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아

by 송멀티 posted Nov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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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공모작 "경신아"





어떤 아이라도 한 어미의 등대와 같은 존재이다. 삶의 이유이자 희망이 되는 ‘누군가’의 아이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겪는 현 시대상의 여러 가지 문제와, 우리 곁에서 발견하는 말썽꾸러기 아이의 과거와 현재를 같이 조명하며 어떤 아이이든지 부모에게 절대적인 희망이자 지침, 그리고 바다 위의 신호등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그리고자 했다. 또한 ‘등대’ 불빛을 보며 배가 길을 찾듯이 이 시대 우리가 주목하고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갈 길은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야, 너는 등불이야.”


아이는 속없이 편안한 얼굴로 자기를 감싸는 절대적인 포근한 세상인 어머니를 향해 손과 발을 움직거렸다. 그저 이 따뜻함이 자기를 더욱 보듬어주기를 바라면서. 그것만이 아이에게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어미는 그 발버둥치는 손짓같은 언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욱신대는 것을 느꼈다. 예쁜 손을 부여잡고 젖가슴에 아이를 꼬옥 묻어 끌어안으며 어미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이야, 너는 내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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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은 도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은 자기 눈 앞에 있고, 또 굉장히 화난 얼굴이었다. 또 내가 울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것으로 상황을 종결하자는 이상한 결론을 경신에게 종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경신. 대답 안 해? 왜 자꾸 수업 시간에 다리 떨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냐고 선생님이 몇 번을 말했어? 수업 집중도 안하면서 대답도 안 하는거야?”

그제야 머릿속에 밀려드는 말소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려 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칠판 쪽으로 가버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뜬 눈 옆에서 눈물이 비질 새어나왔다. 이유 없이 코가 시큰해져 경신은 코를 뭉그러트리듯이 비볐다.

경신은 수업시간에 집중을 놓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나만의 세계에 빠져든 것이었다. 그 세계는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다. 경신은 젊고 예쁜 어머니와, 양복을 근사하게 입은 아버지 사이에서 놀이동산도 가고 티비도 같이 보았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진형이가 와서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축구 할래?”

응. 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경신은 일어나서 재빨리 책상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 커다란 티비 뒤에 끼어있는 공을 손바닥으로 톡 올려쳐 꺼냈다.

방금 전 수업했던 책을 정리하던 선생님이 또 눈이 독사 눈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이경신!! 정신 못차려? 이거 선생님이 수업 다 끝나고 종례할 때까지 건들지 말랬지?”

선생님이 벼락같은 목소리로 야단을 치는데도 경신은 이미 마음이 온통 공에 가 있는 상태였다. 사실 집에서 엄마가 야단을 칠 때도 항상 말소리를 듣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대답도 하지 않고 말들을 흘리다 보니, 선생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경신은 꺼낸 공을 이미 친구들과 여러 번 농구 공을 패스하듯 주고받다가 복도 쪽으로 뻥 차면서 뛰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선생님은 한 번 더 입술을 크게 열다가 그냥 닫고 냉랭한 표정으로 하고 있던 책 정리를 계속하였다. 경신은 이미 선생님께 여러 번 혼났지만 고칠 생각도, 고쳐진 적도 없는 그런 아이니까.

“이 쪽으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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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은 하교 시간이 가장 싫었다.

아이들은 모두 다 돌아가고 경신과 나머지 옆 반의 친한 친구들 몇 명만 남아서 복지 선생님과 있어야 했다. 그 선생님이 매일 주는 간식은 좋았지만 이미 복지 선생님의 방에 있는 장난감은 3학년부터 매일 갖고 놀았기 때문에 질린 상태였다. 경신은 복지 선생님이 운영하는 주간 보호 교실에 맡겨져 저녁 일곱시까지는 학교에 있었다.

