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지붕의 집

by 신하영입니다. posted Apr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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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지붕의 집>

 

술을 잔뜩 마신 탓인지 머리가 많이 아프다. 진작 집에 갔어야 했는데 역시 난 분위기에 약하다. 여기서 두 블록만 더 가면 우리 집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마음 같아선 택시를 타고 싶지만 지금 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냥 걷기로 한다. 고요한 분위기. 새벽 공기 참 좋다. 코를 들어 바람을 마시니 술이 어느 정도 깨는 것 같다. 담배라도 펴야겠다 싶어 근처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담배 연기는 지금 내 한숨과 같다. 이렇게 술만 마신 날이 언제부터였는가, 아니 언제부터가 아니지 전역하고 줄곧 이랬으니까.

내 통장 잔고는 빗물에 생긴 웅덩이처럼 얕아 곧 메말라 버릴 듯 하고, 월급 날 까진 2. 월급을 받아봤자 시급 5580원에 80시간 하면 겨우 50만원 남짓. 내 나이 23, 다시 복학은 해야겠고 그전에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기는 그러니 돈도 벌어야겠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난 그저 그런 볼품없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다.

과는 건축학과. 소중한 사람을 위해 집을 만들고 싶어 건축하과를 지원했다만 내가 건축이란 걸 얕잡아 본 탓인지 어려운 부분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 정말 이러다간 이도저도 아닌 놈이 돼버리고 마는데…….

난 어느새 다타버린 담배를 손에 쥔 채 입술을 깨물고 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머지 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저기 신문가판대가 눈에 보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TV에서 실업자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신문이나 뒤져봐?’

나는 신문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330. 일단은 자야겠다, 라는 생각에 이제는 엄마 품보다 더 좋은 내 침대 속으로 몸을 던졌다.

눈을 떴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일도 없고 약속도 없는 한가한 날이다. 시계를 보니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부모님은 출근을 했는지라 집안은 고요 그 자체였다. TV를 켜고 냉장고를 연다. 전날에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혀가 텁텁하다. 나는 포도주스를 마시고 TV를 보다 테이블에 놓여 진 신문을 보고 무릎을 쳤다.

아 맞다!”

이건 설렁설렁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는 샤워를 하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나갈 테니 시켜만 주십쇼. 라는 마음가짐이었다. 토목, 건축 부분을 살펴보니 일할거리가 상당히 많이 보였다. 하지만 전화를 해보니 막노동의 느낌이 크게 나서 나는 신문을 보는 눈을 약간 높이자 했다. 과가 건축학과다 보니 거만해진 것이리라.

거만한 건 아는데 그래도 아무데서나 일한 순 없지!

그렇게 3시간. 볼펜이 부서질 정도로 체크를 한곳은 단 두 군데 밖에 없었다. 현대물산과 효진 건설. 막상 전화를 하려니 떨렸지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번호를 눌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건 어느 할아버지였다.

, 구직공고 보고 전화했습니다. 설계 부분에 조수를 구한다해서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전화는 밝게 다가서는 게 단연 최고다.

, 조수? ……. 거 나이가 어떻게 되요?”

“23살입니다. 지금은 한양대 건축학과 다니다가 휴학 중에 있고요.”

건축학과? 그러면 그쪽으로는 좀 알겠구만.”

중후하게 깔리는 목소리에서 약간의 위트 함이 느껴졌다.

. 나름 자부할 수 있습니다.”

나는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했다. 얼굴에 약간 경련이 일어나긴 했지만.

위치는 거기 적혀있겠고 한번 찾아오게나. 내 전화로는 답답해서 안 돼.”

, 찾아가면 되는 건가요? 근데 저 여쭤볼게 있는데.”

뭔가?”

월급은 어떻게 되고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 알고싶…….”

! 젊은 놈이 그렇게 앞서가면 되나, 일단은 찾아와.”

무심하게도 할아버지는 내 말을 딱! 잘라 말하셨다.

, 일단은 찾아가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쇳소리와 함께 전화는 마무리됐다. 생각보다 격식이 없는 전화였다. 난 현대물산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주소가 적힌 신문지를 들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효진 건설은 과연 어떤 곳일까?

.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있고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자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그곳에 효진 건설이 있었다. 통나무로 된 3층집. 실로 전통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직원들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 걸음으로 큰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왔다. 이곳, 왠지 느낌이 좋다.

, 여기로 들어와.”건물 안쪽에서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히 문을 열고 집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집안은 생각보다 크고 고급스러웠다. 수십 개의 액자와 윤기 나는 오동나무 기둥,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가옥 모형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집안을 구경할 때 2층 계단 쪽에서 할아버지가 내려오셨다.

아까 전화한 청년 맞지? 이쪽으로 오게나.”

할아버지는 하얀 머리에 하얀 수염에 리드미컬한 주름을 가지고 계셨다. 연세는 70대 초반 정도. 할아버지를 뒤따라 간 곳은 작은 사랑방이었는데 세련된 디자인의 나무 탁자위엔 유리로 된 응접세트가 놓여있었다.

오는 길이 참 멀지? 거기 의자에 앉게나.”

할아버지는 선풍기를 테이블 쪽으로 틀고 내 맞은편에 앉으셨다. 그렇게 면접시작. 자질구레한 대화 없이 할아버진 자신의 일에 적합한 인재를 찾는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셨다. 기에 눌리기는 했지만 무게 잡힌 목소리 안에 약간의 가벼움도 느껴져 나는 내 PR과 동시에 묻는 질문에 요령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효진 건설에 온지 한 시간 남짓 됐을 때 면접은 끝이 났다. 3. 해는 쨍쨍했고 바람은 살랑살랑 좋았다.

오늘은 일단 가보게나, 내 나름 생각해보고 전화주지.”

, 알겠습니다. 근데 저, 여기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날도 좋은데 제가 지금 할 게 없어서요.”

