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왕 조만나씨

by 몽쉘 posted Aug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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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왕 조만나씨

 

 

 

 

1.

푹푹 찌는 한 여름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바람 한 점도 귀한 날씨 속에서 긴 와이셔츠에 긴 바지, 검정 구두를 신은 만나씨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다. 한 쪽 손에는 노트북 가방, 나머지 다른 한 쪽 손에는 이미 다 젖은 손수건이 들려있다. 걸을 때 마다 출렁이는 뱃살은 칭얼거리는 아기 한명쯤을 배에 업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도 성격 더러운 울보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그만 울어, . 옳지, 착하지. 아무리 달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더 요동치지만 말아줘. 속으로 그는 중얼거린다. 요란스러운 배 만큼이나 장도 허약하다. 땀에 젖은 바지 사이로 허벅지가 쓸린다. 슬슬 배도 아파오고 허벅지도 아려온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더욱 더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이런 여름 날 화장실은 반가지 않은 손님 같다. 까다롭게 상황이나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빈번하게 찾아오는 손님. 오늘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그의 긴장감은 더 하다. 땀에 흘러내린 안경태가 코끝에 걸터앉아있다. 그는 너무 덥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한 쉰내가 묻어져 나온다.

 

-, 네 여보세요? 네네... 네 가고 있습니다. 네 그럼요.

 

 

폭염특보문자를 받았다. 살갗을 다 헤집어놓는 것 같은 뜨거운 햇살이 검은색 양복을 입은 만나씨에게 고스란히 꽂힌다.

전화를 받은 후 만나씨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2.

보험 일을 시작한 건 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기억이 날 듯 한 여자애를 우연히 만난 그 때쯤 부터였다. 팀장으로 승진했다는 은혜를 동네 편의점에서 처음 만났었다. 물론 만나씨는 여자가 자기를 불러 세우기 전까진 은혜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너 만나맞니?

 

 

-...

 

 

-너 조만나맞지?

 

 

그때서야 여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긴 속눈썹, 웃을 때 양 쪽 볼이 푹 꺼졌다. 어딘가가 낯익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만나씨는 먼저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 의례 그렇듯 만나씨는 일정 간격의 거리를 유지하며 과하지도 않고 너무 인위적이지도 않게 웃어보였다.

 

 

-아니 것보다 살이 왜 이렇게 쪘니?

 

 

무례하다고 느꼈다. 대뜸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살이 왜 이렇게 많이 쪘냐는 질문에 만나씨는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불룩 튀어나온 배를 힘주어 밀어 넣는 게 만남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척 하면서 배를 밀어 넣어보았다. 아니, 뭐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었다. 이미 뱃살쯤은 들킨 뒤였기도 했고, 바로 은혜라는 것 까진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한 의지가 없었기도 했다.

 

 

-그래 너 진짜 오랜만이다. 근데 너, 누구더라?

 

 

-은혜잖아 섭섭해진다 야. 나 보험일해. 여기 명함

 

 

여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거기에 적인 장은혜, 글자로 보니 기억이 확실해졌다. 만나씨는 골똘히 학창시절 교문을 떠올려냈다. 애쓰기 시작하자 서서히 텅 빈 머릿속에 사나운 가구들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교문 앞에는 세 명 이상의 팔 둘레 정도를 거뜬히 넘는 느티나무가 있었고, 대부분 야구부들이 운동을 하는 곳으로 쓰이는 작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돼지우리를 연상시키는 허름한 매점이 나왔다. 매점을 따라 교문 쪽으로 되돌아가다보면 식당이 나왔다. 대충 살아나는 건 풍경이었다. 종례가 끝나면 느티나무 옆 작은 연못쯤에 모여 해가 질 때까지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몇몇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 속에 있던 친구 중 하나도 은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은혜가 생리대와 커피 두 개를 고르는 동안 만나씨는 살아오면서 몇 명의 은혜가 자기를 스쳐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만나씨는 오랜만에 어려운 문제에 닥쳤다고 느꼈다. 지나온 사람, 특히나 동명이인을 스스로 구분해내는 일이 정말 그러했다.

