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by byulpd posted Apr 10,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애니
 설레는 그 말, 소개팅. 한글과 영어의 조합. 아니, 정확히는 한자와 영어의 조합. 대한민국에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 말들이 많다. 미팅에서 파생된 소개팅, 번개팅 심지어는 노예팅(을 해보고 싶다)까지. 하나의 목적으로 함께 공부를 하는 '스터디'에서 뻗어나간 밥터디라는 것도 있다. 엄연히 같이 밥먹는 자리에 스터디라는 말을 붙인다는 게 옳지는 않다. 그래도 뭐. 그들이 그런다니 그럴 수밖에. 난 어제부로 3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정확히 일 년이 됐다. 일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소개팅을 주선해줬지만, 꿋꿋하게 거절했다. 이건 나의 신조이며, 소신이다. 

 3년 사귄 사람과는 1년이 휴식기, 2년 사귄 사람과는 6개월이 휴식기, 그 밑으로는 한 달이다. 3년을 사귄 구 여친과 3년이 되기 전에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너무 양아치 같은 생각이라 접어뒀다. 2년 사귄 사람은 지금껏 없어서 그 규칙은 적용된 적이 없다. 2년 밑으로 사귄 사람은 꽤 있다. 난 이래뵈도 못생기진 않았다. 남들은 귀엽다고, 엄마는 잘생겼다고 말한다. 고로 잘생김과 귀여움을 한 얼굴에 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니 친구들이 소개팅을 주선하지. 구 여친은 이미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 남자의 이름은 park tae hyun. 페이스북에서 뒷조사를 좀 했다. 언뜻보니(사실 자세히 봤다) 이 사람 꽤 못 생겼다. 구 여친의 새 남친이라 그러는 말이 아니다.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다. 눈은 찢어지고 입은 크고 코는 납작하고,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이런 남자를 만나냐.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새 남친의 외모 밖에 못 보니까 어쩔 수 없다. 무튼, 난 일 년간의 자체 애도기를 지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지만 기억 속 나의 그녀는 죽었으니 애도기를 가져야 함이 분명하다.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애도기 따위를 가지는 건 아니다. 그 사이에 여자를 만나봤자 금방 헤어질 것 같아서 이런다. 외로워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헤어지더라. 옆에 있는 사람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구 여친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비교를 하게 되거나. 3년 사귄 사람과 헤어졌으면 일 년은 지나야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애도기가 끝났음으로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만나볼까 생각중이다. 흑석동의 망나니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
무수한 소개팅을 하기 전에 나름 기준을 세웠다. 첫 번째, 구여친과 닮아서는 안 된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 3년 사귀고 헤어졌는데 또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이제 다른 사람 좀 만나야지. 두 번째, 키가 나보다 작아야 한다. 아마 모든 남자가 소개팅할 때 다는 조건일 게다. 난 키가 170cm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보다 조금 예민하다. 요즘 키 큰 여자들이 많아서. 그래서 이걸 조건이라고 달고 있다. 난 나의 아담한 키(라고 쓰고 작은 키라고 읽는다) 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한 적이 없지만, 키 큰 사람 옆에 서면 주눅드는 건 사실이다. 주눅드는 감정은 부끄러움과는 다르다. 20cm나 더 큰 친구 옆에 서면(생각만 해도 싫다) 누구나 쪼그라들 게다. 188cm 남자가 208cm 남자 옆에 서면 그 느낌을 알지 않을까. 이런 조건을 달고 친구들의 소개팅을 하나 하나 접수하기 시작했다.
 
 정윤지. 나이는 24살. 이름처럼 여자. 학생 기자 활동을 하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고 친해진 동생이다. 첫 번째 소개팅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면서 '첫 번째'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게 된 친구다. 동네 카페에서 종종 만나는 사이. 
"오빠, 소개팅해달라고?"
"응 해줘 해줘"
"그런데 소개팅이라는 게,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먹는 것처럼 누르면 나오는 게 아니야"
"알고 있지만 친구는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처럼 네 외모가 또 워낙 출중하니까. 친구 중에 한 명 아무나 소개해달라는 거지"
"이 오빠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을 읽었나. 오늘따라 설득력 좋네. 안 그래도 봄이라 주변에 외롭외롭열매를 먹은 친구들이 꽤 있긴해. 내가 한번 물어나 볼게"
"고마워 역시 윤지 밖에 없다. 아무나 해줘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청순큐티한 사람으로 부탁할게"
"헛소리 그만해"

