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서투른 남자

by dasdio posted Apr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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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남자

 

겨울도 아닌데 감기에 걸렸다. 정확한 진단은 아니었다. 그 집엔 체온계도 없었다. 간밤에 둘 다 보일러를 키러 거실에 나왔다. 누군 켰고 누군 껐다. 저녁에 둘은 소파에 앉아 어느 나라에서 온 찬 바람 때문에 아침에 몹시 추울 거란 뉴스를 봤다. 먼 나라에서 오는 건 꼭 나쁜 것들뿐이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식탁에 아직 정리하지 못한 식기들이 있었다. 누가 올 거라고 했는데 누가 오지 않아서 음식이 많이 남은 채였다. 그는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은 채 사라졌다. 어느샌가 조금씩 일찍 자기 시작했다. 신혼에는 자정에 시작하는 영화를 보려 근처 극장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도 술을 한 잔 마셨고,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도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다시 마시기도 하고 그러다 서로 같이 목욕하기도 했다. 욕조에서 잠이 든 그를 옮기느라 그녀는 매번 작은 상처를 얻었다. 체질이 살이 연한 탓에 어디 살짝만 부딪혀도 멍이 들었다. 그런 새벽이 지난 아침이면 그는 꾸역꾸역 일어나선 자는 아내 몰래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릇을 다 씻은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주변의 전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 집은 지중해식 목조주택이었다. 두 개의 건물 중앙에 천장이 뚫린 뜰이 있었고 왼쪽 건물엔 차고와 테라스와 서재과 정원이, 오른쪽 건물에는 주방과 화장실과 거실이 있었다. 그건 순전히 그의 취향이었다.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는 오래전 본 집의 도면을 용케 기억했다. 집을 짓는데 한 해가 걸렸는데 그동안 그는 공사 현장에 불쑥 나타나서 집은 곧 인생을 즐기기 위한 마지막 장소란 말을 하고 다녔다. 어디 조용한 곳에 근사한 집을 가지는 일. 그는 그게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다고 종종 말했다.

그녀는 뜰에 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았다. 며칠 전만 해도 더위 때문에 십 분을 앉아 있을 수 없었는데 그새 서늘해진 게 이상한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탁자에 놓인 달력의 날짜를 읽다가 이틀 전이 그의 생일이었단 걸 알게 되었지만, 별 느낌이 없었다. 무슨 일, 무슨 날, 무슨 기념 같은 건 훨씬 전에도 챙긴 적이 없었다. 오랜 가뭄처럼 서운함은 흔적도 없었다. 같은 집에 살지만, 그녀는 오른쪽 건물에 주로 있었고 그는 왼쪽 건물에 주로 있었다. 식사 시간에만 주방에 모일 뿐이었다. 그는 자기 물건에 조금 집착했다. 자기 수저, 자기 슬리퍼, 자기 전등, 자기 손톱깎이와 청소기까지. 그런 건 왼쪽 건물에도 오른쪽 건물에도 어느 구석에서나 갑자기 발견됐다. 그녀는 말없이 그걸 버렸는데 누구도 전혀 찾질 않았다. 뜰은 거의 그녀만 이용했다. 좁고 벌레가 많았지만, 사방이 막힌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물을 자주 주지 않아 시든 잎을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졸았다. 그녀가 일어났을 땐 몹시 추웠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몸이 조금 젖었다. 그녀는 씻지도 않고 옷만 훌렁 벗은 뒤에 침대에 누웠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 아님 유령 아님 원한 가진 사람이라도 느닷없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불안해진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빛이 모든 창문으로 들어왔다. 낮은 온통 낮인데도 밤은 온통 밤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세 번을 꾸역꾸역 잠이 들길 기도하다 결국 그녀는 일어났다. 낮게 가라앉은 먼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뜰을 가로질러 왼쪽 건물의 문을 열었다. 거기엔 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오른쪽 건물로 돌아왔는데 그제야 식탁에 놓인 작은 종이를 발견했다.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 올게.

약국에는 유달리 사람이 많았다. 어느 여자가 약을 한 통 사면 옆에 있는 여자가 그게 뭐냐고 물었고 그러면 의자에 앉아 대기하던 할머니가 일어나 약을 산 여자에게 통을 빌려 소리 내어 글자를 읽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순서를 기다렸다. 의사는 정신이 없는지 연신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자꾸만 떼로 몰려 환자가 들어왔다. 겨우 차례가 된 그녀는 간신히 쌍화탕 한 병을 사서 그 자리에서 단숨에 마셨다.

