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3 사건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얼굴을 처음 보는 두 남자가 민가에 내려와서 한라산을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고 몹시 배가 고프니 밥 좀 얻어먹을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다. 옷도 남루하고 그동안 굶기도 많이 굶었는지 몰골도 영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둘 다 장총을 메고 있었다. 총이 있으면 군인 아니면 경찰, 둘 중의 하나일 텐데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경찰 복장을 한 것도 아니며 또 계급장도 없었다. 민간인 차림인데 단지 총을 메고 있었을 뿐이다. 이상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도 배고프다고 하면 밥 한 끼 먹여주던 게 관습이든 시절인지라 아주머니는 먹던 밥과 김치는 부엌에서 가지고 나오고 텃밭에서 오이와 고추를 따다가 올려놓고 된장과 함께 간단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국은 없어서 마실 물을 큰 그릇에 떠다 놓았다. 그리고 신발 안 벗고 걸터앉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앞 마루에 내다 주었다. 그랬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어느새 후딱 먹어 치우는 게 아닌가? 몹시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라산에는 왜 갔느냐고 물어봤다. 지금 훈련 중이라고만 간단하게 대답했다. 한라산에 무슨 신병훈련소가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고 경찰이 특별히 한라산에서 해야 할 훈련도 없을 텐데 머리가 좀 갸우뚱해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말투가 공손하여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침 밖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어리둥절해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남편에게 아내는 서둘러 설명을 했다. 한라산에서 훈련을 받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네요. 배가 몹시 고프다고 밥 좀 얻어먹을 수 없겠느냐고 간청하기에 우리가 먹던 밥을 대접하고 있어요.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가는지 남편의 긴장이 약간 느슨해지는 틈새에 한 사람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대화에 끼어든다.
“초면에 이렇게 신세를 져서 고맙소.
선생, 우리를 좀 도와줘야 하겠소!
우리는 인민 유격대원이요.
지금 한라산에서 유격훈련을 받는 중인데 우리는 이 지방 지리에 밝은 사람이 꼭 필요하단 말이오.
우리와 동행 좀 해주시오.”
한다. 말 속에 단호하고 강압적인 억양이 들어가 있다. 그러면서 총을 벗더니 남편에게 위협해 보이면서 남편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졸지에 일어난 상황이라 남편은 암말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는 좀…”
머뭇거리면서 거절하려는 남편에게 그 사람은 말을 딱 가로막으면서,
“알고 있소, 선뜻 마음 내키지 않는 것을. 내가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니었소. 하지만 가야 하오. 우리는 인민 유격대라고 말하지 않았소? 우리가 지금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미국 놈들이 이 나라를 점령해서 괴뢰 정부를 세우려 하고 있는 것 선생도 다 알고 있지 않소? 나라를 위해 큰일 한다 생각하고 같이 가 주시오. 지금 우리는 남로당 박헌영 선생의 큰 뜻에 따라 김달삼 장군의 지휘 아래 이 나라를 구하려 하고 있소. 우리의 직속상관이 이덕구 사령관이오. 미국 놈들은 신탁통치라는 이름을 내걸고 정치를 하고 있지만, 인민의 편이 아니요. 작년에 일어났던 관덕정 사건만 해도, 보시오! 구경하던 어린 애가 기마대 말발굽에 밟혔는데 그건 애 잘못이지 기마 경찰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래서 오히려 항의하는 민간인을 쏴 죽이는 것 보지 않았소? 이제 한발 더 나아가서 남쪽에 괴뢰 정부를 세우려 하고 있소. 그러면 우리나라는 영구히 두 조각이 나는 것이요.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소련과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는 바람에 남북으로 갈라져 이 지경이 되어 있는데 여기다 남과 북이 합칠 생각은 않고 각각 따로 정부를 세운다면 그건 분단국가를 영구화하는 책략밖에 뭐가 더 있겠소? 여기서 우리가 막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 편에 서서 힘을 좀 보태 주시오.”
