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진

by 이도희97 posted May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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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진

 

 

'내방 창문 밖은 커다란 감나무와 그 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너를 알게된 나는 더 젊어지고 싶었다. 가슴아래와 등 뒤 날개죽지에선 주름과 검버섯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너와 함께 보내는 밤마다 그 모든걸 잊고선 젊고 어린 여고생처럼 너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수줍어 하였다. 서로 손을 깍지낀채로 별다리를 지나 보름달 앞까지 걸어간뒤 우리는 기뻐하였고 서로를 더 사랑 하였다.

새벽의 푸른빛이 천천히 식어갈 때쯤이면 너는 앙상하게 드러난 내 척추뼈에 몸을 더욱 더 바싹붙이고선 내 머리칼을 살살 어루만지고 또 주름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나는 그때마다 꽃을 피었고. 너는 등 뒤에서 나의 꽃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나는 모른다.

내가 너에게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너와 같은 어린아이가 되고싶다 했을때, 너는 뾰루퉁한 얼굴로 어리지 않다고 배꼽주변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었지만 나는 너의 그런 모습마저도 어려보이고 귀여보여 너의 정수리를 가까이 잡아당겨 키스하였다.

내가 바란 젊음은 그런것 이였다. 너의 몸짓과 표정에서 나오는 당연하면서도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가지고 싶어하였다.

감나무 위를 맨발로 올라, 감나무 잎사귀들이 내 머리칼과 살갗을 마음대로 헤집게 그대로 두곤 가지에 걸터앉아 너를 내려다 보고싶었다. 내 발 끝을 종아리를 너의 입술에 맞추고 싶었다.

혹은 너와 함께 마당의 잔디밭 스프링클러의 물을 맞으며 뛰어놀고, 어느 풀밭이든 서스럼 없이 너와 마주 누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내가 바란 젊음은 그런 것이였다.

‘유진’

너가 불러주는 내 이름이 너무나 예쁘게 들려 계속 들려 달라 때를 쓴적이있었다.

나는 너를 덮었고 너는 하얀 이불을 덮은채 나를 팔로 가두고선 내 귀에 느리게 속삭였다.

‘유진’

‘응’

‘유진’

‘응’

어느 비오는날 다른때보다 천둥이 더 거세게 내려쳤고 마당의 잔디는 오랜만의 단비에 비를 흠뻑 맞은채로 보름달이 꽉 찬 저녁을 맞이하였다. 쾅쾅 내리치는 천둥소리와 귀 옆에 들리는 너의 목소리가 겹쳤고, 서로의 체온이 서늘함과 동시에 맞닿아있는 부분만이 따스해 너를 더 사랑하게 되었던 날인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아주 많이 그렸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그림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하였다. 하지만 너는 내 그림은 좋지만 너무 어려워 많이 생각해야한다 하여 나는 너를 그렸다. 너는 그림을 보고서 알수없는 표정을 지었고. 그 뒤로도 자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너를 가만히 몇분동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그런 너를 아주 사랑했다.

너를 아주 사랑했다.

유 진

오두막집 앞에서 20분째 젖은 양복을 입은 서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주제는 한결같이 이런 산골에서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였고 나는 한귀로 듣고 흘리는걸 계속 반복하였다. 서팀장의 차는 시동이 이십분째 걸려서 덜덜 걸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차 마저도 서팀장이 수다를 그만 끝내고 빨리 서울로 올라가길 재촉하는거같았다.

“이런 산골에 내려와서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시겠단건지 저는 전혀 이해 못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작품은 뭐랄까, 그래요 도시속의 차가운 여자가 그리는 차가운 도시 아닙니까? 여기는 뭐 도로가 있는것도 아니고 이웃집이 있는것도 아니고, 안그래도 부쩍 혈압도 떨어지셔서 일어나시기도 힘든데, 괜찮으시겠어요? 저혈압이란게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선생님. 제 이웃의 사촌이요 … 그래가지고 응급실에 실려갔단 말입니다. 선생님? 듣고계세요?”