거리로 나와 조심스레 걷는데 갑자기 별 대단한 병이 아닌데도 오래 아플 것만 같았다.

 

남자는 저녁 일곱 시쯤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는데 옆에 놓인 잡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남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카트를 밀어 넘어뜨렸다. 가위들이 떨어졌다. 한동안 그들은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누가 치워주는 것도 아닌데.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녀였다. 빗과 가위를 주섬주섬 주워 바구니에 넣었다. 남자는 어디 앉지도 않고 가만히 선 채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어설피 몸을 움직였다. 잠깐이지만 그녀는 남자가 몹시 귀찮아졌다. 카트를 거울 앞까지 밀어놓고 나서 문을 조금 열었다. 아주 어지럽고 몽롱했는데도 미용실 안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헤어밴드를 이마까지 올리고 귀를 만지작거릴 때 멀뚱히 선 남자가 아주 작게 물었다.

아직 영업하시나요?

?

머리 자를 수 있지요?

, , 당연하죠, 이쪽에 앉으세요.

그 짧은 거리를 움직이는데도 남자는 뭔가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렸다. 그녀는 미용실 안쪽으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조금 닦았다. 얼굴 중에 어딘가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만졌다. 밤하늘 사이로 담배 연기가 지나갔다. 서준이는 늘 별자리에 대해 말했다. 오리온자리는 아르테미스 여신과 사랑에 빠진 오리온을 오해로 여신 자신이 죽여서 생긴 별자리고 페가수스자리는 메두사 머리에서 나온 피로 만들어진 별자리래요. 그녀는 그걸 어릴 적에 책에서 읽었다고 구태여 말하지 않고 가만히 꽁초를 밟았다. 서준이는 깡충깡충 뛰면서 별을 잡을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엉성하고 우스운 동작이었다. 등 뒤에서 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부부는 곧잘 싸웠으면서도 금방 화해하곤 했는데 그녀는 그럴 때마다 서준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설명할 수 있는 별자리가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엎은 술상에 있던 반찬이나 술잔이 벌써 치워진 뒤였다. 그녀는 언니를 잡고 작게 귓속말했다. 나중에 꼭 언니처럼 살고 싶다. 언니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 기차가 출발할 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녀는 늘 누가 맞은편에 앉았던 거 같고 또 누가 맞은편에서 싸웠던 거 같고 혹 누가 맞은편에서 울었던 것만 같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걸리나요?

그녀는 남자의 몸에 커트보를 둘렀다. 커트보 끝자락으로 남자의 슬리퍼가 삐져 나왔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발등에 밴드를 잔뜩 붙였는데 오래 걸은 모양인지 전부 흐물흐물하게 구겨져 있었다. 남자는 자꾸 꿈틀거리며 낮게 기침을 뱉었다. 기름진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그녀는 가위를 들며 물었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아주 짧게요.

짧게요?

아니, 그렇게는 말고요.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깔끔하게요.

일단 자르면서 여쭤볼게요.

좀 추운데 난방 없어요?

온풍기를 켰다. 쌓인 먼지가 조금씩 따뜻한 기운을 타고 풀풀 날아다녔다. 그녀는 가위를 집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랐다. 머리카락이 무척 뻣뻣했다. 일 년 정도 자르지 않은 모양인지 아주 긴 머리카락인 데다가 손질이 전혀 되지 않아 가위가 잘 들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발기로 조금씩 밀어냈다. 남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잠이 오는 모양인지 하품을 연거푸 했다. 얼굴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놀라 화들짝 움직이기도 하고 발가락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털어내려 몸을 흔들기도 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구레나룻를 천천히 미는데 남자가 돌연 말했다.

너무 더운데 저거 좀 꺼주세요.

