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by 윤수 posted Apr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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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사

 

1.
 너는 이상한 남자애였다.

 내 바로 앞자리의 너, 고개만 들면 바로 보였다. 보이는 것은 늘 뒷모습이지만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하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고동색 머리털로 덮인 작고 동그란 뒤통수도 보이고 표백을 해놓은 것처럼 언제나 깨끗한 교복 셔츠도 보였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 회색 체육복 상의를 꺼내 입고 지퍼를 느릿느릿 잠그는 것도 보였다. 조용히 선생님 말에 귀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보였다. 그러면서 교과서의 다른 페이지를 펼쳐놓고 책 위 몇 미리 공중에서 펜을 삭삭거리며 필기하는 척하는 것도, 필통에서 트럼프 카드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리는 것도 보였다. 창문 밖에서 비추어 온 햇살이 얼굴에 맞닿으면 고개를 돌려 밖을 오래오래 보는 것도 보였다. 프린트를 뒤로 넘기려고 돌아볼 때면 여름의 눈사람같이 하이얀 얼굴도 보이고 옅은 눈썹도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눈매에 가득 찬 무관심만이 뚜렷이 보였다.

 5월의 초여름쯤에 나는 네가 이상한 애라는 것을 눈치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네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누가 너의 이름을 아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아이들은 네게 말을 걸 때 야, 저기, 있잖아, 하는 것으로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4번, 앞에 나와서 오른쪽 문제 풀어봐, 하는 식으로 너를 불렀다. 그렇게 이름이 빠진 말조차 너에게는 별로 건네지지 않았다. 실은 그것도 이상했다. 세상과 극도의 무관심을 주고받으며 혼자 다니는 사람이라도 필연적인 상황에 의해 충족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대화량이란 건 있는 법이다. 그게 너에겐 없었다. 마치 아무도 너를 신경쓰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는 이상한 남자애였다.
 너는 점심시간에는 물론이고 체육시간에조차 축구를 하지 않았다. 너는 언제나 조용하게, 소리없이, 의식되지 않고, 어딘가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운동장에서 잠깐 숨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면, 회색 스탠드는 휑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열심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까맣고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의식을 더 집중하고나면 그게 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흙먼지에 뒤덮인 운동장을 공이 반지름처럼 가로질렀다.
 운동장 끝과 끝에 위치한 두 개의 골대에 공이 가까이 갈 때마다 아이들은 함성을 질렀다. 함성지르는 아이들은 여름의 땡볕에 얼굴이 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부러진 발목때문에 스탠드에 앉아 공을 눈으로만 쫓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처럼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축구에 끼지 않고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너는 수업시간에 만지작대던 트럼프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카드는 이 학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 고등학교의 아이들은 체육아닌 수업시간엔 죄다 축구를 하느라 죽은 사람처럼 책상 위에 머리를 엎드리곤 했다. 그 교실에선 제정신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축축한 땀냄새가 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창문이 누군가 던진 빗자루에 깨졌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학교에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이 그랬다. 그런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한 장의 흰색 트럼프 카드라니. 딴 세상에서 온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장소와 때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든 너를 보고 있자니 난 꼭 흰 토끼가 떨어트리고 간 장갑 한 짝을 발견한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너는 왜 항상, 축구 안 해?

 내 물음에 네가 목각인형처럼 천천히 목만을 이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너는 바닥에 놓인 내 왼손에 개미가 기어오르려는 것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벌레가 싫은 나는 황급히 손을 치웠다. 그래도 너는 원래 내 손이 있던 곳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깊어질수록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상한 애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 때 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오류구나.

 세 번 눈을 껌벅였다. 이름모르는 너를 오래전부터 '이상한 남자애'로 속으로 불러오긴 했지만, 그런 너에게서 평범한 대답이 나오진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네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내 이름은 오류가 아니야.
 -알아.

알아, 네 대답이 끝나는 동시에 종이 댕강댕강 울렸다. 게임에서 진 쪽의 아이들이 한숨을 지었다.

 -나는 마술사를 찾고 있어.

 네가 다시 말했다. 너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난 충분히 설명했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내게는 하나마나한 대답이었을 뿐이다. 덥석 마술사를 찾고 있다고 말한들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네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진심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네가 이상한 애였다.

 


2.