“예예. 그럼요. 서팀장님 이웃의 사촌분은 잘 살아게신데다가 이 산골에 땅을 산 저는 집까지 다 지어졌고. 짐까지 다 풀어놓은지 한달째인데 어떻하나요. 그리고 싶은게 있어서 이런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팀장님. 1년뒤에 전시회가 열리면 모두가 놀랄만한 그림을 가지고 갈께요. 걱정 마세요.”

“아휴 물론 이선생님은 실력이 증명 되있으니 캔버스에 점하나 찍어도 모두가 박수를 치겠지만 저는 이런 산골에 여자인데다가 몸도 허약하신 선생님이 홀로 사셔도 괜찮을까 걱정이되서 그런거지요”

“걱정마시구 이제 출발하세요, 사십대 늙어가는 노처녀지만 아직 멀쩡합니다. 차 시동을 이리 오래 걸어 놓으면 기름 닳아요. 가져오신 보약도 잘 먹겠습니다.”

“아이쿠 산골이라서 벌써 밤이오네요. 거 다섯시밖에 안됬는데, 그럼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선생님 뭐 필요하신거 있으시면 회사로 전화 하셔야해요!”

“네네 어서 출발하세요”

부르릉

노란 경자동차 한 대가 좁은 도로를 빠져나감으로써 주위가 고요해지며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찌륵찌륵 자기들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서른아홉 크리스마스날 완공된 순천의 시골집은 마흔이 된 신정날 들어왔다. 나름 사십대로 접어든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 혹은 복잡한 일상을 편안히 만들어 보고자 하는 도피처이기도 했다.

여자나이 마흔이 되면, 갱년기가 온다. 오십견이라던가 주름처럼 당연히 오는 그런 절차가 된 갱년기는 ‘폐경’이란 단어와 함께 내게 찾아왔다.

요즘 세상에 젊은 여자들은 방탕한 세상을 즐기기 위해 일찌감치 수술로 생리를 멈추게 하는 사람들이 적잖아 있다지만 늙어서 온 폐경과는 전혀 의미가 달랐다. 물론 나는 서른셋 이후 남자친구가 없었고, 서른다섯 고등학교 친구의 결혼식날 뒤풀이에서 만난 마흔살 남자와의 잠자리 이후 섹스를 한적도 없었다.

누군가의 엄마라던가 아내라는 자리를 원한적따위 없던 내게도 나름 여자라는 자부심을 주었던 현상이였을까. 막상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는 현실감과 무게가 나에게 덮쳐 더 우울해져만 갔다.

우울했던 그림이 더 우울한 색체를 띄었고. 내 그림을 사랑해준 팬들은 열렬히 환호하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울한 그림의 실체가 폐경이자 생리라는걸 알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 저는 화가 진이 그린 ‘우산쓴 남자’가 좋아요”

“ 네 그건 폐경한 직후 그린 그림이죠.”

그럼 모두가 아주 우스워하겠지.

잔디밭에 스프링클러를 돌리고 마당에 설치한 가로등아래 놓인 그네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잃은듯한 상실감이 아직도 가슴깊숙히 자리잡고있었다.

‘윙윙’

원모양을 그리며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를 보고 나무로 지어진 집을 보고 마당에 심어놓은 동백나무와 포도나무를 찬차히 훑다가 감나무에 삐져나온 다리를 보았다.

‘다리?’

헐거이 신겨진 검정 쪼리와 복숭아뼈에 난 긁힌상처 그위로 기다란 종아리에 곱슬거리며 나있는 굵은 털들. 그에 대비된 하얀 속살까지. 놀라 굳어 있던 몸이 상대방이 아무 움직임이 없자 몸을 일으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까만눈과 검정색 파마머리가 가장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깜짝 놀라였다. 일자로 쭉뻗어 내려앉은 코와 쳐진 큰 입술에 다부진 턱이 너무나 닮아.

이 세상에 존재 하지않는 나의 우울함과 ‘우산쓴 남자’와

“유진?”

