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기억

by 키싸일 posted Jul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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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름기억

주제: 짧은 기간동안의 기억으로 물든 청춘


오늘은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현우는 20살이 되어 충북에 있는 한 국립 대학교에 입학했다. 아직 푸른 열매처럼 생긋하고 어떠한 나무가 될지 모르는 새싹 같은 스무 살 대학 새내기 시절의 절반이 지나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4개월은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학생이 되니 4개월이란 기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다음날의 컨디션은 포기해야 할 만큼 술도 마셔보며 즐거운 대학생활이 잠시 휴식기에 접어든 것이다. 대학생으로서 첫 방학을 맞이한 현우는 성인이 되었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방학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현우의 고모와 고모부가 운영하시는 편의점에서 평일 오전9시부터 오후9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현우의 고모부는 현우에게 일을 가르쳐 주셨고 현우는 방학을 시작한지 딱 일주일째가 된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라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추석연휴에 휴게소에서 3일 동안 했던 설거지가 전부인 현우에게는 처음 해보는 아르바이트가 어색하고 12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기도 했지만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뿌듯해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르바이트 첫날, 평일이라 그런지 편의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현우가 긴 아르바이트에 지쳐갈 무렵 현우의 또래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노을 진 풍경과 함께 편의점에 들어와서는 불고기 삼각 김밥 한 개와 매운 컵라면 한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익숙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정확히 23백 원을 꺼내어 현우에게 건넸다. 긴 머리에 억지로 눌러쓴 것 같은 까만색 모자, 그리고 자기 사이즈 보다 두 치수는 커 보이는 회색 후드티를 입고 나타난 여학생이 편의점 밖으로 나간 뒤에도 현우에 머릿속에는 그 여학생이 계속 맴돌았다. ‘말이라도 걸어볼걸…….’ 눈에 뛸 만큼 예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현우는 그 여학생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딸랑거리던 문에 달린 종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몰입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현우는 다음에 또 그 여학생이 온다면 무조건 말이라도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그런 현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다음날 똑같은 시간에 그 여학생이 편의점에 들어와서 불고기 삼각 김밥과 매운 컵라면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정확히 23백 원을 현우에게 건넸다. 현우는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부끄러움에 안녕히 가시라는 기초적인 인사도 못한 채로 그 여학생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현우는 숫기 없는 자신을 한탄했지만 한편으론 내일도 그 여학생이 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김없이 다음날이 밝았고, 현우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최대한 깔끔한 옷차림으로 기분 좋게 편의점으로 간다. 편의점 안에선 직원조끼를 반드시 입어야 하는 데도 말이다. 현우는 매일 그 여학생이 오는 오후 740분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여학생이 즐겨먹는 컵라면을 잘 보이는 곳으로 슬쩍 밀어놓았다. 그렇게 현우가 학수고대하던 740분이 되었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여학생이 들어왔다. 굳은 다짐을 한 현우는 밝은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라고 소리쳤고 예상보다 큰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에 살짝 놀랐지만 다행히 여학생은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여학생은 익숙하게 삼각 김밥과 매운 컵라면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오늘은 불고기 맛이 아닌 제육볶음 맛이었다. 현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불고기 맛이 아닌 제육볶음 맛을 드시네요.”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현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몰라 부끄러움에 얼굴이 상기 되었고 여학생도 살짝 당황한 것 같은 말투로 900원 짜리면 아무거나 먹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여학생과의 세 번째 짧은 만남도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던 한 마디가 두 사람을 친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하루는 여학생의 나이, 하루는 이름, 하루는 사는 곳을, 심지어 일주일 후에는 여학생이 왜 편의점에 정해진 시간마다 매일 오는 것인지 까지 현우는 알게 되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은 김나연이었고 나이는 현우와 같은 20살이었다. 나연은 미대 입시생이었지만 재수를 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충남 홍성에 사시고 나연 혼자 미술학원을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고시촌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연은 매일 아침을 고시촌에서 제공하는 밥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저녁은 직접 해먹어야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산책도 할 겸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사러 학원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연과 현우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거의 8시가 다 돼서야 모습을 드러낸 나연에게 현우가 물었다. “오늘 학원에서 시험 비슷한걸 봐서 쫌 늦게 끝났어.” “잘 봤어?” 현우가 물었고 거의 모든 시험 잘 봤냐.’