그녀는 한 손에 이발기를 든 채로 일어나 온풍기를 끄고 돌아왔다. 그새 남자는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온 전화를 받았다. 한 시간 안에 갈게. 왼쪽 구레나룻를 다 밀고 오른쪽 구레나룻를 밀 때 남자는 아무 신호도 없이 휴대 전화를 꺼내 다시 전화를 걸더니 대뜸 말했다. 십 분 안에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문 좀 엽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녀는 이발기의 전원을 끈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돌아오면 그냥 돌아가 달라고 말하기 위해 이발 기구들을 치우려고 주변을 둘러봤다. 카트는 그녀에게도 남자에게도 먼 곳에 있었다. 남자는 문을 발로 밀었는데 너무 새게 민 탓인지 문이 다시 돌아와 부딪혔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넘어지는 도중에 바닥을 손으로 짚어 머리카락이 온통 묻었다. 관절이 조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헬기에는 여러 명의 군인이 타고 있었다. 낙하산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에 다들 겁을 먹어 누구는 기도하고 누구는 눈을 감았다. 그건 처음이었고 혼자였을 뿐만 아니라 떨어지고 난 뒤에는 누군가 늘 다친단 소문이 있었다. 차례는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다가왔다. 서준이는 제일 마지막에 떨어졌다. 그 높은 하늘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낙하산을 몇 번이나 당겼을 시간에 대해 아무도 해명하지 않았다. 언니의 남편이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시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들은 서준이의 말이 떠올랐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면 별자리가 되는 걸까요. 그녀는 내내 서준이와 함께 다녔다. 별자리가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 말이 입안을 계속 맴돌았지만,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무릎을 탈탈 털며 일어나면서 물었다.

다 자르신 건 아니죠?

, 조금 남았어요.

제가 좀 다 서툴러서요.

괜찮아요, 저도 그래요.

제가 훨씬 나쁜 상태일 거예요.

벨이 울렸다. 그녀는 절뚝이며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남자는 아까 앉았던 곳이 아니라 바로 옆에 비스듬히 앉아 어디가 아픈지 자꾸 끙끙거렸다. 낮고 작은 여러 얘기가 지나가고 겨우 그가 말했다.

의사가 검진받아보래서 받았어.

어떻대요?

내일 결과 나온대.

심각하대요?

모른다니까, 끊어.

끊으라는 말을 한 사람이 먼저 끊었다. 그녀는 다시 이발기를 들고 남자의 뒷머리를 조금씩 밀었다. 잠깐 사이에 찬 바람이 미용실 안을 가득 채웠는지 손이 달달 떨렸다. 남자는 이발기가 목에 닿을 때마다 개구리처럼 폴짝 뛰었다. 아직 다 자르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정수리 부분을 만지며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이발기를 든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문을 닫고 물을 한 잔 마셨다. 남자는 이제 아예 커트보를 반쯤 걷고 청바지를 들어 올려 상처가 났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그냥 이발기 전원을 끄고 카트를 정리하며 까칠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시면 오늘 안에 머리 못 잘라요.

아까 전화 남편이에요?

그렇다네요.

어디 병원에라도 가셨어요?

요즘 몸이 좀 안 좋대요.

부인께선 괜찮으시고?

저도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요. 가슴 위가 쿡쿡 쑤시고 뭔가 멍울이 만져지는 거 같기도 하고. 입맛도 영 없고 기운은 더 없네요. 그러니까 머리 안 자르실 거면 가세요.

혹시 말이에요, 어쩌면 아주 심각한 병일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보실래요?

남자는 아예 커트보를 벗어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어디선가 갈색 가방 하나가 튀어나왔다. 한동안 고장 난 버튼을 누르느라 기를 쓰더니 청진기를 꺼냈다. 청진기는 쇠가 조금 녹슬어있었다. 꺼내다가 한 번 바닥에 떨어뜨려 머리카락이 조금 붙었는데도 남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청진기를 쓰고 소파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 자리에 앉으라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엉덩이 붙일 기색 없이 정승처럼 서서 물었다.

의사예요?

.

여기서요?

돈은 안 받겠습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병인지,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모른다니까요.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죽어요. 평소에 건강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얘기하죠. 그건 건강한 게 뭔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나중에 병원에 가볼게요.

남자는 조금 기가 죽어 청진기를 소파에 올려놓곤 한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반만 깎인 머리가 삐뚤빼뚤 비쳤다. 해외에 어디 유명하지 않은 밴드의 기이한 스타일 같았다. 남자가 가방을 열어 알약 몇 개를 꺼낼 동안 그녀는 간신히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가슴 언저리를 조금씩 손가락으로 만졌다. 분명 뭔가 만져지긴 하는데 그게 어제부터인지 작년부터인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남자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제가 못 미더우신 거 압니다, 여기 들어와서 제대로 한 게 없으니까요.

