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FALL

by 차이 posted Jun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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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FALL

 

 

 

 

 

물 한 잔 주레?”

등 뒤의 미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쪼그라들었다는 인상을 주는 검은 피부의 노파였다. 가게 안이 그늘진 탓인지, 정말 그녀의 피부가 죽어버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뇨. 괜찮아요.”

한참을 서있었는데도 기척이 없어 버려진 구멍가게라고 생각했었다. 벌컥 문이 열릴 줄은 몰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던 노파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손이 미지근한 환타 캔 하나를 던져주고 얼른 되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주변은 곧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왠지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는 혼자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경우 그런 아이가 자신이었으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릴 일은 없었다.

수년간 괴롭힘의 타겟이 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두들겨 맞던 아이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고 결국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온 뒤로는 유일한 폭력의 대상이었다. 저항을 해보기도 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대개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었다. 나를 두들겨 팬다고 해도 잔뜩 화가 나서 쫓아올 어른이 내 주위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애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내가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네 아파트의 맨 꼭대기 까지 올라가는 일 뿐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잠이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가도, 티비를 보다가도, 덜컥 몸을 던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면 참지 않고 바로 집을 나서 아파트의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는 텅 빙 옥상의 끝으로 달려가 난간에 바짝 몸을 댔다. 이러다 잘못하면 떨어질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다 정말 위험한 순간에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중 가까스로 땅에 발이 닿고 나면 내 머릿속은 , 죽을 뻔 했네. 살았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위안이 과거의 일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주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바로 열흘 전의 일이다. 외삼촌으로부터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순간부터, 나는 옥상에 올라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보통은 아버지의 존재를 먼 친척과의 전화로 알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말은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께름칙한 노파가 사라지고 나니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틈을 타 오후 두 시 여름의 햇볕은 열심히 제 몸을 태우고 있었다. 겨우 그늘을 찾아 구멍가게의 슬레이트 아래에 바짝 붙어있었지만 반팔의 교복차림이었던 탓에 팔 부근이 따가웠다. 약속장소인 사거리까지는 잘 찾아온 것 같은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등 뒤의 구멍가게와 다 허물어져가는 흙집들뿐이었다. 버스를 타고 어느 정류장을 지난 순간 과거로 와버린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 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20대의 이른 나이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채 1년이 되지 않아 아버지를 떠났다. 나를 삼촌에게 맡긴 뒤 사라진 아내를 찾아 떠난 아버지도 곧 소식이 끊겨버렸다.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듣지 못 했다. 이 두 줄 남짓의 문장이 내 과거의 전부였다.

, 아버지와 네가 참 닮았다는 삼촌의 말도 함께였다.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변변찮은 친구도, 뒷골목에서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달려와 줄 가족도 없는 몸이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열여섯이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또 어찌 되었든 나는 혼자이므로, 실수로 옥상에서 떨어져버린다거나 어디선가 실종되거나 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뒤를 수습해 줄 사람도 필요했다. 나는 질문하는 대신 묵묵히 삼촌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아버지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하셔. 그 말로 충분했다. 다만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

주머니 부근의 진동에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흰 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이 먼저였고 양 손과 발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나중이었다. 둘러보니 주변은 온통 흰 공간이었다. 1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병실에 홀로 누워있었다. 침대는 여러 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 앞으로 까만 승용차 한 대가 멈췄었다. 30분 정도를 이동한 뒤 나 혼자 내렸다. 전해들은 번지수를 찾아 초인종을 세 번 누르고, 현관문 위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어두운 복도를 계속해서 걸어갔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작은 핀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복도 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 걸음 정도 걷자 나는 바닥에 경사가 져있음을 깨달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기울기였다. 덜컥 두려워져 거대한 쓰레기통이 발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던 중, 커다란 엘리베이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5층이 전부였지만 숫자 말고도 알 수 없는 모양의 버튼이 많았다.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 몸을 밀어 넣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거구인 남성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를 따라 둘, , 아니. 여러 명이 줄을 지어 엘리베이터 안을 채웠다. 나는 점점 구석으로 몰렸고 점점 숨이 막혀왔다.

