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차 창작 콘테스트 소설 부문-메두사와 춤을

by 3HW3HR posted Apr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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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와 춤을

 한 남자가 벙커의 해치를 힘겹게 열고 나왔다. 탈출한 남자에게 모자를 쓴 사람이 다가갔다.

“괜찮아요?”

여인은 태양과 모자가 만들어낸 그림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목소리만 듣고서 여자라 생각을 했다.

“예. 괜찮습니다.”

남자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어도 되는 겁니까? 메두사가….”

“괜찮아요.”

여인은 남자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사실 같았다.

“혼자세요?”

여인이 물었다.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남자는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궁금해서요.”

여인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여인을 보고 말했다.

“혼자입니다. 처음엔 9명이었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었나요.”

“예. 전부요. 벙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요?”

남자는 망설였다. 그러나 그에게 더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모든 일은 끝났기 때문이다.

“전부 말씀드릴게요.”



지금 내 앞에 4명의 사람이 보인다.(정확히 한 명은 사선을 넘어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지만) 그리고 내 뒤 구석에 쭈그리고 계신 네 구의 시체가 만들어진 계기는 나 때문이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하지만 필수불가결이었다고 장담한다. 왜? 여긴 빌어먹을 벙커기 때문이다. 벙커 안에서는 친구끼리 치고받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럼. 그렇다고 벙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벙커 밖의 세상은 지금 메두사라는 신화에나 나올법한 처자가 사람을 전부 돌로 만들고 있다. 처음 시작은 빈민촌. 마을 사람 전부가 돌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세상에나. 아리따운 여인도 있었을 거다. 우리 할머니가 그곳에 계셨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사건에(부자들은 좋아했다. 난 부자였고) 조사를 나선 경찰도 돌로 발견됐다. 슬슬 메두사의 세력이 거리를 좁혀오자 나 같은 돈 많은 사람들(특히 30대 중반에 젊어서 성공한)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행동을 했다.

이게 바이러스건 살인 사건이던 여자 하나 옆에 끼고 벙커로 냅다 뛰어갔다. 마음이 맞는 부자 친구들(당시에는 정말 끝까지 같이 갈 거라 생각했다. 음…. 그랬지 몇몇은 끝으로 갔다.)과 말이다.

말이 벙커지, 여기는 호화 저택을 땅에 거꾸로 꽂은 것 마냥 굉장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불만이라고는 본인 집이 아닌 것뿐이었다. 한 놈만 빼고. 시체 넷 살아있는 사람 다섯. 뭔가 숫자가 안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정답이다. 아담과 이브처럼 짝수가 아니란 말이다. 아담과 이브에 아담의 뭐로 만들던 남자를 하나 더 추가해서 삼각형을 만들면 절대로 정삼각형이 될 수 없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밑변이 상당히 짧은 이등변 삼각형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한 놈이 그랬다. 지금은 시체가 된 내 친구, 형제라고 생각했던(아담의 물건으로 만들었을) 진수. 벙커에 제일 늦게 도착했는데 마누라 빼고 홀몸으로 왔던 진수. 아마도 새 삶을 시작해보려 한 것 같다.

며칠은 조용히 지나갔다. 밥도 같이 먹고 놀다가 방에 짝끼리 들어가서 섹스하고 약도하고 비교적 잘 지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진수가, 쓸쓸하고 외롭고 욕구불만에 빠진 진수가. 나는 눈치를 챈 적도 없었다. 내 짝(오란)과 진수가 눈빛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사실은 언제나 징조를 보낸다. 그렇다고 충격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 경우도 그랬다. 때는 늦은 밤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어두웠지만 파란빛이 감도는 방. 이 벙커의 각 방은 각각의 색이 있었다, 말 그대로 방 내부가 파란색이면 문도 파란색 가구도 파란색 모든 게 파란색이다. 옆에 누워있어야 할 오란이 보이지 않은 것이 실은 첫 번째 징조였다. 화장실에 간 것일 뿐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바보 같은 생각(방마다 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에)을 하면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2시 17분을 파란빛으로 알려주었다. 어두운 방에 파란 장막이 쳐졌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시계는 가는 것을 까먹은 것 같았다. 잠은 이미 솟구치는 생각으로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자리에서 일어나 파란문으로 걸어가 복도로 나왔다. 하얀 복도는 각 방이 지닌 빛이 반사되어 물들여져 있다. 앞의 노란색 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문들을 지나친다. 초록색, 주황색을 지나쳐 붉은색, 보라색이 물든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다.

붉은색 문 아래에서 다른 방들과는 다른 좀 더 강한 빛이 은은하게 나와 발을 붉게 물들인다.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색이다. 혼자 있어야 할 방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조심하고 있지만, 한밤중의 고요에 비해선 턱없이 큰 교성과 대화였다. 턱이 팽팽해진다. 두개골을 차가운 것이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파란색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파란빛의 시계가 아침 5시를 표시할 때 오란이 돌아왔다. 방안에 깨어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오란은 최대한 소리를 자제하면서 옆자리에 들어왔다. 오란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죄의식이라는 교육의 결과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을지도. 오란 자신은 알까. 사람은 무엇 때문에 변하는지 안다고 해도 변화를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변한 것처럼.


아침 8시가 지나자 오란이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자기야.”

가끔 사람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생겨난다. 뭔가 굉장히 감동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을 때도 말이다. 내 허락과는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몇 시간 전에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후자가 말이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제는 남아있지 않은 나였다면 이 말과 목소리를 사랑했을 텐데. 이런 일을 겪어도 그녀는 그녀일까. 얼굴을 쳐다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내가 사랑하는 그녀였을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녀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릿결과 검은 눈동자가, 신체적 특징이 완전히 똑같은 도플갱어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하지만 말과 행동까지 똑같이 한다면?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은 결국에는 겉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돼버린다.

“먼저 가. 금방 일어날 거야.”

오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똑같은 웃음소리.

“금방 오지 않으면 여기로 가져올 거야. 잠꾸러기 같으니.”

“응.”

나는 중얼거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턱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프고 땅겼다. 그녀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린 후 눈을 떴다. 온통 보이는 파란색. 밤에 있던 일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면 오늘 아침은 잠도 개운하게 자고 행복했으리라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랑한 그녀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변한 것이든 간에 방금 느꼈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오란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만 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도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둘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저지하는 목적으로 가져온 더블액션 리볼버를 파란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약실에 든 총알 여섯 발을 확인한 후 바지와 엉덩이 사이에 오른손으로 빼기 쉽게 집어넣었다. 한 번도 쏴본 적이 없는 총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총을 두고 갈까 망설였다. 총을 가지고 간다고 꼭 쏜다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 이건 오만이다. 그럴 리 없었다.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다시 문들을 지나치고 붉은문까지 지나가니 양옆으로 홀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나왔다. 벙커라 하기 미안할 정도로 연회장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홀 왼쪽 벽에 붙은 식품저장고 문과 그 앞에 주방과 더불어 식탁 용도로 쓰이는 곳에 친구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네모난 식탁 왼쪽 끝에 오란이 앉아있었고 반대쪽에 진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앉아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간혹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에게 눈빛을 보내는 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지금까지? 옷에 묻은 얼룩이 눈에 한 번 띄면 신경 쓰이는 것처럼 확연하게 그리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까지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멍청했다니.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가 쳐다봤다.

“자기 왔어? 여기 앉아.”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자기?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었다. 손이 엉덩이 쪽으로 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리에 앉으니 그녀가 접시에 몇 개 음식을 담아서 앞에 놓아줬는데,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오로지 문제는 총을 언제 꺼내야 할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왼쪽에 있던 올백 머리를 한

빵꾸(평소 행동이 나가 하나가 빠진 것 같다고)가 덩치 크고 까무잡잡한 별명이 큰손인 친구에게 말을 꺼냈다.

“큰손. 그 얘기 좀 해줘 네가 큰손이라 불리기 얼마 안 됐을 때 말이야. 이쪽이 궁금해하더라고 왜 큰손으로 불리는지.”

