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이 돌아간 날

by 흑표 posted Jun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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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이 돌아간 날

 

 

 

표를 판다.

표를 파는 나는 구관조다. 구관조는 사람 말을 잘 흉내 내는 덕에, 혹은 그 때문에 애완용으로 사육된다. 까마귀를 닮은 구관조가 잡새 취급을 받지 않는 이유다. 물론 모든 묘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전임자는 나를 따로 훈련시키지 않았으나 나는 매표소에 앉자마자 구관조처럼 말을 따라했다.

“어른 두 명, 아이 한 명이요.”

“네, 어른 두 명, 아이 한 명이요.”

“국가유공자 한 명, 어른 한 명, 중학생 한 명, 초등학생 두 명. 근데 유공자 가족은 무료입장 안 되나?”

“네, 국가유공자 한 명, 어른 한 명, 중학생 한 명, 초등학생 두 명이요.”

구관조는 핵심단어만 따라한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필요 없을 만큼 재능을 타고나는 인간이 아주 드물지만 존재한다. 일을 배우지도 않고 인간의 음성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나는 태생이 구관조다.

봄과 여름에는 제법 손가락에 물집도 잡혔었다. 더러 초등학교에서 소풍이라도 오는 날엔 구관조는 부리만 삐죽 내밀 뿐 말이 없는 짐승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물집은 나았지만 발이 시려 왔다. 몸값 비싼 동물은 열선을 깔고 누워 하품을 하였다. 그런 동물들은 대개 덩치가 크다. 왜소한 구관조는 똥파리처럼 손만 비빈다. 그래도 구관조는 텃새처럼 매표소를 지켰다.

11월이 되자 과장은 매표소 철창을 열어 구관조를 방사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던 구관조는 다시 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구관조에게 과장은 말했다.

“내년 봄에 다시 보세.”

구관조는 철새가 되어 떠나야 했지만 기다리는 서식지는 없었다.

주라기 동물원은 참신하고 정열적이며 진취적이고 유능하기까지 한 신입사원을 기다렸다. 나는 덤으로 7개의 자격증과 토익성적표를 웃돈으로 얹은 덕에 구관조가 될 수 있었다. 참신하고 정열적이며 진취적이고 유능하며, 여기에 7개의 자격증과 토익성적표를 가지고 있는 사원을 과장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철새처럼 자유롭게 비행하다가도 어느 한곳에 텃새처럼 정착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허허로운 하늘을 절뚝거리다시피 비행했다. 날갯죽지는 녹슨 기계처럼 마찰음을 냈다. 너른 들판이 보이면 안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말라 부스럭거리는 들에는 내가 주워 먹을 곡식 따윈 없었다. 그때 반가운 제비 한 마리가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알바드림>은 누군가가 인재를 급히 필요로 한다는 이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요구하는 조건은 주라기 동물원과 비슷했다. 참신하고 정열적이며 진취적이고 유능하기만 하면 됐다. 단, 애국심이 강한 청년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나는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곧잘 할 줄 안다. 애국심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급여도 좋았다. 일당 10만 원. 그것도 당일지급. 이런 거대한 박씨가 다 있나.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전화를 걸어 물었다.

“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상대방은 대답 대신 되물어왔다.

“동물원 매표소요.”

“음, 그거랑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표를 파는 일과 비슷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철창 속에 갇혀 앉아 있기만 하면 되거나 남의 말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 수도 있겠다.

코끼리 가죽에 똥이 묻은 줄 알았다. 먼지를 덮어쓴 회색 컨테이너 가건물에는 녹이 흘러내리다 못해 똥색으로 번져 있었다. 그 위로 앙상한 깃대에 태극기가 나부꼈다. 고용한 쪽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출입문 손잡이를 무심코 돌렸다가 정전기에 흠칫 놀랐다. 정전기가 얼마나 따끔거렸는지 보안상 전류를 흘려놓은 것만 같았다. 잠바 소매로 손을 감싸고 다시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매표소처럼 생긴 컨테이너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공사를 하다 만 건지, 이제 막 시작하려는 건지 컨테이너 주변은 여기저기 파헤쳐져 땅이 울퉁불퉁했다. 간밤에 비까지 내려 흙이 온통 젖어 있었다. 나는 박씨를 입에 물기 위해 다리가 분질러져야 했던 제비처럼 비치적거리며 걸음을 뗐다. 쇠창살 너머로 금이 간 창문이 보였고, 그 금을 따라 누런색 테이프가 금띠를 둘렀다. 창 너머 실내엔 대형 태극기가 꽂혀 있고, 무궁화로 장식된 한반도 그림이 벽 한가득 걸려 있었다. 발이 시렸지만 신발을 신고 있던 터라 비빌 수도 없었다. 똥파리가 신을 신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점심시간이 다 돼 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척. 척. 척. 척.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얼굴이 짬뽕처럼 시뻘건 중국집 배달부였다. 그는 더러운 군복 바지에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내 쪽을 한 번 힐끔 보더니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철가방은 오토바이에 꽂아둔 채였다. 중국집 배달부에게 내가 그걸 알려줘야 하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도어락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오른손 검지는 자장면 면발처럼 가늘고 시커멨다. 삐. 삐. 삐. 삐. 삐리리. 비밀번호는 1003이었다. 그는 마치 내가 전혀 위험인물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란 듯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배달부는 나를 다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이가 없어 나도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아, 아르바이트 때문에 왔어요.”