그런 게 아녜요.

그래도 의사 면허는 진짜입니다.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 아내도 그래서 절 떠났습니다. 서툰 게 하나둘이 아니지만, 밤일도 그렇고 요즘은 이런 사람이 도통 없으니까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언니가 일본 여행 기념으로 선물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발을 내렸다. 아주 기다란 발이라 밖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남자는 신이 난 듯 소파에 놓인 청진기를 들어 다시 쓰고 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가까이 다가가 상의를 올렸다. 청진기는 차갑고 낯선 감촉이었다. 한동안 남자는 여기저기에 청진기를 댔다. 가슴 언저리, 배꼽 근처, 허리와 옆구리에서 겨드랑이까지. 그녀는 눈을 감고 양손을 맞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남자는 오래 청진기 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갈아 젓더니 가만히 혼자 뭘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엠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곡소리가 들렸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런 소리들이 지나간 뒤에야 말했다.

운명을 믿으세요?

?

제가 예전에 불교를 좀 공부했어요. 수박 겉핥기지만. 법화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회자정리거자필반.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에요. 난 그 말을 안 믿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승에 가면 아주 긴 설명을 하는 생각. 지금까지 죽은 모든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고 나면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생각. 부인께선 혹시 그렇게 해서라도 죽은 뒤에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을까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친 사람일까요. 동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정신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다고.

글쎄, 전 그런 걸 잘 몰라서요.

아는 게 없으시군요.

제 분야가 아닌걸요.

부인께선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군요. 혹시 무드셀라 증후군이라고 아세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추억은 항상 아름답다고 하며 좋은 기억만 남겨두려는 심리를 말해요. 지금이 딱 그렇잖아요?

저 죄송한데 혹시 어느 계열 의사세요?

전 작은 치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빨 빼곤 전혀 모르시는 거 아녜요?

저희 일이 그래요. 처음엔 모든 분야의 의학을 배우고 다음에 전공을 정하죠. 그래서 사실 모든 일반인들이 오해하곤 하지요. 부인께선 지금 당장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질병을 꽤 많이 가지고 계세요. 지금이라도 그걸 알아서 다행이지요. 머리카락을 깎고 계실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남편분께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우연히도 좀 서투르지만 괜찮은 의사를 만났다고 하세요. 혹시 실례가 된다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부인을 검진한 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떤가요?

거긴 국밥을 파는 집이었다. 손님은 그들뿐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가 간신히 주문을 받은 뒤에야 그녀는 카디건을 벗었다. 남자는 수저통을 뒤적이다 이내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플라스틱 잔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휴지를 꺼내 수저와 젓가락를 가지런히 정리할 때는 옆 테이블에 부딪혀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나기도 했다. 남자는 가방에서 작은 책을 하나 꺼내 식탁에 올려두었다. 거꾸로 뒤집어놔서 제목이 보이질 않았지만, 얇고 낡은 책이었다. 한동안 텔레비전 소리만 들렸다. 가요 무대에 나온 여자 가수는 자꾸 비틀거렸다. 남자는 책을 펼치며 말했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을 거 같아요?

제가 알아야 되나요?

이건 다 가짜예요. 물론 모든 게 그렇단 말은 아니에요. 이 책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이에요. 법경 같은 거죠. 전부 한자로 적혀 있어서 이걸 읽기 위해서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기억이 있어요. 흰 종이에 하나둘 음과 뜻을 적었죠. 이까짓 게 뭐라고 말이에요. 읽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이걸 읽고 또 읽었어요. 습관처럼. 부인께선 혹시 특이한 습관이 있나요?

, 전 미술관이나 영화관 같은 데서 뭘 보면 숨쉬기가 어려워져요. 그래서 꼭 무릎담요를 챙겨요. 어릴 적에 삼촌에 준 담요인데 그 냄새를 맡으면 진정이 되거든요. 어딜 가든 그 담요를 가지고 다녀요.

그건 스탕달 증후군이나 블랭킷 증후군의 증상 같군요. 흔히 겪은 증후군은 아니지만, 부인은 참 복잡한 사람인 거 같습니다. 여러 가지 병의 증상을 조금씩 겪는 중이니까요. 그런 건 보통 치료하기 어려울 수밖에요. 부인께선 혹시 특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나요?