빵꾸는 옆에 있는 여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쪽으로 끌어당겨 머리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큰손은 씩 웃음을 짓더니 빵꾸 옆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큰손도 TV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모델인가 연예인인가? 아무튼 그런 일을 하고 있을 거였다.

“숙녀분이 궁금하시다면 말씀드려야죠. 제가 무슨 일에 종사하는지 아시나요?”

큰손이 공손하게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하면 암거래상이죠.”

식품저장고에 식품을 뺀 나머지 약들은 전부 큰손이 가져온 것이었다. 가져온 양만 해도 많아 보였지만 그가 유통하고 있는 양에 비하면 개인용에 가까웠다. 9명이 쓰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양이었다.

“제가 하는 사업은 확실히 정해진 법은 없고 서로 간의 지켜야 할 규칙이나 존중, 약쟁이의 의리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크고 작은 분쟁이 잦다고 말씀드릴 수 있죠. 이 얘기는 제가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큰손은 다른 손에 얹은 손가락을 고민하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숙녀분들이 있으시니 순화를 좀 시키겠습니다. 한 사업 동료가 저에게 찾아오더니 이런 말을 하더군요. ‘큰손. 당신이 이 지역의 관할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영역을 점점 넓히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수수료를 10%나 올리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당신이 큰손이라는 별칭을 유지하고 싶다면 철회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주변 파트너들과 협약을 맺어 당신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 라고 말이죠. 당시 파트너는 굉장히 흥분해 있었어요. 그래서 우선 진정을 시켰죠. 그리고 얘기하나를 들려줬어요. ‘파트너. 저라고 처음부터 잘됐겠습니까. 빈털터리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거죠. 저도 사정을 모르지 않아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안정성입니다. 이 바닥에서 경쟁 상대가 있다는 것은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죠. 그렇지 않습니까?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다면 만들어야죠. 지금은 힘이 들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바닥에 법이라는 게 생긴다면, 후일을 생각하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 좀 진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별칭에 대해서 잘못 아신 사실도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제 손바닥을 들어 보여 줬습니다.”

큰손은 앞에 파트너가 서 있는 것처럼 손을 내밀더니 별안간 뺨을 후려치는 동작을 취했다.

“그건 내 손이 커서야, 이 양반아!”

그 말을 듣고 빵꾸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와 진수도 웃고 있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일은 잘 해결됐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있으니까요.”

큰손은 청중들의 반응을 만족스럽게 살펴보다 한 웃지 않는 관객을 발견했다.

“후두. 왜 그래? 이미 몇 번 들어서 그런 거야?”

큰손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후두. 내 별명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소규모로 이런 일을 하면 장사꾼 소리를 듣지만, 회사를 상대로 대규모로 벌이면 사업가라고 불러주는 일. 거기에 사람을 교묘하게 속이는 말솜씨가 가미되면 이런 별명이 생긴다.

“아니. 네 얘기를 듣는 건 언제든 재밌지. 우리 모두 종사하는 일의 성질이 다르잖아? 빵꾸는 호텔, 큰손은 암시장, 중탕은 소프트웨어. 생각을 해봤는데 지금 나에게는 객관적인 의견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그녀와 진수를 번갈아 바라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게임을 하나 제안 해보려 해. 팀을 나눠보자 후두팀 그리고 오란과 진수팀.”

그녀와 진수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의는 받지 않겠어.”

“어….자기….”

그녀는 영문을 몰라했다. 진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팀을 나눴으니 진수 옆에 가서 앉지 않을래? 이건 게임이니까.”

그녀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일어나 진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좋아. 우리가 지금부터 할 일은 가정과 토론이야. 마지막으로 투표지. 가정을 해보자고 오란이 나를 두고 진수와 눈이 맞았다 치자, 진수의 말발이던 밤일이던 뭔가가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손을 바지 위로 가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광경에 웃지 않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럼 뭘 토론을 하자는 거야? 어느 쪽이 더 잘하는지?”

빵꾸가 웃기다는 듯이 말했다. 몇몇이 킥킥댔다.

“아니. 그것도 재밌겠지만. 여기서 원하는 것은 말했듯이 다각적 시선이야. 도덕적 잣대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고. 되고 안되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 오란이 바람을 피운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가 변한 것일까 아니라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그리고 그 행동이 용납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수 있는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말해보자는 얘기야. 마지막으로 의견이 두 가지로 좁혀지면 투표를 하면 돼.”

“그러니까. 거시기 크기는 상관없다는 얘기네?”

중탕이 끼어들었다. 중탕의 별명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주장하는 여인이라는 점도 있지만 침착하다고 하기도 다혈질이라 하기도 모호한 성격의 영향이 컸다.

“그런 셈이지. 진 팀에게는 지금은 비밀이지만 벌칙도 있어. 아마 깜짝 놀랄걸.”

“무슨 TV쇼 같군.”

큰손이 말했다.

“맞는 말이야. 여기는 다 좋은데 TV가 안 나오잖아. 어찌 되든 밖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할 것도 없는데 뭐.”

빵꾸가 맞장구쳤다.

“나도 찬성.”

중탕까지 동의하고 게임이 시작됐다.


“먼저 말해둘게. 어떤 의견이 나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객관적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개인적 의견의 합의점 같은 거니까.”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눈으로 ‘이해했지?’ 라고 묻듯이 훑어보았다. 마찬가지로 진수와 오란에게도.

“시작하지. 오란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오란이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그저 내가 모르는 오란의 이면이 있었던 거겠지.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 성격을 보라고 하잖아? 그런데 솔직히 성격을 볼 수는 없어. 그 사람의 말과 행동만을 보는 건데 성격이 어떻다고 추측하는 거지. 오란팀 의견은 어때?”

나는 공격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더는 망설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당돌한 여성의 표정이었다.

“내 생각은 달라. 내가 그랬다면 그건 변했기 때문이야. 변화가 아닌 본성이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은 영향을 받아. 그게 무엇이든. 같은 사람, 길가의 꽃, 생각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어. 그럴 때 느꼈던 감정을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아. 그건 마치...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거든.”

그녀가 말을 마쳤다. 진수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 옆에 있는 여인은 그저 잠자리의 욕구만 해결하면 그만인 여성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주체 못 할 정열을 지닌 오란이었다. 진수는 이제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다.

“자유로운 의견 고마워. 다른 사람들은 어때?”

“난 오란과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어.”

빵꾸가 나서며 말했다.

“내가 자주 드나들던 주점에, 솔직히 눌러살았지. 아무튼, 거기 입이 아주 걸걸하신 청소부 할배가 있었어.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만나기만 하면 욕을 하더라고. 그런데 할배 기세가 얼마나 등등한지 욕할 때는 할배가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니까. 알 사람은 다 알았어. 대부분 욕을 먹을 이유가 있기는 했지. 꽁초를 아무 데나 던져 놓거나 딱 봐도 청소부가 싫어할 일들 있잖아. 이상하게 난 보기만 하면 욕먹었어. 나도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할배 얼굴만 보면 그럴 마음이 사라지더라. 그만큼 무서웠지. 그러던 어느 날 내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내 팔을 잡더니 날 보고 ‘잘 지내나?’ 이러는 거야.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인상이 순하고 웃음을 짓고 있어서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얼굴이었지. 그래서 응답했어. ‘네. 그럭저럭 이요.’ 그러더니 웃으면서 다시 갈 길을 갔어. 주점으로 들어가서 방금 나간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지. 그때 점장이 한 말이 글쎄 그 할배라는 거야. 당연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되물었지. 점장은 확실히 청소하는 할배가 맞다고 말했어. 얘기를 들어보니 점장이 얼마 전에 해외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한 장사꾼이 주머니 하나를 보여주면서 안에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의 파편이 들어있다고 말을 하더래. 점장은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100달러를 불러서 안 산다고 했어. 당연히 사기인 줄 알았지. 그런데 장사꾼이 하도 사정해서 결국에는 10달러에 주머니를

사주고 여행에서 다녀올 때까지 가방에 넣고 까먹고 있었어. 집으로 가던 중 할배를 본 점장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거지. 차를 세우고 할배에게 주머니를 주면서 장사꾼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한 거야. 할배는 이런 귀한 물건을 나에게 줘도 되겠냐고 반문했데. 점장은 자기는 교회도 안 다니고 신앙이 깊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 말하고 할배에게 주머니를 넘겨줬어. 이 일이 있던 다음 날부터 할배가 주머니를 목에 걸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변했다고 들었어. 사람이 변해도 아예 다른 사람이 돼버렸지. 후두 말대로 하면 본성이 어떻게 반대가 되겠어, 아무리 숨겨져 있다 해도 말이야.”

