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봄 날

by 활선님 posted Apr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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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차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몸을 움츠리게 한다. 대길은 한기를 느끼자 조수석에 놓아둔 휴대폰을 찾아 액정을 터치한다. 화면이 깜빡이다가는 깜깜해진다. 전원버튼을 눌러보지만 반응이 없다. 그는 배터리 충전을 해오지 않은 걸 잠시 자책한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는 투박한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눈두덩을 덮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실리면서 지그시 누른다. 마치 백내장이 시작되어 세상을 희미하게 지워가는것 같았다.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는데 불현듯 시야가 환해지면서 바람의 향과 햇살의 향이 코끝을 스미며 따스한 기운이 아지랭이처럼 어슴푸레하게 차올랐다. 마치 샤워를 금방 끝낸 아내의 체취에서 흔히 풍기던 바디클렌저의 후레지아 향기처럼 상쾌한 기운이. 그리고 눈 앞에 푸른 스크린이 펼쳐졌다.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캠벨이 주 종목이던 포도나무를 걷어내고 머루포도를 식재하던 날이기도  했다. 햇살을 등진 아내의 얼굴은 희망으로 충만했고, 새 묘목을 내려다보던 대길의 표정 또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대길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닌현실이길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하길 진정으로 소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이대로 눈을 감고만 있어도 호기롭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갑자기 기운이 빠져나간다. 모든 기운이 소진된 몸은 얇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져 있다. 대길은 문득 바람에 올라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날개처럼 양팔을 벌린다.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허공으로  점점 더 높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발밑이 가벼워진다. 눈꺼풀은 감긴 채로.

 

  빈소 앞엔 예닐곱 살의 젊은 상주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소년의 넙데데한 얼굴이 제단 위의 사진 속 남자를 쏙 빼다 박았다. 그 옆에 모로 누운 선예의 둥근 어깨뼈가 들썩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웃고만 있다.

  자정이 넘어서자 조문객의 발길도 끊기고, 상조도우미들도 퇴근한 주방은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돈다. 그때 불콰한 낯빛의 머리 희끗한 두 남자가 장례식장으로 들어선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에 선예가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고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젊은 상주도 일어선다. 그들을 향한 선예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제단에 절을 하는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핏발 선 눈알을 부라린다. 그들이 부의함에 조의금을 넣으려는데 날랜 범처럼 선예가 잽싸게 달려와 봉투를 낚아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선예의 앙칼진 악다구니가 무거운 공기를 쩍 가른다. 그녀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간 하얀 종잇장들이 허공에서 눈발처럼 흩뿌려진다. 느닷없는 봉변에 그들은 얼굴을 구기며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들이 야박한 말로 대꾸하진 않는 건 주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그들의 구둣발 소리가 가뭇없이 사라지자 사정을 알 길 없는 시집 식구들이 그녀를 에워싸며 손님에게 어찌 그런 행패를 부리냐고 나무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다.

  그러니까 일 년 전, 대길은 승냥이 떼들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덜컥 내주었다. 물론 그들이 승냥이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날은 와인사업단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회의가 시작된 지 삼십분이 지나도록 진행에는 속도가 붙지 않아 한숨이 돌림노래처럼 터져 나올 즈음 한 사장이 운을 뗐다.

  “우리 자형이 변호산데 맥주사업을 함께 해보자고 하는군. 와인도 판로가 힘든 판에 맥주라니……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자니 가슴만 답답하고.”

와인 사업단의 회장이기도 한 그의 말에 대길은 움찔했다.

  “초기 투자금은 얼마래요?”

  “그건 잘 모르겠고 자형이 활동하고 있는 수제 맥주 동호회에서 공장을 설립할 모양일세. 공장부지만 확보되면 조립식으로 건물을 올리고 시에도 투자계획서를 제출해 지원을 받아볼 생각이라더군.”

  “시에서 허락은 해준대요?”

  “기다려봐야지. 시장이 독일 유학파 출신 아닌가. 독일은 맥주를 음료처럼 마신다고 하잖나. 회원들 중엔 해외유학파 교수들이며 기업체 사장들, 정치에 줄을 대고 있는 지역유지들까지 워낙 쟁쟁한 스펙들이니 그깟 지원금에 연연하진 않을 걸세. 아무튼 공장부지만 확보되면 바로 시작한다더군.”

  “땅은 매입인가요, 임댄가요?”

  “일단 빈 건물이 있으면 임대해 몇 년 시험 삼아 가동해보고 승산이 있다 싶으면 땅을 매입해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더군. 건물을 정 못 구하면 나대지 임대도 괜찮다고 했어.”

  “그 자형이라는 분을 제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혹시 생각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알아보고 연락함세.”

  대길의 눈빛이 사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대길의 승합차는 날랜 제비같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합차의 녹슨 배기통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이 모기방역차의 연막입자처럼 도로를 희뿌옇게 뒤덮었다. 와이너리에 도착한 대길은 야외 체험장으로 바삐 걸어갔다. 그 곳은 단체객 백 명 정도는 넉넉히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너른 공간으로 포도 수확철마다 와인투어 체험행사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체험장 한 켠에는 여름 한철 바비큐를 토해내던 그릴이 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무심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길은 체험장에 널려있던 책상과 의자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 후 자재창고에서 줄자를 찾아와 둘레를 재기 시작했다. 그의 콧등으로 애벌레 몸피 같은 잔주름이 돋았다. 이윽고 줄자를 거둔 대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고였다.

  며칠 후, 대길은 한 사장으로부터 약속 장소와 시간을 통보받았다. 그날 밤 선예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알렸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며 단박에 거절을 당했다. 허나 대길은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아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린다고 해도 꿈쩍도 안할 태세였다.

  부부는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식을 올렸고, 이십년이나 살을 맞대며 살았으나 서로에게 딱히 불만을 품진 않았다. 금술이 꽤 좋은 편이었다. 십년 전, 대길이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을 때도 선예는 시댁으로 들어가 포도농사를 짓자며 남편을 다독였다. 어차피 삼류 지방대 출신에다 사십 줄에 접어든 처지에 번듯한 새 직장은 먼 나라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 무렵 사회적으로 귀농이 트랜드로 떠오를 때라 대길도 순순히 아내의 결정에 따랐다. TV 프로그램에도 이따금 귀농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인터뷰하거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소개되곤 했다. 더구나 때마침 그해 지방선거에서 독일 유학파 출신의 젊은 시장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으로 포도 재배 농가를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새 시장은 취임 후 관광농업의 연계를 부르짖으며 와이너리 신축 농가에 한해 무상으로 오천만 원의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다.

