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밥상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나중에 가서는 왜 싸웠는지 모를 그런 수준의 문제. 그것은 생각보다 생활에 오래 잠식해서 냉전이라는 단어로 변해갔다.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연애가 아니라 싸우던 말던 한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결혼은 안심하는 만큼 서로에게 주는 상처에 무감각해진다. 그런 것보단 사랑이 아닌 서로에게 익숙해서 한 결혼이 문제였을지도.
상사에게 잔뜩 깨지고 퇴근한 금요일 밤. 신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랜 기간 연애 후 결혼 해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였기에 위로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셔츠채로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는 남편. 다녀왔는데도 인사는커녕 신발장에 있는 나를 힐끗 보고 다시 TV에 시선을 돌린다. 시어머니께 잔뜩 싫은 소리를 듣고 만들어 놓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치킨을 시켜먹었는지 튀김가루가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서울에 살아야 한답시고 서울 끄트머리 고작 10평짜리 전세에 빚을 삼천이나 떠안고 산 집이었기에 현관문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이는 거실 바닥에 흩뿌려진 치킨가루. 오래 된 빌라여서 바퀴벌레가 나오니 바닥에 떨어진 건 꼭 잘 치우자고 했었는데. 평소 같으면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씻고 안방에 가서 잠들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그렇게 우스워?"
"왜 또 뭐가."
"내가 쇼파에서 옷 갈아입고 누우라고 그랬잖아. 양말도 그렇게 벗어 놓으면 누구한테 제대로 해 놓으라는 거야? 일은 같이하면서 집안일은 왜 내 몫인데? 저녁 내 몫까지 시켜 놓는 건 바라지도 않아. 혼자 먹었으면 뒷정리는 당신이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시끄러워.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신경 좀 꺼. 네가 내 엄마야? 왜 이렇게 잔소리질이야."
"그래 이런 건 당신 어머니께나 부탁드려! 내가 당신 엄마야? 안 그래도 당신 어머니가 내가 혹시 당신 아들 굶기는지 호시탐탐 보시 길래 꾸역꾸역 시간 내서 만들어 놓은 반찬에는 손도 안 대고 치킨이나 쳐 시켜먹는 당신한테 내가 어휴 잘 하셨어요. 라고 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
"뭐? 치킨이나 쳐 시켜 먹어? 이게 아주 말을 싸가지 없게 하네. 야. 아니...됐다. 너 얌전히 자든가 나가던가 해라. 한 마디라도 더 하면 너랑 한 결혼 후회하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요 며칠 혼자 자는 안방침대에서 쇼파에서 부터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날 밤이면 매일 밤 결혼을 후회했었다. 그런데, 그걸 남편 입에서 들으니까 왜 이렇게 열이 받지?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었다! 나 며칠 안 들어올 거니까 알아서 치우던 말던 바퀴벌레가 나오던 말든! 알아서 해!"
문을 쾅 닫고 나왔다. 너무 큰 소리가 나서 남편이 뛰어나와 뭐라고 할 지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안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눈을 가득 채운 눈물에 지나가는 네온사인 빛이 번져 보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한참을 걷다가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발이 아팠다. 아침에 신었던 출근용 하이힐이 그대로였다.
'신발이라도 바꿔 신고 나올 걸.'
이윽고 신호는 초록불로 바뀌고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옆 트럭의 하이라이트가 유난히 밝아 눈이 아팠다. 잠시 집 앞 벤치에 앉아 쉬었다. 사실, 남편이 오길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안의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15분을 꼬박 기다리다 일어섰다. 잠시 쉬어서 그런지 발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밤에 남편과 싸우고 나온 아내들의 갈 곳은 정해져 있듯, 나는 친정으로 향했다.
