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로베르트는
김용주
우리의 지친 하루는 언제 끝날까.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보며 시간을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루의 경계선이 모호하며, 밤과 낮이 바뀐 사람들에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지쳤지만 가벼운 어른들의 발걸음을 볼 수도 있다. 아마 이 방법이 더 확실한 확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 저기 저 직장인, 미희의 걸음이 아침보다 가볍다. 저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즐겁고 행복한 생각들이 있다. 어서 빨리 가서 땀으로 축축한 몸을 씻어야지, 침대에 누워 뒹굴고 싶다, 잠들기 전에 그림 하나 그리고 자야지. 더 이상 직장 상사의 귀 따가운 잔소리도, 개발팀의 아리송한 독촉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해가 뜨는 출근길에 다시 무거워질 것이다. 끝이 이어진 펜로즈의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처럼 지친 하루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미희의 걸음은 순간 편의점에서 앞에서 멈추지만 곧 총총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간다.
미희는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전에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집중한다. 얼른 내 사랑, 로베르트에게 안기고 싶다. 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싶다. 집중을 끝낸 미희는 비밀번호를 누른다. 언제나 정겹게 들리는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린다. 미희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뇐다. 단조로운 멜로디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야. 이 문 너머에 있는 일상이 행복하고, 그 일상을 함께 하는 내 남자, 로베르트가 있어서 행복한 거야.
“왔어?”
깊고 푸른 눈의 로베르트가 싱긋 웃으며 미희를 본다. 갈색의 단정한 머리와 희고 고운 우유색 피부가 먼저 눈에 띈다. 거기에 섹시하게 느껴지는 큰 키와 제법 두꺼운 팔과 다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게 해준다. 여느 영국인 남자들조차 가질 수 없는 완벽한 신체 스펙이다. 로베르트는 거실에 놓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푸른 물 위에 세워진 빨간 벽돌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수로 위를 떠다니는 작은 조각배들이 그려진 풍경화다. 아니,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것이니 상상화라고 해야 할까. 미희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가면 로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꼭 껴안는다. 그리곤 달콤한 키스를 해준다. 미희가 하루 중 가장 원했던 순간이다. 로베르트는 미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채 로베르트의 이젤 앞에 서서 그림을 내려다본다.
역시 로베르트, 색의 조합과 선이 뚜렷하다. 미희는 로베르트가 그린 그림마저 사랑하지만, 애교 같은 작은 질투가 생겨 입을 삐쭉 내민다. 언젠가 미희는 로베르트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봤지만, 그의 그림에 비해 어딘가 조금씩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로베르트는 미희의 생각을 또 완벽하게 읽곤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어준다.
“미희 그림도 정말 좋아.”
로베르트는 원어민 수준으로 완벽하게 말한다. 그는 몸만큼이나 머리도 완벽했다. 영어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구사했고, 한국말, 불어, 일어도 완벽했다. 요즘은 중국어를 공부하는데, 미희는 완벽한 그림 실력과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아는 그가 매번 새롭게 느껴지면서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거실의 한 쪽 벽엔 두 사람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로베르트의 상상 속 알프스 산의 작은 마을과 미희가 그린 로베르트가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서로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었다.
“오늘 일 힘들었지?”
로베르트는 미희를 품에 안은 채 거실 한 쪽의 부엌으로 향한다. 로베르트는 찬장을 뒤적이며 뭔가를 꺼낸다. 미희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바라본다. 로베르트가 찬장에서 꺼낸 건 레드와인과 와인 잔이었다. 로베르트는 아직 이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검지를 피더니 찬장에서 크래커를 꺼낸다. 미희가 원했던 완벽한 조합이다. 미희는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짓는 이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꼭 껴안는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또 있을까. 10년 전, 대학교에서 학생 신분으로 처음 만난 이후로 로베르트는 여전히 미희바라기다. 그 긴 시간, 바람이 불면 떠날 수도 있었는데, 로베르트는 미희가 힘들고 괴로울 때도 그 옆을 지켜줬다. 요즘은 덜 하지만 처음 연애할 땐 꿈속에서조차 로베르트가 미희의 옆을 지켜줬다.