빵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큰손이 한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나도 하나 들려주지.”

큰손은 내 쪽을 쳐다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후두의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겠군. 우리 쪽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대선배격 되는 ‘낚싯줄’이라 불리는 분이 계셔. 상대를 굉장히 많이 죽이기도 하셨지만, 특히 낚싯줄로 목을 졸라 죽여 자신의 손으로 얻으신 별호 같은 거지. 다행히도 지금은 은퇴하시고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셨어. 그런데 여기서 은퇴를 하게 된 경우를 들어보면 기가 막힐 거다.”

큰손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은 낚싯줄이라 부르는 살인청부업자. 목표를 손에 쥔 낚싯줄로 마무리를 하면서 장갑 아래로 느껴지는 살을 파고드는 줄이 생생함을 전달해 주었다. 살아있는 생명의 마지막 몸부림이 손으로 전해지다 느슨하게 풀릴 때의 감각이 낚싯줄을 애용하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순간의 쾌감은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낚싯줄은 생각했다. ‘오늘도 좋았네. 점심은 뭘 먹을까.’ 그러던 중 낚싯줄은 한 기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목표의 일당인 이미 자신에게 급소를 찔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과. 그 남자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고 그의 목적이 복수인지 아니면 낚싯줄을 죽여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온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지 낚싯줄은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후자다. 오로지 표정에는 낚싯줄을 죽인다는 생각으로 차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다섯 걸음도 안 되는 지척에서 낚싯줄에게 총을 겨눴다.

“죽어! 이 새끼야!”

남자는 소리치고 낚싯줄에게 총을 연달아 세 번 연속으로 발사했다. 낚싯줄은 총성과 뒤에 있는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확실히. 아직은 느껴지지 않지만 죽었구나. 낚싯줄은 이제 몸이 원치 않아도 쓰러져야 할 때가 올 것을 직감했다. 아주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순간에 낚싯줄은 이상함을 느꼈다. 남자의 표정이 놀람을 지나 황당함이 짙게 묻어나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본 것이다. 낚싯줄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총알 자국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총알은 애꿎은 창문에만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이 거리에서 못 맞추는 것은 남자와 낚싯줄 둘 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했는지 둘 다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낚싯줄이었다. 낚싯줄은 창문 밖으로 재빠르게 몸을 던졌다. 남자도 정신을 차렸다.

“이런 미친!....”

남자는 다시 총을 쐈지만, 이번엔 창문도 없이 허공만을 가르는 총알만이 있을 뿐이었다. 낚싯줄은 14층 빌딩의 아래로 떨어지면서 죽겠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아찔한 광경에 기절했다.

얼마 뒤 낚시줄이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을 감싼 검은색 뭉치들이었다. 뭔가 구린내를 맡은 낚싯줄은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뭉치 사이에서 허우적대면서 몸을 가눈 낚싯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쓰레기트럭 위였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다면 몸이 어딘가 쑤시는 것 빼고는 너무도 정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낚싯줄은 기적을 보았다. 하루에 두 번이나. 낚싯줄은 그날을 마지막으로 일을 관두었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빵꾸 얘기와 비슷하게 느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그분을 뵙게 되는 일이 남았지.”

큰손은 얘기를 마저 했다.


큰손은 두목에게 전달받은 물건을 한 달동네로 배달하는 중이었다. 두목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만날 사람은 한때 ‘낚싯줄’로 불렸던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큰손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가 행한 일과 업적이라 할만한 행보를 그리고 어떻게 관두게 되었는지까지도.

“현역에 계실 때 나를 많이 봐주셨던 분이시니. 최대한 깍듯이 대하도록 해라.”

두목의 말이었다. 최대한 깍듯이. 두목의 말이니 당연히 따라야 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낚싯줄과 관련된 얘기를 들어보면 마지막은 꼭 은퇴가 나온다. 확실히 너무 특이한 경우이긴 했다. 기적을 봤다고

관두었다니. 그때마다 큰손은 궁금한 게 있었지만, 이 질문의 답은 오로지 낚싯줄만이 해줄 수 있었다. 과연 질문해도 될까 망설여졌다. 거기다 초면인데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트렁크에서 물건을 꺼냈다. 큰손은 허름해 보이는 집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누군가?”

안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자분이 보내서 왔습니다!”

두목이 말해준 은어였다. 안에서 문이 열렸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체구의 주인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어서 오게. 그 녀석이 보냈나 보군. 그건 내려놓게.”

큰손은 물건을 내려 놓으면서 집안을 좀 살폈다.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집안에는 여인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설마. 큰손은 낚싯줄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누구도 성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으며 청부살인을 하기에 좋은 점이었다. 그래도 낚싯줄이 여성이라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오느라 수고했네.”

큰손은 여인의 손을 몰래 살펴보았다. 손의 중앙에 움푹 한 줄이 깊게 그어져 있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큰손은 즉각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낚싯줄은 털털하게 웃었다.

“은퇴한 할망구한테 뭘 그리 깍듯이 대하나. 그 녀석이 그리하라던?”

“아닙니다!”

“반응을 보니 소싯적 기억이 나는군. 상대 앞에서 낚싯줄을 꺼낼 때 날 보던 표정이 딱 자네야. 그리고 그만 소리 지르게. 귀가 다 윙윙대니.”

낚싯줄은 얼굴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큰손은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게.”

낚싯줄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큰손이 느꼈던 것은 의문이었다. 굉장히 검소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가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지만. 전직이 암살자인 사람이 조그마한 마당 딸린 초가집 같은 곳(다행히도 지붕은 볏짚이 아니었다.)에서 산다는 게 의아했다. 낚싯줄은 방의 한가운데 작은 상을 하나 피더니 앉으라고 했다. 잠시 후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전부리를 담은 그릇과 찻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집과는 영 매치가 안 됐다.

“냉큼 들게.”

큰손은 시키는 대로 맛있게 주전부리와 차를 음미했다. 중간중간 낚싯줄에게 두목의 안부를 전하고 낚싯줄이 두목이 잘 지내느냐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응답했다. 분위기가 너무 편하게 느껴져서 큰손은 낚싯줄이 이모라도 되는 줄 알았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들어 봤나?”

문득 낚싯줄이 물었다.

“맡으신 일들 대부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은 은퇴로 끝나는 이야기들이었죠.”

낚싯줄은 재밌다는 식으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나? 혹시 들은 게 있다면 말해보게.”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어떤 이는….”

큰손은 선배님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연세도 그렇고 두목의 은인이셨다.

“실은 선생님께서 살인이 지겨워서, 크게 다쳐서, 광인이…. 뭐 여러 가지 들었지만 소문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코나 귀 보기 좋을 대로 걸어대죠.”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뭐가 진짜 갔나.”

낚싯줄이 물었다. 큰손은 이미 친근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숨김없이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살인이 지겨워 보이시는 분은 아닙니다. 지겨우셨으면 별명 또한 못 가졌을 테니 말이죠. 부상은 확실히 제 눈으로 확인한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정신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믿지는 않았지만, 기적을 보신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낚싯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낚싯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대화로 돌아왔다.

“늙어서 그런지 말상대가 이리도 좋군.”


낚싯줄은 큰손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번의 기적을 보았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의 초반에 큰손은 영화를 보는 소년처럼 흥분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놀란 표정만 지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입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다야. 이후로 떠돌다 이곳에 정착했지. 별다른 이유는 없었네. 이곳은 가난한 동네에 기회가 되면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하는 곳이기는 하지. 그런데 보자마자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어. 돈은 죽였던 이들의 가족이나 관계가 있는 자들에게 주었지. 그마저도 없으면 손님 대접용으로 쓰고 있고.”