‘찌륵찌륵’

‘윙-윙-’

내 대답을 대신해준듯 울려대는 풀벌레와 스프링클러의 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고요한 집이 더욱더 고요해졌다. 우울한 얼굴의 사내 입꼬리가 어느새 올라가있었다. 우울했던 내가 조금 당황해있었다.

“나는 당신이 그린 그림이야. 너에게 이름을 받으러 왔어.”

*

그런 이야기가 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 인지 몰라도 중국의 무명화가가 집안 벽지 가득 기다란 용을 한 마리 그렸는데 눈을 그리지 않고 죽었는다, 그 화가를 사랑했던 기생이 화가의 집에 찾아와 눈이 없는 용을 보고 불쌍하다 생각해 눈을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자 용이 꿈틀거리며 그림밖으로 튀어나와 기생을 목에 태운채 하늘을 높게 올라갔다는 이야기이다.

늙은 화가들 사이에서 전래동화처럼 내려온 이야기인데, 대개 서예를 전공하는 늙은 남자화가들이 하는 진부한 이야기로 마음에 들지 않아하였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내 그림 속 남자와 얼굴이 닮았다고 찾아와 이름을 받으러 왔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안믿어도 괜찮아. 나는 그냥 이름을 받으러 왔는걸?”

“난 작명해주는 점쟁이가 아니야 꼬마야 빨랑 집으로 돌아가렴”

“아니 진짜래도?”

“경찰 부를까?”

“불러도 상관은 없는데 그냥 아무 이름이나 지어줘! 그럼 갈게!”

“살다살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시골이라도 경찰은 올텐데, 진짜 전화해야하나 싶어 수화기를 들자 사내는 아예 소파위로 뻗어버렸다.

폭넓은 회색반바지와 커다란 하얀티가 말려올라가 사내의 파인 배꼽이 드러났다. 아주 깨끗한 살색. 우연인지 몰라도 사내의 위에는 ‘우산쓴 남자’가 걸려져 있다.

커다란 몸. 복숭아 뼈에 칠한 붉은 상처와 곱슬곱슬한 털. 회색반바지에 하얀 박스티를 입고 우산을 든 검정머리의 남자가 마치 나를 뜨겁게 바라보고있는듯한 착각이 났다.

“그럼 내가 당신의 비밀을 말할까?”

“뭐?”

“내가 태어난건 당신의 폐경때문이야”

“너가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폐경소식을 처음본 사내아이가 말하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파위로 뻗어 고개를 살짝 비켜 나의 반응을 쳐다본 사내는 아주 우스운 개그프로그램이라도 봤다는듯 오른손목으로 눈을 카리며 킥킥 웃어대었다.

“당신이 했던 생각들도 나는 알아. 나를 그리면서 첫눈을 본날도, 첫눈을 본날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는것도 알지. 그 영화 결말 아직도 모르지? 하긴 보다가 잤는데 어떻게 알겠어”

오른손목을 살짝 치우며 눈웃음치는 사내아이의 얼굴에 쿠션을 던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일어나자 두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오른손으로 왼쪽팔을 붙잡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무서워서? 수치스러워서?

“너! 사이코야 뭐야!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당신이 그린 그림이래도.”

“대체 무슨 얼토당토 않는!”

‘우르릉 쾅! 쾅쾅!!’

“히익!”

“괜찮아?!”

정말 싫다. 다가오는 봄 탓인지 몰라도 요새들어 자주내리는 겨울비는 천둥이 항상 동반했다. 벌써 이곧에 오자마자 3번째 천둥이다. 나이먹고 아직도 천둥이 무섭냐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땅바닥에 가까이 구부린 몸은 펴질 생각조차 없었다.

다가온 사내의 발과 복숭아뼈의 상처가 보였지만, 수치스러움보다 무서움이 앞서 두선으로 사내의 발을 잡았다.

차마 다 잡혀지지 않은 두꺼운 발목의 뼈가 사라질꺼같지 않아 안심이 되면서도 차가워 정신이 확 깼다.