 이 대화가 끝나고 정확히 30분 뒤에 윤지는 '오빠 소개팅 ㄱㄱ'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첫번째 소개팅이 성사됐다. 첫번째 카톡 이후에 연달아 소개팅녀의 연락처가 왔고 신상정보가 몇 차례 더 왔다. 연락처를 받았지만 바로 연락할 수는 없었다. 이건 연애의 기본 원칙이다. 내가 안달나지말고 남을 안달나게 만들어라. 난 밤 11시에 카톡을 보냈다. 10시부터 11시는 여자와 폰이 멀어지는 시간이다. 이유는 드라마. 남자가 게임에 몰입하는 순간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된다. 괜히 10시 30분에 카톡보냈다가 성의없는 답장을 받고싶지는 않다면 드라마 시간은 피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김희준이라고 해요ㅎㅎ윤지 소개로 연락드려요ㅎㅎ'

ㅎㅎ와 ㅋㅋ의 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웬만하면 다 ㅋㅋ를 쓰고 ㅋㅋ를 쓰기에 애매하다 싶을 때는 ㅎㅎ를 쓴다. 예를 들면 처음 만난 사이나 헤어진 여자친구에게는 ㅎㅎ를 쓰는 게 맞다. ㅋㅋ[키키]의 발음기호처럼 얼마나 경박스러운가. 어색한 사이나 어색해진 사이에 경박한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네 안녕하세요^^시간은 언제가 괜찮을까요?'

이 여자 거침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 숨김 없는 사람. 

'이번주 수요일 저녁6시 합정동에서 볼까요?'
'네 좋아요 ㅎㅎ'
'네 ㅎㅎ'

대화는 이렇게나 간단하게 끝났다. 사실 할 얘기가 없는 순간이다. 그녀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녀를 모른다. 그렇다고 알아가기에는 둘의 운명이 불안하다. 한번의 소개팅으로 끝날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서로 얼굴도 모르는데 이것저것 터놓는 게 굉장히 어색하지 않나.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내일 모레 수요일이면 이틀 남았다. 팩을 사서 오랜만에 피부관리를 하고 운동도 좀 해야겠다. 

수요일, 첫 번째 소개팅
난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여자라는 동물은 더이상 나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남중 남고를 나와 대학교에 들어가 1학년 때는 여자와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지만 더이상 아니다. 나를 주눅들게 하는 건 나보다 20cm나 더 큰 남자애들 밖에 없다. 
합정동은 홍대 바로 옆에 있다. 정확히 홍대라는 지역은 서교동과 동교동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합정동은 동교동을 지나 서교동 옆에 자리한 동네다. 합정동은 홍대의 번화가적 느낌도 나지만 골목골목은 예술가마을같다. 이게 합정동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다. 데이트코스 아니, 소개팅 장소로는 더없는 장소가 아닐까. 
여섯시가 지났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뭐하는 사람일까. 카톡을 해보니 차가 막혀서 조금 늦는단다. 그래, 퇴근시간이니까 차가 많이 막히겠지. 지하철로 오면 안 막힐 텐데, 소개팅 약속에 5분 이상 늦다니 매너가 좀 없네. 여자는 6시 8분에 도착했다. 많이 미안해했다. 그래, 미안해해야지. 약속을 늦는 건 정말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개팅인 것을 감안해서 저녁엔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다. 맘같아서는 삼겹살이나 치킨이지만, 잔뜩 힘준 옷에 고기냄새가 베는 것도, 불편하게 치킨을 뜯는 것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일식이 이럴 때는 그러한 적당함에 아주 적절하다. 정갈한 분위기에 정갈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메뉴. 또 이 집은 예전에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 야끼소바를 무료로 준다고 했다. 난 전에 이 집의 후기를 작성해놨다.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지만 난 모르는 척 이 집으로 골랐다. 

