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전구-
준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바닥을 보며 걷던 그의 버릇과는 다르게, 고개를 든 것이다. 지하철 안이라 탁한 먼지가 그의 코를 자극했지만, 그는 그의 버릇과는 다르게 고개를 들었다.
‘어? 평소보다 어둡잖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지만, 준영은 한참 천장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다른 많은 전구들과는 다르게 빛을 발하지 않는 검은 전구 가 있었다.
‘검은 전구 라…….’
검은 전구라는 말의 역설성이 맘에 들었는지, 준영은 그 말을 되뇌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평소와 다른 날 이었다. 늘 땅을 쳐다보며 걷던 버릇이, 버릇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곳에는 불을 밝히지 않는 검은 전구 가 있었다.
그가 생각을 마무리 하건 말건, 그의 다리는 집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문 앞에 섰고, 그의 뇌는 열쇠를 찾아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준영이니?”
집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영은 그 말을 무시한 체, 방에 들어가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준영아 씻고 저녁 먹어라. 매일 그렇게 하더니 오늘은 왜 그러고 있니?”
목소리는 준영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매일?’
그는 매일 이라고 말해본다.
‘매일이라면, 나는 오래전부터 집에 들어오면 씻고 저녁을 먹었다는 말인데…….’
그 목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이 모든 일상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준영이었다.
- 사고 -
사실 준영이 에게는 20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4년 전 그 사고이후부터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특별한 사고도 아니었다. 하루에 수천 번도 더 일어나는 교통사고, 준영은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준영은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무시한 차량에 치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친구 성민이 신속히 구조요청을 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하는데, 준영은 이 모든 이야기를 친구인 성민에게 들었다.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고도, 그자신이 어딜 급하게 가고 있었는지도.
사고 후 준영은 20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보살펴주는 가족과 친구 성민이 있었다. 그는 빠르게 회복했고 예전의 생활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고 주변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준영에게는 그러한 생활 자체가 생소했다.
시간은 흘러 사고 몇 달 후, 신체적으로 회복이 끝난 준영은, 술자리에서 성민에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다.
“저기 성민아, 내 사고 말이야…….”
“응, 그게 왜?”
“아니 나 말고, 날 쳤다는 그 차는 어떻게 됐냐?”
성민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뭐 지금까지는 네 건강 회복이 제일 중요했으니깐, 너한테 말 안했지만, 이제 너도 다 회복했으니깐 말해주마. 그 차에는 한 가족이 타고 있었어, 남편 부인 그리고 아들. 안타깝게도 널 치고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일가족 모두 죽었지. 아들은 우리랑 같은 또래라 던데.”
준영의 표정이 굳어짐을 성민은 느꼈다.
“거봐, 말 안할걸 그랬네. 충격 받았어?”
“아냐, 그냥…….죽었을 거라곤 생각을 못해서.”
이상한 분위기가 싫다는 듯 성민은 높은 톤으로 말했다.
“야! 얼굴 펴라 산사람은 살아야지 너무 충격먹지마라. 너희 부모님께서도 그 가족 딱하게 생각하셔서 피해자는 넌데, 병원비 하나도 안 받고 그 가족 친지한테 위문금까지 주셨다 고하더라.”
성민의 말을 듣고도 준영은 말이 없었다. 한 참후 적막감을 깨뜨린 건 성민이었다.
“아! 열두시다. 가자 이제. 술맛도 떨어지고. 안갈 꺼야? 나 먼저 간다.”
인사를 남기고 먼저 일어난 성민과는 달리, 준영은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크게 충격을 받거나 달리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저 머물러 있고 싶었다.
10분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준영은 생각할수록 죄의식이 들었다. 나 한명은 살고, 그 가족 3명이 모두 죽었다는 생각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곧 그 모든 후회의 덧없음을 생각해 냈다.
- 병원 -
아침 일찍 일어난 준영은, 늘 다니던 병원을 찾았다. 사고 이후 쭉 다니는 병원이었다. 간단히 피검사와 검진을 받고,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대답하고는, 병원을 나섰다. 준영은 병원이 싫었다. 하지만, 병원은 그의 의식이 돌아온 후 가장먼저 본 장소였다. 그 만큼 그의 머릿속에 크게 자리 잡은 공간이기도 했다.