“유진 쉬이. 놀라지마.”

‘쾅!!’

“헉!”

“괜찮아 유진. 쉬이 쉬이.”

사내가 없었다면 침대안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고 깊이 잠에 들었을것이다. 잠에 들기까지 천둥소리를 두려워하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손이 못나게 튀어나온 척추뼈를 하나하나 쓰다듬었고 사내가 일어섬과 동시에 바닥으로 내팽겨쳐진 쿠션이 어느새 내 눈을 가리고있었다. 사내는 어릴적 기억의 아버지와 똑같이 나를 대하고있었다.

커다란 손이 쓰다듬는 느낌이 너무나 비슷하여 괜시리 더 눈물이 났다.

겨울비는 그 뒤로 세시간동안 천둥과 함께 나를 겁주었고 사내는 세시간동안 나의 뼈를 쓸며 내 이름을 불렀다.

*

“유진 일어나”

머리카락이 무언가로 인해 넘겨지면서 기분좋은 온기가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유진”

“그림?”

“일어났네.”

양쪽으로 쭉 찢어진 커다란 검정눈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살가죽만 있는거같은 마른 볼에는 물기가 뭍어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내가 그린 그림과 똑같이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은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뭐지, 진짜 꿈인가.”

“아닌데? 어제 울다가 잠잤어 기억안나?”

“아니, 나 물”

“응, 여기”

쪼르르륵

길다란 유리컵에 유리병이 물을 붓자 금세 내 입앞으로 물컵을 가까이 가져다 주었다.

“마셔”

“고마워”

물이 식도를 넘어가자 매마른 장기들을 하나하나 거쳐가며 장기로 미끌어지는게 느껴졌다. 유리로된 물잔안을 바라보며 마시다가 다 마신 물컵을 매만진 나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컵을 빙글빙글 매만졌다. 어제 화내다가 울었던거 같은데. 그 뒤로 나를 달랜 사내에게 일어나자마자 화를 내기도 그렇고 어떻게 할줄 모르다가 고개를 들자 남자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진짜 당신이 그린 그림이야.”

“진짜?”

“그럼, 당신이 나를 그리면서 했던 생각, 그후 나날들을 모두다 알고있지”

“킥킥 내가 옷갈아 입는것도?”

짓궂은 질문을 던지며 웃으며 유리잔을 빼앗아 탁자에 올린뒤 침대위로 사내가 올라왔다. 커다란 두 팔안에 나를 가두고 얼굴을 바짝 붙여 가까이 다가와 귀옆에 속삭였다.

“그럼, 오른쪽 가슴아래 난 점까지 다 알고있지”

“뭐?하하! 이거 웃어야되 말아야되?”

가둔 팔을 풀고 침대 옆으로 굴러 눟은 사내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계속 흐름에도 이번에는 어색하지 않았다. 마주친 두 눈동자에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좋아, 너 이름을 지어주면 되는거지?”

“응.”

“그럼 너는 어디로 가는거야?”

“저 그림 안을 다시 들어가는거야”

“정말 얼토당토 않는군. 나이 마흔됬더니 마법이 사라지고 마법이 일어나다니”

“내 존재가 마법이라니. 서럽군!”

“뭐래니. 그나저나 그럼 어떤 이름을 지어주지? 나는 작명이란거 동물한테도 해본적 없단말이야.”

“그림에 사람이름이라던가 비슷한걸 지어본다고 생각해”

“그런적 없어, 그린 다음 그냥 그대로 모습을 글로 표현한거 뿐인걸. 나참, 나이 마흔에 애 이름도 아니라 그림 이름을 지어야되!”

“처음부터 멀쩡한 이름이였다면 내가 이곳으로 나올 이유도 없었을껄?”

“다른애들은 왜 안나온대니?”

“그야 당신이 그린 인물은 나밖에 없잖아?”