  지원금에 현혹된 농가들이 너도나도 신축에 뛰어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와이너리를 오천만 원으로 지을 순 없다. 모자란 건축비는 고스란히 건축주가 떠안아야만 한다. 게다가 10년간 매매도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정부에서 보조금을 허투루 쓸까봐 안전장치를 걸어놓은 건데 혹시라도 매매로 인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따라서 건물 등기는 와인사업단 명의로만 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얼토당토 한 조건도 아니다. 어차피 와인 사업단은 와이너리 농장주들이 설립한 법인 단체였으므로 어차피 그곳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부부도 포도밭 입구에 50평 규모의 와이너리를 건축했다. 남향으로 우뚝 선 통나무 건물은 미국 남부의 어느 목화 농장을 연상케 했다. 내부는 고급살롱처럼 화려하면서도 단아했고, 바닥은 최고급 마루를 깔아 발을 뗄 때마다 서걱서걱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복도를 기점으로 왼 편에는 세척실과 착즙실이 나란히 붙어있었는데 오른 편은 와인 바가 럭셔리하게 배치되었다. 가장자리 벽면에 홈을 판 선반에는 세계 각국의 와인병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천장에 레일을 박아 허공에 드리워진 와인잔들은 방문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와인병들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했고, 컬러도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와이너리 신축 후, 몇 년은 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와인사업은 순항이었다. 시는 관광농업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와인투어 경비 일체를 책임져주었다. 와인투어란 포도 수확철에 체험객들을 모집하여 와인을 직접 만들어 시음을 곁들이는 홍보행사였다. 사실 명분만 그럴듯하지 체험객이 한정된 상황에서는 별 재미도 보지 못했다. 농가마다 다양한 서비스와 이벤트로 체험객 유치에 나섰지만 등록된 와이너리 농가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 경쟁은 과열이었다. 밑지는 장사인 줄 알면서도 선예는 와인에 숙성시킨 돼지 바비큐 요리를 푸지게 대접했다. 체험이 끝나갈 즘엔 직접 숙성시킨 와인과 착즙한 포도 주스를 챙겨 주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체험객들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약속 장소에는 박 변호사 외에 동호회 회장이라는 천 교수도 참석했다. 천 교수는 A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소개가 끝나고 박 변호사가 빔 프로젝트를 펼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흰 벽면 위로 맥주 거품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리모컨을 누를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수제 맥주 제조 기계와 그에 따른 사용법들이 소개되었다. 사업 계획서는 그럴싸했고, 브리핑은 솔깃했다.

  김 사장님은 맥주 공법에 관해 얼마나 아십니까?”

  박 변호사의 질문에 대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전혀요, 와인 만드는 방법밖에는 모릅니다. 방금 소개된 하이 그래비티(High Gravity) 공법과 오리지날 그래비티(Original Gravity)공법의 차이가 궁금하긴 하네요.”

  대길은 재치 있게 반문해 좀 전의 당황을 무마했다.

  “하이 그래비티 공법은 맥주 원료를 투입할 때 맥즙을 진하게 해서 알코올 도수를 7-8도로 높인 뒤 병이나 캔에 담기 직전에 20-30%의 탄산수를 첨가해 도수를 4-5도로 낮추는 공법입니다. 주로 대량의 맥주를 공장에서 생산할 때 쓰는 방법이죠.”

박 변호사의 친절한 설명에 대길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변호사는 그런 대길의 반응을 세심히 살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리지날 그래비티는 맥즙의 농도를 처음부터 4-5도에 맞추어 나중에 탄산수 첨가를 최대한 억제하는 공법인데 한마디로물 타지 않는 맥주를 만드는 거죠. 시중에 파는 맥주들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처음부터 알코올 도수를 일부러 높였다가 나중에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추죠.”

  “시판하는 공장용 맥주가 그래서 싱거웠군요.”

  “예리하십니다! 우린 제대로 된 수제 맥주를 생산하려고 해요.”

  “언제부터 계획한 거죠?”

  갑자기 천 교수가 박 변호사의 말을 잽싸게 가로채어 설명했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자가 양조설비로 하우스 양조 맥주사업을 하는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죠. 그런데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취기가 오르더군요. 한국에서는 아무리 마셔도 싱겁고 배만 불렀었는데. 맥주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때부터였죠.”

  대길은 천 교수의 대답에 흠뻑 매료되어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며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 교수는 간간이 대길의 반응을 살펴가며 브리핑의 속도를 조절했다.

  “귀국해 대학에 자리를 잡고부턴 맥주사업을 실행에 옮기기로 다짐했죠. 다행스럽게도 좋은 동업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기계를 들여놓을 공간만 찾으면 됩니다. 고정 거래처가 확보 되는대로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키워볼 생각입니다.”

  “말씀만 들어도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네요. 그런데 수제 맥주가 보급 된지도 오래 전인데 과연 승산이 있을까요.”

  “괜한 걱정 마십시오. 식당이라고 전부 장사가 잘 되나요. 흥하든 망하든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죠. 회원들의 사기가 충천(衝天)해 있고, 나름의 지위와 인맥을 갖추고 있으니 거래처 확보야 별 문제도 아닙니다.”

  말을 마친 천 교수가 껄껄 웃자 대길도 취기 오른 사람처럼 헤죽헤죽 웃었다. 이렇게 달뜬 감정은 처음이 아니었다. 와이너리 설명회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시작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처럼. 단지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그날 저녁 대길은 원대한 이상에 빠져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맥주사업이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줄 거라고 확신했고, 흥분한 나머지 계약서 문구를 꼼꼼히 읽지 못하고 덜컥 싸인을 했다.

  선예가 계약 사실을 알게 된 건 공사가 시작된 다음날이었다. 와이너리를 청소하러 온 그녀의 눈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부들이 이해될 리 없었다. 그녀는 공사를 멈추고 인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대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하이톤의 언성이 수차례 오가고 감정이 격해졌다. 그녀는 남편과는 말이 통하지 않다고 판단해 천 교수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계약취소를 들먹이자 천 교수는 되레 거만한 투로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며 으름장을 피웠다. 리스 기계는 외국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반품이 불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선예는 천 교수보다 남편에게 더 섭섭했다. 어떻게 지켜온 와이너리인데 이제와 포기를 하다니! 그 가벼움에 치를 떨었다. 대길은 와이너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윈윈하는 것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선예는 믿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다간 둘 다 망할 거라며 오히려 대들었다.