는 질문에 나오는 대답이 들려왔다. “긴장을 해가지고…….”잘 못 봤다는 대답이었다. 현우는 용기내서 시험 못 본 기념으로 내가 주말에 밥이나 사줄까?”라고 또 한 번의 어이없는 말을 던졌다. 나연은 설마 진짜로 사주겠어?’라는 마음으로 그래 언제든지 연락해!”라는 형식적인 말을 남겼지만 현우에게는 허울뿐인 말이 아니었다. 현우는 다시 한 번 용기 내어 나연의 번호를 물어보았고 현우와 나연은 그렇게 서로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현우와 나연은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현우는 실컷 늦잠이나 자고 오후에 슬금슬금 기어 나와 소파에 누워 하릴없이 tv만 시청하고 있었을 토요일이지만 이번 토요일을 나연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고 옷차림도 신경 써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나연은 평소처럼 평범한 복장으로 약속장소에 나왔지만 현우의 정신을 황홀하게 만들 기엔 충분했다. 음식을 주문하던 나연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끝내 현우는 나연에게 밥을 사주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현우와 나연은 서로 더욱 친해진 것 같았고 나연에대한 현우의 마음도 확실해져갔다. 현우는 내친김에 영화도 보자고 제안했고 나연도 주말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흔쾌히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 현우와 나연은 못 다한 얘기들을 나누며 같이 걸었다. 마치 여느 연인 같이 하루를 보낸 나연과 현우는 저녁이 되어 나연의 고시촌까지 현우가 대려다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고 나연은 현우에게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엔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연락을 먼저 했다. 그날을 계기로 현우와 나연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락하며 저녁 740분에는 편의점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나연도 자신을 웃게 해주고 힘든 일이 생긴다면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현우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같이 현우가 기다리던 740분이 되었고 변함없이 나연이 들어왔지만 오늘은 나연과 함께 처음 보는 남학생이 들어왔다. 나연은 그 남학생을 이름은 박성훈이고 미술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구고 역시 재수생이라고 웃으며 현우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현우는 무언가 속에서 화가 나지만 마땅히 화를 낼 연유가 없기에 잠자코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훈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서 지켜보았다. 현우는 성훈에게 왜 집근처 편의점까지 따라온 것인지, 집을 들렸을 텐데 왜 지금 같이 있는 것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나연은 평소처럼 컵라면 한 개와 삼각 김밥 한 개만을 계산대에 올려놓았고 성훈이라는 친구는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간 후 현우는 삼십분을 혼자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나연에게 잘 들어갔는지, 오늘은 학원이 언제 끝났는지 등을 물어보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어 했다. 현우는 결국 학원이 조금 늦게 끝나서 집은 들리지 않았고 마침 현우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근처에 살았던 성훈이라는 친구가 나연에게 화구박스를 빌려주어서 그 것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는 결론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시름 놓은 현우는 문득 자신이 나연을 이렇게까지 좋아한다는 것에 놀랐다. 처음엔 단순한 감정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현우가 나연의 옆에 서있는 성훈을 보고 느낀 것은 현우가 나연을 엄청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현우는 겁이 나지만 나연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다음날 편의점에서 현우는 나연에게 이번 주 주말에 저번에 사주기로 했던 밥이나 사줘.”라고 말했고, 나연은 그럴까? 주말에 할 것도 없어서 난 좋지!”라고 대답했다. 어느덧 방학도 한 달이 넘어가며 하늘엔 완연한 여름이 와버린 7월 초에 현우와 나연은 약속했던 음식점에서 만난다. 현우는 고백할 생각에 긴장을 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보던 나연이 걱정스런 말투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안색이 말이 아니야.” 라고 현우에게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우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나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버렸다. 나연은 크게 당황하며 우물쭈물 거렸다. 나연도 눈치가 있는지라 현우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고백을 해올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연의 맘속에는 당혹감이 컸지만 내심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나연은 현우에게 입시준비 때문에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좀 힘들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라고 물었고 현우는 그냥 지금처럼 평일엔 편의점에서 잠깐보고 주말엔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하면 되지 난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 현우의 말투에는 진심이 묻어나있었다. 나연은 그 진심을 느꼈고 현우와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우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나연도 그런 현우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연인으로써 처음 경험하는 데이트를 현우와 나연은 마음껏 즐겼다. 둘은 서로 나연이 편의점에 성훈을 데리고 왔을 때 현우의 감정이라든지 지금껏 말 못했던 속마음들을 다 얘기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 즈음 현우는 전처럼 나연의 고시촌까지 나연을 대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하늘이 완전 어두워져서야 현우의 집에 도착했다. 그날 밤 현우와 나연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메신저 이름 옆에 하트를 붙여놓았다. 