‘선생님의 작품은 뭐랄까, 그래요 도시속의 차가운 여자가 그리는 차가운 도시 아닙니까? 여기는 뭐 도로가 있는것도 아니고 이웃집이 있는것도 아니고,’

서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집을 둘러보자 벽에 걸린 그림들은 모두다 위에서 바라보는 도로 위 자동차, 빌딩과 그 사이의 옥탑방. 외로운 전봇대와 서울의 새벽같은 우울한 푸른색 그림밖에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대학시절 크로키를 했을때 빼고 제대로 그린 인물화는 저 그림밖에 없구나.

“눈을 그리지 말걸”

“세상에, 사람들이 내 눈을 보고 얼마나 당신을 칭찬했는데!”

“너, 우울한 얼굴치고 성격이 반대구나?”

“킥킥”

하얀 시트에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던 사내가 입술 끝을 올리더니 짓궂게 웃음지었다.

웃자마자 우울했던 얼굴이 사라지고 쾌활한 십대 고등학생과 같아 마치 나마저 고등학생의 철부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사내의 등 뒤로 빼꼼히 열린 유리창문을 타고 들어온 겨울바람이 머리칼을 파고들어온다. 서로의 따스한 온기사이를 지나가고 사내의 하얗고 뽀오얀 피부를 지나 나의 늙고 쳐진 피부를 스쳐 방안을 빙 돌아 다시 나간다.

“내 이름은?”

“글세”

“심술부리는거야?”

“은수어때”

“은수?”

“계명하려던 이름인데, 너 줄게”

“여자이름 같아”

“여자이름인걸?”

뾰루퉁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이 천천히 감겨지면서 한숨을 내쉰다. 이게 정말 그림일까 싶기도 하면서 뭔가 애뜻하게 마음이 간다.

작품에 대한 사랑? 폐경 때문에 그린 그림에게 위로를 받고 그 그림을 사랑한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소재로 쓰일 말인가!

“이제 가는거야?”

“그래야지? 난 여기에 이름을 받으러 온거거든.”

“그럼 어디로가? 내가 그린 저 도시속으로?”

“아니? 나는 저런곳은 싫어. 생각해야할게 너무 많은건 내 취향아니야”

“허? 그럼?”

“너가 나를 태어나게 한 곳으로”

“뭐, 폐경된 자궁?”

“킥킥킥 뭐야 그게,”

눈을 감고 답하던 은수가 눈을 휘며 웃었다. 쳐진 입술이 올라가면서 웃음소리가 목울대를 지나 뱉어져 방정맞으나, 꾀 듣기 좋은소리같다.

“너가 태어난거라면, 폐경때문인데?”

“난 당신 아이가 아닌걸? 자궁으로 태어난게 아니야.당신이 그림을 그릴때 반짝반짝 거린다는거 알고있어? 나는 그 반짝이는 별에서 태어났을껄?”

“도통 모르겠네, 이제 됬어 별로 알고싶지 않아. 갈꺼라면 내가 자고난 뒤에가, 잠자고 일어나면 너가 없을거라 생각할게.”

“또 자는거야?”

손을들어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은 은수는 등뒤를 토닥이며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늙으면 잠이 줄지. 늘지는 않는데, 왜 그런 말을 뱉은걸까. 그림이 가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아서? 아니면 누군가 떠난다는 두려움때문일까?

잠드는 동안 토닥이는 등 뒤의 손이 안심이 되어 나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

천둥을 무서워하게된 이유는 내가 우울한 그림을 그리게 된것과 같은 이유이다.

천둥치는날, 시골 논길에서 낫으로 10번이나 찔린 어머니를 발견한 일곱 살 짜리 아이의 후유증. 그 뒤 망가진 한 가정의 모습.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죽인 놈을 죽이고 오겠다고 낫을 들고 깽판을 치시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무서우면서 어머니가 생각나 덜덜 떠는 나.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조금 나아진다 싶던 내 증세는 아버지가 낫을 들고 내 허벅지를 찌름으로써 더 심각해졌다.