  며칠 후, 가벽이 체험장을 빙 둘러쌌다. 판넬로 지은 건물은 일주일도 채 안되어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었다. 출입문은 따로 냈지만 와이너리와 이어지는 연결통로도 만들었다. 공사대금은 대길이 지불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동호회에서 대금을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지만 대길은 극구 사양했다. 훗날 유치권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박 변호사의 조언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실내 인테리어가 마무리되자 맥주기계들이 자리를 잡고 냉장창고에는 보릿자루로 채워졌다. 와이너리 현판이 붙어있던 곳에는 비키니차림의 모델이 가슴골을 훤하게 드러낸 채 맥주잔에 흘러내린 거품을 그 붉고 긴 혀로 핥는 실사 아크릴판으로 교체되었다.

 

  개업식 날, 첫 시음회가 열렸다. 대길의 뺨에도 복숭아 빛 홍조가 발그스름하게 돌았다. 명함에 아로새겨진영업이사 김대길이란 직함은 마치 바이샤의 수장으로 인정받는 낙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개업 후, 회원들은 밤마다 시음회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술 파티를 벌였다. 대길은 새벽 두시가 넘도록 그들의 훈계와 잔소리를 안주삼아 들어야했으며,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수북한 담배꽁초와 술잔들은 그의 의무가 되었다. 포도 세척장이 점령당하면서 주방도 빼앗겼다. 보리 짜는 기계는 물마를 날 없는데 포도 착즙기와 오크통은 구석자리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맥주로 채워지고, 허울뿐인 와인바는 맥주 바로 전락했다.

  정기모임으로 정한 목요일 밤이면 회의는 뒷전이고 밤새 마시고 또 퍼마셨다. 맥주 시음회 겸 연구발표회라는 명분은 집에서 남편을 기다릴 그들의 아내들에게 합당한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들은 밤새 술독에 빠져 있다가 동이 틀 무렵이면 근처 사우나로 몰려갔다. 뒷정리는 당연히 대길의 임무였다. 개수통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며 화장실엔 실례한 토사물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굴욕은 생존의 당위성 앞에서는 무력하고 경제적 약탈능력이 뛰어날수록 존경을 받는다는 유한계급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되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한 세월은 두 계절을 뛰어넘고도 변화가 없었다. 집단 간암에라도 걸릴 심산인지 판매는 제로상태이면서도 시음회는 여전했고, 그럼에도 회원은 불어났다. 새 회원들 역시 정치와 경제에 해박한 지역 유지들로 따지고 보면 대길이 모셔야 할 상전이 늘어난 셈이었다. 그날도 정기모임이 열리는 목요일이었고, 술판이 무르익어갔다. 천 교수가 대길에게 맥주를 더 가져오라고 주문하자 대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주방으로 가지 않고 천 교수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는 오늘부로 동호회를 탈퇴하겠으니 여러분도 이곳에서 나가주십시오.”

절제도, 예의도 없는 저들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몇 달을 벼르고 별러 내뱉은 말인데도 결코 후련하지가 않았다. 실핏줄이 부풀어 오른 대길의 눈동자가 꽈리처럼 터질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천 교수가 대길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저자세로 굴었다.

  “김 이사. 성질을 가라앉히고 불만을 말해 봐요.”

  대길은 천 교수의 손을 극구 뿌리치며 소리쳤다.

  “진짜 너무들 합니다. 지난 몇 달간 밤새 벌여놓은 회원님들의 술판을 치우느라 이골이 났습니다. 제가 노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천 교수가 회원들을 향해 눈을 껌뻑였다. 회원들은 눈치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천 이사가 대길을 추켜세우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김 이사 말이 백번 옳아요. 이제라도 우리가 어질러놓은 건 치우고 갑시다. 김 이사가 아니었으면 공장설립은 엄두도 못 내었을 텐데, 지금껏 수고한 김 이사에게 박수라도 칩시다!”

  천 교수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린 회원들의 박수갈채가 장맛비처럼 요란했다. 대길의 기세도 한풀 꺾였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를 놓칠세라 천 교수가 대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입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무안해진 대길은 약속을 핑계 삼아 자릴 떴다. 대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멸시와 조롱의 말들이 쏟아졌다.

  그 일이 있은 후, 회원들은 반성한 아이들처럼 대길에게 친절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고마워하는 척 먼저 인사했다. 그것 또한 임시처방과도 같은 천교수의 계략이었겠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고, 탄성의 법칙은 그 공간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대길은 어느새 술판을 치우고 있었다.

  그들의 무례는 도를 지나쳐 마지막 보류였던 지하의 와이너리 보관창고에도 손을 뻗쳤다. 손바닥만 한 영역조차 자신의 것이 없음을 알게 되자 대길은 창고 벽면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했다. 일백 킬로그램을 웃도는 거구의 몸짓은 포효하는 맹수와도 같아 지진이라도 난 듯 벽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와인병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났다. 벽이 무너진다며 선예가 날 선 소리로 저지했지만 대길은 대걸레 자루로 보릿자루를 흠씬 두들겨 패기만 했다. 수십 개의 자루에서 터져나간 낱알들이 바닥의 홈을 메우고 이윽고 작은 봉분처럼 불룩하게 솟아났다. 선예의 만류에도 대길은 기어이 포장된 와인병까지 모조리 깨고서야 행동을 멈췄다. 깨진 병에서 흘러나온 와인이 발목까지 차오르고, 그 위로 퉁퉁 불은 맥아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의 몸과 옷이 와인으로 물들어 핏빛이 되었다. 수년을 쏟은 땀과 인고의 시간들이 바닥으로 침전해버린 어처구니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이없는 상황에 놀란 선예는 대길을 노려봤다.

  다음날 대길은 재산권을 되찾을 요량에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노크했다. 저들에게도 유능한 박 변호사가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대길은 추호의 망설임조차 하지 않았다. 저들의 방어벽이 아무리 높다고 하나 법은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공무로 잠시 자리를 비웠고, 젊은 사무장이 대길을 맞았다. 대길이 건넨 계약서를 살펴보던 사무장의 고개가 갸웃했다.

  “직접 싸인하신 거 맞습니까?”

  “네에……

  “그렇다면 꼼짝없이 당하겠는데요.”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는 처음 봅니다. 어떻게 3년 동안 무상으로 땅과 건물을 그들에게 제공한다고 허락할 수 있죠? 게다가 3년 후에는 소정의 월세로 전환하되 임차인 스스로 나갈 때까지 명도 할 수 없다니요?”