 나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네 
지은 죄 말로는 다 못한다네 
뿌얘진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네 
아직 난 잘할 수 없다네


 살짝 목이 잠긴 목소리의 선율을 따라 들으며 생각했다. 가수는 노래를 녹음하기 전에 우유를 마셨을까, 하고. 나는 노래를 잘 알지 못해서 우유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다. 다만 몽롱하게 노래하려면 평소와는 다른 음료를 마셔야 하지 않을까 싶을 뿐이었다. 때론 이렇게 남이 들으면 이상해 할, 혹은 지루해 할 생각들을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그리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말을 고르고 고르는 것이다.

 나는 네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졌다. 그 날 아침에도 그랬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우유를 생각하던 나는, 버스에 네가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너는 회색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늘 그랬듯 깨끗하게 세탁된 하복 셔츠를 단추를 끝까지 채워 단정히 입고 있었다. 눈썹도 언제나처럼 옅었다. 카드를 단말기에 갖다 대고 나서 너는 뚜벅 뚜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그 때 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기에 소리만을 들었다.)

아직 난 잘 할 수 없다네
아직 난 잘 할 수 없네

 슬프게 훌쩍이는 듯한 노랫말이 끝날 무렵 옆 좌석에 누군가 앉았다. 너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앉아서 학교까지 갔다. 버스에 다른 남은 자리가 있기는 했는지 돌아서 볼 용기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내리는 정류장은 학교 앞으로 같았지만 나는 발을 절뚝이면서도 평소보다 훨씬 빠른 템포의 걸음으로 훌쩍훌쩍 갔다. 그 때, 뒤에서 네가 말했다.

"같이 가."

 그대로 멈췄다. 처음 듣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처음처럼 낯설었다. 네가 느리게 걸어왔는데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우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 따분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어제 왜 조퇴했어?"
"나?"
"그럼 누구겠어."
"병원갔었어."
"어디 아파?"
"안 아파. 엄마 보러 갔어."
"어, 어디 편찮으신 거야?"
"아니……. 음, 아니. 곧 출산예정일인데, 원래 몸이 약한 편이셔서. 혹시라도 몰라서 입원해 계셔."
"출산?"
"응."
"그럼 너 동생 생겨?"
"응."
"우와……."

 나는 내뱉은 것 이상으로 놀랐다. 열여덟 살에게 동생이 생기다니, 하고.
 네 목소리가 보통 사람의 것이라는 데에도 놀랐다. 나는 너를 정말 이상한 애로 여기고 있었나보다. 너무도 놀라서, 마술사를 찾고 있다고 한 건, 내가 오류라고 한 건 무슨 뜻이었냐고 물으려 한 것을 잊을 정도였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나는 너에게 매점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너는 병원을 가야 한다고 답했다. 아, 그래, 목에서부터 훅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나는 잘, 다녀와, 라고 더듬더듬 말을 건넸다. 그걸 뒤에서 숨죽이고 남자애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소곤거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네가 가방을 뒤에 매고 교실을 느리게 썰물처럼 빠져나가자마자 그들은 마술에 걸리기라도 한 듯 수군거림을 멈췄다.
그 이상한 침묵, 서늘한 침묵.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야."
 "응?"
 "쟤 이름이 뭔지 알아?"
 "누구?"
 "방금 나랑 얘기한 애. 이 자리에 앉는 애."
 "뭔 소리야. 너 여기에 계속 혼자 서 있었잖아."
 "너희야말로 무슨 헛소리야. 너네, 뒤에서 쳐다봤잖아, 웃고 있었잖아. 다 들었어."
 "이거 미쳤나... 수면부족이면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이고 있든가."

 얼이 빠졌다. 정말 나는 미쳐버린 걸까? 아니면 네 말대로, 내가 오류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네가 사람 모양을 한 공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눈앞에 있을 때 사람들은 너를 인식할 수 있고 너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있다. 너와 대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당장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때 너는 없는 사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너는 관념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나만이 아니다.
 나는 네가 없을 때도 너를 떠올릴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다. 너의 행동에 대하여, 너의 모습에 대하여. 그래서 내가 오류란 것이겠지. 그런데, 그러면 너는 뭐야? 내가 오류면 너는 누구야? 몇 번이고 묻고 싶었지만 막상 네 얼굴을 마주하면 내 목소리는 무력해졌다.