할아버지는 입 꼬리를 약간 올리시곤 말하셨다.

그래, 그럼 구경하고 가.”

털털하기도 하시지. 나는 깊게 목례를 하고 효진 건설 간판이 있는 곳에서 산책을 시작했다. 여기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땅위에 펼쳐진 초록색 바다. 넓은 들판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초록색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도시에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자연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한다면 나는 무조건 후자가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것들을 보며 흥미로움을 느끼는 자체가 너무 기분 좋았다. 그렇게 새로운 기분을 만끽하며 30분 동안 주변을 산책했다. 이제 여기가 내 일터란 말이지! 라는 김칫국을 마시면서 말이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3일 전만해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다리를 벌벌 떨었지만, 다행이 어제 연락이 와 오늘부터 효진 건설 사장인 김창엽 할아버지의 조수로 일을 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면접 때와 달리 딱딱하시다. 웃음도 없으시고 생각 이상으로 말도 없으셨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효진 건설은 우리나라 전통가옥을 짓거나 복원하는 일을 하는 회사다. 1968년 창설 이래 47년이 지난 나름 뼈대 있는 작은 기업이었다.

할아버지가 1. 자그마한 돋보기안경을 쓰고 일하시는 모습이 매우 고지식해보이는 할아버지였다.사장님, 이거 다락방에 놔두면 되요?”

끄덕. 할아버지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그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신다. 그렇게 내 잡일은 시작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정말로 이정도 일 줄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나는 묵묵히 일을 했다. 참고 일하는 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105만원 이라는 큰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막노동의 결실인가 했지만 실제로 할아버지나 몇 명 안 되는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름 여기에 적응도 됐고 할아버지 까진 아니라도 공사를 담당하는 서창원 아저씨나, 디자인 담당 심수연 누나랑은 나름 친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이! 하루 총각 점심 먹고 해.”

창원 아저씨는 멀찍이에서 항상 밥을 먹으라고 소리치신다.

, 가요!”

여기서의 식사는 그야말로 감동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회사인 탓인지 식사도 한국고유의 음식을 내어준다. 근데 중요한 건 너무 맛있다는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직원 8명과 할아버지,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둘째 딸 김희연 아주머니. 그렇게 우리는 옹기종기모여 식사를 한다.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너무 행복했다. 정말이지, 나는 이런 정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잘 묵네. 한 공기 더 먹어라 밥 많다.”

그래도 될까요? 아주머니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밥이 잘 넘어가네요.”

어머 고마워라. 하긴, 내 김치가 맛있긴 맛있지 호호. 잠시만 기다려, 내 금방 갖다 줄게.”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젊은 청년이 많이 먹어야지.”

할아버지는 묵묵히 젓가락 질만하신다. 같이 대화라도 하면 좋을 텐데……. 들어보니 할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참고로 수연이 누나는 말문을 트는데 자그마치 6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근데 또 술 한 잔 하시거나 둘이 있을 땐 몰라요.”창원 아저씨가 이쑤시개를 입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수연이 누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누나에게는 그것도 아닌가 보다.

맞아, 아버지가 저래도 원래는 엄청 재밌는 분이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봐.”

희연아주머니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 처음 면접을 봤을 때 할아버지는 농담기가 가득하셨다. 그게 할아버지의 본모습인데 내가 조수라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은 먼저 다가가야겠지?

.

한 달이 지났다. 오후 4. 2층 테라스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열심히 무엇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일을 하나 싶었지만 이번엔 웬일인 걸 할아버지께서 풍기는 아우라가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하다고 해야 하나? 빠르게 움직이는 손에선 재촉이 보였고 할아버지의 동그란 안경에 비치는 눈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뭐지?

나는 마른 하늘위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하얀 종이에 그려지는 집은 뭘까? 할아버지의 슬픔을 그리는 펜촉이 유난히 진하게 보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일요일. 나는 할아버지가 맡기신 경주 민속촌과 안동 민속촌 가옥들의 정보가 담긴 파일을 정리하러 효진 건설에 왔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막상 혼자서 일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프로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나는 숨통이 막히는 찜통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 덥다. 근데 이방은 뭐지?”

아무래도 혼자다보니 자신감이 생겼나보다. 나는 금색으로 된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할아버지의 방인 것 같았다. 낡은 테이블 그리고 스탠딩, 액자. 나는 솟구치는 흥미로움을 그만두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방안에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졌다. 액자.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한 여자와 손을 잡고 있다. 그 뒤에는 수백송이의 코스모스가 보였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신혼여행 사진 인 것 같았다.

잘 생겼네, 우리 사장님.”

나는 삐뚤어진 액자를 바로 잡아주고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그것.

일단은 나무 기둥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이 얹혀져있다. 지붕 쪽에는 작은 글씨로 하얀색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다섯 평 남짓한 잔디 마당과 넒은 대청마루, 오픈형 주방, 서재, 하얀 울타리 안에 목화나무, 통유리로 된 창문. 널찍한 도면지에 그려진 그림은 참으로 다채롭고 예쁜 집이었다. 그나저나 이 도면은 왜 그리셨을까?

나는 눈으로 그 도면을 찰칵 찍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궁금증은 내 머릿속에서 마치 종양처럼 쑥쑥 커져나갔다. 하지만 나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힘들었다. 그랬다간 내가 방에 들어간 걸 알게 될 테니까.

.

저기, 사장님 이번에 주문 들어온 집, 제가 한번 그려보면 안 될까요?”

어느덧 여기서 일한지도 3개월이 넘어간다. 나는 그동안 현장에서 배운 기술과 홀로 연습했던 도면 그리기를 보여주고 싶어 할아버지에게 앙탈을 부렸다. 할아버지는 흑심이 묻은 손을 탁탁 털어내고 애교 섞인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서 일한지 얼마나 됐지?”

“100일 정도 됐는데요.”

