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상

by 놀웨 posted Apr 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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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C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물어왔다. 손님은 겨우 여섯 명뿐이었다. 테이블로 치자면 두 테이블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각기 가게의 구석 쪽에 또아리를 튼 듯이 앉아 있는 통에 내가 있는 BAR쪽의 공간은 전혀 긴장감이 없는, 나태한 공기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C의 시선과 마주쳤다. C는, 방금 내가 물었으니 형은 대답을 해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게 사회의 규칙이라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C와 나는 친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C의 어머니의 오빠가 나의 아버지니까 C는 나의 사촌이 된다. 맞나? 어차피 촌수 따위는 상관없다. C도 나도 대체로 그런 인간이다. 다만 내가 C보다 두 살이 많기 때문에 C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있을 리가 없잖아.”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이틀 동안 내 의식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어이없게도 오선지였다. 지금도 오선지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코를 흘리지 않게 되면서부터 오선지와는 다른 세상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강릉이나 목포 같은 곳에는 오선지가 득실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곳의 주민들은 오선지 국수나 오선지 떡을 먹으면서 오선지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느라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C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BAR를 빠져나가 카운터에 설치된 컴퓨터를 켠다. 또, 그 망할 놈의 게임이다.

고모는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한 동네에서 살았다. 때문에 C와 C의 여동생인 윤희, 그리고 우리 형제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고모는 광주로 이사를 갔다. 이후로 C와는 한동안 만난 적이 없다. 머리가 무지하게 좋아서 서울대학교는 따 논 당상이라는 소문만 간간이 들려왔을 뿐이었다.

2001년은 나에게 있어서 최악의 해였다. 1996년 겨울,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뭐, 흔한 일이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당시,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모 대기업에 들어갔던 나는 여전히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월급이 들어온 통장을 정리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일종의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나를 떠난 것은 터질까 말까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가스통에 토치를 들이댄 것과 같았다. 나는 폭발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일본에 있었다. 그야말로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이 년 후, 나는 Y대학의 문학부에 문부성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가받았다. 2학년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일본에 간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살았니?’

 

나는 대답대신 Y대학의 학생증을 내밀었다. 부모님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읽을 수가 없었다. 뭐, 나도 그들의 용서나 인정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다시금 집을 나서면서 난 내 자신이 마치 노른자위는 없는, 흰자만이 가득한 달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화할 필요도, 부화할 수도 없는 달걀. 내 삶은 대체로 그랬다.

“날씨 때문인가?”

회사를 마치고 가게에 들른 윤희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함부로 털어댔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생각보다 적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건넸다.

“고마워.”

C는 게임에 열중한 채 윤희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C를 다시 만난 것은 올해 봄이었다. C는 결국 서울대는커녕 이류대학을 다니다 어느 날 등록금을 챙긴 채 사라져, 3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했다. 녀석을 집으로부터 몰아내 거리를 방황케 한 것은 게임이었다. 시시껄렁한 학교 공부에 일찌감치 흥미를 잃어버린 어느 날 녀석은 운명처럼 네트워크 게임이라는 저주의 땅에 발을 디뎠고 곧 영웅이 되었다. 광주에서는 이미 녀석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부터 C는 칼 대신 십 만원이나 주었다는 광센서가 달린 마우스를 들고 사무라이처럼 전국을 누볐다. 쓰러트리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꼬꾸라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삼 년이 흘렀고,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방만한 경영을 폈던 그 게임개발회사는 -경영진들은 끝까지 공격적인 경영이라고 우겨댔지만- 결국 문을 닫았고 서버도 폐쇄되었다. C의 충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이제 C를 위해 배팅을 해 줄 사람도 없어졌고, 흔쾌히 게임비를 깎아주던 PC방의 주인들도 등을 돌렸다. 때깔 나던 녀석의 광마우스도 이젠 별 볼일이 없었다. 지하에 숨어들어서 열심히 신무기를 만들고 있던 과학자가 ‘군축협상’의 소식을 듣고는 정신이 돌아버렸다는 러시아의 유머가 재현된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고모가-그러니까 그의 어머니가-상당한 재력가였다는 점이었다. 피폐한 몰골로 돌아온 자식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대학이 세 개나 모여 있는 목에 가게 하나를 인수해서 C에게 던져 주면서 빈둥거리고 있던 나를 불렀다. 명목상 C는 사장이 되었지만 고모 역시 C를 신뢰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술과 주방에서 쓸 재료들을 주문하는 건 나의 몫이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뽑고 매상을 관리하는 일은 윤희의 몫이었다. 모 광고 기획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윤희는 하루에 한 번은 빠짐없이 가게에 들러서 금전등록기를 열고는 C의 용돈과 내 몫만을 남겨둔 채 남은 돈을 회수해 갔다.

