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열쇠

by 루꾱 posted May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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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열쇠


밝은 태양이 푸른 잔디를 눈부시게 적시는 화창한 어느 날의 오후. 허나 맑은 날씨와는 반대로 22살의 그는 극도로 초조해 보인다.

미안하지만 나...”

눈에 보일 정도로 경직된 그와 마주서있던 24살의 그녀가 말한다. 어려워하는 표정의 그녀는 그에게 거절을 말한다.

그럼... 먼저 가볼게... 미안해...”

그에겐 미안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가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단지 좋은 동생일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스쳐간다. 허나 그는 입 안 가득 스미는 씁쓸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를 흘려보낸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간다. 그의 22살 봄의 청춘이 떠나간다.

후우우...”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트린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 * *

 

다음 날, 여전히 황금빛 햇살은 세상을 밝게 비추지만 22살의 그는 기운이 없어 보인다. 기운 없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쉰다. 확실히, 기운이 넘친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이대로... 끝이겠지?

어젯밤. 조용한 밤이면 늘 그녀의 소식을 물어다주던 그의 폰이 조용했다. 조금은 낯선 정적. 그것이 그를 더 가라앉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에 상처받는 자신이 한심해 고개를 떨어트린다. 스스로가 비참해진다.

 

같은 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는 다르게 24살의 그녀는 조금 복잡하다. 그녀는 그를 거절했다. 마음이 없다면 거절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게 상대방을 위한 일이고 옳은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오를까?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그녀 앞에서 화사하게 웃어주던 그의 얼굴과 겹쳐진다. 너무도 대조적이라 가슴 아픈 오버랩.

이상한 일이다. 정말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할 텐데...

하지만 티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또 문득 문득 그의 상처받은 표정이 떠오른다.

역시... 조금 복잡해...

어젯밤. 항상 그에게 자신의 하루를 재잘거리던 그녀지만, 어제는 폰을 들 용기가 없었다. 조금은 낯선 정적. 그녀는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생이었는데... 그가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라 조금은 그녀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그 설렘의 향기는 아직, 너무나도 미약하다. 그녀의 무거운 마음이 털썩-자신도 모르게 비집고 나와 흘러, 떨어진다.

 

하아아...”

 

하지만 상처를 오랫동안 음미할 시간도 없이, 오늘의 그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대학은 결코 그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가만히 멈춰서있기엔 22살의 봄은 그렇게 상냥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에겐 22살의 봄은 그렇게 상냥하지 않았다.

 

오늘의 그녀도 애써 의연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세월은 결코 그녀를 기다리지 않기에, 가만히 멈춰서있기엔 24살의 봄은 어리지 않았다. 마냥 마음에 묶여있기엔 24살의 봄은 어리지 않았다.

마음은 다잡은 그녀는 친구와 도란도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음을 뗀다.

 

그런데...

 

강의실복도 저편. 그녀가 보인다. 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는 그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그 혼자서만 앓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열병도, 그 후유증도. 그리고 아직 남은 상사병의 몸살조차도. 오롯하게, 그 혼자서만.

…….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굳어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선다. 그는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음이 마음 아프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되어버리니까,

그는 혼자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싫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는 입술을 깨문다. 그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넨다.

 

안녕 누나.”

 

그녀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

아뿔싸, 그녀의 앞에는 언제 온지도 모를 그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안 좋을 수가? 그녀는 자신의 둔함을 원망한다.

허나 그녀가 급작스러움에 놀라 미처 인사도 못한 채 얼어있는 사이, 그의 존재를 모르는 그녀의 친구는 그를 발견 못한 채로, 그녀를 데리고 강의실로 들어간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그의 인사를 무시한다.

다시 나가서 인사를 하려 했지만... 굳이 다시 나가서 인사하는 것도 낯간지럽고 이상하다. 무엇보다... 그와 단둘이 마주하는 게 어렵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인사를 무시한다.

고작 하루, 고작 하루 만에 그들은 다가갈 수 없는 불길 같은 강 한 줄기를 그들의 사이에 두게 되었다.

 

…….

그의 인사는 무시당했다. 그는 한참을 손을 든 채로 서있다. 그는 한참을 굳어있다.

뭐야 이게...”

그는 떨어트리듯 웃으며 손을 내린다. 너무 비참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그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또 한 번 거절당한 느낌이다.

