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하화(下化)

by 혤게이트 posted Apr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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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화(下化)



1.



 “은연빛, 이제 정말 일어나야해. 너 늦었어!”

  이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내 몸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카랑카랑한 엄마의 목청소리에 그제야 나의 온몸을 누르고 있던 중력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겨냈다기보다 그 무거움을 들어낸 것이 더 맞겠다. 시계는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문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거실 행거에 곱게 걸어진 흰 와이셔츠, 검정 넥타이, 검정 재킷, 검정 바지를 입고 검정 배낭을 멨다. 거실의 전신거울을 보니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흰색이라곤 새까만 재킷 속 살짝 모습을 드러낸 흰 와이셔츠뿐 이였다. 비도 내리고 진흙탕에 신발이 더러워질 것이 뻔하였다. 그래도 저번 주 주말에 시내에서 산 흰 운동화는 포기할 수 없었다. 새 학기니까. 새 출발이니까. 모든 게 완벽했으면 했다.

  현관문을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콧속으로 깊게 들어왔다. 이런 날씨가 싫진 않았다. 그 차가움은 시원함으로 느껴졌다. 단지 이 날씨엔 내 운동화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새까만 교복 사이로 와이셔츠와 운동화로 나를 밝혔음에도 손에 들린 우산은 또 검정색이었다. 안개 낀 하늘과 쌀쌀한 공기 거기에 새까만 우산까지... 오늘은 왠지 모를 어두움이 느껴지는 날이다. 학교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린다. 시골길이었기에 버스로 갈 수도 없고, 엄마는 운전을 못 하시기에 차로 갈 수도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꼼짝없이 걸어가야 한다. 집 앞 논두렁을 지나 학교로 향하는 오솔길에 다다랐다. 이제 막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가지, 이파리 사이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운동화 밑창과 진흙이 닿아 내는 소리와 빗소리만이 오솔길에 가득했다. 그 소리들은 나에게 노래의 박자처럼 느껴졌다. ‘, 토독토독, , 토독토독그 박자를 깬 건, 저 멀리 뒤에서 들리는 자전거 소리였다. 진흙탕 속을 뚫고 세차게 달려오는 자전거에게 내 흰 운동화는 속수무책이었다. 오는 내내 조심해서 걸었기에 새하얗던 운동화는 한순간에 진흙으로 더럽혀졌다. 그 뿐인가? 교복바지도 진흙으로 젖어 축축했다. 원망스런 눈으로 자전거 주인에게 고개를 돌리니 한 여자아이가 바구니에 곱게 있던 분홍색의 가방 안에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곧 가방 안으로 머리가 들어갈 듯이 파고들며 한참을 찾더니 손수건을 건넸다. 분홍 손수건 이었다. 각이 잡히지 않은, 대충 4번 구겨 접은 모양새였다. 손수건엔 ‘Suzy.Lee'라고 박음질 된 글씨와 벚꽃모양의 자수가 오른쪽 아래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안해 진짜! 괜찮아?”

  여자아이가 말했다. 표정엔 미안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고 그 애 역시 까만 재킷에 치마, 리본 그리고 왼쪽 가슴에 下化高等學校’(하화고등학교) 마크가 있었다. 마크 위엔 주홍색 줄 하나가 그어져 있었고 그 모습들은 나와 그 아이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목덜미가 간지럽기라도 하는 듯 연신 긁어댔다. 그 얼굴에 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괜찮아, 넌 괜찮아?”

  “당연히 난 괜찮지. 혹시 괜찮으면...나도 그 우산 좀 씌워줘. 비가 너무 오네.”

  “! 미안.”

  우리는 안개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새까만 지붕아래 같이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예쁜 소녀라는 걸. 왼쪽 가슴의 빨간 줄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 동그란 눈 위에 보일 듯 말 듯 한 쌍꺼풀, 작은 콧방울과 입술 그 아이의 모든 것은 내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미안한 건 나지! 손수건으로 좀 닦지 그래? 너 신발 흰 색이던데...새 거 같던데...”

  그 아이는 더럽혀진 운동화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괜찮아, 새 거 아니야.”

  “아 다행이다! 난 또 걱정했잖아~ 원래 새로 산거 더럽혀지면 기분 진짜 안 좋잖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손수건은 필요 없어. 여기.”

  그 애는 구겨져있던 손수건을 넓게 펴고 뺨을 닦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맞은 빗방울이었다. 그 아이의 하얀 뺨에 이슬처럼 맺혀 흐르고 있었다.

  “, 비 오는 날은 자전거 타는 거 아닌가봐~근데 지금 몇 시야?”