장은혜는 그러니까 장씨는 딱 한명이었다. 김은혜와 잠시 동안 헷갈렸지만 다시 그녀의 웃음을 보고 김씨와 장씨 사이의 기억의 깊이가 판가름 났다. 무성한 숲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가 생겨났다. 장은혜는 고등학교 첫 잠자리 상대. 지금 내 앞에 그녀는 잠시 대학 후배와 헷갈렸던 김은혜가 아닌 첫 잠자리 상대 장은혜였다. 역시 고등학교 시절 은혜가 맞았다. 어떤 사이여서 잠을 잤는지 그 이후로 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는지는 가물가물해졌다. 만나씨가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뭐하고 사냐는 질문이 날라왔다.

 

 

-지금은 백수야

 

 

조금 어색하게 웃은 탓에 입 꼬리가 살짝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후로 몇 번 은혜와 따로 만남을 가졌다. 이야기 끝에는 결국 치아보험과, 상해보험을 들었다. 보험사를 만나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가도 생긴다. 밥 먹을 돈도 없는 게 만나씨의 처지였지만 은혜를 만나고 난 뒤부터 괜한 건강 걱정부터 모든 고민이 앞섰다. 다 일이 그렇게 되나보다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은혜와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은혜도 그 만큼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사실상 만나씨도 그랬다.

 

 

3.

몇 달 뒤 만나씨는 은혜가 다니고 있는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만나씨는 독기를 품은 사람처럼 일만 했다. 어쩌면 이렇게 열심히 일 수 있었던 까닭은 만나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영택씨 덕이 컸다. 영택씨는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출근시간보다 항상 삼십분 일찍 와서 자기 책상을 닦고 회사 내에 있는 화분에 물을 줬다. 중소기업에서 인사과로 일한 경력이 있다는 그는 사람들 사이도 원만해보였다. 처음 보험일은 지인을 타서 하는 방향으로 많이 가다보니, 영택씨는 만나씨보다 더 빠르게 실적을 쌓아갔다. 이상하게 만나씨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백수가 되고 나서부터 피해의식은 늘 달고 살았지만, 특정한 대상에게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었다. 괜스레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 싶은 심보도 생겼다. 보험회사에 입사한 지 육 개월 만에 목표점수에 도달했다. 물론 영택씨는 아주 안타깝게 항상 이등이었다. 등수제로 나뉘는 보험일은 혹독했다. 그들은 월급은 나날이 올랐다. 영택씨는 더 성실했고, 만나씨는 영택씨보다 더 성실하려고 애썼다.

사실상 만나씨 인생은 이제야 피어오르고 있는 셈이었다. 늘 하던 일들이 잘 안되었다. 사장에게 돈을 떼이기도 했고, 손님들과 싸우기도 했다. 다양한 직종을 오가며 돈을 벌었지만 끊기가 없어서 육 개월 이상은 가지 못했다. 회사동료들은 만나씨에게 보험왕 만나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만나씨는 자신의 별명이 불릴 때마다 제 어깨가 잔뜩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처럼 솟아올라가는 걸 느꼈다. 첫 입사 때만 해도 허름했던 양복도 점점 근사해졌다. 만나씨는 스스로 느끼기에 얼굴도 예전보다 잘 생겨진 것 같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 더 나은 미래. 지금 준비합시다>

 

 

항상 일등인 만나씨는 이후 SB보험 광고인으로도 발탁되었다. 이번건 사실 은혜의 도움이 컸다.