‘좋은 분이야.’

윤희가 어느 날 ‘우리 엄마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언제나 돈타령인 내 부모님에 비하면 확실히 좋은 분인 것 같았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내 말이 모욕적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C오빠 이름으로 신탁계좌를 만들었어. 죽을 때까지 써도 남을 만큼 남겨주려는 모양이야. 부모는 그런 거라구.’

확실히 좋은 분이었다.

“언제부터?”

윤희는 C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내뱉었다.

“글쎄. 한 시간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금전 등록기를 열고 돈을 챙겨 넣은 후 BAR 맞은 편에 앉아 이마를 찌푸렸다. 매상이 자꾸 떨어지네... 윤희는 내가 건넨 발렌티나에 미네럴워터를 부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었다.

“여름이니까. 좀 쌀쌀해지면 괜찮아지겠지...”

 

어느새 윤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리며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자들이란 대개 저런 법이다. 실컷 말을 건 후에 능청떨기. 그들만의 전매특허.

“지금도 오선지 노트 같은 게 있을까?”

“오선지?”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갑작스레 던져진 내 말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려고 애쓰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말에 복선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그저 ‘오선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왜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쓰던 노트 말이야. 음표를 그릴 수 있게 줄이 다섯 개 그어진...”

그녀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있겠지. 요즘도 음악 수업은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한심스런 사고의 늪에 빠져 있었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음악 시간에 음표를 그리기 위해서는 오선지가 필요한 법이다. 왜 그런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악연이 아니라면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볼이 홀쭉해질 때마다 담배 불빛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에게서 '얼굴이나 한번 볼까'라는 연락이 왔을 때 난 사실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내게 있어 이미 그녀는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존재에 불과했다. 적어도 미래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에 그녀가 등장하는 신은 더 이상 없을 터였다.

어릴 적에 수심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강에서, 퉁퉁 불어서 떠오른 익사체를 본 적이 있다. 수두에 걸렸었는지 얼굴이 온통 얽어 있던 그 만화방 주인아저씨는 숨이 막혀오던 그 마지막 순간,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왜 벌떡 일어서지 않았던 걸까? 지금 나는 안다. 늪인 줄 알면서도 그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숙명이란 이름의 노예 계약서 앞에서, 아무런 반항의 몸짓도 취할 수 없는 인간의 미약함을 안다.