두 사람은 크래커에 얹을 소스를 만들기 위해 참치와 마요네즈를 섞기 시작했다. 미희는 회사 일로 지쳤던 하루를 잊고 싱글벙글 웃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미희의 콧노래에 화답하듯 로베르트도 똑같이 흥얼거린다. 미희는 지금 로베르트와 함께 하는 것이 달나라를 걷는 것처럼 사뿐사뿐하다. 하지만 이런 로베르트와의 완벽한 나날에도 한 가지 거대한 흠이 있었다.
전화벨이 행복한 순간 사이로 파고들며 날카롭게 울린다. 미희는 화들짝 놀라 얼른 전화기로 달려간다. 미희의 아빠다. 평소 같으면 엄마가 전화해서 딸의 안부를 물으며 반찬거리가 있는지, 요즘 일은 어떤지 등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그녀의 아빠는 형식상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반찬 필요하니?”, “언제 한 번 내려올 거냐?” 같은 그런 단조로운 말들. 잠시 부녀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미희의 아빠는 회사 잘 다니라는 어색한 말을 남긴 채 끊어버린다. 미희는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그저 표현이 부족한 분이시기에, 이제야 딸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 이런 전화를 하시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희는 여전히 불편했다. 아빠와 통화를 하거나 만날 때면 공기가 뜨거워지면서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미희가 여러 꿈을 품고 찾아 헤매던 어린 시절부터 말이다.
미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로베르트는 여전히 크래커 소스를 만들고 있다. 가서 미희를 안아주며 “괜찮아, 앞으로 나아질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느끼는 분노와 자괴감으로 크래커 소스를 뭉갤 뿐이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는 미희의 곁을 지켜줄 뿐,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사랑을 속삭이거나, 매일 안아줘도 우울한 것을 잊게 해줄 정도로 꽉 안아준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기 위해선 조금의 집중력과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느껴지는 상상력으로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야 했다. 미희는 로베르트가 있는 부엌을 돌아본다. 로베르트와 부엌이 피카소 추상화의 일부처럼 괴기하며 우울하게 보인다. 미희는 눈을 꾹꾹 누르며 지갑을 챙긴다. 아빠의 목소리가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자신을 다그치는 모습을 떠올리자 집중이 안 됐다. 미희는 로베르트에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로베르트는 미희를 잡지 않는다.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며 크래커 소스를 휘휘 젓고 뭉개길 반복하고 있다.
“미희, 나 역시 관둘까?”
미희는 로베르트를 본다. 여전히 피카소의 추상화처럼 보이며, 곧 그림의 선과 색이 무너져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미희는 최대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지만 결국은 쓴웃음이 된다. 이 남자마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일과 잠 사이의 허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로베르트는 미희에게 있어 희망이었다.
“로베르트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여기가 로베르트 집인 걸.”
미희는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며 미희에게 남아있는 따듯한 집 안 공기를 날려버린다. 미희는 잠시 그렇게 바람을 맞다가 걸음을 옮긴다. 미희가 향한 곳은 퇴근할 때 지나쳤던, 집 앞의 편의점이다. 미희가 편의점에 들어서자 야간 편돌이인 진수가 핸드폰 게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진수는 장난 가득한 미소로 미희를 본다. 그의 머릿속에선 시시한 장난들이 스쳐지나가지만 그 생각들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선명했다. 미희는 어제처럼 소주 한 병을 꺼내와 계산대 위에 올린다. 진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미희를 본다. 그리곤 능글맞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한다. 미희가 한 번 쏘아보면 그제야 장난이라며 소주의 바코드를 찍는다. 미희는 이 장난꾸러기 꼬마를 본다. 키는 미희보다 조금 컸지만, 로베르트보단 머리 하나가 차이 날 정도로 작았다. 게다가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애였다. 처음에 미희는 진수를 안 좋은 시선으로 봤다. 단정한 로베르트의 외모와 달리 진수는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여자애들처럼 귀를 뚫고 까만 피어싱을 했다. 왼쪽 귀 뒤 쪽에서부터 목 중간까지 세긴 까만 해마 타투를 보며 그의 학창 시절을 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만으론 그의 모습을 완전하게 볼 수 없었다. 미희는 술에 잔뜩 취한 손님이 편의점 문을 거칠게 열어젖혀도 진수가 먼저 밝은 인사를 건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진수의 친근하고 장난스런 모습들이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수가 아는 체 할 때면 왠지 기분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젠 해마를 떠올리면 바로 진수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야간 편의점 일을 한다는 건 여전히 꺼림칙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미희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기도 했다.