할아버지는 벽장의 달력을 한번 쳐다보시고는 웃음 섞인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래, 니 오늘 약속 없제? 일 끝나고 내랑 술 한잔하자.”

, 술이요?”

? 싫나?”

, 아니에요. 갑자기 그러시니까 깜짝 놀랐어요.”허허. 내 할 얘기도 있고, 이제 하루 니랑 말 트일 때도 안됐나 싶어서.”

3개월 전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는 왠지 모를 설렘과 고마움이 들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일대일인가요?”

당연하지, 오늘은 일적인 관계가 아니고 남자대 남자다 알겠나?”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와 인간적인 관계로 첫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효진 건설에서 차로 15. 전을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이라는 가게로 향했다. 가게는 조선시대 주막처럼 안뜰과 마당에 상들이 놓여있었다. 풍요로운 가야금 소리가 기둥에 달린 스피커에서 웅장하게 나오고 있었고 여름이라 그런지 편안한 차림의 사람들이 옹기종기모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아, 이런 곳이 아직도 있나 봐요. 분위기 좋은데요?”

고마 젊은 놈 데리고 올 곳은 아닌데, 나이가 뭐 중요하나? 술만 맛있으면 됐지 안 그렇나?”

리드미컬 한 주름살, 하얀색 수염. 나는 그럼요, 라고 말한 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주문한 해물파전과 막걸 리가 나왔다. 세상에! 막걸리에 살얼음이 있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한잔 받거라.”

할아버지가 조롱박 반쪽으로 된 술 국자를 들고 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도 한잔 받으세요.”

그래, 그래.”

그렇게 우린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고 속절없이 건배했다. 나는 그저 두근두근.

어이, 하루야. 니는 아직도 내가 불편하나? 그래, 고마 내 3개월 동안 무뚝뚝하기는 했지. 근데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할아버지는 시금치무침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에게 물음표를 던지셨다. 솔직히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상대방이 마음을 열면 나도 덩달아 마음을 여는 편이라 현재의 바뀐 할아버지의 모습에 어색함의 자물쇠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뇨, 불편하진 않아요. 근데 그 이유가 뭔데요 사장님?”

, 그냥 일종의 시험인기라. 내 이때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100일을 넘기는 사람은 한명도 없더라고. 니도 알다시피 여기서 일하는 게 쉽지는 않다이가. 근데 니는 잘 버티더라고, 내 조용히 지켜봤다만 하루 니는 인성도 좋고 말붙임도 좋고 사람이 좋더라고. 내 조수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거라, 그래서 오늘 내가 술 한 잔 사주는 거다.”

뭐지? 내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봤던가?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나는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몸들 바를 모르겠네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나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셨다. 덩달아 내 마음도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이 담긴 술잔들에 나는 조금 취해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아직 멀쩡하다. 역시 연륜엔 못 따라 가나보다.

근데 니는 와 집을 지을라하노?”

, 저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좋게 말하면 그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고 싶었거든요.”

소중한 사람? 진짜가?”

, 생각해보면 조금 진부할 수도 있는데, 좋잖아요? 누군가를 위해서 집을 짓는다는 거.”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래, 그거야 말로 집짓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지. 이 할애비는 말이다 6.25전쟁 때 친구를 한명 잃었어, 아마 낙동강 전투였을 거다. 그때 나는 목수였지, 친구랑 사람들한테 집을 지어주면서 살고 싶었거든. 포안에서 싸울 때 고마 친구 놈이 내 옆에서 꼬꾸라지더라고……. 근데 그때 워낙 상황이 급해서 치료를 할 수 있어야지. 지도 딱 죽을 거 알고 내한테 말하드라이가 니는 계속해라고. 나무로 사람들 편하게 살 수 있는 집 어떻게든 만들어 라고. 이말 해버리고 마 삶의 끈을 놓더라. 내야 전쟁 통에 벌벌 떨면서 싸웠는데 그때는 내 북한 놈들 죽이고 무조건 살아야겠다, 라는 마음이 들더라. 내뿐만이 아니라 싸웠던 사람들 모두가 그랬지 그 사람들도 옆에 있는 전우가 죽고 그랬으니까. 그 덕분에 이겼어. 근데 친구 놈이 죽으니까 이긴 것도 안 느껴지더라. 그냥 그 놈이 나한테 해준 말만 생각났지, 그래서 내가 이 효진 건설을 만들었다이가. 네 말처럼 소중한 사람한테 편안한 집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도 있고 그리고 내 금마랑 한 약속을 어째 어기겠노.”

할아버지는 굳은살이 베긴 손바닥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감동했다. 남자의 의리 그리고 그 약속에.

그런 사연이 있으셨네요. 그런 거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사연이 뭐가 중요하노? 직업에 귀천 없듯이 사람은 뚜렷한 목표의식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가요. 저는 아직 풋내기라 그 소중함이라는 게 크게 와 닿지가 않네요.…….”

조금만 있으면 알게 된다. 고마 그런 걱정을 하지마라.”

다시 잔을 채웠다. 할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와는 정말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계셨다. 난 그것이 참으로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누군가 말했다. 노인은 위대한 스토리텔러 라고. 나는 할아버지의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그 도면도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인자 배부르나?”

어우, 진짜 잘 먹었어요 사장님.”

그래, 그러면 인제 일어나자 할 일이 태산아이가?”

, 그만 일어나시죠.”할아버지와 나는 기분 좋게 을 나왔다. 내가 차가 없는지라 할아버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는 배려를 보여주셨다.

여기서 타면 되요 사장님.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사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술은 안 취하셨죠?”

쓰잘때기 없는 걱정은, 얼른 들어가라.”

, 들어가십쇼.”

, 그래 하루야.”

?”

이번에 들어온 주문 네가 한번 맡아서 해봐라. 이것도 테스트니까 한번 열심히 해봐라. 내 간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나에게 크나큰 행복의 짐을 맡겨주시고 가셨다. 가시는 뒷모습은 마치 단단한 거인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좋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조금은 묽은 밤하늘을 보며 콧바람을 흥얼거렸다. 오늘은 얇은 초승달이 떠있다.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든다. 내일부턴 정말 죽어라 일만 해야지.

