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아무 데도 안 가요

by 민호 posted Feb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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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데도 안 가요 -



*


근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실상 나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고민은 쭉 이런 방식으로 흘러왔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내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들이 피로를 느껴 잠시 방향을 잃은 결과였나 싶다. 정말 불행히도, 정말이지 슬픈 일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부모님께 조언을 구할 수 없었다. 두 분이 서로에게 헌신적이지는 못했기에 그랬던 것도 있었고, 몇몇 일들을 겪으며 부모님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더 잘 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뒤였으니까.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도 그런 것이, 아버지는 수년간 어머니의 병원비로 적지 않은 금액이 나가는데도 싫은 소리 한 일이 없었다. 그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 드러난 뒤에도 마찬가지고, 아버지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굳이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면 정말이지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가 있었다.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몇 안 되는 동료 교수들이나 주변인들, 심지어는 어머니까지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낡은 틀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이라기 보단, 틀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수리하는 축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고, 이제와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가 저지른 행동은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구도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안방에서 오갔던 말들은, 오,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위험할 정도로 화가 나 괴성을 지르는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는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그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것이 전부라는 듯 차분히, 한편으로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양 말했다.

“당신에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에 어리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뭘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얼마간 집을 떠나 있었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은 나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닐 테니 신경 쓰지 말라 엄포를 놓는 일이었고,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다음으로 한 일은 집안 청소였다.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체했고 보통은 그렇게 행동했지만, 이따금씩 내가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면 자신의 남편을 찾아가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난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가장 화가 나는 건 여전히 그렇다는 사실이고요.” 아버지는 같은 태도로 대꾸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달라질 건 없다고. 잊어버려.”

그런 말들을 내뱉고도 여전히 두 분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사랑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두 분은 그때보다 나이가 들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은퇴한 시점에는 완전히 노인이 되어 버렸다. 두 분은 지금에 와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잊어버린 양 굴 정도로 뻔뻔하지도 못했다.

나는 가끔 시간이 비거나 할 때면 아버지와 술을 마셨는데, 내가 연락하는 경우는 적었고 대부분은 아버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내가 도착할 쯤이면 이미 몇 잔을 들이켠 뒤였고 조금 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가 정말로 취했다 생각되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야 술을 마실 수 없는 몸이었기에 당연히 그런 상황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기운을 빌려 많은 것들을 얘기했고 자리에서 일어날 시점엔 여러 말들이 오간 뒤였는데, 무언가가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 다한들 제와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전히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



의자는 두 개뿐이었고 짐을 놓을 공간도 없었다.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 아버지는 늘 그곳에 앉아있었다.

“왔니.” 내가 어깨를 건드리자 아버지가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고 내가 자리에 앉자 천천히 얼굴을 살폈다.

“몇 잔이나 드신 거예요?”

“서너 잔 마셨다.” 그가 말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어. 금방 왔다. 옆에 앉은 커플 보이지? 저 사람들이랑 같이 왔다.”

옆 테이블엔 젊은 커플이 있었다. 내가 마주 보는 방향에는 남자가 앉아있었는데, 묶어 올린 머리칼에 긴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귀걸이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과 함께 찰랑거렸다. 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양 말했다.

“뒷모습만 봤을 땐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더라.”

“요즘은 뭐,” 내가 말했다. 눈썹을 한 번 들썩였을 뿐, 별 관심을 두지 않자 아버지는 메뉴판을 건넸다.

“알아서 시켰다. 늘 먹던 것들로. 다른 걸 먹고 싶다면 더 시켜도 좋아. 테이블이 작아서 자리가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괜찮아요. 좋아요.”

“맥주 마실 테냐? 요즘 얘들은 소주를 시켜봐야 별로 마시질 않으니까.”

“이젠 요즘 얘들도 아닌걸요.”

아버지는 몸을 기울여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내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아버지. 뭐든 좋아요. 아버지 드시는 걸로 시키세요.” 아버지는 종업원을 부르려 손을 들었는데, 구석 자리라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다시 메뉴판을 살폈다. 여전히 손은 든 채였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종업원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버지는 소주 하나를 주문하고 다시 나를 보았다.