술이 깬 아버지는 자책하셨고, 그 뒤로 술을 드시지 않았지만 마음의 병때문인지, 마지막 까지 술때문인지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뒤 허벅지에서 무릎까지 길게 난 벼락모양 상처가 문신보다 더 흉측하게 자리잡아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비가오면 두가지의 아버지가 있었다.

어릴적 낫을 들고 소리를 치던 아버지와, 어른이 되어 천둥에 덜덜 떠는 나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등을 쓰다듬던 아버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된 이유는 은수가 쓰다듬던 척추뼈때문일까.

*

눈을 떴을때 은수는 없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우산쓴 남자’ 그림만이 살짝 삐뚫어진채로 걸려져 있었다.

*

그 해 나는 마흔장의 그림을 그렸다. 무리하게 나이에 맞추어 그린탓인지 손목에 염증이 생겨 한동안 고생했지만, 전시회 결과가 성공적이여서 꾀 만족하였다.

마흔장의 산골 그림중에 단 한 장의 그림이 인물화였는데, ‘은수와 감나무’ 라는 제목으로 은수가 감나무 위에 올라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폐경의 우울함 때문에 또다시 은수를 그린것은 아니였다. 단지 너가 싫어하는 도시 속이나 나의 매마른 자궁보다 더 나은곳을 그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감나무와 아직 이파리 없이 매마른 겨울나무 위 은수의 젊고 우울한 모습.

마흔의 전시회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마흔하나가 되었지만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산골 집으로 돌아갔고, 너가 몹시 보고싶었다 은수야.

*

“작가님은 첫사랑이 있으신가요?”

“있지요. 아주 멋지게 생긴 사람이에요.”

“누구신가요? 언제 만나셨죠?”

“추잡스럽게 들릴수 있지만 저는 마흔에 제 첫사랑을 만났어요.”

“마흔이요?!”

“예. 여자나이 마흔에 첫사랑이라니 흉측하나요?”

*

마흔 일곱이 되었을때 세상은 또 한번 변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변화라 하더라도 그 작은 변화는 모든 것을 바꾸었기에, 나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으려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무엇을 하냐 하였지만, 나는 더 이상 내가 그릴것이 없다 생각하였다.

마당앞에 더 굵고 커진 감나무도 겨울. 쌓인 눈 아래로 떨어진 동백꽃도 더 이상 그리고 싶지않을때 까지 그렸다.

거울안 내 모습은 어색하였다. 코밑으로 퍼진 작은 팔자주름과 눈주름, 손등과 몸에 자리잡고 있는 검버섯과 쳐진 살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들이였다.

몸에 색을 칠하였다. 두 다리를 짙은 파랑색으로 허리를 옅은 녹색으로 가슴을 하늘색으로 칠하고 두 팔을 검정색으로 칠한뒤, 얼굴을 하얀색으로 칠하였다. 커다란 붓이 몸을 스쳐지나가고 바닥에 깔아둔 신문지와 물을 받아놓은 투명한 유리컵에 물감을 튀었다. 아무 표정 없이 혹은 우울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등 뒤는 어떤색으로 색칠할꺼야?”

붓이 떨어지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추잡한 몸뚱이가 들석이며 깜짝 놀라였고 거울에 비치는 은수는 깜짝놀란 나를 모르는 건지 오직 내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정머리에 검은눈. 하얗고 뽀오얀 피부와 복숭아뼈의 상처가 사랑스러운 아이다. 천둥이 치지 않았지만 은수가 내 눈앞에서 나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은수야.”

“왜? 유진”

그림을 그리며 너를 많이 생각하였다. 만약 다시 너를 만난 다면 어떤말을 할까?

정말 너가 저 그림속에서 나왔다면 다시 한번 나와주지 않을까?

욕심을 부리는 노인이란 생각도 들었다. 젊은 너를 사랑한다니 추잡스럽다는 생각과 내 자신이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거 같아. 너가 몹시 보고싶었다.

“등 뒤는 안칠할꺼야. 씻으러 갈래.”

너와 두 번째로 만난날.