[엄마 나 지금 엄마네 갈 거야. 오빠네 말 해둬]
예전에 꽤나 잘나가는 청년사업가였던 오빠는 정말이지 한 번에 말아먹고 지금 친정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새언니는 발레를 전공하고 바로 오빠와 결혼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사람이었다. 아이를 하나 놓고 집에서는 살림만 하던 사람이었지만 오빠가 실직하자 학생 때 조금 할 줄 알았던 프랑스어 번역 일을 시작해 그 벌이로 세 식구가 근근히 풀칠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1년 새 재기를 한 오빠가 나한테 빌렸던 돈을 이자까지 쳐 한 번에 갚은 걸 보니 제법 돈을 벌었나보다. 사업으로 한 번에 천, 이 천씩 버는 걸 보니 맞벌이로 오백 벌어 아등바등 사는 우리와 비교가 되 한숨이 났다. 어느 새 도착한 친정집 앞, 밤늦은 시간이라 불은 꺼져 있었다. 종종 주말이면 유치원 생 조카를 돌보러 갔었기에 도어 락 번호는 알고 있었다.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안방에서 달칵, 소리가 났다. 엄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금요일 늦은 밤에 정장을 모두 갖춰 입고 친정집에 온 딸이 어이가 없긴 하겠지.
"그냥 여기서 자고가려고. 내일 주말이잖아. 회사 안가는 토요일이거든."
궁색하게 변명을 하는 나를 빤히 보다가 엄마는 거실 불을 켰다.
"오빠 네는?"
"사업 일이 있어서 잠깐 대전 내려갔다. 주말 껴서 간 거라 가족들이랑 여행이라도 하겠다고 같이 내려갔어."
"그렇구나..."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엄마는 툭 내뱉었다.
"밥은 먹었냐?"
항상 얼굴 보면 첫 번째로 인사처럼 말하는 엄마의 밥 먹었냐는 새벽 열두시 반에도 여전했다. 나는 픽 웃다가 그대로 주루룩 나오는 눈물에 목이 메어 잘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아직...안.."
온수부터 잠실까지, 한 시간 반을 지하철에서 꼬박 참았던 눈물이었는데, 엄마의 한 마디에 너무나 쉽게 터져 나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추운 새벽바람을 맞고 온 나에게 엄마의 체온은 너무나 따스했다.
실컷 운 뒤 씻고 나오자 구수한 된장찌개 향이 진동했다. 고봉밥에 치즈 계란말이, 고춧가루에 버무린 오이소박이와 된장찌개. 큼직하게 썬 감자를 넣은 된장찌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였다.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성실한 사람이었다. 일도, 술도, 여자를 밝히는 면에서도. 상대방 여성의 임신을 알게 된 엄마에게 아버지는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같은 당신 탓이라고 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이혼도장을 찍어 주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다. 그렇게 떠나갔으니 양육비를 줄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엄마는 그저 오빠와 나를 데려 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악착같이 공장 일을 하며 일 할 동안 여덟 살 위인 오빠가 나를 키웠다. 세 살 때부터 이유식이 아닌 된장찌개에 밥 말아 먹었던 것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된장찌개를 제일 좋아한다. 역시 습관이란 무섭다.
초등학생이었던 오빠가 나를 돌보며 밥을 먹였던 나날, 그 시절 오빠의 꿈은 집주인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시절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제일 돈을 잘 버는 것 같아서 그랬단다. 월세 살던 옥탑 단칸방 시절, 수도가 고장 나 한 겨울 찬물로 씻어도 절대 고쳐주지 않던 집주인. 따지는 오빠에게 아니꼬우면 방 빼던가. 어린 것이 건방지게. 애비 없는 것들은 이래서.. 라고 말했던 집주인은 이틀 후 월세를 받으러 왔다가 내려가는 길 오빠에게 찬물세례를 받았고, 펄펄 뛰는 집주인에게 엄마는 연신 굽실대고 감기가 걸린 것 같으니 병원비를 내놓으라는 집주인에게 병원비도 지불했다. 집이 바로 아래층이라 들어가서 바로 따뜻한 물로 씻었던 주제에. 오빠에게 엄마는 집주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지만 오빠는 끝까지 하지 않았고, 결국 사과할 때 까지 3월 초에 알몸으로 밖에 서 있어야 했다. 3월이라곤 하지만 아직 추운 날씨에 하루 종일 밖에서 서 있던 오빠는 열이 크게 올랐었고, 사흘을 내리 앓고 난 후 말수가 적어졌다. 엄마와 오빠는 그 때 부터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된장찌개를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했던 나는 왜 수저를 들지 않냐는 듯 쳐다보는 엄마를 보다가 밥을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목이 메어왔다. 따끈따끈, 계란을 여섯 개나 써서 만든 두툼한 치즈 계란말이.