준비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내가 들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앞뒤가 꼭 맞는 말이다. 하는 말로 미루어 보아 이 두 사람은 혈기 왕성한 의병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남로당이라는 말도 낯설고 박헌영, 김달삼, 이덕구란 이름들도 모두 금시초문인 이름이다. 본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거명하지만 나는 과거에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박헌영이란 이름이 사실 당시 중앙 정치 무대에선 꽤 유명한 이름이긴 하였다. 성읍리가 시골이라서 그렇지, 해방 전후에 박헌영의 명성은 대단하여 누구나 다 아는 거물 정치인이다. 북에서는 북조선 노동당이라고 하는 정치단체가 김일성이 주도하에 만들어졌고 남조선 노동당은 박헌영이 조직하여 북한과 연계하여 통일을 이루겠다는 목표하에 남로당 조직이 정계뿐 아니라 군사 조직에까지 뿌리내려 있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 꼬드겨 일단 남침만 시작하면 남로당이 주역으로 남반부 전역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나 김일성을 도울 것이고 통일은 자동으로 된다고 충동질을 해서 김일성이 남침을 시작하였다. 역사가 말해 주듯 그렇게 바라는 대로 되질 않자 화가 난 김일성이 이북에까지 도피해 나온 박헌영을 잡아다가 전쟁 죄로 사형을 시켜버렸을 정도로 한국의 근대사에 큰 획을 긋고 사라진 인물이다. 김달삼도 제주 출신 사회주의 혁명가로 남로당 제주도 책임자이자 군사부 총책이었다.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월북해서 해주에서 열린 인민 대표자 회의에서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 보고도 했고 자칭 남조선 혁명화의 선봉장이라고 만방에 선전하고 다녔다. 625 직전에 유격대를 이끌고 태백산 지구까지 내려와 유격전을 벌리다가 전사했다. 또 이덕구도 제주도 신촌 사람인데 29살의 젊은 나이로 인민 유격대의 야전 사령관을 하며 43 무력 폭동을 이끄는 주동 세력이었고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한라산에서 버티다가 결국은 사살되었는데 죽은 후 목 잘린 머리를 관덕정 앞에 매달아 사람들이 구경하도록 하는 사후 수모도 당했다.
지금은 일제에서 해방되어 일본 사람은 물러가고 새로운 정권은 들어서지 않아 일시 정권의 공백 기간이다. 너도나도 그동안 일제하에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제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호소를 하는 게 요즘의 정치풍경이다. 웬만한 이름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박헌영, 김달삼, 이덕구란 이름들은 전혀 들어보질 않아서 아마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인가도 생각해봤다. 북에서는 김일성 수상 만세라고 매일 떠들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지금 나와서 떠들고 있는 김일성이도 가짜 김일성이라는 말도 많고 요즘 정치는 남이나 북이나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풍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무척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귀국하여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습니다.’ 외치면서 선거 유세를 벌이는 이승만 박사가 외모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그럴싸해 보이는 대통령감이기는 한데 거기도 또 반대파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북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지 하나같이 김일성 수상이라고 떠받들면서 점령군인 소련과 대화가 원만히 진행되어가는 모습이다.
이 사람은 열변을 계속했다.
“가보면 알겠지만 지금 수많은 동지가 한라산에서 훈련을 받고 있단 말이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하려 해도 이 지역 지리를 잘 모르니까 어려움이 보통 많질 않소. 올라가서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우리의 동지가 돼 달란 말이오. 올라가면 모두가 당신을 따뜻하게 맞이할 것이요. 그리고 그게 바로 사나이로 태어나서 나라를 구하는 길이요.”
열변을 토했다.
잠깐 말이 없더니,
“그리고 산에 올라가면 당장 먹을 것도 필요하니까 집에서 쌀이라도 좀 가지고 갑시다.”
했다.
“아주머니! 광이 어느 쪽이요?
내가 들어가서 쌀 좀 퍼갖고 나오리다.”