이제 실토하실까? 당신이 대체 이곳 비밀번호를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서. 나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컨테이너만 보면 발동하는 조건반사인지도 모른다.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는 개나 사람이 말을 하면 그대로 따라하는 구관조처럼.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그는 나를 내버려두고 부릉부릉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저, 저기!”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꽃빵처럼 희고 둥근 헬멧을 뒤집어쓰고서 사라졌다. 철가방에는 ‘개천손짜장’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출입문을 빠끔히 열어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까 본 대형 태극기와 한반도 지도가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낡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햇빛을 받아 연막탄처럼 희뿌연 실내공기만 제외하면. 도저히 발이 시려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조심스레 오른발을 안으로 내디뎠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떼를 지은 오토바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배달부가 돌아온 걸까. 중국집 배달부도 떼를 지어 출장뷔페를 다 가나 싶었지만 웬일인지 오토바이마다 태극기를 꽂고 있었다. 탑승자는 몽땅 중노인이었는데 화려하게 꾸며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예비군훈련 받으러 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초로의 아저씨가 선글라스를 휙 벗더니 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나도 아저씨를 톺아보았다. 과장스럽게 불룩 내민 배는 마치 새끼를 잔뜩 밴 돼지의 그것 같았고, 그 아래로 깡똥한 두 다리가 다 닳은 연필심처럼 박혀 있었다. 무언가 작심한 듯 입을 앙다물고 눈에 힘을 꾹 주었지만 그럴수록 황달기 있는 눈엔 핏줄만 섰다. 무엇보다 명찰에 박음질된 ‘장군’이라는 이름이 너무 웃겼다. 아직 오토바이에서 내리지 않은 채 뒤에 버티고 있던 아저씨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단체관람 온 손님들이 매표소 안의 나를 빤히 쳐다보듯이.

“아, 아르바이트 때문에 왔어요.”

나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게 최초이자 최종면접인 것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 굴러들어온 박씨인데 놓칠 수야 있나. 무엇보다 당일지급이 아닌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름대로 씩씩하게 다시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선글라스를 상의 주머니에 꽂더니 입맛을 다셨다.

“군필자를 원했는데…… 군대는 갔다 왔겠지?”

뒤에서 ‘그럼!’, ‘그럼!’하고 맞장구가 터져 나왔다. 내 귀에는 그게 ‘부릉!’, ‘부릉!’하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어느 군 출신인가?”

아저씨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 질문을 잘못 이해하여 여주군 출신이라고 답했다. 모두들 원숭이를 구경하는 아이처럼 박수치며 웃어젖혔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저씨에게 뭐라고 지시를 받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흩어졌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도 아르바이트를 하나 싶어 측은하였다. 한편으론 나 역시 훗날 다 늙은 마당에도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자 조금 울적해졌다.

“앉게.”

아저씨가 소파에 먼저 앉아 실내공기는 연막탄 수준이 아니라 순식간에 최루탄으로 변해버렸다. 뿌연 먼지 입자 하나하나마다 붙어 있을 세균과 박테리아를 떠올리며 나는 뜨거운 커피를 불었다. 그건 더러운 먼지를 아저씨 쪽으로 보내버리기 위함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후후 불어서 밀어내는 세균을 들이마시며 내 이력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눈길을 둘 곳이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걱정에 휩싸였다. 고액일당으로 순진한 나를 꼬드겨 다단계 판매에 투입시키려는 건 아닐까. 강제합숙을 시키지는 않을까. 내가 저들의 회유와 협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고문하지는 않을까. 불안해진 나는 탐정처럼 사무실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무슨 수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바로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상황판이 보였다. 온통 한자로 쓰여 있어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혹시 중국인인가? 어쩐지 중국집 배달부가 자기 집처럼 드나들더라니.