‘병원이라, 그래 내가 의식을 찾았던 곳이 이 병원이지 .’
준영은 오래된 기억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기억 저장소 깊숙이 위치해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그 기억은 병원에서 처음 의식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준영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무릎에 엎드려 있던 건, 아빠도 엄마도 아닌, 성민이었다.(준영은 그때의 성민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밥도 안 먹고 간호한 것 같은 성민의 얼굴은 자신보다도 더 환자같이 보였다) 성민은 곧 엄마와 아빠를 불렀지만, 엄마와 아빠는 준영이 깨어난 다음날에야 병원에 왔다. 왜 그렇게 늦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가족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왜 엄마 아빠가 아니라 성민이가 나를 간호하고 있었을까?’
준영은 이 의문점을 쭉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끙끙거려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성민은 준영에게 좋은 친구였고, 성민 없는 준영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준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사고 전 준영의 행동과 성격 등을 말해주며, 기억이 되살아나기를 누구보다도 바랬다.
준영은 결국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발길을 학교로 돌렸다.
- 대학교 -
대학의 도서관은 준영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의 책들이 좋았다. 친구 성민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준영은 가만히 앉아서 책의 냄새만 맡는 것조차도 좋아했다.
“준영아!”
갑자기 누군가 준영을 불렀다. 그것도 도서관에서 치곤, 굉장히 큰소리로.
“조용히 좀 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라였다. 고. 소. 라. 준영이 매일, 고소(해)라 라고 놀리지만 늘 소라는 준영을 찾는다.
“뭐해?”
한심한 눈으로 준영은 소라에게 말했다.
“눈이 없냐? 책 보자나”
매일 만나서 티격태격 해도, 소라는 준영의 유일한 대학 친구이자 말상대였다. 말이 없던 준영과, 언제나 활발한 소라는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친구가 없다는 점도 둘 사이를 더욱 돈독히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만 난건 순전히 소라의 패션 때문이었다. 두 달 전, 이제 막 학교에 복학한 준영이 도서관에 있을 때였다. 조용히 책을 읽던 준영에게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자연히 그쪽을 쳐다본 준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가 자신의 발보다 3배는 큰 것 같은 부츠를 신고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항공모함 같은 부츠를 신고 소라는 준영에게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준영이 앉아 있던 자리가 원래 소라의 자리 여서 온 것 이지만 말이다.
“준영아 너 혹시 너희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적 있어?”
“아니 왜?”
“나는 아무래도 주어온 아이 인가봐. 난 매일 우리 아빠랑 싸워. 난 서양학과로 진학하고 싶은데 아빠는 디자인과를 가라는 거야. 그게 돈이 된다면서. 난 하기 싫은데 말이야. 그쪽에 재능도 없는 것 같고.”
짜증을 부리는 소라를 보며 준영은 말했다.
“그거야, 디자인과가 유망하니깐 그러시는 거 아니겠어?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니까 그러시는 거야. 출생의 비밀 걱정할 시간에 공부나 더해!”
준영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소라를 질책했다.
“그뿐만이 아냐. 옷은 사주지도 않아. 만날 친척 언니 것만 얻어다 입으라고 강요하고. 얼굴도 모르는 친척 언니, 옷은 왜 또 그렇게 큰지, 내 몸이 두개는 들어갈 것 같아. 신발은 항공모함만한 것 밖에 없고. 요즘에는 아예 살을 찌우라고 하는 거야. 더 쪄야 그 옷들이 맞는다나 뭐래나. 정말 나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어. 내가 돈 벌어서 옷을 사던지 해야지.”
그렇게 소라의 푸념을 들어주는 사이 수업시간이 되었다.
“나 수업 들으러 간다.”
“그럼, 이따가 집에 같이 가자. 학관 앞에서 기다릴게!”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그녀도 수업을 받으러 교실로 갔다.
준영에게 법학수업은 지루했고, 핸드폰 시계만 쳐다보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수업 종료 후같이 집으로 가는 중에 소라는 준영에게 자기 집으로 놀러가자는 말을 했다.
“나 집에 가서 리포트 써야한단 말이야. 숙제가 수두룩 빽빽 하구, 우리도 이제 2학년이니까 공부 좀 열심히…….”