.

그 후 나는 할아버지의 조수가 아닌 효진 건설의 도면설계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냥 이곳이 좋아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나에게 굴러온 좋은 인연과 기회를 받아드리기로 결심했다.

이거, 사장님이 인정하셨네. 고생했어, 하루총각.”

어머,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잘 없는데 잘됐네!”

뭐야, 나보다 더 친해진 거야? 향에서 술도 마셨다며?”

이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무뚝뚝했는지. 아무튼 난 효진 건설 사람들과 함께 갈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월급도 괜찮고 건축을 배우는데 나에게 이만한 곳은 없었다.

.

도면 작업을 하면 할아버지와 싸우는 경우가 많다. 전통가옥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현대건축에 물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도면을 현대방식으로 그릴 때가 있다. 할아버지 눈에는 당연히 눈엣가시일 수밖에.

야 이놈아! 이걸 이렇게 그리면 우짜노?”

, 사장님 이것도 예쁘지 않나요? 모던적인 게 좋잖아요.”

모던은 개뿔, 다시 안 그리나? 기둥이 이게 뭐고.”, 알았어요. 근데 솔직히 지붕은 괜찮지 않아요?”

입 안 다무나? 이게 유럽에서 집짓는 줄 아나, 내 볼일보고 오는 동안 싹 다 고쳐 놔라 알겠나?”

…….”

할아버지가 나가고 난 후 입을 쭉 내밀고 내가 그린 도면을 바라봤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분이라도 떨어졌나싶어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고요함속에서 미세하게 할아버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

문밖에서 덜커덩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 나는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할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사장님!”

나는 119를 부르고 할아버지를 업었다. 다들 출장 작업을 나갔기 때문에 효진 건설에는 할아버지와 나, 단 둘밖에 없었다. 하필 이때 아무도 없다니.

가까스로 응급실에 도착해 할아버지는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보호자 분 되십니까?”

백색가운의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요. 보호자는 아닌데 일단 가족 분들은 불러놨어요. 근데 저희 사장님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심장질환 인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발작증세가 일어난 것 같네요.”

많이 안 좋으신가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지만 추후에 주기적으로 진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네요. 자세한 건 보호자 분이 도착하면 설명해드리죠.”

일단 희연 아주머니가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부리나케 달려오셨다.

아이고 하루야, 이 무슨 일이고. 아버지는?”

저쪽에 누워계셔요.”

아버지 괜찮나?”, 방금 일어나셨어요.”

이윽고,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막내 딸 가족이 왔다. 희연 아주머니가 연락을 해서 다들 부랴부랴 온듯했다.

아버지! 아버지 괜찮아요?”

너희들 와이래 호들갑이고, 내 괜찮다.”

아빠, 내가 몸 관리 잘하라고 했잖아. 보약도 잘 안 챙겨먹고 뭐야 이게.”

괜찮다니까.”

괜찮긴, 근데 이 총각은 누구야?”

막내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생김새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계속 쳐다봤는데 그만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는다.

하루, 내 조수. 이 녀석이 119에 신고해서 병원왔다이가.”모든 가족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그 시선에서는 어쩐지 감사함이 느껴졌다.

아이고, 고마워라. 총각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고맙네, 하루라고 했던가? 안 그래도 심장질환이 있으셔서 걱정했는데 이거 고맙게 됐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었는데요 뭐.”

가족들이 내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어라? 근데 희연 아주머니 뒤쪽에 어여쁜 여인이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빠 다른데 아픈 곳은 없고? 이참에 건강검진도 싹 다 받자. 나 걱정 되서 못 살겠어.”됐다. 내 아직 팔팔한 거 모르나? 그나저나 효진이는 왔나?”

효진이?

그 어여쁜 여인이었다. 할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

, 할아버지 저도 왔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여인은 할아버지 곁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꼭 잡는다.

왜 울려고 해 우리 천사. 할아버지 괜찮다.”

안 울어요. 안 울 테니까 이제 걱정하게 하지 마요,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알았다, 알았다. 내 앞으로 걱정 안 시키게 할게.”

할아버지는 딸 바보가 아니라 손녀바보였다. 할아버지가 저렇게 바보같이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

10. 할아버지가 잠에 들었을 때 나머지 가족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좋은 일을 한 탓인지, 질 좋은 한우를 대접 받았다.

많이 먹어라, 부족하면 말하고.”

, 맛있네요.”

근데,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나?”

지금 23살입니다.”

우리 효진이랑 똑같네. 학교는 다니고?”

아니요. 학교는 잠시 휴학했습니다. 건축학과 다니는 데 학교 다니는 거 보다 여기서 돈 벌면서 일하는 게 더 좋아서요. 배우는 것도 많고.”

그래, 아버지 밑에서 일하려면 힘든 게 이만저만 아닐 텐데 잘 버티고 있나보네.”

, 얼마 전에는 같이 술도 한잔하고 어떻게 목수가 됐는지도 말해주실 정도에요. 친구 얘기. 저 그 얘기 듣고 엄청 감동 받았는걸요.”

역시 가족들이라 그런지 할아버지의 성격을 잘 아는듯했다. 그나저나 효진 씨는 나랑 동갑이구나. 그녀를 힐끔 쳐다보니 조용히 고기만 먹고 있다.

그러면 우리 엄마 얘기도 들었겠네?”

막내 아주머니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사장님 부인이요? 그분에 대해선 딱히 들은 게 없는데요.”

~ 아빠가 엄마를 지독하게 사랑하셨거든. 엄마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어 하셨어. 우리 부모님이 꿈이 하나있었는데 그게 둘이서 알콩달콩 살 수 있는 집을 한 채 짓는 거였어. 아빠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집을 지으려고 했지, 근데 돌아가셔가지고……. 에고고 내가 무슨 말은 하고 있어, 얼른 고기나 먹자 하루총각 많이 먹어.”