그렇게 엄마와 오빠 사이를 멀어지게 한 집주인이었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집을 나온 건 그 일이 있고 나서 3개월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세 살이었던 나는 상당히 얌전한 아이었다.
어렸을 때 예민했던 오빠와는 다르게 방긋방긋 잘 웃고, 얌전하고 잘 잤다. 하나 문제가 있었던 건 세 살인데 말문을 트지 못한 거랄까. 엄마, 오빠, 맘마정도는 말 했지만 이게 뭐야? 하고 묻는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엄마나 오빠가 나에게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도리질 하고 말아다. 어디 병원에 데려갈 형편도 아니고 아예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라 나아지겠지 하고 말았다고 한다.
5월, 옥탑방의 여름은 빨리 찾아온다. 새벽 내내 땀을 흘리며 아침이 되어서야 곤히 잠든 찰나에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엄마나 오빠나 보통 문을 따고 들어오기에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졸려서 별 생각을 않던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는 얼굴,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은 공과금 종이를 들고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세 가족이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데 그나마도 오래 틀어놓으면 산소가 사라져서 죽는다는 괴담에 항상 한 시간만 타이머를 맞춰두고 자 오빠나 나나 새벽에는 팬티만 입고 자기 일쑤였다.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준 세 살의 나도 그랬다.
"엄마나 그 새낀 없냐?"
집주인은 오빠를 그 날 이후로부터 그 새끼라고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주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그래도 수도세가 너무 많이 나와서 얘기 좀 해야 되는데.."
그러면서 헛기침을 했다.
"혹시 수도관이 새는 걸지도 모르니 한 번 들어가서 보자."
그리고 그는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보아야 할 수도관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어느새 늘어난 오빠의 티를 입고 있는 내게 다가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아저씨가 너 배 좀 볼까? 이렇게 선풍기 많이 쐬면 감기 걸리지 않니?"
나는 도리질 했지만 집주인은 기어코 나를 자신의 품속에 놓고 배를 슬금슬금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손이 슬슬 위로 가던 찰나, 열쇠로 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집주인은 나를 이불 위에 팽개치고 일어났다. 학교에 다녀온 오빠였다. 한 손에는 검은 봉지 안에 라면이 하나 담겨 있었다. 그 아저씨의 어색한 행동을 본 오빠였지만 오빠 또한 초등학생이었기에 별 생각은 않고 그냥 싫은 마음에 집주인을 노려봤다.
"엄마는 언제 오시냐?"
오빤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
"아홉 시 넘어서요."
"오면 나 좀 보자 그래라."
대답도 않고 물을 끓이는 오빠를 보다가 버릇없는 새끼, 하며 혀를 쯧 차고 나가버렸다.
집 주인은 다음날에도 왔다. 오후 열 시 부터 나를 깨운 집주인을 째려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손에 들고 있는 것에 나는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그건 치즈였다. 항상 디즈니 만화동산이나 색종이 접기 프로 전에 하는 광고에서 나오지만 먹을 수는 없었던 것. 집주인은 내게 그걸 내밀었다.
"이건 치즈야. 치즈. 먹고 싶지? 얌전히 있으면 주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치즈를 주었고 나는 바로 한 입 물었지만 아무 맛도 안 났다.
"비닐을 벗겨야지."
비닐을 벗기자 네모나고 꼬리꼬리한 향이 나는 주황색 체다 치즈가 드러났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조금씩 떼 아껴먹자 아저씨는 나를 또 품에 안고 배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 후 부터는 가슴, 엉덩이를 한참이나 만지다가 오빠가 오기 전에 돌아갔다. 엄마나 오빠에게는 비밀이라는 말과 함께. 나는 어차피 말을 잘 못 했고, 오빠는 그 날 이후로 말수가 적어졌고, 엄마는 들어오시면 바로 주무시고 새벽에 나갔기 때문에 이 비밀스러운 놀이는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일주일 후에 집주인은 더 대담해져 함께 발가벗고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싫었던 것은 침으로 번들번들한 입술로 내 볼에 입 맞추는 거였다. 침이 끈적끈적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지속되었던 이 놀이는 공장이 망해 하루아침에 실직한 엄마가 들어오며 끝났다. 계란과 쌀을 가지고 들어온 엄마는 황급히 옷을 입는 집주인과 발가벗고 엄마를 반가워하던 나를 한 번씩 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를 낸 적 없던 엄마의 속 안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피 끓는 비명소리였다. 엄마의 슬픔이 전해져 나온 나는 그 때 부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엄마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계란을 판째로 집주인에게 세게 던졌다. 정통으로 얼굴에 맞아 소리를 지르던 집주인은 옷가지를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소란스러움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창문을 열고 구경하던 중이었고, 제대로 망신을 받으며 집에 들어간 집주인은 무언가 눈치 챈 부인에게 더 크게 맞았는지 눈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나왔다. 벌건 대낮에 일어난 일에 소문은 이미 동네방네 퍼져 있었다. 엄마는 없는 형편에 나를 3일이나 입원시켰고,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와 퇴원한 내게 무언가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아직까지도 말을 잘 못하는 나였기에 별로 기대하고 물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놀랍게도 나는 말을 했다.