낚싯줄은 손으로 상에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

“무슨 뜻으로 이곳으로 이끄신 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게 악하다고 한다면 나를 가만히 있게 만드셨으니 성곤하신 게지.”

큰손에게 다시금 언제나 궁금해 마지않던 질문의 속삭임이 찾아왔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절제는 사람에게 너무 힘이 드는 시련이었고 큰손도 사람이었다.

“선생님. 무례한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큰손이 말했다. 낚싯줄은 큰손과 눈을 마주 보았다.

“치사하군. 그렇게 말하면 허락을 안 해줘도 궁금해서 손해고 해줘도 손해 아닌가?”

낚싯줄은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큰손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질문해보게. 이미 자네가 나에게 해준 게 있으니.”

낚싯줄이 말했다. 큰손은 낚싯줄을 바라보고 입을 통해 속삭임을 해방했다.

“선생님은 살인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큰손의 질문에 낚싯줄은 깜짝 놀랐다. 일을 그만두고 이곳에 정착하기까지도 정착을 한 지도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하지만 낚싯줄을 확실하게 따라다닌 것이 있었다.

“자네는 질문을 하기 전 굉장히 망설여졌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절제를 발휘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거야….”

큰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낚싯줄은 두 손바닥을 보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실은 나도 그래. 그리워하느냐고? 그리워하는 정도가 아니야. 그 시절을 갈망하고 있네. 나는 일에서 느끼는 작은 쾌감까지도 좋아했지. 정말이지 천직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사람이 죽으면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을 알고 있나? 난 지금도 기억해. 아주 생생하게. 기적이 나에게 가져다준 충격과 깨달음도 정말이지 강렬했지 하지만 일이 나에게 주었던 것과는 달랐어. 과연 죽기 전에 그와 비슷한 것이라도 느껴볼지 의문이 드는군. 그래.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다르지. 난 변하지 않았어. 단지 참고 있을 뿐이지.”



“달동네에서 사셨던 분이라 메두사에 당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반기셨을지도 몰라.”

큰손이 이야기를 마칠 때쯤. 중탕은 물로 목을 축이고 목을 풀기 시작했다. 준비가 끝난 중탕이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해줄 건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주관적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둘게. 우선 본성이 과연 있기는 한지도 의문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싶은 거야. 시대와 환경이 사람을 좌우한다고.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중탕은 앞에 놓인 나이프를 손에 집어 들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효자의 모범이 뭐겠어?”

중탕은 손에든 나이프로 접시에 놓인 방울토마토를 하나하나 꽂아서 꼬챙이로 만들었다.

“당연히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인 영웅이 효자지. 칼에 피를 묻히면 묻힐수록 좋은 거야. 요즘 효자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시대와 환경이 다르니까. 겉모습이 멋지면 영혼 또한 훌륭하다 믿는 시대와 주위에서 작고 큰 전쟁이 일어나는 환경이 영웅이 어떤지를 결정한 거지. 어느 부분에서 본성이 관여할까.”

중탕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아무 데도 없어. 오로지 행동과 결과만이 있을 뿐이지. 지금 얘기하는 본성도 실은 후천적이 아닐까 싶어. 본성이라는 종이 위에 영향이라는 색을 칠하는 거지. 어떤 것들은 덧칠해지고 완고하게 남아있는 것들이 있는 거야. 그 때문에 선택을 두고 고민을 하게 되는 거고.”

몇몇은 이해한 듯 수긍하는 표정이었고 몇몇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중탕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세상에 아무나 붙잡고 살인을 할 수 있느냐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대부분은 엄두를 못 내거나 했다고 해도 이후에 생활을 잘 꾸려나갈지 두렵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어디서 왔을까. 그게 바로 환경이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 시대와 환경에 그리고 가족도. 사람을 사물에 비교할 이유는 없지만 안될 이유도 없지.”

중탕은 컵에 담긴 물을 수저로 약간 떠서 바닥에 흘렸다.

“물은 지구에서는 떨어지게 되어있어 중력에 의해서, 그런데 지구 밖으로 나간 물은 떨어지지 않잖아. 알다시피 무중력이기 때문에. 사람도 똑같은 거지.”

모두 이해한 얼굴이었다.

“중탕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말하려는 본성의 근본은 달라도 성질은 오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고 봐도 되겠어?”

내가 말했다. 중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넌 어때?”

중탕이 자신의 연인에게 물었다. 남자는 깜짝 놀라더니 손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앞으로 내저었다. 남자의 표정은 차의 불빛을 본 고라니와 비슷했다. 당황한 그는 생각할 틈도 없었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응?...난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해.”

남자는 대답을 하고서도 중탕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네 생각을 말하라고 무조건 동의만 하지 말고.”

중탕은 찡그린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자신이 또 뭔가 잘못한 게 있는데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아니. 아니. 듣다 보니 자기 말에 공감이 간다는 뜻이었어…. 그 외! 식성도 군대 가면 바뀌잖아? 하하.”

“싱겁기는. 뭐 됐어.”

남자는 위기를 넘긴 표정이었다. 중탕의 얘기가 끝나고 더 의견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없지?”

나는 손을 모아 서로 비볐다.

“그럼 투표를 시작하기 전에 이건 연습이라는 것을 알아둬.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말한 주제가 정확히 어떻다고 판단할 수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지. 게임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를 알기 위한 연습이라 생각해 주길 바라. 다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짜는 투표가 끝나고 다음 주제에 있지. 불륜이 용납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된다, 안된다, 두 개의 마음이 공존할 수 있어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어느 한쪽에 자그마치 나마 마음이 기울 거라는 거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을 거야.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 있어?”

이런 식으로 묻는다는 것이 굉장히 치사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 만약 총을 보여줘야만 했을 상황이 왔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주제는 두 가지의 선택만 남을 거야. 따라서 사람 수에 따른 승리와 패배가 나뉘겠지. 우린 홀수니까. 그러면 게임은 끝나. 우선 투표부터 시작해 보자.”



모두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자신의 이름을 적고 투표를 하라고 했다. 고민하는 이도 몇 보였지만 금방 적어냈다. 결과는 오란 6표 후두 3표로 오란팀의 승리였다. 내 쪽에는 큰손과 큰손의 연인이 있었다. 대부분(나빼고) 자신의 연인과 같은 선택을 했다. 중탕의 연인은 같은 선택을 한 것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결과에 대해서 저마다 서로에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의견을 내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어떤 점에서 공감했는지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조짐이 보일 때 내가 말을 꺼냈다.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여. 활기찬 건 좋은 거지. 밖의 상황이 어떤지는 몰라도 이 분위기를 다음에도 이어가 보자고.”

오란팀 쪽을 쳐다보니 진수와 눈을 마주쳤다. 연습게임에서 의견을 내지도, 말도 하지 않았던 진수는 이번에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웃음도 같이. 오란은 그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진수. 먼저 얘기할래?”

웃으면서 말을 꺼내면서도 뭔가 찝찝함이 남았다. 곧 불쾌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진수는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래. 나부터 시작할게.”

진수는 팔 한쪽을 오란의 어깨에 둘렀다. 내 웃음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하마터면 육두문자가 나올 뻔했다. 일어나려는 몸을 의자에 간신히 고정했다.

“후두 너의 말은 우리가 지금 이런 사이라는 거지?”

진수는 보란 듯이 오란을 끌어안았다. 오란은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때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잠깐 우주에 베일이 드리운 것 같이 아무것도 진수 빼고는 보이지 않았다. 진수는 끌어안은 팔을 다시 풀고 얘기를 시작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아마 이거 때문만은 아닐 거야.”

진수는 하반신에 자신의 분신을 가리켰다.

“내가 여기 혼자 온 이유, 아직 아무도 모르지? 지금 말해줄게. 아주 재밌을걸.”

진수는 자신의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결국에는 짧게 하! 소리를 내는 거로 회상을 끝냈다.