둘은 문자 하나하나에도 온 신경을 다 쓰면서 조심스럽게 보내고 문자 하나하나에 너무 좋아 몸을 배배 꼬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평일은 편의점에서 주말엔 밖에서 만나며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나연은 조심스레 나연의 고시촌에 현우를 초대한다. 현우와 나연은 나연의 방에서 배달음식도 시켜먹고 웃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절대 들리면 안 되는 소리가 나연과 현우의 귀에 들리는데 그 소리는 바로 시골에서 나연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러 오신 부모님이 나연의 방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였다. 나연의 부모님은 나연이 미술을 하는 것을 너무 좋아 하셔서 적극적으로 밀어 주시지만 나연이 홀로 타지에서 생활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셨다. ‘------띠리링이 소리가 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나연과 현우에게는 마치 엿가락 늘리듯이 몇 배로 늘어져서 들렸을 것이다. 나연의 방은 워낙 좁아서 현우가 숨을 곳도 없고, 설령 넓었다 한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숨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연의 부모님이 방에 들어오셨고 딸의 방에서 같이 앉아있는 현우를 보자마자 너무 놀라신 나머지 나연에게 주려고 가져오신 밑반찬들이 나연의 어머니의 손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연의 부모님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나연의 방 신발장에 뻣뻣하게 서계셨다. 나연은 심하게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멍하니 앉아있었고 현우의 머릿속에는 큰일이 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 십분 후에 현우는 나연의 아버지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고 나연은 황급히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냥 놀러 온 거야. 와서 그냥 치킨 시켜먹고 앉아서 얘기 조금 한 거뿐이야. 진짜야.” 하지만 나연이 아무리 부모님에게 해명해도 부모님은 나연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신 채 잔뜩 화가 나신 얼굴로 나연의 짐을 쌌다. 짐을 싸시는 동안 부모님이 나연에게 하신 말씀은 이제부터 저 놈 만나지도 말고 집에서 학원 다니 거라.”라는 명령 하나였다. 나연은 부모님에게 울고불고 때를 써봤지만 엄하신 부모님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았고, 결국 부모님은 나연을 홍성에 있는 집으로 대리고 가셨다. 그나마 나연이 울고불고 때를 썼기에 휴대폰을 정지시키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현우는 나연의 아버지에 의해 쫓겨난 직후 나연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나연은 당연히 받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현우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며 나연에게 수십 통의 메시지를 남겨놓는다. 나연 또한 어쩔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연은 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집에 도착할 때까지 현우에게 답장을 하지 못하였고, 현우의 속은 타들어 가기만했다.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나연은 시골집에 도착했고, 서둘러 현우에게 답장을 하였다. 문자의 내용은 대략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오신 거라 나연도 몰랐고 이제는 학원을 집에서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우는 나연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없다는 것도 막막했지만 나연이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매일 오갈 것을 상상하니 왠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나연은 현우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는 했지만 막막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주말이 지나갔고 월요일이 되어 나연은 어색하지만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서울까지 가는 두 시간은 나연에게 엄청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나마 학원 수업이 오후 3시부터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동틀 무렵에 집에서 나오는 불상사가 생길 뻔했다. 동서울터미널이 학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는 것에 이렇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곤 나연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연과 마찬가지로 현우도 지옥 같았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오후 740분을 오매불망 기다리면서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했을 아르바이트인데 오늘은 시간이 풀잎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마냥 느릿느릿했고 건전지가 부족한지 잘 돌아가지 않는 시계바늘이 원망스러웠다. 한없이 달콤하고 행복했던 나연과의 문자도 9회 말 투아웃 10점을 뒤지며 패할 것을 알고 있는 야구팀처럼 축축 처지고 맥이 없었다. 하지만 병약하게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오후 715분을 가리키던 그 때 편의점 문에 달린 종소리에 현우는 고개를 돌렸고 그 소리를 만들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나연이었다. 나연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미소를 띠며 현우에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컵라면 한 개와 삼각 김밥 한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정확하게 23백 원을 현우에게 건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연은 현우에게 컵라면, 삼각 김밥과 23백 원 대신 일부러 골려주려고 연락도 없이 왔다는 말과 함께 부모님이 화가 많이 나셔서 학원이 끝나 버스를 타고 올 시간이 다되어도 오지 않으면 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한 마디를 건넸다. 현우는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는 것을 느꼈고, 아쉬운 마음을 달랠 틈도 없이 나연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730분 버스를 타야만 하는 나연은 홍성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8시가 되어도 아직 어둡지 않았다. 