 여자의 이름은 김정민, 나이는 24살. 서울 소재 간호학과를 다니고 있다. 나보다 4살이 어리지만 나이만큼 어려보이지는 않는다. 맥주를 마시겠냐고 물어봤지만 요즘 약을 먹고 있어서 술은 마실 수 없다고 했다. 전공은 적성에 맞는지를 물었고,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난 전공은 별로지만 복수전공이 재미있다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빠는 전공이 뭐에요라는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 질문을 발화점으로 내 인생 이야기를 적당한 길이로 이야기해줬다. 난 최근에 봤던 영화에 대해 질문을 하고 책이나 TV에 관해 물어보기도 했다. 그 친구는 내게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꼬노미야끼와 야끼소바는 금방 사라졌다. 내가 거의 다 먹었다. 말을 많이 해서 배가 고팠다. 계산은 내가 했고, 디저트를 먹겠냐는 물음에 자정까지 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쉽다며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이란 없을 것 같았다. 남녀 사이에 바쁘다는 핑계는 관심없다는 거절의 표시로 굳어진 지 오래다. 난 소개팅이 끝나고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쪽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모레도 글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첫번째 소개팅이 끝났고 실패 원인을 분석하지 않았다. 외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취향이 안 맞거나, 둘 중에 하나다. 어쨌건 실패다.

*
 주말에는 학교 근처에 있는 이디야 카페에서 알바를 한다. 손님이 워낙 많아서 같이 알바를 하는 형과 친해질 시간이 없을 줄 알았지만, 어쩌다보니 친해지게 됐다. 이 형에게도 소개팅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형, 저 소개팅 좀 시켜주세요"
"소개팅? 너 저번엔 안 한다며?"
"이제 하려구요. 전 여친이랑 헤어진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 해도 될 거 같아요"
"그래 그래. 소개팅. 시켜줄 수는 있는데, 내 친구들이니까 너보다 연상이라, 괜찮냐?"
"연상, 상관없어요. 전에 연상이랑 사귄 적 있어요" 사실이다. 2주 사귀고 헤어졌지만.
"그래 그럼 내가 연락줄게. 주변에 물어보고"
"네, 형"

나만큼이나 키가 작고, 얼굴이 순해보이는 이 형은 나와 같이 알바한 지 3개월 정도 됐다. 대학원생인데 마냥 집에서 용돈 받아쓰는 게 미안해서 용돈은 조금 받고 알바로 생활비의 대부분을 마련한다고 한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 형의 순한 얼굴과 부모님의 난감한 표정이 겹쳤다. '저 대학원에서 공부 더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 순간 흘렀던 정적을 어떻게 견뎠을까. 부모님의 휘는 허리와 흰 머리를 보고도 대학원에 가고 싶을 만큼 용기가 있었던걸까. 아니면, 이기적이었던걸가. 그 형과 사적이고 깊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강단있는 사람인지 부모에게는 어떤 사람인지 친구들에게는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주말마다 나와 앞치마를 메는 모습을 보고, 쓰레받이를 들고 여기저기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그런 상상이 된다. 그리고 이미 4학년인 내가 1년 사이에 생각이 바껴서 대학원에 가고 싶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가 닿는다. 만약 정말 가고 싶게 되면 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알바형은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일요일에 내게 연락처를 줬다. 자신과 동갑, 그러니까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여자. 어엿한 직장인으로 빌딩숲에 켜진 불빛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운명이 있다고 믿어서일까, 누가 어떤 조건이든 개의치 않는다.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된다고 밥먹듯 생각하며 살았다. 또한 만남도 이루어질 만남은 이루어진다고 지금도 믿어의심치 않는다. 결과가 무엇이 나오든 합리화시켜버리는 '운명'이라는 최종무기는 어쩌면 나를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을 '이게 운명이었네'라는 말로 눙쳐버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인연에 있어서는 난 운명이 분명있다고 믿는다. 노력해도 발전이 없는 관계, 노력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관계들을 숱하게 봐왔으니까. 사랑같은 건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대표적 분야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면 운명이라 믿는 게 속편하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직장인이라 해도 못 사귈 이유는 없다.