“흠…… 전공은 괜찮군.”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긴 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나는 구관조만도 못했다. 가르쳐주는 것도 따라가질 못했으니까. 아무래도 내 전공을 써먹을 요량 같은데, 그 점이 더 불안했다. 내 머리에서 국어국문학 지식을 추출하기란 한반도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것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운 일은 결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가족관계란을 제대로 안 채웠네?”

“네?”

“부친은 뭐하시던 분이신가?”

“교사셨는데 퇴직하셨어요.”

“과목은?”

“교련이에요.”

“호오!”

면접은 싱겁게 끝이 났다. 참신하고 정열적이며 진취적이고 유능할 뿐만 아니라 자격증 일곱 개에 토익성적표를 갖추고 국어국문학과를 어찌 됐든 졸업은 했으며 전직 교련 선생님을 부친으로 둔 나는 이곳과 딱 들어맞는 인재 같았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다급하게 물어봤지만 아저씨는 바지춤을 배꼽까지 끄집어 올릴 뿐이었다. 비장한 그의 얼굴 뒤로 현판의 글씨가 보였다. 하면 된다!

하면 되는 건 그렇다 치고, 대체 뭘 해야 되는지가 정말이지 너무나 궁금했다. 벌써 오후 두 시였다. 점심을 못 먹어 배가 고팠다.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없는 타조도 제 시간에는 사료를 먹는다. 문득 굶어 죽어가는 동물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하면 되는 일을 빨리 하든지 해야 오늘 일당을 받을 게 아닌가.

“저기, 사장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가요?”

눈을 감은 아저씨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혹은 졸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곰처럼 보였다. 마침내 아저씨가 입을 뗐다.

“자네의 임무는 심리교란작전 및 정훈교육일세.”

“네?”

나는 천문학이 뭔지는 알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저씨의 주문도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당이 높았던가. 씨, 괜히 왔나. 나는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아저씨는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인터넷 댓글 작성으로 후방의 적군을 교란하고, 우군을 형성하라는 게 나의 임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짬뽕 국물이 별자리처럼 범박하게 퍼진 노트북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서 국어국문학도를 필요로 한 걸세! 우선 이것부터 해주게.”

아저씨는 군복 상의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꺼냈다. 종이는 마치 정경부인 속곳처럼 여러 겹으로 접혀 있었는데, 그 속엔 대갓집 마나님의 속살처럼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듯했다.

“작성하게.”

정리하자면 이거였다. 아저씨가 건네준 종이를 문서파일로 옮겨 적고, 시간 나는 대로 인터넷에 들어가 댓글을 다는 것이었다. 우호적인 댓글을 달되, 절대 아마추어처럼 티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조를 할 때는 성난 도사견 같았다. 검사를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무슨 댓글을 달죠? 누구를 위해서요?”

아저씨는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아직 이야기를 안 했나 보군. 인터넷에 ‘개천당’을 쳐보게.”

검색창에 ‘개천’까지 치자 ‘개천손짜장’이 나오긴 했다. 아까 그 배달부가 일하는 중국집이었다. ‘당’까지 마저 쳤다. 開天黨이라는 한자가 나오긴 했지만 가운데에 天이라는 글자 빼고는 읽을 수 없었으므로 관심을 두진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 곰처럼 앉아 있는 저 아저씨가 모니터 속에서 떡하니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게 아닌가. 뭐가 좋은지 해죽해죽 쪼개면서. 사진사가 웃기게 생겼던지 과하게 벌려 웃는 입술 틈으로 금니가 반짝였다. 상황판에 쓰인 “정치의 멍군은 가라! 장군이오!”, “자장처럼 맛있는 정치! 짬뽕처럼 화끈한 정치! 만두처럼 알찬 정치!”라는 구호가 햇빝을 받아 번쩍거렸다. 안 그래도 선거철이긴 했다. 아저씨도 소싯적에 돈깨나 모은 덕에 정치인을 지망하나 싶었다. 고마웠다.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늘려줘서.

“사장님, 혹시 정치하세요?”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이곳이 제발 이상한 단체가 아니길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은 것이었다.

“허허허.”

