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라인 (Timeline)
말 그대로 안절부절이다. ‘그래.’라는 대답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스로 자책했지만 결국 와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이 서점을 약속장소로 정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 나를 ‘그저 퇴근길에 잠시 서점에 들른 평범한
직장인’ 정도로 생각하고 스쳐갈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보호막이랄까 뭐 그런 것.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30여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화장실로 가 괜한 손을 씻고 고개를 막 들었을 때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머리칼과 동그란 얼굴형, 블라우스 아래
무릎 위로 올라오는 스커트와 작은 키 때문에 신은 높은 구두까지. 어딘지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한 이십 대 후반의 여자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곤 밖으로 나왔다. 서점 안은 늘 그렇듯 약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책에서 나는 인쇄냄새가 너무 좋았다. 마치 특유의 향수인 것처럼.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대신 집에 동화책들을 깔아놓고 읽어달라
졸랐고 조금 크면서부터는 주말마다 서점에 붙어 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글짓기상을 수두룩하게 받고 대학도 글을 전공했다. 늘 익숙했고 잘했던 일. 평생을 그렇게 글을 쓰면서 살거라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잊어버려야지. 그래야지.
유아서적코너가 눈에 띈다. 크고 네모 반듯한 정사각형의 그림책들. 선명한 색채들과 커다란 한글이 띄엄띄엄 적힌 동화책들은
순결한 느낌이다. 시간은 아직도 10분전. 공항에서 빌려온 구형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따라 시간이 참 안 간다는 생각을 했다.
발길 닿는 대로 따라온 곳에는 신작소설들이 한 가득 꽂혀있다. 이 달의 신작, 올해의 작가, 베스트셀러. 손 끝으로 책들을 쓸다가
순식간에 또 울컥해진다. 이렇다 보니 서점은 늘 갈증의 장소이자 애증의 장소다.
“... 누나.”
순간의 공백을 깨고 날아든 목소리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흔하디 흔한 저 호칭 하나를 저리도 애절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단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는 선뜻 돌아가지 않았다. 반가운데 낯설고 긴장이 되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세은이 누나 맞지? 역시, 누나일줄 알았어.”
말을 끝냄과 동시에 불쑥 건네온 것은 꽃다발이었다. 너무나도 풍성한, 장미꽃들이 하얀 안개꽃에 쌓여 붉게 빛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미는 모두 스물 아홉 송이였다.
주변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 중 몇몇은 일행과 속닥거리기도 했다. 더 이상 ‘퇴근길에 잠시 서점에 들른 평범한 직장인’ 역할극은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든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은데 마른 체형이라 전체적으로
길고 호리호리한 느낌이 드는. 딴에는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신경을 쓴 듯한 옷차림이며 헤어스타일이, 아직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애 띤 얼굴과 참으로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얼떨결에 받아 든 꽃다발을 그대로 안은 채 몇 걸음 걷자 손가락에 실이라도 매여
있는 것처럼 그가 따라와 발을 맞췄다.
날도 어두운데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고 있었다. 늘 그렇듯 우산 따위를 준비하지 못한 나는 급히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뛰어나갈
채비를 했으나 꽃다발 때처럼 또 불쑥 내밀어진 우산에 막혀 그런대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우리는
갈 데가 없었다. 저녁을 먹기엔 너무 늦었고 허기도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했다.
“우리, 뭐하지?”
“노래방.”
아무래도 미리 생각을 해 온 모양이었다. 첫 만남에 노래방이라니 살짝 난감해졌지만 내 입장에서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아르바이트생이 졸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비비며 겨우 깨서는
멍한 얼굴로 돈을 받고 방을 안내해주었다. 회사에서 단체 회식 할 때나 쓸 법한 넓은 방. 열 댓 명은 족히 들어가게 생긴 이 넓은
방에서 이번엔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대충 한쪽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자 그가 내 팔을 끌어당겨 화면 바로 건너편 소파
정 중앙에 앉히곤 옆에 붙어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똑같아 사진이랑. 그 노란색 있잖아.”
-
그를 처음 만난 건 우습게도 SNS에서였다. 그것도 내 어설픈 지적 질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곳에 적응을 못해 과거에 목메던 시간.
잠 못 들던 밤을 달래준 건 SNS였다. 오랜 해외생활로 이제는 몇 안 남은 지인들과 또는 새로운 사람들과 간간히 맨션을 주고 받던
그 때 새로운 계정 하나가 나를 팔로우 해왔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어느 날 타임라인에 그의 글이 하나 올라왔다.