사실 저녁 7시가 되면 대부분의 주간보호교실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집에 가게 되어있어서 저녁 7시에 집에 가든 그 이전에 반의 친구들처럼 빨리 집에 가든 상관이 없었다. 저녁 7시에 부모님이 아이를 데리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경신은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 엄마는 순간 표정에서 축축한 그리움을 비추었다가 사라지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저 만나게 될 인연이라 이리 되었다. 라는 말만 반복하던 엄마가 하루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자고 있는 경신의 앞에서 넋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경신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느이 아버지가 떨어져서 죽었어.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꾸역꾸역 나갔어. 공사판 계단 부실하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사람 죽이는 계단인지 내 알았더라면, 내 공사하는 사람 만나서 이렇게 또 혼자야.. 느이 아버지가 떨어져서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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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사실 매일 자신을 구경하는 남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사는 슈퍼, 아니 슈퍼에 딸린 집으로부터도 더 골목 위로 올라가야 있는 판자촌에 사는 모양이었다. 어스름이 지는 저녁이면 추적하게 보이는 걸음으로 회색 작업복을 입은 채 자신이 앉아 있는 슈퍼의 평상을 지나가면서 꼭 얼굴을 무엇이 묻은 것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며 지나가고는 했다.

젊은 자기의 얼굴이지만 볼만한 것이 아니고, 잘난 데 아무것도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데도, 더벅머리에 회색 유니폼을 입은 얼굴 가득 굵고 검은 주름 진 사내의 시선에 눈을 밑으로 내리 깔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자는 평상에 앉은 자신의 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막 찾아 신은 양말과 편하게 신는 슬리퍼, 그것이 마치 자신과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는 마치 꽃신을 보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점점 그 시간대에 의식적으로 슈퍼 안쪽에 딸린 방에서 나와 평상에 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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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은 꼭 집에 들르기 전에 가는 자신의 진짜 “집”이 있었다.

엄마도, 담임선생님도 모르고 경신이 유독 가깝게 지내는 복지 선생님도 모르는 진짜 집이었다.

경신은 오늘도 손에는 천원짜리 두장을 쥐고 담배냄새가 어쩐지 묻어나는 것 같은 유리문을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 젖혀 열었다.

딸랑 소리, 피씨방 문에 붙은 종이 쓸데없이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원래 경신이 이용하는 ‘진짜 집’ 은 2시간에 2000원 요금제가 있었지만 경신에게만 특별히 3시간을 주었다. 경신의 피씨방 포인트가 VIP이기도 했고, 뚱뚱한 주인 아저씨는 유독 경신에게 친절했다.

정신 없이 게임을 하다 보니 3시간이 끝나버려 경신은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담배내가 미끄러지듯 켜켜이 엉겨붙은 피씨방 문을 손바닥으로 눌러 열었다. 어느 새 시간은 밤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한다.

왠지 입안이 썼다. 경신은 운동화 앞코로 땅을 툭툭 걷어차다가 집이랑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딸랑 소리. 이번에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엄마가 서빙하는 칼국수집이었다.

엄마는 칼국수집 서빙을 끝내고 있다. 경신을 보면서 반가운 웃음을 짓는 엄마 뒤로, 엄마 옆에 언제나 있는 키 작고 머리가 벗겨진 칼국수집 주인 아저씨도 경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좁은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잔소리하며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 것이 경신의 뒤통수로도 보였다.

이상하게 경신은 엄마가 잔소리 하면서 신발장에 자신 대신 신발을 넣어줄 때 꼭 수학 문제의 정답을 맞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승리감에 경신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서 누구도 못 보는 미소를 자신에게 지어주었다.

자려고 누운 방, 엄마와 경신은 말이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다. 작은 창문으로 비 흐르는 소리가 타닥, 타닥 창문을 때리고 나서 격렬하게 흩어져 밑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어느 새 문득 눈을 뜬 경신은 옆 자리에 엄마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 엄마는 일할 때는 바르지 않던 빨간색 립스틱을 두껍게 바르고, 검정색 스타킹과 검은색 가방을 들고 어디에 간 것 같았다.

사실 경신은 엄마가 밤마다 남자친구와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사실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지만 친구들 엄마보다는 굉장히 나이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동수 엄마는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 엄마는 주름이 많았다. 경현이 엄마는 머리가 긴 생머린데 우리 엄마는 아줌마 파마를 하고 있다. 근데도 엄마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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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술에 취해 집을 나선다.

여자는 경신이에게 맞은 뺨을 부여잡고 이야기하였다. 경신은 아직 엄마의 무너진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걷지도 못하는 남자였다.

