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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K posted Jun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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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가 되자 마담이 자리를 비웠다. 이 시간 즈음의 주점은 여러 가지 조건들로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무료함도 달랠 겸 희도는 카운터에 앉아, 멍하니 CCTV화면을 들여다봤다. 운이 좋다면 늘씬하게 잘빠진 예쁜 다리를 볼 수 있었고, 없다면 괜히 기웃거리는 부랑자들을 쫒아내러 밖으로 나서야했다. 오늘은 길고양이 몇 마리 본 게 전부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입구에 놓인 쓰레기 더미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다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에서 고양이가 사라지고 사내 서너 명 정도가 무리를 지어 계단을 내려왔다

 

어서오십쇼, 행님들! 불금 개시 손님들이셔서 VVIP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희도는 남자들에게 일일이 형님거리며 허리를 90도 각도로 수그렸다. 그리고 남자들을 찬찬히 뜯어봤다. 적어도 40대 후반이 됐을 무리에게서 찌든 사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른 곳에서 이미 한잔 걸쳤다는 증거였다. 희도에게는 엉큼한 버릇이 있었다. 손님들을 관찰하며 나름 상상을 했다. 그들의 결혼 유무와 이곳에 오게 된 배경. 그리고 학창시절의 모습. 혹시나 가지고 있을 성병의 종류 따위들을 말이다. 진상 손님들을 가려내어, 미리 대비를 하고자한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들을 룸으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았다. 에어컨을 작동시키는데 뿔테안경을 쓰고 머리가 발랑 까진 사람이 불쑥 물어왔다.

 

삼촌, 여기 아가씨들은 예뻐?”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행님! 마성읍 텐프로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자자 행님들 대신에 저희 가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잘 지켜준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걸그룹 라인업으로 데려오겠습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걸 보아 멀리 서울서 내려온 무리인 듯 했다. 그들은 규칙들을 듣기도 전에 텐프로라는 말에 이미 흡족해했다. 오렌지 단란주점은 마담의 특이한 철칙으로 인해 노래를 같이 불러주거나 춤을 춰주는 식의 흥만 돋궈주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대화를 나눠주는 그런 도우미들이 있었다. 접촉? 완전 노터치였다. 그럼에도 싸면서 아가씨를 부를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은 손님들이 모였다. 마담의 방식이 도시에서는 성행했나 보다. 룸으로 양주와 안주를 넣으려는 사이 때마침 마담이 돌아왔다. 그리고 또래의 여자들이 추리닝 차림으로 마담을 따라 들어왔다. 희도는 술을 보자말자 여자를 보채는 남자들을 달래고 나와야 했다. 그래도 고운 말씨를 쓰며 사근사근한 그들의 태도에 희도는 마음이 놓였다. 카운터에서 마담이 주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담이 희도에게 차키를 건네주며 말했다.

 

아제들 좋은 거 쳐묵네, 요만코만 받아도 본전 뽑겄다.”

 

그것도 그거지만 서울에서 온 분들인지 참 상냥합니다. 오늘 밤은 조용할 거 같아요.”

 

서울? 시끄러워도 된다, 깍쟁이들 쫙쫙 빼무쁘라!”

 

마담은 데킬라 몇 병을 챙겨 구석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여러 술을 섞는 게 싫어 독한 데킬라를 선호한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도우미를 룸에 넣는 일까지가 마담의 역할이었다. 그것까지도 희도가 맡기로 했다. 마담은 늘 일에 성의는 없으면서 정이 많았다. 그녀와 달리 희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몸에 베인 청년이었다. 희도가 일을 맡은 후로 여자들이 울면서 룸을 뛰쳐나오던 경우는 확연히 줄었다. 희도가 대기실 앞에서 노크를 했다. 문안에서 잠깐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담배연기가 코를 찔렀다. 희도는 생각해두었던 이름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수진, 지유, 경이, 장미, 하림.’ 하림이란 말이 들리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자신도 가겠다며 달려들었다. 도우미들 사이에서 매니저가 하림이만 좋은 초이스를 내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희도는 이어질 볼멘소리가 듣기 싫어 곧장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열에 아홉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하림이라는 도우미였다. 술에 취해 불순한 손놀림을 놀리던 손놈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희도는 유독시리 매번 초이스마다 트러블메이커를 고집해서 보내는 마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희도가 직접 초이스까지 맡으려 결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매번 울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들었던 쓸데없는 동정심을 피하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기다리고 있자, 아까 말한 다섯 명이 그대로 나왔다. 카운터에 비치되어있던 향수를 뿌려주고 룸으로 향했다.