물감을 잔득 칠한 몸으로 바닥에 파랑색 발자국을 찍으며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아래에서 나는 따뜻한 물을 맡았고, 너는 어느 순간 내 앞으로 다가와 나에게 키스했다. 얼굴에서 빨간물이 뚝뚝. 몸에서 초록색 파랑색 물감이 뚝뚝 너의 하얀티를 적셨고, 너의 복숭아 뼈를 물들였다, 너를 덫칠하였다, 수없이 계속. 따뜻한 물에 물감을 풀고 늙은 나의 주름과 검버섯이 들어나고 나의 뻣뻣한 검은머리가 너의 볼에 엉켜붙었지만 너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마주보았다.

빨간 물감보다 더 빨간 혀가 엉키고 하얀 물감보다 하얀 너의 손이 나의 가슴을 왼쪽 가슴의 젖꼭지를 그 아래 점을 깊게 패인 배꼽과 곱슬곱슬한 털을 매만졌다. 나는 너의 등을 안았고, 우린 투명한 색을 가득 입은채로 하얀 침대로 향했다.

서른다섯 마지막 경험과 달리 나는 마치 처녀처럼 수줍게 너를 반기었다. 키스하나에 움찔거렸고, 너의 손가락과 나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는것마저 외설적인거 같아 몸을 휘었다.

별다리를 건넜다. 보름달 앞까지 다녀왔다.

차가운 새벽이 느릿느릿 찾아왔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내 몸은 예쁘지않아.”

“괜찮아, 내 눈에는 유진보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는 없어. 나는 유진인걸, 유진에게서 태어났어, 유진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당연히 유진을 사랑해.”

예쁘지 않게 마른 몸을 은수가 쓰다듬었다.

그날처럼 척추뼈를 쓸고, 옆구리와 팔뚝. 머리카락 한올한올 조심스레 은수의 손가락이 나를 각인하고있었다.

하얀 이불안에서 나는 엄지발가락으로 은수의 복숭아뼈 상처를 쓰다듬었고, 우리는 서로 고양이마냥 갸르릉 거린채 잠이 들었다.

*

비가 몹시 내리는 날이였다. 천둥이 칠까 나는 은수의 품안에 들어가 떨어지는 감나무 잎사귀들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에 물방울 수천개가 맺혔다 떨어졌다를 반복하였고, 은수는 내 정수리에 턱을 괸채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유진”

“응?”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감이 외롭겠다.”

“무슨말이야 킥킥 어린애 같아.”

“그냥 뭔가 감이 외로울꺼같에.”

“감은 외롭지 않을껄”

“왜?”

“다음해에 그 자리에 또 잎이 필꺼거든”

“그래?”

“응, 아마? 이름 또 불러봐”

“이름? 유진? 이렇게?”

“응, 난 내 이름이 안예쁘다 생각했는데, 아닌가봐 듣기좋아.”

나를 안은 은수의 팔에 턱을 괸채로 은수의 머리위에 있는 이불을 더 가까이 끌어내렸다.

정수리위에서 울려퍼지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유진”

“응”

“유진”

“응”

“유진”

“응”

그날은 천둥이 치지 않았다. 은수는 내 이름을 계속 말했고, 나는 계속 답하였다.

하얀 시트안이 우리둘 체온으로 가득 덮히고 내가 잠이 들때까지.

창문 밖 빗소리가 다닥다닥 들리고, 어딘가에 있을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서로 맞부딪힌다.

“잎이 피지 않으면, 감은 혼자 홍시가 되어 터져버릴꺼야.”

“뭐라구?..”

“아니야, 자자 유진 쉬이.. 쉬이..”

*

“첫사랑과 다시 만난적이 있나요 선생님?”

“그럼요, 다시 만났죠. 우리는 뜨겁게 사랑했어요.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서로를 핥고 붙잡고 쓰다듬었죠.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 내가 많이 아파요. 몸도 늙었고, 눈도 잘 보이 않을뿐더러 귀도 먹어버렸죠.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도 나는 더 이상 들을수 없었죠. 듣지 못하니 답할수도 없었어요.“

“늙는다는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물론, 어느 누구나 늙고 죽어 흙으로 돌아가죠.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젊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생각해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젊은데 나는 늙어 병들어 죽는다는걸.”