“정말 더 안 시켜도 되겠냐?”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고민하다 음식을 하나 주문했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종업원이 떠나자 아버지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네게 자주 얘기하기도 했다만, 네가 멀쩡하게 자라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눈짓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키더니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넌 어려서부터 말썽 한 번 피우질 않았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 만일 네가 저런 남자를 만났다가는, 오, 내가 뭐라도 저질러버리고 말았을 거다.” 그가 말했다.

“그래,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는 거냐?

“나는 말이다, 얘기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네가 여러 남자들을 만나봤으면 한다. 여러 남자를 만나보다 제대로 된 녀석 하나 골라서 결혼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테니까.”

“만나는 사람이야 있죠. 늘 있었어요.”

“그게 정말이냐? 응? 지금도 만나고 있고?” 아버지는 조금 놀리는 투로 말했다.

“군인, 그러니까 중사예요.”

아버지는 내가 거짓말하는 건 아닐까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는 대견하다는 듯 기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만나보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고요.” 내가 말했다.

“그래, 약속이 잡히면 그땐 네 엄마랑 함께 보자꾸나.”

아버지는 술은 마시고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잔을 들이켜고 입가에 흐른 것을 닦았다.

“그래서 언제쯤 만나볼 수 있냐?” 아버지가 금방 다시 물었다. 나는 막 나온 음식을 한 입 먹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직 그런 얘길 해본 적은 없어서.”

“오, 그런 사이는 아닌 거냐?” 아버지가 말했다. “잠깐 만나보고 그러는 사이인 거야? 그 남자랑은 결혼하지 않을 셈이냐?”

“아깐 여러 남자들을 만나보라면서요.” 아버지는 잠깐 당황한 듯, 눈알을 굴리더니 말했다.

“군인이라면서? 정신은 제대로 박힌 놈이겠지.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말하는 거다만, 가끔 얘길 나눌 사위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제가 있잖아요. 어머니도 있고.”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이럴 거냐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남자들끼리의 대화도 필요한 법이야. 여자들은 끼어들 수도 없고 끼어들어서도 안 되는 그런 대화 말이야. 가끔은, 정말 가끔은 말이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하기도 해.” 아버지는 병을 완전히 비우고 나서 말했다.

“그럼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

“그건 제 잘못이 아닌걸요?”

“물론 네 잘못은 아니지,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 응? 내가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그냥 그런 거야.”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조금 짜증이 난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머니 얘길 하시려는 거죠?” 내가 말했다.

“어머니 얘길 하시려는 거라면 좋아요. 궁금하기도 했는걸요.”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말씀해 보세요, 일단 시도해 보자고요. 시도하는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아버지가 말했다.

“애초에 이 얘길 입에 올렸으면 안 됐어. 그냥 넘어가자,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는구나.” 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꺼내 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담배 하나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나는 반쯤 잔을 비우고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취기가 오른 얼굴을 하고 여자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자 또한 남자를 응시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일랑 밝고 따뜻할 것이라는 눈빛으로.

나는 다시 아버지를 보았다. 복잡한 눈이었다. 더 재촉한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더 묻지 않을게요. 지금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럴 마음이 들면 얘기해 주세요. 아버지 딸이잖아요?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언제든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하세요.”

“미안하구나.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는….”

“이해해요.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다른 얘기해요.” 내가 말했다.

“일 얘기할까요? 아버지 일 얘기 좋아하시잖아요. 늘 충고뿐이긴 하지만.”

“내가 그랬었나? 오, 그랬다면 다 널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야.”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얘기해봐, 네 얘기라면 뭐든 환영이다.”