너구리굴에서 나온 무리는 싸구려 향수 냄새에 더 성화였다.

 

형님들 많이들 기다리셨습니다! 드림걸스 들어갑니다.”

 

룸 안은 생각보다 차분한 분위기였다. 방금과 달리 너무 싸늘하기까지 해서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림이 지나갈 때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희도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림은 쌩하고 지나가버렸다. 문을 닫자말자 룸 안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이후에 두 팀 정도 손님을 더 받았다. 웬일인지 과일화채를 시키는 그룹이 없어 더할 나위 없이 한가하게 카운터를 지켰다.

술에 취해 걸걸해진 목소리들이 메아리 쳐 지하에 울렸다. 갓 일을 시작 했을 때는 중년들이 이다지도 신나는 트로트 유행가에 집착을 할까 답답하기도 했다. 그저 술자리의 분위기라 추측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들이 부른 유쾌한 멜로디가

젊은 세대의 어지간한 발라드보다 호소력 짙은 가사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출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마담의 방에서 호출이 왔다. 희도는 안주거리를 챙겨 마담의 방으로 갔다. 엄지를 치켜세우던 마담에게서 데킬라 몇 잔을 받았다. 혀 꼬인 말투로 마담이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데.

 

쨍그랑!’

 

마담을 부축하여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하자 아가씨 한명이 우유빛 피부에서 시뻘건 피를 쏟고 있었다. 정신이 다 아늑해졌다. 하림이었다. 하림의 비명소리에 대기실에 있던 아가씨들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마담을 보자 성난 남자는 술에 물을 탔다느니 머니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까 그 머리 까진 남자였다.

 

느그집 딸이래도 이릴끼가 니!”

 

사장님 진정 하이소.”

 

마담은 지지 않고 불곰에게 달려드는 진돗개 마냥 남자에게 들러붙었다. 마담이 큰 소리를 내자, 다른 룸에 있던 손님까지 합세하여 좁은 로비를 가득 매웠다. 일단 둘을 때어놓았다. 마담과 남자가 말씨름을 놓는 사이 구경꾼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다친 하림을 대기실로 데려갔다.

 

어쩌다 이랬노.”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문밖에선 언성이 더 높아졌다. 나서기 전 눈물, 콧물로 얼룩진 그녀에게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다.