  “전 박 변호사가 작성한 계약서에 싸인만 했습니다. 가방끈 길고 잘 난 사람들이라 무조건 믿었습니다.”

  “이건 명백한 사기 계약입니다. 건물등기는 본인 앞으로 되어있나요?”

  “땅만 그렇고 건물은 와인사업단 소유로 되어있습니다. 와이너리 지원금을 무상으로 지원받는 조건으로 권리주장을 할 수 없도록 묶어둔 거죠. 십년이 지나면 제 앞으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건물의 소유주가 의뢰인 명의가 아니라서 소송을 해도 불리합니다. 본인의 소유도 아닌 건물을 임대했으니 월권이죠. 와인사업단 측에서 반격이 들어오겠는데요. 처음부터 그걸 노렸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비관적으로 추측하시지 말고 보다 건설적인 방안을 제시해주세요.”

  사무장이 한숨을 내뿜으며 대길의 얼굴을 응시한다. 당장 담배 한 개비가 필요하다는 표정이다.

  “글쎄요. 저들의 횡포에 굴복하는 수밖엔 대안도 없네요. 건물등기가 본인 소유라야 소송도 가능한 법인데.”

  대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를 세워둔 공터까지 십분은 걸어야하는데 버거웠다. 몸은 물에 불린 솜이불처럼 천근만근이었고, 팔에서 시작한 통증이 턱밑까지 번졌다. 재산을 전부 날리게 생겼는데 그깟 주차비 몇 푼 아끼자고 먼 공터에다 차를 세웠나 싶어 후회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끌어 공터에 도착했을 땐 일말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떤 고통도 이토록 명징한 적이 있었던가. 가혹하리만큼 혹독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니 절대 겪어서는 안 될 고통이다. 가까스로 차 안에 몸을 밀어 넣자 잠이 몰려왔다.

  사흘 후 대길은 꽁꽁 언 채 발견되었다. 그의 손에는 마치 노예문서와도 같은 계약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사인은 저체온증으로 의한 심장 쇼크사였다.

 

  장례식을 치른 후 선예는 송장처럼 늘어져 누워만 있었다. 영양분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몸뚱어리는 낙엽처럼 바스러질 듯했고, 화장기 없는 안색은 창백한 주검 같았다. 창밖으로 낮과 밤이 거푸 지나갔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가만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잔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몸소 경험했다. 자고나면 하루가 지나갔고, 또 자고나면 또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왔을 땐 장대비가 질척거렸다. 질펀하게 젖은 세상은 온통 눅눅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그녀의 넓적다리 틈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당겨 부푼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가 안방으로 되돌아가더니 검은 운동복차림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마당에 세워둔 승합차에 냉큼 올라타 부리나케 달렸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와이너리였다. 때마침 정기모임이 있는 목요일이라 앞마당에는 빠끔한데 없이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차를 가로막아 시동을 껐다. 승냥이 굴로 성큼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와인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거치대에 모양 좋게 걸려있던 와인 잔들은 식탁에 널브러져 있고,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난 것도 있었다. 성한 것조차 잔 표면에 손자국이 얼룩덜룩했다.

  길고 어두운 통로 저편에 맥주공장이 있었다. 그곳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수십 개의 검은 눈동자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푸른 레이저를 쏘았다. 어색한 침묵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녀의 겁먹은 눈동자가 회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다가 천 교수 앞에서 멈칫했다. 천 교수는 그녀와 시선이 엉키자 미간을 찌푸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낌새라도 차린 걸까. 그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참다못한 그녀의 입술이 먼저 달싹였다.

  “공장을 옮기고 그만 제집에서 나가주세요.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지켜보고만 있던 박 변호사가 입 꼬리를 삐죽 올려 비아냥거린다.

  “위약금 낼 돈은 있나보죠.”

  “얼만데요?”

  “한 장 정도면 고려해 보죠.”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낄낄댔다. 돈도 없이 까분다는 조롱의 야유가 틀림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한 장의 가치가 얼마인지 그녀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알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가진 돈도 없다. 그녀의 눈에서 핏발이 터질듯했다. 정오의 태양처럼 이글대는 분노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이성을 흔들어 술판을 뒤집어엎었다. 조미 오징어 채가 서릿발 날리듯 허공을 뱅그르르 돌아 바닥으로 내꽂혔다. 맥주가 찰랑거리던 와인잔도 둥근 형체를 잃고 조각조각 파편어 튕겨 나갔다. 그녀가 목을 꼿꼿이 세워 쐐기를 박았다.

  “내 남편 목숨 값이 고작 열장이라니!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당장 나가!”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 천 교수의 반응은 잔인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계속 행패부리면 영업방해죄로 경찰을 부를 거요.”

  “부를 테면 불러요. 오히려 잘됐네. 잘잘못을 법정에서 따지자고요!

  선예는 신경질적으로 울부짖었다. 천교수의 지시를 받은 회원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건물 밖으로 패대기쳤다. 돌부리에 찍힌 이마에서 끈끈한 액체가 흘렀다. 입술 새를 파고 든 액체의 맛이 비릿하게 느껴질 즘 칼바람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 감촉이 너무 시려 뺨이 얼어붙을 듯했다. 그녀는 뺨을 만지며 이 아득한 겨울이 얼른 지나가고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았다. 시장은 신년사에서 포도과수원을 폐원하는 농가에게 천이백만 원의 위로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지역특화작물로 앞으로는 복숭아에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곧 와이너리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포도 농가들은 된서리를 맞은 듯 아우성을 쳤지만 판세는 그렇게 흘러갔다.

  얼었던 땅이 녹자 그녀는 포클레인을 불러 골짝 포도밭을 갈아엎었다. 복숭아 묘목을 심을 작정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삶의 마지막 끈인지도 몰랐다. 등 굽은 노파가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다가는 구시렁댔다.

  “공들여봐야 말짱 꽝이여. 멧돼지가 워낙 극성이어야제. 골짝 밭이라 손까지 타는구먼. 아랫동네 박 씨네 복숭 밭도 다 털렸어.”

  끌끌, 노파의 혀 차는 소리가 언덕 너머로 메아리친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뿌리개를 들고 밭고랑을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설령 그 말을 들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복숭아 와인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을 테니까. 신의 격려와도 같은 봄날의 온기가 그녀의 정수리로 내리붓는다.