“이런, 얼마나 젊은 분이셨길래”

“호호 아주 젊은 사내였답니다.”

*

예순이 되었을때 나는 병이 들었다. 나을수도 없었고 치료를 하기에도 몸이 너무 늙어 치료를 들어가자마자 바로 침대 신세가 될게 뻔하기에 치료를 거부하였다.

그 해 나는 마지막 전시회 라는 이름으로 ‘은수’ 를 세상에 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은수를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잠자는 은수, 잔디밭에 누운 은수, 감따는 은수, 눈사람을 만드는 은수 수많은 은수가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졌고 전시회가 끝난후 마지막 송별회 저녁 은수 나는 둘이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진”

“...”

“유진”

“...”

“유진!”

“응?”

“사랑해!”

“그래, 나도 사랑해.”

신은 어째서 사람에게 탄생을 주셔서 죽음을 겪게 하신걸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늙고 병드는 나와 달리 늙지 않는 너를 보며 너가 정말 그림이란걸 실감하기도 하였다.

그날 우린 집으로 가는 침묵 속에서 많은걸 이야기 하였다.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고 세수를 하고 침대속에 들어가 나의 머리를 찬찬히 쓰는 너를 느끼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 침대위에서 나는 마흔살의 나였고, 너는 ‘우산쓴 남자’였다.

잠이들때 나는 마흔살의 유진 이였고 너는 은수였다.

“유진”

“응”

“유진”

“응”

“잘자”

“응”

“유진”

“잘있어”

나는 너와 함께 했을때 더 어려지고 싶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너처럼 젊어지고 싶었다. 삐그덕 거리는 뼈와 쪼그라드는 가슴을 손으로 훑으며 조금만더 느리게 늙어지길 바란적이 많았다.

파란 잔디를 맨발로 밟은채 뛰어 놀기를 바랬고, 젊은 너의 손을 잡은채로 아이들이 부르는 가요를 따라 부르며 하루 온 종일 시내를 누비기를 원했다.

다른이들에게 그림이 아닌 너를 보여주며 은수라고 소개시켜주고 싶었고, 그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일수 있는 그런 ‘여자’가 되기를 바랬다.

난 병들었고, 너는 나를 걱정하였다. 잠이드는 나를 보며 너는 홀로 울었다.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지만, 너는 내가 들을 때까지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날 후로 너는 사라졌지만 너의 그림들은 집안에 가득 차 어디서든지 너를 볼수 있었다.

이 집 어디에도 너의 눈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 까만 눈이 까만 머리가 하얀 손이 쳐진 입술이 다친 복숭아뼈가.

오늘도 하얀 침대 위에 깡마른 팔뚝을 하고 감나무를 보고 있었단다 은수야.

아마 나는 곧 죽을때가 되었는지 속이 더 아프고 눈도 흐물흐물 하여 너의 그림이 잘 보이지도 않아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세길 뿐이야.

감나무에 있는 감을 딸 힘도 없어 모두가 홍시가 되어 바닥에 추락해 터져버렸지만 배고픈 까치와 까마귀들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더구나. 감나무 아래가 항상 새 한 마리씩은 있어 외롭지 않아 보이거든. 또 감나무 위에 누군가가 더 있었던거 같기도 하더라. 그게 까마귀 무리인지 몰라도 말이지. 그게 나는 너라 생각해서 마른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는데, 너는 아니.

나이가 들어 잠이 없어진줄 알았는데, 나이들고 병들면 잠이 많아지나 보다.

내일 아침 내가 일어나려진 몰라도 잘자렴 은수야.

‘잎이 피지 않으면, 감은 혼자 홍시가 되어 터져버릴꺼야.’

‘잎은 꼭 필꺼야. 다음해라도, 그 다음해라도.’

“잘자 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