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에게
어쩌면 세상이 반으로 갈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갤러리의 하얀 벽과 검은 벽의 모서리에 자리를 배치 받았을 때 부터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갈라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먹었을 수도 있다, 삶과 죽음처럼.
갤러리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오드리 헵번의 흑백영화가 한 쪽 벽면에 크게 틀어졌다. 헵번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를 본 뒤 나는 이따금 밤이 지겨워 질 때 마다 풍물시장에서 운 좋게 구한 헵번의 영화들을 밤새 틀어두고 잠에 들었다. 어느 날 아침 ‘샤레이드’에서 헵번은 그녀의 얼굴만 한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그때 처음으로 헵번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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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의 집엔 큰 상이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자리에 앉아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수저와 젓가락으로 상에 흠집이 나도록 치고 있을 때 쯤 이면 할머니는 따뜻한 뚝배기에 무언가 푸짐하게 담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신장도 나이도 중간 이었던 나는 늘 모서리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밥은 맛있기만 했다. 할머니는 나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큰 상 사러 가자”
내가 집에서 나오게 될 때 까지 큰상에 앉아 보진 못했지만 그 집을 나오는 순간 세상이 너무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앞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멈칫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때 할머니는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그곳을 떠나던 날 할머니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루에 1분씩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짜 세상에서의 나의 삶은 그 1분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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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은 갤러리 헬퍼 이다. 햇수로 4년 째였다. 전시와 전시의 중간 지점에서, 혹은 주제와 주제의 구분에서 뚜렷한 주제 없이 검은 옷을 입고 앉아있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관람객의 통솔과 정숙을 관리 하며 가끔은 큐레이터를 도와 진행을 하기 도 한다.
나에게 이 직업은 천직에 가까웠다. 마주 앉아 있는 새내기 헬퍼가 하품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다가 사무장에게 눈초리를 받았다. 9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질적인 허리 통증이 나를 따라다녔고, 윤기 났던 나의 밝은 갈색의 머리는 검정색 염색약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나에겐 전시를 보는 눈이 생겼고 미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검정색 배경의 그림이 내 앞을 스쳤다. 지방시의 검정색 드레스와 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가볍게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 여러 다발의 진주 목걸이는 영롱히 빛나고 있었고 헵번의 머리 위 티아라는 그녀의 빛나는 홍채를 닮아 있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녀였다. 갤러리는 가정의 달을 맞아 오드리 헵번 특별전을 열었다. ‘어린이와 어머니의 우상,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녀 오드리 헵번’ 이라는 슬로건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태생부터 죽음 까지300평이 넘는 갤러리 안은 오드리 헵번의 인생의 서사에 따라 채워지기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 그녀의 사진은 내 맞은편에 자리 했다. 그렇게 가끔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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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오드리 헵번을 닮았어, 아가 ”
거울에는 할머니와 나의 얼굴이 겹쳐서 보였다. 할머니의 오래된 접이식 거울 한 모퉁이 에는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붙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나의 머리를 묶으려 진주모양을 한 머리끈을 하나 사오셨다. 나는 그 머리끈을 정말로 소중히 여겼다. 할머니의 우상이었던 오드리 헵번이 죽은 1993년 그 해 겨울 나의 입양이 결정 됐다. 고아원 원장은 나에게 운이 좋다고 말했다.
“ 네 새로운 어머니 아버지는 교수님에다 돈도 엄청 많이 벌어 , 너무 잘됐다..!!!
할머니 얘 머리 좀 묶어 주세요. 그리고 머리 다 묶이면 화장실 청소도 좀 부탁드릴게요!”
고아원 원장의 목소리는 상기됐었다. 할머니는 말했다.
“ 이리 온 예쁘게 머리를 묶자 ”
문득 문득 머리를 묶는 할머니의 손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같이 움직였다. 나는 눈을 이만치 올려서 할머니의 손을 훔쳐보았다. 할머니의 손의 주름은 날 안심 시켰다. 머리를 다 묶었는지 할머니는 내 머리를 꼭 눌렀다.할머니가 나를 위해 몰래 챙겨주던 카스테라 같은 포근함이었다. 할머니는 소보로 빵을 더 좋아 하신 탓에 카스테라는 늘 내 몫이었다. 모든 세상의 잘못의 면죄부가 나는 할머니 손에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 매일 모서리에서 밥 먹느라 고생했다 아가 ”
나는 말이 끝나게 무섭게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큰 눈에선 왈칵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았다. 그때 난 처음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슬픔이 피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어졌다. 할머니는 찢어지고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은 나를 겁먹게 했다.