그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깨어난 곳이 내 방 침대 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무도 없나요.”

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단 하나뿐인 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 아버지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요.”

순진하게 납치되어 버린 걸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올라탄 것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낸 차였는지도 몰랐다. 나를 데리러왔다는 말에 어떤 질문도 없이 차에 올라타 버렸다. 어린 애는 잠자코 있는 게 최선이라는 삼촌의 말이 틀렸는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수상했다. 나에게 음료수를 건넨 노파도, 지나치게 조용한 주변도, 모든 것이 하얀 건물도. 벽에 걸린 저 초상화도.

초상화.

벽에 걸려있는 것은 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머리숱이 많았고 주름이 적었다. 눈은 날카로웠다. 그의 둥근 턱은 내가 줄곧 거울 속에서 보아왔던 내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착하자. 어쩌면 잘못 끌려온 게 아닐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도망가지 않기로 삼촌과 약속을 했었다. 그 말이 지금의 상황을 의미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림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누워있는 데다가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액자 속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밴드를 풀기 위해 손목을 움직였다. 그러나 밴드는 침대의 밑 부분과 단단하게 연결되어있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엔 아래쪽을 보기 위해 몸을 숙였다.

한 밤 중 냉장고에서 들릴 법한 소음과 함께 침대의 등받이가 수직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받이는 몸이 거의 접힐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발버둥 쳐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코가 무릎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얼굴에 피가 쏠렸다. 숨을 내쉬기 위해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침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구두를 신은 남자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가 버튼을 누르자 침대의 등받이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기침과 함께 헛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남자는 여유롭게 옆의 의자를 빼서 내 옆에 앉았다.

인적사항에 대한 확인을 좀 할게요. 맞으면 맞다고 대답해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이곳이 평범한 병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목에 걸린 카드에는 1실험실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구겨짐 없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이며 생년월일, 학교명을 줄줄이 읊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나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틀린 게 있다면 사인 보내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제가 그 학교의 바로 그 학생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상대는 나와 대화할 의지가 조금도 없어보였다.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던 와중에 멀리 떨어져 있던 문이 열렸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맨 앞에 있던 몇몇의 사람이 성큼 성큼 걸어와 침대의 밑을 어루만지더니 밴드들을 좀 더 세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용을 읽어나가던 남자는 실은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말했다.

부모 생존 사항 없음. 보호자 없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내 손에 잉크를 찍은 뒤 흰 종이에 마구 지문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지 범인을 좇아 나서다보면 그 곳에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내 인생을 놓고 보자면 이건 거의 변하지 않는 법칙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번이었던 나는 청소를 마친 뒤 빗자루를 청소도구함을 정리했다. 그 때에도 역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당번이었던 아이는 일찌감치 도망 가버린 후였고 혼자 남아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를 마친 후에는 도구함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는 것이 당번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교실에서 누군가 돈을 잃어버렸다느니 게임기를 잃어버렸다느니 하는 일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곤란했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교무실로 찾아갔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남자 선생님 한 명만이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그는 그게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얼버무리고는 나에게서 관심을 꺼버렸다.

교무실 문 앞의 열쇠를 모아놓는 도구함을 다시 열어 보았지만 열쇠는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교실로 돌아와 칠판에 열쇠를 주우신 분은 돌려주세요.’라고 적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론 예상대로다. 불안한 마음으로 등교한 나는 한 순간 범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교탁 한 가운데에 피 흘리는 죽은 병아리를 옮겨다 놓은 사건의 범인으로 말이다. 아이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담임선생이 올 때 까지 죽은 병아리를 치우지 않았고 담임이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하다는 듯 경멸스러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나는 방과 후 복도의 한가운데서 몹시 혼났다. 그는 몇 번이고 가만둘 수 없다는 듯 손을 치켜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모욕을 줄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어차피 믿어줄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얼른 다 혼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옆을 지나가던 과학 선생이 나와 담임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생각해낸 것인지, 담임과 나에게 다가와서는 열쇠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고 그 애가 곧바로 돌아간 것을 자신이 보았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담임은 나이가 비슷한 과학 선생에게 진작 좀 말해주지 그랬냐며 멋쩍게 웃었다.