그런 경신이었지만 여자는 경신이를 붙잡고 하나 하나 이야기 해주었다. 아빠랑 어떻게 만났는지, 아빠가 자신의 집에 결혼 허락을 맡으러 사과 바구니를 들고 온 얘기, 우리 집 슈퍼에도 있는 사과를 왜 굳이 사오냐고 여자의 아버지가 역정을 낸 얘기, 그렇게 차린 살림 남편이 전혀 보탬은 되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단칸방에서 깜빡 쓰러졌다가 눈을 뜨니 경신이 태어나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아빠랑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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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칼국수집에서 하루종일 서빙을 한다. 일은 고되지만 딸려 있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버텨내야 한다고 엄마는 온종일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을 귀로 훔쳐 듣고 마음에 새긴 주방 언니 하나가 아홉시 뉴스가 끝난다는 소식에 티비에서 퉁퉁한 등을 돌아앉아 눈을 금이라도 본마냥 번쩍거린다.

“아니 근데 자네는 나이가 오십 여덟이면서 그래, 어째 애가 열 두 살이야?”

그 말에 여러 개의 귀가 따라붙어 엄마에게 향하고 있다. 다른 눈들도 같이 금을 발견한 듯 번쩍거렸다.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야.”

한숨처럼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토끼같이 놀라는 언니들의 눈동자를 둘러본 엄마는 점점 청중 앞에서 연설할만큼 힘을 얻는다.

“내가 배아파서 낳은 딸은 지금 이미 30대야. 걔는 나한테 연락 한번 안 한지 10년은 된 거 같아. 지금은 알아서 시집가서 잘 살어.”

“그러면 경신이는 누구 애야?”

“누구긴 누구야, 내 남편 두번째 부인 딸이지. 내 남편도 꼬랑내 나게 생겨서 여자도 없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세 번째 여자고, 경신이는 두 번째 부인 자식인데 나랑 살기 전에 핏덩이 낳아두고 도망 간 여자 자식이야.”

쯔쯔쯔쯔 혀 차는 소리가 바람에 들불 번지듯이 둘러앉은 여자들 입술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엄마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내가 정이 있어서 자식처럼 키우는데 다 늙어빠져서 애 키우려고 하니까 고생 꽤나 했지. 내가 똥기저귀 갈고 내가 키워서 내 자식이지. 나도 신세 빠진 여자야, 남편마다 결혼하면 이 모양이니.”

첫번째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20대 만나서 결혼했다. 순하고 순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술만 마시면 사발이 궤짝이 될만큼 너무 많이 마시고 손찌검을 해댔다. 맞는게 지긋지긋해서 바람핀 남자랑 도망쳤다.

그렇게 같이 도망친 두 번째 남편이랑은 동거만 했는데 알고 보니 얘도 술먹고 나니 자기를 때렸다. 왜 사회에서 가진 불만을 내 몸에 푸는지 몰랐다. 그래서 또 나와서 이제는 나 혼자 살다 죽자 하고 지내다가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은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나에게 잘 해줬지만 공사판에서 떨어져서 즉사하였다.

죽기 전에 혼인 신고를 해두었기에 남편의 보험 들어놓은 것에서 나온 돈으로 핏덩이 아이랑 덜렁 장례 치르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보니 나도 술밖에 찾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랑 같이 잘 살아 보려고 분식집도 차렸는데, 학교 앞에서 차렸어도 망한게 그렇게 망할 수 없을만큼 망해서 그 돈을 다 날려버렸다. 지금은 칼국수집에서 열시간씩 서빙하고 시급을 3500원씩으로 받는다.

그 때 딸랑,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놀리던 입술을 멈추고 뜨끔하는 소름이 온 몸에 우수수 돋았다. 혹시나 하고 쳐다본 문에는 경신이가 어딘가 회색빛이 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이고, 경신이 점심 먹으러 왔나? 어매 벌써 토요일이네. 학교는 주말이라 안 했나?”

10초가 넘는 침묵 끝을 누군가 자르고 억지스런 밝은 톤으로 이것 저것 말을 뱉어내는 것을 신호로 빙 둘러앉은 대열을 깨고 부산스럽게 아줌마들은 움직여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엄마는 놀란 가슴을 숨기며 태연한척 무릎을 짚으며 아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가만히 문에 서 있는 경신에게 손짓해서 구석자리로 아이를 앉히며 물수건과 김치를 날라주었다.