, 근데 듣고 보니까 사장님 무척 로맨틱 하셨을 거 같네요. 하나 궁금한데 그 집은 지으셨어요?”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질문을 했다.엄마가 없는데 지어서 뭐하겠어, 예전에는 그림도 막 그리시고 하던데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한우를 씹으며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그때 그 애절한 모습으로 그리시던 도면이 할머니와 함께 살려고 했던 그 집이 아닌가하고.

식사는 즐겁게 마무리됐다. 할아버지 가족 분들도 다 정겨운 사람들이라 그런지 미지근한 어색함 같은 건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가게를 나서기 전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왔다. 손을 씻고 문을 여는 순간 여자화장실 문도 열렸는데 나오는 사람을 보니 바로 효진 씨였다.

어라? 눈을 마주쳐버렸다. 이렇게 가까이서보니 정말로 미인이었다.

저기……. 고마워요. 할아버지 구해주셔서.”

앵두 같은 입술에서 가느다란 톤의 목소리가 나왔다. 두 손을 꼭 모은 게 무척이나 조신하게 보였다.

,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을 텐데요. 깜짝 놀라셨나 봐요?”

, 할아버지가 저를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 봐도 그런 거 같더라고요.”

아무튼 감사해요 오늘.”

효진 씨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먼저 가게를 나섰다. 곧장 뒤를 따라가는데 기분이 왠지 이상했다.

하루 총각. 집까지 태워줄 테니까 차에 타.”,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죠.”

내일도 출근인데 어서 가서 쉬어야지. 아버지 몫까지 해야 할 거 아냐?”

열심히 빈자리를 채우겠습니다. 얼른 쾌유하셔야 할 텐데.”

차에 타는 순간 효진 씨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라고 예쁘게 뻗은 눈매가 아름다웠다.

첫째 아저씨가 데려다 준 덕분에 나는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그때 그 벤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신다. 정말 바쁘게 하루가 흘러갔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달라져있는 거겠지? …….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사랑은 잘 모르지만 그것이 의미 있고 진부한 것인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아주머니 말로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지독히도 사랑했다고 한다. 지독히, 이 말이 가족의 입에서 나올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또 그것을 표현했던 것일까?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며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많이 슬퍼하셨겠지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사랑 애기를 등한시하던 내가 한 이제는 한 노인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해졌다.

.

3주 뒤 할아버지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으셨다. 할아버지가 없는 효진 건설은 그야말로 초토화였고 나는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낄 수 있었다.

, 하루야 저기 가서 대못 좀 갖고 오너라.”

, 사장님.”

대못이라고 했다. 쪼만한 거들고 오기만 해라.”

, 여기서 일한지가 몇 개월인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효진 건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나는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그냥 기뻤다. 할아버지와 다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던 어느 날. 지평선사이로 쓰러지는 해를 보며 작업을 정리하던 중 할아버지가 조용히 날 부르셨다.

오늘 약속 있나?”

아니요? 오늘 한가한데.”

그러면 내랑 어디 잠시 가자.”

어디요?”

우리 집에.”

집이요?”

할아버지는 들려줄 것이 있다하며 나에게 식사를 권하셨다. 이젠 할아버지의 집까지? 순간 설렜고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효진 건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초가을 밤 찌르레기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고 살랑 부른 바람은 나의 콧잔등을 스쳐지나갔다. 도심에서 조금 밖에 안 벗어났는데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둥글게 뜬 보름달도 밝았고 이 모든 것들을 몸소 느끼고 있는 내 얼굴도 밝았다.

여기가 사장님 집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말했다. 집은 경상도의 전통적인 가옥형태였다. 대청마루가 유난히 크다.

그래, 내 집이지. 예전에 내 와이프랑 살던데.”

사장님 부인요? 지금은 혼자 지내시구요?”

할머니 얘기가 나와서 나는 약간 놀랬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얘기를 오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사실 지내는 집은 따로 있고 여긴 내 별장이다. 쉼터.”

할아버지는 마루위에 있는 나뭇잎을 주워들며 말했다.

사장님 별장도 있으시고 좀 멋있는데요? 근데 여기서 뭐하려고요?”

여기서 술이나 한 잔 할라했지. 내 할 얘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술상을 준비하신다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집안을 살펴보니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고 정리정돈이 매우 잘 되어있었다. 할아버지가 별장이라 하셨지만 여기는 분명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또 추억하는 장소일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조촐한 안주상을 준비하고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효진 건설에서 일한지 어연 5개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아버지와 나는 서슴없이 잔을 건 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인자 가을도 무르익네, 나뭇잎들이 술술 떨어진다.”

그러게요, 시간이 엄청 빨라요. 조금 있으면 추워지겠어요.”

그래, 근데 니는 복학 안하나?”

아직 생각 없는데요, 여기도 적응했고 지금은 일하는 게 좋아서 복학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그건 그런데, 아직까진 효진 건설이 좋아요 사장님.”

그놈 참……. 얼른 한잔 받아라.”오늘따라 유난히 팔자주름이 선명하게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하루야, 니는 집을 짓는 사람으로서 꿈이 있나?”

꿈이요? ……. 꿈이라, 그냥 저는 집을 짓고 싶어요. 성취감이랄까요? 누구든 집을 짓는데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을 텐데 거기에 맞게 집을 지어주면 그 사람들은 거기서 행복하게 살 거잖아요. 그런 거 생각하면 뿌듯할 거 같고 덩달아 저도 행복할거 같아요.”

하루, 니 잘 아네. 자고로 건축이란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 거랑 똑같은 거다. 이 세상 모든 집에겐 다 각자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게 바로 우리들이 할 일인기라. 이거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가 만드는 그 하나하나에 많은 추억들이 생기고 또 집이라는 둥지에서 어느 누구보다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가? 이걸 항상 가슴속에 새기고 있어라, 집은 곧 천국이다. 사랑해야 되 집을.”

