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치유

by 임아영 posted Dec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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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치유

 

사람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과 맞닥뜨리곤 한다.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새 나에게 다가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아주 고얀 놈이다.

미정아, 요거 앞 분식집가자. 나 오늘 언니 돈 몰래 빼갖고 왔응께 내가 살게.”

평소와 같이 날 붙잡아 두고 언니와의 씨름을 줄줄이 늘어놓으려는 명자를 뒤로하고 독서실 문을 나섰다.

똑같았다.

공부를 마치고 내 가슴속에 차오르는 뿌듯함 마냥 꽉 찬 달을 보며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항상 그 느낌이 좋았다.

서로 자신의 위용을 뽐내느라 결국 모두의 순수한 모습을 잃는 한낮의 하늘보다 어둠의 희생으로 달과 별을 볼 수 있는 밤중의 하늘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어미에게 모이를 갈구하는 새끼새 마냥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며 걷다가 웅성웅성 하는 소리에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다.

아직 밥 때도 아닌데 거리엔 떠들썩한 아이들의 모습이 없다.

초겨울 초저녁, 이상하게 오늘따라 우리 동네에 더 일찍 더 깊게 어둠이 내려앉은 것 같다.

나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쑥덕대기 시작했다.

워메, 안쓰러워 우짠대.”

조용히 하소, 아 듣것네.”

괜시리 숨을 죽이며 그 무리에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조용하지?”

쑥덕대던 사람들이 내 질문에 입을 닫았다.

재차 묻는 나의 호기심어린 목소리에

암 것도 아녀. 어여 집에나 들어가자. 어여.”

라는 말과 함께 내 등을 떠미는 옆 집 아주머니의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의 모퉁이를 돌아가니 딱 한집만 아주 밝게 빛이 났다.

이질감의 느껴지는 동네의 분위기에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집과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곡소리에 점점 무거워졌다.

내 발걸음이.. 신발에 벽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오빠가 죽었단다.

따뜻한 손을 가진 우리 오빠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우리 오빠가, 집안의 기둥이 사라졌다.

딱 하나였다.

집안의 남자라곤 우리 오빠 딱 하나였다.

그 만큼 의지했다.

오빠에겐 아직 식도 올리지 못한 예쁜 새언니와 곧 태어날 아기도 있었다.

사고라고 했다.

술취한 운전자가 우리 오빠를 덮쳤다.

오빠는 월급을 받고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사가지고 집에 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깨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도저히 깨어지지 않는 꿈에 이제 받아드려야 할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나는 오빠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도 울지 않았다.

일상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초리를 볼 때마다 방 안 구석에 쳐박혀 숨죽여 울었다. 그치고 싶지도, 닦고 싶지도 않았다.

서러웠다. 원망스러웠다.

오빠를 죽게한 그 사람도, 살리지 못한 의사도, 나를 보며 안쓰런 눈길을 보내는 동네사람들, 내 앞에서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친척들도 모두 미웠다.

미치고 싶다.

나도 오빠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 한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는 엄마를 보며 나는 변해야만 했다.

언니는 그저 엄마를 위로하기에 급급했고, 동생은 아직 어렸다.

괜찮은 척, 강한 척 마치 처음부터 나에게 오빠가 없었던 것처럼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오빠가 안쓰럽고, 그리운 마음은 컸지만, 나에겐 지켜야할 현실이 있었다.

 

 

그렇게 갑작스런 이별에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정리하며 살다보니 30년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오빠가 있는 곳에 찾아가지 못했다.

아니 찾아가지 않았다.

장가를 들지 않은 사람의 묘지에 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어머니의 주장 때문이었으리라.

또한 나의 마음이 아직 그곳을 향하기엔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이란 건 참 무서운 건가보다.

오빠와 함께한 날보다 함께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지만 겨울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매년 이맘 때 그날이 되기 삼일정도 전부터 엄마는 몸져누우며 되뇐다.

우리 아들 죽은날이네. 어짤까, 오메, 나죽겄네.”

나는 퉁명스럽게 애기한다.

쓸데없이 그런 걸 계속 기억하고 있어. 잊어버려. 기억해서 뭐해.”

말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하지만 독하게 말한다.

이미 떠난 사람 생각하지말고, 산사람이나 잘살게.”

오랜 시간동안 나는 억누르는 법을 배워버렸다.

괜히 모나고 따가운 말로 주위사람들의 그리움을 흐트려 버린다.

그날이면 엄마 집에서 돌아온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잠이 들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어느덧 스물 한 살이 된 내 딸을 앞에 두고 함께 술 한 잔 하며 외삼촌에 대해 말해준다.

담담히 술친구가 되어주며 내 이야기를 듣고있는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퍽 웃음이 난다.

내 딸은 누군갈 잃는다는 이 느낌을 알고 있을까.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딸이 말한다

숨길 필요 없어요.”

“......?”

아닌척 되물었지만 당황한 기색은 미쳐 숨기지 못한 채 딸과 눈동자를 맞췄다.

딸아이는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술을 따르며 말한다

세상에 슬픈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단다.

그걸 감추는 능력이 개인마다 다를 뿐이란다.

그렇다.

나는 무뎌진게 아니었다.

딸은 또 말한다.

자신은 나의 상황이 된다면, 나처럼 행동하지 못 할거란다.

잠시 생각하더니 또 입을 뗀다.

아무리 자신이 슬퍼도 내가 슬퍼할 만큼 슬퍼한 자신은 없단다.

그리곤 충고한다.

자식 잃은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평생을 그리워 하고 죄책감에 살게 될 것이라며 할머니의 슬픔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노라고.

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게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좋았다.

아무도 나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기에 작은 조언이 고마웠다.

미처 나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남 눈치보기 바쁜 나를 50이 다 돼서야 돌아봤다.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고서 가슴속의 곪은 응어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겨울날의 불면증과 작별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25살의 오빠가 있다.

그 오빠를 기억할 땐 나는 17의 소녀가 되도 된다.

오빠 앞에선 나는 아직 상처많은 어린 소녀가 되어도 괜찮다.

 

마음의 치유 (임아영/ dyzlgov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