텅 빈 교실로 돌아온 나는, 그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그러니까 튀는 행동 좀 하지 말라고 했지, 씨발. 나만 쪽팔리게.

 

그들이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밀어 옮기는 동안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화 속 남자의 얼굴은 분명 나와 닮아있었다. 아니, 어릴 적 내가 기억하던 아버지의 얼굴과 똑같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어째서 가운을 입은 남자는 나에게 가족이란 없다고 말한 걸까.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면 나는 이곳에 왜 오게 된 걸까. 삼촌, 삼촌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 잠깐.”

침대가 멈췄다. 나를 옮기던 사람 중 하나가 내 얼굴을 보고는 화닥닥하기 시작했다. 함께 가던 사람들이 연달아 뒤를 돌아보고는 같은 표정을 지었다.

“C1상황, 이송 중이다.”

갑자기 침대의 방향이 틀어졌다. 그들은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누군가 내 입을 벌려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흰 천이었다. 입 안으로 비릿한 맛이 퍼졌다. 턱 밑으로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거즈 좀 더 줘.”

제기랄.”

침대가 역행함과 동시에 그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로봇인 양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듯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잘 좀 보라고 했잖아. 장난하나?”

죄송합니다.”

우왕좌왕하는 그들에게 이끌려 침대가 몇 번이고 벽에 부딪혔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도착한 곳은 교실 하나 크기 정도의 공간이었다. 슬쩍 보이는 진열대와 서랍엔 온갖 의료기기와 약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정해진 공간에서 최대한의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말하자면 소규모의 병원인 것 같았다.

손목을 묶고 있던 밴드가 풀렸다. 머리가 하얗게 샌 의사가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누워있던 내 얼굴 위로 조명을 가져다 대며 팔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가있으라고 작게 말했다.

. 크게.”

입을 벌리자마자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마구 들어왔다. 핏물을 삼키고 뱉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몇 번 발버둥을 치고 난 뒤 정신이 혼미해질 때 쯤 그가 작은 가위로 혀 위의 무언가를 잘라냈다.

헹궈.”

버튼을 누르자 등받이가 올라왔다. 커다란 은색 서랍에 비친 내 얼굴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아 빨간 핏덩이인 것처럼 보였다. 다만 눈물이 흐른 자국을 따라 하얗게 살이 드러나 있었다.

얼굴. 씻고 와라.”

그가 세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그를 똑바로 보았다. 키가 나와 비슷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 한 쪽이 의족이었다. 눈 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치료가 끝나자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공격하는 법을 영영 잊어버린 검은 개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책상 옆에 어린 여자 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이는 젊은 시절의 그인 듯한 남자와 함께였다.

도와주세요.”

그는 피 묻은 의료기들을 씻고 정리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침대 위에 묶여 있었어요.”

나는 목이 메었다.

제발 풀어주세요. 당신이 도와줬다고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을 게요.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는 지만…….”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가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그 모습을 본 그가 재빨리 달려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런 채로 있을 거냐? 얼른 얼굴을 씻고 나가라.”

그가 벽을 힐끔 보았다.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었다. 오후 열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반대쪽 벽으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밖을 보고 싶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들어온 곳의 문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사람이 서너 명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밖을 나가 그들을 따라간다면 나는 다시 침대에 묶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영영 벗어나지 못 하게 되겠지.

나는 다급히 등 뒤의 서랍을 열었다. 흘끔 보니 작은 약병에 주황색 액체들이 담겨 있었다. 뒤를 살폈지만 그는 내가 무엇을 하든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얼른 그 옆의 서랍을 열었다. 나이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가장 긴 나이프를 하나 손에 쥐었다. 다시 묶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다치면 곤란한 거죠?”

그제야 그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놀랐다기보다 애처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이프를 목에 가져다댔다. 그의 시선이 내 뒤의 문으로 향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을 지나가더니 문의 중간에 달려있던 고정판을 밀어 문을 잠궜다.