그는 흡족한지 웃음만 터트렸다. 아무튼 이상한 종교단체가 아니란 점 하나만큼은 만족스러웠다. 비록 꼴은 요상하지만 그래도 정치인과 독대하고 있는 내가 무언가 인정받는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아무렴, 그건 그렇고 일당을 받으려면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일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타자를 치는 건 별거 아니지만 괴발개발 아무렇게나 써놓은 글자를 읽어내기란 암호해독의 과정처럼 짜증스러웠다. 어찌나 쓰다가 고치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던지 글자 수보다 환칠해놓은 부분이 더 많았다. 자필로 썼을 그 노고에 비해, 그리고 내가 해독하여 타자를 치는 이 고단함에 비해 내용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모두 잘사는 나라를 함께 잘 만들자, 뭐 이런 내용이었다. 더러 북진통일과 삼청교육대 상설화, 부패공무원 사형 등의 내용을 발견할 때면 조금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약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북진에 앞장서거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

“사장님, 일단 한 쪽은 다했습니다.”

손가락보다 눈이 더 아팠다. 나는 깔끔하게 친 워드를 아저씨에게 보여주었다.

“사장이라……. 이제 자네와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말인데, 그 호칭을 좀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나 싶어 망설여졌다. 그때 아까 봤던 개천손짜장 배달부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와 호칭을 정리해주었다.

“사장님, 사모님이 전화 좀 받으시라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아저씨는 미간만 찌푸릴 뿐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너 이 자식, 내가 시킨 일 마음 단단히 먹었나!”

아저씨가 근엄한 말투로 배달부에게 말했다. 배달부는 오줌이 마려운지 다리를 비비 꼬며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게, 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말입니다.”

“야, 인마!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 주고! 보너스에 휴가까지 주겠다잖아.”

“그래도 그건 좀……. 차라리 다른 사람을…….”

배달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쪽을 쓱 쳐다봤다. 나는 뭔 일인가 싶어 눈만 씀벅거리며 둘을 쳐다봤다.

“이미 결정했어! 전선에서 퇴각이란 없다. 물러서는 자는 탈영병으로 간주, 사살한다. 넌 내가 고스톱 쳐서 이 자리까지 오른 줄 알아?”

아저씨는 탈영병을 감시하는 독전대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아저씨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생긴 아줌마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컨테이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이 썩을 놈아, 마누라는 하루 종일 기름때 묻은 그릇 닦는데, 넌 짜장 묻은 돈으로 무슨 오사리잡것에 환장했냐!”

“어허! 여편네가 거 말본새 하고는.”

아저씨는 나 때문에 더 민망했던지 ‘흠’, ‘흠’하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배달부는 이런 광경에 익숙한지 밖에 나가 담배만 피웠다. 배달부의 뒤통수를 바라보는데 반대쪽 차선으로 시커먼 고급 세단이 무려 일곱 대가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이 동네에도 조폭이 어지간히 설치는구나. 나는 몸을 움츠렸다.

“여편네? 오냐, 그래 좋다. 네놈이 허파에 바람이 든 모양인데, 내가 오늘 그 숨구멍 더 뚫어주마!”

자장면과 짬뽕이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물의 세계에는 모계사회가 종종 있는데, 이 부부가 그래 보였다. 그러나 둘의 드잡이는 아까 흩어졌던 오토바이족들이 등장하면서 끝이 났다.

“총재님,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이마에 두건을 덮어쓴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물론 그 두건에 그려진 태극기는 멍이 들어 있었다.

“뭐요! 그게 어디요?”

“고아원이랍니다.”

아저씨는 씩씩거리는 아줌마를 내팽개치고 오토바이 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이번엔 배달부가 통 사정을 하면서 말렸다.

“사장님, 사모님 말씀처럼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말입니다. 제발 마음을 돌리지 말입니다.”

“군인은 생존가능성을 따져가며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 너 인마, 임무 완수 못하면 오토바이 키 반납할 생각해!”

그렇게 아저씨와 오토바이족 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줌마도 내가 못 산다는 하소연을 허공에다 대고 두어 번 하더니 돌아갔고, 배달부는 무슨 고민이 있는지 한숨을 푹푹 쉬더니 나가버렸다.

남의 가정사에 간섭할 일은 아니라서 나는 잠자코 내가 해야 할 일만 했다. 아저씨가 준 종이 중에서 한 장은 이미 다했고, 다음 장을 타자 칠 차례였다. 군인이었군. 종이에 적힌 아저씨의 경력사항을 보니 예비역 상사였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읽기도 귀찮은 단체 여러 군데에도 간부를 맡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적힌 그대로 타자를 쳤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따라하는 구관조처럼.