버스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탓에 쪽잠도 자지 못한 채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두 시간이 흘러갔고 집에 도착한 나연은 긴 거리를 처음 왕복한 것이 피곤했는지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 현우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씁쓸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어김없이 나연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의 문이 나연 앞에 열렸고, 나연은 그 문이 마치 상어의 입처럼 느껴질 만큼 버스에 오르는 것이 힘들었다. 버스창가 쪽에 자리 잡은 나연은 버스가 출발 하자마자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핸드폰에 있는 노래를 틀었다. 노래가 많기 때문에 랜덤재생으로 설정해놓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핸드폰도 나연의 기분을 아는지 우울하고 우중충한 노래들만 이어폰을 타고 나연의 두 귀에 꽂혔다. 나연은 기분전환을 위해 신나는 노래들만 재생 했지만 행복한 가사나 신나는 멜로디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꾸역꾸역 시간은 흘러갔고 드디어 나연은 학원에 도착했다. 나연은 평상시처럼 자리에 앉았지만 친구들이 나연을 보는 눈빛은 사뭇 달라져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나연은 학원에서 제일 친한 하정에게 학원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하정으로부터 들려온 대답은 나연이 상상도 못했을 뿐더러 나연의 억장이 무너지는 한 마디였다.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보려했는데 네가 저녁마다 맨날 어떤 남자랑 숙박업소 같은 곳에 들락날락 거리다가 너희 아버지한테 걸려서 집으로 끌려간 거라는데 진짜야?” 나연은 이 얘기를 듣자마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무엇을 어디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나연이 살던 고시촌 바로 앞에는 오래된 모텔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가 현우가 끌려 나가는 것을 본 것이고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밖에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저녁마다 간다는 소리는 어디서 나온 것이며 누가 이런 사실무근한 헛소문을 퍼뜨린 것인지에 대해 나연은 강한 의문이 생겼다. 평소에 치열한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학원에서 친하게 지낸 사람은 하정과 성훈밖에 없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냉소적인 이미지였던 나연은 평소에 자기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란 점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런 뜬소문을 퍼트리면서까지 나연을 괴롭히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연은 하정에게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라고 묻자, 하정은 학원 홈페이지에 어떤 사람이 사진을 올렸더라고. 나도 누군지 엄청 궁금해.”라고 답하며 헛소문 맞지?”라며 나연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연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갔고 그 곳에는 나연과 나연의 아버지, 그리고 모텔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우의 사진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나연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에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이 끝나자마자 홈페이지 관리를 담당하시는 선생님에게 가서 사진을 내려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나연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을 바로 지워 주셨다. 나연은 어제처럼 학원에서 바로 현우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현우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 하고 싶었지만 굳은 표정의 현우를 보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우도 표정이 좋지 않은 나연을 보니 마음이 더욱 안 좋았다. 야속하게도 어제처럼 나연이 버스를 타야하는 시간이 돌아오고 말았다. 현우가 보는 나연의 뒷모습은 왠지 어제의 그 것보다 더욱 쓸쓸해 보였고 현우는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더욱 자신을 책망했다. 그렇게 나연을 보낸 현우는 나연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싸맸다. 이젠 현우와 나연의 메신저 대화방에서 예전의 활기와 달콤함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연과 현우, 둘 모두에게 마치 커다란 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나연은 다시 동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심한 버스바퀴는 나연이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쉼 없이 달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나연을 동서울로 대려다 주었다. 나연은 시간이 남아서 현우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편의점에 골목하나 남겨두고 성훈을 만났다. 나연은 과연 성훈이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하지만 현우는 나연을 보자마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나연을 반겨주었다. 나연은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현우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직 수업하려면 시간 많이 남았는데 벌써 학원가는 거야?”나연이 물었고, “오늘 쫌 일찍 나왔네. 넌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 오늘 버스가 일찍 도착해서.” “버스라니? 너 근처에 살지 않아?” 성훈은 나연에게 물었고, 그제야 나연은 성훈이 어떻게 나연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연과 성훈은 자연스럽게 근처 놀이터 벤치로 가서 얘기를 나누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나연이었다. “나 사실 고시촌에서 안 살고 집에서 다녀.” “? 이제 학원 옮기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조심스럽게 나연은 성훈에게 모든 일들을 설명 해주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진짜 한심한 사람이다. 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지?” 나연의 말은 들은 성훈은 화를 내며 나연의 편을 들어주었다. 