“그러지 말고 가자~ㅇ”
소라는 준영의 말을 끊어버리고 준영의 팔을 끌었다.
-소라의 아버지-
소라의 방에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누군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의 아버지였다. 소라는 웃으면서 나를 아버지에게 소개했다.
“아빠! 내 친구 준영이에요. 얘가 나랑 얼마나 친…….”
“조용히 하고 넌 방에 들어가!”
갑자기 소라의 아버지는 고함을 치시며, 소라를 나무랬다. 그리고 준영에게 말했다.
“자네도 이제 돌아가게”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 위압감에 눌려서 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소라의 집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는 것 같았다. 준영은 좋지 못함 맘으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날부터 소라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뿐만 아니라 연락자체가 두절되었다. 준영은 걱정되기는 했지만, 종종 내키는 때마다 학교를 결석했던 소라를 알기에, 별일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가출한건 아닐까도 생각했다. 걱정보다는 오히려 자신한테 말도 없이 가출한 것이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준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가출 같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준영은 소라의 집을 찾아갔다. 소라의 집에 도착한 준영은, 예전 소라의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이 생각나서 벨을 누르지 못하고, 소라의 방 창문에 대고 소리쳤다.
“소라야 나 준영이야. 방에 있어? 있으면 창문 좀 열어봐.”
그렇게 몇 번을 부르자 창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그곳에는 소라와 많이 닮았지만 통통하게 살이 찐,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아, 저는 소라 친군데요. 소라 있어요?”
“고소라요?”
준영의 질문에 대답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제가 고소라 인데요. 누구시죠?”
“예?”
준영은 놀라서 주소를 확인했다. 분명 이곳은 예전 와봤던 소라의 집이 맞았다. 하지만 그곳에 소라는 없었고, 소라를 닮은 여학생이 있을 뿐이었다. 동생인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준영은 소라에게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었다.
“소라야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들렸는지, 소라의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준영은 재빨리 전신주 뒤로 몸을 숨겼다. 숨어서 다시 한 번 창문을 보자, 소라의 아버지가 보였다. 분명히 예전에 봤었던 소라의 아버지가 맞았다. 하지만, 지금의 광경은 준영에게 굉장히 생소했다. 소라의 아버지는 소라를 닮은, 하지만 소라가 아닌 여학생에게 소라라고 이름을 부르며 당연하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건가? 아니야, 그건 아니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데 잘못 봤을 리는 없지.’
준영은 계속 소라의 창문을 주시했지만, 이내 창문은 닫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준영은 생각이 정리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소라와 지금의 여학생은 절대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아는 소라는? 생각할수록 이상한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준영은 다음날 다시 소라의 집을 찾아갔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며, 한 시간쯤을 소라의집 앞을 서성거렸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그 여학생이 나왔다. 준영은 그 여학생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학생”
“누구세요?”
“저기, 저 어제 창문에서 소라를 찾았던.”
그 여학생은 준영을 알아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지었다.
“그러니까…….”
준영은 차분한 말투로, 그 여학생에게, 자신이 아는 ‘고소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연락이 두절되어서, 행방을 모른다는 것도 말했다. 하지만 그 여학생에게서 나온 말들은 준영이 기대한 말이 아니었다.
“제가 소라에요. 고. 소. 라. 이집 외동딸이고요. 제가 이집에 살고 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뭐 물론 제가 이집에서 산건 한 달 전부터지만.”
준영에게 “한 달 전” 이라는 말이 강하게 들려왔다.
“뭐? 한 달 전부터라니, 무슨 말이야! 네가 이집 외동딸이라고 하면서 한 달 전부터 살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준영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요, 저는 두 달 전쯤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 달간 입원해 있었거든요. 회복하구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됐어요. 뭐 교통사고로 몸은 별로 안 다쳤지만, 사고로 이전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사고 전에도 쭉 이곳에서 살았겠지만, 그때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저한테는 이집에서 산지 한 달째 인거죠.”
화가 난 듯한 그 여학생은, 준영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준영에게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준영은 혼란에 빠졌다.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일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리고 소라의 실종은 어떻게 설명 될 것인가. 그 여학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영이 알고 있던 소라는 실제로는 존재 하지 않았다는 말이 돼 버린다.