프로필에 본인을 작가지망생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으니 그가 올린 이 140자의 단문도 습작의 일부인 듯 했다. 그 짧은 문장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지만 분명 노련한 표현을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미처 문장 정리가 되지 않아 의미가 뒤섞여
버린 글이었다. 나 역시 대단한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니 감히 누군가의 글을 평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왠지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를 작가지망생이라고 당당히 소개하는 그가 조금은 부럽기도 아니 조금은 얄밉기도 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왠 오지랖이었나 싶긴 한데 그 땐 그랬다.
괜한 심통으로 뒤덮인 나는 늦은 밤, 그의 문장을 대폭 수정하여 보내 버렸다.
그게 우리의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때 프로필은 옅은 개나리 색 상의를 입은 내 사진이었다.
-
“그 사진 아직도 나한테 있어. 저장해뒀는데.”
“… 그걸 뭐 하러 저장을 해.”
예쁘잖아. 웃는 게.
그 말은 부러 못 들은 척 했다. 노래나 해, 시간 가잖아. 그를 툭툭 치자 겨우 일어나서는 마이크를 가지고 옆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연상연하 커플노래. 그는 그다지 노래에 소질이 있는 편은 못 되었다. 목에 핏대가 설만큼 열심히
부르는데 음정도 박자도 자주 엇갈렸다. 그는 자주 내게 누나도 노래 불러, 라며 마이크를 넘겼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어내었다.
연인도 아닌 주제에 이런 ‘척’이라니. 어린 나이의 치기일까 생각하니 슬쩍 우습기도 했다.
옆방의 어떤 남자는 아무래도 실연을 당한 모양이었다. 무슨 노래인지 아주 악을 쓰며 불러대는 통에 이젠 정말 심하단 생각이 들
즈음 우리 방에 남았던 시간도 동이 났다. 여태 혼자 신나게 노래를 부른 그는 목소리가 갈라졌고 여태 조용히 감상만 한 나는 목이
잠긴 채로 함께 방을 나섰다. 꽃다발을 부러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감추기위해 문 밖에서 가방을 챙기는 척 하고 있는데 그가 어느새
그것을 들고 뛰어나와 다시 내 손에 들려 주었다. 덕분에 서둘러 카운터를 지나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다.
“어머. 아가씨 좋겠어. 남자친구한테 꽃다발도 받고.”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아르바이트생 대신 왠 넉살 좋은 아주머니께서 반달 눈을 하고 웃고 계셨다. 아니 아주머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연락은 해왔지만 그렇다고 애인 사이는 아니고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라서요. 이건 얘가 그냥. 뭐 반가움의 표시로 사 온
거지 아주머니가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 싶었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인 달까
아니면 뿌듯해 보인 달까 그런 바람에 결국 아 네…. 하고 멋쩍게 돌아서고 말았다.
“아, 기분 좋다.”
밖으로 나와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이 진심으로 좋아 보였다. 조금은 홀가분하고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어두워진 밤길을 그저 얼마간 내 옆에서 걷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갈 곳이 없어졌다.
-
그의 답장은 굉장히 의외였다. 일면식도 없던 왠 여자가 뜬금없이 보낸 글에. 그것도 본인이 애써 만들었을 문장을 아주 제멋대로
고쳐 보낸 오지랖에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그럴 만도 한데 그의 답장엔 황당하게도 ‘감사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단 한마디의 원망조차 없는 선한 인사말. 너무도 미안하게 만들었던 그 한마디로 그는 내 머릿속에 새겨지듯 남았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자주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이뤄진 평범한 일상에의 공유였다.
* 카페에서 라떼 마시는 중. 아,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라던지.
* 오늘 날씨가 너무 덥다. 여기는 오늘 쌀쌀해, 바람도 많이 불고. 라던지.
물리적인 거리로 치자면 비행기로 다섯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이고 시간으로 따지자면 몇 시간의 시차도 존재했으며 더욱이
계절의 변화까지도 달랐다.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주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야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우리의 다른 점은 따로 있었다,
가로막힌 현실에 착하게도 수긍해버린 여자 어른과 꿈속에 아직 살고 있던 낭만소년.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이.
그 사이에서의 괴리감이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빨리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 와 같은 소원 따위는 빌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나는 소위 말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고 안개 속에 갇혀버린 꿈을 쫓을 용기가 없어 당장 눈 앞에 펼쳐진 현재를 살아내는데 충실한,
평범한 어른으로 살아내던 참이었다. 그런 내 눈에, 그가 철없고 답답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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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갈 곳이 없던 우리는 어느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놀이터로 발길을 돌렸다. 밤의 놀이터. 놀이터 안팎을 비추는 가로등에서는
연신 노란 불빛이 옅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글짐 하나와 미끄럼틀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시소와 또 두 개의 그네. 모래 장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 구두 굽이 안으로 푹푹 빠졌고 틈새 안으로 모래들이 들어와 맨 발바닥에 따갑게 밟혔다. 그네에 하나씩 각기
걸터앉아 멍하니 앞뒤로 몸을 움직였다.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나, 우리도 뭐 같이 쓸래?”