'안녕하세요. 선희씨. 소개팅하기로 했던 김석준이라고 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소개팅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금요일 저녁이 낫겠죠?'
'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좋아요. 장소는 어디가 괜찮으세요? 주로 어디서 노세요?'
'저는 합정 홍대 이 부근에서ㅎㅎㅎ'
'아 그런 합정에서 봐요. 직장은 강남인데 집이 그쪽이라'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저녁 합정으로?'
'넵^^'

 한 차례 실패를 겪고 난 다짐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멋있을 거야. 정말 얼굴도 괜찮고 건강한 생각을 가졌으며 미래가 창창한 남자가 FA시장에 나왔는데 도대체 왜.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거야. 아마 잘 될거야. 내가 잘 안 되면 누가 잘 되겠어. 날 안 만나면 누굴 만나겠어. 없는 자신감들을 끌어모았다. 가만, 그런데 그 선희라는 사람은 나이가 29살. 아마 결혼을 생각할 텐데. 난 아직 결혼은 모르겠지만 만나보고 결정하면 되지. 이쯤 생각하니 스스로가 웃겼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떠올렸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부끄러웠다. 

금요일, 두 번째 소개팅
또 합정역이다. 연이은 소개팅, 연이은 합정역. 그런데 선희씨가 돈을 버니까, 저녁을 사려나. 아님 그래도 내가 남자니까 내가 사야하나. 웬만하면 내가 사야겠지. 돈을 어떻게 낼지에 대해 혼자 생각하는 사이 선희씨가 도착했다. 우린 또 오꼬노미야끼를 먹으러 갔다. 블로그 포스팅한 걸 우려먹으려고 온 게 아니다. 저번 소개팅에서 블로그 이벤트를 한번 썼기 때문에 또 쓸 수는 없다. 가격대가 저렴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왔다. 앞으로도 소개팅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여기로 와야겠다. 정갈하다 정갈해.

"여기 와본적 있어요?"
"아니요. 합정 부근에 맛집 많이 아는데도 여기는 처음이에요"

물론 믿을 수 없다. 집이 합정이고 나이가 29살인데 여기를 모를리가. 여긴 꽤 유명한 맛집이라고. 게다가 오꼬노미야끼를 파는 곳이 그렇게 많이 않다고. 소개팅남에 대한 배려가 있는 여자라고 느꼈다. 

"소개팅이기는 하지만, 불금인데 맥주 한 잔 어때요?"
"좋죠.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선희씨는 귀엽고도 성숙한 외모를 지녔다. 귀여운 외모는 본래 그의 외모이고 성숙한 건 나이가 듦에 따라 생긴 매력일 것이다. 귀여움과 성숙함이 서로 조화롭게 있는 나이가 29살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랑 두 살 차이니까 나이 차이가 심한 것도 아니고 잘 맞을 것 같았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우린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야끼소바와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다. 저번에 만났던 정민이와 대화와 분위기를 떠올리며 선희씨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직장인이기 때문일까, 나보다 연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퇴근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선희씨는 내 말에 잘 웃어주고 심지어는 대화를 주도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보통 소개팅에서 여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1학년 때는 그랬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그랬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분명 다르다. 
 
 난 원래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술을 한 잔 마신 이 여자는 내게 2차를 제안했다. 2차? 전혀 생각치 못한 코스다. 우리의 대화가 꽤 재미있었나보다. 그래 좋아 2차 가는 거야. 난 내가 알고 있는 제주도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좋다고 했다. 여기도 처음이라고 했다. 이것도 역시 그냥 하는 말이겠지. 그럴지라도 새로운 맛집을 알려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 사람도 좋아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취향을 공유한다는 감정, 이런 느낌 오랜만이다. 우린 야외테라스에서 한라소주와 몸국을 시켜먹었다. 몸국은 매생이국과 비슷한 국으로 고기가 들어간 제주토속음식이다. 두 세 번 먹으면 익숙해지는 맛이지만 처음 먹으면 누구나 그 맛에 반한다. 선희씨 역시 그랬다. 진짜 맛있다고, 술이 쭉쭉 들어간다고 열심히 감상평을 하는 그녀는 벌써 내게 말을 놨다. 나도 놨다.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서로 정말 편하게 술을 먹고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는 얼마든지 이야기해 줄 수 있는데 과거의 연애까지 물을 때는 좀 곤란했다. 소개팅에 나와서 지나간 여자 얘기하는 건 무슨 상황일까. 난 끝까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게 사귀는 사람의 과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니 선희도 말하지 않았다. 서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난 그게 좋았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지금까지의 과거였으나, 소개팅자리에서 과거의 나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지나간 연애는!