 이제 너는 아침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늘 옆자리에 앉거나 앞뒤로 같이 앉거나, 그도 아니면 버스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날엔 내가 너에게 이어폰 한 쪽을 건네기도 했다. 혹시라도 더러운 게 있을까 바람을 후 불고 나서야 주었다. 네가 말끔하게 미소 지으며 그걸 받아들었다. 난 그 때 또 발목의 통증이 멎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상의 요소가 되어도 넌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남자애였다.

 

뿌얘진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네
아직 난 잘할 수 없다네
아직은 나 잘할 수
없네

 

 있잖아, 네가 말했다. 응?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쏙 빼내며 고개를 돌렸다.

  "가수 목소리가 몽롱해. 녹음하기 전에 우유라도 마신 것 같아."

 정지해 있던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다시 출발했다. 열려있던 창문의 조그만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의 온도에서 알 수 있었다. 이제 여름도 다 갔나 봐. 나는 널 좋아하나 봐.

 

 

3.

 바람이 차던 저녁, 우리는 교문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던질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고 너도 조용했다. 10분 넘게 기다려본 적 없는 버스가 그 날은 유난히 오질 않았다.

 “몇 분 후에 오는 거야.”
 “나,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너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네가 뭘 하려나, 생각하며 검정색 폴더폰을 넘겼다. 휴대전화를 받은 너는 정류장 표지판을 꼼꼼히 읽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6분 후에 온다네.”
“어디로 전화한 거야?”
“저기.”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여덟 자리 전화번호가 있었다. 아래엔 작고 검은 글씨로 분명히 ‘버스 도착 시간 안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게 있는 줄은 그 날 처음 알았다.

 “집까지 얼마나 걸려.”
 “걸어서 삼십 분.”
 “먼 건가.”
 “모르겠는데... 버스 타기 싫어?”
 “응, 너만 괜찮다면.”
 “그럼 걸어서 가자.”

 우리는 정류장을 지나 인도를 따라 걷고 걸었다. 조명이 불그스름하고 테라스가 있는 카페와, 두 가지 맛 슬러시를 파는 분식집과, 창문이 작은데다 얼마 없는 빌라를 지나쳤다. 분식집 앞에서는 잠깐 멈춰 슬러시를 사 먹었다. 네가 파인애플 맛을 고르기에 나도 같은 걸 선택했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여름만큼은 아닌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또 차가왔다. 그러다 보통보다 조금 강한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다.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보자 너는 바람같은 건 분 적이 없었다는 듯이 평소같이 잔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뭘 보냐.”
“아니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뒷자리에서 본 것과 옆얼굴의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후자의 경우가 좀 더 인간미가 있어 보였다. 우리는 조금씩 대화하며 걸어갔다. 사실 대화라 해 봐야 내가 바보같이 내 이야기를 왕창 끄집어내서 어떻게든 네 관심을 끄려고 시도하고, 네가 그것에 조용하고 짧은 리액션으로 답하는 것의 연속에 불과했다. 속이 타들어갔다. 따분한 건가, 아니면 기분이 안 좋은가, 하고. 하지만 그것도 몇 분이 지나자 익숙해져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일 거라 여기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길게 대화해 본 게 그 저녁이 처음이었다. 집에 닿기 10분 전쯤 너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다른 길목으로 빠졌다. 안녕, 이라고 답하고 나서 곧바로 가던 길을 성큼성큼 갔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머리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뒤에서 쳐다본다거나, 가던 길을 멈추고 힐끔힐끔 돌아본다거나 하는 일은 너무 정형적이어서 소설 속 인물의 흉내를 내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다음 날의 너는 학교에 춘추복을 입고 온 첫 학생이었다. 약간 하늘빛이 도는 긴소매 셔츠에 남색 니트조끼 차림이 안쓰러울 정도로 더워보였지만, 너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생이 태어났어.

 수학 뒤의 쉬는 시간,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대리석을 보며 네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네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나라면 어떨까, 집에 갓난아기가 생기는 일. 나이차가 크니까 친자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조금 난데없는 사건이려나. 축하한다고 한 마디 던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머리를 굴린 건 네가 기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기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은 완곡한 표현이고 실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어딘가로, 지금 당장 우리가 위치해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너만이 존재하는 구덩이로 깊이 깊이 빠져들고 있는 듯했다.

 난 그게 좋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그건 이기적인 감상이었다.

 “축하해.”
 “고맙다.”
 “귀엽겠네.”
 “...”
 “얼굴은 봤어?”