“… 뭘?”
“왜 있잖아. 공동집필. 하나의 이야기를 남녀 각자의 입장에서 쓰는 그런 거.”
“난 안 쓴지 오래됐는데 뭐. 알면서 그래.”
“하지만, 난 누나가 쓰는 문장들 같은 게 진짜 좋던데.”
“… 나는. 됐어 야.”
몇 마디의 짧은 대화 이후 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였다. 물론 나라고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꿈을 쉽게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꿈을 이룰 기회가 없었고. 아니 기회를 만들기 위한 모험이나 그럴 용기보다는
당장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것들이 우선순위에 놓였을 뿐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쉽게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내 꿈 앞에서는
비겁한 겁쟁이였던 모양이다. 처음 그 때부터 지금까지 참 꾸준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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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상상함으로써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걸까.
SNS 프로필 사진으로만 서로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던 그 때. 우리는 어딘가에 우리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살아가는 실제의 세상은 그것과 정 반대였을지언정.
그는 재수생이었다. 한 반 한 책상에서 종일 마주보고 지냈던 친구들이 대학 진학이니 취업이니 각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
그를 둘러싼 그 해 겨울은 참 추웠다고 후에 그는 회상했다. 견디기 힘들만큼 혹독했다고. 그리고 그 겨울, 그는 한 여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것도 SNS에서. 별 생각 없이 올린 습작의 일부를 자기 식대로 고쳐 보낸 특이한 여자. 그런데 그 글의 분위기가 묘하게
와 닿았다고 했다. 이상하리만치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 그 노란색 상의를 받쳐 입은 여자의 이유 모를 미소도 함께.
그 다음날 그는 다시 워드를 열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동안 워드를 켜고 있어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멍하게
커서 깜박이는 것만 바라보곤 했었는데 왠지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은 들었다고도 했다. 별 것도 아닌 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얘기,
라고 내가 말했지만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하며 말했다. 진짜야, 라고. 겨울을 보내고 재수를 결정하면서 그는 더 바빠졌다.
수능 공부하랴 공모전 준비하랴. 그 와중에 그는 글을 쓰면서 자주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 누나, 내용이 여기서 남자 입장으로 바뀌면 이상할까?
* 누나, 이 여자가 알고 보니까 그 남자랑 연이 있던 사람인 거야. 어때? 괜찮아?
* 누나, 이렇게 공모전 내도 되려나? 나는 왜 자꾸 고치고 싶어지지.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더러 봐달라는 지. 몇 번을 거절했지만 그래도, 하지만, 역시 누나한테 대답을 들어야 맘이 편해,
라는 그의 끈질긴 질문세례에 결국 나는 그저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내 생각을 말해주는
정도로만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어색한 문장은 편안하게 읽히게 고쳐주고 스토리가 꼬이면 같이 고민하고. 내 식대로 간단히 몇몇 문장을 써서 보여주기도 했다.
무심한 척
했지만 나 역시 오랫동안 잊었던 글이었기에 어릴 때 썼던 일기를 다시 읽는 것처럼 조금, 설렜는지도 몰랐다.
아니 설렜다. 많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 실제하는 상대방에게, 또는 꿈에게 빠져들었다. 나도, 그리고 그도.
그렇게 내내 오랜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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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많이 부네, 오늘따라.”
“밤이라 그렇지 뭐, 지금 벌써 새벽 다 됐는걸.”
“아,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이?”
“응, 우리 늦게 만났잖아.”
우린 너무 늦게 만났다. 나는 여태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물리적인 거리도, 시차도 상관없는. 그런 공간에서 만나진 우린 지금도,
만났는데 왜인지 만난 것 같지 않다. 현실인데 현실 같지 않다. 어느 장소도 아닌 장소에 우리는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불고
날씨도 쌀쌀해서 더 이상은 이 휑한 놀이터에 있기가 어려워졌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 때 후드득- 다시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 비 또 오네.”
“… 가자.”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빗방울은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도 비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너무
늦었다. 어디로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는 궁금해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나를 따라와주었다.
새삼, 그가 참 순하단 생각을 했다.