우리는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 선희는 술을 센 사람이었다. 각 일 병씩 마셨으나 얼굴만 조금 빨개질 뿐 혀가 꼬이거나 비틀대지 않았다. 아무리 술이 안 취해도 벌써 새벽 1시인데 같이 있어도 되는 걸까. 소개팅인데 모텔을 가는 건 무례한거라 생각했다. 계산은 선희가 했고,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선희는 걷고싶다며 사람들이 많이 없는 골목길을 가리켰다. 몇몇 커플들과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만 있는 그 골목길을 걸으며 선희는 조금 비틀거렸다. 아까는 분명 멀쩡해보였는데 지금은 누가봐도 취해보였다. 취기라는 게 아무리 갑자기 온다지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선희는 내게 팔짱을 꼈다. 난 취해서 나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팔을 꽉 잡을 수 있게 선희의 손을 내 팔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한 순간 아이스크림은 누가 계산해야 할까를 떠올린 내가 쪼잔한 걸까. 편의점 아이스크림은 꽤 비싸다. 두 명인데 돈 아끼자고 2+1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근처에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빵빠레 하나와 월드콘 하나를 샀다. 돈은 3000원 가까이 나왔고 계산은 선희가 했다. 아이스크림을 올리기도 전에 선희는 지갑을 꺼내고 있었는데 누가 계산할까 따위를 생각한 내가 조금 한심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직장 상사를 욕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큰 도로가 나왔다. 택시들이 많이 보였다. 난 선희를 보냈다. 그녀의 취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 첫 만남에 키스를 하거나, 모텔에 갈 만큼 날라리가 아니다. 집에 가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보냈다. 

'나 댤 도탁ㄷ했언'

선희는 잘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내고 이후로 다른 말은 없었다. 오랜만에 스킨십이라 기분이 좋았다. 내게 팔짱을 꼈을 때 그 느낌과 분위기를 떠올리며 나도 불을 끄고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냐는 카톡을 시작으로 몇번의 대화를 했다. 
그 다음날, 일요일인데 뭐하냐는 카톡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나 선희는 생각보다 답장을 빨리하지 않았다. 
월요일은 카톡을 하지 않았다.
화요일에 카톡을 했고 6시간 뒤에 답장이 왔다. 이번주에 볼 수 없냐고 물어봤으나 주말에 바쁘다고 했다. 밀당을 심하게 한다는 느낌이 왔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 이번주에는 시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이번주에도 바쁘다고 했다. 이후로도 몇번의 카톡을 했지만 6시간 뒤에 카톡이 오거나 다음 날 카톡이 왔다. 이럴 때 주선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어서 알바형에게 혹시 선희가 소개팅에 대해 어땠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아무런 얘기 안 했다고 대답했다. 소개팅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대화가 잘 통했는데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마침내 선희는 '퇴근했어?ㅎㅎ'라고 묻는 나의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선희와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애매한 말에 대해 답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질문에 대해 읽고 씹는 행위를 해석하기란 어렵지 않다. 너와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 

 구여친과 헤어지고 두 번째 소개팅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도대체 뭘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실패 이유를 알아야 실패를 번복할 수 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는 힘드니 여자사람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답은 두 가지로 분류됐다. '너랑 자려고 했는데 네가 눈치없이 택시 태워보냈다'라는 응답이 1위, '놀았을 때는 좋았는데, 술 깨고 생각해보니 학생과 만날 자신이 없어서'가 2위다. 키가 작아서 앉아있을 때가 좋았다라는 응답도 1명 있었다. 물론 내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1시까지 나와 술을 마셨으며 왜 내게 스킨십을 했을까. 여전히 의문부호가 떠나질 않는다. 정말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다. 이걸 모르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의 소개팅이 끝나고 난 더 외로워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더' 외로워진 게 아니라 없었던 외로움이 생겼다. 소개팅을 하기 전에는 난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다. 난 봄날에 어울리는 핑크빛 사랑을 꿈꿨고, 누구든 만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소개팅 상대들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진 기준에 내가 걸맞지 않았다. 운명을 믿었지만, 운명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소개팅을 하는 건 힘들었다. 체력적 소모보다는 심리적인 소모가 컸다. 일 년 간의 애도가 끝나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외로움'을 알았을 뿐. 그러다 문득 난 구여친과 왜 헤어진걸까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왜 헤어졌던걸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권태기로 헤어졌다. 서로에 대한 권태가 아닌 일방적인 권태에 의해 헤어졌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고, 난 어느날 이런 만남이 지겹다고 느꼈었다. 지겨움을 느껴버린 나는 지겨움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그것이 머리에서부터 커졌는지 심장에서부터 커졌는지 모르지만 점점 커져만 가서 결국 입 밖으로 나오게 됐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지겨움이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면서 '그만 만나자'라는 문장으로 바꼈다. 이별을 예감한 여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마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먼저 말했을 게다. 만남을 지겨워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보며, 더 이상 웃지 않는 모습을 보며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싸워서 헤어지지도 않았고, 취향이 달라서 헤어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매일 만날 만큼 서로가 좋았고 함께 하는 게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좋지 않았고, 모든 게 즐겁지 않았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갑자기 생긴 외로움 때문에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보고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친구와 내가 헤어질 땐 우린 분명 서로 웃지 않았지만, 우린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던 커플이었다. 그 때가 생각났다. 한 시도 떨어지기 싫어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새 힘들었던, 힘들게 하던 시절은 시간 속에 스러지고 아름답던 기억만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이런 몹쓸 생각으로 카톡을 보냈다. 

