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아몬드

by 아몬드 posted Apr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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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아몬드

 

 

  그는 나와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 아니 그런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은 아몬드씨. 사실은 그의 이름을 알지는 못한다. 여느 때처럼 나를 피해 가던 어느 날 아침, 어찌된 일인지 실수를 피해가지 못한 천재 범죄자처럼 툭 하고 까칠하고 바짝 마른 아몬드 한 알을 그는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나의 집 앞에.

내가 이곳에 이사 온 지가 두 달쯤 지났다.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이런 원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 나또한 그러하듯이 우리는 서로 마주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웃사촌? 그런 말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전 건물에도 2년이나 살았지만, 나는 옆집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누군가와 마주칠라치면 타다다닥 뛰어가 띠띠띠띠 빠른 손놀림으로 비밀번호를 누른다. 띠리릭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면 빠르게 들어가 쾅! '세이브다, 나는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았다!'하며 스릴과 함께 왠지 모를 쾌감을 느끼곤 한다.


 신발장 위에 놓인 그것의 까끌까끌한 질감을 느끼고 있다.

  '그저 견과류를 좋아하는 걸까, 건강을 챙기는 걸까, 아니면 어쩌다 한번 사본 아몬드인걸까?'

내가 왜 이런 멍청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벌레라도 만진 듯 빠르게 아몬드를 내려놓는다. 신발장 바로 옆이 쓰레기통이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삼일 째 그곳에 그저 놓여있다. 엄마를 잃은 어린 고슴도치처럼 이 아몬드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는 인질을 데리고 있다." 하는 말도 안 되는 인질극을 벌이는 상상을 하다 어느새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허공에 흩어지는 나의 웃음소리. 휴대폰 메신저로 웃음을 공유하기 위해 불과 한 달 전만해도 함께 이 프로그램을 보며 웃어대던 나의 예전 룸메이트에게 연락을 해볼까 핸드폰으로 손을 뻗다 이내 그친다. 이곳은 무인도이다. 나는 고립되어 있다. 구조 신호를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 고여 있겠다.


  할일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직 개강은 꽤나 남았고, 이번 방학은 별다른 계획 없이 흘러가도록 고삐를 풀어 두었다. 그 흔한 편의점도 꽤나 걸어 나가야 있는 답답한 동네이다. 참견 많은 주인아주머니와의 마주침을 피해 십오 분쯤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수목원이 있다는 점 하나만 마음에 든다. 이 시커먼 도시 유일의 100년이 넘은 수목원이라고 한다. 사실 아몬드씨를 맨 처음 마주한 곳도 그곳이었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건물이 아니라.

  네 번째로 수목원에 방문했을 때다. 난 이미 친구를 사귄 후였고, 그의 이름까지 알았다. 커다랗고 예쁜 손을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이름은 '찰피나무.’ 읽기 어려운 그의 학명을 딴 '틸리아'라는 애칭마저 있다. 그의 약간은 축축하고 까칠하지만 포근한 표피에 손을 가만히 얹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었다.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연락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믿는 나였다. 그에게 학교에서 늘 그 자리를 지키며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나무 한 그루와 지난여름 프랑스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난 먼 나무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에 질려하는 나이지만 찰피나무와 친구가 된 이유는 두 갈래로 곧게 갈라져 뻗은 그의 겉모습 때문이다, 그 아래 작은 나무 벤치가 놓여있다는 점도 물론 한몫했지만. 커다란 나무 바로 밑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순간만큼 행복할 때가 없다. 거기에 약간의 바람과 햇살이 다가와 수많은 잎들이 하늘을 간질이듯 흔들리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언뜻언뜻 보인다면! 그 벤치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만큼 내가 좋아하는 일은 없다.