텔레비전을 틀면 풍부한 몸매가 돋보이는 만나씨가 인상 좋게 웃고 있었다. 더 이상 만나씨는 영택씨와 같은 자리가 아니었다. 보험 노래에 맞춰 입을 오물오물 거리면서 만나씨는 눈썹을 움직였다. 광고 덕택에 만나씨의 영업은 더할 나위 없이 진정성을 힘입었다. 인정을 받기 시작하더니 만나씨는 점점 보험을 위해 온 몸을 받치기 시작했다. 어떤 목적보다 순위가 중요해졌다.

 

 

-나 덕분이지?

 

 

술에 취한 은혜는 반쯤 만나씨에게 몸이 기대어져 있었다. 맞은편에 은혜의 남편 팀장님은 은혜보다 더 술에 취해있었다. 남편은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에게 술을 따라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입사원은 젊고 어렸다. 사근사근한 성격에 웃음까지 많았다. 신입사원이 자리에 없을 때는 그녀에 대한 몸매 이야기로 수군거릴 정도로 글래머에 실적도 잘 쌓는, 아주 미래가 훤칠한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은혜는 신입사원을 향한 남편의 노골적인 시선을 마주하고도 덤덤했다.

 

-너 기억하니? 우리 사궜었던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혜는 깔깔 뒤로 뒤집어졌다.

 

 

-우리가 사궜어?

 

 

-아닌가? 나도 가물해

 

 

-아냐 너 좋아했었어. 근데 넌 나 말고 반장 좋아했잖아.

 

 

그때야 만나씨는 반장이 생각났다. 만나씨가 처음으로 잔 것도 은혜가 아니라 반장이었다. 예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얼굴이 밀가루 같았지? 마치 귀신처럼?

 

 

-너 얘들이랑 연락은 하고 지내?

 

 

-야 우리 나이에 친구랑 놀 시간이 어딨냐 다 학창시절 얘기지. 난 사는 게 바빴어.

 

 

-백수 아니었니?

 

 

두 볼이 벌겋게 상기된 은혜는 놀리기로 작정했다는 듯이 혀를 삐죽 내민다.

 

 

-이것저것 많이 했어. 보험일하기 직전까지는 휴대폰 팔았고

 

 

술에 취한 은혜는 귀신 흉내를 냈다. 만나씨는 왜 반장을 은혜로 착각했는지 알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만난 사람이 은혜가 아니었다면 첫 잠자리 상대를 은혜로 생각했을까 생각하니 술기운이 확 올랐다. 대학 때는 장연미라는 아이도 만났을 것이다. 장 씨라는 게 확신은 없지만, 뭐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연애를 적게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상세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없다는 건 어쩐지 슬프기도 했다. 허전한 마음은 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 먹고 사는 게 바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인사불성이 된 은혜에게 몇 번이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은혜는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만나씨는 팀장님을 불렀다. 한 동안 듣지 못하던 팀장님은 마지못해 은혜를 들쳐 업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창 밖에서 콜택시가 한 대가 스쳐지나갔다.

 

 

 

4.

갈수록 바쁜 나날이었다. 날마다 고객과의 만남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 확신을 심어주기에 바빴다. 더 많이 불안하거나, 현재에 대해 애착이 많은 사람을 대할수록 확률은 높았다. 종교단체처럼 사람들은 돈을 담보로 미래에 대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불안을 주고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쩌면 사실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나날이 진급했다.

 

 

-정철이니?

 

 

몇 년 만의 통화였다. 겨우 SNS를 통해 알아낸 그의 번호였다.

 

 

-야 나 만나야. 조만나

 

 

-만나? 얼마만이냐 살아있는거야? 나 지금 바빠서 나중에 전화할게

 

 

-나 보험일 하잖아. 그래그래, 다 바쁘지 이 나이에 안 바쁜 게 이상하지

 

 

정철과의 통화는 짧게 끝났다. 만나씨는 또 SNS를 뒤졌다. 점점 지인들도 떨어지고, 발로 뛰는 영업이 귀찮게 느껴질 때마다 만나씨는 SNS로 예전에 만난 사람들을 찾아봤다. 친했었나, 안 친했었나 싶은 사이가 많았다. 너무 희미한 경우는 메시지를 남겼다. 남기다보니, 메시지는 단체문구처럼 호칭이 사라졌다.