유리처럼 투명한 소주를 목에 들이부으시곤 할아버지는 소매로 입을 닦으셨다.

내 가슴은 멈칫 했다. 내가 계속 학교를 다녔다면 이런 깊은 의미를 한번이라도 생각 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의 말 한하나가 내 머릿속에 박혔다. 집은 곧 천국이라는 말. 가슴속에서 진득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게 몸에서 전율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아니다. 나의 선생님이자 스승. 나는 할아버지의 빈 잔을 다시 채워드렸다. 그렇게 짧은 고요함은 지속됐다.

사장님은 이때까지 일 하시면서 제일 의미 있었던 집이 뭐였는데요?”

침묵을 조용히 깨며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집 주변으로 눈빛을 보내셨다.

글쎄다. 아직 내 인생 최고의 집은 만들지 못했어. 생각은 하고 있다만 내 살길이 바빠서 허허.”할아버지가 말하는 집이 그 도면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머쓱한 웃음 뒤에 나오는 슬픔과 그때의 그 애절함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집이신데요?”

하늘을 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무척 진지해졌다. 잠시 뜸을 들이는 그 침묵이 나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내 우리 여편네랑 지내려고 했던 집.”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그 도면. 이제는 말해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로 입술을 적시고 나는 속에 있는 말들을 하나 둘, 끄집어냈다.

사실은, 사장님이 그리시던 도면을 봤는데 혹시 그게 그 집의 도면이에요?”

놀랄 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리곤 이마에 삼자주름을 만드시며 다시 입을 여셨다.

그래, 그때 네가 본 게 바로 그거다. 내 와이프랑 평생 지낼 집을 만들라고 했지. 예쁘더제? 가시나 그게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만들라고 해서 허허.”

? 알고 계셨어요?”

그러면. 그때 내 방에 몰래 들어가서 안 봤나, 내 그때 창고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렸었는데 고마 일은 안하고 농땡이 치는 놈 하나있데.”

죄송해요 사장님……. 근데 저, 할머니 얘기 좀 해주시면 안돼요? 사장님 사랑얘기가 궁금해서요, 그 도면에 관해서도 궁금하고.”

사랑얘기? 뭐 애기 할 것도 별로 없는데.”

할아버지 입엔 이미 미소가 번져있었다. 할머니 얘기를 하는 게 할아버지 입장에선 꽤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귀를 쫑긋 세웠다. 벌써부터 목메시는지 얘기하시기 전, 침을 꿀꺽 한번 삼키신다.

내가 6.25전쟁 때 친구 한 놈 잃었다 했제? 그 놈한테 여동생이 한명 있었어, 한 살이 어렸는데 얼굴이 예뻐서 남자 놈들이 집적거리는 거 우리가 막 패주고 그랬었지 허허 그게, 친구 녀석이 동생을 격하게 아꼈어. 어딜 가든 자기 동생 자랑만하고 다녔거든. 50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입대를 했을 땐 지 동생이 걱정되는지 눈물 한 방울 없던 놈이 펑펑 울더라. 그렇게 북한 놈들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지. 다행히 우리 둘이는 같은 부대에 있어서 마, 살붙이고 잘 지냈다이가. 근데 북한 놈들이 워낙 드세서 부산까지 밀리고 그때 친구 놈이 총알 맞아서 헐떡일 때 나한테 집 얘기랑 동생얘기를 했어. 동생 제발 잘 부탁한다고 진짜 부탁이니깐 동생만은 지켜달라고, 피 흘리고 막 울면서 얘기하는데 내 가슴이 여간 아파야지. ……. 그래서 내가 걱정하지마라고 했다. 그 놈 없고 나선 나도 많이 힘들었어. 사는 게 고통인데 내 친구랑 한 약속을 저버릴 수가 있어야지.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잘 살아있다이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목수일 하면서 친구 동생도 같이 보살폈다. 우리 와이프. 서로 잘해주고 아껴주다 보니깐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 친구 놈한테는 미안한데 이왕 사랑하게 된 거 옆에서 평생 지켜주자 라고 마음을 먹었지.”

흰 수염 가운데 있는 입술이 파르르 하고 떨렸다. 마음에서 울컥하는 게 올라오신듯했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수밖에.

김미애. 내 와이프 이름이다. 결혼하고 미애 건설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지. 내 옆에 철썩 같이 붙어있었어, 고집은 똥고집인데 또 배려는 한없이 많았지. 얼굴은 아까 말했듯이 진짜 예뻤고 몸매도 진짜 좋았다. 요리도 곧 잘했는데 나는 미애가 만들어주는 콩국수 제일 좋아했다이가. 그렇게 희재, 희연이, 희민이 낳고 옹기종기 잘 살았는데 고마 암에 걸리는 바람에. 손가락 하나 다치면 꽥꽥 소릴 지르던 여자가 그 암에 걸렸으면서 아픈 내색을 안 하더라. 암 걸렸다는 거 알고 나선 미애가 얼마나 미웠는지 허허, 내 앞에서는 한없이 여렸는데 지도 엄마인지 엄청 강하더라고. 그렇게 점점 내 앞에서 사라져갔지……. 미애 없는 세상은 상상도 안 해봤다 정말로, 그래서 나도 엄청 무서웠던 걸. 살아생전 내가 알고 내가 사랑하는 건 미애라는 여자밖에 없는데 그게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싶었지, 나도 참 어리더라고 우리 미애 앞에서는. 근데 마지막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겠노 하루야, 그래그래 바로 집이었지. 그래서 그 도면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우리 미애 원하는 대로 집을 만들려고 했어. 근데 암이라는 놈, 참 예의 없게 우리 미애를 그냥 데리고 가버리데. 하늘나라로 가버렸어 내 손 꼭 붙잡은 채로. 벌써 8년이 지나갔네, 시간도 참 빠르지.