나는 늪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자멸했다. 그 후 1년 동안 나는 습기 때문에 벽에 물이 송글 송글 맺히던 사글세 지하방에 처박혀 미친 듯이 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문예지에 보냈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당선이 되었다. 피타고라스의 말대로 3이란 숫자는 완벽했다. 1년 동안 나는 악녀의 주술에 걸려 허우적거렸으며 다음 1년 동안은 폐인처럼 벽을 쳐다보았고 마지막 1년 동안 소설을 썼고, 그리고 소설가가 된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론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사실 몇 번인가 펜을 들고 원고지를 노려보았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쓸 수가 없었다. 쓸 것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내 속에는 끊임없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내 기억에 그 불길이 꺼졌던 적은 없다. 하지만 일단 소설가라는 낙인(?)이 찍히고 나자 구역질처럼 말들을 풀어놓는 행위가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사물. 그것들은 더러운 구역질의 흔적 같았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르바이트를 쓰는 탓에 나나 C가 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C야 사장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나의 임무라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류회사에 전화를 거는 것뿐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는 근처의 시립도서관으로 향한다. 한 달 전쯤 나는 그곳의 독서회원에 가입했다. 독서회원은 3권의 책을 최대 2주일동안 빌릴 수 있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도서관에 들러 3권의 책을 빌린다. 격일제로 3권을 빌리고 3권을 반납한다. 그게 나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내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이미 친구들과는 몇 년 동안 연락이 두절돼 있었다. 물론 먼지와 습기로 눅눅해진, 정체 모를 조그만 생명체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졸업앨범을 뒤적거린다면 두, 세 명쯤은 연락이 닿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누구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배가 고팠지만 구체적인 식탐이 도는 것은 아닌...그런 상태가 줄곧 계속되었다.

그 날 도서관에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늘 빌릴 책들을 머릿속에서 선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부턴가 시작된 버릇으로, 흔들리는 차 안에서 하는 작업치고는 상당히 유쾌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오랜만에 일본작가들의 책을 빌리리라 마음먹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유미리의 소설을 한 권씩, 그리고 누구라도 좋으니 평론이나 수필집을 한 권, 이렇게 세 권. 도서관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 설치된 검색컴퓨터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와 유미리라는 검색어를 차례로 넣어 목록을 검색했다. 그리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와 유미리의 ‘콩나물’ 이렇게 두 권을 빌리기로 했다. 나머지 한 권은 직접 서고에 들어가 대충 한 권을 집어들면 되리라. 내가 책을 빌리는 데는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었다.

 

먼저 가장 위험 부담이 큰 책부터 집어들기. 이건 가장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부터 젓가락을 가져가는 내 식사 습관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장 마지막에 즐기는 것은 그 편이 그 음식의 이미지를 가장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법이다. 유미리의 책은 거의 다 읽은 편이었고, 허무할 정도로 배신당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편이었다. 10분 정도를 망설이다 우선 마루야마 켄지의 ‘소설가의 각오’라는 에세이집을 골랐다. 책의 뒤표지에는 작가의 모습을 측면으로 잡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엄숙하고 음험해 보였다.

 

게다가 ‘소설가의 각오’라니. 배신당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리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 마지막으로 유미리의 ‘콩나물’...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서고에 없었다. 나는 다시 검색컴퓨터로 가서 유미리의 이름을 입력하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콩나물’...그것은 분명히 일본작가코너에 놓여 있어야만 했다. 누군가 그것을 집어들고 뒤적거리다 기분이 상한 나머지 어딘가에 숨겨 놓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두 권의 책을 가슴에 안고 대출코너로 향했다.

“저 ‘콩나물’을 찾고 있습니다만...”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쓴 직원여자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차 싶었다. 어두컴컴한 가게에 처박혀 지내는 탓에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형편없어진 듯 했다. 내가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잠깐 사이 여자는 시선을 다시 컴퓨터 쪽으로 돌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성의 없이 물어 왔다.

“콩나물요?”

“유미리씨의 소설 ‘콩나물’말입니다.”

여자는 기어이 코웃음을 치고야 말았다. 내 얼굴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짧은 탄식을 하고 나서 여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빌려 가신 분이 아직 반납을 하지 않으셨군요. 벌써 이틀이나 연체됐네...죄송합니다. 가끔 이런 분들이 계시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공평해진 느낌이 들었다.

“지금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여기 전화번호를 남겨 주시겠어요?”