“오늘도 상대 해줘요?”
미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희는 평소처럼 소주를 들고 파라솔이 쳐진 야외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는다. 평소엔 과자부스러기나 음료수를 쏟은 자국 때문에 더러운 자리이지만, 진수가 편의점에 출근하면 새 것처럼 깨끗해졌다. 미희는 진수가 출근하자마자 손걸레로 테이블이며 의자를 박박 닦는 걸 본 적이 있다. 곧 진수는 한 손에 소주 한 병을, 다른 손엔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나온다. 소주 한 병으론 두 사람이 나눠 마시기 부족하단 것이다. 그리고 소주만 마시기엔 속이 더러워진다며 그 날 본인이 먹고 싶은 과자를 갖고 나왔다. 미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누군가가 함께 술을 마셔준다면 그걸로 좋았다.
“누나,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진수가 잔에 술을 따라주며 자연스레 말문을 연다. 여태 아무 말도 않던 미희는 진수의 붙임성이 자신보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항상 로베르트 앞에서만 적극적이었다. 미희는 집을 나오기 전에 아빠와의 숨 막히는 통화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다. 진수는 귀 뒤의 해마를 만지작거리며 미희의 말에 집중한다. 이따금 두 사람은 술을 홀짝이며 과자를 먹는다. 미희의 불만은 이제 직장 상사에게 향하고, 진수는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말이 옳다고 말한다. 미희는 신나게 떠들다가도 가끔 당황스러웠다. 로베르트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자유로이 입을 여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때. 미희는 곧 로베르트마저 잊고 진수와 얘기하는데 집중한다.
“아빠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난 자유가 없어. 이게 현실이야.”
미희는 잔에 가득한 술을 단 번에 마신다. 진수는 싱긋 웃으며 미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본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미희는 얼른 눈을 피하며 과자를 집어먹는다. 분명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진수는 미희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절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꼴리는 거 하면 되잖아요. 누나가 원래 하고 싶은 거 말이에요.”
꼬마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사는 게 어른들이야. 미희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왠지 진수라면, 귀 뒤에 해마가 있는 이 꼬마라면 평생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미희의 눈엔 진수가 이 세상을 탐험하는 작은 해마로 보였다. 이런 모습이 로베르트와 같다고 생각했지만, 로베르트처럼 살기 위해선 천부적인 재능과 마르지 않는 돈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꼬마한테 그런 모든 것들이 있을까. 만약 로베르트처럼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감각을 발휘해 돈 걱정 없이 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과연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을까. 미희는 안심이 됐지만 또 안타까웠다.
“누나 남자친구는요? 영국인 남친은 뭐래요?”
미희는 얼마 전, 진수에게 로베르트에 대해 말한 걸 후회한다. 그다지 비밀에 부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진수가 로베르트에 대해 말 할 때면 가슴에 물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로베르트를 자랑했지만, 왠지 진수 앞에서는 그러질 못했다. 한 번은 작정하고 자랑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꼬르륵 잠기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미희는 말없이 술을 마시며 과자를 집어먹는다. 어서 빨리 다른 주제를 술안주 삼아 떠들고 싶었다. 진수는 이제 미소를 지우고 미희의 얼굴을 쳐다본다.