침착해.”

그가 내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왔다.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챘다. 힘이 굉장해서 손목이 부서질 것 같았다.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여긴 네가 살던 곳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야.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차 안에서 깜빡 잠들었다고 생각한 시간은 사실 다섯 시간은 족히 되었을 거다. 네가 내린 곳은 깜깜해진 밖이 아니라 실내였어. 이곳은 커다란 하우스로 덮여져 있어.”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네 의지대로 나갈 수 없다는 뜻이야. 그들이 너를 죽이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니 안심해. 네가 다칠 일도 없을 거야. 그저 잠자코 있으면…….”

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대답을 않자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영원히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네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의미잖아요.”

의사가 내 손의 나이프를 뺏으려던 순간 그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문을 고정시키고 있던 판이 날아가고, 커다란 양쪽 미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마구 달려 들어와 의사를 먼저 붙잡았다. 나는 나이프를 꽉 쥐고 목에 가져다 댔다.

그들이 멈칫했다. 내가 칼로 목을 살짝 베자 모두들 움직임을 멈추었다.

밖으로 나가게 해줘요. 나를 풀어줘요.”

그들은 우물쭈물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서있던 사람들만이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가고 싶어요. 나가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으니까 그것부터 내려놔.”

그들 중 한 사람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들고 있던 칼을 그를 향하게 했다.

나가는 길을 알려줘요.”

알았다. 이 쪽으로…….”

그 때 뒤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가 말을 멈추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왼쪽 복도를 바라보더니 스믈스믈 비켜나 길을 내주었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거울 속을 자주 들여다봤던 건 내 얼굴을 기억해두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이야말로 시간을 들여 바라보지 않는 한 마주치기 힘들다. 막상 자신의 외모를 떠올렸을 때 금방 떠오르지 않거나 엉뚱하게 왜곡된 얼굴을 떠올리는 건 그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얼굴을 훨씬 더 자주 바라본다.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신경을 써서 거울 앞에 앉곤 했다. 그와 내가 정말 닮아있다면, 나는 내 얼굴을 뜯어봄으로써 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영락없이 나와 닮은 얼굴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안경 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내 얼굴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뒤에 무리지어 서있던 남자들도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을 들이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노야.”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평범하다고 생각해왔던 이름이 낯설고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양 손으로 꽉 잡았다. 얼굴에 묻었던 피들이 땀과 함께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왔다. 점점 더 시야가 흐려졌다.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벗어놓은 가운 안 쪽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사진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걸어와 옆의 책상 위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돌려 사진을 보았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남자아이가 커다란 풍선을 들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책이 한 권 있었다. 전직 형사가 쓴 아버지에 대한 책이었다. 딸은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내도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는 의사인 친구로부터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주변을 정리했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여전히 미워했다. 딸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실망했다. 아버지는 안락사를 결정하고 얼마 후 그의 가족들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침대 밑에 편지를 한 통 남겼다. 자신이 남긴 재산과 그간의 일에 대해 짤막한 사과를 적어둔 편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추신을 남겼다.

딸에게. 그것도 모두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전해주시오.

그가 나를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안겼다. 얼굴에 묻어있던 핏자국들과 눈물이 뒤섞여 그의 흰 가운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옷이 더렵혀져도 괜찮을 것이다. 아버지니까. 아버지니까 괜찮았다. 모두 괜찮다고 말해 줄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하나이고, 나를 위한 존재이다. 아버지는 하나뿐이고 나를 위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나를 만들었다. 그러니 그는 나를 위한 아버지이다. 나를 위한 아버지는, 아버지 단 한 사람뿐이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것이 괜찮다. 그는, 가족은, 모든 것을 괜찮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뿐이고, 나의 아버지이다.