여자는 메모지를 내밀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왜 내 전화번호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이 여자는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책이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당신한테 우선권이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음모 같은 건 없었다. 여자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도서관에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나는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근처의 식당에 순두부찌개를 배달시키고서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환율급등. 주가폭락. 인사청문회. 이른바 톱뉴스로 꼽힌 그것들은 어제 신문에서도 톱뉴스로 실린 것들이었다. 이럴 바에야 오늘 신문은 찍어내지 않아도 될 뻔했을 텐데.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른다. 부시시 눈을 비비면서 문을 연다. 배달원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어제와 같습니다. 이상.’ 이걸로 족할 텐데 말이다. C는 아침에야 잠이 들었는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김형석씨 댁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만...”

“도서관입니다.”

여자는 책이 도착했으니 찾아가라는 말을 남긴 채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대충 밥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이름을 대자 여자는 반환 기간을 지켜달라는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건넸다. 유미리의 ‘콩나물’.

 

다행히(?) 그 날도 손님이 뜸했기 때문에 나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주인공은 여자였고 아내가 있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아내에게 고소를 당했으며 여자는 부모를 증오했다. 책을 다 읽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버릇대로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역자의 경력을 살펴보기 위해 책을 거꾸로 놓은 다음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오선지였다. 본문과 역자의 감상을 적은 부분을 가르고 있는 빈 여백에는 샤프펜슬로 그린 듯한 오선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책에다 낙서를 해 놓았군.’이라고 지나쳐 버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다섯 개의 선 위에는 음표대신 예사롭지 않은 몇 개의 단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면제. 비타민. 질식. 대동맥. 밧줄. 20평. 싫어. 그리고 스물 일곱.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C가 어깨너머로 역시 그 오선지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C는 맞은 편에 엉덩이를 털썩하고 내려놓더니 책을 집어 들고는 담배를 꼬나 문 채로 책을 집어 들었다. 한참 뒤 책을 내려놓은 C 역시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단순한 낙서일까?”

“자살을 꿈꿔 본 적 있어?”

C는 대답대신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없이.”

C는 언제 빌린 건지를 물었고 나는 오늘 아침이라고 대답했다. C가 담배연기를 내 쪽으로 내뿜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건강에 나쁘기 때문에 담배를 피지 않는다. C는 엄청난 골초였다. 언젠가 윤희가 그러다간 오십도 되기 전에 폐가 시커멓게 타서 죽을 거라고 나무란 적이 있었지만 C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금 가게를 나서다가 죽을 수도 있지. 차에 치이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키던가. 그게 폐암보다 훨씬 흔한 죽음이라구.’

“술에 취해서였을거야.”

C는 거칠게 담배를 비벼껐다. C는 소설의 내용을 물었다. 나는 대강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C는 두 개피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우울하군...”

“그런 편이지.”

나는 C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칙칙한 내용들을 책으로 펴내는 거지? 형은 왜라고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오른손집게손가락으로 코밑을 긁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 거야. 아마...”

C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넌 왜 저따위 게임을 하는 거지?”

내 말투는 괜히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C는 미소를 지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야.”

“그거야말로 도피라구.”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게다가...”

C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바보녀석이라도 같은 게임을 천 번쯤 하다보면 모든 걸 알아버린다구. 나무아미타불을 만 번쯤 외다가 자신도 모르게 得道를 하는 것처럼 말이야. 노력한 만큼 얻는 셈이지. 세상에 그렇게 정직한 일은 드물다고 생각해. 안 그래?”

C의 말은 나를 정말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왜 오선지를 그린 걸까?”

“음악을 전공했거나...아니면...”

“아니면?”

C와 오늘처럼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다. C는 들떠 있었다.

“왠지 단어가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어. 왜,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줄이 그어진 사각형 안에다 글자를 써넣곤 하잖아. 균형감을 습득하기 위해서 말이야.”

이번에는 C의 말이 맞는 듯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에 일본어를 배울 때 노트에 다섯 줄 정도의 선을 그려 넣고는 히라가나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이 사람 죽지는 않았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C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적 예감?”