잠깐 동안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버렸다. 룸에 있던 일행까지 가세하여 마담을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희도는 필사적으로 일행들을 몸으로 밀쳐냈다.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을 빌미로 남자가 마담에게 손을 댄 것이다. 그 어떤 진상 손님들도 마담에게 손을 대진 않았다.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병을 한 짝 재다 깨도 마담의 남편이 누군지 아는 이상 동네 아저씨들은 절대 그녀를 건들 수 없었다. 타지사람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렀다. 유난스러웠던 밤에 여자들은 쉴 틈 없이 사건에 대해 수군거렸고 유난히 거칠어진 퇴근길에 투덜거렸다. 희도는 영양가 없는 대화에 말려들기 싫었을 뿐더러 빨리 마무리 짓고 경찰서에라도 가 볼 심상이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룸을 정리하고 나오는 길에 마담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도 편하지, 자신은 막 집에 들어가는 길이니 조심히 들어가란다. 전화를 끊고 맥이 빠진 희도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었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1번 룸에 불을 켰다. 마담이 마시다 남긴 데킬라도 챙겼다. 바짝 마른 목에 독한 술이 넘어가니 목은 목대로 타들어가고 갑자기 쓰린 속에 현기증이 났다. 문득 안주거리가 생각났다. 그때도 딱 야릇한 조명 아래였다.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대학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일 때마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안주 씹듯 해댔으니 질릴 만도 했겠다 싶었지만, 거친 이질감이 그를 엄습했다. 학창시절 이래봤자 공부라면 거리가 멀었던 놈들이 대학물 먹고 잘나가는 척 기세등등해진 모습들이 역겹기까지 했다. 가만히 있는 게 중간이라도 간다고 했던가? 희도는 없는 척 겉돌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장자리로 옮겨가 소주 몇 잔 걸치며 맞장구만 쳐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대화에 꼬리가 붙으며 방향이 틀어졌다.

 

나 대학 휴학 내고 공무원 준비나 할라꼬.”

 

요즘 개나 소나 공무원 한다고 덤비는데?”

 

, 뭐라카더라. 인문대 다니는 놈이 취업 할라믄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서 취업해야한다나? 어떤 코쟁이 ceo놈이 그랬다더라. 어쩌겠노, 인생은 적절한 줄타기 아니겄나.”

 

그 누고 옛날에 같은 농구부였는데...... y대 간 놈 있다이가.”

 

성식이?”

 

그래! 금마는 s기업 인턴 간다카데.”

 

직이네. 역시 공돌이! 현도 새키, 니도 내처럼 이과가서 공대나 오지.”


니도 공돌이지만 니가 같은 클라스가? 니는 일단 졸업장이나 따야제.”

 

도찌 니는 대학 갈 생각읍나? 요즘 야간 대학에 아줌마 아저씨들도 쌨드라.”

 

대학은 무슨........ 현도 점마도 공무원 준비한다카는데.”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대학은 다녀봐야제, 술집에서 일해가꼬 어따 써 먹겄노.”

 

? 거가 어때서? 니는 삼류대학 안다니나. 내는 거서 일이라도 해서 배워가, 똑같이 물장사 할끼다. ? 니는 돈 주고 백수 할끼가?”

 

둘다 고마해라! 오랜만에 봐 가꼬...... 칙칙한데.......”

 

역시나 마무리는 여자이야기였다. 여자 친구들이 있는 놈들은 밤경험들을 모험담삼아 늘어놓고 플레이보이들은 원나잇을, 그것도 없는 놈들은 풋풋함 썸이야기를 했다. 차례가 돌아왔다. 회상은 거기서 끊겼다. 희도는 딱 좋게 알딸딸해진 것이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인기 차트를 검색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란 마음에 얼른 술병부터 숨겼다. 손에 거즈를 댄 여자가 룸으로 들어왔다. 하림이었다.

 

니 집에 안 갔었나?”

 

데려다 줘야 가죠.”

 

머리를 긁적이며 어떤 말로 상황 설명을 할까 위로를 할까 고민하던 중,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었던 술병을 마저 비우고 노래를 시작했다. 하림은 희도의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가만히 노래를 들었다. 희도는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뺐다.

어영부영 노래가 끝나자,

 

매니저님 나도 한곡 불러도 되요?”