할머니의 눈물은 나의 손등을 타고 바닥으로 하나 둘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우는 나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더 크게 울지 않으셨다. 그저 나를 꽉 안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 오드리 헵번은 아무데서나 울지 않았어 아가 ”
겨울의 햇빛은 눈에 반사되어 더욱 쨍하게 느껴졌다. 그 날 이후 나는 진주 머리끈을 들고 나의 조그만 기억의 광산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 그것들을 꽁꽁 묻어두고 생각했다.
‘ 다음에 이곳에 올 땐 할머니가 좋아했던 하얀 장미가 피어 있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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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성황리에 시작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생을 보며 누군가는 울기도, 누군가는 소녀처럼 웃으며, 그렇게 각자 다른 방법으로 헵번은 추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헵번이 좋아했던 하얀 장미를 다발로 들고 와 그녀를 추억하려 했지만 나는 그 꽃다발을 제지 할 수 밖 에 없었다. 그것이 ‘룰’ 이었다. 전시회장에 출입하기 위해서 나는 그 하얀 추억을 보관 해야만 했다. 나의 검정 바지에 장미의 하얀 모습은 더욱이 고고하게 보였다. 문득 지금 어머니 아버지의 납골당 앞에 무슨 꽃이 놓여져 있는지 생각했다. 아마 수국이었다. 오래되고 예쁜 식탁 위엔 항상 수국이 있었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수국 너머 앉아 있는 나를 틈틈이 살피고는 간이 짜지 않는지, 국이 뜨거 우니 조심히 하라 던지 투명한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언젠가 수국이 아닌 프레지아로 화병을 채워 드린 적이 있었다. 식탁 너머의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날 꽃집에서 수국을 사들고 화병에서 프레지아를 빼왔다.수국은 언제나 금방 시들었다. 어머니를 추억해야하는 날이 자꾸만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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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햇살이 비출 때면 할머니를 추억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 아버지를 추억했다. 나의 추억에도 룰이 필요 했다. 나는 꽤나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 만큼 불행과도 친했다. 17살, 비오는 날이었다. 연기 나는 차 안에서 나의 저녁 도시락을 꼭 안고 계셨다. 우산을 들고 학교를 나오며 오늘 저녁 메뉴는 뭘까 생각했다. 교문 앞에는 희뿌연 안개가 낀 듯 했는데 무언가 펑하고 나는 소리에 교문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는 좋아 하시던 비를 맞으며 돌아 가셨다. 희끗 희끗 검은 연기에 문득이 보이던 어머니의 손이 왜 잊혀 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차에 붙어있는 불은 비에 황급히 소진 되었다. 붉고 날카롭게 나의 뇌는 그 장면을 카메라처럼 찍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나의 삶의 끝까지 그 모든 장면들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든 순간, 나의 추억에는 ‘룰’이 필요 했다. 살아가기 위함 이었다. 경제적인 것들은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다. 학교 후 남는 시간에 아르바이트 정도면 충분 했다. 남기고 가신 유산은 종로에 큰 저택 뿐 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저택은 나에게 너무 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대로 저택을 남겨 두고 홀로 나와 살기 시작했다. 그 집을 나오면서 나는 운명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신이 있다면 나는 신의 뒤편 그 언저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천직이기도 했다. 그것이 운명일거라 확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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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검정색 드레스가 있는 D 섹션은 늘 나의 퇴근길과 함께 했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전시회장 에서 홀로 그 드레스 앞에 섰다. 오드리 헵번의 작은 체구와 똑같이 제작된 마네킹에 드레스는 마법처럼 감겨 있었다. 감히 입어보고 싶다는 상상 조차 들지 않았다. 40여년이 지난 드레스였지만 여전히 빛이 났다. 가벼운 왈츠 소리가 어디 선가 들려왔다. 곧 마네킹은 일어나 나에게 손을 건 냈다. 헵번은 나에게 춤을 권했다.
문득 나의 발에는 토슈즈가 신겨져 있었다. 왈츠의 선율에 나는 천천히 발을 떼어 헵번의 리드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은 발레였다. 발의 감각은 둔해 졌지만 몸이 발레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헵번은 그렇게 춤을 추었다. 완벽한 리드였다. 그 완벽한 안정감은 오래된 느낌을 연상케 했다. 할머니의 손이 나의 머리를 꼭 누르던 때와 같은 완벽한 안정감. 갤러리 바닥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나는 헵번과 함께 그녀의 생애를 거닐 고 있었다. 이렇게 천천히 예쁜 토슈즈를 신고 헵번과 함께 춤추고 싶었다.