  곧 다시 오겠노라고 헤어질 때면 나는 늘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처음 만난 뒤 세 번째로 다시 찰피나무를 보러 수목원을 찾았을 때, 나는 내 사랑스런 친구와 나를 위한 벤치가 누군가에 의해 침범당해 있는 것을 목격한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한 남자다. 내가 늘 그 자리에 앉아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는 것과 다르게 처음 보는 그 남자는 너무도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다. 눈의 각도가 콧날의 그것과 같이 아래로 힘없이 향하였고 눈동자 역시 기운이 빠져 있다. 한 가지 나와 닮은 점이 있기는 했다. 아니 사실은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역시 가만히 나무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으니까. 나와 같이 나무가 들을 수 있게 손을 올리고 가만히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을까?

  나만의 자리를 빼앗겼음에 마음속으로 나의 친구에게 '다음에 다시 올게'하는 인사를 남기고 축 쳐진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늘 걸리는 신호등 앞에 나는 섰다. 가만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동네 하천 조깅 트랙에서 달리거나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한번은 나도 이곳에서 먼 개울가를 달리고 그러다 지치면 걷고 하며 내 머릿속에 담긴 말들을 거친 들이쉬고 내쉼으로 토해냈었지. 그러다 운동복이 아닌 정장에 핸드백과 불편한 구두를 신고 그곳을 걷는 한 여자에 눈이 간다. 그녀도 말없이 무언가를 토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배우 하정우가 말한 것처럼 스트레스를 해소할 '그녀만의 한강'을 찾아 이곳으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한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곳을 걷거나 아니면 버스를 타고 바라보며 지나고 싶었다. '내 근심 걱정들을 모두다 그 불투명하고 깊은 강물 속에 가져가줘'하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파란불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왼쪽 아주 가까이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고 이내 왼쪽 목이 빳빳해온다.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돌려 차도의 신호등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 왼쪽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의 또 다른 친구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뿐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친밀할지도 모르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나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저 십분 째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에 어깨를 아주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 외에는. 흐릿하게 반달로 넘어가는 초승달과 닮아 있었다. 아주 말랐다는 것 때문도 그렇지만, 시린 기운을 풍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아니고, 누군가 확 재처 도전적으로 다리를 쭉쭉 뻗어 걸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같은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지나쳐온 뒤에 대한 미련도도, 앞으로 다가갈 앞에 대한 기대도 없는 듯 보였다. 남겨둔 것도 나아가 잡아들 것도, 나를 붙잡는 이도 기다리는 이도 없었던 나처럼.

 

 내가 사는 건물에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빠르게 걸어갔다.

 '우리 동네에 사는구나.'

그 때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집에 들어간 뒤, 그는 내게 그리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우리 건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고, 몇 번의 짧은 스침으로 인해 그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층 몇 호에 살고 있는지를 들키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아몬드의 크기만큼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이 자라나고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바퀴벌레처럼 한 건물 안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렇다는 사실을 아몬드씨 때문에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무릎을 끌어당겨 턱을 올린다. 이내 고개를 기울여 볼을 무릎에 대었다. 그러다 이마를 대고 완전히 웅크린다. 보일러의 화력이 너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조만간 원룸 주인이 계란과 식혜를 팔기로 작정한 것인지 방바닥이 너무 뜨겁다. 장기하의 노랫말에서처럼 이러다간 내 발바닥이 녹아서 장판에 붙어버릴 것만 같았다. 벌써 주부가 된 냥 뜨거운 만큼 방이 건조한 덕에 빨래가 금세 빳빳하게 말라가는 거에 기뻐했지만 개키기는 귀찮아 조그마한 방 한구석에 빨래 건조대도 세를 살고 있다. 목이 말랐다. 조금 전 끓여둔 물은 아직 식지 않아 미적지근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나는 옷을 대충 걸쳐 입고 핸드폰도 없이 현금만 달랑 들고 근처 슈퍼로 향한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서자 생기 없는 눈으로 내가 아닌 허공을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아저씨는 인사를 내뱉었다. 나 역시 공허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소리 없이 인사를 대신한다. 목이 마른 것도 있었지만, 오늘 하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던 터라 목이 멨다. 이대로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물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끓이는 것도 이제 귀찮은 터였다. 여섯 개 묶음에 3600원이란 빨간 글씨의 라벨이 물통들의 더미 앞에 붙은 것이 보인다. 편의점 행사 상품보다 300원 비쌌지만 2리터 물 여섯 병을 낑낑거리며 멀리서 날라 올 생각은 없다. 여전히 말없이 계산을 하고 문을 나선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문을 열자 스피커에서 상투적이고 인공적인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안녕'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하고 당겨오는 오른쪽 목과 어깨 근육에서 통증을 느끼며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물병들을 고쳐 든다. 다 언젠가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게 될 물이다. 쌀쌀한 날씨에 내 목마름을 해소해줄 서울의 물은 차갑다.