“저희 원장님에 관한 건데, 들어보세요. 재밌을 거예요.” 나는 종업원을 불러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그은 테이블을 보더니 더 시키실 것은 없냐고 물었다. 난 아버지를 힐끗 살피고 말했다. “일단은요.” 종업원은 옆 테이블에도 같은 것을 물었고 그 커플은 술을 한 병 더 주문했다. 종업원이 떠나자 여자는 남자의 옆자리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기댔다. 여자는 응석 부리듯 남자의 가슴을 꼬집었다. 난 그들을 구경하다 조금 자세를 틀어 다시 아버지를 마주했다. 아버지는 어서 말해보라며 손바닥을 내보였는데,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특이한 사람이에요.” 내가 말했다.

“치과엔 손님이 많은데, 하나 같이 나이가 든 분들뿐이죠. 그분들 중에는, 사실 거의 대부분이 그런데, 치료가 적절하지 않았거나 때로는 완전히 잘못되어서 돌아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재밌는 점은, 이해되지 않는 점이기도 한데, 그분들은 원장님 실력이 형편없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도 동네 근처의 다른 치과로 옮길 생각이 없더라고요.”

“그렇겠지. 나이 든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기질적으로.” 아버지가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뭐랄까, 원장님을 퍽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어요. 이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인데, 원장님은, 외모 얘길 꺼내긴 그렇지만, 결코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에요. 대머리며, 마스크 옆으로 삐져나오는 지저분한 수염이며, 진료복이 구겨질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온 배는 정말…. 보통 이런 것들은 매력이랑은 거리가 있잖아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냐? 머리가 그렇게 벗어질 정도면 내 또래쯤 됐으려나?” 아버지가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실례예요. 육, 칠십은 가뿐해 보인다니까요.”

“저런, 어쩌다가….”

“모르겠어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전문가처럼 보여질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내가 말했다.

“그래, 특히 아이들이 기겁을 했어요. 도무지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 진료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죠. 끝날쯤에는 목이 전부 쉬어서는 숨만 겨우 헐떡이고, 오, 그럴 때마다 제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니까요. 애들은 무슨 끔찍한 고문이라도 당했다는 양 엄마, 아빠를 찾기 바쁘고….” 아버지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 그렇게 느끼기보단 내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 표시에 가까웠다. 내가 계속 말했다.

“보호자들은 고생하셨다고, 죄송하다고 말은 하는데, 표정은 마치 ‘내 새끼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하는 표정이었죠. 거기다 대고 원장님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랬어요.” 나는 최대한 원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뭐, 애들이 다 그렇죠.”

아버지는 대강 알겠다는 듯 웃었다.

“직원들에게 인기는 없겠네.”

“그럼요.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직원들한테는 말도 예쁘게 안 해요.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느낌이랄까요?” 난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말했다. “여자들은 그런 사람 싫어해요. 아버진 남자라 모르실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웃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기분이 상해 보이진 않았다.

“그 얘긴 끝난 줄 알았는데.”

“오, 죄송해요. 그냥 아버지 생각을 듣고 싶었어요. 나이 든 환자들은 그런 원장님을 왜 좋아하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찌 됐든 아버지 또래고, 게다가 아버지는 교수시니까.”

“교수였지.” 아버지가 말했다.

“글쎄, 그 원장이란 사람,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만, 말이 많은 편이냐?”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죠. 환자분들을 대할 때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내가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쉽게 말할 수는 없다만, 그냥 이런 것 같다,” 아버지가 말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잖냐, 택시기사라든가, 가끔씩 먼저 말을 붙여오는 사람들.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는 정말로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거든, 상대가 낯선 이든 누구든 그저 말을 붙일 상대가 필요한 사람들 말이다. 그런 기질을 지닌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지. 더군다나 주변에 친구나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 정말 상상하기도 싫을 거다.” 취기가 오르는지 아버지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래, 나이 든 환자들. 아마 그런 경우일 거라 생각한다. 조금만 원장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중 몇몇은 원장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몰라, 일부로라도. 그래야 다시 치과를 찾을 수 있고 원장과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넘겨짚는 걸 수도 있어. 어쩌면 보수적인 노인네들이 그 원장이란 사람의 성격으로부터 어떤 끌림?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다른 치과로 옮기기 귀찮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도 그 원장의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뭐, 아무래도 전자일 경우가 크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좋은 사람처럼 들리네요.” 내가 비아냥거렸다.