물어본 후 사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 집안으로 쑥 들어가더니 광으로 통하는 문을 금세 알아보고 들어가서 쌀독을 찾아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기가 가지고 왔는지 무명 주머니를 꺼내서 쌀을 잔뜩 채우고 나오더니 이제 됐으니 출발합시다 한다. 머뭇거리는 남편을 총부리로 툭 치면서 어서 나서라고 눈짓을 준다. 반항할 겨를도 없이 납치된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올레길을 빠져나와 세 사람은 큰길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돌아 터벅터벅 영두산 쪽으로 걸어가는 것까지 봤다. 약간만 더 가면 한라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한라산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대로 뒀다가는 우리 남편과는 영원한 생이별이겠다는 긴박감에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머리는 더 안 돌아간다. 눈앞이 까맣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다. 다급해진 아내는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이웃 마을에 가서 지서에 먼저 알리자! 그 생각이 번뜩 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헐레벌떡 남쪽으로 내려가는 큰길을 따라 걸었다. 허둥지둥해서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 빨리 지서에 가서 알려서 순경들이 올라가서 우리 남편을 구해 와야 한다는 일념 밖에 다른 생각이 안 났다. 지서는 한 20리나 떨어져 있는 표선마을에 있다. 걸음 반 달음박질 반으로 걷는데 앞으로는 먼 태평양 푸른 바다가 보이고 길 양쪽에는 곡식을 갓 심어놓은 크고 작은 밭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어 여느 때 같으면 보통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다. 오늘은 그런 게 다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 간혹 밭에서 일하다 말고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영식이 엄마! 어디 가우? 소리를 내지르지만, 너무 혼비백산하여 걷느라고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내려가는 길이 유달리 자갈이 많아 발등이 채여 피가 나고 실제로는 20리 길이 오늘따라 200리는 더 되어 보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성읍리는 바닷가 마을인 표선리와 한라산 사이에 있는 중 산간 마을이어서 발전도 더디고 옛날에는 정의 고을이라고 해서 남제주에서는 행정의 중심 도시였던 모양인데 그 영화도 모두 역사 속에 흘러갔고 지금은 주민들이 모두 농사일에 매달려 사는 두메 골 농촌 마을이다. 아직도 마을에는 고색이 창연한 향교 건물이 남아 있고 마을 한가운데 자라는 우람한 팽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고목이 되어 마을의 자부심을 지켜주고 있다. 지서가 있는 표선리는 인구도 많고 섬 주위를 도는 일주 도로인 신작로도 여기를 통과한다. 바닷가라 성읍리보다는 훨씬 큰 면 소재지이다. 집들이 모두 농가인 성읍리에 비하면 표선리에는 띄엄띄엄 상점도 있고, 면사무소도 있으며 병원도 있다. 중학교도 표선리에 있다. 아주머니는 표선에 도착해서 지서로 곧장 찾아 들어갔다. 지서는 원래 일제 시대부터 있던 신식 건물이고 들어가는데 관상수로 심어놓은 몇 그루의 벗나무도 보기 좋고 들어가는 입구에 화단도 꾸며놓아 관공서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누구나 그 앞을 지나다 힐끗 쳐다보면 관록도 있어 보이고 그 분위기가 사뭇 사람의 기를 꺾는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검은 제복을 입은 몇 사람이 책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대화하고 있는 게 보인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남편 납치됐어요.
우리 남편 좀 구해 주세요, 제발!
급해요!
지금 한라산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머니, 서두르지 말고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씀해보세요.”
하면서 종이와 만년필을 가지고 다가온다. 앉으라고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아서 집에서 일어난 일을 자초지종 모두 이야기했다. 이야기만 하는데도 몸이 떨리고 말이 안 나온다. 사고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무섭고 간장이 서늘해 견딜 수가 없다. 순경은 책상 맞은 편에 앉아 들으면서 모든 걸 받아 적었다. 이야기가 끝난 다음, 자기가 쓴 것을 한번 쭉 읽어주더니 내용이 모두 맞느냐고 물었다. 맞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진술서에 날짜와 이름과 주소는 본인이 직접 쓰시고 손도장이라도 찍으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다. 남편이 아직 한라산까진 못 가고 가는 중일 테니 빨리 올라가서 구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이 사람이 책상 몇 개 건너 아직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동료를 부른다,
“어이, 김 순경!
여기 비슷한 이야기 또 있네.
성읍리래!