그렇게 축 늘어진 그의 어깨에, 어느새 다가온 친구가 어깨동무를 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젠 그녀와 친구조차도 아닌 사이가 돼버렸다는 사실에 애석한 마음이 입 안 가득 비릿하게 퍼지지만... 친구 앞의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난다. 이미 만신창이가 돼버린 자존심이지만... 더 이상 짓밟힐 순 없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자리를 뜬다. 다시금 일상으로 녹아든다.

 

강의실로 들어온 그녀. 그녀는 그의 인사를 무시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그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녀는 폰을 들었다. 허나 그녀는 다시 폰을 놓는다. 하지만 또다시 폰을 잡는다. 그리고 다시금 폰을 내려놓는다. 그녀는 반복한다.

그를 생각하면 폰을 들지만... 함께 떠오른 그의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을 생각하면 폰을 내려놓게 된다. 더 이상... 상처 줄 순 없다.

그녀는 결국 포기한다.

 

그녀는 그와 어색해진다.

그는 그녀와 어색해진다.

그들은 어색해진다.

 

* * *

 

얼마의 시간 그동안, 그들은 점점 멀어졌다. 어쩌면 친구와 연인사이에서 미끄러진 모든 이들이 밟는 길을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결국 친구조차도 되지 못했다.

웃고 떠들던 그들의 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웃고 떠들던 그들의 행복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들도 알고 있고, 그들도 기억한다.

허나 그는 그녀에게 뛰어가지 못한다.

그녀는 그에게 전활 걸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의 거절이 두렵고, 상처가 무섭다.

그녀는 상처 줄까 두렵고, 책임이 버겁다.

스무 두 살이나 스무 네 살이나 스무 살의 어리숙함과 스무 살 만의 여린 마음은 여전하여,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기억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한다. 되찾을 수 있는 순간임에도 그들은 붙잡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 수 있게 응집되고 있는 그 마그마 같은 것들에도, 그들은 시작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는 몇 번 더 그녀와 마주쳤지만 이번엔 의식적으로 그녀를 피한다.

그녀는 나를 발견했을까?

그녀가 아는 체를 한 것도 같았지만, 그는 애써 외면한다. 완전히 시선을 피했기에, 그녀의 반응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와 또 마주쳤다. 저번의 미안함을 담아, 이번엔 그녀가 먼저 손을 흔든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어라? 날 못 봤나?

그녀는 끝까지 손을 들고 있다. 허나 그는 끝까지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녀는 덩그러니 남는다. 그녀만 덩그러니 남는다.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누가 볼 새라 얼른 손을 내린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일부러는 아니었겠지만... 조금은 그가 밉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저지른 잘못이라 그를 탓 할 수 없다.

... 뭐랄까 오늘은... 엉망인 하루였다.

 

그 뒤로 며칠,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나를 피해 다니는 건가? 무슨 일 있나? 단순히 시간이 안 맞은 것일 수도 있지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걱정의 씨앗이 불안의 땅에서 싹을 틔운다. 초조함을 먹고 조금씩 자라난다.

다만... 그녀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그 뒤로 며칠,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와 그를 찾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그가 보고 싶기도 하다. 항상 그와 마주치던 대학교 정문 앞에서 괜히 한번 둘러본다. 하지만 오늘도 그는 없다.

! 그런데 나.

 

, 약속시간에 늦겠다.

그는 전화를 걸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사정을 설명하며 열심히 통화를 하던 그, 잠깐만- 하고 멈춰 선다.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그녀와 마주치던 정문 언저리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그는 그녀가 반갑다. 그래서 그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인사하며 다가서다가아차, 멈춘다. 그를 거절했던 그녀가 떠오른다. 그를 무시하고 강의실로 들어갔던 그녀가 떠오른다. 다시 무시당할까 두렵다. 거절당할까봐 겁난다. 엄청난 중력이 그를 잡아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감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있다.

, 아니야- 그는 다시 수화기너머의 친구에게 말을 걸며 그녀를 지나치려 한다. 입맛이 쓰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다. 처음엔 주머니를 뒤적뒤적, 이내 곧 그녀 자신의 주위를 기웃기웃.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다. 하지만 찾지 못했는지, 그녀의 갈팡질팡하고 전전긍긍한 불안감이 그에게까지 느껴진다. 어떡하지? 도와줄까?

 

그녀는 열쇠를 찾고 있다. 아주 중요한 열쇠. 항상 조심히 보관하던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뒤적뒤적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본다. 그러나 없다. 그녀는 더듬더듬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하지만 없다. 그녀는 주섬주섬 가방 속을 헤집어 본다. 역시나 없다.