 

얼떨결에 그러라고 대답했다. 하림은 상당히 노래를 잘 불렀다. 희도가 넋을 놓고 인형의 꿈의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할 만큼. 하림도 작정한 마냥 심취했다. 마지막으로 가게 입구를 셔터로 걸어 잠그고 낡은 봉고에 올랐다. 하림은 조수석에 앉았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단 둘이 차에 있는 것도 그렇고 하림은 화장을 지운 상태였다. 진한 화장 때문에 도우미들은 그년이 그년인가 싶었는데 룸미러로 힐끗 쳐다본 그녀의 모습은 여자였다. 아름답다 청순하다 귀엽다 그 어떤 수식어를 몽땅 갖다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그런 여자. 코를 간질이던 짙은 향기도 카운터에 있는 마담의 싸구려 향수가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하림도 룸미러를 쳐다봤다. 희도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바퀴가 굴러가는 내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주점 일도, 그녀를 깜빡한 것도 모든지 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다리 앞에서 신호에 걸리기까지 대화가 없었다. 보통 때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신호도 구지 기다렸다. 뻥 뚫린 새벽 다리 위에서 마침 악셀을 밟으려는데, 멀리 향동 마을이라는 팻말 바로 옆에서 경광봉이 보였다. 희도는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였다. 하림이 얼굴에 긴장을 머금고 이유를 물었다. 희도가 손가락으로 지그시 허공을 찌르자 하림이 깔깔댔다.

 

내가 운전할게요.”

 

손은 괜찮나?”

 

살짝 배인 정도에요.”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경찰하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차 쪽으로 다가왔다. 하림이 기어 봉 위로 엉덩이를 들이 밀었다. 어쩔 수 없이 희도는 그 밑으로 몸을 뺐다. ‘똑똑


문제 있으신가요?”

 

하림도 음주 측정에서 0.07%라는 수치가 나왔다. 희도는 그때서야 이마를 딱하고 때렸다. 경찰이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데 옆에 있던 늙은 경감이 최명철이 차네 그냥 보네라.’ 한마디 툭 던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안했을 것이다.

 하림은 차를 많이 몰아봤는지 희도보다 능숙하게 운전했다. 하지만 희도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창문에 비친 하림의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차가 멈췄다.

 

다 왔어요.”

 

벌써?”

 

다리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런가.”

 

, 매니저님. 뜬금없지만 부탁하나만 해도 되요?”

 

뭔데?”

 

희도에게는 돌이키면, 괜히 가슴이 먹먹하고 한 없이 아쉬워지는 감정이 있었다. 기억 속에서 일정하게 멀어지면 어김없이 꿈에 나타나 악에 받친 온갖 감정들 사이에서 그리움만을 끄집어냈다. 조롱하듯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몇날며칠 기약 없는 괴롭힘을 시작했다. 이제는 꿈속의 그녀에게서 느껴진 감정이 그녀에게 향했던 진솔한 사랑인지 감정의 부재로 인한 갈증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시시콜콜한 집착이라 치부하기엔 과거는 뜨거웠다. 다음날,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끈질긴 스토커를 쳐다본 마냥 경멸감에 젖어들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은 해결책이 없었다. 그저 침대 위에 앉아 머리만 긁적이면서 그 중간에 끼어 매콤달콤한 소용돌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추억이란 사진첩에 여러 여자들을 넣어버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갑 속에 틀어박힌 애물단지였다. 그렇다. 그날 꿈에도 헤어진 여자 친구가 나타났다. 언제 그런 일이 터졌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안부를 물어왔다. 그녀가 어루만진 볼은 아직 감촉을 머금었고, 언제든 다시 시작해도 좋다는 식의 뉘앙스가 잔뜩 담긴 달콤한 목소리는 귓가에 맴돌았다. 눈을 뜨자말자 고민 없이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 ‘;’ ‘그럼 그렇지.’

 

대신 생각나는 여자가 있었다. 어제 밤 하림이 멀리 있는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백화점은 읍내보다 멀어서 교통편이 불편하기도 하고 돌아올 때 짐이 많다보니 귀찮아진다고 했다. 그녀는 오늘 밤이 과할정도로 특별했으니 분명 행운이 올 것 같다는 촉이 왔다고 했다. 희도는 살면서 촉이란 것과 관련해 좋은 일이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며 억지로 받았던 연락처가 요긴하게 쓰이게 될 줄이야. 그는 하림의 마을에 있는 정자나무 앞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게다가 코 앞 거리를 약속시간 보다 30분씩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신청곡으로