이제 성읍리에까지 침투하는 모양이네…”
중얼중얼하면서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시라고 했다.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나왔다. 그런데 아까,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네!’라는 말이 마음에 와 걸린다. 우리 말고 당한 사람이 또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우리가 처음 일어난 일이다. 시절이 점점 뒤숭숭해지고 있구나! 아무래도 남편에 대한 불안감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제발 다치지 말고 무사히 집에 돌아와 줬으면 좋겠는데 어디 구해낼 방도가 없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성읍리보다 더 한라산 쪽에 가까이 있는 가시리에서는 벌써 여러 집이 쌀 강도를 당했고 여러 남자가 납치되어 산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한라산이 가까운 산간 마을에서는 이미 폭도 사건이 발발한 지 오래고 우리 마을은 인제야 그 피해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폭도들은 한라산 기슭에 토굴을 파고 사는데 밤만 되면 민가로 내려와서 주민을 괴롭힌다고 한다. 낮에는 활동을 안 하는지 조용하다가 밤만 되면 떼거리로 내려와서 엿사 엿사 구령을 지르며 열 지어 구보도 하고 약탈을 일삼는다고 한다. 쌀도 퍼가고 젊은 남자가 보이면 사람도 납치해 간다고 했다. 가시리가 한라산에서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고 순경들이라도 있는 표선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마치 치안 부재의 외딴 마을처럼 폭도들이 내려와서 주인 행세를 하고 다닌다고 했다. 지서에서도 바짝 긴장하고 면사무소에서는 연일 단체장 회의를 소집해서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수습해 나갈 수 있을까 연구도 하고 안전대책을 강구해 보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이 점점 더 빈번해 지면서 지서에 살인까지 보고가 들어왔다. 폭도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부녀자와 노약자는 건드리지 않고 건장한 청장년들만 납치해 가는데 어떤 사람은 시키는 대로 말을 안 듣고 반항하다가 총으로 사살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토벌을 한답시고 경찰서 순경들이 한라산 기슭으로 올라가서 폭도들을 잡아보려고 시도해 보지만, 그 넓은 한라산에 숨어있는 폭도들을 순경 몇 사람이 올라가서 찾아낸다는 말도 말이 안 될뿐더러 폭도들 복장이 또 민간인과 똑같아서 수상한 사람을 만나 조사라도 할라치면 현재 밭에 일 나와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면 더는 할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사실 토벌에서 잡혀 온 몇 사람이 있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지역 주민임이 판명되어 모두 훈방했다. 어떻게 잡혀 왔는지는 모르지만, 폭도로 밝혀진 사람도 둘이 끌려오긴 했었다. 포승으로 전신을 옭아매고 지서 앞 벗나무에 묶어 놓아 주민이 나와서 구경하도록 전시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얼굴이나 좀 보자 하고 폭도들의 얼굴을 구경했다. 못 먹어서 그런지 둘 다 깡마른 오징어처럼 피골이 맞닿아 있었는데 눈만은 독해 보이고 번쩍번쩍 광기가 났다.
“저러니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는 거지, 보통 사람 같으면야 어찌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어? 쯧쯧!”
하면서 사람들은 보고 돌아섰다. 사람들이 이름이 무어냐? 고향이 어디냐? 학교는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아무리 물어도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렇게 사람을 전시하더니 그들도 어디론가 보내 버렸다.
사태가 점점 장기화하면서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납치되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폭도들에게 마을 정보를 다 가르쳐 주어 폭도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지도자급 인사들 집만 골라 털기 시작했다. 이장 집도 털리고 일제 시대에 일제에 편승하여 유지가 되었거나 한자리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목표물이 되어 시달렸다. 폭도들이 모르는 사람인데도 가족관계까지 모두 꿰뚫고 있어서 이들에게 명령할 때는 마치 잘 아는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처럼 이름까지 부르면서 명령했다. 마을에서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 집이 털렸지만, 또 잡혀간 폭도들과 원한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집도 털리고 매도 실컷 얻어맞아 죽을 뻔한 사건도 일어났다. 산간 마을에는 지서도 없고 한밤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데 호소할 데가 없다. 단지 목숨만 살려줍쇼 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폭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다 듣는다. 어차피 동네 주민이 돈은 없으니까 으레 쌀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면 쌀독에 있는 쌀을 모두 퍼주고 폭도들의 동정을 바라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고 나라가 독립한 지는 얼마 안 된다. 미국 사람들이 신탁통치라 하여 정치를 하는데 주민 반발이 보통을 넘어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는 짓을 보면 사사건건 주민의 뜻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동떨어진 정책을 펴고 있다. 언제나 보면 옳든 그르든 관리 편이다. 아니, 관리들이 그들 편이다. 아직도 군국주의다. 관리들도 일제시대에 일하던 사람들을 교체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쓰고 있으니 이건 해방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새 나라를 찾았다고 마음 부풀었던 것도 허황한 꿈이고 섬 밖으로 끌려나갔거나 고향을 등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꿈을 안고 다시 귀향했지만 살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렵지,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어 보이질 않는다. 