"치즈..."
엄마는 다음날 아침 낡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말이를 해 주었다. 계란말이 안에는 치즈가 두 장 들어 있었다. 나는 그걸 맛있게 먹으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는 잊어버렸으면 했던 건지 내가 좀 더 커서 말을 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그 일을 자연스럽게 잊고 있다가 고등학교 보건시간에 성교육을 받을 때 까지 알지 못하였다. 보건 수업을 받자마자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바로 화장실에 가 아침을 게워낸 나는 이후로 남편을 만날 때 까지 성인 남자를 무서워했다.
모든 게 너무나 맛있었지만 양이 2~3인분에 가까워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친 나에게 엄마는 사과까지 깎아 주었다. 토끼모양 사과였다.
그다지 살림이 핀 적 없었던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실직 후 마트에서 일하며 좀 더 우리를 챙겨 주었기에 당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던 공장 일보다는 벌이가 훨씬 적었다. 그래서 모두들 급식을 먹었던 때,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오빠는 진학하라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업계에 갔다.
빨리 돈을 벌고 싶은 게 이유였다. 원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고 싶어 했지만 중졸 10대 청소년을 써 줄만한 곳은 햇빛 비치는 직업군에 한해서는 없었다. 의무교육인 중학교와는 다르게 고등학교는 학비가 들었고, 버스로 통학을 해 교통비까지 들어 더 돈이 드는 마당이라 급식비 삼 만원도 사치였다. 물론 오빠도 도시락이었다. 모두들 급식을 먹는데 단촐한 도시락을 가지고 다녀야 했던 나는 친구들에게 내 도시락을 보이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애용했던 장소는 음악실이었다. 문도 안 잠겨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나의 성지. 그곳에서 콩밥, 김치, 김의 단촐한 식사. 그 행복도 김치냄새가 난다는 학생의 민원을 받고 끝났다. 다음 날 부터 반에서 먹으라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집에 들어가 저녁 때 까지 울던 나는 눈물을 닦고 안 운 척 세수까지 한 후 엄마의 퇴근을 맞았다. 엄마 지갑에서 동전을 슬쩍 하거나 심부름 값 500원을 떼먹을 때는 한 없이 둔한 엄마인데, 이런 일에는 완전범죄를 꿈꿨는데도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서는 캐물었다. 나는 이야기를 했고, 엄마는 말없이 나가버렸다. 나는 죄책감에 엄마는 어디 가셨냐는 오빠의 물음에도 모르겠다고 어물어물했다. 다음 날 아침, 엄마와 오빠는 일찍 나갔고 식탁 위에는 내 도시락 가방만이 남아 있었다. 바라지 않던 점심시간, 벌써부터 체할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었다. 선생님이 딱 지켜보고 있어서 나갈 수도 없었다. 에라 하는 심정으로 도시락 통을 열자, 도시락 통이 훨씬 예쁜 걸로 바뀌어 있었다. 스뎅이 아닌 분홍색 토끼가 그려진 플라스틱 도시락. 아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내 도시락을 보고 있었다. 도시락을 열자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김치볶음밥 위에 소담스레 올려진 계란 후라이, 김 가루와 깨가 뿌려져 있었다. 반찬이 따로 없어도 진수성찬 같아 보이는 음식. 그리고 디저트로는 토끼모양 사과. 그 날은 급식으로도 사과가 나왔는데 엄마가 해준 토끼모양 사과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투박해서 아이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우쭐한 나는 기분 좋게 점심을 먹었고, 엄마는 그 후로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같은 메뉴지만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는 토끼모양 사과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즈음, 오빠가 시작한 작은 사업이 성공가도에 들어 훨씬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급식비도 낼 정도로 여유롭게 되었다. 엄마는 일을 그만 두라는 오빠의 만류에도 끝까지 마트 일을 꿋꿋하게 했다. 몸이 멀쩡한데 일을 하지 않는 건 낭비라나. 참 엄마다웠다.