나연은 화를 내는 성훈을 보니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하정과 성훈만큼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 어차피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인데 내가 백날 떠들어봐야 믿지도 않을 거고 이상한 애들한테 해명하고 싶지도 않다.’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무너진 정신을 추슬렀다. 한참을 떠들다 보니 현우에게 가기는커녕 학원 수업을 제시간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간당간당한 시간이 되었다. 서둘러 학원으로 간 나연과 성훈은 다행히 수업엔 늦지 않았고, 학원이 끝날 시간이 되어 나연은 뭔가 아까 현우에게 가지 못한 것이 걸려서 서둘러 학원을 빠져나왔다. 나연이 다니는 학원에서 편의점으로 가려면 한 사거리를 지나쳐서 가야하는데 나연이 사거리를 건너려고 하자 누군가 학원 문 앞에서 소리쳤다. “나연아!” 나연은 즉시 뒤를 돌아보았고 소리의 진원지에는 현우가 서있었다. 나연은 현우에게 가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보았고 현우는 고모한테 부탁드려서 이제부터 오후 630분까지만 일하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라고 물었고 현우는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너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이제부터 너 학원 끝나면 버스 탈 때까지 너랑 같이 있으려고.” 나연은 현우에게 가지고 있었던 이유모를 섭섭함이 싹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나연과 현우는 홍성으로 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함께 있었다, 나연이 버스에 타자마자 현우는 나연에게 문자를 보냈고 나연도 이에 맞추어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나연과 현우사이에 조금은 예전 같은 분위기가 생겼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나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커다란 벽이 허물어질 수도 있는 기미가 생기는 듯했다. 비교적 밝은 기운이 돌던 하루가 지나갔고 한없이 돌아가는 쳇바퀴같이 나연은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고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나연이 버스로 학원을 가는 것이 일주일 하고도 나흘 차에 접어들던 8월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도 나연은 좀처럼 이런 생활이 익숙해지지 않았고 고문당하듯 버스에 몸을 실고 가고 있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학원에 들어서자 하정이 나연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다른 아이들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해가더니 신나게 떠들어댔다. 언제 친해졌는지 엄청 친해보였고 나연은 하정에게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아마 하정이 나연을 보던 그 눈빛 때문일 것이다. 나연은 요즘 들어서 학원에서 하정보다는 성훈과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차라 더욱 섭섭함을 느꼈다. 그래도 일주일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을 나연은 위안 삼았다. 그러나 나연이 걱정하던 그 일이라는 것은 그날 학원이 끝나고 터졌다. 나연이 학원 수업을 마치고 현우를 만나러 가려하는데 하정이 갑자기 나연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그래도 난 너를 믿었는데 네가 진짜 이런 애 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망이 큰 것도 큰 건데 지금까지 너 같은 애랑 친하게 지냈다는 것도 창피할 지경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들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하정이 말하는 우리란 나연이 친해지지 못했던 학원 아이들이었다. 나연은 갑작스러운 하정의 행동에 놀라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정아, 무슨 말을 어디서 어떻게 듣고 온 거야.”라고 물었고 그러자 하정은 화를 꾹꾹 참고 있다는 것을 온 얼굴에 내비치며 나연에게 말했다.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너 남자친구 있으면서 성훈이한테도 꼬리 치더라.” 이 말을 들은 나연은 저번과는 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나연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 일주일동안 나연은 태풍의 눈에 있었던 것이고 나연에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성훈을 꾀려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변모한 것이다. 나연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연과 가장 친했던 하정이라는 사실에 크게 낙담하며 서서히 허물어질 기미가 보이던 마음의 벽이 더욱 견고하게 재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연은 이 일을 현우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현우에게는 오늘 급하게 집에 가야해서 학원에서도 일찍 나왔다고 거짓말을 한 후에 혼자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학원에서부터 성훈은 나연을 뒤따라서 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성훈의 걱정대로 나연은 화장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성훈은 황급히 나연에게 가서 나연을 토닥여주면서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이상한 소문에 자꾸 휩싸이는 것 같다. 정말 미안해.”라며 나연을 위로해주었다. 나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울고만 있었다. 나연은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인지, 자신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너무 원망스러웠다. 현우는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나연이 걱정 돼서 나연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나연은 받을 수가 없었고,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현우는 터미널에서 나연을 샅샅이 찾아보다가 저 멀리 성훈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나연을 발견하게 된다. 나연이 다른 남자에게 안겨있다는 것, 그 남자가 저번에 본 성훈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연이 울고 있다는 것이 현우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현우는 나연에게 달려가서 왜 울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나연이 대답을 못하자 현우는 성훈을 대신 대답해 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성훈은 일단 내가 나연이를 안고 있었던 것은 정말 미안하지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라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나연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현우에게 설명해주었다. 