 ‘Better than yesterday’라는 음악이 흘렀다. ‘이런 노래도 나오네.’ 한참을 듣던 라디오가 지루해졌다. 항상 음악이 들어 있는 USB를 가지고 다녔지만, 마담의 차는 구식 오디오를 달고 있어 무용지물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손가는 데로 음악을 담아 틀었다. 운전대를 툭툭 건드리며 리듬을 타보려는데 언덕 위에서 하림이 내려왔다. 마침 조나스 브라더스의 노래가 나왔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과 딱 매칭이 되었다. 그녀의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화창한 날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맨다리보다도 그녀에게서 나오는 어떤 분위기에 반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동그랗게 뜬 눈을 보니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왔네요.” 그래서 어때?” 하고 물었다. 하림이 차에 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그녀의 붕대감은 손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보다 괜찮네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백화점에 도착해서야 눈치 챈 사실이지만 희도를 보고 한 말이었다.

 

미안해서 어쩌죠, 집에서 좀 더 쉬어야 밤에 일을 할 텐데........”

 

니도 마찬가지 아니가. 나도 간만에 콧바람 좀 쐬고 싶어서 부른기다. 오늘 밤엔 초이스 좀 빼줄게.”

 

정말요? 저기 매니저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요? 이참에 저 하림이라 말고 00이라 불러주세요.”

 

희도는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담아둔 모양이었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그녀는 목적지라고 했던 3층에서 보다 1층에서 진을 다 빼놓았다. 여기저기 보석코너에서 커플링을 맞춘다는 핑계로 갖고 싶던 반지들은 실컷 껴보았다. 그녀의 구실 덕에 종업원들의 남자친구가 멋있어요라는 식의 립 서비스를 실컷 들을 수 있었지만, 희도는 팔이 시리도록 손사래를 쳐야 했다. 3층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던 중 눈에 익은 선글라스를 보았다. 그녀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였다. “여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격표에 써진 숫자는 예상치도 못한 액수가 써져있었으니. 3층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놀이터에 나온 어린 소녀마냥 해맑게 다녔다. 신상 백, 신상 구두, 신상 옷, 신상 이모저모. 딱 세 곳만 더 살펴보고 남성코너로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하림이 탈의실에 들어갔다. 하림은 단아한 원색의 원피스를 입고 나와 희도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희도는 그 옷을 본적이 있었다. 분명히 헤어지던 날이었다. 하림과 그녀의 매정했던 마지막 얼굴이 겹치며, 그녀의 목적 없는 쇼핑보다 오버랩 되는 그날이 희도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희도는 자신이 둘러보려던 물건들은 싹 잊은 채 하림을 보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남의 물건만 한 가득 실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희도오빠야, 오랜만에 나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다.”

 

무방비의 상태에서 희도의 심장은 기습을 당했다. 어쩌면 희도는 요새 그 단어를 가장 그리워하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최근 들어 가장 가슴 설레어 한 일이 다 식어빠진 사랑을 곱씹었던 것뿐이었으니. 그러나 이내 옆 자석의 여자가 자신이 다니는 단란주점의 종업원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다. 들뜬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잔인할 만큼 냉소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 들가면 푹 쉬라.”

 

뒷자리에 고이 모셔두었던 쇼핑백들을 주섬주섬 챙기던 그녀가 가방 속에서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하나를 주었다. “자 선물그리고 그녀는 언덕 위를 오르며 점점 작아졌다. 잠시 풀이 죽었던 희도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단란주점으로 출근했다. 매번 보던 LED 조명들이었는데 오늘따라 푸르게 찰랑거렸다. 턱을 괴고 하릴없이 그 출렁임을 감상하는데.

 

새끼 여자 생깄나, 어울리지도 않게 차를 다보고 있노?”

