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벤츠
저자: 이은
"아이씨. 미친 거 아냐?"
허겁지겁 바닥에 널부러진 속옷을 주워 입느라 은지는 정신이 없었다.
"미쳤어, 성은지. 이 미친년. 이 정신나간 년!"
"왜 그렇게 서둘러서 가요?"
평소 좋아하는 주황색 티에 구매 이래 처음으로 우악스럽게 머리를 집어넣던
은지는 등 뒤에서 들리는 태연한 목소리에 삐걱이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서둘러서 가냐구요, 구몬쌤."
방긋방긋 웃는 모양새가 꼴도 보기 싫어 죽겠다. 갓 일어난 것치고 나름 멀끔한
태가 옆 거울에 비친 자신의 부스스한 모습과 비교되어 더 싫었다.
"응, 쌤이 또 다른 수업이 있어서요. 늦을 것 같아서 서두르는 거예요."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고 화끈거리는 낯을 잘 안신기는 양말에 쳐 밖고 있으면서
혀는 나머지 신체 기관 중 제일 매끄럽게 작동했다. '나이스 주둥이.' 은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학시절 도움이 하나도 안됐던 토론 동아리 경험이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무슨 수업이요? 지금 오전 8시인데? 쌤 그렇게 안봤는데 되게 부지런 하시네요."
"그쪽 시계가 망가져서 그래요. 지금 12시예요."
"이거 쌤 핸드폰 시간인데요."
"저기요, 박은철씨. 선생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 그래서 뭐 배우겠어요?"
'괜히 양말 스타킹을 신어가지곤.' 은지는 욱하는 마음에 양말을 벗어서 던지며 대꾸했다.
"아니 뭐, 그렇다구요. 아침 먹을래요?"
"저는 은철씨하고 아침 먹는 사이는 아닌데요."
"아, 같이 잔 사이하고는 아침은 못먹나요? 그럼 이따 점심은 어때요?"
서둘러 아이보리빛 정장 재킷을 걸치던 은지는 단전부터 올라오는 불덩이를 내뱉지 않고
꾹 눌러 삼켰다. '이 새끼 왜 이래?'
"야, 박은철. 어제는 실수였지. 그래, 혼자 술 마시고 우는 거 달래줘서 고맙고
같이 마셔줘서 고맙다. 옛말에 똥차 가고 벤츠 온대도, 정든 똥차랑 헤어져서 좀 서러웠다. 됐냐?
정신 못차리는 거 친절하게 본인 집까지 데려와준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이렇게 잡아먹기 있냐?"
"덥친 건 선생님이신데요, 말씀은 바로 하시죠? 저는 덥쳐지는 입장에서 선생님이 예뻐서
서로 좋은 마음에 한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시죠?"
"덥치다니 내가 뭘....!" 라고 반박하려던 중 곰곰히 생각해보니 덮친건 본인이 맞다.
"그래, 너도 좋았다니 다행이다. 이제 다른 중국어 구몬쌤 구해봐.
난 제자하곤 안자는 철칙이 있어서."
"그럼 그냥 성은지해. 그리고 나랑 아침 먹어."
"아니 이게 아침 못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래, 먹어 아침. 먹는다고 죽겠냐? 체하고 말지."
아침에 목숨 거는 은철 때문에 은지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괜히 발도 쾅쾅 굴러보고 침대에
앉아 주먹으로 배게를 팡팡 내리쳤다. 은지의 수락에 은철은 그제서야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안체하게 죽 먹을까? 너 예전처럼 낙지죽 먹을래? 아님 전복죽?"
빠른 속도로 옷을 입은 은철이 주머니에 차키와 지갑을 넣으며 물었다.
'이건 정말 일생일대의 문제로군. 낙지냐 전복이냐. 옳지, 더 비싼 걸 먹어야지. 지가 사겠지, 뭐.'
"니가 사는거면 전복죽."
"좋아. 일어나. 나가자."
은지의 검은 토드백을 챙겨들고 은철이 먼저 신발을 신었다. 은지의 신발을 찾는 헤프닝이
있었으나 우습게도 신발은 식탁 밑에서 발견되었다.
'어제 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거지. 똥차랑 헤어지고 기분이 좋아서 신발을 날린 건가?'
웃긴 표정으로 구두를 들고 오는 은지를 보며 은철이 근질거리는 입가를 누르며 말했다.
"어제 신발 날리는 거 좀 섹시하더라. 액션 멜로 영화 주인공 같았어."
"맞을래 아님 맞을래?"
붕붕 돌아가는 은지의 주먹을 피해 차로 향하는 은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은철이 차에 시동을 걸 때 은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귀여운 상혁이'
"누구야? 이거 그 똥차야?"