'요즘 뭐해?'

요즘 뭐해는 아주 적절했다. '뭐해'라는 말이 썸남과 썸녀 사이에 썸관계를 공식화하는 질문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요즘 뭐하냐는 말은 일반적인 질문이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에게 할 만한 그런 질문. 답장은 바로 왔다. 

'오빠 오랜만. 나 요즘 인턴해유'

그랬다. 전 여친은 말끝마다 유를 붙였다. 이유는 없다. 왠지 귀여워서가 아닐까. 참고로 그녀는 서울 토박이다. 

'아 인턴하는구나. 아니 예전에 리얼후라이치킨 갔었잖아. 요즘 그 치킨맛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 겸 같이 갈까 했지'
'아 오키오키 좋아. 평일엔 바쁘니까 토요일 한 다섯시쯤에 보자'
'응ㅎㅎ'
애도기를 가지고 내 기억속에서 죽여버렸는데, 나도 모르게 연락을 하고 이미 약속까지 잡았다. 그래 뭐,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대화가 잘 통했으니까. 오랜만에 서로 안부나 물어야지.

*

흑석동은 내가 사는 동네이면서 전 여친이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우린 같은 동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다가 만났다. 헤어지고 일 년 사이에 동네에서 만날 법도 했지만 여지껏 그런 적이 없었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행스럽기는 하다. 지나가다가 만나는 거였다면 많이 어색해서 몸둘바를 몰랐을 게다. 흑석동 삼거리는 누가 뭐래도 흑석동의 중심가다. 흑석동에는 흑석시장도 있고 중앙대학교도 있고 먹자골목도 있지만 그 중앙에는 흑석동 삼거리가 있다. 흑석동 삼거리를 중심으로 중앙대, 중앙대 병원, 이마트, 흑석역, 흑석시장이 에워싼 형태다. 그렇다고 흑석동 삼거리가 핫플레이스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다. 삼거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겨울이 되면 군고구마와 군밤을 파는 아저씨와 녹차호떡을 파는 아주머니는 있지만, 그곳은 중심가일 뿐 번화가는 아니다. 그래도 삼거리와 여러 개의 횡단보도 그리고 삼거리의 중심에 놓인 커다란 검은 돌은 이 동네의 상징이다. 검은 돌에는 '옛부터 흑석동에는 검은 돌이 많았으며...'으로 시작하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그런 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주민들이 대다수지만 나만은 동네주민으로서 그 검은 돌을 볼 때마다 애동심이 고취되고는 한다. 흑석동을 사랑하는 이유는 없지만, 몇 년 살았다고 정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네 시 오십 분에 흑석동 삼거리에 전 여친이 도착했다. 이름은 김애니, 나이는 24살이다. 그렇다. 첫번째 소개팅을 했던 여자와 동갑이다. 이름은 본명이다. 할머니가 외국에서 살다오셨는데 그때 이름이 애니였다고 말해줬다. 할머니가 외국 어디에서 살았는지 교포인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애니가 나에게 설명을 해줬는데 기억을 못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말해준 적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애니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1분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줬다. 그 정도로 시간관념이 철저한 애였다. 그래서 늦는 사람을 싫어했다. 다행히 시간 약속을 철저히 하자는 신조는 나 역시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늦게 온 상대방을 탓하며 싸우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오빠 일찍 왔네."
"응. 너 살 많이 빠졌다."
"빠지긴 초췌한거지. 일이 힘들어서 그래."
"그래 그럼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애니는 갑자기 웬일로 연락했을까 궁금했다고 얘기를 꺼냈다. 치킨이 먹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내 말을 듣고 황당하지만 이해한다고도 말하며 웃었다. 리얼후라이치킨은 충분히 그럴 만한 곳이라고도 말했다. 가끔 치킨맛이 생각나서 연락을 할까했지만 바쁜데 방해하는 걸까봐 안 했다고 했다. 리얼후라이치킨은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동네치킨이지만 매장인테리어나 간판은 여느 프랜차이즈 치킨집에 버금간다. 아니 그 이상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매장인테리어나 간판 디자인은 둘째치고 이곳은 치킨맛이 환상적이었다. 특히, 양념치킨은 고추장소스에 오미자인지 뭔가를 많이 넣었는데 가격은 16000원으로 대학가 치킨집과 비교해 비싼 편에 속했지만 양도 더 많았고 맛도 더 있었다. 