큰 도로를 지나 비탈진 언덕길로 들어섰다. 편의점을 지나고 문 닫힌 분식점을 지나 한 5분쯤 걸었을까 주택가 골목 안쪽으로
5층 높이의 길다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일 때문에 서울 본사로 출장 차 들어온 터라 일주일째 숙소로 쓰고 있던 참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프런트에서 직원 하나가 어떤 외국인 손님을 응대하고 있어 그 틈에 그를 데리고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인실 예약인 터라 두 명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몰래 그를 데리고 들어와버린 것이다.
후-, 빗소리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왠지 뭐랄까. 철모르던 시절 엄마 지갑에 딱 한번 손을 댄 적이 있는데 딱 그 때 같았다.
죄책감과 함께 따라오는 두근거림. 좁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우리 두 사람은 실컷 축축해져 있었다.
복도 끝 513호.
한참을 뒤적여 카드 키를 찾았다. 문을 열자 작은 내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왼쪽으로는 작은 샤워실 겸 욕실이 하나 있고
안쪽으로 하얀 커버를 폭 씌운 낮은 싱글 침대 하나와 옆쪽으로 작은 티브이가 놓인 나무 재질의 책상이 있었다. 편의성을 앞세운
작은 원룸 스타일이라 역시. 혼자 있을 땐 몰랐는데 두 명이 되니 확실히 방이 조금 좁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춥겠다. 비 맞아서.”
“괜찮아 뭐.”
나 혼자 맞았나. 누나도 같이 맞았으면서.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유난히 그런 단어들을 좋아했다.
같이, 함께, 우리, 내 사람, 뭐 그런 단어들. 하나가 아닌 둘이어야 완성되는 단어들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뭔가 우리 안엔 그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 것일까.
문득 생각이 나서 '근데, 옷은 있어?' 하고 묻자 그는 매고 온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원래 지방에 사는 그가 나와의 약속을 위해
며칠간 친구 자취방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아예 옷가지들을 잔뜩 싸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어찌됐든 이 와중에 갈아입을 옷이라도 있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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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늘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곤 했다. 시간이 가고 서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밤을 기다렸다.
각자에게 닥친 ‘현실’을 숨차게 살아내고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겨우 숨통이 트여 서로에게 각자의 하루를 토해내었다.
마치 술 취한 다음날처럼. 늘 그랬다.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와도 아빠와도 닮지 않았다는 친척들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도,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나는 생각보다 의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계모나 계부의 이미지는 내 양부모라는
사람들에게선 찾을 수 없었으니까. 늦둥이 동생과의 차별은 어쩌면 그러려니도 했던 것 같다. 그럴 수 있다고.
친자식들 중에서도 더 예쁜 놈이 있는데 하물며.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신문기사나 인터넷에 떠돌만한 그런 나쁜 일 없이.
이렇게 키워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그렇게 조용히 살았다. 아무런 사고도 없이 그냥 어느 집 평범한 어린애인것처럼.
그런데. 파양됐다. 동생에게 이어질 재산 상속에 내가 걸림돌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두 분이 자주 충돌을 한 듯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니 괜찮을 거라고. 네, 괜찮아요. 대답은 했는데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남겨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책 한 줄 읽기가 겁이 났고 더욱이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들과 함께였을 때 만들어진 꿈이라는 생각에, 내 모든 게 일그러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버림받는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혼자만 남겨진단 게 어떤 건지.
얼마간 시간을 흘려 보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중에 있던 돈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나왔다. 2주의 여행이 끝난 마지막 날,
공항까지 갔던 나는 그 날 리턴 티켓을 버렸다. 그 대신 언어를 배우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향수병에 시달려도, 그리움에 지쳐도,
심각한 우울증을 약으로 버티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내가 독해서도, 대단한 의지력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인간을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나는 그저 눈 앞에 만들어진 현실에만 지독하리만치 매달렸다.
더 이상 내게는 피터팬도, 꿈도, 마법가루도, 사랑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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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누나 잠들었어?”
“아… 언제 나왔어?”
“방금. 아 깨우지 말걸 그랬나. 미안.”
“괜찮아.”
누나, 또 그런다. 괜찮아 그 말 좀 그만 하라니까. 하나도 안 괜찮은 거 다 아는데.
코 끝으로 그의 알싸한 비누 냄새가 가득 풍겨와 겨우 눈을 떴다. ‘괜찮아’ 라는 말은 내게 입버릇처럼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그 날,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괜찮아요. 그거였으니까, 내가 뱉은 말이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괜찮아야 했다. 그 언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옅게 웃으며 한번 더 ‘진짜 괜찮아.’ 라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메마른 내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엔 물기가 어려있었다. 매우 조용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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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훈’ 부재중 전화 7통.