거기다 폭도들까지 출현하다 보니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다. 사소한 건수만 있어도 터질 듯한 위험한 민심이다. 일제 시대 때는 치안이라도 잘 잡혀 있었으니까 두려운 걱정은 안 해도 됐지만, 지금은 치안까지 흔들리니까 오히려 일제 시대 때보다 더 못 하다. 폭도들의 출현을 중앙에 보고했으니 무슨 조치가 곧 나올 것이라고 관리들은 말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안 보인다. 기껏해야 상부에서 대응책이라고 하달이 되어 왔는데 마을 주위를 돌로 성곽을 쌓고 주민이 경비를 서라는 것이다. 사람이 들고나는 몇 군데만 남겨 놓고 사람 키의 두어 배 정도 높이로 마을 주위를 담으로 쌓아 밤에는 주민이 몇 사람씩 조를 짜서 순찰하면 안전해지지 않겠느냐는 방안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성을 쌓기 시작했다. 여자도 나오고 남자도 나오고 어른도 나오고 아이도 나와서 돌을 함께 날라다 성을 쌓아 마을을 완전히 요새화했다. 제주에는 화산 돌이 사방에 깔렸기 때문에 등에 지기도 하고 가능한 곳에서는 달구지에 실어 나르기도 하면서 어렵지 않게 마을을 성곽으로 둘러쌀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 청년들이 조를 짜서 매일 밤 경비를 돌았다. 청년들이 갖고 순찰하는 무기라야 별것 없고 죽창이 전부다. 석 자 정도나 되는 대나무 한쪽 끝을 비스듬히 날 서게 깎아 그걸 들고 성곽 안쪽을 따라 돌았다. 그러면서 성 밖에서 일어나는 인기척 소리를 엿듣는 게 임무다. 폭도들은 언제나 이동할 때는 엿사 엿사 구령을 지르면서 구보를 했기 때문에 엿사 엿사 소리를 들으면 폭도들임이 틀림이 없다. 달이 밝은 밤에도 엿사 엿사 하고 달이 없는 칠흑 같은 밤에도 뛸 때는 엿사 엿사 하면서 뛰었다. 엿사 엿사 소리가 가까워지면 우리 마을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믿어 달려가서 동네 사람들을 깨운다. 그리고 싸울 준비를 하도록 한다. 그래서 혹시 제사라도 지내느라 자정까지 안 자고 모여 있다가도 순찰팀이 와서 폭도가 출현했다고 소리 지르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죽창 들고 성곽으로 뛰어 나갔다. 성안에서 와글와글 사람 소리가 나면 폭도들은 또 슬그머니 방향을 틀어서 다른 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실지로 폭도들과 맞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다. 숫자로 보아 그 정도로 마을 사람들과 대항하여 싸울 만한 폭도들의 떼거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총이 있으니까 총으로 쏴 댄다면 죽창 들고 덤비는 마을 사람들과는 상대도 안 되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탈이나 방화는 하면서도 주민과 맞붙어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폭도들의 발생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7년에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3.1절 기념식을 치르는데 기마 경관이 부주의로 어린아이 한 명을 짓밟았다고 한다. 주위에서 소릴 지르고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하자 기마 경관은 놀라서 경찰서로 뺑소니를 쳤는데 군중이 경찰서까지 따라가며 돌을 던지고 성토를 벌렸다. 경찰서에서는 군중이 경찰서를 공격하는 줄 알고 발포하여 여섯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부상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이 군정에 보고가 들어가고 내부 조사를 벌였는데 군정에서는 경찰의 정당방위였다고 경찰이 잘 못한 게 없다고 경찰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던 주민은 군정에 폭발 직전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 기회를 잽싸게 포착하여 남조선 노동당 제주 지부에서는 총파업을 주도했다. 결과적으로 평가하여 대단히 성공한 총파업이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호응했는지 제주 직장인 95%가 파업에 참가했다고 한다.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면사무소 모든 관공서가 일시에 손을 놓아 버렸다. 심지어 경찰이 근무하는 경찰서 지서도 상당수가 같이 파업에 동참하여 제주도는 완전히 행정 공백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당황한 미 군정은 곧바로 주동자를 색출하여 재판에 넘기기 시작했다. 이 과정이 또 강압적이고 무자비하였다. 당시에 준 공권력이나 다름없는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많은 우익 단체들을 투입하여 이들이 마치 경찰관처럼 행세하며 주민을 탄압했다. 이래서 결국 파업을 해결하기는 하였지만, 주민의 더 많은 분노를 샀다. 이제는 반미 감정으로 주민은 완전히 미 군정에 등을 돌리고 극우파 세력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군정은 여전히 강경책을 버리지 않고 계속하여 우익세력 배척운동에 가담하는 자들을 투옥하여 옥죄기 시작했는데 이를 피해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도피하였다. 점차 더 많은 수의 불만세력이 한라산으로 피신하였고 나중에는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 수십 명이 총과 탄환을 가지고 입산해 군경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군사 조직이 생겨났다. 이렇게 세력이 불자 무장 세력은 도민과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조직을 개편했다.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된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체계가 잡힌 게릴라 군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토벌대는 제아무리 평정하려 해 보지만 도저히 효과가 안 났다. 무장대는 항상 치고 도망가는 게릴라 전법을 썼다. 밤에만 마을에 내려와서 약탈을 하던지 사람을 납치해 산으로 달아나곤 했는데 열 사람이 도둑 하나 못 잡는다고 정부군으로서는 마땅한 예방책을 찾을 수가 없었고 또 사후 수습책도 부족했다.