사전을 찾아가며 몽골어를 번역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아저씨가 옆에 없으니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나와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치 고고학자가 희미하게 지워진 고대문자를 해독하듯 한 자, 한 자 옮겨갔다. 마침내 그 짓을 다했을 때는 눈이 아파 도저히 댓글을 달 수 없게 됐다. 게다가 퇴근시간도 다 됐다. 벌써 다섯 시 아닌가. 장래희망이 공무원인 나로서는 퇴근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소신이 있다. 하지만 일당을 줄 아저씨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되자마자 일당 달라고 전화하기엔 너무 돈만 밝히는 인간 같아서 일단은 참기로 했다. 참기로 했으니 참기는 했는데 그냥 참고 있기엔 아저씨가 무책임하게도 돌아오기는커녕 연락조차 없다. 하는 수 없이 전화를 여러 차례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미 어둑해졌는데 텅 빈 컨테이너에 혼자 있기가 여간 을씨년스러운 게 아니었다.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없는 타조도 관람시간이 끝나면 자유를 얻는다. 이런 야간개장이 다 있나!

나는 드디어 동물원 매표소 같은 컨테이너를 빠져나와 고아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알 턱이 없다. 찾아가는 도중에 아저씨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억울하지만 택시를 타기로 했다. 내 돈 받으러 가자고 내 돈 쓰는 것만큼 짜증스런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내일이 되면 저 컨테이너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일당을 받아야만 했다.

“거 참 썩을 것들 말이야.”

택시 문을 닫자마자 기사는 누구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을 듯이 씨부렁거렸다. 내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느라 자꾸 꼼지락거렸기 때문인가 싶어 잠깐 움찔했었다.

“저것들은 잘도 쏴 올리는데, 우리 나로호는 뭐하고 자빠졌는지 몰라.”

‘저것’이란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이며, 나로호는 또 뭔가 싶었다. 신문은커녕 뉴스도 안 보는 내게 있어 이 세계란 온통 비밀로 가득하다. 예의상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지만, 뭘 알아야 아는 체를 하며 나설 게 아닌가. 나는 무식이 탈로나기 싫어 잠자코 있었다.

“학생, 혹시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힐끗힐끗 보며 얼른 대화에 동참할 것을 재촉했다. 내가 아는 문제가 나와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당연히 공산주의 아닌가요?”

“저거 봐, 저거 봐. 저렇다니까. 내가 학생 또래 손님들 태우면 꼭꼭 물어본다고. 그런데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전에는 정치외교학 전공한다는 친구도 모르더구만.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돼 가는 건지 원. 도대체가 기본들이 없어요, 기본들이. 학생, 6․25는 언제 발발했는지 알아? 몇 년 몇 월 며칠?”

이 나라가 어떻게 돼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사는 그게 온통 내 탓인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했다. 그는 나와 할 얘기가 참 많다는 듯 일부러 택시를 천천히 몰았다. 나는 같은 지점에 대하여 빠른 속도로 운전하여 단시간에 도착하는 게 택시비가 덜 나올지, 느린 속도로 긴 시간 동안 운전하는 쪽이 덜 나올지가 궁금해졌다. 기사는 작은 택시에 앉아 세계를 통째로 굴리는 사람처럼 이것저것 다 간섭했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그의 입 밖으로 나오더니 살짝 열린 차창 너머로 튕겨져 나갔다. 나는 고아원으로 가는 게 초행길인 데다 수중에 돈도 간당간당해서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라디오에 소행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뉴스가 나오는데, 기사가 자꾸 방해해서 짜증이 슬슬 치받기 시작했다.

“듣고 있어?”

<소행성이 어젯밤 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지구를 스쳐 지나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내가 지갑을 만지작거리자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다시 흘끔 보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예? 아, 예, 예.”

<이 소행성은 불과 하루 전에야 발견됐으며 지구를 23만㎞ 거리를 두고 지나갔습니다. 이는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 38만6000㎞보다 훨씬 가까운 것입니다.>

“북쪽 놈들은 불과 하루 전에 미사일을 해체한다고 쇼하더니 오늘 날름 쏴대는 거 좀 봐. 거기서 여기까지 이 택시 타고 불과 몇 시간도 안 걸려요. 남과 북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워. 그걸 알아야 해. 정신 차려야 해.”