 바로 앞 현관으로 향한다. . 물을 내려두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발을 대고 양 손으로 힘을 다해 물들을 끌어 당겼다. 문을 받치고 있던 내 오른발이 갑자기 자유로워졌다. 날 누르고 있던 현관문이 갑자기 사라지자 놀란 나는 두 손을 놓아버린다. . 하며 여섯 개의 물들은 아래로 떨어졌고 그들이 모두 한 모서리로 힘을 모아 내 발등을 내리찍는다.

  "!"

  오늘 처음으로 낸 소리다. 근 며칠 만에 처음일지도 모르는 소리다. 아니, 어제 친구와 통화를 하였으니 오늘 처음이 맞겠다. 아픔을 느끼던 것도 잠시 누군가 나를 도와주려 문을 잡아준 것에 놀랐다는 사실에 창피함이 더 커졌다. 여전히 현관문은 나를 위해 열려 있었다. 빠르게 물을 집어 올려 안으로 나른 뒤, 나는 뒤를 보았다. 아파하는 나에 당황과 그리고 약간의 웃음기가 어린 아몬드씨가 내 눈 앞에 서 있다. 입술을 깨물며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고 그가 먼저 가라며 비켜준다. 엘리베이터로 향한 그는 갑자기 방향을 꺾어 계단으로 사라졌다. 분명 예전 아슬아슬하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을 본 나이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오늘은 운동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매너 있는 아몬드씨였다. 나를 위해 버튼을 누르는 것은 잊지 않은 그였다.

물병을 열어 컵에 따르며 생각을 한다. 나는 그에게 한심한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얼굴을 잊어버릴 지경이니 한번 만나자고 한다. 새로 사서 한 번도 입지 않고 걸어두기만 했던 코트를 꺼냈다. 구두에 발을 끼워 넣으려다 뒤꿈치에 걸려 구두는 찌그러졌다. 함께 끼인 내 손가락이 아파왔다. 헛웃음이 났고 꾸겨진 채로 멀찌감치 구두를 밀어두고는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자마자 그녀가 꺼낸 말은

  "너는 뭐 별일 없어?"

였다. 내게 무슨 별일이 있었을까. 그리곤 자신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몇 보따리씩 풀어헤친다. 이야기가 꽤나 드라마틱하게 흐를 때도 있고 험담을 막 하다가도 결국에는 그의 편을 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나는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따금씩 질문을 한다.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다. 단조로운 나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때때로 아니 사실 자주, 나는 소설 책 속의 모모가 된다. 그 아이처럼 말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내 목소리를 낼 때도 있지만, 주로 이야기를 듣기, 그게 내 일이다. 대충 한편의 드라마를 마무리 지은 그녀는 이제 내게 관심이 가는 사람도 없냐는 질문을 한다. 속으로 무언가 뜨끔 하며 커피 잔을 쥔 내 손이 미세하게 움찔하지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다.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없어"라고 나는 말한다. 그 말에 그녀는 집에만 박혀 있어서 그런 거라며 요즘 왜 그러냐고 이젠 내 걱정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난 괜찮아'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지만 머뭇거리다 사실이 아님에 소리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다.