군정에서는 북의 비협조적인 상황에서 남한만이라도 초대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1948년 5월 10일 날 총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 이에 반대하여 남로당 제주지부에서는 산에 있는 무장 폭도들 350여 명을 동원하여 제주도의 총 24개의 지서 중에 12곳을 습격하는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이날이 1948년 4월 3일이었는데 이것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리는 난동사건이 되었다. 43 사건이 터지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오라리라고 하는 제주시 근방의 작은 동네에서 일어났던 방화사건이 또 43사건에 촉매작용을 하여 크게 확대해 버렸다. 대동 청년단 요원 두 사람 부인이 한라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에 의해서 납치되어 갔다. 한 사람은 살해되고 다른 사람은 산에서 나무에 꽁꽁 묶여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돌아왔다. 죽은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내려오던 대동청년단 단원들이 분개하여 그 동네에서 입산한 폭도들 소유인 다섯 가구의 12채 집을 모두 불 질러 버렸다. 안채, 사랑채, 마구간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태워버린 것이다. 오라리에는 원래 입산한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소식이 폭도들 귀에 들어가자 이들이 다시 내려와서 보복으로 이번에는 이 마을에 사는 경찰관의 어머니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도망갔다. 이 방화 사건이 세칭 오라리 방화사건인데 초기에 평화적으로 잘 해결할 수도 있었던 43 사건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물꼬를 틀어버린 것이다. 방화사건이 터지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토벌대 대장과 무장대 대장이 마주 앉아 사태를 평화스럽게 해결해 보자고 협상을 벌였었다. 협상이 잘 진행되어 72시간 이내에 무력 활동을 중지한다는 데까지 모두 합의가 되었는데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지면서 자극받아 군정에서 갑자기 강경 진압 쪽으로 정책을 급회전시켜 버렸고 그 바람에 43사건은 완전히 고삐를 놓아버린 망아지 꼴이 되었다. 무장대들도 더는 자제하지 않고 무력 폭동을 강화하여 양측의 충돌은 격화일로로 줄달음질을 쳤다. 군정은 평화적 해결을 주창했던 토벌대 대장을 해임하고 강경파 그의 부하를 진급시켜 강경작전을 실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도 일도 시작하기 전에 암살을 당하여 강경정책은 처음부터 저항을 받았다.
산으로 붙들려간 피해자 가족들은 가끔 마을을 털러 내려온 폭도들로부터 산에 있는 남편이나 아들의 안부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쪽 소식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다. 가족의 안부도 전해주고 순경들이 언제쯤 토벌을 나간다고 들었노라고 조심하라는 소식도 함께 전해줬다.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하면 쌀도 보내줬다. 그래서 산에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정보는 빠짐없이 얻어듣는 그런 처지라 어찌 보면 주민과도 연계된 꼴이 되었다. 정부군의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이 하루면 이미 산에 폭도들 귀에 들어가 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주민의 등을 업고 싸우는 반군을 몰아낸다는 것은 제아무리 강력한 정부군이라 할지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토벌대의 노력은 항상 헛수고로 끝나고 말곤 하였다.