<이번 소행성의 크기는 지난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지역에서 공중 폭발해 2000㎢의 숲을 잿더미로 만든 소행성과 비슷한 크기였습니다.>

“이번 미사일은 지난 2009년에 쐈던 그 뭐냐, 광명성 2호, 그래, 그거.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하더구만.”

“예? 아, 예.”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소행성과 충돌할 뻔하다니.

<현재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지름 5㎞의 거대 소행성 4179 투타티스는 며칠 내로 지구에 700만㎞까지 근접하며 훗날 더 가까운 거리를 지나갈 전망입니다. 만약 이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진다면.>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후보가 떨어진다면.”

<인류 문명 전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6500만 년 전 공룡들을 멸종시킨 칙술룹 소행성은 지름이 약 10㎞였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사라질지도 몰라. 60여 년 전에 이 나라를 폐허로 만든 공산당을 잊어선 안 돼!”

어쨌든 소행성과 충돌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다.

그의 이야기는 종횡무진, 동서고금으로 확장해 나갔는데 존 로크라던가 로코코라던가 하여간 그런 사람 이름도 나오고, 국민들이 헌법만큼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충고도 나왔다. 모두 옳은 소리 같았으므로 나는 잠자코 들으며 지불해야 할 택시비를 준비했다. 라디오 듣는 건 진작 포기했다. 동전주머니까지 탈탈 털어봐야 3,200원. 미터기는 벌써 3,200원을 찍었다.

“저기요! 여기 세워주세요!”

“아직 고아원 멀었는데? 여기서 몇 분 더 걸어야 해.”

“괜찮아요. 여기 세워주세요!”

나는 다급했다. 급하기는 택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주야장천으로 쏟아내도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한데 벌써 세우라니. 그는 택시를 멈추고도 계속 떠들었다. 하, 기사가 시간을 끄는 바람에 100원이 더 나와 버렸다.

“저기, 아저씨. 100원이 모자라네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나를 쳐다봤다. 백미러를 통해서 눈만 봤는데, 얼굴을 제대로 보니 멧돼지처럼 생긴 상이다.

“그럼 진작 세워달라고 해야 할 거 아냐!”

“말씀드렸잖아요.”

“더 빨리 말해야 할 거 아냐! 젊은 사람이 말이야.”

그에게는 소행성보다 100원이 더 소중해 보였다. 그러니 나는 정중하게 사과해야 했다. 무려 소행성보다 중대한 100원이 아닌가. 아무튼 충돌하는 즉시 모든 게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충돌하는 그 순간까지 놓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중요한 게 이 지구상에는 참 많은 듯하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는 100원을 깎아주는 아량을 베풀어주었다. 뒷좌석 문을 열자 택시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소행성 4179 투타티스가 다시 지구 곁을 지나간다니! 만약 내가 인생이 잘 풀려서 마당 넓은 2층 집에서 리트리버를 키우며 살아가는데 소행성 때문에 그 행복이 깨진다면? 혹은 투타티스가 또다시 찾아올 때까지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다른 지구 생명체와 더불어 공멸한다면? 어떤 경우든 나는 참 억울한 인생이 되겠거니 싶었지만, 순식간에 죽을 것이므로 그런 불필요한 억울한 감정은 느끼지 않아도 되겠지, 하며 안도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택시 기사가 너무 무례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만만히 보이나? 하긴 주라기 동물원 과장도 저치와 비슷하게 날 대했었지. 대체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인다는 걸까. 만만히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깨에 힘을 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고아원이 보였다. 고아원은 고아원답지 않게 인파로 북적였다. 방송국에서 나온 차량과 고급세단과 아저씨 무리의 오토바이 들이 뒤섞여 고아원을 잠시나마 풍족하게 연출해주었다. 아저씬지 사장님인지 총재님인지는 몰라도 그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고아원에 딸린 작은 도서관에서 아저씨를 찾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함께.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왠지 낯에 익었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아주 잠깐씩 보던 사람이었다. 볼 때마다 가르마가 참 개성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그는 자신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늘 책을 가까이 했기에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취직도 아니라 고작 남을 위해 일하려고 골치 아픈 책을 읽는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신기한 건, 그가 고개를 들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진다는 거였는데, 그때마다 그는 규칙적으로 활짝 웃었다. 주라기 동물원 친구들도 웃기 싫을 때는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가르마 아저씨는 참 딱해 보였다. 나는 사진 찍히는 게 싫어서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아저씨, 아니 사장님, 아니 총재님! 여기 계셨어요?”