  커피 잔이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 만남을 계속하고 그녀와 헤어진다. "다음에 또 만나!"하며 해맑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나도 미소를 보여준다. 버스로 네 정거장 정도. 돌아가는 길에는 걸어가기로 한다. 겨울의 밤공기가 차가웠다.

 ""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온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다 녹아 질척거리고 사람들의 발 떼가 타 까매져버린 눈들이 눈에 거슬렸다. 뽀드득 거리는 흰 눈이면 좋으련만.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한 두개 보인다. 행성도 끼어있나? 다시 고개를 내려 깜깜한 밤거리를 응시하다가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기운 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기운 없이 거짓을 자그맣게 내뱉는다.

 

  "외롭지 않아."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주말이 다가왔다. 다음 주부터는 평일 내내 오전에는 예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다시 하기로 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휴대폰으로 몇 글자 적어 연락을 했더니 경력직 환영이라며 그대로 계신 사장님은 날 반가워했다. 개강 후의 시간 조절은 그 때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월요일에 보자라는 말로 연락을 끝맺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무기력하게 있느니 돈이나 벌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니 나의 여유로운 휴가도 이제 끝이 나가는 것만 같다. 마지막 주말, 마지막 자유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전날 몸이 무거워 일찍 잠이 들었기에 아침이라기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눈을 떴다. 사실은 여전히 뜨거워 등이 타버릴 것만 같은 보일러 덕분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창문도 조금 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답답한 이 조그만 집 안에 상쾌한 공기가 필요했다. 컴퓨터를 켰다가 허기를 느끼고 우유 조금에 시리얼을 붓는다. 고요한 방에 씹는 소리만 울릴 뿐이다. 적막을 깨고자 휴대폰으로 자그맣게 음악을 틀었다. 어느 정도 방음이 되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속을 아무리 헤집어 보아도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 며칠 동안 밀려두었던 설거지를 하고 빨래도 돌린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지만 손은 움직이질 않고 모니터는 입력 값이 없으니 검은 화면만을 띄었다.

  "쾅쾅"

 예상치 못한 문 밖의 소음에 토끼처럼 긴 귀는 없지만 짧은 내 귀가 바짝 올라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집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짧고 깔끔한 두 번의 노크다. 그리고 다시 정적. 스릴러 영화 속에서 본 온갖 장면이 떠오르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목소리를 낸다.

  "누구세요?"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집을 잘못 찾아 온 건가 생각을 하며 다시 뒤로 돌려는 순간 밖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저기 같은 건물 사는 사람인데요.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산책하실래요? 삼십 분 뒤에 현관에서 뵙죠."

  "?!"

제안이라기보다 일방적 통보에 가까운 그의 말에 놀라 큰 소리로 되묻지만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뭐지? 신종 납치 수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내가 혼자 사는 여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며 두려움에 떨다 갑자기 신발장 위에 놓인 작은 물체로 눈길이 간다. 아몬드였다. 이제 거의 일주일 째 그곳에서 말라가고 있는 아몬드.


  미친 짓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옷을 입고 있다. 씻고 있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산책에 적합한 복장이면서 너무 편하지만은 않은 옷을 고른다. 아직 쌀쌀한 날씨이니 패딩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다.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으며 열쇄를 집어넣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우면서도 일단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 것이니 우리 건물 사람은 맞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정신 나간 제안을 한 사람이 바로 아몬드씨라는 것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내려오면서 문득 처음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걱정을 한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일 층. 현관의 불투명 유리 너머로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후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에라 모르겠다! 하며 현관문을 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몬드씨였다.

 

  "저 본 적 있죠?"

그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단 가죠."

말없이 그는 저벅저벅 걸었다.

  "우리 지금 수목원 가는 거예요, 괜찮죠?"

끄덕끄덕.