사과까지 집어넣고 음식과의 전쟁에서 성공한 나는 엄마와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졸음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며칠 전부터 남편과의 냉전으로 항상 있었던 긴장이 한 번에 풀어지는 걸 느꼈다.
"방에 가서 자야지."
엄마는 말은 퉁명스럽게 하고선 나를 부축해주며 안방에 데려왔다. 엄마는 침대를 별로 안 좋아했다. 평생 이불바닥 생활 해 온 당신인지라 이해했다. 두꺼운 솜이불이 깔려져 있었다. 불을 끄고 조용해진 집 안에서 이따금 차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가진 추위에 엄마 품으로 파고드니 엄마 냄새가 기분 좋게 났다. 엄마는 날 껴안아 토닥이며 말했다.
"너...세살 때..."
갑자기 잠이 조금 달아났다. 무슨 이야기일까 심장이 뛰었지만 모르는 척, 자는 척 숨소리를 좀 더 크게 냈다.
"느이 아버지랑 헤어지고 일 하려는데 여간 막막해야지.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회생활을 뚝딱 잘하겠냐.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눈치 보면서 새벽에 핏덩이 같은 너랑 완이 두고 나가서 일했지. 그 때부터 밤까지 일 하고 오면 고물고물한 것들 둘 모여서 자는 게 어찌나 가슴이 에리던지.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너는 참 이뻤어. 나는 꼭 딸이 있었으면 했거든. 그래서 완이 때 보담 태교도 참 열심히 했어. 그랬더니 내 바람이랑 꼭 닮은 딸이 태어났데. 하얗고 눈도 송아지 눈 맹키로 정말 이쁘드라고. 그런데 낳기만 하면 부모가 아니데. 공장 망한 날 월급도 두 달 밀린 판이라 직원들이랑 공장장 집에 다 같이 쳐 들어갔는데, 빨간딱지 다 붙고 집에는 가져갈게 없더라. 이미 공장장 네는 멀리 도망가고 우리는 남은 거라도 챙기자 싶어서 뒤지다가 쌀 좀 가지고 남은 돈으로 계란 한 판 사고 집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어야. 그런데 문을 여니까 그 미친놈이 당황하는 꼴이랑 너 벗고 방긋 웃는 거랑 보니 집주인이고 뭐고 눈이 훼까닥 돌더라고. 정신 차리고 보니 잘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던 네가 어찌나 서럽게 울고 있던지, 도저히 내가 울 자격이 없어서 너를 달래면서 너 입원한 병원에서 밤새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내가 너희를 덜 신경 써서 그렇게 된 건데도 느이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더라. 그 후로 집 주인 부인이 찾아왔었어. 보증금에 오백 더 넣어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말도 안 된다고 쫓아 보내고 신고했는데, 경찰들이 어찌나 지랄 맞던지. 거기가 공장 딸랑 있는 시골 촌 동네인데다 그 새끼 부인이 한 가락 하는 사람이라 애 인생 망치려는거 아니면 그냥 포기하라고 하데. 그러면서 말도 잘 못 하는 너를 어찌나 괴롭히고 진행 되는 건 없는지. 울화통이 터져 미치겠는데 경찰서 갔다가 들어가는 길 네가 홱 돌아서 기절을 해 버리는데 정말 무서웠었다. 집에 급하게 데려가서 눕혀 놓고 물 뿌리니 일어는 나는데 그 하얗고 말간 얼굴이 어느새 누렇게 뜨고 눈은 흐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더라고. 내가 애를 망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냥 다 잊자 하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하고 그냥 이사했다. 집 주인 부인이 선심 쓰는 듯 주려는 오백만원 그 년 얼굴에 던지고 왔어. 엄마는 그 후로 돈 때문에 힘들었어도 그 날 일을 한 번도 후회 한 적이 없다. 이사 간 집에서 마트 일 하면서 너희 좀 더 챙겨주니 몸은 좀 배고프고 가난해도 마음은 참 편하더라. 완이가 참 착하고 무던해서 그 때 그 일 있던 이후로 엄마한테 마음은 잘 안 열어도 너는 잘 챙겼어. 다행스러웠지. 아직도 완이한텐 그 일이 멍울이 져서 남아있다. 나만 을이면 되었지 애까지 을을 못 만들어서 그 추운 겨울날 쫓아 낸 게 너무 한스러워. 그래도 사업 망하고 나도 에미라고 의탁해준 게 너무 고마웠었다. 