 

 

 

 

 

 

 

 

 

 

 

 

 

 

 

 

 

 

 

 

 

 

 

 

 

 

 

 

 

 

 

 

 

월간 문학 한국인 제 28차 콘테스트

 

 

 

응모 분야 단편소설

 

제목 봄날

 

이름 이은정

 

메일 eunjung320@naver.com

 

전화 010 8906 4330 유선 054)776-4330

 

 

봄날

 

 

차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스산하다. 대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터치한다.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깜깜해진다. 전원버튼을 눌러보지만 배터리는 무반응이다. 그는 배터리 충전을 해오지 않은 걸 잠시 후회했지만 곧 포기하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눈두덩을 덮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실리자 지그시 누른다. 세상은 암흑이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는데 불현듯 시야가 환해지면서 바람의 향과 햇살의 향이 코끝을 스미며 따스한 기운이 주위로 차오른다. 마치 샤워를 금방 끝낸 아내의 체취에서 흔히 풍기던 바디클렌저의 후레지아 향기처럼 상쾌하게. 눈앞에 푸른 스크린이 펼쳐진다.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캠벨이 주 종목이던 포도나무를 걷어내고 머루포도로 교체하던 날이기도 했다. 햇살을 등진 아내의 얼굴은 희망으로 충만했고, 새 묘목을 바라보던 대길의 표정 또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대길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길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하길 진정으로 소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이대로 눈을 감고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갑자기 기운이 빠져나간다. 모든 기운이 소진된 몸은 얇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져 있다. 대길은 문득 바람에 올라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날개처럼 양팔을 벌린다.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허공으로 점점 더 높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발밑이 가벼워진다. 눈꺼풀은 감긴 채로.

 

빈소 앞엔 예닐곱 살쯤 먹은 젊은 상주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소년의 넙데데한 얼굴이 제단 위의 사진 속 남자를 쏙 빼다 박았다. 그 옆에 모로 누운 선예의 둥근 어깨뼈가 들썩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웃고만 있다.

자정이 넘어서자 조문객의 발길도 끊기고, 상조도우미들도 퇴근한 주방은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돈다. 그때 불콰한 낯빛의 머리 희끗한 두 남자가 장례식장으로 들어선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에 놀란 선예가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잠이 깬 젊은 상주도 일어선다. 그들을 향한 선예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제단에 절을 하는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핏발 선 눈알을 부라린다. 그들이 부의함에 조의봉투를 넣으려는데 날랜 범처럼 선예가 잽싸게 달려와 봉투를 낚아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선예의 앙칼진 악다구니가 무거운 공기를 쩍 가른다. 그녀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간 하얀 종잇장들이 허공에서 눈발처럼 흩뿌려진다. 느닷없는 봉변에 그들은 험악한 인상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들이 야박한 말로 대꾸하진 않는 건 주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그들의 구둣발 소리가 가뭇없이 사라지자 사정을 알 길 없는 시집 식구들이 그녀를 에워싸며 손님에게 어찌 그런 행패를 부리냐고 나무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다.

그러니까 일 년 전, 그녀의 남편인 대길은 승냥이 떼들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덜컥 내주고 말았다. 물론 그들이 승냥이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날은 와인사업단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회의가 시작된 지 삼십분이 지나도록 진행에는 속도가 붙지 않아 한숨이 돌림노래처럼 터져 나올 즈음 한 사장이 운을 뗐다.

우리 자형이 변호산데 맥주사업을 함께 해보자고 하는군. 와인도 판로가 힘든 판에 맥주라니……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자니 가슴만 답답하고.”

와인 사업단의 회장이기도 한 그의 말에 대길은 움찔했다.

초기 투자금은 얼마래요?”

그건 잘 모르겠고 자형이 활동하고 있는 수제 맥주 동호회에서 공장을 설립할 모양일세. 공장부지만 확보되면 조립식으로 건물을 올리고 시에도 투자계획서를 제출해 지원을 받아볼 생각이라더군.”

시에서 허락은 해준대요?”

기다려봐야지. 시장이 독일 유학파 출신 아닌가. 독일은 맥주를 음료처럼 마신다고 하잖나. 회원들 중엔 해외유학파 교수들이며 기업체 사장들, 정치에 줄을 대고 있는 지역유지들까지 스펙이 워낙 쟁쟁하니 그깟 지원금에 연연하진 않을 걸세. 아무튼 공장부지만 확보되면 바로 시작한다더군.”

땅은 매입인가요, 임댄가요?”

일단 빈 건물이 있으면 임대해 몇 년 시험 삼아 가동해보고 승산이 있다 싶으면 땅을 매입해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더군. 건물을 정 못 구하면 나대지 임대도 괜찮다고 했어.”

그 자형이라는 분을 제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혹시 생각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알아보고 연락함세.”

대길의 눈빛이 사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대길의 승합차는 날랜 제비같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합차의 녹슨 배기통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이 모기방역차의 연막입자처럼 도로를 희뿌옇게 뒤덮었다. 와이너리에 도착한 대길은 야외 체험장으로 바삐 걸어갔다. 그 곳은 단체객 백 명 정도는 넉넉히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너른 공간으로 포도 수확철마다 와인투어 체험행사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체험장 한 켠에는 여름 한철 바비큐를 토해내던 그릴이 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무심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길은 체험장에 널려있던 책상과 의자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 후 자재창고에서 줄자를 찾아와 둘레를 재기 시작했다. 그의 콧등으로 애벌레 몸피 같은 잔주름이 돋았다. 이윽고 줄자를 거둔 대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고였다.

며칠 후, 대길은 한 사장으로부터 약속 장소와 시간을 통보받았다. 그날 밤 선예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알렸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며 단박에 거절을 당했다. 허나 대길은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아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린다고 해도 꿈쩍도 안할 태세였다.

부부는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식을 올렸고, 이십년이나 살을 맞대며 살아왔으나 서로에게 딱히 불만을 품진 않았다. 금술이 꽤 좋은 편이었다. 십년 전, 대길이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을 때도 선예는 시댁으로 들어가 포도농사를 짓자며 남편을 다독였다. 어차피 삼류 지방대 출신에다 사십 줄에 접어든 처지에 번듯한 새 직장은 먼 나라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 무렵 사회적으로도 귀농이 트랜드로 떠오를 때라 대길도 순순히 아내의 결정에 따랐다. TV 프로그램에도 이따금 귀농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인터뷰하거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소개되곤 했다. 더구나 때마침 그해 지방선거에서 독일 유학파 출신의 젊은 시장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으로 포도 재배 농가를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새 시장은 취임 후 관광농업의 연계를 부르짖으며 와이너리 신축 농가에 한해 무상으로 오천만 원의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다.