“직업상 자주 해외로 돌아다니는 일을 많이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 거야. 통역사니까 당연한 거지만. 실은 그 문제로 아내와 싸웠어. 더 웃긴 건 일을 많이 해서 싸운 게 아니라 아내의 고민 탓에. 그 대단하신 고민이 해외로 간 내가 바람을 피울 거라는 의심이었지.”

진수는 손가락으로 숫자 넷에서 다섯 사이를 고민하다 넷에서 멈추고 이내 말했다.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야. 여자들은 굉장해. 조금만 행동이 달라져도 깨달아 버린다니까. 아무튼, 결국에는 일이 터져버렸어.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있나 봐. 메두사였어. 해외에서 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두 너의 전화를 받았지. 속으로 생각했어 ‘잘됐네. 이번 기회에 내 버릇도 고치고 관계도 회복해야겠다’ 여기까지는 좋았지.”

진수는 더는 웃지 않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난 아내를 찾았어. 그런데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찾은 것은 아내방에서 나온 쪽지 한 장뿐이었지. 쪽지에는 손으로 적은 한 줄 글귀가 적혀있더군. ‘잘 있어.’ 그게 끝이야. 언제 한 번 아내와 헤어지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었어. 솔직히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상황이 갑자기 닥쳐오니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방구석에 앉아있었지. 살면서 그렇게 목적이 없는 것도 처음이었을 거야. 그러다 문득 살기 위해서 그랬는지 목적이 생겼다는 게 기뻐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곳으로 오고 있었지.”

진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란이 나와 눈이 맞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시작은 단 한 번의 눈 맞춤일 거야. 그거면 충분해.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느낌은 같았을 거라는 얘기야.”

진수는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누군가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화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질투였다. 내가 보지 못한 오란의 모습을 보았을 진수에 대한 질투가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 말을 꺼내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진정을 하는 게 힘이 들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보고 손을 맞잡기도 했다. 어느 정도 목소리가 나올 것 같자 나는 말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해줘.”

말을 마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 아내랑 바람을 펴?! 당장에라도 말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 혀를 깨물고 있어야 했다. 진수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 과연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 참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나의 끈만을 놓치지 않도록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이 끈을 놓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장담하는데, 좋은 방향은 아닐 거다. 하지만 진수가 내적 갈등을 통해서 어떤 말을 꺼내 든 그 말이 진실이기 바랬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벌인 일은 금방 식어버리는 일이 태반이지.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어져. 그렇다고 당시 느꼈던 감정이 가짜라고 생각할 순 없을걸. 당시에는 아주 간절하게 느꼈으니까.”

진수의 말이 맞았다. 욕망은 아가리를 한 번 벌리면 다물 줄 모르다가도 배만 부르면 어디 다른 게 없나 둘러보는 놈이었다. 이미 먹어봤던 거라면? 신경도 안 쓴다. 욕망은 줄일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다. 욕망을 죽인다는 것은 의지의 상실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수의 말에 공감한다. 오란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이 똑같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떻게 매 순간이 처음과 같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에 지루함이란 단어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어가 있다는 것은 그런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필요했기에 만들어졌다는 말이고 그런 범주에 없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형용할 수 없는. 나는 지금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온 우주가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냐고 한다면(기억은 원래 훌륭한 영화감독의 자질을 타고나서 각색을 맘에 들게 잘한다.) 글쎄….

“그리고 당시에 용납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면 난 무조건 될 수 있다고 할 거야.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생각은 하나야. ‘그때는 그게 옳은 것 같았어.’”

진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나는 진수가 과거에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수는 과거에 저질러진 일에 대해 현재의 내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과거를 보지 않는다면 실수가 뭔지 알 길이 있을까. 실수가 가져올 미래의 재앙도 과거를 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저 닥쳐온 일일 뿐이다.(머리에 날아오는 총알까지도. 암.)

과연 실수가 맞을지도 의문이다. 옳다고 믿고 행동했고 그거면 됐는데 어떻게 실수라고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나’라고 하는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문제고 붉은빛 앞에서 느꼈던 불쾌감이 진실인 게 문제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말해야겠어. 나를 빼고 둘이 아주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나는 말이야….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거야. 행복을 빌어줘? 미친 소리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은 이기적이거든.”

말을 할수록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떠나갈 때 과연 누가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그것도 연인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사랑한 이가 맞겠는가. 혹시라도 둘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크고 작은 말다툼과 실랑이가 지나 마지막에는 바지 뒤에 있는 총이라 생각했다. 그 장면 밖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과정이 어떻든 결론은 총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기쁘게 해주는 것도 나를 더 사랑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지.”

나는 오란을 쳐다보았다. 오란의 표정은 일관되게 나를 쳐다보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마치 할 말은 더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속삭임이 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투가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이미 오란은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이 들자 마녀 할멈의 손이 맨살을 만지는 것처럼 소름이 돋고 피도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버리고 있었다. 생각의 줄기가 어딘지 몰라도 잘라버리고 싶었다. 흐르다 못해 철철 넘치고 있는 탓에 눈만 껌벅이고 있을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나도 동의해. 뭐 내가 하는 짓은 정말로 이기적이지만.”

빵꾸가 말했다. 빵꾸가 있어서 다행이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시선을 돌려준 탓에 생각을 떨쳐버릴 시간이 생겼다. 현실을 마주하니 고통스러웠다. 그것도 아주 고약 할 정도로. 슬슬 이 게임에 낌새를 눈치채는 이들도 있었다. 중탕과 큰손이 그랬다. 둘은 진수와 나의 발언에서 그냥 게임이라 하기에는 너무 진지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꼈나 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이걸. 아 그래!. 난 한 번도 약속 시각을 가져본 적이 없어. 그냥 내가 만나고 싶을 때 가. 밤낮 신경 쓰지 않고.”

하지만 속을 알 리 없는 빵꾸는 순전히 게임을 위해 의견을 제시했다. 빵꾸는 만나는 여자가 하루에 한 번 바뀐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지금 옆에 있는 여인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 신기한 것은 새로 여자를 만나려는 원동력이었다. 빵꾸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으레 하는 말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결혼 할 것 같아! 진짜라고!’ 하루마다 사랑이 바뀌는 게 재밌는 구경이기도 했지만, 많이는 아니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랑을 하는지 이해를 해보려 해도 안 됐다. 그저 다른 여자를 볼 때마다 놀라기만 했다.

“대부분 그러면 싫어하지만, 어떡하겠어?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저 말이 진짜 같아서 감탄만 나온다. 저런 사랑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시야와 이해는 여태껏 보고 겪은 세계 안에서만 헤엄을 쳐서 다른 세계를 판단할 수 없었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않겠나?

“여자가 널 만나고 싶을 땐 어떻게 하는데?”

큰손이 물었다. 빵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질문한 사람을 무안하게 할 정도로.

“당연히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아니면 안 보는 거지.”

큰손은 괜한 걸 물었다는 표정이었다. 녹음된 라디오를 트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여자가 네 집까지 찾아오면 나갈 거냐?”

그런데도 큰손은 라디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궁금했는지 질문을 계속했다. 잠깐 라디오가 정지했다 다시 재생으로 돌아갔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마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겠지?”

“퍽이나.”

중탕도 합류했다. 보다보다 못 참고 내뱉은 것 같았다. 중탕의 표정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겨있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네. 날 별로 안 좋아했나?”

“그랬겠지.”

큰손은 이미 끝을 봤다는 투로 대답했다.

“아니 왜? 내가 어때서? 좋아서 만나러 갔는데.”

빵꾸는 순전히 놀람만을 느낀 표정으로 나머지 해야 할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도 비슷하겠지만 이해를 못 하는 것들의 끝에는 물음표가 붙기 마련이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가진 한계였다. 왜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할까. 보고 싶은 대로 왜곡(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하고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 하는 일은 왜 계속 일어날까. 원인을 안다고 해도 계속해서 벌어질 일이다. 왜냐하면, 원인을 눈앞에 두고도 못 볼 테니까.