"그래서 요즘 무슨 인턴하는거야?"
"IT기업에서 마케팅 인턴하는 건데, 마케팅 쪽이 역시 빡세. 미팅이 얼마나 많은지"

전공이 경영학이라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했는데, 마케팅 인턴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뿌듯했다. 애니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이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다른 학문에 대해 배우는 걸 특히 좋아했다. 타 전공 1학년 수업 듣는 게 취미였는데, 물론 학점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중국어, 역사학 등 관심사가 너무 넓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전공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전공 학점은 언제나 잘 나왔다. 능력자였다. 

"오빠는 요즘 뭐해?"
"난 4학년이라 취업준비하지"
"아 그렇겠네, 인턴도 저번에 했고, 대외활동도 많이 했고, 토익 점수는 땄어?"
"이제 토익만 남아서, 토익 공부하면서 마지막 학점관리 해야지."
"오빠는 잘 할 거야. 워낙 계획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잖아. 플랜맨이니까."

애니는 플랜맨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특유의 눈웃음을 보였다. 나 역시도 애니만큼이나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배움에 대한 욕심보다는 성취에 대한 욕심이었다. 뭔가를 시도하는 것보다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이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했다. 그래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가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해 헤어졌지만, 어떻게 하다가 권태기를 겪에 됐는가를 생각해보자면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만남에 대한 지겨움 이전에 난 애니를 장애물로 생각하곤 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애니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뒷전이고 카페에 가서는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다. 카페에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가끔씩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소음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됐다. 난 공부를 하려하고 쉽게 예민해지고 화가 나 있었다. 난 집에 일찍 가고 나 때문에 공부할 거리는 챙겨온 애니 역시 일찍 가야 했다. 난 모든 기념일을 챙겼고, 선물뿐만 아니라 편지를 써서 줬다. 매일같이 집에 바래다 줬다. 그런데 난 그런 쉽고 단순한 일들로 평소의 나의 행동들을 덮으려고 했다. 애니를 만나는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애니가 장애물로 보였다.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시는 날이면 답장을 하지 않았고, 일부러 늦게 하는 일들도 잦아졌다. 눈 앞에 애니를 두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가 왜 헤어졌어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선명해졌다. 아름답게만 포장되어서 반짝거리던 기억들보다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500cc 한 잔씩만 마셨다. 애니는 오랜만에 나를 만나 즐거워보였고 종종 연락하라고도 말했다. 난 즐겁게 놀았지만 다시 연락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지금의 애니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내가 준 상처를 그 사람이 치료해줬구나. 애니는 많이 행복해보였다. 여유로움과 행복함이 나 때문도, 치킨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흑석동 삼거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일년 전에도 삼거리에서 헤어졌고, 오늘도 그랬다. 일년 전에 애니에게 그만만나자고 말했을 때, 애니는 울음을 참았다. 짐작했던 이별이었지만 감당하기엔 둘은 많이 가까웠다. 힘겹게 헤어졌던 애니의 발걸음은 오늘은 가벼워보였다. 우리는 또 그렇게 삼거리에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