 

 예전 그와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 나란히 걸었던 것처럼 우리는 속도를 맞춰 걷는다. 다만 차이점은 이번에는 우린 함께 라는 것이다. 나란히 걷는 것은 같지만, 그때는 따로 지금은 같이. 뭔가 웃긴 부분이 있었다. 태연하게 걷는 그 덕분에 나도 아무 생각 하지 않기로 하고 토요일 오전의 매연이 섞여든, 한때 상쾌했을 공기를 마시며 수목원을 향해 걸었다. 그저 기분 전환을 하러 혼자 걸어 나온 것처럼.

  "주말에 가끔 수목원 가시는 거 같던데, 취향이 저랑 같아서요.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옷을 다 입고 현관에 서서 또다시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하며 문을 두드려 버렸어요. 혼자 보단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앞을 향해 걸으며 앞만을 응시하며 그가 갑작스레 건넨 말, 그 솔직함에 놀란다.

  "같이 가는 게 낫겠죠, 아무래도."

그렇게 대답을 하다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제가 302호에 사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아이처럼 쑥스럽게 웃는다. 옆머리를 짧게 깎아 보이는 귀도 그렇게 웃는 듯 보였다. 동시에 주인아주머니에게 302호에 누가 새로 이사 온다는 이야기를 어쩌다 들었고 짐을 나르던 내 모습을 보아 그런 줄 알았다고 말한다.

  ", 그렇구나."


 그렇게 우리는 걸었다, 말없이. 말이 없다는 게 참 좋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기 앉을까요?"

그가 내 자리인 찰피나무 앞 벤치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거 알아요? 나무에게 말할 때에는 손을 대고 말해야 한다는 거."

 ', 나랑 똑같다!'하며 밝게 웃으며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가만히 나무에 손을 올린다. 내 나무에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런 데 앉아서 노래 듣는 거 좋아해요."

  "저도요, 무슨 노래 듣는데요?"

가만히 물었다.

  "그냥 이런 날 혼자 듣기 좋은 노래? , 산책하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먼 곳으로도 자주 가요?"

요즈음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날이 추워선지 집 밖을 도통 벗어나지 않는 나이지만 본래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저마다 스트레스 푸는 법이 한 가지씩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버티고 살아갈 수 없으니. 나는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걷는다. 혹은 버스를 타고 드라이브를 한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키는 곳을 정해, 걸을 만한 곳이면 더욱 좋다. 한참을 버스를 타고 달려 내린 뒤, 생각이 다 정리되고 마음 속 모든 말들을 공기 중으로 쏟아낼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가끔씩요. 혼자 걸어 다니는 거 좋아해요.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야 답답함이 풀릴 때가 있거든요."

  "그럼 언제 어디 멀리 같이 갈래요? 나도 걷는 거 좋아하는데."

  "그래요. 사실은 걷는 게 몇 안 되는 좋아하는 거 중 하나거든요. 어릴 때는 좋아하는 것들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부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싫어하는 걸 참고 하는 법을 배우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 말을 들은 적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 중에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라는 구절이 있는데, 참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거지만 벌써 좋아하는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아요. 예전엔 많았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요."

 

 말을 마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너무 진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버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수목원 찰피나무 그늘 아래여서일까? 그의 앞에서는 마음 속 말을 다 터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느 친구와 다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쳐가듯 그를 만나며 벌써 이만큼 익숙해져버린 걸까.

 

 갑자기 그는 한없이 늙은 얼굴을 하고 답했다.

  "나이 어려 보이는데, 내가 아는 그 또래들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진지한 사람 같아요."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은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 나였다. 그 말뜻은 대부분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돌려 표현한 것이었는데. 진지하다는 말이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뜻일까 겁이 났다. 그러다 이내 이 사람이 아몬드씨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이 사람 앞에서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재미없어 질려버린다면 떠나버리든 하겠지. 편하게 대하고 싶었다. 불과 한 시간 쯤 전에 첫 마디를 나눈 사이지만.

 

  "이제 일어나죠? 한 바퀴 돌아요, 우리."