“이 순간이 영원 했으면 좋겠어요, 헵번 ”
덜컥 암전이 되었다. 갤러리를 닫고 나갈 시간이 왔다. 나의 갈색 단화는 그렇게 토슈즈
대신 발에 신겨져 있었지만 나는 그녀와의 이 시간을 즐겼다. 이 드레스 앞이라면 그녀와 함께라면 영원히 춤 출수 있을 것 같았다. 갤러리 문을 닫고 93번 버스를 타고 오며 나는 이 갤러리 헬퍼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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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을 간 뒤 나는 어머니에게 발레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나는 값비싼 토슈즈와 레오타드를 입고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와의 첫 대화는 그렇게 발레로 이루어졌다고 좋아하셨다. 토슈즈를 하나 두 개씩 바꿔갈 때 마다 늘어나는 건 내 발레 실력 뿐 만이 아니었다. 오드리 헵번이 했기에 선택했던 발레였다. 할머니가 좋아 했기 때문에 선택 했던 오드리 헵번 이었다. 하지만 춤을 출 때면 그곳엔 나 뿐 이었다. 춤을 출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나는 그를 흠모 했다. 할머니를 추억하지 않음에 죄책감이 들지도 않았다. 발레를 하는 시간을 제외한 그 모든 시간엔 할머니가 존재 했다. 그렇게 10년간 발레를 했고 17살 비오는 그날, 나는 한 손에는 토슈즈를 다른 손에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다시 나의 기억의 광산 앞에 서야 했다. 하얀 장미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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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가 얼마 안 남았네요. 섹션 D에 헵번 드레스들 손대려는 관객들이 많아요. 헬퍼 분들 주의 좀 부탁드려요. 핸드폰 사용 자제 해주시고요. 마지막 날 경매 열리는 거 다들 아시죠?
짧은 조회였다. 헬퍼 들은 일제히 자신의 자리로 흩어졌다. 3일 후면 이 곳은 늘 그랬던 것처럼 깨끗한 백색의 도화지로 변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갤러리는 또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텁텁한 나의 갈색 구두 소리를 끊어 내듯 사무장의 목소리는 나를 뒤 돌게 했다.
“다음 전시도 계속 할 거죠? 앙리 카르티에 사진전이 열릴 거예요.”
오드리 헵번의 명언들이 사무장의 뒷 벽면에 가득히 적혀져 있었다.
문득 무수히 많은 오드리의 가치관이 문장으로 변해 나를 지켜보는 듯 했다.
“아, 아뇨 사무장님 이번이 이 전시회 마지막으로 그만두려 구요.”
“아, 왜요?”
사무장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녀에게 나는 가장 맘에 드는 헬퍼였기 때문이었다.
메뉴얼 대로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사무장은 애착을 느꼈다. 나 또한 그런 생활이 나쁘지 않았고 나와 사무장은 은연의 동질감을 공유 하고 있다 해도 무리가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무장님”
사무장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을 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죠?”
사무장은 말했다.
“네 저는 이일을 참 좋아 했어요 사무장님”
차라리 다행이었다. 말을 아낄 수 아는 그녀라 더 고마웠다.
나의 이별은 늘 그렇게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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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아원 앞에 섰던 건,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았다. 나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곳은 이제 큰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되어있었다. 서울 모퉁이 한적한 지역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근처에 생긴 갤러리 탓이었다. 유명한 미술계 저명인사가 설립한 갤러리였다.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을 모두 다 섭외해 전시를 열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전시회를 보러 모여 들기 시작했다. 고아원 주차장은 예쁜 공원이 되어 있었고 여러 잡지에도 소개 되었다. 추억들은 여기 저기 곳곳에 서려 있었지만 기억하려 애를 써야 찾을 수 있는 흔적이 많았다. 길을 걷다 문득 시간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지나온 시간과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들이 일종의 선처럼 그 일대를 휘감겨 눈앞에 펼쳐졌다. 어지러웠다. 나의 인생은 직선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일도, 위험한 발상도 없었다. 그저 목적지가 없는 직선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무수한 선들은 그가 잘못되었음을 지적 하는 듯 했다. 이렇게 내 인생은 무수히 많은 선으로 만들어져 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갤러리 안에 있었다. 작품과 벽, 그리고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날부터 일주일간 나는 갤러리를 매일 찾아갔다. 3일 동안은 작품을 보았고 3일 동안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헬퍼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로 에 이력서를 넣었다. 오랜만의 욕구가 내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흐를 것 이라는 것, 그런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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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flowers you choose, the music you play, the smile you have waiting. I want it to be gay and cheerful, a haven in this troubled world.”
'당신이 고른 꽃,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 당신이 기다리는 미소.