누군가에게 말해야했다. 자신의 말을 웃지 않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준영에겐 상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준영의 다리는 성민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성민-
성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준영의 몸 전체 세포들은 하나하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벨을 누르고, 대문이 열리자, 준영은 성민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 너 왜 그래?” 의아한 듯 성민은 물었다.
준영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 같아, 성민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말했다. 과거의 사고와 기억상실, 그리고 소라라는 아이의 실종에 대해서 준영은, 성민이 말을 끊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했다.
성민이 알겠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말을 정리해 보면,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네 사정이랑, 그 소라라는 아이, 그러니깐 네 말대로라면 ‘네가 알던 소라가 아닌’ 그 소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의, 하이구야 복잡하다. 아무튼 그 여학생의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이 너랑 똑같아서, 뭔가 이상하다는 거 아냐. 무슨 음모론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지금 나한테 와서 장장 30분을 말한 것이 기껏 음모론이야?”
“소라의 실종도 있어” 준영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뭐 그래 좋아. 그래도 잘 생각해봐 지금은 2015년이야. SF영화 속의 미래 가 아니란 말이야. 네 말대로 라면, 소라라는 애가 없어진 게 무슨 음모로 인해서 없어진 거고,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이 다 누군가에 의해서 꾸며 진거라고 생각 하는 모양인데. 참 어이가 없어서, 널 15년씩이나 알아왔던 난 그럼 뭐냐?”
비웃음을 띄우며 성민은 준영을 바라봤다.
“난 심각해. 적어도 내가 기억상실에 걸린 것은 사실이잖아”
준영이 화를 내자 그제야 성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 좋아. 그럼 우리 같이 생각해보자. 음모론이 실제로 존재 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건데? 신문사에 폭로라도 할 거야?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입니다 하고? 아님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할 거야?”
성민의 이야기에 준영은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삶-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준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을 나 자신도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없어. 너 아닌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당장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을 거야. 이 세상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에 걸려있는 사람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하지만…….”
준영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이고, 내가 생각하는 음모론이 정말 존재하는 거라도, 내 기억상실과 소라의 실종에 무슨 음모가 있다고 해도, 나는 그냥…….”
준영은 다시금 한숨을 길게 쉬고 말했다.
“나는 그냥 살아갈 거야. 부모님한테는 하나뿐인 아들로,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그냥 살아가겠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 아니 정말 말도 안 돼는 공상과학영화처럼, 복제인간이든지 아니든지, 나는 살아가겠어. 설령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이 거짓이라도 나는 살아갈 거야. 대용품이면 어때, 세상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누구든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지.”
한참을 듣던 성민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중요한건 말이다. 넌 내 친구 준영이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알아온 너란 녀석은, 사고전이든 후든, 네가 기억상실에 걸려있든 걸려있지 않든, 결국 내 친구 준영이란 말이다. 새끼 심각하게 말하기는”
성민은 웃었다. 그리고 준영도 웃었다.
성민은 준영에게 많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준영은 성민에게 너는 애늙은이 다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집에 가라.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쓸데없는데 정력 낭비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라. 나는 너 때문에 다 못잔 낮잠이나 자야겠다. 잘 가라.”
성민은 하품을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 교체(交替)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준영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머리 위 공간은 하늘에서 지하철 천장으로 바뀌었지만,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오던 준영은 예전 “검은 전구”를 본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자리에는 검은 전구 대신, 밝은 빛을 내는 전구가 끼워져 있었다.
‘바꿔 끼운 건가?’ 준영은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옆의 다른 전구들보다도 더 밝은 빛을 내는 그 전구에게서, 예전 검은 전구의 모습을 찾을 순 없었다. 언젠가 다시금 빛을 잃더라도, 다른 전구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영은 집으로 돌아갔다.
-전화-
준영이 돌아간 후 성민은 준영이 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는 준영의 어머니가 받았다. 성민은 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예 별문제 없습니다. 사고 후유증 때문에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돼서 그렇습니다.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가 옆에서 돌봐주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예,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성민은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요번 달 들어 벌써 두 번째 제품결함이었다. 연속 두 번의 반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에게는 이 직업이 중요했다.
‘그래도, 요번에는 잘 막았다.’ 혼자 속으로 생각 하는 성민 이었다.
성명 : 신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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