분명히 아까까진 있었는데... 이 근처에서 떨어트린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기웃거리지만, 결국은 찾지 못한다. 역시... 없다.

소중한 건데... 어떡해...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의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인다.

 

그는 아직 고민하고 있다. 도와줘야하나?

그때 그의 눈에 놀람의 감정이 서렸다. 그녀가, 무언가를 찾는 듯 보이던 그녀가 고개를 떨어트리고 어깨를 떤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그는 가슴이 시큰하다. 괜히 눈시울이 뜨겁다. 그는 주먹을 꽉 말아 쥔다.

그는 길게 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은 후,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그녀에게로 그가 다가왔다.

...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 순간,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와 마주한다.

어색함이라는 끈이 불편함이라는 매듭을 지으며 그녀를 휘감는다.

그녀는 그와의 접점을 거부한다.

... 아니야...”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그녀에게 다가가려한다.

뭐 찾고 있는 것 같던데... 뭐 잃어버린 거 에요?”

그냥...”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말을 흐린다. 그녀도 염치란 것이 있기에, 감히 그에게 부탁하지 못한다.

 

…….

그녀가 불편해한다. 순간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여 조금 웃음이 나왔다.

젠장, 뭐 하러 나온 거야? 무슨 좋은 꼴을 보자고?

꼭 말아 쥔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뭔가... 비참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며, 또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한다.

... 그래요?”

 

그가 아...그래요?-하며 돌아선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그의 도움을 받아선 안 돼.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사실... 염치란 놈이 있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부탁을 해야 할 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열쇠였다.

저기...”

 

그는 돌아섰다. 역시 안 되는구나...하며

그때 그의 옷깃을 잡는 그녀의 손. 그리고 그를 돌려세우는 그녀의 목소리. 그의 귀에 그녀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눈동자에 고개를 떨어트린 채 힘겹게 말하는 그녀가 보인다.

자꾸만... 괜찮다고 말하며 와락, 안아버리고만 싶다.

 

어쩌면... 이 순간 가장 도움받기 싫은 상대일 수도 있는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비참함과, 미안함과, 절박함에 그녀는 입술을 깨문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겉 같아 고개를 떨어트린다.

 

괜찮아요. 도와줄게요.”

 

항상 연상의 위엄을 지키려 늘 어른스럽던 그녀. 그녀가 숨겨왔던 가녀림에, 그 흔들리는 유약함에 결국, 그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 자신의 품에 기대어놓고는 달랜다. 그리곤 딱 붙어있는 둘의 사이만큼 가까워진 어색함이 둘을 덮치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그는 그녀가 잃어버린 열쇠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는 굳어버렸다. 기습적으로 다가온 그의 품에,

그녀는 숨을 멈춰버렸다. 아찔하게 다가온 그의 향기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데어버릴 것 같이 뜨거운 그의 온기에,

그가... 처음으로 남자로 느껴졌다.

그러다 아차, 자신의 열쇠를 열심히 찾는 그의 모습에 정신이 든다. 그녀는 빠알갛게 상기된 얼굴을 숨기며 열쇠 찾기에 몰입한다.

 

그는 열쇠를 찾는 일에만 몰두한다.

끊어진 대화 속에서 길가의 화초 속을 뒤적뒤적, 하수구 안을 기웃기웃, 걸어온 길을 거슬러 주섬주섬, 여기를 한 번 빼꼼, 저기를 한 번 물끄러미, 그는 완전히 열쇠를 찾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녀는 열쇠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려한다.

끊어진 대화 속에서 길가의 화초 속을 뒤적뒤적, 하수구 안을 기웃기웃, 걸어온 길을 거슬러 주섬주섬. 그리고... 그를 한번 힐끔.

왜일까? 그렇게 소중한 열쇠를 찾는 중임에도 그가 신경 쓰이는 이유는?

그녀는 조금 복잡하다. 애써 열쇠에 신경을 집중하며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둘은 열쇠를 찾는 일에 완전히 녹아든다. 하지만 모든 잃어버린 물건이 그러하듯 한번 잃어버린 물건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부재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없어짐으로써 얼마나 소중했는지, 또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 그 와중에도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 속절없이, 메이는 일 없이 흘러 어느새 세상을 밤의 향기로 물들인다.

 

하아아...”