“누나, 사실 남자친구 안 좋아하죠? 어떻게 한 번을 안 데리고 와.”
미희는 바늘로 옆구리를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순간 아무 생각도,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희는 진수의 말에 반박할 추억들을 되짚어보며 끄집어낸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순간, 식탁에서 마주보고 저녁을 먹는 순간, 서로를 껴안은 채 깊이 잠든 밤, 처음 생각해낼 땐 설렜지만 차츰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일상들이었다. 미희는 자신의 감정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들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재생했다. 하지만 한 번 잃은 빛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미희는 어떻게든 행복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기억을 짜깁기한다. 어느 순간, 추억 속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은 로베르트가 아닌 진수가 된다. 미희는 당황하지만 달콤한 유혹인 머릿속 영상에 시선을 뺏긴다. 미희가 그림을 그릴 때면 진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옆에 앉아 그림을 망치고, 식탁 앞에 마주보고 앉아 저녁을 먹을 땐, 입가에 뭔가가 묻었다며 떼 주는 척 은근슬쩍 입을 맞추는 진수가 보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강렬한 키스를 하며 미희의 옷을 벗기는 진수가…….
미희는 눈을 꾹꾹 누르며 그 모든 생각을 떨친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앉은 그 꼬마를 본다. 진수의 뚜렷한 눈썹과 작지만 선명한 눈을 보고, 푹신하며 달콤해 보이는 입술을 본다. 그리고 그 입술의 감촉을 상상하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진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던 미희는 로베르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오랫동안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닫는다. 취해서 그런 거다, 취하면 온갖 상상이 생생해지잖아. 미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 잔을 비운다. 그러면서 진수와의 연애는 위험할 것이라고 최면 비슷한 자기암시를 한다.
“누나, 있잖아요…….”
“아니, 난 여전히 로베르트를 사랑해.”
미희는 진수의 말을 자르며, 사랑해란 말을 강조하듯 힘주어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마셨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희가 휘청거리며 일어서자 진수가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한다. 순간, 미희는 진수의 품에 털썩 안긴다. 로베르트의 든든한 품과 달리, 생각보다 따듯하며 말랑말랑한 그 품에. 진수의 심장 뛰는 소리가 미희에게 전해진다. 규칙적인 그 소리에 미희는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을 받는다. 미희는 잠시 그렇게 안겨 있다가 잊고 있던 로베르트가 떠올라,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진수의 품에서 떨어진다. 진수도 미희의 향기로운 온기에 머리가 멍해져서 잠시 그렇게 서서 미희를 본다. 천천히 멀어지는 가련한 미희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본다.
“누나, 잠시 만요.”
진수는 우물거리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미희에게 닿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미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진수는 닻을 내린 미련 때문에 한 동안 서서 그쪽만 바라본다.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목소리는 목 끝에 걸렸다. 밤을 잊은 손님이 편의점에 찾아오면 그제야 뒤돌아서 소주 한 잔 털어 마시고 일터로 돌아간다.
미희는 돌아오자마자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른 채 이젤 앞에 앉았다. 그리고 붓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선의 경계가 없어서 불안해 보이는 색깔들이 타들어가듯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각각의 색들은 누군가의 화난 얼굴 같기도 했고, 슬픈 얼굴 같기도 했다. 타들어가는 온갖 색의 한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미희는 그림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여인 옆에 구원자가 될 남자를 그려보려고 했지만 붓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붓을 내려놓고 와인을 쭉 들이킨다. 지독한 술 냄새가 입 안에서 퍼지며 혀가 마비되는 기분이다. 로베르트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미희를 바라보다가 결국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미희는 로베르트의 손길을 느끼곤 그를 올려다본다.
“그만 잘까?”