대한민국 첫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5월 10일에 다가왔다. 무장대와 도민들은 510 총선거를 거부했고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 총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두 곳이 모두 선거인 과반수 미달로 무효화 되었다. 이에 분노한 정부와 미국은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무장 세력을 강제로 제거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육지에서 경찰력을 뽑아내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방법이 여전히 무자비했고 이성을 잃은 작전이라 민간인 피해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연행한 후 죄의 유무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집단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얼굴이 고운 여자들은 골라 성폭행한 후 역시 죽였다. 대부분 바닷가 백사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는데 모래판 언덕바지에 구덩이를 파라고 해놓고 구덩이 가까이에 세워놓은 다음 사정없이 총을 쏴댔다. 쓰러지면 구덩이에 쳐넣고 묻어 버렸다. 무자비하게 이런 짓을 저지른 서북 청년단은 원래 이북에서 쫓겨나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공산당이라면 한이 맺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한라산 폭도들이 빨갱이라고 하니까 피가 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토산에서 죽은 사람만 157명에 이른다. 서북 청년단 단원들은 모두 민박을 하면서 살았다. 민간인들 집에 얹혀살면서 토벌대에 합류하여 낮에는 산간 마을에 직접 토벌 작전에 참가도 하고 산에서 몰고 내려온 폭도가 의심되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도 모두 서북 청년단의 임무였다. 토산리를 원정하여 마을 사람들을 심문하는 날이었다. 허름한 한 집에 들어갔더니 인기척이 없었다. 빈집인가 했는데 안에서 한 처녀 아이가 나온다. 식구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다 죽고 엄마와 자기 혼자 산다고 했다. 그동안 쪼들려 고생 끼가 얼굴에 진하게 스며있었다. 핏기없는 피부며 머뭇거려 아무 일도 자신 있게 못 하는 그 태도로 보아 얼마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 서려 있는 그 천진함은 감춰도 보인다. 마치 천사의 눈을 보는 듯한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이 눈 속에 서려 있었다. 언제 아빠와 오빠가 피살되었느냐고 물었더니 한 열흘 전에 토벌대가 올라와서 죄 없는 아빠와 오빠 둘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고 머뭇머뭇 말을 했다. 자기네 식구는 폭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집이라고 했다. 폭도들의 피해를 받아본 적도 없고 도피자 가족도 아닌데 이 마을에 사는 게 죄였는지 아빠와 오빠들이 토벌대 총탄에 쓰러졌다고 말할 때는 같은 서북 청년단원이 듣기에도 분노를 느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앞이 캄캄하다고 중얼거릴 때는 아무리 오기를 부려 들으려고 해도 차마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래도 이 책임을 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우선 우리와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내가 모든 걸 책임져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했다. 이 아이가 방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이 아저씨가 책임을 진다고 내려가자고 하는데
엄마 우리 내려가요.
어차피 여기선 살 수가 없는 형편이지 않아요?
나빠지려면 더는 어떻게 나빠지겠어요?
우리 따라갑시다.”
그래서 이 서북 청년단원은 모녀를 데리고 민박하는 집에까지 내려와서 자기가 새로 맺은 엄마와 동생이라고 소개하고 숙식을 부탁했다. 이 사람이 서북 청년단에서는 간부급 요원이라 어느 정도의 재량권도 있었다. 다른 단원들한테도 새 동생이고 새엄마라고 소개하면서 마음을 트고 살기 시작했다. 북에서 혼자 내려와서 안 그래도 일가친척 없이 외로운 생활인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좋고 서북 청년단이 저지른 죄과를 일부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까 여간 마음이 가벼워질 수가 없었다. 민박집에 머무는 동안 계속 같이 살다가 나중에 육지로 이동할 때 같이 떠난 후 소식이 없다.