주변은 어느새 밤의 옷자락에 뒤덮여 어둠을 머금었고, 그녀는 초조함에 떨고 있다.

진짜 찾아야하는데... 조금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때, 톡 토도독 토독. 빗방울이 떨어진다.

왜 이런 순간엔 항상 비가 오는 걸까?

그녀는 하늘이 조금 원망스럽다.

 

톡 토도독 토독.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열쇠를 찾는다. 하지만 사실, 조바심이 난다. 멋있게 열쇠를 찾아내서 그녀를 웃게 해 주고 싶었는데... 둘의 사이는 운명과 기적의 세레나데가 아니었고,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그는 어두워진 시야에 휴대폰 라이트를 비춰보지만, 그 빛의 좁은 시야에 들어오는 건 굵어지는 빗방울뿐이다. 그래도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재경아

 

그녀는 그를 불러 세운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자기일도 아닌데 허리도 한 번 안 펴고, 비도 오는데 고생고생. 더 이상그에게 피해 줄 순 없었다. 그녀는 그의 호의를 멈춰 세운다.

비 오잖아...들어가...”

 

그는 멈칫한다. 그녀를 바라본다. 아직 찾지 못했는데... 아직 웃게 해 주지 못했는데... 그녀가 그만하자고 한다. 이대로 멈출 수 없다. 그는 입을 뗀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그녀도 비를 맞고 있음을 깨닫는다. 쫄딱 젖어버린 그녀를 본다. 그는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한다. 여전히 아쉽지만... 자신의 아집 때문에 그녀를 힘들게 할 순 없다.

가슴이 갑갑해 터질 것만 같지만, 그녀를 위해 그는 입을 뗀다.

알았어요. 대신 누나도 들어가면.”

 

그가 생각보다 쉽게 알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도 들어간다면의 조건을 내 걸었지만,

실은 힘들게 견디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왠지 조금 서운하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그를 보낸다. 하지만. 역시 조금은 서운하다.

 

그는 그를 태연히 보내주는 그녀를 본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찾아 헤매지도 않고, 그렇게...

그는 흩어질 듯 아릿하게 눈물짓던 그녀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빗속에 더 이상 그녀를 세워둘 순 없다. 그는 그녀에게 내일 아침, 꼭 다시 찾는 걸 도와주겠다, 약속하고는 그녀를 보낸다. 그는 혹시나 그녀가 남아서 계속 열쇠를 찾을까 그녀를 먼저 보낸다.

그렇게 둘은 헤어진다.

 

-

 

그녀는 집에 도착한다. 가까운 거리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제법 먼 거리라 버스를 타야하는 그를 걱정한다. 조금 있다가 그가 도착할 즈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볼까 생각중이다.

문득, 그는 항상 이렇게 자신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여러 모습들이 떠오른다. 빗속에서 자신을 위해 열쇠를 찾아 헤매던 모습, 그녀에게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 언제 어디서나 뭐해요, 뭐해요?’하며 항상 궁금해 하던 모습, 그리고 활짝 웃으며 다가오던 그의 모습.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다. 항상 웃으며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니...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

아냐, 아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을 털어낸다. 이미 붉게 상기된 볼은 숨길 길이 없지만 그녀는 정신을 깨우려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 뽀송뽀송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몸은 개운하지만, 머릿속은 너저분하다. 이렇게 잃어버리는 건가? 아직 정리되지 못한 추억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그리고 어쩌면 열쇠 생각보다 더 많이, 그가 아른거린다.

따뜻한 밀크티 한잔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있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적신 게 하늘에서 내린 빗물인지, 샤워기의 물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헷갈린다.

그녀의 호흡을 따라 하얗게 서리는 입김에 그 열쇠의 추억이 같이 서린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많은 감정과 추억들이 서린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 모든 기억들을 지워내듯 창을 쓸어내리지만, 오랜 추억들은 진달래꽃처럼 하이얗게 입김 위에 피며 흐드러진다. 흩어질 듯 흩어질 듯 흐릿하게 반짝이지만... 그렇기에 더 애가 탄다.

역시... 이대로 있을 순 없어.

그녀는 우산을 챙겨 다시 집을 나선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그 비가 빚어내는 적막한 고요의 멜로디. 소나기는 아닌 듯 끊임없이, 하지만 조용하게 흐르는 봄비의 선율. 그녀는 발아래 복잡함을 찰박거리며 그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길가의 화초 속을 뒤적뒤적, 하수구 안을 기웃기웃, 걸어온 길을 거슬러 주섬주섬, 여기를 한 번 빼꼼, 저기를 한 번 물끄러미. 누군가가,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라이트 불빛을 흔들거리며 주변을 헤매는 그 사람. 과연 누굴까? 그녀는 조금 더 다가간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멎는다.