두 사람은 방 안의 어둠을 이불 삼아 눕는다. 로베르트가 미희의 뒤에서 꼭 안아주지만 그녀는 허공을 응시한 채 반응이 없다. 어두운 머릿속엔 오직 해마 한 마리가 그려지고, 그 해마는 곧 진수가 된다. 야외 테이블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던 그 모습이 된다. 미희는 한숨을 푹 내쉰다.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현실을 돌아보니 씹으면 씹을수록 더 질겨지는 무기력한 감각이 입에서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기분이었다. 미희는 슬쩍 로베르트를 본다. 순간 그의 얼굴이 진수처럼 보여 얼른 고개를 돌려 눈을 꾹꾹 누른다. 로베르트는 미희의 생각을 읽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잠시 부드러운 눈길로 미희를 훑어본다. 로베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이 깔린 거실로 향한다. 미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다. 로베르트가 이대로 영영 떠날까봐 그의 손을 잡는다.
“내가 더 잘 할게, 로베르트.”
로베르트는 그저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미희의 손을 푼다. 너무도 완벽해서 느낄 수 없는, 미희의 어지러운 마음을 헤치지 않는 동작이었다. 로베르트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미희는 눈앞이 흐려지며 곧 꿈속으로 빠져든다.
미희의 꿈속에선 모든 것이 음 소거 상태였다. 미희는 얼굴이 그림자로 가려진 한 남자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떤 장치도 없이 구름 위를 날았지만 미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두 사람은 누군가의,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그림 속 알프스의 한 마을 위를 내려다봤고, 물 위에 세워진 빨간 벽돌 마을의 수로 위를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날았다. 뭉게구름 곁을 지나갈 때, 손을 뻗어 구름을 움켜잡으면 그 부위만 흔적 없이 사라졌다. 구름의 어딘가에서 자명종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점차 커졌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것은 움켜쥔 구름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한 곳에 있었던 것처럼 미희 혼자 편의점 앞에 서있었다. 그때 미희의 꿈은 끝났고, 그녀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간다. 잠에서 깬 미희는 한 동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왠지 기분이 들떴지만 가슴이 파란색으로 가득 찬 느낌도 들었다.
미희의 하루는 어제가 끝나지 않고 쭉 이어지는 것과 같다. 지겨운 아침 출근길을 걸어 회사에 도착하면 상사의 귀 따가운 잔소리와 문어발처럼 엉키며 계속 이어지는 개발팀의 컨펌에 두통을 앓는다. 미희는 잠깐씩 숨통이 트일 때마다 공책에 낙서를 했다. 선을 긋고 원을 그렸다. 선과 원의 그림은 남자의 형태가 됐다. 미희는 곧 업무보다 낙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낙서 속 주인공은 곧 로베르트가 된다. 하지만 어딘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미희는 로베르트의 귀 뒤에 해마를 그려 넣는다. 이제야 그 낙서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이 익히 아는 로베르트의 모습이 아니기에 쫙 뜯어서 버린다.
미희는 그 날 이후로 편의점에 가지 않았다. 퇴근길조차 동네 한 바퀴를 돌아서 가기에 절대로 편의점이 시선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대신 집에서 먼 할인마트에서 소주 한 박스를 사놓고 로베르트 몰래 한 병씩 꺼내 마셨다. 알딸딸한 기분이 들면 그제야 로베르트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와인을 마시며 야식을 즐겼다. 깊은 밤에는 서로를 꼭 안은 채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완벽한 로베르트가 미희의 웃음 뒤 외로움을 모를 리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는 것이 미희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잠시 부는 바람일 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가슴 한편으론 자신이 떠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희가 로베르트에게 말은 안 했지만, 더 이상 그녀의 꿈에 자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시각, 진수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금세 잊은 채 야간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 날,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보며 미희가 오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편의점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깊은 밤이면 찾아오던 그 손님의 외로움이 진수에게 전염된 것처럼 가슴 속에 한숨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틀 째 되던 날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며 홀로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미희와 처음 만났을 때, 호기심이라 느꼈던 그 이상야릇한 감정을 원망해보지만, 부정할수록 더 깊어지는 마음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해서 쉽게 죽을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진수는 미희를 보기 위해 여느 때보다 일찍 출근도 해보고 편의점 주변도 어슬렁거렸지만, 단 한 번도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 헛된 희망일수도 있지만, 다시 미희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사과를 하자니 영영 손님과 편돌이로 남을 것 같았고, 고백을 하자니 그대로 갈라질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여느 때처럼 아무 것도 아닌 척 말을 걸자니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생각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어떤 말과 모습도 진수의 허전한 가슴을 채울 수 없었다. 어쨌든 일단 미희를 보고 싶었고, 그때가 되면 어떤 말이든 하겠지 생각하며 질긴 시간 속에서 매일을 기다렸다.