아저씨는 아저씨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가르마 아저씨에게서 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아이들과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받은 선물을 서로 자랑하며 웅성거렸고, 여교사가 미소를 띠며 황급히 달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너 여기 웬일이야?”

아저씨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죄송하지만 퇴근시간이 다 돼서요. 일당 주셔야죠.”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노동의 대가만큼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다.

“알았어. 일단 나가 있어. 전화할게. 이제 곧 협상에 들어갈 거야.”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드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이들과 대체 무슨 협상을 한다는 건지. 아니면 혹시 나랑 일당을 깎는 협상을 벌이겠다는 건가? 어디 그러기만 해보라지. 타자 쳐 놓은 파일 다 지워버릴 테니까. 그리고 인터넷에 소문을 다 퍼트려버릴 테니까. 어차피 이 사람 저 사람 뒤엉켜 있는 실내 공기가 갑갑하여 나가고 싶던 참이었다. 설마하니 일당을 깎거나 떼먹을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때였다. 아저씨 부근에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싸우는 게 아닌가. 아마 검은 세단을 타고 온 쪽에서 건넨 선물 같아 보였다. 그중 좋은 걸 서로 갖겠다고 아까부터 가댁질을 하다가 티격태격하더니 기어이 한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이쿠, 저 녀석 목소리 한번 쩌렁쩌렁 하구나!”

가르마 아저씨가 우는 아이를 상대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했다. 그러자 좌중이 어허허허 참 재미있다는 듯 과장스럽게 웃었다. 자기가 더 크게 웃는다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나의 사장님도. 모두가 자기를 보고 어허허허 웃자 울던 아이는 눈을 매섭게 뜨더니 대놓고 울음을 터트렸다. 예의 그 여교사가 또다시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를 띠며 입을 틀어막았지만 아이는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르마 아저씨는 또 한 번 웃음을 선창했고, 모두가 돌림노래를 부르듯 그걸 따라했다. 그 꼴을 보며 내가 여기 왜 있나 싶어 복도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전등이라도 꺼진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근데 그건 정말 도서관 전등이 꺼진 때문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불이 꺼진 거야?”

“정전이야?”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불이 꺼졌다는 건 누구라도 안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도서관 안에서 검은 정장 입은 아저씨들과 취재진들, 아이들과 오토바이족들이 뒤엉켜 고성과 비명을 질러댔다. 둥근 머리들이 소행성처럼 여기저기 서로 충돌했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울음을 터트리자 다른 아이들도 몽땅 목청을 드러내놓고 울어버렸다.

“시끄러워!”

“어허, 이 사람아, 아이들에게 그 무슨 험악한 말투인가.”

“송구합니다.”

“애들 좀 달래 봐요!”

“후보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허허.”

“어딜 만져!”

목소리로 봐서 여교사였다. 나는 성추행범으로 몰릴까 불안하며 팔짱을 낀 채 주저앉아버렸다. 누군가 나에게 발이 걸려 넘어지며 나를 덮쳤다.

“누가 여기다 짐을 갖다 놨어!”

나는 졸지에 짐짝이 되었다.

“총재님! 총재님!”

오토바이족 중 누군가가 우리 사장을 불러대나 보다.

“야, 어서 문 열어!”

“문이 잠겨 있습니다!”

“어떤 새끼…… 아니 누구야! 야, 어서 후보님 곁으로 밀착 경호해!”

“선생님, 여기 스위치가 어디 있습니까?”

“밖에 있어요.”

“미치겠군.”

“뭐 이런 고아원이 다 있어!”

“복지예산 퍼주면 뭐하나. 스위치 하나 제대로 못 다는데.”

“자, 자, 침착들 합시다.”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여러 번 번뜩였다.

“사진 찍지 말아요! 사진은 안 됩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또 찰칵. 찰칵.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후보님! 애국세력이 결집되지 않으면 이번 선거는 필패입니다!”

“조용히 좀 해요. 아까부터 되게 떠드네.”

“뭐요? 당신 관등성명이 뭐야!”

“뭐, 관등성명? 너보단 높아, 이 자식아!”

“어허, 거 말조심 하게. 기자님들 계신 데서.”

“아, 예, 송구합니다, 후보님.”

“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하는 거요!”

“혹시 이거 정치적 테러 아니오?”

“뭐? 설마, 기자님들도 계신데.”

“그냥 해본 소립니다, 후보님. 헤헤.”

“사람 참 실없기는.”