“그 양반 결혼은 했냐?”

“맞춰보실래요?”

“그렇겠지.” 아버지는 술잔을 채우더니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취하셨어요?” 내가 말했다. “취하신 모양이네.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드셨나 봐요.” 실상은 나 또한 취한 상태였다. 말이 조금씩 편해졌고 스스로도 그렇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우리 몇 병이나 마신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걸요. 아버지 취하신 거죠?”

“그런 것 같구나. 아니, 그런 것 같니? 아가, 아빠가 취한 것 같아?”

“그런 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취하신 것 같은데요? 전 결혼을 고민해야 할 나이라고요.” 아버지는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그래, 저 공공장소에서의 염치라곤 없는 커플처럼 말이지. 네가 남자랑 있는 모습이라니.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는구나.”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새삼스럽게 뭘.” 내가 말했다. “그만 일어날까요? 영감님?”

“오, 아가. 제발.”

“그 아가 소리를 계속하실 거라면 쭉 이렇게 불러드릴게요.” 내가 짓궂게 굴자 아버지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눈짓을 보냈다.

“그래도 말이다, 나나 네 엄마나 나이가 들긴 한 모양이야.” 아버지가 말했다. “네 엄마랑 이렇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함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이해해요.”

“정말 이해하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아버지의 얼굴 선위로 진중함이 드리웠다. 그는 진중한 답을 원하는 듯 보였다. 나는 가볍게 대답하려다 잠깐 뜸을 들였다.

“음.” 내가 말했다. “분명히 모르는 부분도 있다고는 생각해요.”

아버지 역시 혼란스러운 듯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결국은 얘기해야 할 모양이구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오, 오해하진 말거라. 아빠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어. 그저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네 원장에 관한 얘기, 그 젠장 맞을 양반 얘길 꺼낸 시점에서 알아차렸어야 했어.” 아버지가 말했다.

“네 원장 얘길 더 해야겠구나. 물론 아빤 그 사람을 몰라. 어디까지나 추측일 거다. 하지만 널 이해시키기 위해선 그 양반 얘길 해야만 해. 주변을 빙 도는 얘기라 생각될 수 있지만 끝까지 들어주렴. 응? 그럴 수 있지 아가?”

“말씀하세요. 시간도 넉넉한 걸요. 아버지 편한 방식대로 말씀하세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나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 양반은 똑똑한 사람일 거다. 치과의사니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동시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을 하지 못한 것, 피를 나눈 자식이 없다는 게 그 증거야. 그는,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인 거지, 아빠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거야. 어떤 면에선 그 양반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복잡하구나, 정말 복잡한 문제야.” 아버지는 이마를 짚었다.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마다 하던 버릇이었다.

“그 양반이 왜 결혼을 못했다고 생각하냐? 정말로, 왜 그런 것 같아?”

“음, 대머리 원장님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젊었을 적부터 대머리는 아니었겠지. 게다가 치과 원장인데, 인기가 없었을까? 속물스런 여자 한 둘쯤은 접근하지 않았겠니?” 몇 가지 반론이 떠올랐지만 난 아버지가 얘기를 끝내도록 두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그 양반이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 양반은 일찍이 알았던 거야. 결혼할 나이, 아마 서른이 되었을 때쯤 알았겠지. 자신이 기질적으로 너무도 까칠해서, 혹은 다른 이유야 뭐가 됐든,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자격이 없다는 거다. 겁쟁이인 거고.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노인네들을 보면서, 세상에, 그 양반이 무슨 생각을 했겠니. 책임감은 요만큼도 없고 남자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아버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술을 마셨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우더니 곧바로 잔을 채웠다. 나는 말리지는 못하고 얘기했다.

“천천히 드세요 아버지. 시간은 많아요. 밤새 얘기하신대도 상관없어요.”

아버지는 잠시 뭔가를 곱씹더니 말했다.