 

나 만나다. 잘 지내고 있지? 시간 날 때 연락해. 소식궁금하다. 아참, 난 보험일해. 필요하면 전화하고 010-2222-0000

 

마지막 지인에게 복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만나씨의 책상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만나씨는 일어서서 창문 커튼을 쳤다. 에어컨 온도도 한층 낮췄다. 그럼에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만나씨 책상 위에는 작은 선풍기 두 대가 무용지물처럼 요란스러운 소리만 내며 돌아가고 있다. 선풍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만나씨의 볼 살을 살짝 간질이는 정도지만 출근부터 퇴근까지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만나씨는 선풍기 두 대를 얼굴 앞쪽으로 끌어당기며 땀을 식힌다. 이번 달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달력 촘촘히 적혀있는 스케줄들을 뿌듯하게 바라본다. 다만 한 명 정도의 고객이 부족했다. 누군가가 삼 만원 치라도 들어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따라 만나씨도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휴대폰 연락처를 한참 뒤적이다가 만나씨는 한숨과 동시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형이 어쩐 일이야?

 

 

-말버릇이 그게 뭐야. 보험 하나 들어라.

 

 

생각보다 말투가 딱딱하게 튀어나왔다. 오랜 틈의 어색함이 묻어있기도 했다. 다음 답변에는 조금 더 친절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 흠 목을 가다듬었다.

 

 

-바빠. 필요하면 전화할게

 

 

-금방 들어. 뭐 하나 드는데 하루 걸리니. 필요한 거 내가 추천할게.

 

 

또 다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연락하기 싫다는 신경질 적인 동생의 말투가 전화를 끊었다. 만나씨는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동생과 만나씨는 부모님의 이혼 이후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다. 아버지는 게임중독자였다. 이혼이 결심에 무르익었을 때는 일도 나가지 않고 게임을 했다. 그가 중학교 때였다. 동생은 그런 아버지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철부지 같은 동생이 납득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여전히 호탕을 쳤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결심하던 날 그는 동생의 뺨을 때렸다. 어머니와 그, 동생이 한 식탁에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계란프라이를 그릇에 올려다주며 누구와 함께 살고 싶든 각자의 의견에 따른다고 했다. 그날을 떠올림과 동시에 그때의 눅눅하던 부엌의 온기가 살갗에 늘러 붙는 것 같았다.

만나씨는 다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이 꺼져있었다.

왜 같이 살수 없냐는 동생의 울부짖음에 만나씨는 동생을 방으로 끌고 가서 때렸다. 아주 힘껏 때렸는데 뺨을 때린 것 이상으로 자세한 건 없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동생과 일 년에 한번 씩, 이년에 한 번씩. 그러다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동생과 통화한 건 대략 몇 년 전, 돈 좀 빌려달라는 전화로 끝냈다. 동생의 와이프가 돈을 말아먹은 듯 해보였고 그는 돈이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5.

-, 제가 sb보험회사 조만나인데요 무슨 일이세요?

 

 

경찰서라고 했다.

 

경찰서에서 정철의 이름이 오갔고, 어쩐지 만나씨는 한 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만나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은혜는 정철이를 기억한다고 했다. 은혜말로는 정철이와 은혜와 만나씨는 학교 끝난 후 몇 번 토스트와 빙수를 같이 먹었다고 했다. 은혜는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만나씨는 너무 더웠다. 휴게실 안으로 잘 통풍되지 않는 습도들이 가득 끼여있는 것 같았다. 땀이 턱밑으로 흐르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가방을 챙겨 나온 은혜가 만나씨를 부축했다.

 

-너 정철이랑 목친 아니었니?