  그 말에 손목을 가리고 있던 소매를 걷어 시계를 보니 8시였다.

  “8시인데? 늦었어.”

  “뭐라고? 야 이럴 때가 아니잖아!”

  우리를 감싸던 검은 지붕에 나와 그 아이는 자신의 분홍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이미 자전거 안장은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아이는 대충 흙을 털고 안장에 앉아 달릴 준비를 했다.

  “뭐해? 너 뒤에 안타?”

  “? 나 무거운데...”

  나의 말에 그 아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나도 알아~ 이럴 때 아니야 얼른 타기나 해~”

  그 아이의 말에 우산을 접고 안장 뒤 위태롭게 달려있는 짐받이 위에 몸을 맡겼다. 앉자마자 그 아이는 오솔길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안개도 걷혀졌다. 그제야 머리 위에 하늘이 푸르게 색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 내내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이름, , 학년, 좋아하는 음식 등. 나와 그 아이의공통점을 찾으려 하였지만 학년 빼고 일치하는 게 없었다. 그 아이이름은 수지였다. 이수지. 손수건의 자수를 보고 이미 알았지만 모르는 체 했다. 왠지 부끄러웠다. 내 신경이 모두 그 아이에게 가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항상 작게만 느껴졌던 나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그날따라 크게 느껴졌다. 평소 4분의 2박자로 뛰었다면 그 순간은 4분의 4박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4분의 4박자가 심장 박동의 평균이 된 것 같다. 이 날은 모든 게 완벽하지 않았다. 완벽했던 것들마저 질서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2.



  아침 공기가 여전히 차다. 오늘은 엄마보다 빨리 일어났다. 그냥 눈이 떠졌다. 빨리 현관문 밖을 나가고 싶었다. 죽어도 하기 싫던 아침 목욕이 즐겁게 느껴졌다. 평소에 엄마가 쓰는 것을 보고 향이 독해 쓰지 않던 라벤더 향 바디워시도 사용했다. 딱히 그 아이를 만날까봐, 수지를 만날까봐 그런 건 아니었다. 시간은 벌써 7시 반이었고 어제와 똑같이 집을 나섰다. 같은 교복에 같은 신발이었다. 현관문을 나서자 찬 공기가 뺨을 스쳤다. 난 오솔길로 달렸다. 그 곳은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높은 키를 자랑하는 초록빛의 나무들과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 모두 아침 공기에 흔들렸다. 그 공기는 차지만 상쾌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도 예뻤다. 나무 사이에 작게 존재를 드러내는 햇살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따스했다. 저 멀리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은연빛!”

 고개를 돌리자 수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좁은 오솔길이 크게, 넓게 느껴졌다. 작은 햇살로 비춰지는 수지의 머리카락은 까만색이 아닌 은은한 갈색이었고 그 아이가 내 눈앞에 왔을 땐, 검은 눈동자가 아닌 고동색 눈동자였다. 어제는 검은 지붕이었는데. 오늘은 밝은 하늘, 햇살이 지붕이었다. 그 아래 우리는 다시 만났다. 계속 머물고 싶었다. 사실 그 순간은 나에게 2배속 느리게 돌린 영화 같았다.

  “아으 추워! 오늘도 같이 가겠네? 얼른 가자!”

  그 짧은 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나의 무의식은 깨졌다.

수지와 나는 오솔길을 걸었다. 수지는 할 얘기가 많았다. 그 작은 입술은 쉬지 않았다.

  “난 너 이름이 너무 부러워! 은연빛. 너무 예쁘잖아. 난 수진데. 그 흔한 이름, 수지. 연예인 중에서도 몇 명이 나 있는지! 전국에 수지란 이름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안 돼 정말! 거기다 성도 흔하고...“

  “너 이름도 예뻐. 수지.”

  “수지하면 연예인 수지라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고? 근데 연빛이란 이름 무슨 의미야?”

  “연신 빛나란 의미야.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

  “. 뜻도 예쁘네. 연신 빛나라... ! 그 이름 나 빌려주라. 내가 블로그에 내 그림 올리는데 필명이 필요하거 든.”

  “미안하지만 아마 안 될 거야. 나도 블로그에 내가 작곡한 음악을 올리거든. 연빛이란 이름으로.”

  “?? 주소 알려줘! 나도 너 음악 들어보고 싶어!”

  “나중에 직접 들려줄게.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

  사실 완성한 곡은 많았다. 엄마 말고는 내 음악을 들어본 사람은 없었기에 창피했다.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비웃진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 수지는 나의 반응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3.