“저, 바쁘신가요?”

도서관은 폐관시간을 30분 정도 남기고 있었다. 여자는 내 쪽을 돌아다보지도 않은 채 용건을 물었다. 나는 여자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내가 누구인지 기억 속을 더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여자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었다.

“콩나물.”

 

이번에도 내 말솜씨는 형편없었다. 공공기관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이런 곳에 오면 언제나 주눅이 드는 탓에 적절한 단어를 끄집어내는 일에 곤란을 겪는다. 다행히 여자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다. 3권 이상은 대출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자는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책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그 페이지를 펼친 다음, 여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낙서군요. 이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여자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단어들을 보십시오. 대동맥. 수면제. 밧줄...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요.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여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자살을 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아니, 벌써 했을 지도요.”

 

여자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절더러 어떡하라는 말인가요?”

“전화라도 한 번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연락처도 아실 테고”

“이것 보세요. 이번 달에도 예산이 삭감되는 바람에 직원이 반으로 줄었어요. 덕분에 지금 저는 세 사람이 했던 일을 혼자서 하고 있구요. 댁 같은 분의 그런 한심한 노파심까지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구요.”

“저는 단지 전화 한 통만 해주시지 않겠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잖습니까?”

“그 여자는 멀쩡했어요.”

여자직원은 책을 빌렸던 그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말해버린 자신의 실수 때문에 안절부절 했으며, 나는 줄곧 대출코너 앞에 서서 그녀를 괴롭혔지만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으므로- 끝내 그녀의 철저한 직업 윤리 앞에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C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여전히 손님은 없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예민하다거나 둔감하다거나 하는 류의 문제가 아니지.”

C는 말했다.

“신경성 위염과 어디에선가에서 주운 열쇠의 공통점은?"

"글쎄....."

이 정도쯤 되면 C의 컨디션은 최고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지금이라면 자기 몸집보다 큰 돼지를등에 업혀도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를 성큼 성큼 걸을 게 분명했다.

 

"현대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거. 근데 나나 형은 가지지 못한 거. 보통 사람들은 말이야, 콧구멍을 팔 시간도 없을 정도로 살아가거든. 형이나 나처럼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서 살지는 않는다구.”

C의 말을 옳았다.

“어차피 타인의 일이잖아.”

그러나 역시 개운치가 않았다. 만약 그 여자가 정말 자살이라도 한다면 엄연히 나는 그 여자의 죽음을 방조한 셈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미필적 고의를 이겨낼 만한 자신이 나에게 없음은 분명했다. 침을 꿀떡 하고 삼키는 내 꼴을 보면서 C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낄낄거렸다.

“방법이 있긴 하지.”

C는 컴퓨터를 재부팅시켰다.

“그 쪽 서버에 침투하는 거야.”

C의 손가락들이 벌레를 쪼아대는 병아리의 주둥아리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화면에는 패스워드를 넣으라는 메시지가 나타났고 커서가 깜빡거렸다. C는 화살표를 눌려서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섯 자리야.”

그렇게 말하고는 C는 어떤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알파벳과 숫자들이 화면을 깨알같이 수놓기 시작했다. 순열과 조합. 내가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묻자 C는 순열과 조합이라고만 대답했다.

“한 잔 하겠어?”

"끝난 거야?“

“30분에서 한 시간쯤 걸릴 거야. 딩동 소리가 나면 끝나는 거라구.”

C와 나는 컴퓨터가 부지런히 일을 하는 동안 데킬라를 한 잔씩 하기로 했다. 내가 감탄사를 올리자 C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간단한 거라구.”

나는 레몬을 세 개쯤 집어서 그걸 꾹 짰다. 맑은 즙이 빗방울처럼 잔 위로 떨어졌다.

 

“그 정도의 컴퓨터 실력이라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건전한 직장에 붙어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로 월급을 받는 거야. 그럼 고모나 윤희한테 눈총을 받을 필요도 없지.”