지원금에 현혹된 농가들이 너도나도 신축에 뛰어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와이너리를 오천만 원으로 지을 순 없다. 모자란 건축비는 고스란히 건축주가 떠안아야만 했다. 게다가 10년간 매매도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정부에서 보조금을 허투루 쓸까봐 안전장치를 걸어놓은 건데 혹시라도 매매로 인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따라서 건물 등기는 와인사업단 명의로만 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얼토당토 한 조건도 아니다. 어차피 와인 사업단은 와이너리 농장주들이 설립한 법인 단체였으므로 어차피 그곳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부부도 포도밭 입구에 50평 규모의 와이너리를 건축했다. 남향으로 우뚝 선 통나무 건물은 미국 남부의 어느 목화 농장을 연상케 했다. 내부는 고급살롱처럼 화려하면서도 단아했고, 바닥은 최고급 마루를 깔아 발을 뗄 때마다 서걱서걱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복도를 기점으로 왼 편에는 세척실과 착즙실이 나란히 붙어있었는데 오른 편은 와인 바가 럭셔리하게 배치되었다. 가장자리 벽면에 홈을 판 선반에는 세계 각국의 와인병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천장에 레일을 박아 허공에 드리워진 와인잔들은 방문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와인병들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했고, 컬러도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와이너리 신축 후, 몇 년은 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와인사업은 순항이었다. 시는 관광농업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와인투어 경비 일체를 책임져주었다. 와인투어란 포도 수확철에 체험객들을 모집하여 와인을 직접 만들어 시음을 곁들이는 홍보행사였다. 사실 명분만 그럴듯하지 체험객이 한정된 상황에서는 별 재미도 보지 못했다. 농가마다 다양한 서비스와 이벤트로 체험객 유치에 나섰지만 등록된 와이너리 농가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 경쟁은 과열이었다. 밑지는 장사인 줄 알면서도 선예는 와인에 숙성시킨 돼지 바비큐 요리를 푸지게 대접했다. 체험이 끝나갈 즘엔 직접 숙성시킨 와인과 착즙한 포도 주스를 챙겨 주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체험객들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약속 장소에는 박 변호사 외에 동호회 회장이라는 천 교수도 참석했다. 천 교수는 A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소개가 끝나고 박 변호사가 빔 프로젝트를 펼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흰 벽면 위로 맥주 거품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리모컨을 누를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수제 맥주 제조 기계와 그에 따른 사용법들이 소개되었다. 사업 계획서는 그럴싸했고, 브리핑은 솔깃했다.

김 사장님은 맥주 공법에 관해 얼마나 아십니까?”

박 변호사의 질문에 대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전혀요, 와인 만드는 방법밖에는 모릅니다. 방금 소개된 하이 그래비티(High Gravity) 공법과 오리지날 그래비티(Original Gravity)공법의 차이가 궁금하긴 하네요.”

대길은 재치 있게 반문해 좀 전의 당황을 무마했다.

하이 그래비티 공법은 맥주 원료를 투입할 때 맥즙을 진하게 해서 알코올 도수를 7-8도로 높인 뒤 병이나 캔에 담기 직전에 20-30%의 탄산수를 첨가해 도수를 4-5도로 낮추는 공법입니다. 주로 대량의 맥주를 공장에서 생산할 때 쓰는 방법이죠.”

박 변호사의 친절한 설명에 대길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변호사는 그런 대길의 반응을 세심히 살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리지날 그래비티는 맥즙의 농도를 처음부터 4-5도에 맞추어 나중에 탄산수 첨가를 최대한 억제하는 공법인데 한마디로물 타지 않는 맥주를 만드는 거죠. 시중에 파는 맥주들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처음부터 알코올 도수를 일부러 높였다가 나중에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추죠.”

시판하는 공장용 맥주가 그래서 싱거웠군요.”

예리하십니다! 우린 제대로 된 수제 맥주를 생산하려고 해요.”

언제부터 계획한 거죠?”

갑자기 천 교수가 박 변호사의 말을 잽싸게 가로채어 설명했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자가 양조설비로 하우스 양조 맥주사업을 하는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죠. 그런데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취기가 오르더군요. 한국에서는 아무리 마셔도 싱겁고 배만 불렀었는데. 맥주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때부터였죠.”

대길은 천 교수의 대답에 흠뻑 매료되어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며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 교수는 간간이 대길의 반응을 살펴가며 브리핑의 속도를 조절했다.

귀국해 대학에 자리를 잡고부턴 맥주사업을 실행에 옮기기로 다짐했죠. 다행스럽게도 좋은 동업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기계를 들여놓을 공간만 찾으면 됩니다. 고정 거래처가 확보 되는대로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키워볼 생각입니다.”

말씀만 들어도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네요. 그런데 수제 맥주가 보급 된지도 오래 전인데 과연 승산이 있을까요.”

괜한 걱정 마십시오. 식당이라고 전부 장사가 잘 되나요. 흥하든 망하든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죠. 회원들의 사기가 충천(衝天)해 있고, 나름의 지위와 인맥을 갖추고 있으니 거래처 확보야 별 문제도 아닙니다.”

말을 마친 천 교수가 껄껄 웃자 대길도 취기 오른 사람처럼 헤죽헤죽 웃었다. 이렇게 달뜬 감정은 처음이 아니었다. 와이너리 설명회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시작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처럼. 단지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그날 저녁 대길은 원대한 이상에 빠져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맥주사업이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줄 거라고 확신했고, 흥분한 나머지 계약서 문구를 꼼꼼히 읽지 못하고 덜컥 싸인을 했다.

선예가 계약 사실을 알게 된 건 공사가 시작된 다음날이었다. 와이너리를 청소하러 온 그녀의 눈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부들이 이해될 리 없었다. 그녀는 공사를 멈추고 인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대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하이톤의 언성이 수차례 오가고 감정이 격해졌다. 그녀는 남편과는 말이 통하지 않다고 판단해 천 교수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계약취소를 들먹이자 천 교수는 되레 거만한 투로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며 으름장을 피웠다. 리스 기계는 외국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반품이 불가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사실 선예는 천 교수보다 남편에게 더 섭섭했다. 어떻게 지켜온 와이너리인데 이제와 포기를 하다니! 그 가벼움에 치를 떨었다. 대길은 와이너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윈윈하는 것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선예는 믿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다간 둘 다 망할 거라며 오히려 대들었다.