 

망치가 뒤통수를 딱 때렸다. 본인은 애교라지만 두 번 맞으면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들을 뵀을 만큼 아팠다. 그냥 보고 있었다고 둘러대자 그는 딴 짓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망치는 마담의 남편이다. 그 사람의 주먹이 망치만큼 쌔서 조직에서는

망치라고 부른단다. 마담도 그를 지칭할 때마다 망치망치 거리다보니, 희도 역시 그 별명이 이름보다 더 친숙했다.

 

사장님은 괜찮으십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치는 말도 안 되는 연설들을 무시무시하게 늘어놓았다. 여자한테 일을 맡기면 안 된다느니 여자와 북어는 때려야 제 맛이라니 안 그러면 콧대 높아진 여자들이 주제도 모르고 사고를 친다나. 혹시나 그간 마담의 행동을 숨겨준 것에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했는데 망치는 계산대에 있던 돈을 싹 가지고 자리를 비웠다.

 

와이프 오믄 있제. 어제 말했던 가스나 오늘 데리고 간다고 전해도.”

 

7시가 다 돼서야 마담이 들어왔다. 마담에게 키를 건네주며 혹시나 해서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그녀는 멀쩡했다. 10시가 넘어도 마담이 가계부만 들여다보고 있자, 희도가 스리슬쩍 마담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아가씨들 데리러 가는 게 좀 늦네요, 사장님.”

 

응큼한 시키 너도 남자라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기가? 당분간 아가씨들 안 부를끼다! 새키들 꼭 지 앞가림도 못하는 놈들이 그 꼬라지제. 경찰서 가니까 딱 꼬랑지 내루고 싹싹 비는데 얼메 통쾌하던고. 집에서 알까봐 무서운가, 빌빌기드라. 아 망치씨 왔다 갔더제? 어제 일 아는 눈치더나 모르던 눈치더나?”

 

희도는 경찰을 부른 것이 후회되었다. 아무래도 도우미를 쓰는 불법 영업이 경찰서에서 문제가 되었긴 되었나보다.

일이 줄어서 한동안 편하지.’, ‘잠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는 하늘의 계시구나.’ 해석했다. 그리고 모르겠다고만 대답했고 망치의 말을 전했다. 마담은 고개만 까딱였다. 망치가 했던 대답이 미궁에 빠진 순간이었다. 며칠 다이나믹하게 보냈더니,

주말은 그렇게 단골로 찾아오는 아저씨들의 푸념 몇 마디 듣는 걸로 한가하게 흘러갔다. 월요일은 휴일이었다.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 헤어진 여자친구, BMW520, 직업여성 등을 검색했다. 무의식속에 그 사람과 다시 잘되고 싶다는 심리라며 잔뜩 속을 후벼대고. 컴퓨터 화면 속 숫자는 한껏 초라하게 변해버린 통장잔고 속 숫자와 몇 번을 번갈아 쳐다보게 했으며.

마지막은 말도 안 되는 야설과 여자가 등 처먹은 썰이 난무했다. 허허 웃으며 컴퓨터를 껐다. 점심을 먹고 옷들을 빨려는데

하림이 준 상자를 발견했다. 당장 열어보기엔 선글라스의 가격표가 거슬렸다. 일단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꼬라 물었다.

돌려주더라도 열어보고 나서야 돌려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났다. 나름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상자를 열었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쵸콜릿과 사탕으로 가득한 상자에 여러 장의 손수건들과 쪽지 하나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희도는 마약 같은 감정을 무한정 솟구치게 하는 그 쪽지부터 대번에 열어봤다. 그 날 밤은 정말 시간이 가지 않았다. 당연히 잠이 오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혹시나 꿈이라도 꾸려고 양들도 무수히 많이 세어보았다. 들락거린 베란다의 창문에 떠 있는 달과 별이 얼마나 예쁜지도 알았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그날 밤은 예전 여자 친구의 오지 않을 카톡을 전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희도의 망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생각을 쌓으며 커다란 산을 만들었다. 손수건 한 장 한 장 꺼내며 울고 있던 하림을 떠올렸다. 혹시나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키던 이유가. 남자답지 못했던 지난 장면들이 떠오르며 이불을 걷어 차버렸다. 하림을 보며 들었던