“아무래도 그 아이 짓 같아요. 아까 울면서 뛰어나간 애 말예요. 가끔씩 그러거든요.”

많은 목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엉켰다. 그중엔 반가운 목소리도 있었다. 내게 일당을 줘야 할 아저씨였다. 그는 가르마 아저씨에게 자꾸 무슨 결단을 촉구했다. 가르마 아저씨가 거들떠보지 않을수록 목소리는 더 간절해졌다. 무슨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제발 일당을 받고 퇴근하고 싶었다. 그것이 아저씨를 향한 나의 촉구이자 요구였다. 어둠을 밝히려는 건지 이 와중에도 찍을 게 있다는 건지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해서 연이어 터졌다. 플래시에 비친 사람들의 형상을 볼 때마다 모두 동물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동물이 되어 내일 조간신문에 나올까.

원장이 황급히 달려오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도서관은 못 먹을 걸 먹어서 구토를 게워내듯 어둠 속의 모든 걸 토해냈다. 출입문으로 몽땅 우르르 몰리자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밟히는 사람과 밟는 사람, 할퀴어지는 사람과 할퀴는 사람, 욕 듣는 사람과 욕하는 사람 들이 마치 난해하여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조형물처럼 어떤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나저나 저들은 알까. 간밤에 인류가 몽땅 전멸할 뻔했던 아찔한 사실을. 같이 죽자고 맹렬히 날아오던 소행성이 이들을 봤다면 얼마나 멋쩍어할까. 그 먼 길을 힘들게 날아오고도 맘을 돌려 비켜간 건 우리의 무심함에 황당했기 때문이다. 분명하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공룡도 박살낸 소행성이 인류가 등장하고부터 잠잠해진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기분 좋게 문질렀다. 돈을 주던 아저씨는 내일부터는 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했다. 그 의미가 아저씨로서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좋은 일거리를 놓쳐 퍽 아쉬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수중에 빳빳한 고액지폐가 두 장이나 생기자 소행성 충돌에 대한 걱정 따위는 순식간에 증발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아저씨도, 택시 기사도, 가르마 아저씨도 그만의 걱정거리를 잊고자 무엇 하나에 정열을 쏟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보고 아저씨와 약속한 댓글도 달 겸 컴퓨터를 켰다. 자주 가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자취생들이 주로 찾는 야식집이나 중국집의 맛을 평가하는 사이트다.

id: 혼자 있고 싶어 - 개천손짜장 정말 맛있어요. 다른 데랑은 비교할 수가 없네요.

id: 불효자는 웁니다 - 거기 먹지 마세요. 배달부 불친절해요.

id: 혼자 있고 싶어 - 개천손짜장 사장님 정말 신의 있는 사람이네요. 약속 하나는 확실히 지켜요.

id: 움직이는 소나무 - 알바 너무 티 난다. 너 댓글 하나당 얼마 받냐?

어찌됐든 이걸로 아저씨가 말한 나의 임무는 끝났다. 아저씨가 말한 심리교란작전과 정훈교육도 막상 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오만 원짜리 지폐를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똥파리처럼 양손으로 비벼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컴퓨터를 막 끄려는데, 포털사이트 뉴스 란에 개천손짜장 아저씨의 흥분한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아저씨는 면발을 뽑던 그 큰 손으로 가르마 아저씨를 가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마 아저씨의 피둥피둥한 볼살을 가리기엔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손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와 창을 닫았는데 이번에는 배달부가 기사에 떴다. 그는 “이 시대 마지막 애국자 개천당 장군 후보의 사퇴를 거부한다.”라는 피켓을 들고 빌딩 옥상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다. 짬뽕 같은 얼굴은 추위에 얼어 퍼렇게 질려 있었다. 경찰과 1시간 정도 대치하였지만 그는 장군 후보가 사퇴를 철회하기 전까지는 절대 내려갈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진에 찍힌 경찰관들을 보니 내가 인건비 적게 주는 아르바이트를 뛸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짜증스러울 만큼 귀찮은 일이지만 직업상 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인간이 종종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정말 죽으려고 한 건 아니라서 곧 경찰에 진압되긴 했다. 나는 그 기사에 댓글을 달려다가 말았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댓글들이 배달부에게 듬뿍 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댓글은 ‘소도 웃겠다.’라는 것이었다. 소라니. 소가 어때서. 문득 주라기 동물원이 떠올랐다. 이 추위가 그치면 다시 돌아가야 할 그곳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