빽빽한 도시와 도시 사이의 간이역 같은 일요일이 찾아왔다. 일을 쉬는 주말이면 사람들은 비가 내려도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운 법이었다. 게으르게 TV 앞에 드러누워 깔깔거리는 것조차 버킷 리스트의 일부가 돼 하루를 허비하기도 했다. 구름마저 맑게 빛나는 오늘, 평소 같았으면 미희는 로베르트와 함께 공원을 거닐고, 카페에서 나른한 기분을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결혼식장이었다. 회사 동기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면 두 주인공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 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그 결혼식은 조금 달랐다.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신랑을 바라봤고, 신랑은 선글라스를 쓴 채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살짝 벗어난 곳을 보며 긴장과 행복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신랑이 되는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었다. 선천적인 장애였지만, 동기는 그 장애가 서로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듯 더 밝게 웃었다. 그녀의 연인은 지팡이 대신 신부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맹세했다. 미희를 포함해서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회사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들의 앞날을 걱정했다. 말의 톤이 어떻든 모두의 말은 똑같았다.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모두 미소 가득 웃어 보이며 결혼을 축하해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처세술이었다. 다음은 네 차례라며 동기가 미희에게 부케를 던져줄 땐 왠지 피하고 싶었다. 분명 가벼운 부케인데, 왠지 신부가 신랑에게 짓던 미소만큼이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넌 과연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희에겐 그렇게 들렸다. 나도 그런 사랑, 할 수 있어. 속으론 이 악물고 말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척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받는 것도 처세술의 일종이었다.
결혼식에서 돌아온 미희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마신다. 과자가 없어서 허전하고 술은 썼지만, 그 모든 걸 꾹꾹 누른 채 잔을 비웠다. 그녀가 두 번째 소주를 꺼낼 때가 돼서야 로베르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희는 로베르트가 그저 스쳐지나가길 바랐다. 아직은 로베르트의 포옹도, 위로도 원치 않았다. 로베르트는 미희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대로 스쳐지나간다. 그는 거실에 이젤을 펼치며 스케치북 하나를 그 위에 올린다.
“오늘 어땠어?”
순간, 미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매일 완벽하게 자신의 마음을 읽고 움직였던 로베르트가 오늘은 어딘가 다른 것이다. 미희는 말 대신 소주를 더 들이부으며 알코올이 혈액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길 기다렸다. 곧 쓰러질 정도로 세상이 빨리 돌기 시작한다. 미희가 원했던 순간이었다. 결국 미희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로베르트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온다. 미희는 로베르트에게 의지한 채 천천히 일어선다. 그대로 로베르트가 자신을 침실로 데려가주길 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베르트는 그녀의 바람과 달리 이젤 앞으로 데려간다. 미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지만 혀가 알코올에 꼬여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지 않는다. 무기력한 느낌이 더 강해지고 자신이 빈껍데기처럼 느껴졌다.
“미희, 나 할 말이 있어.”
결국 미희는 로베르트에 의해 이젤 앞에 앉는다. 속이 뒤집히면서 먹었던 것들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빙빙 돌기에 눈앞에 뭐가 있는지 보려면 표정을 잔뜩 찌푸려야 했다. 곧 로베르트가 이젤 위에 올린 그림이 보였다. 순간 미희는 그 그림 때문에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이젤 위의 그림은 해마였다. 타투처럼 새까만 해마였다. 미희는 로베르트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속으로 말들을 골랐지만 뒤틀리는 속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제 숨기지 않아도 돼.”