나는 그 모든 것이 경쾌하고 즐겁기를, 이 험한 세상의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Audrey Hepburn
전시회의 마지막 날 경매를 준비 하느라 2시간 일찍 출근 했다. 경매장 벽면에는 이번 경매의 모토인 오드리 헵번의 명언이 쓰여 있었다. 헵번의 첫째 아들의 아이디어로 열린 경매였다. 헵번이 직접 그린 8점의 작품과 3벌의 드레스가 경매의 물품으로 선정 되었다. 3벌에 드레스 중에는 검정색 새틴 드레스 또한 포함이 되어있었다. 경매의 하이라이트였다. 사교계 인사들이 온다는 소문은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공개 경매였기에 그를 구경하러 온다는 사람들 또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사무장 까지 상기된 모습은 꽤나 오랜 만이었다. 미묘한 긴장감이 들 정도였으니 그날은 갤러리의 공기부터가 달랐다. 갤러리는 늦은 오전부터 북적 거리기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 곳에 있는 사람 전부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을 귀중히 여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귀감이 되었고 그 귀감은 또 다른 귀감을 낳았다. 그 안엔 할머니와 내가 있었다.
문득 내일 아침을 생각했다. 내일 아침엔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또 다른 직장을 찾은 것도, 뚜렷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뚜렷한 기준 점이 나에게 사라져 버린 듯 했다. 나에게 시간은 지나가게 두는 것이었다. 시간 앞에 놓여 있는 운명이라는 산을 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웃던 소리가, 할머니의
볼품없던 손이, 기억나지 않았다. 발레 콩쿨 대회에서 나의 모습을 찍으려 달려오다 넘어졌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이 나지 않았고, 나긋이 책을 골라 오라던 아버지의 저음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천천히 잊기 위해 나는 갤러리에 갇혔다.
이 전시가 끝나면 나는 또 다시 시간에 흐름에 한 발짝을 내딛어 어디론가 실려 가야 할 것이다. 그 여정을 향해 나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헵번 만난 탓이었다, 왜 헵번은 이 순간 나의 시간에 불쑥 끼어든 것 일까. 이것이 운명이라면 ,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받아 드려야 할까, 피식 웃음이 낫다.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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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장례식장은 17살 무용학도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곳이었다. 성품이 좋으신 부모님 덕에 식장에는 잔치를 하듯 많은 사람들이 오고 나갔다. 친인척과 지인들은 자리에 앉아 나를 걱정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 순간의 난 장례절차에 맞춰 변호사 선생님과 함께 움직일 뿐이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였다. 내가 눈물을 흘릴 때 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었다, 아무도 떠나게 할 수 없었다. 화장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유골함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었다. 내가 깨어 난 건 변호사 선생님의 전화 때문이었다. 생모를 찾아주시겠다고 하셨다. 미성년자인 나는 아직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거부 했고 나는 법적인 보호자로 변호사님을 위임했다. 나의 생모와 생부가 누구든 중요치 않았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 참으로 기괴한 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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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를 알리는 알림 소리가 갤러리에 퍼졌다. 복잡해진 머리가 한 순간에 깨끗이 정리 되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경매장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나는 관람객의 질서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매사가 등장 하였고 그렇게 경매는 진행되기 시작했다. 헬퍼들은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자 할당받은 구역의 뒷정리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난 경매장 뒤에 위치해 있던 검정색 새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보기로 결심했다. 드레스는 여전히 단단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요. 안녕 헵번”
순간의 정적이 나를 짓눌렀다. 덜컥 차오르는 눈물이었다. 정적을 깨듯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헵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의 목소리였다.
“괜찮단다, 아가.”
눈물을 참기 위해 서둘러 뒤를 돌아가 청소를 시작했다. 포토 월 앞의 방명록을 사무실 안에 들여 놓아야 했다. 어린이 재단에 경매금의 이익과 함께 기부 된다고 한 사무장의 지시였다.
방명록을 살펴보던 중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거울 모퉁이에 붙여져 있던 헵번의 사진이었다.
틀릴 수 없었다. 사진을 집어 들어 보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헵번에 사진에 금새 눈물이 떨어졌다.
“수희에게”
사진의 뒷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시끄러운 경매장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속이 뒤죽박죽 소리를 내며 오작동 내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모른다. 나도 잊었던 나의 이름이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리를 참기 힘든 울음이었다. 정의 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날 이후로 처음 이었다. 나는 그렇게 울기 시작했다. 온몸은 떨렸고 숨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쁘게 쉬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시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오래된 손 하나가 내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오드리 헵번은 아무데서나 울지 않았어, 아가.”
박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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