빵꾸가 뭔가를 놓친 것 같이 나도 뭔가 놓친 것이 있을까. 있을 거다.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중탕과 큰손은 서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무튼, 내 여자가 바람이 난 걸 내가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거야. 나랑 일이 다 끝나고 남남이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결코 좋게 끝나지는 않을걸.”

빵꾸는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서 더는 말하기가 싫었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너라면 찾아가겠지.”

중탕이 대꾸했다. 중탕의 눈매는 여우 같았다. 놀릴 거리 하나를 막 잡은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는 넌 어떤데?”

빵꾸는 짜증이 난 찡그린 표정으로 방어적으로 물었다. 중탕은 옆의 연인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중탕이 쳐다보자 ‘이번엔 뭐지?’하는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중탕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남자의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내 포기한 게 아닐까 싶다. 중탕은 남자에게 의견을 묻는 대신 손 한쪽의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남자는 깜짝 놀랐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사랑은 말하자면 계약이지. 아니 계약은 너무 딱딱하게 들리네. 약속이라고 하자.”

중탕은 다른 손으로 남자의 손바닥을 보란 듯이 마주 잡고 악수하듯이 흔들었다.

“응? 이런 거라고. 내가 지금 얘랑 살을 맞대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이겠어?”

중탕은 아이에게 설명하듯이 빵꾸에게 말했다. 중탕은 남자의 손을 내려놓았다. 남자는 수줍어하며 두 손을 모았다.

“시간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서로 대면하려고. 이렇게 시간까지 들이면서 만나면 서로 지켜줘야 할 약속이 암묵적으로 생겨.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만나지 마라, 네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을 쓰듯이 나도 너에게 쓰고 있으니.’ 라던가 ‘서로가 좋아해서 만났으니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잘 해봐 우리.’ 이런 거.”

확실히,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은 없었지만, 상대가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 또한 나도 자제를 해야 하는 게 서로를 위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구도 기분이 더럽기 싫을 테니. 이 생각을 하니 또 울컥했다. 오란이 옆자리에 앉아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있기를 바라겠어. 행여 여러 명과 결혼할 수 있다고 인정이 되는 사회에서도 그 상황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중탕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다가 내 쪽을 흘끗 쳐다보고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결과가 좋으려면 과정 또한 좋게 흘러가야 해. 그게 내 규칙이고 불륜이 도움된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녀는 이렇게 의견을 마무리 지었다.

“너무 많은 것 같다. 사람이 사는 방식 말이야.”

큰손이 말했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법이나 도리 같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말이야.”

큰손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그리 정직한 일은 아니지만, 문화적 현상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자.”

큰손은 헛웃음을 지었다.

“중요한 것은 제멋대로 사는 이들을 몇몇 손을 봐줘도 세상에는 넘쳐난다는 말이지. 원래 규칙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키지를 않아. 그래도 서로 존중은 해줘야지.”


존중이라. 오란에게 있어서 나에 대한 존중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온 것? 아니면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한 것? 처음부터 이런 일이 없게 만드는 존중은 없냐 묻고 싶었다.

“나 같은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서로 추구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거기에 나 혼자만이 있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지켜야 할 선을 넘으면 다시는 건너올 수 없게 돼.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지.”

큰손은 짧게 자신의 의견을 끝냈다. 큰손은 마지막 말을 의미심장하게 강조했다. 나는 생각했다. 오늘이 평화롭게 지나가고 오란이 진수와 헤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훗날 오란에게 다른 기회가 생겼을 때 오란은 거절할 수 있을까? 오 세상에 내가 지금 오란을 안다고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확신이 갔다. 그녀는 기회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행동은 바지 사이에서 주장을 펴고 있는 리볼버뿐이었다.


마지막 투표가 다가왔다. 솔직히 좀 떨렸다. 진수에게 총을 겨눌 생각을 하니 짜릿한 기분이 들어서. 물론 투표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난 내 이름을 적고 다시 밑에 내 이름을 적었다. 다른 이들을 쳐다보니 이번에는 처음보다 의견이 좀 갈리는 것 같았다. 중탕과 그녀의 연인은 아니었다. 빵꾸와 큰손은 서로의 연인과 대화를 나누다 이내 서로 좋을 대로 적게 결정을 한 것 같았다. 부디 선택을 잘하기를 빌었다. 모두가 투표를 끝내자 나는 용지를 하나씩 펴가면서 투표자와 찍은 팀을 불렀다.

“큰손, 후두팀”

이렇게 시작을 해서 두 장이 남을 때까지 계속했다. 현재까지 결과는 후두팀은 후두, 큰손, 빵꾸, 중탕 4명과 진수와 오란팀은 진수, 빵꾸의 연인, 큰손의 연인으로 갈렸다. 나는 마저 한 장을 집어 적혀있는 글자를 읽었다. 결과는 중탕의 연인이 후두팀을 뽑아 나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는 나머지 오란이 적었을 종이를 보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결과는 나왔는데 그게 중요할까.

“음. 결과가 나왔네. 후두팀 승리야.”

내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오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억양이 없이 말했다.

“고맙네, 진 팀은 벌칙이 있다는 것도 알지?”

웃음을 지으려 해도 잘 안됐다. 과연 잠시 후에도 축하해 줄 수 있을까.

“그럼 진 팀과 이긴 팀은 서로 자리를 나눠줘.”

잠시 후 식탁 중심을 기준으로 양 팀이 나뉘어 섰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벌칙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모두 잠시 눈을 감아. 내가 뜨라고 하면 그때 뜨면 돼.”

모두 눈을 감은 사이에 손을 뒤로 가져가 총을 꺼냈다. 손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눈을 떠.”

손에 들린 총을 본 이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놀람에서 이내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뀌었다.

“말해두겠는데 이거 진짜야. 확인해볼 사람은 말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의심을 거둔 표정은 아니었다.

“이게 벌칙이야.”

나는 손을 위로 들어 총알 한 발을 발사했다. 생각보다 방아쇠 당기는 게 굉장히 힘이 들었다. 힘겹게 한 발을 발사하자 귀가 윙윙댈 정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안을 매운 것은 소리만이 아니었다. 의심을 거둔 이들의 표정에는 공포가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대부분 본능적으로 몸을 아래로 숙이려 했다.

“움직이지 마!”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지금부터 얘기가 끝날 때까지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는 사람은 쏠 거야. 과녁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여기서 죽어도 메두사에게 당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나는 천천히 인원을 둘러보았다. 중탕과 큰손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표정이었고 빵꾸는 아직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엉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진수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얬다. 옆에 있는 두 여인은 떨고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지. 나는 어젯밤에, 정확히는 오늘 새벽이지, 저 둘이 방안에 같이 있는 것을 알게 됐어. 자세한 설명을 원해? 부정하는 거라도 있나?”

나는 총구를 둘에게 가리키고 휘저었다. 잔뜩 찌푸린 내 얼굴로도 설명이 충분했는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시 곧바로 방문을 열지 않은 이유는 나에게 있어. 오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확신이 안 서더군. 잘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알게 됐지. 내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행동뿐이라는 것을. 이 게임의 목표도 실은 내 판단이 옳은지 너희 판단이 옳은지 가리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그냥 둘을 죽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친놈 취급하고 몰아낼 가능성도 있었고, 이렇게 팀을 나눠야 저항도 덜 심하고 잘하면 공범자로 엮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까지 꺼내진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결론이 났잖아? 만약 반대였다면 총구는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겠지. 너희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겠어.”

나는 문득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해적처럼 비열하게 보일까 그렇지 않으면 응당 정의의 철퇴로 응징하듯 당당한 표정이었을까.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광인일 것 같았다.

“나는 이제부터 오란과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우리 팀이 좀 도와줘야겠어. 어차피 진 팀은 모두 벌칙을 받게 될 거야. 그러니 각자 한 명씩 맡고 죽여주길 바라.”

이 말에 다들 크게 동요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데?”

중탕이 거칠게 물었다.

“알잖아?”

나는 웃음을 지으면서 총을 까딱했다.

“뭐가 문제야? 네가 하지 않아도 내가 할 텐데. 죽을 사람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명해 주고 싶어서 그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모두 선택을 했고 그에 따라 결과가 있을 뿐이야. 벌칙이라고 무슨 물 폭탄 맞고 끝나는 거로 생각했어?”