“로, 로베르트. 이건, 옛날에 그런 것처럼 잠시 끌린 거야. 믿어줘. 그 앤 너무 어리고, 겨우 편의점 알바생이야. 그리고 걔도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나한테 관심 없을 거야.”
로베르트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표정으로 미희를 내려다본다. 미희는 처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속에서 올라오던 것들을 꾹꾹 누르던 미희는 결국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낸다. 로베르트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쳐주지만, 알코올이 몸속에서 빠져나갈수록 그의 손길이 흐릿하게 느껴진다. 먹었던 것들과 함께 무기력하고 우울한 감정도 토해서 그런지 속이 빌수록 마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속을 어느 정도 게워낸 미희는 입을 닦으며 문간에 주저앉는다. 로베르트도 그녀를 마주보며 앉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미희는 취했지만, 로베르트의 깊고 푸른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기서 더 취한다면, 무아지경의 꿈속으로 빠진다면 로베르트는 더 생기 있고 완벽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떠오르는 한 사람, 못 본지 일주일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 같은 진수가 생각났다.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로베르트는 미희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굴 떠올리며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10년이란 긴 연애 기간에서 터득한 서로간의 애정 교신이 아니었다. 로베르트가 처음 미희와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아니, 처음엔 그저 스쳐지나가는 완벽한 이상형의 표본이었다. 잔상처럼 남은 그 환상, 그때 또렷해진 거짓된 완벽함이 미희에게 다가온 것이다.
“미희, 이제 솔직해지자. 언제까지 환상 속에서 살 수 없어. 이 집을 봐. 그림들을 봐.”
로베르트와 함께 사는 이 집은 사실 미희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 얻은 집이다. 퀸 사이즈의 침대에선 언제나 미희 혼자 잠이 들었다. 얼마 전, 로베르트가 준비한 레드 와인과 와인 잔, 크래커도 미희가 대형 할인 마트에서 사둔 것들이었다. 언제나 이젤 앞엔 미희 혼자였고, 로베르트가 그린 풍경화와 미희가 그린 로베르트의 인물화는 모두 그녀가 상상에 기대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젤 위에 올려둔 저 해마 그림도 미희가 술기운에 그린 것이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았어. 애초에 사랑이란 모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흉내 낸 것뿐이야.”
사실 미희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이게 좀 더 쉬운 방법이었다. 어떤 남자도, 자신의 머릿속의 형상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고, 아주 작은 부분조차 로베르트와 비교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싹이 트기도 전에 죽은 사랑들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 사랑이 변색되고 식어버리는 것조차 두려웠다.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 모든 게 견디기 힘들었던 미희는 10년 동안 로베르트의 품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로베르트, 아니 미희는 천천히 일어선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빈 캔버스와 압정들을 방에서 갖고 오고, 스케치북에서 해마그림을 뜯어낸다. 그렇게 손에 한 가득 든 채 캔버스들이 걸린 벽 앞에 선다. 미희는 오랫동안 그림들을 바라본다. 겁이 났다. 환상이었지만, 10년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그 순간들을 정말 내릴 수 있을까. 내가 이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에서, 정말 변수 그 자체인 순수한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미희가 주저거리자 로베르트는 그녀의 몸을 빌려 벽에 걸린 모든 그림을 내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빈 캔버스를 걸곤 해마 그림을 압정으로 고정시킨다.
“미희,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인정해. 난 어차피 언젠가 사랑이 나타나면 떠날 환상에 불가했어. 이젠 그 사랑을 놓치지 마.”