“어여 앉아라. 칼국수 먹고 가 응?”

경신이는 칼국수를 싫어한다. 꾸역꾸역 먹고 집에 가기 전 엄마에게 피씨방 갈 돈을 달라고 한다.

엄마는 줄 생각이 없는 듯이 잔소리를 하다가 앞치마에 손을 쑥 집어넣는데 뜻밖에 경신의 눈앞에는 다른 데서 돈이 내밀어진다. 머리가 벗겨진 칼국수집 사장님이다. 경신은 멍하니 만원이 내밀어진 손끝을 보다가 낚아채듯 들고 칼국수집을 뛰쳐나가 나섰다.

경신의 풀어진 운동화끈의 끝에 딸랑거리는 문틈 사이로 엄마의 잔소리가 매달려 뛰어가는 경신과 함께 햇빛을 받았다.

경신이는 피씨방에서 총 게임을 켰다. 아직 경신의 나이로는 할 수 없는 게임이지만 엄마 주민번호를 도용해서 만든 아이디.

피씨방 컴퓨터 모니터 안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며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총게임으로 매일 연습해서인 것 같다. 그래서 내 아빠가 떨어져서 죽었다고 하는 엄마의 말에도 슬프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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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고 있는 경신을 눈으로 사진을 찍어 저장이라도 하듯이 하염없이 경신을 쳐다보았다. 감긴 눈에도 입맞추고 손도 만지작거린다. 작은 경신이 귀엽기 때문. 방금도 말한 것 같지만, 여자는 경신의 귀에 대고 속절없이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뜨거운 입김만큼 뜨거운 마음과 함께 고백한다.

“사랑해, 경신아. 엄마는 경신이 사랑해, 경신이를 응원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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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은 집에 가는 길, 다시 가로등이 있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친구들도 계단을 오른다. 이쯤은 숨에 차지 않는다.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가다 보면 언덕길이 나오고 또 그다음 계단이 있다. 옆 친구들은 아까부터 욕배틀을 하고 있다.

옆의 친구들은 벌써 욕을 잘 하지만 경신은 많은 욕을 하지는 않는다. 친구들은 장난치듯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찾고 있었다. 그 사이, 경신은 그저 얌전히 있는다. 그러나 옆에 있는 아이들이 가끔씩 기어오르면 그 아이들을 패서라도 자신이 꿀리지 않는 존재감이 있단 것을 보여준다. 경신은 사실 그 아이들의 짱이다.

집에서도 경신은 집안의 짱이다. 집안에 남자가 없어 자신이 가장이기도 하지만, 엄마보다 더 높은 서열에 있는 짱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경신이 하고 싶은 것은 곧잘 잘해주지만 경신은 엄마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기 위해 엄마가 자신에게 해라고 하는 것을 가끔 어긴다. 경신은 엄마가 자라서 의사나 하라고 하는 말을 매일 듣는다. 그런데 경신은 속으로 몰래 생각한다. 그저 어서 자라서 무엇을 하든지 어른이 되고 싶다. 혹은 병 없이 빨리 죽고 싶은게 자신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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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경신이에게 이야기한다.

“네 이름은 등불이란 뜻이야. 밝은 몸으로 이 세상을 비추거라.

사랑받을 아이야, 신아, 경신아...“

작은 어깨가 들썩인다. 긴 치맛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친다. 치마 한쪽에는 아빠가 던진 김치그릇에 맞아 빨갛게 멍든 천조각 한자락이 같이 울고 있다.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가죽 가방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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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은 가로등을 쳐다본다.

왠지 눈이 부시다. 그런데도 계속 빛을 쳐다본다. 멍청히 쳐다보고 있느라 아이들은 이미 계단 위로 올라가버렸다. 따라서 가파른 계단 위를 툭툭툭 올라간다. 경신이 신은 신발은 이미 빨아서 신은지 한 달은 되어 좀 검다.

어미는 경신이가 세상에서 겪을 풍파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경신도 또한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한 어미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가로등은 침묵했다. 경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은 경신이 그저 주간보호 대상자임을 알리는 xx초등학교 복지실에서 나누어준 커다란 가방과, 연달아 총소리를 내며 서로를 죽이는 척 장난하고 있으면서 경신이 어서 계단 위로 올라오기를 바라는 옆 교실의 친구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경신이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