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지스트 -exist-
'한 개체가 어떻게 인식되는가'에 따라서 ‘존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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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쾅!
절벽이 맞닿아 있는 고속도로. 자동차 한 대가 가드레일에 부딪혔다.
차는 이리저리 굴러 산산조각 나버렸고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운전자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점차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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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자는 눈을 뜨자 어리둥절하였다. 이곳은 자신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지만 사고 직후 눈을 뜬 곳이 방이라는 사실이 이상했다. 대게 사고가 발생하면 병원에 있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의 방이라니.
더불어 지금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 평소 직장을 다닐 때에도 이렇게 좋았던 적은 없었다.
“...꿈이었나?”
그 순간 남자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밥 드세요”
아내의 목소리였다.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다, 하지만 이것으로 남자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기억이 꿈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밥을 먹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
무언가 이상했다.
남자는 평소와 다르게 방문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사물이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다. 마치, 온 세상이 커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확실히 이상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를 들어올렸다. 남자는 당황하였다. 성인 남자인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밍키야~”
남자를 들어 올린 것은 그의 아내였다.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볍게 들어 올리다니...
“밍키야. 아빠는 어디가고 너만 있는 거니?”
밍키는 남자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이다. 그렇다. 강아지이다.
“음..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품에는 밍키. 즉 자신의 남편을 품에 안고서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개가 되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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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아내는 주방에 오자 사료를 한 움큼 가져와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아유~ 우리 밍키. 밥 먹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개 사료를 덥석 입에 물었다.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적응이 된 건가. 설마 이 잠깐의 시간동안? 절대 믿기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확실히 남자는 지금 먹고 있는 개 사료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졌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은 어디로 갔고, 왜 내가 우리 집 개가 되었을까?
끊임없이 궁리해 보았지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멍하니 생각하던 남자는 아내의 떨린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밍키야.. 설마 신문을 보는 거니?”
“.....”
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던 신문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강아지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신문을 넘기는 꼴이라니. 그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광경이었다.
남자는 기왕 이렇게 된 것 강아지가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아내의 한 마디에 바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호호. 꼭 아빠같이 행동하네. 매일 같이 다니더니 따라하는 건가. 호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녀에게는 어떠한 액션을 취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아. 맞다, 맞다! 옆집 아주머니 고양이 산책해주기로 했지!”
그녀가 퍼뜩 생각난 얼굴로 박수를 짝 치더니 밍키를 보며 싱긋 웃었다.
“밍키야~ 산책 나가자~”
남자는 슬슬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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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리리릭~
남자의 아내는 따스한 햇살과 산책이 기분 좋은지 휘파람을 불어대며 사뿐사뿐 거리를 걸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밍키가 얌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사실, 밍키는 이렇게 온순한 아이가 아니었다. 본능대로 행동하고 신나게 돌아다니는 익살맞은 강아지다.
하지만 남자의 아내는 이런 밍키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쳐다보았다.
나랑 오랫동안 같이 살았기 때문인가? ..그래서일 수도 있겠네.
남자가 그녀를 따라서 걷기 시작한지도 한 10여분이 지났을 무렵, 저 멀리서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의 아내도 그 여성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
그녀는 남자의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다. 남자의 부부처럼 애완동물을 키우다 보니 같이 일면식하게 된 사이였다.
“오랜만이야, 새색시.”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우와! 캣시는 전보다 많이 자랐네요!”
남자의 아내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호호. 매임 많이 먹어서 그래. 음~ 밍키도 많이...... 많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호호 웃으며 손 사레를 치던 그녀는 강아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동물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갔는데 왜 이상하지 않겠는가. 옆에서 손사래 치며 말하는 남자의 아내가 유별난 거다.
“기분 탓일 거예요~ 기분 탓~”
“그..그런가? 호호..”
“호호호.”
아주머니를 따라 입을 가리며 웃던 남자의 아내는 별안간 남자를 들어 올리더니 캣시라는 고양이 앞에 그를 두었다.