하루야, 너도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이 사람이 없어져도 후회 안할 정도로 잘 해줘야한다. 그것밖에 답이 없더라.”

할아버지의 사랑얘기. 그것이 너무나 애달프고 슬퍼서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미간을 약간 찡그리시고는 굳은살이 베긴 딱딱한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왜 울어? 내 얘기가 그렇게 슬프나?”

아니에요. 안 울어요, 사장님. 근데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때의 할아버지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져 내가 물었다.

돌아가시고, 어떻게 지내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겠노, 말 안 해도 알겠제? 한 일 이년간은 죽었었다고 봐야지. 애들이 날 살렸어 금 같이 내 새끼들이.”

근데 미애 건설에서 효진 건설로 이름이 바뀐 건가요?”

, 이름? 그래. 우리 천사 같은 손녀 이름이 효진이 아니가, 하는 거 보면 미애를 쏙 빼닮았어. 내 새 마음 새 뜻으로 다시 일 시작할 때 이름도 같이 바꿔버렸다.”

, 효진 씨……. 근데 사장님. 그때 그리시던 도면은 그 도면이 아닌가봐요?”

아니다, 맞다. 그게 내가 미애를 그리워하는 방법이지. 그 도면을 그리고 다시 또 그리는 거.”이 말로 내 모든 궁금증은 풀렸다.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이 씁쓸한 게 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본 듯했다. 사랑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그것을 모르지만 조금은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묵묵히 소주잔을 넘기는 할아버지가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여어, 뭐한다고 멍때리노 얼른 잔이나 받아라.”

밝게 뜬 달이 우리를 밝게 비췄다. 향기로운 풀냄새, 깨끗한 바람, 그리고 참으로 깊었던 대화.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사장과 직원의 관계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

할아버지가 다시 쓰러지신 건 정확히 14일 뒤.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한참동안 안 나오는 걸 이상하게 여긴 창원아저씨가 서재 입구 쪽에 가슴을 부여잡은 채 의식을 잃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황급히 119를 불렀고 할아버지 가족 그리고 효진 건설 직원들이 급히 병원으로 모였다.

심장질환 증세가 계속 된다는 건 그 증상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표정들이 하나같이 우울 그 자체였다.

아빠 저러다가 진짜 큰일 나면 어떡해 오빠. 나 걱정 되서 못 살겠어.”

막내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치시며 말했다.

괜찮은 거다 걱정하지마라. 일단은 의사한테 얘기 들어봐야지.”

예예, 괜찮을 겁니다. 사장님이 보통 인물입니까? 금방 일어나실 거니깐 고마 걱정하지 마이소.”

잠시 후 할아버지 담당의사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일동 긴장.

김창엽 씨 가족 분들 되십니까?”

, 저희 아버지 많이 안 좋으신가요?”

오른쪽 중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한번 올리고 의사는 입을 열었다.

위에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건 급히 수술을 하셔야 될 것 같고요. 심장질환은 예전보다 많이 심해지셨네요. 혈압도 높으시고 심근경색증도 가지고 계셔서 장기치료를 받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종양은 수술하면 아무 문제없는 건가요?”

, 수술만 하시면 문제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김창엽 씨의 몸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 수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단다. 심장질환에 위종양까지.

나는 깊은 잠에 빠지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우울함이 가득 찬 공간을 모래 빠져나왔다. 담배를 물고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어느새 내 삶 전체를 덮고 있는 효진 건설의 존재가 새삼 느껴지니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니 효진 씨가 울상인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 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오늘은 밤하늘에 구름이 마구 떠있다. 회색 잿빛 구름이. 나는 하늘을 보며 속으로 계속 이 말을 되뇌었다.

제발 할아버지가 죽지 않게 해주세요.’

.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가족들의 진득한 보살핌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빠르게 되찾으셨다.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병문안을 갔다. 할아버지는 항상 날 반기셨고 하나도 안 아프다고 으름장을 내놓으시며 우리들을 안심시키려고 하셨다. 효진 건설은 창원 아저씨를 비롯해 수연이 누나, 경용 아저씨 등 직원들의 무고한 노력으로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할아버지도 직원들을 믿으시는지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으시는 듯 했다.

그렇게 한 달.

어느 날 수척해진 모습의 할아버지가 병원 옥상으로 산책을 가자고하셨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하루야…….”

, 사장님 말씀하실 거 있으세요?”

그래, 내 부탁이 하나있어서 이런다. 들어줄 수 있나?”

할아버지는 어느 때 보다 약해보였다. 나는 일반적인 부탁이 아닐 거란 예상을 했다. 싸늘한 옥상바람이 날카롭게 분다.

, 말씀만 하세요.”

……. 그 집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나?”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단호했고 또 절박했다.

집이요? 갑자기 왜…….”

이제는 만들어도 괜찮을 거 같아서 그런다.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를 꺼냈다.

내 방안에 책상 서랍 세 번째 열쇠다. 열어보면 도면이 있을 거야. 하루, 니 내 부탁 들어주는 거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이것은 고민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는 문제.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집, 제가 꼭 만들어 드릴게요.”

.

서랍에서는 낡은 도면 한 장이 발견됐다. 예상컨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 집을 생각하며 처음으로 그렸던 도면 인 것 같았다. 낡은 종이에는 할머니의 웃음과 할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사랑이 묻어나 있는 듯했다. 효진 건설 직원들에게도 모든 사정을 말하고 할아버지의 부탁을 도와달라고 했다. 직원들은 흔쾌히 허락해주었고 우리는 바로 착공에 들어갔다. 경비와 부지는 할아버지께서 말한 대로 준비했고 낡은 도면, 그것을 그대로 살려 우리는 열심히 집을 만들었다. 할아버지 가족들도 모두 두 손 모아 집을 만드는데 힘을 합쳤다. 슬프지만 사람들 모두 이것이 할아버지를 위한 마지막선물인 것처럼 일을 했다. 지붕. 우리는 할아버지가 특별히 부탁하신 하얀색 지붕을 만들기 위해 기와를 흰색으로 제작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하얀 지붕을 완성시켰다.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셨는데 할머니가 이 집을 구상할 때 하얀 지붕 밑에서 살고 싶단 말을 제일 강요하셨다고 한다. 아름다운 집에서 단 둘이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집. 새하얀 지붕 밑에서 서로를 위해 염원했던 그 집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나 서서히 완성되고 있었다.