현우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지금까지 나연이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730분이 되었고 혼나는 것도 혼나는 것이지만 막차이기 때문에 나연은 버스에 올라야만했다. 현우는 나연이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현우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지금 나연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나연은 학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현우에게도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좀 쉬어야겠다는 문자 한 통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현우는 나연이 실제로 몸이 안 좋은 것이 아님을 알기에 걱정 되지만 나연의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나연은 학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현우와는 간간히 연락은 했지만 나연이 현우를 대하는 태도는 많이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나연의 머리는 현우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심하게는 현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힘든데 정작 현우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나연은 학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에 학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 나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정을 비롯한 학원 아이들과의 오해를 푸는 것, 현우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아닌 나연의 입시결과였다. 그만큼 현우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연은 현우에게 실기 준비를 빠듯하게 해야 해서 이제 잠깐씩 만나는 것도 어려우니 일부러 학원까지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나연의 마음을 알기에 현우도 그에 수긍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현우와 나연은 서로 공식적인 선언만 안 했을 뿐 거의 이별한 모습을 한 채로 미적지근하다 못해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봄의 끝자락에서 시작한 현우의 방학은 1주 남짓 밖에 남지 않아 이제 매미가 쩌렁쩌렁 우는 8월의 후반부였다. 현우는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나연의 마음이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나연에게 어쩌면 남자친구로서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르는 선물을 사주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사줄지 고민하다가 약 두 달 전에 나연이 성훈에게 화구박스를 빌렸다는 것이 생각나서 나연의 낡은 화구박스 대신 새로운 화구박스를 사기로 결심했다. 현우는 인터넷을 한참 찾아보다가 나연에게 선물하기에 적절한 화구박스를 발견하고 주문을 하려는데 만나서 주기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나연의 집으로 주문을 했다. 현우의 진심을 담은 편지도 한통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배송이 언제 될지, 또 배송이 되는 날에 현우와 나연의 사이는 어떻게 바뀌어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앞뒤 재지 않고 그냥 주문을 했다. 그와 동시에 나연은 학원에서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으며 입시에만 집중하며 열심히 그림만을 그려나갔다. 성훈은 그러한 나연의 모습을 보며 나연에게 다가가 보지만 나연은 또 다른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어서 성훈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보니 현우에게도 조심스러워 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연은 자신이 현우에게조차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현우의 얼굴을 웃으면서 볼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현우와 나연과의 관계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질 때 즈음 현우의 길지만 짧았던 또 짧지만 길었던 여름방학이 끝났다. 현우는 학교를 가기위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고 나연은 현우가 방학을 하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자취를 하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꼈고 이제 통학하는 것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냥 홍성에서 계속 다니기로 했다.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달콤한 데이트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인데다 몸까지 멀어지니 나연과 현우는 그나마 하던 형식적인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나연은 잘못이 없는 현우에게, 현우는 자신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가는 나연에게 미안함을 느끼지만 이미 둘 모두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은 아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이별을 고 할 수 없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연은 입시에, 현우는 학업에 조금이라도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1주일 2주일 그러다 한 달이 흘러갔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연과 현우 모두에게 서로를 마음에서 2순위로 밀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나연은 자연스럽게 다시 성훈과도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성훈은 가끔씩 현우를 대신해서 나연을 학원에서 버스터미널로 대려다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덧 11월이 다가왔다. 어쩌다 학원이 조금 일찍 끝난 날이었고, 성훈은 나연에게 밥을 같이 먹을 것을 제안하며 나연과 성훈은 밥을 먹으려 한 음식점에 갔다. 