“자. 밍키야. 오랜만이지. 캣시야 캣시.”
남자도 아내와 같이 다니다가 이 고양이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바라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강아지와 다르게 날카로운 눈매에 깊은 눈동자.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이었다. 아니 정말 깊이 빨려 들어갔다.
주위의 소리도, 시간도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캣시의 눈동자만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내의 목소리에 남자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밍키야 가자~”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남자는 앞서가는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다.
“캣시야, 어디가?”
아주머니였다. 그것보다 캣시라니?
남자는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고목처럼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방금까지 그였던 밍키라는 존재가 떡 하니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밍키인데. 아니, 밍키는 아니지만... 어쨌든 방금까지 자신이었던 존재가 저기에 있다니! .....그럼 나는 누구이지?
남자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곧바로 자신을 부르는 아주머니의 부름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캣시야, 우리도 가자~”
....아무래도 이번에는 캣시라는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결국, 그는 아주머니와 같이 그녀의 집에 들어왔다.
강아지 다음에는 고양이라..
처음, 그가 영문도 모른 채 밍키와 합쳐졌을 때는 당황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도 머리가 어지럽긴 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고양이의 삶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 누가 강아지가 되고, 고양이가 되는 경험을 해보겠나?
우선, 남자는 행동에 나서기 전, 목에 걸려있는 ‘무언가’를 떼버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중에 찾으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불편한 것도 없겠다. 그는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해보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몸에 놀라며 그는 방방곳곳 뛰어다녔다. 이리저리 물건들이 헤집어지고 난잡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자신의 집도 아니고 이상하게도 그저 몸 가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은 무료한 시간으로 인해서 리모컨을 사용하여 tv를 보기도 하였다. 고양이의 몸으로 구멍가게 과자들을 훔치기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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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남자는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더니 결국, 아주머니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은 캣시의 모습에 기이함을 느꼈다. 캣시를 들어 올려 뚫어지게 고양이를 관찰하던 그녀는 고양이의 목에 걸려있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어, 캣시가 아닌가?”
남자는 그녀의 한마디에 당황하였다. 자신이 캣시는 아니었지만, 분명 이 몸뚱이는 캣시라는 고양이가 분명한데, 아니라니?
하지만 그는 그녀가 중얼거린 한마디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름이 적힌 목걸이가 없네..?”
남자가 불편하다고 떼어버린 것은 이름이 적힌 목걸이였다. 상황은 남자가 어떻게 수습할 겨를도 없이 점점 안 좋게 흘러갔다.
“아유~ 고양아. 우리 집 애가 아니었나 보네. 우선 동물보호소에 데려다 줄게”
이러면 안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양이의 기이한 행동과 이름표가 없음으로 인하여 캣시라는 고양이를 다른 고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이 고양이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는 우선 아주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마치 교통사고를 당했던 순간처럼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데....!
결국,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남자의 의식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원래 고양이의 존재뿐이었다.
사선은 그대로 끝마무리 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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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보게 된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사람의 손이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동물이 되지 않은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어쨌든 원래 자신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양이의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였다.
“아유~ 이제 일어났니? 유치원 가야지~”
한 여성이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유니폼으로 보이는 옷을 가져오더니 천천히 그의 옷을 갈아입혀주기 시작했다.
“자, 됐다! 가볼까?”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유치원 차량 한 대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유치원생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에는 집중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소한 다른 행동으로 인하여 이 아이의 존재가 달리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그는 최소한으로 행동을 조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잘 다녀와~”
어머니는 좌우로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 이 아이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저 간소하게 대답하였다.
“네.”
조용히 조용히...
대답을 마친 그는 조용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부르릉 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진정된 가슴을 추스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아이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본 남자의 가슴은 쿵! 하고 덜컥하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문제였을 것이다.
또 자신은 이 아이를 의도치 않게 변화 시키게 될 것이다. 이 아이는 다른 존재로 인식이 될 것이다.
남자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간이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버스는 유치원에 도착하였다.