그냥 평범했어요. 바다 근처의 시골이었죠. 가정집에서 평범하게 공부하고 피아노도 조금 배우고 중학교 땐 수영 교실도 다니고 고등학생이 돼서는 공부도 안 하고. 대학교 이후론 고향에 거의 내려가 본 기억이 없어요. 상견례 땐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셨거든요. 결혼하곤 딱 한 번 갔었어요. 바쁜데 뭐하러 내려오냐고 하셨죠. 그 이후론 전화도 안 했어요.

죄송한가요?

다들 자기 삶을 사는 거니까, 이해하실 거라 믿어요.

부인께선 대체로 자기 과거를 설명할 때 뭘 했는지에 대해 얘기하시는군요. 후회하는 일도 거의 없지만, 반대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도 없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삶의 모든 부분에 만족한다면 그 누구도 아프다고 말하진 않겠죠.

뚝배기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남자는 공기밥 뚜껑을 열어 밥을 뚝배기 안에 전부 넣다가 국물이 옷에 튀겨 생선처럼 퍼덕거렸다. 물티슈를 꺼내 옷을 벅벅 닦더니 그 물티슈로 입가를 닦곤 겸연쩍은 듯 웃었다. 김치 한 점을 집어 먼저 입에 넣다가 젓가락을 반대로 집은 걸 깨닫고 물티슈로 다시 젓가락을 닦다가 팔뚝이 뚝배기에 닿았는지 손에 든 모든 걸 떨어뜨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국밥 한 숟갈을 뜨며 조용히 바라봤다. 어느새 할머니는 계산대에 앉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바둑을 두는 두 기사에서 화면이 멈췄다. 여자 기사들이었다. 해설은 착점하기 전에 다른 얘길 하며 깔깔 웃었다. 드디어 흰 돌이 바둑판에 올라왔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채널이 돌아갔다. 이번에는 테니스였다. 남자는 그새 새 젓가락을 꺼내 취나물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둥둥 기름이 뜬 국물을 바라봤다. 양념은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수저를 저을수록 국물이 빨갛게 물들었다. 미리 건져내지 않은 채로 서서히 번져가는 빛깔을 그녀는 건드릴 수도 없어 수저를 내려놨다. 네 자식도 아닌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너만 그렇게 고상한 척이야. 언니는 서준이에 대한 일을 금방 잊고선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가끔 버스를 타고 현충원 앞을 계속 둥글게 돌다가 돌아왔다. 비가 올 땐 우산을 쓰고 눈이 올 땐 모자를 썼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아예 그 안에서 오래전부터 기다릴걸. 그런 생각 끝엔 그 모든 걸 예상하지 못한 게 조금 외로웠다. 남자는 소주를 한 병 시켜 잔에 졸졸 따르며 물었다.

사람이 병 때문에 죽는다 믿어요?

아뇨.

나도 그 말 안 믿어요. 병은 사람 곁에 늘 상주하고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조금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잖아요. 고칠 수 있는 병이 있고 고칠 수 없는 병도 있지만, 어쨌든 그건 병의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에요. 의사가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이상할 순 있지만, 사람은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녜요. 죽음은 살 수 없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지요. 늘 믿음이 모든 걸 망쳐요. 부인께선 무언가를 믿는 중인가요?

전혀요.

우리 집은 아니었어요. 집에선 아버지가 두목이고 대장이고 신이었죠. 아버지가 먼저 식탁에 앉아 식사를 마치면 그제야 엄마와 저와 여동생이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남긴 반찬이랑.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어요. 그런 아버지가 믿는 불교는 더 대단한 거였어요.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절에 가서 무릎이 닳도록 절을 올렸어요. 그 절은 소원을 들어달라는 기원이거나 단순히 미래를 기대하는 그런 행위는 아니었어요. 믿지 않아도 믿는 척하는 거였죠. 하지만 아버지는 진짜 믿었어요. 여동생이 아팠을 때도 그랬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아픈 사람을 치료하지 말라는 구절이 법경 어디에도 없는데도 아버지는 여동생을 병원에 데려가려고조차 하지 않았어요.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맞단 말만 했어요. 고칠 수 없는 병은 더더욱 아니었어요. 그때 저는 여덟 살이었어요. 뭘 할 수가 없었죠. 엄마는 여동생을 병원에 데려가려다 머리를 맞아 한동안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요. 나는 그저 여동생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어요. 어느 날은 여동생이 물었어요. 오빠, 빈손으로 온 게 나뿐이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줬어요. 모두가 빈손으로 왔다고. 그제야 여동생이 살짝 웃었어요. 모든 아픔을 잊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날은 토요일 밤이었어요. 나는 주방에 몰래 들어가 식칼을 가지고 있다가 새벽이 오길 기다렸어요. 사실은 누굴 찔러야 할지 몰랐지만, 그대로 살 순 없었거든요. 부인께선 누굴 먼저 찔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잘 모르겠어요.