 

그녀를 보낸 후 그는 돌아서려고 했다. 아니 몇 발자국만큼은, 실제로 돌아섰다. 하지만그녀의 떨리던 어깨가 아른거린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린다.

결국 그는 다시 발걸음을 되돌린다. 비록 한 폭의 시야밖에 비추지 못하는 라이트지만, 그 빛에 비치는 건 굵어지는 빗방울뿐이라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라이트를 켠다. 다시 그녀의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헤맨다. 비록바보 같을 지라도, 한심하기 그지없을 지라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였다. 이 빗속을 헤매던 이는 바로 그였다.

돌아간 게 아니었나?

그는 쫄딱 젖은 모습으로도 그녀를 위해 열쇠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널 거절한 나인데... 무슨 열쇠인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 양심이 비명을 지른다. 그녀는 그를 멈춰 세우고자 한다.

그때,

 

아싸 찾았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그의 손에서 은빛 열쇠가 반짝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른다. 드디어 그녀의 웃음을 찾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곤 이내 아차. 부끄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며 그녀에게로 간다.

 

휴대폰이 울린다.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나 찾았어요!- 기계음을 타고, 그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허나, 아무 말도 않는다.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본다.

 

이상하다. 분명 전화를 받았는데, 대꾸가 없다.

그는 그녀가 놀란 탓이라 생각한다.

오직 열쇠만 바라보며 걷던 그는, 눈앞의 인영에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긴 커녕 이 순간 누구보다도 행복한, 아기 같은 웃음으로 그녀에게 열쇠를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는다.

완전히 쫄딱 젖은 모습. 너무도 미안하다. 또 그렇기에 너무도 감사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

그녀는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거절이, 그녀의 무시가, 멀어진 사이가 떠오른다. 괜히 쭈뼛쭈뼛, 어색해진다. 그녀도 불편해 하는 것 같다.

그는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 지를 생각할 새도, 왜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할 새도 없이 재빨리 등을 돌린다.

그럼 전 이만

 

, 안 돼 이대로 보낼 순 없어!

그녀가 또 그의 옷깃을 잡는다. 마치 부탁을 하던 그때처럼. 허나 그때완 전혀 다른 마음으로, 다른 의미로.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용기 내 말한다.

데려다 줄게. 우산도 없잖아.”

이미 홀딱 젖어버린 그이지만, 그녀는 다가가 우산을 씌워준다.

 

그녀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준다.

그의 심장이 두근,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한다.

아니겠지찾아준 성의에 대한 보답이겠지.

그는 애써 심호흡을 한다. 애꿎은 기대감을 부여잡고, 희망을 진정시킨다.

그렇게 둘은 같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커다란 검은 우산 아래, 둘은 아무 말 없이 걷는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커다란 검은 우산 아래, 말은 없지만 생각은 가득하다. 공간을 메운 것은 비뿐만이 아니다.

그의 목적지에 닿을 무렵, 이제 곧 안녕을 말해야 하는 순간,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네 고백...아직 유효해?”

그의 표정은 의아함이다가, 휘둥그레 놀라다가, 이내 환희로 가득 찬다. 햇빛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

그는 대답대신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는다.

긴장할 대로 긴장해 있던 그녀 또한 깜짝 놀라다가, 이내 그의 손이 전해주는 따스함에 슬며시 미소 짓는다. 그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행복이 터져나온다.

커다란 검은 우산아래, 그렇게 둘은 함께 걷는다.

설레는 작은 행복아래, 그렇게 둘은 함께 걷는다.

 

그녀는 알까? 사실은 그녀를 보낸 후, 내가 계속 그녀의 열쇠를 찾아 헤맸다는 것을. 또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찾아 헤맸는지를.

 

그는 알까? 사실은 그가 찾은 열쇠가... 내가 찾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찾은 열쇠가 연 것은 굳게 잠겨버린 자물쇠가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었단 것을.

 

우산이 커서 다행이다. 내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릴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

 

우산이 커서 다행이다. 내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

 

우산이 커서 다행이다.

우산이 커서 다행이다.

 

fin


이름 : 이한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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