“넌 미쳤어.”

중탕이 중얼거렸다. 난 못 들은 척했다. 지금의 난 미쳤다기보다는 그저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흥분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오란. 이쪽으로 와.”

홀의 중앙 카펫이 깔린 곳으로 오란을 불렀다. 이곳에선 식탁에 모여있는 모두가 보였다. 어느 정도 거리도 있고 순식간에 덮칠 수는 없을 터였다.

“지금부터 난 오란과 할 말을 할 거니까 주방에서 벗어나지 말고 각자 할 일해.”

정적이 일다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진짜야?”

빵꾸는 첫말이 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뒷말은 소곤대며 물었다. 딱히 대상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럼. 후두 눈 못 봤냐. 우린 이미 빠져나갈 수 없어.”

큰손이 단호하게 말했다. 큰손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때 진수가 나서며 말했다.

“죽이는 척만 하는 건 어때. 기회를 봐서 덤벼들면…”

“닥쳐.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데.”

진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중탕이 중간에 가로막고 짜증을 냈다.

“빌어먹을.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여기는 밖에 비하면 좁아터진 벙커 안이라고!”

최대한 자제를 했지만, 분노와 증오를 숨길 수는 없었다. 진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후두가 이 자리를 벗어난 것만 봐도 녀석은 미쳤지만 판단을 못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녀석은 지금 흡혈귀에게 말뚝을 꽂는 것도 모자라서 사체 입에 마늘도 쑤셔 넣을 거다.”

큰손은 진지하게 말했다.

“도박하기에는 너무 정상적으로 눈이 돌았다는 거지?”

빵꾸가 소곤댔다. 중탕과 큰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아 아니다.”

빵꾸는 자신이 생각해도 되지도 않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남은 선택은…”


중탕과 큰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보다 천천히. 진수는 흠칫했고 옆에 있는 두 여인은 눈을 크게 뜨고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흘러나오는 흐느낌이 손의 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주방은 이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하나는 안전지대로 또 하나는 묫자리로.

“이건 말도 안 돼.”

진수가 저항했다. 초조해 하는 핏기 가신 얼굴이 이제는 마치 가면처럼 보였다.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진수에게 큰손이 말했다.

“너라면 고작 말로 후두 기분을 설명할 수 있겠냐?”

그는 이렇게 말을 마치고 행동에 나섰다.


뒤에서 보고 있으니 큰손은 진수를 빵꾸는 큰손의 연인을 중탕과 그 연인은 빵꾸의 연인을 각각 맡은 것 같았다. 잠시 후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나도 할 일을 시작했다.

“왜 그랬냐고 묻지는 않을게. 어차피 이해 못 할 테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물었다. 복잡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슬픔 또는 분노 비슷한 것이. 최대한 무표정하게 있으려 했지만 아마도 지금 내 표정은 굉장히 억울해 보였을 것이다.

“완전히 몰랐다고 장담은 못 하겠어.”

오란이 순순히 대답했다. 나에 반해 그녀는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이렇게 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주먹을 내 관자놀이에 대고 문질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그럼 이제 내가 뭘 할지도 알겠군.”

“쏘겠지. 난 죽을 거고.”

“맞아.”

마지막에 한 말은 평상시보다 떨림이 심했다. 나는 과연 오란을 죽일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일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붉은색 문만 머릿속에 떠올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죽일 수 있다. 훗날 그런 일을 또 겪을 바에야 지금 당장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와 심장 둘 중 어디를 조준할지 망설였다. 머리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끝날 것 같았고 심장은 얼마 동안은 더 살겠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조준했다. 일이 다가올수록 심장은 더욱더 쿵쾅거렸다. 이제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는 지체하기 힘들었다.

“잘 가. 오란.”

나는 울먹거리듯 중얼거렸다.

“잘 지내….”

오란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만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처음보다는 쉽게 당겨졌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지. 공이가 뒤로 밀리고 실린더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소리가 다시 홀을 매웠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쓰러진 오란에게 다가가기 전에 내가 본게 맞나 의심을 했다. 총알을 발사하기 직전에 오란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웃음에 담긴 의미는 잘 해보란 듯이 비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보았을 때 짓는 웃음이었다. 오란의 표정은 다행이라고 말없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해 보였다. 갑자기 진수에 대한 증오와 오란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대신에 일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뭔가 놓친 것이 있나. 목 안에서 구역질이 올라오고 있었다. 몸이 가지고 있던 열은 빠르게 식어서 핏기가 점점 얼굴에서 사라졌다. 나는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연인에게 다가갔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오란의 표정은 자신이 보았던 게 맞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한 손을 오란의 어깨 밑으로 가져가 꿇고 있는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오란을 죽였다.


한참을 울고 소리를 지르다 목이 다 쉬었다. 나는 이제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리볼버에 담긴 총알이면 못 해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살했는데 혹시라도…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정말이지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내가 죽었는데 나에게 남은 게 지옥뿐이라면….

지금 나에게 지옥은 분명했다. 육체가 없는 세계가 있다면 늙지 않을 것이고, 늙지 않는다면 내가 만든 오란의 허상 또는 오란에게 영원히 고통받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두려워졌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탁에는 아까 펼쳐보지 않았던

오란의 쪽지가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쪽지를 집고 펼쳐서 안에 쓰여 있는 두 줄을 눈으로 읽었다. 거기에는 사랑스러운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란. 그리고 내 본명이 적혀있었다. 나는 실없이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 딱 맞는 지옥이 완성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상황은 다 정리가 된 듯싶었다. 쓰러져있는 진수, 두 여자 그리고 예상에는 없지만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멍청하게 왜 그랬어!”

중탕이 연인에게 소리쳤다. 중탕의 눈에는 눈망울이 맺혀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중탕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연인의 옆에 앉아 지혈함과 동시에 뭔가를 찾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치료 도구 같은 거 없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있다고 해도 저 정도면 수술이 필요할 텐데 여기에 의사만큼의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중탕의 연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중탕은 뭔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말했다.

“병원에 데려가야겠어.”

이 말에 모두 놀라서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나 또한 정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여…. 여기서 나간다고?”

나는 목이 쉬어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벙커로 나가면 메두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메두사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메두사를 만나서 죽기라도 한다면…적어도 지금은 안됐다. 벙커에 들어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상황을 지켜보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게는 안 돼.”

큰손이 나서며 강압적 태도로 말했다.

“그럼 나 살리자고 이렇게 된 녀석을 내가 죽게 내버려둬!”

중탕이 변호하듯 소리쳤다. 아마도 빵꾸의 연인과 승강이를 벌였던 것 같다. 주방에서 칼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자신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중탕에게 휘두른 흉기를 중탕의 연인이 대신 맞았겠지.

“우리 둘만이라도 내보내 줘. 부탁이야.”

중탕은 울먹이며 호소했다. 중탕의 연인이 중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나에게서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해서 확실히 깨달았다. 누군가 정을 몸에 한순간에 박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고 내 이기심도 한 몫 했다.

“메두사가 공기로 전염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빵꾸가 나 대신할 말을 해주었다. 중탕의 표정은 절망에서 서서히 분노로 바뀌어 갔다. 그러다 평소대로 돌아왔고 몸을 숙이고 연인에게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고개를 든 중탕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올게.”

“주방을 벗어나지는 마.”

내가 말했다. 이런 말을 한 자신이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이미 떨어질 곳도 더는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게 아닐까 싶었다.

“알았어.”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식품저장고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잠깐.”

나는 중탕을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중탕은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저장고 쪽으로 발돋움해서 빠르게 뛰어갔다. 나는 총을 겨눠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중탕은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손과 빵꾸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식품저장고의 문은 바깥쪽에서 여닫게 되어있다. 문을 못 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탕이 더 빨랐다. 안에서 묵직한 것이 쓰러지면서 내는 소리와 많은 물건이

쏟아지듯 와장창 소리가 같이 들렸다. 큰손과 빵꾸는 문을 열어보려 밀었지만, 식품을 보관하는 철제 단이 쓰러져 막고 있는 상황이라 문을 열 수 없었다.