 그 질문엔 대답없이 고개만을 간신히 끄덕였다. 그 때, 어디선가 깽, 하고 소리가 났다. 아마 옆반의 누군가가 던진 대걸레에 박살난 창문의 소리이리라, 했지만 소리의 근원지는 우리반 교실이었다. 바닥에 눈송이처럼 널부러진 파편을 보며 반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창의 깨진 곳을 통해 트럼프 카드 하나가 나아갔다. 분명, 공중에서 전진하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려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이었다. 모두 유리 조각에 관심이 쏠려선지 나만이 입 밖으로 소리 하나 흘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걸 보고 있었다. 내 옆얼굴로 따갑게 닿아오는 네 시선을 느꼈다. 카드를 보는 나를 네가 보고 있었다. 카드가 떠다니는 이상한 광경을 나 혼자서만 보게 된 게, 꼭 아이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집중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과 후 자습이 끝나고 나서, 그 날 너는 다 먹은 슬러시 컵을 버리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라고. 다음 날부터 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4.

 이상한 일이지만, 네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첫 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너에게선 정착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존재를 내가 슬며시 알게 된 것처럼 그렇게 슬며시 사라질 것 같다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무도, 선생님조차도 네 행방을 묻지 않았다. 아마 그게 궁금한 사람은 이 일대에-혹은 세상 천지에 나 하나뿐인 듯 했는데, 그건 예상치못한 쓸쓸함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살면서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 홀로 특정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 쓸쓸함은 너를 생각하게 했다. 정착의 것이 아닌 네 냄새를 생각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네 눈매에 가득찬 건 무관심이 아니라, 그런 허한 고독이었다.

 너는 왔다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도 해낸 게 없었다. 별달리 공통점을 찾아 빠르게 친해지거나 입담을 주고받은 적도 없고, 유명하지 않은 맛집을 찾고 시시덕댄 적도 없었다. 공유한 기억에 특별한 즐거움이랄 게 없고 바람에 덜컹이던 버스나 옆 초등학교 운동장의 정글짐 위나 분식집의 파인애플맛 슬러시나, 그런 것뿐이었다. 그래도 난 그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바심이 들었다.

 “야.”
 “어, 어?”
 “뭐하냐? 그거 안 먹어? 내가 먹는다.”
 “아니, 먹어. 숟가락 치워라...”

 정신을 차려보니 좋아하지도 않는 프랜차이즈 통 아이스크림과 A가 내 앞에 있었고 난 숟가락을 들고 멍히 앉아 있었다.

 “뭔 생각해?”
 “그냥 뭐.”
 “요즘 좀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한 건 아니고.”

 화가 나.

 대뜸 그렇게 대답해 버릴 뻔했다. 화,를 발음하려고 입을 벌리곤 그대로 멈춰버렸다. 피곤한 게 아니면 뭐냐고 A가 물어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보다 나빴다. A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뭐야, 야, 괜찮아, 뭔 일인데, 하고 말을 더듬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여보려는 멍청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화, 화가, 나아아아, 나는 A보다도 더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내 의지로 된 일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꺼억 꺼억 하는, 딸꾹질같은 소리가 입을 막아 그리 되었다. 목이 멨다. 정말 이상했다. 너는 정말 이상한 남자애였다.

 

 미안하다.

 

 그 목소리를 회상하자면, 달콤하지만 우아하진 않은 슬러시 향이 배경으로 떠오른다. 퍼석퍼석한 흙 위에 떨어진 나뭇잎과, 그것이 밟힐 때 발에 느껴지던 양감도 같이 떠오른다. 머릿속에 오래 남는 것들은 대개 그 맥락과 함께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네가 사라지기 전 날 난데없이 건넨 그 사과는, 개중 하나였다. 오래 남은 것들.

 

 뭐가 미안한데?

 

 네가 나를 본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지만, 실은 그 너머 다른 것을 보고 있음을 나는 충분히 느낀다. A의 앞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 때보다도 오히려 그 때가 더, 안에서 서글픈 느낌이 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네가 내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연인으로 희망하는 사람은 못 돼도 내가 네 친구까진 됐구나, 그게 너무 명백히 보였고 또 네가 사라지리라는 본능적인 예감을 어떤 방법으로도 밀어낼 수가 없어서 나는 무너지고 싶다시피 서글퍼졌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조차 나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누구냐고, 어디에서 왔냐고, 이름은 무엇이고, 이제 어디로 가냐고, 여기에 잠시라도 더 머무르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나는 해내지 못했고 너는 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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