나는 그의 팔을 더듬어 손을 꼭 쥐었다. 따듯한 손이었다. 어린 시절 어린이 공원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던 나를 찾아 움켜쥐었던 그 손이었다. 동네의 수로에 빠졌을 때 몸이 미처 물에 닿기도 전에 나를 안아 올렸던 그 품이었다. 얼굴만이 도려나 있던 기억의 조각이 맞춰졌다. 나는 그 때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줄곧 친했던 아이들에게 하루아침에 따돌림을 당하고, 뺨을 맞고, 밤새 옆구리가 아파 혼자 병원을 찾아갔지만 문 앞에서 돌아와야만 했을 때 떠올렸던 아버지였다. 그 때에도 그저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다.

줄곧 말하고 싶었어요. 그것도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남자는 나의 손에 들려있던 칼을 빼앗아 세면대에 던져 넣었다. 물을 틀어 손을 적신 뒤 내 얼굴을 씻겼다. 커다란 손에서 구수한 햇빛 냄새가 났다. 그는 천장에서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주었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그는 몇 번이고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어요. 제가 혼자라고 했어요.”

마구 침이 넘어오는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는 수건에 물을 적셔 교복을 닦아주었다.

가자. 다 설명해줄게.”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있던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졌다.

숨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입안으로 침이 마구 배어나왔다. 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매일 상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어린애처럼 울음보를 터뜨리고 있다.

마음의 한편은 좀 더 씩씩하게 걸으라고, 너 같은 아들을 다시 만난 걸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하라고 나무라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이내 눈앞의 아버지의 모습에 지워졌다.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라도 가족의 단면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다.

천장에 달려있던 스피커로부터 지직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송을 알리는 음악이 울리고 뒤이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밖을 나서던 아버지의 걸음이 느려졌다.

잠시 후 2실험실로 여아 실험자가 도착예정. 신원확인을 위해 배당된 인원은 속히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온 몸의 피가 멈춘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 손을 놓아버렸다.

아빠, 이건 삼촌의 목소리잖아요.

 

카데바 관리 하나 못해서 이 난리를 피우게 하다니.”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 같은 건 아파트의 옥상에서 일찌감치 떨어졌어야 했다.

끌려가던 의사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추방당한 사람처럼 저항 없이 내 옆을 걸어갔다.

던져라.”

그가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슬쩍 넣어주고는 작게 말했다.

 

잡아!”

나는 돌아온 길을 향해 마구 달려 수술실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려 했지만 고정판은 이미 날아가 버린 후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먼저 달려오던 한 남자의 머리에 스테인레스 통이 맞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서랍을 열어 안에 있던 나이프를 꺼내 쥐었다. 한 남자가 뒤에서 나를 붙잡으려다, 내가 쥐고 있던 나이프이 얼굴을 스쳤다.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마구 발버둥 치며 의사가 건네주었던 유리병을 그의 얼굴에 던졌다. 유리병이 그의 눈에 맞은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진 액체에서 엄청난 양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숨이 막혀왔다. 나는 급히 입을 막았다. 뿌연 연기 너머로 연기를 마신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같은 색의 유리병들을 주머니에 주워 담은 뒤 몸을 숙인 채 그곳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두 번쯤 올랐을 때 뒤따라오던 한 남자가 내 발목을 잡았다. 연기사이로 그의 반대쪽 몸이 보였다. 한쪽 손목이 이미 날아간 채였다. 그는 내 발목을, 종아리를, 허벅지를 잡고 올라왔다. 그가 눈앞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양손으로 그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으나 이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왈칵 내 가슴팍에 토를 하고는 쓰러졌다. 저 멀리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마구 쫓아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거리였다. 나는 유리병을 더 던졌다. 병이 뒤따라오던 사람의 눈에 맞았다. 그가 눈을 움켜쥐기 무섭게 손가락 사이로 피와 함께 안구가 터져 나왔다. 뒤에 있던 사람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났다. 내 바로 뒤에 있던 사람이 쓰러지면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던 나머지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어떤 일이든지 범인을 좇아 나서다보면 그 곳에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내 인생을 놓고 보자면 이건 거의 변하지 않는 법칙에 가까웠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같을 수밖에 없는 걸까.

 

옥상은 열려있었다. 나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난간에 바짝 몸을 들이밀었다. 몸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던졌다.

아버지, 저 잘 한 거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잘했구나, 아들아.

 


우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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