.

하늘도 무심하시지,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떨어지는 단풍처럼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알약, 그리고 여러 번의 수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픈 동시에 어서 집을 만들어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바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지 못하는 게 바다라는 시간의 물결이다. 계절은 겨울이 되었고 바람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해갔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을 만드는데 노력했다. 하나같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꿈을 알고 있는 듯 열정을 다해 집을 만들었고 1월 초. 그토록 할아버지가 꿈꿔왔던 집은 우리들의 손길에 의해 완성됐다.

드디어 완성했네. 다들 고생했습니다. 이제 정리만 하고 얼른 사장님 모셔서 집 보여드립시다.”

, 제가 내일 아버지 모시고 올 테니깐, 다들 조금만 힘냅시다.”

어휴,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희연 아주머니는 행복해하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생각 한 듯 이내 눈물을 훔치셨다.사장님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이제 건강만 되찾으시면 될 텐데.”

그래그래 다들 우울해하시지 말고! 기분 좋게 정리하고 어서 집 보여드리자고요.”

멀찍이에서 효진 씨는 카메라로 집을 이리저리 찍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쪽으로 오더니 앵두 같은 작은 입술로 이런 말을 했다.

내일 할아버지 오시면 우리 꼭 사진 같이 찍어요.”

우리는 미소로 답했고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하며 하얀 지붕의 집을 열심히 청소하고 또 청소했다. 하늘에선 하얀색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

다음날.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는 하얀 지붕의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창문만 바라보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참으로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말을 걸어본다.

사장님. 기분이 어떠세요?”

기분? 좋지……. 평생 꿈꿔온 집을 이제 보는데. 하루 너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아니에요. 다른 분들도 얼마나 열심히 집을 지었는데요. 이제 집도 있으니까 병 같은 거 훌훌 털어버리시고 빨리 건강 되찾으세요. 그래도 효진 건설은 사장님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그놈 참……. 알았다 내 얼른 나아서 너희한테 이때까지 못한 잔소리 다 해주마.”

할아버지와 나는 웃었지만 사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기분이. 왠지 마지막이라는 느낌.

오전 11. 우리는 도착했다. 그 하얀 지붕의 집에. 모두가 차에서 내리고 할아버지도 차에서 내리셨다. 순간, 공기는 멈췄고 할아버지의 눈은 금방 이슬로 가득 찼다.

오열. 할아버지는 집을 향한 채 무릎을 꿇고 오열을 하셨다. 인생에서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 장면에 나도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렸다.

미애야……. 드디어 만들어졌다. 우리, 우리 같이 살기로 했던 집. 미애야……. 미애야…….”

하얀 지분은 하늘에서 내린 눈으로 더욱 더 하얗게 빛났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꺼내 집 기둥에 살포시 기대었다. 소매로 눈물을 닦으신다.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위로를 건네고 어제 효진 씨가 말했던 사진을 찍기 위해 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할아버지와 내가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다.

이주일 뒤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 소원을 이룬 탓인지 돌아가실 때 매우 평온해보였다고 효진 씨가 말했다. 장례를 치르고 할머니가 쉬고 계시는 묘지 옆에 할아버지를 묻어드렸다. 분명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할머니를 만나셨을 거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것이 설사 죽음 뒤에 있어도 말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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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역시나 흐른다. 나는 점점 성장했고 나름 괜찮은 건축업체에서 일하는 건축가가 되었다. 하얀 지붕의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사진만으로 집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효진 건설. 할아버지는 그렇게 떠나가셨지만 효진 건설은 계속해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창원 아저씨를 비롯해 수연이 누나, 경용이 아저씨 등등 모두가 많은 노력을 한 탓이다.

, 23살의 효진 건설. 나의 선생님. 그리고 많은 배움.

삶의 진정성, 그리고 사랑과 소중한 것들에 대한 믿음. 이것은 효진 건설에서 내가 배운 것들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계속 집을 짓고 있다. 집은 곧 천국.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을 난,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사랑. 난 효진 씨와 사랑에 빠졌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라고나 할까? 효진 씨는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착한 나의 천사가 되었다. 나는 그때의 그 할아버지를 매일 기억하며 이렇게 산다. 열정적이고 행복하게.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말을 생각하며.

하루야, 누군가를 위해 소중한 집을 짓고 싶다는 게 바로 이런 거다. 니는 나한테 행복을 줬고 천국을 준거야.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나도 내 이야기가 있듯이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거야. 건축이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삶들을 풀어내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다. 하루 니도 앞으로 사랑하고 아파하고 또 행복하면서 시련도 겪을 건데 그 속에서 너만의 이야기를 알고 또 그것들은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된다. 꿈은 말이다, 겁쟁이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그런 존재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에 자신이 없으면 세상 모든 게 니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거야, 난 아직 만족은 못한다만 생각해보면 많은 집들을 지었어. 그것들을 지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 속에서 내 삶의 진정성도 찾았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이거다. 집을 만들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껴라. 니는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다. 저기 저 지붕 보이제? 하얀 지붕. 저것처럼 하얗고 깨끗한 집을 지어서 사람들 행복하게 해줘라. 내가 뭐라고 했노, 집은 곧 천국이다. 알겠제? 이때까지 수고했다.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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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잘 지내시고 계시죠?  




신하영 math5425@naver.com 010)5025-9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