느이 오빠 며느리는 처음에 봤었을 땐 너무 새초롬하고 무용 전공했다는 거 보니 돈 안 되는 일 하겠구나 싶어서 반대를 했었다. 그런데 느이 오빠 사업 망하고 여기 와서는 싹싹하게 잘하고 외국어 번역 하면서 애 키우면서 아등바등 하는 거 보니 참 이쁘더라. 시어머니랑 생활 하면서 많이 힘들었겠지. 그래도 이번에 느이 오빠 사업 좀 성공하고 곧 이사 간다더라. 다행이지..... 고등학생 때 네가 보건체육 시간에 성교육 시간 이후 무단조퇴한 일로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을 때, 심장이 덜컹 했었다. 애가 다 알고 있구나. 감이 오더라고. 그래서 너무 무서웠다. 엄마를 원망하면 어쩌나. 그런데 아무 말 않더라고. 너는 항상 큰 문제가 생겨도 아무 말도 안 했지. 초등학생 때 도시락 때도 그렇고. 나도 엄마라고 아들 딸 얼굴에 문제가 생기면 그게 읽혔지. 그런데 이번엔 못 묻겠더라고. 무슨 일 있는 걸 뻔히 알아서 그걸 못 묻겠더라고. 전화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릴 정도로.. 엄마가 무서워서, 네가 날 싫어 할까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다... 미안하다...미안하다...다 내 잘못이다...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나는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어느 새 눈물이 나와 엄마의 옷깃과 이불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할 말을 찾질 못했는데 엄마도 마찬가지였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계셨다.
"엄마...나 힘들었어요... 정말 힘들었어.."
엄마는 다 안다는 듯이 당신도 우시면서 나를 토닥여 주었다. 서른 살의 딸은 엄마 품으로 들어가 세 살 아이가 된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엄마.. 나 여기서 살 까봐..다 그만두고..돌아가면 다시 남편 봐야하고..힘들어.."
깜깜한 밤이었는데도 익숙해지자 제법 사물이 보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니."
"그냥 내가 아무리 말 해도 듣지도 않고... 반찬 해 놓은 거 먹지도 않고 시켜먹고 말고...그거 치우는 건 또 내 몫이고.. 양말도 거꾸로 벗어놓고..서로 요즘 싸웠다고 말도 안 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엄마는 울다가 쿡쿡 웃었다.
"내가 한동안 하던 잔소리를 네가 이번엔 남편에게 하고 있구나..아가. 너는 고 서방 엄마가 아니야. 네가 엄마가 될 존재는 따로 있단다. 해 줄 것과 안 해 줄 것은 분명히 해라. 해 주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고 네가 생각했을 때 네가 할 일이 아니라면 하지 마라. 그리고 많은 대화를 하렴. 사실 3년 전에 너희 아버지가 한 번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 정말 미워하던 사람인데도 많이 늙고 지친 모습이 안타깝더라. 손은 다 거칠어지고 앙상할 만큼 말라서는... 아무 말 않고 식사 차려서 대접하니 한 술 뜨면서 한 번 울고 한 술 뜨면서 한 번 울더라. 그러고는 몇 만원이나 내고 가더라고.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많은 게 느껴졌었다. 그렇지만 너는 그러지 마라. 우리도 한 때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점점 익숙해지고 모든 걸 안다는 이유로 말을 줄인 것이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결과가 되었어. 10년 만났다고 해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 생각도 모르겠는데 다른 곳에서 20년 동안 산 사람을 어떻게 말도 안하고 이해하겠니..내일 가서 고 서방이랑 이야기 하거라. 남자 무서워하던 네가 괜찮다고 한 남자야. 운명이라 생각해서 엄마는 반대도 하지 않았다..고 서방도 많이 후회하고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
"그럼. 그러니까 푹 자렴."