그렇게 수목원을 돌았다. 날이 조금은 풀린다고 풀렸지만 여전히 일월이었기에 볼이 차갑게 얼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동동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전 추위에 정말 약해요. 조금만 추우면 곧잘 감기에 걸리곤 해요. 그래서 이렇게 추운 날엔 집 밖에 잘 안 나오는데, 오늘은 왠지 나오고 싶었어요. 집 안에서도 공기의 온도 차가 느껴지는 거 뭔지 알죠? 그래서 어떤 때는 침대 위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침낭을 덥고 잔적도 있어요."

 "정말요?"

천진하게 눈을 휘며 말하는 그의 귀도 빨갛게 얼어 있었다.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오해였는지 몰라도 피하기만 하다 불현듯 이렇게 다가온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아침에 씻으러 나가려면 삼중고를 겪어야 하죠."

 "그게 뭔데요?"

 "추위를 세 번 견뎌야 돼요. 침낭에서 나오면 텐트 속 공기가 너무 차갑고, 그 다음에 텐트 밖 내 방 공기가 너무 차가웠거든요. 마지막으로 거실로 나오면 흔히 거실들은 다 썰렁하잖아요. 우리 집은 더군다나 보일러가 별로 쓸 만하지 않았었거든요."

침낭 밖으로 애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그가 상상되어 웃음이 나왔다. 춥다고 이불을 두르는 모습도.

그런 말을 하는 사이 우리는 수목원을 빠져나와 근처 커피숍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잠깐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가죠."

 ".“

 

  따뜻한 라떼 두 잔을 시켰다. 뜨거운 걸 잘 마시지 못하는 나는 커피가 조금 식을 때까지 머그잔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지면 손을 잠시 뗐다 그 온기를 느끼기 위해 다시 가볍게 잡으면서. 몸이 녹는 듯 했다. 포근한 의자도 한 몫 했다. 그러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아몬드씨를 보자 갑작스레 혼란스러움이 밀려온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왜 나는 지금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있지?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인지 무언지 머리가 아파왔다. 알 수 없는 걱정들이 밀려와 내 머리 속을 괴롭게 헤집는다. 그러던 차에 그가 입을 열었다.

  "원래 전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어느 샌가부터 혼자 있는 게 편해지더라고요. 먼저 연락이나 만나자는 말도 잘 안하는 편인데, 오늘은 급작스럽게 그냥 부른 거예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그냥. 저도 모르겠네요, 왜 그랬는지. 그래도 이렇게 이웃사촌끼리 알아가는 거겠죠?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뭔지도 안 물었네. 이름 뭔지 물어봐도 돼요?"

  "김지아요."

  ", 지아구나. 이름 예쁘네요."

이제 내가 아몬드씨의 이름을 물을 차례였다. 그는 이제 아몬드씨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될 터이다.

  ", 그 쪽 이름은요?"

  "우리 또 만날 일이 있을까요?"

 "?"

이름을 묻는 질문에 동문서답이었다.

 

 "우리 많이 가까이 사니까 슈퍼에서라도 또 만나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다 이야기하면 재미없잖아요. 이름은 다음에 또 만나면 알려줄게요."

뭔가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진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알려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알아내지 못하였다. 앞으로는 맞교환을 해야 하나. 절대로 먼저 정보를 주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러다가 순간 뭐지? 아몬드씨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어느새 자연스레 다음에 만날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다. 태연한 그의 얼굴에 따질 수는 없었다. 하얀 편의 피부에 눈썹은 적당히 짙었다. 그리고 눈웃음을 짓는 눈에 코와 입도 자연스러웠다. 키는 작지는 않은 듯 했지만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왜 나만 이름을 알려 주냐고 따지고 들려 해도 그는 그저 재밌다고 웃기만 할 것 같았다. 생각하다 지친 나는 그저 커피만 홀짝인다.

 

  "이제 그만 일어나죠."