한참을 떠들며 밥을 먹고 있던 성훈은 조심스럽게 나연에게 나 사실은 1년 전부터 너를 혼자 좋아하고 있었어, 근데 너한테 남자친구가 생겨버려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요즘 남자친구랑 연락도 잘 안하는 것 같고, 지금 아니면 이런 말도 못하고 너 대학 가는 거 보고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말하기로 결심 한 거야, 지금 나랑 사귀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둘 모두 실기가 끝날 때 나랑 만나줄 수 있어?”라고 말했고, 나연은 매우 당황하며 긴 고민 끝에미안한데 나는 너랑 이런 상태로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야 아무리 내가 현우랑 연락은 잘 안한다 해도 아직 우리는 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너의 말은 못들은 걸로 했으면 해.”라며 성훈의 고백을 거절했다. 성훈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고 서둘러 음식점을 나갔다. 나연은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성훈을 이제 편하게 못 대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나연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버스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현우와의 관계를 매듭 짓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되어서 힘겨운 고민 끝에 현우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현우는 예상은 했지만 그 말을 듣자 힘겨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로는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긴 했지만 크나큰 근심에 빠진 현우는 문득 자신이 여름방학에 선물한 화구박스가 떠올랐다. 나연의 집에 배송되고도 한참이 흘렀을 것인데 나연은 선물에 대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무언가 잘못된 것을 인지한 현우는 서둘러 화구박스를 구매한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우가 주문한 내역을 보니 현우가 입력한 주소가 나연의 주소와 달랐던 것이고 다행히 잘못 입력한 주소에 사는 사람이 반송을 했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리고 내려가 보니 아파트 반송함에 현우가 나연에게 쓴 편지도 반송되어있었다. 현우는 이것을 다시 보내야 하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원래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기에 다시 정확한 주소로 배송을 했다. 배송 할 주소를 입력하는 현우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현우는 느꼈다. 아마도 아직은 나연과의 이별이 실감나지 않고 이것을 받은 나연의 마음이 어떠할 지가 불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현우와 나연의 시들시들했던 4개월간의 연애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헤어진 다음날도 나연은 어김없이 버스에 올랐다. 당장이라도 현우에게 나 지금 버스 탔어.’라고 메시지를 날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시리고 허전한 마음으로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 도착했을 때 나연은 성훈의 모습을 보자마자 현우만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님에 속으로 탄식을 했다. 성훈은 나연의 예상처럼 나연의 눈조차 바라보지 않았고, 나연이 먼저 말을 걸어 보아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나연은 창피하고 속상한 건 알겠는데 무시까지 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연도 기분이 상했고 성훈에게 일부러 말을 거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드디어 어색했던 학원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싸서 나가려는데 학원 선생님이 조용히 나연을 불렀다. 선생님은 나연을 아무도 없는 학원 창고로 데려갔고 조심스럽게 나연에게 물어보았다. “나연아, 혹시 성훈이랑 무슨 일 있었니?” 나연은 조금은 놀라며 대답했다. “왜요? 성훈이가 무슨 말 했어요?” “무슨 말을 했다는 거 보다는 성훈이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서.” “성훈이가 뭐 어쨌는데요?” “그게 말이야.......저번에 너랑 하정이랑 학원에서 언성 높인 적이 있잖니, 근데 그 때 성훈이가 황급히 어디로 달려가기에 선생님이 따라가 봤는데 화장실 앞에 앉아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엄청 웃고 있더라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혼자서 네 이름을 부르면서 심하게 욕을 하고 있더구나, 선생님이 뭐하는 짓이냐고 꾸지람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냥 자리로 돌아가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번에 올라온 네 사진은 지웠지만 홈페이지 관리자만 볼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어서 관리자아이디로 사진과 글을 비공개로 올린 사람을 추적해보니 그게 성훈이 동생 아이디더구나. 너는 알고 있었어?” 그 말을 들은 나연은 밀려오는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성훈이 사는 집 앞으로 가서 할 말이 있으니 당장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십분 후에 성훈은 모습을 드러냈고, 나연은 성훈을 보자마자 말했다. “야 박성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 이상한 뜬소문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네가 가장 가까이서 봐왔는데 알고 보니까 그 글하고 사진 네가 올린 거였네 그런 뜬소문은 왜 퍼뜨린 거고, 또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놓고 어떻게 나한테는 모른 척 연기 하면서 심지어 좋아한다는 말까지 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나연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성훈의 낯빛은 점점 창백해지고 눈은 커져갔다. 나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훈은 나연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말했듯이 난 너를 1년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어, 근데 너한테 남자친구가 생겨서 상실감이 너무 컸는데 그 남자애를 너희 집 앞에서 그것도 씩씩거리시는 아버지 앞에 있는 모습을 보니까 눈이 뒤집히더라고, 나는 아직 네 손도 못 잡아봤는데 저놈은 도대체 뭔데 너희 집까지 들락날락 하는 건지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렇게라도 하면 네가 그놈이랑 헤어질 줄 알았어. 미안해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정말 몰랐어.” 