“모두 물러서! 안 그러면 여기 전부 불 지른다!”

그때 중탕이 안에서 소리쳤다. 나는 안에 무엇이 있었는가 생각했다. 성냥은 있지만, 불이 잘 붙어봐야 대부분 캔이나 냉동고기인데 뭐가 있다고…있었다. 홀의 벽에 붙어있는 벽난로처럼 생긴 등유 난로에 들어가는 등유는 몽땅 저장고에 넣어놓았다. 큰손과 빵꾸는 뒤로 물러섰다.

“우린 나갈 거야! 1분 준다, 빨리 결정해. 안 그러면 오늘 점심 코스는 잿더미밖에 없을걸!”

안에서 흩뿌려지는 액체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이 여기 있는데 어쩌려고.”

큰손이 중탕의 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잘 생각해. 제가 죽으면 여기도 끝이란 사실을. 우릴 내보내 주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야.”

이번에는 아예 콸콸 붙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데리고 나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가까워졌을 때 총으로 쏠 생각이었다. 안에서 더는 붙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철이 바닥을 기는 끼익 소리가 몇 번인가 나더니 저장고의 문이 열렸다. 그녀를 본 나는 일이 꼬여서 이미 매듭까지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총 쏠 생각은 하지도 마.”

그녀는 한 손에 횃불을 만들어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가득 찬 등유 통이 들려있었다. 심지어 옷의 상당 부분이 젖어있었는데 안 봐도 뭐가 묻어있을지 뻔했다. 그녀는 빠르게 번갈아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등유 통이 흔들거리며 바닥에 흘러넘쳤다. 등유는 저장고와 그녀 사이에 길을 만들었다. 큰손과 빵꾸가 가까워 졌을 때 그녀는 입으로 횃불을 물고 양손으로 등유 통을 들어 둘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악!”

둘은 소리치며 물러섰다. 사방에 등유를 뿌린 그녀는 빈 등유 통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쓰러진 연인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성인 남성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고 상황 또한 호의적이지 않았다.

“너희 둘!”

중탕은 온몸이 기름에 젖은 큰손과 빵꾸 둘에게 지시했다.

“한 명씩 위아래 맡아서 들어줘야겠어.”

큰손과 빵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 명은 상체 겨드랑이를 나머지는 하체 무릎 아래를 맡아 들어 올렸다. 그녀와 운반팀은 천천히 주방을 벗어나 홀의 계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 홀의 계단을 차근차근 힘겹게 올라가는 도중 빵꾸가 피 때문인지 기름 때문인지 또는 둘 다에 발을 미끄러져 삐끗했다. 빵꾸는 손이 미끄러져 부축하던 남자의 다리를 놓치게 됐고 남자의 다리는 쿵 소리를 내며 계단에 부딪쳤다.

“뭐하는 거야!”

중탕이 놀라서 뒤쪽을 보고 소리쳤다. 나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중탕을 조준하고 신중히 한 발, 발사했다. 아무래도 나는 실전에 강한 것 같다. 총알은 중탕의 왼쪽 옆구리에 박혔다.

“읔!”

중탕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쪽을 쳐다봤다. 아직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있는 채로. 중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중탕을 조준하고 발사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심장을 맞췄다. 하지만 중탕은 심장에 총알이 박히기 전에 이를 악문 채로 횃불을 큰손에게 던졌다. 그리고 총알이 박힌 그녀는 계단에서 쓰러져 굴러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악! 이런 x발! 으하아아아!”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은 곧바로 큰손의 온몸을 감쌌다. 큰손은 이도 저도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위에서 굴러오는 중탕에게 발이 걸려 두 불덩이가 되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빵꾸는 위에서 내려오는 불덩이 두 개를 동키콩에 나오는 배관공처럼 옆으로 슉슉 피했다.

“어휴, 죽을 뻔 했네.”

빵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빵꾸의 뒤 계단 아래에는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불덩이와 허공을 허우적대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은 고함을 지르는 불덩이 큰손이 있었다. 큰손은 여기저기 두서없이 발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방향이 점점 주방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총을 들었다.


이제는 시체가 되어 타고 있는 큰손의 옆으로 빵꾸가 다가왔다.

“이야…. 이거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네.”

빵구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둘 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시체는 처음 보았을 터였다. 대체 이걸 다 어떻게 정리를 할까. 하지만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여기에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싶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 다 죽은 게 확실하네. 우리 이제 어쩌냐.”

주방을 둘러보다 빵꾸가 말했다.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빵꾸는 중심을 잘 잡지 못한 채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타고 있는 큰손의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모르겠어, 아무래도…. 야!”

나는 오른쪽 발에 불이 붙은 빵꾸를 보고 말을 마치지 못하고 소리쳤다. 빵꾸는 오른쪽 발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이구. 어이구. 후!, 후!”

불씨는 아주 작았지만 조심해야 했다. 빵꾸는 오른발을 들어 흔들고 불어서 불을 제압하려 했다.

“어.”

빵꾸는 중심을 잃고 또다시 미끄러졌다. 저놈의 발을 어떻게든 해야지 원. 이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빵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어!!”

넘어진 자리에는 중탕이 뿌려놓은 등유가 아직 남아있었다. 불은 도화선을 찾은 것처럼 발에서 날름날름 중탕의 온몸을 훑으며 다이너마이트를 찾아갔다. 그 끝은 당연히 저장고였다. 순식간에 대처할 틈도 없이 모든 것이 타기 시작했다. 피부에 화기가 확 하고 몰아쳤다. 공기가 소용돌이치는 순간 나는 멀리서 오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각했다. 이제는 뭔가 느낄 감각과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리치는 빵꾸를 뒤로하고 나는 홀의 시체들이 없는 쪽 계단으로 복도를 올라갔다. 다시 특유의 색으로 빛나는 붉은색, 보라색 등 색의 복도를 지나쳤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살아있는 시체였다. 벙커의 해치가 보인다. 사다리를 올라 해치를 열었다.


남자는 이야기를 마쳤다.

“나는 나의 연인을 죽이고 모든 친구를 죽였습니다.”

남자의 말에서 억양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나요?”

모자를 쓴 여인이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 얼굴로 말했다.

“제 손에는 아직 한 발의 총알이 남아있습니다.”

남자는 손에든 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려워요.”

“혹시 모르죠, 더 좋을지.”

여인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남자는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죠?”

남자는 여인을 노려봤다. 여인은 한 손으로 모자를 벗었다. 남자는 경직되었다. 메두사?. 그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했다. 모자를 벗은 여인의 얼굴은 오란과 똑같았다. 오란이라 말해도 될 정도였다. 여인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자가 받은 충격이 그리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멀리서 들리는 것인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당신의 죽음이기 때문이에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좋아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분간을 못 했다. 그저 그 자리에 딱 멈춰서 서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몸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곳에 왔어요. 그런데 당신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죽음은 당신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은 이미 살아있는 게 지옥이니 말이에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그리고 남자에게서 영원히 떠나면서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당신은 영원히 죽을 수 없을 거예요.”

여자가 떠난 후 얼마 뒤 정신을 차린 남자는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웃음까지 터트렸다. 하지만 정말로 웃겨서 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비웃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죽을 수 없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남자는 총구를 관자놀이에 가져갔다. 남자는 오기가 생겼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사실이 남자에게 있어서 큰 위안이었다.

‘죽음이 어떤지는 내가 확인해 주지.’

남자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탁.

그 소리 말고는 울려야 할, 남자가 살아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남자는 당황했다. 분명히 공이는 총알의 뒷부분을 정확히 때렸다. 남자는 불발탄이 된 총알을 빼고 살펴보았다.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물에 닿은 흔적도 없었다. 실린더에 총알을 다시 재는 남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을 다 올리지도 않고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머리를 조준했다. 그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탁.

남자는 광적으로 방아쇠를 연속해서 당겼다. 그의 몸에서는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주변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탁.탁.탁.탁.탁.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딱 맞는 영원한 지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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