은철이 은지의 폰에 뜬 이름을 보고 눈을 홉떴다. 은지는 괜히 잘못한 사람 마냥 앉은 자리가
따가웠다. 은철이 다짜고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은지 폰입니다. 누구냐구요? 은지 남자친구요. 어제 밤부터 좋은 만남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쪽은 누구시죠? 아, 은지 남자친구요? 이상하다, 남자친구는 말했듯 난데요.
아, 혹시 어제 헤어진 분인가? 고맙습니다. 나, 은지하고 예쁜 연애할게요. 닥치고 끊어요.
차단할테니까 은지한테 전화 하지마."
종국에 거친 호흡으로 통화를 마친 은철은 폰을 꾹 쥐기만 하고 출발할 생각을 안한다.
은지가 손가락 끝으로 은철의 팔을 톡톡 쳤다.
"야,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사겨?"
"나 너 좋아한지 대학교 1학년부터 5년 째야. 쓸데없이 눈치 없고 인기만 많아선 맨날 옆자리
마감이었잖아. 오래 연애도 못하는 주제에. 네 옆에 오래 있고 싶어서 바보같이 사겨달라 말도
못했어. 중국어 구몬쌤도 관뒀으니까 이제 내 여자친구 해줄래? 난 이리보고 저리봐도
알다시피 벤츠거든. 성은지 맞춤용."
'뭐야, 이거 진짜야? 몰래 카메라 이런거 아니지?'
회상해보자면 항상 변덕쟁이에 욕심꾸러기였던 자신 옆에 있어주던 은철이다. 얘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아니네. 성은지 애정 결핍 주제에 계속 사랑받고 있었네.
"죽집 가서 말해줄래. 전복죽 먹어보고. 맛집 있으면 안내해줘봐."
"진짜지? 엄청 맛있는 집이거든? 너 한입 먹자마자 바로 말해줘야 돼. 안그럼 다른 거 먹일거야."
"참 나. 안먹이겠다는 말은 안하네. 그래, 출발하시죠, 박기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얼마 달리지 않아 죽집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차 속은 달콤한 꽃향기와 봄 노래로 가득 차서
은지는 괜히 울렁이는 마음에 창 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따라 구름 한점 없는 맑은 3월 하늘
이었다. 간간이 정지 신호에 걸릴 때면 은철은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빛나는 은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지는 그 시선을 느끼곤 있었으나 시선을 마주하면 빨개진 귀 끝만큼 양 볼도 달아
오를까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은철이 주차를 하는 동안 은지는 먼저 내려 있었다. 차 안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햇살은 막상 나와보니 찬 바람에 막혀 그 포근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때문에
괜히 발 끝에 채이는 돌을 바라보며 동동거리고 있을 때였다. 목에 부드러운 뭔가가 감기더니
이내 몸이 뒤에서 밀어주는 힘에 밀려 반자동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추운데 먼저 들어가있지. 금방 주차할 텐데. 그래도 기다려줘서 고마워."
"뭐가 추워? 나는 남아서 주차하고 있는데 그것도 잠깐 못기다려주냐? 내가 운전기사도 아니고. 암튼 배려심이 없어."
"아 준비 좀 빨리 하면 안돼? 호박에 줄 그으면 수박되냐?"
"호박하고 왜 사귀냐고? 참 나, 야. 나니까 자기랑 만나는 거야. 좀 알아줄래?"
언뜻 은지의 귀로 똥차와의 평소 대화들이 스쳐지나갔다. 단지 자신이 맹하고 어리버리해서
그러려니 넘겼던 그와의 대화들은, 사실 은지가 목말라 하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을
깨닫자 와사비 듬뿍 넣은 초밥을 삼킨 것 마냥 코가 시큰대고 목이 막혔다. 그러나 등 뒤의
체온에 시큰거림이 이내 가라앉았다.
"사장님. 저희 전복죽하고 낙지죽 하나씩 주세요. 감사합니다."
우연히 떠오르는 기억에 똥차와 은철을 비교하기 시작하자 하나부터 열까지 은철의 다감한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폰 줘봐."
"음? 그래, 여기. 뭐 찾으려고?"
비밀 번호를 풀고 은철이 건네주는 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바보 성은지'
맘대로 저장된 이름을 바꾸고 폰을 돌려줬다. 의아한 표정의 은철을 두고 이번엔 자신의 폰을
꺼내 은철의 번호를 찾았다. '박은철'은 그 순간부터 은지에게 '내 사랑 벤츠'가 됐다.
대뜸 은철에게 전화를 거는 은지. 진동음을 내며 울리는 폰을 본 은철의 눈이 행복하게 휘어졌다.
수신자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