며칠 후, 가벽이 체험장을 빙 둘러쌌다. 판넬로 지은 건물은 일주일도 채 안되어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었다. 출입문은 따로 냈지만 와이너리와 이어지는 연결통로도 만들었다. 공사대금은 대길이 지불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동호회에서 대금을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지만 대길은 극구 사양했다. 훗날 유치권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박 변호사의 조언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실내 인테리어가 마무리되자 맥주기계들이 자리를 잡고 냉장창고에는 보릿자루로 채워졌다. 와이너리 현판이 붙어있던 곳에는 비키니차림의 모델이 가슴골을 훤하게 드러낸 채 맥주잔에 흘러내린 거품을 그 붉고 긴 혀로 핥는 실사 아크릴판으로 교체되었다.

 

개업식 날, 첫 시음회가 열렸다. 대길의 뺨에도 복숭아 빛 홍조가 발그스름하게 돌았다. 명함에 아로새겨진영업이사 김대길이란 직함은 마치 바이샤의 수장으로 인정받는 낙관처럼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개업식 이후, 회원들은 밤마다 시음회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술 파티를 벌였다. 대길은 새벽 두시가 넘도록 그들의 훈계와 잔소리를 안주삼아 들어야했으며,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수북한 담배꽁초와 술잔들은 그의 의무가 되었다. 포도 세척장이 점령당하면서 주방도 빼앗겼다. 보리 짜는 기계는 물마를 날 없이 가동되는데 포도 착즙기와 오크통은 구석자리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맥주로 채워지고, 허울뿐인 와인바는 맥주 바로 전락했다.

정기모임으로 정한 목요일 밤이면 회의는 뒷전이고 밤새 마시고 또 퍼마셨다. 맥주 시음회 겸 연구발표회라는 명분은 가정에서 남편을 기다릴 그들의 아내들에게 합당한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들은 밤새 술독에 빠져 있다가 동이 틀 무렵이면 근처 사우나로 몰려갔다. 뒷정리는 당연히 대길의 임무였다. 개수통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며 화장실엔 실례한 토사물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굴욕은 생존의 당위성 앞에서는 무력하고 경제적 약탈능력이 뛰어날수록 존경을 받는다는 유한계급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되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한 세월은 두 계절을 뛰어넘고도 변화가 없었다. 집단 간암에라도 걸릴 심산인지 판매는 제로상태이면서도 시음회는 여전했고, 그럼에도 회원은 불어났다. 새 회원들 역시 정치와 경제에 해박한 지역 유지들로 따지고 보면 대길이 모셔야 할 상전이 늘어난 셈이었다. 그날도 정기모임이 열리는 목요일이었고, 술판이 무르익어갔다. 천 교수가 대길에게 맥주를 더 가져오라고 주문하자 대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주방으로 가지 않고 천 교수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는 오늘부로 동호회를 탈퇴하겠으니 여러분도 이곳에서 나가주십시오.”

절제도, 예의도 없는 저들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몇 달을 벼르고 별러 내뱉은 말인데도 결코 후련하지가 않았다. 실핏줄이 부풀어 오른 대길의 눈동자가 꽈리처럼 터질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천 교수가 대길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저자세로 굴었다.

김 이사. 성질을 가라앉히고 불만을 말해 봐요.”

대길은 천 교수의 손을 극구 뿌리치며 소리쳤다.

진짜 너무들 합니다. 지난 몇 달간 밤새 벌여놓은 회원님들의 술판을 치우느라 이골이 났습니다. 제가 노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천 교수가 회원들을 향해 눈을 껌뻑였다. 회원들은 눈치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천 이사가 대길을 추켜세우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김 이사 말이 백번 옳아요. 이제라도 우리가 어질러놓은 건 치우고 갑시다. 김 이사가 아니었으면 공장설립은 엄두도 못 내었을 텐데, 지금껏 수고한 김 이사에게 박수라도 칩시다!”

천 교수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린 회원들의 박수갈채가 장맛비처럼 요란했다. 대길의 기세도 한풀 꺾였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를 놓칠세라 천 교수가 대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입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무안해진 대길은 약속을 핑계 삼아 자릴 떴다. 대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멸시와 조롱의 말들이 쏟아졌다.

그 일 이 있은 후, 회원들은 반성한 아이들처럼 대길에게 친절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고마워하는 척 먼저 인사했다. 그것 또한 임시처방과도 같은 천교수의 계략이었겠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고, 탄성의 법칙은 그 공간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대길은 어느새 술판을 치우고 있었다.

그들의 무례는 도를 지나쳐 마지막 보류였던 지하의 와이너리 보관창고에도 손을 뻗쳤다. 손바닥만 한 영역조차 자신의 것이 없음을 알게 되자 대길은 창고 벽면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했다. 일백 킬로그램을 웃도는 거구의 몸짓은 포효하는 맹수와도 같아 지진이라도 난 듯 벽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와인병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벽이 무너진다며 선예가 날 선 소리로 저지했지만 대길은 대걸레 자루로 보릿자루를 흠씬 두들겨 팼다. 자루들이 터지면서 낱알들이 바닥의 홈을 메우고 이윽고 작은 봉분처럼 불룩하게 솟아났다. 선예의 만류에도 기어이 포장된 와인병을 모조리 산산조각 내고서야 멈췄다. 깨진 병에서 흘러나온 와인이 발목까지 차오르고, 그 위로 퉁퉁 불은 맥아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의 두 손과 얼굴이 핏빛 와인으로 물들었다. 수년을 쏟은 땀과 인고의 시간들이 바닥으로 침전한 순간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선예는 그저 대길을 노려봤다.

다음날 대길은 재산권을 되찾을 요량에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노크했다. 저들에게도 유능한 박 변호사가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대길은 추호의 망설임조차 하지 않았다. 저들의 방어벽이 아무리 높다고 하나 법은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공무로 잠시 자리를 비웠고, 젊은 사무장이 대길을 맞았다. 대길이 건넨 계약서를 살펴보던 사무장의 고개가 갸웃했다.

직접 싸인하신 거 맞습니까?”

네에……

그렇다면 꼼짝없이 당하겠는데요.”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는 처음 봅니다. 어떻게 3년 동안 무상으로 땅과 건물을 그들에게 제공한다고 허락할 수 있죠? 게다가 3년 후에는 소정의 월세로 전환하되 임차인 스스로 나갈 때까지 명도 할 수 없다니요?”