  벌써 4월이다. 오솔길의 목련나무는 벌써 꽃을 피운지 오래다. 수지와 학교를 오가는 내내 맡은 봄의 냄새는 향긋했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오솔길은 어느새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벚꽃이었다. 벚꽃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우린 항상 학교에 늦었다.

  “꽃을 볼 땐, 자세히 봐야해. 꽃의 색, 잎맥, 가지의 모양까지 모두가 다르거든.”

  수지는 항상 이 말을 되뇌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에 저렇게까지 관찰한다고 했다. 그 말에 자세히 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나의 눈은 꽃 따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꽃을 향한 수지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진지한 표정 때문에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느라 애썼다. 오늘도 역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윗니와 아랫니로 혀를 꼬옥 깨물었다.

  “이 오솔길, 밤이 되면 무섭게 느껴질지 지금과 똑같은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아?”

  그 때 고개를 돌리며 수지가 말했다. 수지의 말은 밤에 같이 오솔길에 가자는 거였다. 이 정도는 이제 알 수 있다. 3월 내내 말을 섞어보니 이제 그 아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같이 와보자.”

  난 아무렇지 않은 일인 듯 대답했다. 퍽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 기대에 찬 눈빛을 깨고 싶지 않았다.

  “좋아! 7시에 만나는 거다!”

    오늘이다. 수지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줄. 한 달 내내 언제 노래를 들려 주냐는 칭얼거림을 듣는 것을 끝낼 기회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를 골라 핸드폰에 담았다. 이어폰도 챙겼다. 가만히 거실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긴장이 됐다. 수지 성격상 좋다고는 하겠지만, 알고 있었다. 한없이 부족한 노래라는 것을. 침착하게 앉아있는 모습과 다르게 내 머릿속은 주말 오후의 시장바닥 같았다. 6시 반이다. 난 오솔길로 향했다. 길어진 해 덕에 하늘은 붉고도 어두운, 그렇다고 검붉진 않았다. 파랗고 주황빛의 노을이 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오솔길에 도착하니 640분이었다. 아직 수지는 오지 않았다.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아침마다 시늉으로만 했었던 꽃을 처음으로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의 목련나무는 촛대 같았다. 꽃봉오리는 둥근 양초 이며 붉은 불꽃은 없지만 그 순백의 색은 길을 밝히기에 충분했다. 벚꽃도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다.

벚꽃은...

  “은연빛!”

  수지가 왔다. 아침마다 듣는 대사와 목소리였다.

  “뭐야~ 10분 일찍 온 건데 와있으면 어떡해!”

  “나도 방금 왔어.”

  “~ 역시 밤에도 예쁠 줄 알았어!”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보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언제 나의 노래를 들려줘야 할지 고민했다. 망설여졌다. 이렇게 내 눈앞에 와있으니 긴장은 배가 됐다.

  “사실 밤의 벚꽃을 그리고 싶은데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봐도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서. 나 혼자 오긴 무섭잖아!”

  수지는 가방에서 선이 없는 두꺼운 종이 재질의 스프링 노트와 연필을 꺼내어 벤치 바로 건너편의 벤치에 앉아 내 머리위의 벚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빠져든 듯 말없이 그 작은 손으로 널찍한 백지에 마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늘 노래를 들려주기엔 틀렸다고 단념했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작곡입시를 위해 오선 위 피아노를 연주했다. 밤의 어두움, 고요함, 쓸쓸함을 노래하는 곡이었다. 노래 제목은 없었다. 항상 그 자리는 공석이었다. 곡의 이름은 항상 정하기가 힘들었다. 괜찮다. 아직 입시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음표를 읽으며, 박자 실수한 것은 없는지 기호의 자리는 맞는지 몇 번이고 검사했다. 그러다 난 평소와 같이 수지가 또 궁금해졌다. 고개를 들자 마주한 모습은, 이른 저녁, 작은 새의 날갯짓 같은 바람, 그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 수지의 머리카락. 그리고 내 마음이 흩날렸다. 아니 요동쳤다. 수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저 어린 마음의 흔들림이 아니란 것을 그 순간 느꼈다. 난 말없이 노트를 넘겼다. 새 오선지에 수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늘거렸다. 핑크빛이었으며, 흐드러졌다. 하지만 강했다. 나를 이끌고 당기며 요동치게 했다. 벚꽃나무 아래 수지는 하나였다. 벚꽃은 자세히 볼 필요가 없었다. 난 이미 매일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의해 깊은 깨달음이 오면 뇌가 멈춰버린 느낌이 든다. 지금 내가 그렇다. 그렇게 한동안 멈춰 서서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작품명:하화(下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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