우선, 남자는 최소한으로 움직임을 절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먹고, 눈을 뜨자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모두 내리고 선생님 한 분만이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많이 졸렸나 보구나. 선생님이 업어줄까?”
유치원 선생님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깊게 가지지 않기로 말이다.
“괜찮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지나쳐 버스에서 내렸다.
남자가 나가고, 유치원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 자신에게 말하던 아이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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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하교를 할 때까지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였다.
혼자 밥을 먹고, 옆에서 구경만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이로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이렇게 생활하면서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만 찾으면, 이 아이에게 지장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탄 버스가 학교를 떠나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옆에 있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좀 달랐죠.”
“평소에는 활기찬 아이였는데..”
“네, 말수도 없고 조용히 있고.”
두 선생님을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정적이 흐르고, 주위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단체 놀이시간이 있었을 때도 혼자 있더라고요. 같이 놀자고 말은 꺼냈는데, 괜찮다며 사양하는 게 꼭 다른 사람 같았어요.”
“아이들하고 밥 먹을 때도 아무 말 없이 먹고, 혼자 따로 앉아 컴퓨터를 하고.”
“조용하고 얌전해서 편하기는 한데,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려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결국, 담임선생님이 아이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린 후에도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여태까지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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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탄 버스는 10여분을 달리고 집에 도착하였다. 다른 아이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가방을 챙기고 버스에 내렸다. 그리고 그가 이 아이의 어머니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춰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심장이 덜컥 하였다.
....아무리 조용히 있으려했지만 무언가 문제가 되었구나.
남자는 무거운 죄책감과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는 자신의 앞으로 검은색의 한 고양이가 휙 지나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고양이가 매우 낯이 익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던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고양이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남자의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멍하니 그곳을 쳐다보던 남자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몸이 얼어붙었다.
"고양아,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의 주인이 아니란다.“
아니었다. 분명, 저 고양이의 캣시였다. 하지만 남자의 행동으로 그녀는 아직까지 캣시를 다른 고양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 상황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자신 때문이었다. 저 고양이도 이 아이도 자신 때문에 달라져버린 것이다.
남자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주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엄마, 이 고양이 캣시 맞아”
확신에 찬 말투였다. 어떻게 안 것일까. 아니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남자에게는 저 아이의 말은 구원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여전히 믿지 못하였다.
“캣시 아니야. 이름표도 없잖아.”
“아니야. 자세히 봐봐. 행동하는 것도 캣시잖아.”
아이의 말에 그녀는 고양이를 자세히 관찰하더니 의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런 것 같네. 이상하네...?”
“거봐 맞지!”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저 고양이는 다시 캣시라는 고양이가 된 것이다. 남자는 갑자기 밀려오는 안도감에 다리가 휘청했다.
그 순간 남자는 힘이 쭉 빠지고 몸이 지면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짐은 없어졌다.
그렇게 다행스런 마음으로 희미해지는 정신에 몸을 맡기던 남자는 자신을 애타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이 몸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을, 이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기서 정신을 잃을 수 없었다.
아... 안 돼 ...
남자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보려 했지만, 결국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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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어느 저녁. 높디높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젊은 부부가 나무 아래에서 다정하게 비를 피한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어느 오후. 높디높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가 사이좋게 햇빛에 몸을 녹인다.
아침 안개가 가득한 새벽. 높디높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어머니와 사이좋게 손을 맞잡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었지만, 매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되어주었다.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그늘이 되었다. 둘 만의 시간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나무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었지만, 매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는 또 누가 될까. 꿈이라면 깨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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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교통사로 인하여 식물인간이 되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여기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병실에만 있다.
남자의 병실에는 창문 하나가 있다. 창문 밖에는 작은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 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창문 밖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그녀는 매번 캣시라는 고양이와 함께 있었다.
창문 밖에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매번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창문 밖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매일 검은색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다녔다.
남자는 그들이 되고 싶었다. 창문 밖의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이 되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겠지?
‘나는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없다.’
김수헌
010-3778-7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