깜빡 잠이 든 사이 부재중 전화가 참 많이도 와 있었다. 약간의 시차를 계산하더라도 자정은 훌쩍 넘었을 시간이었는데.
마지막 전화는 불과 1분 전이었다. 전화를 할까 말까 머뭇대는 사이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낯익은 이름 하나가 액정에 떠올랐다.
“… 여보세요.”
내 목소리가 공기를 돌아 다시 내 귀에 들렸다. 분명히 통화 중인데 상대방 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불분명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사람의 예감이란 신기하리만치 자주 맞아 떨어진다. 슬픈 예감일수록 틀림없이. 불안감에 그를 부르자 숨소리는 점차 분명한
울음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역시나, 그였다.
친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으로 찾아왔더라고.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그녀는 벅찬 현실을 이겨낼 수 없어
도망쳤고 영영 소식이 끊겼다. 빚에 쫓기던 아버지는 밤낮 술만 마셨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그래서 그가 커가면서
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잘 쓰던 못 쓰던 글 안에서만큼은 내 세상이니까. 현재를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그렇게 살았는데 버릴 땐 언제고 왜 이제 나타나서 휘저어놓냐며 그는 악을 썼다, 안 그래도 집 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편하다던
그는 그 날 이후 대놓고 자주 허공을 헤매곤 했다.
우연찮게도 우리는 소중한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전적이 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넓은 세상속에 딱히 내가 있을 공간은 없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정작 진짜 내 사람은 없다. 그 날 새벽, 아주 오랜 시간을 그렇게 전화기를 붙잡고 우리는 같이 울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한 꺼풀 벗겨지는걸 의미하는 걸까. 이십 대는 마치 덜 아문 딱지와 같다.
상처 위로 덮인 딱지는 어쩌면 꼭 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주 조금이라도 긁히면 금방 찢어져 다시금 피가 배어 나온다.
그 해 겨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발악하듯 토해내던 그 울음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종종 내 귓전을 울리곤 한다.
마치, 내 울음소리인 것 마냥, 매우 처절하게.
-
“… 사라지지마. 제발 부탁이야.”
작은 목소리로 잠꼬대 하듯이 여러 번을. 반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은 내 어깨를 꼭 껴안고 매달린 채 그는 속닥거렸다.
그리고 그날 밤처럼 그는 흐느껴 울었다. 누나 옆에 있으니까 이제야 안심이 돼. 조금 살 것 같아. 라며 자꾸만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목을 껴안고 가슴에 기대고 내 심장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사내아이의 검은 머리칼이 내 맨 살에 닿아
까칠까칠했다. 내 맨 얼굴에 입술에 어깨에 가슴께에 옅은 숨이 날아들었다. 잠시도 그는 내 옆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갓난아이가 손을 휘저어 엄마를 찾듯 따스함을 갈구하는 그의 무의식을 나는 결코 밀어낼 수 없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지독히도 외로웠던 것이다.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현재함을 그는..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터진 눈물샘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금 이 감정도 조금은 무뎌질 거라고. 밤새도록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는 동안 창 밖으로는 거센 빗줄기가 휘몰아쳤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곱게 접어둔 옷가지들도, 커다랬던 가방도, 그가 썼던 칫솔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없어지고 없는데도 나는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느꼈다.
바람이라도 쐴까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가려다 아직 문 앞에 놓여있는 장미 꽃다발을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다 아직 채 시들지도
못한 그 꽃다발을 주워 휴지통에 깊이 쑤셔 박았다.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를 대신해 익숙하게 되돌아온 두통에 몸이 반응해
뜨겁게 열이 올랐다. 살이 아프다. 몸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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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해가 바뀌고 또 시간은 흐르고 그렇게 나는 온전히 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사계절이 없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으로.
아침이 되면 습관처럼 커피를 사 들고 회사에 나가 일을 했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잡다한 취미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아주 잠깐씩이라도 무언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밤 이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락이 끊어졌고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그렇듯 그도 잘 지내고 있으리라.
여태껏 그랬듯 위태롭게 하지만 태연하게.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슴 한 켠 과거라는 상자 안에 그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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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하지 않았던 SNS에 다시 로그인한 건 개인정보 유출 어쩌고 하던 뉴스기사 때문이었다. 생각난 김에 쓰지도 않는거 그냥
계정 폐쇄해 버릴까 하다가 오랜만에 예전 사람들과 주고 받았던 대화들을 돌려보니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들, 살고 있을까. 날 기억은 할까. 그 때 타임라인에 글 하나가 반짝였다.
“보고 싶었어.”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보고 싶었어. 타임라인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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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이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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