 

 

정철이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생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친했다. 목숨 같은 친구라고 서로가 말하고 다닐 정도로, 만나와 정철은 하나로 묶어 목친이라고 통했다. 어째서 만나씨보다 은혜가 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신기했다. 만나씨가 신기한 눈초리로 은혜를 바라보자,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싱거운 답변이 끝이었다.

 

 

-엄마가 또 아프네. 돈도 없고

 

 

-큰 애가 몇 살이라고?

 

 

-초등학교 들어가. 학원비에 둘째 유치원비에. 어휴 감당 안돼 넌 결혼 같은 거 하지마

 

 

최근 정철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사망보험과 상조보험을 들게 한 만나씨는 모든 게 자신 탓 같았다. 전화를 받는 내내 손이 죄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렸다. 필요 없다는 보험을 끝까지 들게 한 건 만나씨였다. 모두가 미래를 준비하듯, 부모님은 먼저 돌아가실 사람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설득했다. 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나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정철이 생각보다 빨리 설득되었던 그 날, 만나씨는 좋은 친구를 뒀다고 생각하며 잠든 그날일까? 81일이라... 그날이 그날인지 그날이 언젠지 알 수 없었다. 기억도 없는 그날, 정철에게 그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생각하니 눈구멍에서 안타까운 눈물이 줄줄 셌다. 그러다가도 만나씨는 중간 중간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철의 일은 뼈가 사무치게 아려왔지만, 만나씨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한 건 아니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투자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면 정철의 앞에서 그의 미래를 현실적으로 그려내지는 말았어야 했었다. 정철이 버는 돈과 아이들 교육비, 식비, 부모님 용돈,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르는 건강에 대해서 그래프를 그려준 게 생각났다. 정철의 능력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들이었다. 그럴수록 만나씨는 지금 보험을 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정철도 어느 정도 동의를 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정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줄은 몰랐다.

경찰서 앞에 도착한 만나씨는 섣불리 들어갈 수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웠다. 긴 한숨이었다. 끊은 지 삼년이 다된 담배를 다시 물자 기침이 방언처럼 몰아 터졌다.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하늘이 빙 돌았고 눈을 깜빡이자 햇살의 점막이 온 세상에 찍혔다. 검은 점은 이내 점점 커지다가 머리 뒤로 사라졌다. 그때마다 만나씨의 몸은 휘청거렸다.

형사는 죽기 전 그가 남긴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주차를 하고 온 은혜가 이제야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친구로 시작하는 메모는 메모라기보다는 장문의 긴 편지였다. 만나씨는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찬찬히 읽어내려 가려고 했지만 글자들이 번져보여서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야했다. 만나씨는 정철이 힘들다고 했을 때 들어주지 않았다. 만나씨는 더 이상 정철을 떠올리는 게 힘들어졌다. 만나씨는 메모지를 양복 안주머니에게 넣었다.

친모를 살해했다는 진술이 적혀있는 메모는 두 개라며 형사는 정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정철이 든 보험을 든 날짜와 함께 보험에 대한 정보, 정철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만나씨는 너무 횡설수설해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철에 대해서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글씨가 학창시절 때 정철의 글자와 똑같았다. 동그라미는 꼭 비스듬히 눕히는 습관, 문장이 다 끝나기도 전에 쉼표를 찍어대는 습관들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6

갑작스런 정철의 죽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나씨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샀다. 겨우 맥주에 몸이 이미 뒤틀릴 때로 휘청거린다. 다리에 힘이 다 빠져나갔다. 말도 안 되는 하루라고 여겨졌다. 정철은 부모를 살해 할 만큼, 대담하지가 않았다. 부모애가 지극정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다시 머릿속을 헤쳐 봐도 정철은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친구였다. 아무래도 정철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만나씨는 목울대에서 울음이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다.

눈물보다도 소리가 많은 울음이었다.