미희는 인정하라는 그 말이 무서웠다. 마치 헐벗은 채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을 오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랑만으로 살 수 있어?” 솔직히 로베르트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모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원했다. 하지만 미희의 기대는 전화 한 통만으로 깨질 유리 같은 이야기였다. 사진 같은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삶이든 흠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 기대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환상에 눈이 멀어 행복에 저울질을 한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죄악이다. 내가 없는 사랑이 곧 진정한 사랑이 될 것이다. 로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베르트, 나 정말 이제 와서 너랑 같이 했던 그 날들을 똑같이 살 자신이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미희. 내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행복한 삶을 살아. 걷고 싶으면 걷고, 버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버려. 한 번 그렇게 해봐. 미희, 네가 그런 것처럼 나도 그 애가 정말 좋아. 그 애가 너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처럼, 넌 그 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돼.”
로베르트는 미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순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마주치면 그저 스쳐지나갈 생각으로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미희의 상처 많은 마음을 안아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선택은 오로지 미희의 몫이니까. 그녀의 아빠도, 직장 상사도, 개발팀의 직원들도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그녀만의 영역이니까. 로베르트를 불러냈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할 순 없다. 결국 로베르트의 품에서 울고 있는 건 그녀 자신이니까. 미희는 오랫동안 로베르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본다. 다시 속에서 부글거리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변기를 부여잡고 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쓸쓸히 속을 게워낸다.
편의점에선 싸구려 사랑 노래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속삭이는 것 같아서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다. 하지만 집중해서 듣자니 따분하단 느낌이 욕지기처럼 느껴졌다. 진수에겐 이제 모든 것이 지겨웠다. 어떤 손님이 와도 관심이 가지 않았고, 핸드폰 게임은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야외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조차 귀찮았고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모든 게 색을 잃어가고 있는 지 열흘째다. 진수는 이번 주까지만 편의점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동안 모은 돈으로 국토 대장정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뭔가 몸을 거칠게 다루지 않으면 정신이 금세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는 왼쪽 귀 뒤의 해마의 존재를 잊은 채 벅벅 긁어댄다. 곧 해마 주위가 빨갛게 일어난다.
무기력한 공기를 깨듯 편의점 문 위에 붙은 종이 가볍게 딸랑거리고, 진수는 무심한 인사 멘트를 하며 입구 쪽을 슬쩍 본다. 순간, 진수의 심장은 진정제를 투여해야 할 것처럼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침착하자, 평소처럼 하면 된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지만,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한다. 갑자기 작은 사랑 노래가 진수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나타내는 것처럼 감미로웠고,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매장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미희는 헛개나무로 만들었다는 숙취음료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그 작은 걸음마다 긴장과 생각들이 무겁게 걸렸지만 꿋꿋이 나아간다. 미희가 계산대 위에 음료수를 올리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것처럼 어색하게 마주 선다. 진수는 계산하는 것도 잊은 채 여전히 미희를 본다. 미희는 아직도 진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사춘기에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처럼 다리를 꼬며 몸을 살살 흔든다. 진수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머리를 매만진다. 미희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진수의 정신은 정전 상태에 들어갔다. 국토 대장정이라는 단어에서 기능들이 완전 정지한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생각하고 준비한 말과 행동들이 플래시가 터지며 눈부신 빛 속으로 아득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미희가 슬쩍 진수를 본다. 그의 귀 뒤 쪽에 수줍어하는 것처럼 빨개진 해마를 본다. 미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진수의 해마를 가리키곤 자신의 귀 뒤 쪽을 살살 만진다. 진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음료수의 바코드를 찍는다. 빨개진 해마가 뒤늦게 생각난 진수는 미희처럼 해마가 있는 귀 뒤쪽을 살살 만진다. 계산이 끝난 뒤에도 두 남녀는 자신의 귀 뒤쪽을 만지며 어색하게 웃는다. 누구도 먼저 이 길고 따듯한 침묵을 깨지 않았고, 꽤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마주본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받아 눈 안에서 수정처럼 반짝이는 작은 결정을 바라본다. 드디어 지친 하루의 막이 내리고, 새롭고 순수한 하루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