두 가지 시선이 오금을 조여 왔다. 그녀를 보며 일어나지도 않은 이별을 먼저 떠올려 버린 것. 당시엔 김칫국 마시기 싫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상대의 마음을 알고부터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를 술집 도우미라 업신여긴 것. 그녀가 어느 선까지 어떤 일을 하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삼자가 보면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고, 시답지 않은 이유를 지어내어 궁색하게 회피해왔다는 사실에 희도는 창피해졌다. 지금 드는 감정이 창피함과는 별개의 것이더라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아침 해가 떴지만 잠은 포기하고 하림에게 전해줄 답장을 썼다. 나름 정성스럽게 쓴다고 애를 써봤지만 필력이 오합지졸이었다. 가장 큰 흠은 도무지 그녀가 말해줬던 그녀의 본명이 생각나지 않아, 답장이 수취인 불명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눈에 띄게 하락한 가게 매상에 망치의 불호령이 떨어진 다음날. 출근 전에 백화점에 들려 하림이 유난히 골똘히 봤었던 반지를 봤다. 너무 앞서나가나 싶어, 그나마 값이 싼 목걸이를 포장했다. 그런데 그 날 하림이 출근하지 않았다. 몇 번을 확인해 봤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손톱을 잘근 깨물고 대기실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우연찮게 도우미들이 하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 희도의 귀가 번쩍 뜨이는 부분이 있다.

 

그년 도도한 척은 혼자 다하더만 여인궁 갔다카더라.”

 

그거 땜빵 넣느라 보냈다카던데?”

 

실장한테 꼬리치더니 결국 거기 갈라고 그런 거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 못 봤나? 아니 가방만 봐라, 주제를 알아야지.”

 

심장이 떨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희도는 이야기의 대상이 하림이 아니며 그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담이 실수로 데려오지 않아 늦게 도착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12시가 넘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구석방으로 달려가 술에 찌든 마담을 붙잡고 다짜고짜 하림에 대해 물었다. 마담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새끼 숙맥인줄만 알았더니 마음에 든 가스나가 있었네.”

 

꼴깍 소리가 마담도 들었을 만큼 침이 크게 넘어갔다. 그런데 마담이 희도를 무시하듯 술잔에 가득 찬 술을 비우며 낄낄거렸다. 희도는 마담의 잔을 뺏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새끼 이게 미칬나!”

 

그러더니 자리에 서서 비틀거리다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 하림이! 그 그저께 명철씨가 그년 진죽에 거기 가야할 년이었는데 그년 애비가 빚이 얼마나 많은고, 평생거서 썩을 년 이제라며 데리갔제? ? 근데 희도야, 내 잔이 저기 와 깨져 있노? 희도야?”

 

삽시간에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지금 하림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건지 그녀를 데려간 망치의 목을 비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빌어먹을 세상을 뒤엎고 싶은 건지 심란했다. 마담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지만 희도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미련은 없었다. 내일도 이곳엔 그녀가 없을 테니까. 어두운 밤에도 길거리의 네온사인들이 어지럽게 길거리를 밝혔다. 곧장 왼쪽으로 가면 하림이 있을 미인궁이었고 오른쪽으로 돌면 향동마을 방향이었다. 아가씨 몇 명이 희도를 쫓아 계단을 올랐다. 희도는 잠시나마 달콤했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걸까. 도망치듯 곧장 그쪽을 향해 달렸다. 미지근했던 바람이 시원해지며 성난 가슴에 불쾌한 쾌감이 일었다. 어느 초여름이었다. 검은 양복 마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어떤 미친 사내가 흰 와이셔츠 바람으로 거리를 소란스럽게 했다.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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