만나씨의 탓 때문인 것 같다가도 죽은 정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정철 생각에 집에 도착하기 도 전에 두 캔을 모조리 마셨다. 만나씨가 정철의 회오리에서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땐 알 수 없는 골목길이었다. 한 여름은 밤이 되도 시원하지가 않다. 그나마 낮보다는 조금 건조해져있고, 쌀쌀해지지만 더위를 가시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신경이 곤두선 정철은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몇 걸음 걸었다고 숨이 차는 것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살 때문인가? 웨이브를 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있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가로지르는 흰 와이셔츠가 투명색에 가까워졌다. 무언가를 빠르게 선택하는 편은 아니지만 쉬어가야 한다는 건 분명해졌다. 만나씨는 가로등 앞에 주저앉아 다시 메모지를 펼쳐보았다. 분명 친구에게 쓴 편지가 맞았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한 글자씩 읽어내려 갈수록 그는 정신이 들었다. 다시 천천히 훑어보니 메모의 상대자는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학창시절은 비슷한 추억을 스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언뜻 보면 만나씨와 함께 한 시간들 같았지만, 읽어내려 갈수록 친구는 자신이 아니었다. 다시 보니 정철의 글씨체를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없었고,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피시방에서 보낸 시간들, 어느 게임 속 정철의 아이디가 생각났다. 정철이 연필을 잡은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이쯤 되니 확신이 들었다. 그는 만나씨가 아는 정철이 아니었다. 고객 중 이름이 같은 정철이었다. 정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한두 명 뿐이겠는가?

고등학교 동창 정철은 아니었다. 또 다른 고객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이 그 메모지를 건네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만나씨처럼 그들도 실수로 만나씨를 부른 것이다.

 

골목 끝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잠잠했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만나씨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피해 조금 걷기 시작했다.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는 처음 본 것 같은 언덕이 하나 있었다. 만나씨는 언덕을 올랐다. 숨이 거칠어졌다. 몸이 뒤로 자꾸만 늘어지는 것 같았다. 체중을 실은 발목이 아려왔다. 만나씨는 몇 번 쉬어가기를 반복했다. 멈출 때 마다 오를 때는 느끼지 못한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이상하게 만치 시원했다.

만나씨는 바람을 맞으려고 중간쯤에서 멈춰 앉았다. 온 몸을 맡긴 채 딱 드러눕고 싶은 바람이었다. 만나씨는 뒷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정철의 이름을 길게 눌렀다. 새 소리와 함께 신호음이 갔다. 그는 자꾸만 목이 말랐다. 맥주를 더 사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침을 삼켰다. 침이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식도를 넘어가는 침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반쯤 숙였다. 그럴수록 목이 더 말라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 견뎌내는 거지.

중얼거리는 만나씨 주변에서 연결되지 않는 신호음만이 계속 흘렀다.

 

 

7.

-, 네 고객님 지금 도착해가요

 

 

만나씨는 커피숍 앞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른 땀을 닦는다. 급히 일회용 향수를 꺼내 목덜미에 뿌린다. 이번건만 성공하면 이번 달 목표치다. 사람 좀 되라고 구박받던 시절 때 저지른 대출금도 다음 달이면 끝날 것 같다. 매일 잡지로만 보면 외제차도 사고, 어머니와 한 집에 사는 것도 청산해야지. 예쁜 여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는 하나만 낳으면 될 것 같다. 예쁜 것 보다 몸매가 훌륭한 게 더 좋겠다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전혀 나쁜 삶이 아니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귀여운 만나씨의 눈썹이 광고 CF처럼 들썩인다. 아무래도 여전히 일등일 것 같은 마음에 어깨가 으쓱거린다. 오후 다섯 시 치고는 습도가 높다. 햇빛 쨍쨍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부채를 들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사람들 사이로 만나씨가 지나간다. 만나씨의 두 팔이 힘차게 흔들린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은 잠시 참을 만 하다고 느껴진다. 만나씨는 씩씩하게 걸으며, 젖은 와이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다.

 

유별스럽게 몸이 무겁다고 느낀다. 다이어트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올 가을,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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