먼저 아버지가 자는 방에 들어갔어요. 그 방이 가장 따뜻하더군요.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렇게 느낀 기억이 없어서인지 머뭇거릴 맘도 안 들더군요. 아버지를 먼저 찔렀어요. 목 부근을 찌르니 피가 줄줄 흘렀어요. 거실에는 엄마와 여동생이 자고 있었어요. 식칼을 든 채 엄마 옆에 앉았어요. 원래 그럴 맘이 전혀 없었는데도 엄마도 찔렀어요. 그리곤 여동생을 깨웠어요. 여동생은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났어요. 병원에 가자. 처음에는 내 말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여동생은 그저 멍하니 앞을 보다가 내 손을 잡고 말했어요. 오빠, 내가 먼저 빈손으로 갈게, 그러니까 오빠는 양손 가득하게 선물을 가지고 나중에 와. 무슨 말인지 물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버지가 나오더군요. 나는 정말 화들짝 놀라 손에 든 식칼을 바라봤어요.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금세 엄마도 일어났어요. 평소에는 그럴 일이 절대 없는데 방에서 나온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여동생 가슴에 귀를 대보는 일이었어요. 그날 여동생을 묻었어요. 누구도 울진 않았어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입원한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나는 그날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을 봤다, 말해도 믿지 못하겠지만, 네 동생이 내게 말하더구나, 양손 없이 구천을 떠돌고 싶냐고, 그날 이후론 뭘 해도 여기 있단 기분이 안 드는구나. 부인께선 이게 무섭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저도 그랬어요. 그건 순리대로의 일이라고. 어긋날 수가 없는 거죠.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 말은 맞아요. 근데 신이란 게 있다면 꼭 우리에게 이런 모든 순리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죽음 뒤에야 만날 수 있는 그 신도 무사할 순 없을 거예요. 그건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죠.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영원히 원한을 받은 일 말이에요. 그전까진 쭉 기다리는 일인데 다만 뭘 하며 기다리는가의 문제인 거예요. 우린 누구나 서투른 사람일 뿐이죠.

이제 가르쳐주세요, 저는 무슨 병인가요?

남자는 뚝배기를 들고 국물을 들이마셨다. 턱 사이로 국물이 줄줄 흘렀다. 식은 국물이라 화상을 입진 않았지만, 바지가 반쯤 젖었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남자는 서둘러 화장실로 걸어가다가 한 번 넘어졌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먼저 가게를 나왔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릴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로 가서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도 없이 남자는 앞장서 걸어 멀어졌다. 신호가 꺼질 무렵에는 택시에 치일 뻔도 했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지하철 역사로 들어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같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먼저 내린 건 남자였다. 남자는 내리기 전에 말했다.

무슨 병인지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전봇대 뒤에 몰래 숨어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불이 켜진 장소로 보아 그는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집 어디에서든 밖이 훤히 보였다. 카디건의 단추를 전부 잠그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하고 주방부터 들렀지만, 거기엔 역시 그가 없었다. 그는 서재에도 없었다. 공간을 밝히는 전등을 하나씩 껐다. 어딜 지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건물 안에 있단 건 확실했다. 이왕이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체처럼 자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애써 그를 찾고 싶지 않아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누운 그는 반쯤 다리가 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누가 먼저 나갈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있잖아, 내가 오늘 미용실에서 누굴 만났는데.

그게 누군데?

그분이 의사래, 그래서 날 진찰해줬어.

진짜 의사래?

얘길 들어보니 그런 거 같아.