"엄마.."
"응?"
"사랑해.. 고마워."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에 물든 투박한 손이었지만 부드럽고 조심스런 손길에 꾸벅꾸벅 잠이 왔다. 엄마는 그렇게 내가 잠 들 때까지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현아!"
"정신이 들어? 간호사! 여기 깨어났어요!"
"아가씨! 저 알아보겠어요?"
시끄럽게 말하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힘겹게 눈을 뜨니 한 쪽 눈은 캄캄하다. 왼 쪽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날 보는 남편.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으켜지지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났어. 집 앞에 횡단보도에서.. 엠뷸런스 소리에 혹시나 싶어서 나왔는데..네가 신은 신발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남편.
아아 그래서 발이 아프지가 않았나. 간호사 몇 명과 의사가 오더니 말한다.
"송지현씨 기분이 좀 어떠세요. 어디가 아프신가요?"
"저..괜찮아요."
"이틀 전 오후 10시 경 교통사고가 났어요. 트럭에 치여서 한동안은 위험할 뻔했는데 지금은 환자분이랑 아이 모두 건강한 상태입니다."
"아이요?"
"네, 8주 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그 정도 충격이면 유산되기도 하는데 아이가 정말 태어나고 싶었나 봐요."
생각지도 못 한 선물에 벙 찐 나는 의사가 가고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오빠 부부네를 보았다.
"오빠..."
"응 왜? 어디 불편해?"
"엄마가..미안하대. 그 때 겨울날에 세워둬서..자기가 을이라고 오빠도 을로 만들려고 해서 가슴에 멍울이 져서 잊혀 지지가 않았대..."
멍하니 못 박힌 듯 있는 오빠.
아직도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 몽롱한 와중에 엄마가 생각났다. 3년 전 돌아가신 엄마. 장례식에 찾아온 아버지. 여기가 어디라고 왔냐고 화내는 오빠를 말리고 무엇에 홀린 듯 식사도 대접했던 나. 그래..엄마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해 줄 때부터 알았다. 그래서 돌아오고 싶지가 않았는데.
"고수현.."
오랜만에 불러보는 남편의 이름.
"응 지현아. 지현아..죽는 줄 알았어...내가 널 죽인 줄 알았어..사랑해..정말 사랑해.."
이름 한 번 불렀다고 눈물 콧물 쏙 빼며 다가오는 남편. 잠을 한 숨도 못 잔건지 피부가 꺼칠하고 눈이 빨갛다. 나는 웃으며 멀쩡한 손으로 남편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반찬 좀 먹고 양말도 똑바로 벗어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남편. 울다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남편의 얼굴이 너무 웃겨서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치킨...나도 좋아해. 시킬 때 꼭 나한테 물어보고 시켜줘.."
"응..응.."
내 중얼거림을 모두 들어주는 남편.
밤이었던 하루는 지나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햇살이 밝은 날이었다.
"선주야! 그러면 안된댔지!"
까르륵 거리며 집 안을 뜀박질하는 아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목소리를 높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목욕을 끝내고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리려는 차에 뛰쳐나가더니 집 안을 돌아다닌다. 덜 마른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이 젖는다. 잡으려고 돌아다니는데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달려가서 안기는 딸아이와 아이를 안아들며 환하게 웃는 남편.
"다녀왔어."
아이를 내려놓고 나에게 와 나를 안아주며 내 볼에, 그리고 부풀어 있는 내 배에 입맞춘다. 교통사고가 난지 벌써 4년 전, 남편과 나는 상의 끝에 둘째를 가졌다. 다음 달이면 예정일이라 제법 부푼 배에 힘겹게 소파에 앉았다. 그 때 퇴원 후 남편에게 내가 세살 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남편은 조용히 듣다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나의 사랑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서로 많이 대화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자 아예 안 싸우진 못 하지만 사이좋게 싸우고 사이좋게 화해하게 되었다.
씻고 나와 소파에 앉은 남편에게 씻은 사이 배달 온 치킨을 내밀었다. 남편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난 요즘 당신 요리가 제일 맛 있다구~"
나는 웃으며 내일 저녁을 기대하라고 말했다. 15평 남짓한 방 안에 행복과 웃음소리가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