“남자가 책임감이 없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조금도 남자다운 게 아니지, 여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그렇고말고. 이건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생물학적 무언가를 고작 백 년 남짓 살다 떠나는 인간이 어쩔 수는 없는 거야.”

“요즘은 또 달라요. 남자가 남자답고 여자가 여자다울 필요는 없는 거죠.” 내가 말했다.

“오, 아가, 또 시대가 변했다는 둥 하는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거니?”

“사실인걸요.”

“난 정말 그 말이 싫다. 아무리 들어도 그래. 생각을 해봐라, 갑자기 어린놈들이 튀어나와서는 저들보다 삼, 사십 년은 오래 살아온 내게, 그동안 당신이 살아온 삶은 틀린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다니.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지고, 지식이라곤 없는 멍청한 생각들인지….”

“여자들도 책임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어머니도.” 내가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아픈 어머니를 두고 불륜을 저질렀느냐고.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만일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아버지를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자리를 떠나거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뭔가 더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이 없자, 생각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때 일을 얘기해야겠구나. 듣고 싶은 거지? 그게 듣고 싶을 거야.” 아버지는 숙였던 상체를 뒤로 물리고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건, 네가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꽤 어렸을 때니까. 네가 다섯 살쯤 됐을 때였나, 우린, 그러니까 네 엄마랑 나는 둘째를 가질 생각이었고 정말로 원했단다. 특히 네 엄마가 그랬지. 하지만 네 엄마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어. 네 엄만 그 일로 몹시 상처를 받았단다.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보다 둘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더 슬퍼했어. 그리고 그즈음에, 더 이상 네 아비라 생각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만, 충동이 찾아왔다. 미쳐버릴 지경이었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런 하찮은 생각들…. 그런 하찮은 생각들이 모든 걸 망치고 만 거야.” 나는 숨을 들이쉬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아버지를 보았다.

“아빠가 앞으로 할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야. 이제와 네게 거짓말한들 무슨 소용이겠니. 아빠는 정말로 네 엄마를 사랑했어.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내가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매 순간 자신을 다잡는다는 게…. 교수라는 두 글자에 눈이 멀었던 거야. 거만했던 거지. 내가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적어도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결국 아빠는, 나는, 그래 인정 하마, 그 원장처럼 똑똑하지 못했던 거야. 남자답지도 못했고. 내가 감당할 수 없으리란 걸 모르고, 아니, 알았더라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아버지가 말했다. “내 말 이해할 수 있겠니? 아가? 내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이런 얘길 꺼내도 됐던 걸까?”

“이해해요 아버지. 정말 이해해요. 어머니도 그건 이해하실 거예요. 그래서 아버질 떠나지 않으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였는데, 아버지가 눈을 맞추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있던 얘기, 내가 쏟아낸 것들, 지금 네가 느끼는 것들 전부, 없던 일로 하자꾸나. 약속해주렴, 그래 줄 수 있지? 아가? 그러지 않고는 도무지….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얘길 꺼내다니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됐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변하는 건 없어요. 전 언제까지나 아버지 딸일 거고, 아버지도 언제까지나 제 아버지일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약속할게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는 정말로, 지금껏 오갔던 얘기들일랑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듯 가볍게 몸을 털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일어났다. 집으로 향하는 길엔 하천이 조용히 흘렀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가, 오늘 우리가 만난 거, 네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뭐, 눈치챌 수도 있지만, 의심하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다르니까. 일단은 비밀이다. 네 엄마한테도 그게 좋을 거고.”

“그럴게요.”

“먼저 들어가마.”

“그러세요. 영감님.”

난 아버지를 먼저 올려 보내고 아파트 입구를 서성였다. 어머니가 의심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할까. 애초에 시간이 지난 들 의심이 사라질까? 어머니는 바보가 아니다. 차라리 바보였다면, 그랬다면 여기서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뭐라 얘기할까. 미안하다고? 그 일은 실수였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마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도 굳이 묻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난 여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그냥 그런 거라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결국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