 어느새 그와 나의 잔은 텅 비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집이 보이는 골목이 보이고 그가 묻는다.

  "아침은 먹었어요?"

  ", 오늘 일찍 일어나서."

  "난 안 먹었는데......."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랐다. 어디 가서 같이 먹자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건 너무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내가 깊게 고민할 새도 없이 그가 말한다.

  "그것도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음에 같이 먹어요."

  "혼자 밥 먹기 싫은 날, 부르세요."

나는 그리 답한다.

  "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누군가 잘 찾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지아씨?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어쨌든 이렇게 다시 제가 불러낼 일은 아마 잘 없을 거예요. 혼자 아침을 꺼내 먹으려 하다가 문득 오늘은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는 현관에 들어섰고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먼저 올라가라며 나만 엘리베이터에 태운다.

 

 자기가 불러내놓고 이건 뭐지?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아몬드를 떨어뜨린 그. 갑자기 내게 알아가자는 말을 하며 다가왔다. 내 이름을 물어보고 다음에 자기 이름을 알려주겠다며 그리고 또 다음에 같이 밥을 먹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럴 일은 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복잡한 머리를 하고 멍한 표정을 지은 나와 달리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아몬드씨 당신, 정말 뭐지?

 

 

  그 후로 몇 주 동안은 아몬드씨를 마주할 수 없었다. 현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들여다보다 얄밉게 놓인 아몬드 한 알을 보곤 집어던지려 집어 올린다. 그렇지만 버릴 수만은 없었다. 추위를 많이 탄다고? 말라버린 아몬드에서 싹이 나기를 바리는 사람처럼 햇빛이 잘 드는 창틀에 옮겨둔다. 사실은 햇빛과 함께 바람도 새어 들어와 집 안에서 제일 추운 곳이기에. 그곳에 아몬드를 옮겨두고 나자 드디어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드러눕는다.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하는 곳은 여전했다. 직원들 대부분은 그대로였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헤매는 신입 아르바이트생 교육은 이제 내 몫이었다. 나의 첫 날도 저랬을까? 하며 이것저것 가르치고 또 사이사이 내 몫을 해내며 바쁘게 움직인다. 마음을 맞는 아이가 새로 들어오기를 바래본다.


  '슈퍼에서라도 마주치지 않을까요?'라는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친다. 마침 섬유유연제가 다 떨어졌다는 생각도 난다. 옷을 갈아입고 슈퍼로 향하려다 발을 돌린다. 실은 설사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에게 할 말조차 없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좀 더 멀리 떨어진 커다란 마트에 가기로 한다. 섬유유연제 하나쯤은 고생하지 않고 다시 들고 올 수 있을 거다.

섬유유연제 하나를 집어 드는 데에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자꾸만 카트가 제멋대로 굴러가 다른 사람이 그것들과 맞닥뜨린다.

 내가 아니라 이 카트 녀석이 누군가를 찾고 있나보다. 평일 애매한 시간의 마트가 비교적 한산했기에 나는 더 많은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은 카트를 끌고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그저 달리 할 일이 없이 시간이 많으니 나는 텅 빈 철창에 섬유유연제 한 마리만을 가두어두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었다. 소량계산대로 향한다. 계산원 아주머니의 밝은 인사에도 나는 말없이 웃음으로 답한다. 영수증을 챙겨들고 매고 온 배낭에 섬유유연제를 담는다. 하나를 샀지만 1+1이었기 때문에 1리터짜리 커다란 팩 두개가 내 배낭을 꽉 채운다. 얼핏 보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는 고등학생의 참고서로 가득 찬 배낭처럼 보였다.

 

  외로이 홀로 마트를 나선다.

걷다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내 눈에 예쁜 빛깔의 감귤 한 봉지를 들고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가만히 고개를 든다.

 

 

  아몬드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또 만났네요, 우리.”

 

    



 

실종된 아몬드, 변서림

 

변서림

bsr0862@gmail.com

010 9453 5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