아무리 성훈이 빌어도 나연은 성훈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나연은 성훈에게 하루빨리 글을 올리든 직접 말하든 모든 것이 네가 지어낸 헛소문이라는 것을 밝혀. 그리고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으로 향했다. 결국 성훈은 실기가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학원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나연은 버스에 타고는 지금까지 성훈이 한 행동이 분하고 억울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도착한 나연은 한 달도 남지 않은 실기 준비에 몰두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성훈은 일주일 후 학원 홈페이지에 긴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은 나연이 원하는 내용이었고 마지막에는 학원을 옮길 것이라 이젠 더 이상 얼굴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날 학원 아이들은 모두 성훈이 얘기 밖에 하지 않았고 적잖이 놀란 듯했다. 정작 나연은 무덤덤하게 있었고 그 때문에 아이들은 섣불리 나연에게 말을 걸지 못 하였다. 그렇게 조용한 하루를 보낸 나연을 집에 오자마자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상자 한 개와 한 통의 편지였다. 상자 안에는 현우가 선물한 화구박스가 들어있었고 편지의 내용은 현우와 나연이 사귀고 있을 당시의 현우의 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있었다. 나연은 편지를 읽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화구박스를 보는 순간 현우에게 갖고 있던 미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연이 가지고 있는 성훈에 대한 분노와 현우에 대한 그리움이 반비례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연은 지금 다시 현우를 만난다면 현우에게 너무 미안하고 자신의 실기를 정말 포기하는 길일 것 같은 생각에 현우에게 연락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 반대로 현우는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음에도 나연에게 연락이 없자 엄청 실망했다. 나연과 현우의 입장이 전과 조금은 바뀐 채로 현우는 겨울방학을 맞았다. 현우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고모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이제 현우의 마음속에서 나연이 차지하는 공간은 나연과는 반대로 매우 작아져 있었다. 한여름에 시작한 둘의 관계는 쓸쓸한 늦가을에 끝을 맺었지만 살 떨리게 추운 겨울까지 완벽한 매듭을 짓지 못하였다. 그렇게 어느덧 나연이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의 실기 날이 다가왔고, 꾹꾹 참았던 현우에 대한 마음을 드디어 현우에게 전달했다. ‘선물 정말로 고마워 네가 이렇게 나를 아꼈는지 모르고 내 처지에 대한 불평만 계속 했던 것 같아. 이제 학원에서의 오해는 다 풀린 상태고 실기는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연락을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지금 너도 방학이니까 실기가 끝나면 한 번 볼 수 있을까?’ 메시지를 본 현우는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두 번 세 번을 읽어보고 나서야 감출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나연은 차분히 실기시험에 응시했다. 실기를 보러 가는 나연의 머릿속에는 학원에서의 여러 가지 갈등, 현우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1년을 바친 것이기에 신중히 또 차분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실기를 보는 순간에는 그 무엇도 나연을 방해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진땀 흘린 실기시험이 끝이 났다. 아직 다른 학교가 한 군데 남아있긴 하지만 그 학교는 실기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 시험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연은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 해보았지만 현우에게 온 메시지는 한 통도 없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나연은 집 앞 골목에 있는 가로등 아래에 어떤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려 하는데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낯이 익은 모습이 나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던 것이다. 나연은 현우를 보고 화들짝 놀랐고 매우 기뻤다. 현우는 그날 오전 나연의 문자를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모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린 후에 무작정 나연의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현우의 기다림이 지쳐갈 무렵 저 멀리서 나연의 모습을 발견했고 막상 나연이 나타나니 어찌 할 줄을 몰라서 일단 나연이 눈치 챌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나연의 모습을 본 현우는 나연의 손에 들린 화구박스가 자신이 선물한 화구박스인 것을 확인 하곤 나연과 마찬가지로 놀랐고 매우 기뻤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 멀뚱멀뚱 처다만 보고 있었다. 현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실기는 잘보고 온 거야?” “딱히 긴장은 안했는데 모르겠어, 어떻게 될지.......” 이런 형식적인 대화로 시작해서 현우와 나연은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고, 결국 같은 마음임을 확인하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나연은 미안하다며 또 한 번의 눈물을 흘렸고, 현우는 내가 더 미안하다며 나연의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 주었다. 나연과 현우는 그렇게 다시 사귀게 되었고 매듭 짓지 못하고 있던 둘의 관계는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매듭지어졌다....... 아쉽게도 나연은 원하던 대학교에 붙지 못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3수를 선택했지만 나연의 옆에는 항상 현우가 있었다. 실용미술 쪽으로 방향을 돌린 나연은 결국 3수 끝에 충북의 한 국립 대학교 디자인과에 수석으로 입학 하게 되었다. 여기서 충북의 한 국립 대학교란 현우가 다니는 학교이다. 하지만, 그 기쁨을 현우와 나눌 순 없었는데 왜냐하면 현우는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우가 제대 후 복학 했을 때에는 복학생 현우도 2학년, 3수생 나연도 2학년으로 같은 학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우와 나연의 열정적이던 청춘은 단 한 번의 여름동안의 기억으로 물들여졌고 그 해 여름, 그토록 만화처럼 다사다난했던 현우와 나연의 이야기는 대다수의 만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