C는 담배를 피웠다.

“형은 왜 소설을 쓰지 않는 거지?”

독한 술이 목을 타고 흐르다가 벽을 부여잡았다. 나는 얼굴이 노랗게 질려 켁켁거렸다. C는 휘파람을 불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암담하다. 답답하다.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

C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숨이 잦아들었다. 난 오선지를 상상했다. 흰 여백과 다섯 개의 줄.

“네가 알다시피 난 평탄한 길을 걸었다고는 볼 수 없지.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서 외국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했어. 너는 소설가가 될 테니 이 정도의 행각쯤은 보통이라구. 야간자습을 하고 일류대학을 나와 은행에 다닌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이지. 자격미달이라구. 이렇게 말이야. 그리고 ‘붉은 땅’-내가 등단을 했던 졸작의 이름-을 쓰면서 나름대로 내 경험들을 너저분하게 떠벌였어.”

 

C는 턱을 괴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다음 소설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고 펜을 잡았던 적이 있어. 내 속엔 아직 토해내지 못한 많은 것들이 빛을 보려고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왔으니까 까짓 거 문제없다고 믿었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런 것들이야말로 예술이란 미명아래 벌였던 파계 따위가 아니었을까. 혹시 그런 것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작가가 되려고 발버둥 쳐왔던 것은 아닐까. 나 같은 녀석은 그냥 술이나 처먹고 책이나 읽으면서 살아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내가 아니더라도 정말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면서, 누가 봐도 가치 있고 고귀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을 테니까 말이야...”

 

그 때 컴퓨터가 요란한 비프 음을 울리는 바람에, 난 겨우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C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책이름이 뭐라구?”

“콩나물.”

C는 웃긴 제목이군 이라고 하면서 검색을 시작했다. 겨우 몇 초 만에 컴퓨터는 대출자의 명단을 뽑아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이지은. 주소는 동래구였다. 물론 전화번호도 등재돼 있었다.

“대신 전화 해주지 않을래?”

 

나는 C에게 그렇게 부탁했지만 C는 장난스럽게 혀를 낼림 거리고는 BAR안쪽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는 몇 번의 심호흡을 한 뒤,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조심스레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이지은씨 댁인가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네. 왜 그러시죠?”

“혹시...”

여자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아마도 건설기계 대여회사에서 경리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미리씨의 ‘콩나물’이란 소설을 빌린 일이 없습니까?”

 

여자는 짧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점에 관해선 담당자 분께 충분히 사과를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자는, 날 도서관의 직원쯤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 도서관의 직원이 아닙니다. 당신이 빌린 그 책은 지금 나한테 있습니다.”

혼란스러운지 여자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윽고 상황 파악이 끝난 듯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시죠?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내셨죠? 그리고 왜 저한테 전화를 하신 건가요?”

세 가지 질문에 한꺼번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질문에만 답하기로 했다.

 

“오선지 말입니다.”

“예?”

여자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 놈의 말주변.

“당신이 오선지 위에 적어놓은 글을 봤습니다. 정확히 이런 단어들을 적어 놓으셨더군요. 수면제. 비타민. 질식. 대동맥. 밧줄. 20평. 싫어. 그리고 스물 일곱...”

“그만하세요.”

“뭔가 어리석은 짓을 하신다면...”

“이봐요!”

여자는 꽥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무 심하게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전 스물 넷이에요.”

 

“하지만...”

“게다가 전 자살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다구요. 아시겠어요?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자위행위나 하시지. 미친 자식.”

나는 할 말을 잊고 얼이 빠진 채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뚜뚜...하는 신호음이 비수처럼 심장에 꽂혔다.

“이봐. C. 이 책을 빌린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483명. 무슨 일이야?”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든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러고 보니 장마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C가 어슬렁거리며 메뉴 판을 집어 들고는 손님들 쪽으로 향한다. 나는 대출자 명단이 점멸하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본다. 이런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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