전 박 변호사가 작성한 계약서에 싸인만 했습니다. 가방끈 길고 잘 난 사람들이라 무조건 믿었습니다.”

이건 명백한 사기 계약입니다. 건물등기는 본인 앞으로 되어있나요?”

땅만 그렇고 건물은 와인사업단 소유로 되어있습니다. 와이너리 지원금을 무상으로 지원받는 조건으로 권리주장을 할 수 없도록 묶어둔 거죠. 십년이 지나면 제 앞으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건물의 소유주가 의뢰인 명의가 아니라서 소송을 해도 불리합니다. 본인의 소유도 아닌 건물을 임대했으니 월권이죠. 와인사업단 측에서 반격이 들어오겠는데요. 처음부터 그걸 노렸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비관적으로 추측하시지 말고 보다 건설적인 방안을 제시해주세요.”

사무장이 한숨을 내뿜으며 대길의 얼굴을 응시한다. 당장 담배 한 개비가 필요하다는 표정이다.

글쎄요. 저들의 횡포에 굴복하는 수밖엔 대안도 없네요. 건물등기가 본인 소유라야 소송도 가능한 법인데.”

대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를 세워둔 공터까지 십분은 걸어야하는데 버거웠다. 몸은 물에 불린 솜이불처럼 천근만근이었고, 팔에서 시작한 통증이 턱밑까지 번졌다. 재산을 모두 날리게 생겼는데 그깟 주차비 몇 푼 아끼자고 먼 공터에다 차를 세웠나 싶어 자책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끌어 공터에 도착했을 땐 일말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떤 고통도 이토록 명징한 적이 있었던가. 가혹하리만큼 혹독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니 절대 겪어서는 안 될 고통이다. 가까스로 차 안에 몸을 밀어 넣자 잠이 몰려왔다.

대길은 사흘 후 꽁꽁 언 몸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손에는 마치 노예문서와도 같은 계약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사인은 저체온증으로 의한 심장 쇼크사였다.

 

대길의 장례 후 선예는 송장처럼 늘어져 누워만 있었다. 영양분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몸뚱어리는 낙엽처럼 바스러질 듯했고, 화장기 없는 안색은 창백한 주검 같았다. 창밖으로 낮과 밤이 거푸 지나갔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가만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잔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몸소 경험했다. 자고나면 하루가 지나갔고, 또 자고나면 또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왔을 땐 장대비가 질척거리고 있었다. 질펀하게 젖은 세상은 온통 눅눅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그녀의 넓적다리 틈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당겨 부푼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가 안방으로 되돌아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운동복차림으로 나오더니 마당에 세워둔 승합차에 냉큼 올라탔다. 마당을 빠져나간 승합차가 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와이너리였다. 때마침 정기모임이 있는 목요일이라 앞마당에는 빠끔한데 없이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차를 가로막아 승합차의 시동을 껐다. 승냥이 굴로 성큼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와인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거치대에 모양 좋게 걸려있던 와인 잔들은 식탁에 널브러져 있고,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난 것도 있었다. 성한 것조차 잔 표면에 손자국이 얼룩덜룩했다.

길고 어두운 통로 저편에 맥주공장이 있었다. 그곳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수십 개의 검은 눈동자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푸른 레이저를 쏘았다. 어색한 침묵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녀의 겁먹은 눈동자가 회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다가 천 교수 앞에서 멈칫했다. 천 교수는 그녀와 시선이 엉키자 미간을 찌푸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낌새라도 차린 걸까. 그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참다못한 그녀의 입술이 먼저 달싹였다.

공장을 옮기고 그만 제집에서 나가주세요.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지켜보고만 있던 박 변호사가 입 꼬리를 삐죽 올려 비아냥거린다.

위약금 낼 돈은 있나보죠.”

얼만데요?”

한 장 정도면 고려해 보죠.”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낄낄댔다. 돈도 없이 까분다는 조롱의 야유가 틀림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한 장의 가치가 얼마인지 그녀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알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가진 돈도 없다. 그녀의 눈에서 핏발이 터질듯했다. 정오의 태양처럼 이글대는 분노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이성을 흔들어 술판을 뒤집어엎었다. 조미 오징어

채가 서릿발 날리듯 허공을 빙 돌아 바닥으로 내꽂혔다. 맥주가 담긴 와인잔도 둥근 형체를 잃고 조각조각 파편이 되었다. 그녀가 목을 꼿꼿이 쳐들고는 쐐기를 박았다.

내 남편 목숨 값이 고작 열장이라니!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당장 나가!”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 천 교수의 반응은 잔인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계속 행패부리면 영업방해죄로 경찰을 부를 거요.”

부를 테면 불러. 오히려 잘됐네. 잘잘못을 법정에서 따져보자고!”

선예는 신경질적으로 울부짖었다. 천교수의 지시를 받은 회원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건물 밖으로 패대기쳤다. 돌부리에 찍힌 이마에서 끈끈한 액체가 흘렀다. 입술 새를 파고 든 액체의 맛이 비릿하게 느껴질 즘 칼바람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 감촉이 너무 시려 뺨이 얼어붙을 듯했다. 그녀는 뺨을 만지며 이 아득한 겨울이 얼른 지나가고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았다. 시장은 신년사에서 포도과수원을 폐원하는 농가에게 천이백만 원의 위로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지역특화작물로 앞으로는 복숭아에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곧 와이너리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포도 농가들은 된서리를 맞은 듯 아우성을 쳤지만 판세는 그렇게 흘러갔다.

얼었던 땅이 녹자 그녀는 포클레인을 불러 골짝 포도밭을 갈아엎었다. 복숭아 묘목을 심을 작정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삶의 마지막 끈인지도 몰랐다. 등 굽은 노파가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다가는 구시렁댔다.

공들여봐야 말짱 꽝이여. 멧돼지가 워낙 극성이어야제. 골짝 밭이라 손까지 타는구먼. 아랫동네 박 씨네 복숭 밭도 다 털렸어.”

끌끌, 노파의 혀 차는 소리가 언덕 너머로 메아리친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뿌리개를 들고 밭고랑을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설령 그 말을 들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복숭아 와인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을 테니까. 신의 격려와도 같은 봄날의 온기가 그녀의 정수리로 내리붓는다.

 

 

 

 

 

 

 

 

 

 

 

 

 

 

 

 

 

 

 

 

 

 

 

 

 

 

 

 

 

 

 

 

 

월간 문학 한국인 제 28차 콘테스트

 

 

 

응모 분야 단편소설

 

제목 봄날

 

이름 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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