뭐라는데?

내가 엄청 심각한 병에 걸렸대.

그게 무슨 병인데?

무슨 무슨 증후군이라던데.

자기 혹시 그 얘기 한 거 아니지?

무슨 얘기?

있지도 않은 언니, 조카 얘기. 그 거짓말 아직도 다른 사람한테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어도 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자기 그렇게 아무나 속이고 다니면 안 돼.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데? 고작해야 미친년 취급받는 거밖에 더해? 그런 건 병도 아니야. 자긴 그냥 외동딸이고 혼자 외로워서 그런 얘기나 지어내는 거잖아.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순 없다는 거 자기도 알잖아?

그만해, 나 피곤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데 눈을 뜨니 또 밤이었다. 이틀쯤 지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덩어리가 만져졌다. 모든 덩어리가 암이었으면, 모든 암이 모든 장기에 퍼지고 그래서 아무것도 기증할 수 없는 상태로 죽었으면. 그녀는 커튼을 걷으며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밖은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하늘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녀는 창 앞에 의자를 두고 거기 앉아서 밑을 바라봤다. 서서히 누가 나왔다. 신문을 배달하는 청년, 가방을 멘 학생, 지팡이를 짚은 노인, 스포츠카를 타고 창을 열어 꽁초를 버리는 남자, 요 앞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여자까지. 그녀는 창을 열고 그 앞에 섰다. 텁텁한 입을 여는 연습을 했다. 혀를 굴려 침을 잔뜩 바르고 목을 풀었다. 저 조만간 죽어요. 그렇게 외치려고 했는데 되지 않았다. 건물 밑을 지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걸었다. 커튼을 다시 쳤다. 침대에 누웠다. 오늘 죽어도 내일 또 죽어야 할 거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고 옷을 입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치마. 어딜 가고 어느 쪽으로 걸어도 누구나 한번은 쳐다볼 그런 복장으로.

 

남자는 반쯤 덜 자른 머리를 만지며 문을 두드렸다. 이미 영업이 끝난 시간이었다. 소파에 누워 깜빡 잠이 든 그녀를 깨운 건 그의 전화였다. 언제 잠이 든 건지 저녁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녀는 윙윙 울리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얼굴을 씻었다. 물이 들어가서 다신 켜지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수화기를 귀에 댔다.

왜 안 와?

이제 가려고요.

병원 갔다 왔어.

뭐래요?

그게 말이야, 돌아오면 알려줄게.

계단에 걸터앉은 남자를 발견한 건 전화를 막 끊고 나서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뭔가를 보는 남자는 미동도 없이 턱을 괴고 있었다. 문 앞으로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두 줄로 지나갔다. 산으로 난 길로 남자들이 사라지고 나서 함성이 들렸다. 남자는 계단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천천히 내려갔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나 싶어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는 천천히 뒤돌아 말했다.

어제 아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는데요. 부인이 가진 그 모든 증상이요. 죄송한데 그 모든 증상에 맞는 병도 약도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요.

그래요?

어떻게 하죠?

괜찮을 거예요, 괜찮은 상태로 여태 살아왔는걸요.

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주방에 있는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빈 병이 벌써 세 개였다. 그녀는 가볍게 옷을 갈아입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잔이 식탁에 네 개나 있어서 누군가 더 올 것만 같았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다. 곧 자정이었다. 모레 첫눈이 내릴 거란 뉴스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는 취한 듯 중얼거렸다.

뜰에 나가서 소파 위에 있는 걸 가져와.

크리스마스트리에 양말을 거는 기분이 이럴까. 그녀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린다는 걸 숨기고 싶어서 얼굴을 가렸다. 붉어진 얼굴은 까칠했다. 뜰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길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소파 위에는 커다란 갈색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입구가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아마 그 누구도 아직 열어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자를 품에 안았다. 겉보기와 다르게 제법 무겁고 들고 가기가 불편했다. 주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찾는 수고를 접어두고 바닥에 상자를 내려놨다. 대체 뭐가 들었길래 그럴까. 훔쳐온 것도 아닌데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렸다. 진짜로 눈이 내렸다. 이렇게 눈이 빨리 내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칼도 없이 맨손으로 상자 옆면을 북북 찢었다. 그리곤 그 작은 구멍에 머리부터 조금씩 들이밀었다. 감기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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