 내가 알 수 있도록.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내가 수첩을 읽었다는 것도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겠지만. 정신을 잃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알려야 한다. 오늘의 내가 살아서 내일에 너에게 넘겨준 삶이라는 걸. 그러니 너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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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이 나에게 건네준 삶은 찬란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다. 당신들이 그동안 새겨 놓은 삶들은 지루하기도 했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절실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제 밤 꿈 속에 누군가 찾아와,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는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입가를 말이다.

 맞은 편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보인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다. 누군가 나에게 찾아온다면, 오늘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아니라 저기 보이는 저 문을 열고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어보고 싶다. 나는 당신들을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하느냐고.

임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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