전쟁은 언제나 기적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신이 원해서 일어났든 우연한 기회로 일어났든 통상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가시리에서 몰고 온 주민 몇십 명을 표선리 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놓고 집단 학살을 결행하던 날이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노인도 끼어 있었다. 토벌대의 눈으로 보면 산간 지역에 있는 이 마을은 모두 폭도의 소굴이라고 할 만큼 도피자도 많고 폭도와의 내통도 많았다. 낮에 보면 모두 양민이지만 밤이 되면 모두 이쪽 정보를 저쪽에 전해주는 간첩들이라고 생각하여 어느 한 사람이라도 살려두는 것은 폭도를 키우는 일밖에 아니라고 판단하여 서북 청년들로 하여금 알아서 처치해 버리라고 맡겼다. 서북청년단이 올라가서 거의 전 주민을 아래로 소개해 표선리로 몰고 온 것이다. 모두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놓고 사살해 버리기로 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운동장 가운데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사살 조가 기관총을 들고 탄환을 채운 다음 명령의 호루라기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휙 울렸다. 드르륵, 총알이 빗발쳐 나른다.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툭툭툭 쓰러진다. 모두 땅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학살은 끝났다. 사살 조가 철수하고 시체 처리를 담당한 민간인들이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쳇더미 속에서 자그마한 아이 하나가 슬며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피범벅이 되어 차마 볼 수 없는 시쳇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으니 모두 다 질겁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쓰러지자 자기도 덩달아 같이 쓰러진 게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겁먹어 어쩔 줄을 모른다. 물론 죽은 사람 중에는 자기 부모들도 섞여 있었다. 이제 하는 수 없이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 고아가 된 셈이다. 사람들은 운 좋은 아이인데 살려주자고 모두 쉬쉬하면서 이 초등학교에 심부름하는 급사 아이가 없으니 여기 학교에 살면서 급사 노릇을 하라고 하여 급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몇십 년을 딴생각하지 않고 초등학교에 눌어붙어 온갖 심부름을 다 해가며 살아 주민들은 이 사실을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가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이 옷가지도 갖다 주고 먹을 것도 제공하여 열심히 살았다. 명절 때면 집에 불러서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해주는 그런 학부모도 있었다. 그래서 이 학교에는 교장 선생님은 전근을 가도 급사는 절대 갈릴 줄을 모른다고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곤 하였다. 장성해서 클 때까지 자기의 운명을 바꿔놓은 이 학교를 떠나질 못하고 이곳을 지켰던 그는 그래서 이 고장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기도 하였다.
폭도들은 산속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옷가지가 필요할 때도 있고 당연히 본능적인 욕구도 참지 못하여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을 침입했을 때는 종종 성폭행 사건도 일어나곤 했다. 아녀자를 보면 덮쳤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옷을 벗기고 제 욕심을 채웠다. 가마리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새벽녘인데 개가 몹시 짖어 식구들이 깨었다. 며늘아기가 문을 열고 나와서 개를 챙기느라고 개 이름을 부르면서 어정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세 남자가 총을 메고 들어섰다. 며늘아기가 앳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완숙해서 어느 남자가 보아도 탐이 나는 얼굴이다. 얼굴도 작고, 키는 보통이지만 가슴은 유달리 발달하여 남자들의 눈길을 끈다.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누구세요?
누굴 찾으세요?”
했다.
“우리는 인민 유격대원이요.”
하는데 서로 얼굴이 마주쳤다.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여자의 젖가슴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남자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러는데 온 식구가 모두 깨어 밖으로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있었고 이 여자의 남편인 젊은 청년도 주춤주춤 건넛방에서 걸어 나왔다.
“김 중사님, 우리 이 여자부터 처치하고 일을 합시다.”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자가 총으로 위협하면서 다른 식구들을 모두 한 방으로 몰아넣고 소리를 질렀다.
“방에서 꼼짝하지 마라.
밖으로 나오면 죽여 버린다.”
며늘아기에게는 총으로 툭 치면서 건너편 방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김 중사님부터 먼저 시작하시오. 우리 둘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을게. 여자를 뒤따라 들어온 사내가 방안에 들어오자 여자의 아래옷을 끌어당겨 벗겨버린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무서워하는 여자를 방바닥에 눕혔다. 내의까지 모두 벗긴 남자가 무서운 목소리로 소리 지른다.
“벌려!
더 벌리란 말이야!”
명령하지만 여자는 꼼짝 않고 벌벌 떨기만 한다. 남자가 가까이 가더니 여자의 두 다리를 끌어 양쪽으로 밀어젖힌다. 잠시 일어나서 자기 옷을 벗어 던진 남자는 여자 위에 자기 몸을 포갠다.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인데도 남자가 여자 몸에 들어갈 즈음엔 여자도 느낌이 가는 모양이다. 신음이 나온다. 그리고 여자의 본능적인 몸의 반응도 일어난다. 너무 오래간만에 하는 접촉이라 그런지 오래 끌지를 못하고 남자는 곧 소리를 내지른다. 온몸의 액체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밀려 나왔다. 그리고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와 다른 남자를 들어가라고 한다. 이렇게 남자 셋이 돌아가면서 모두 욕정을 풀었다. 그러고선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한다.
“이 집에선 인제 그만 봐줍시다.
더는 갖고 갈 물건도 없는 것 같고 귀대합시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식구들한테 밖으로 나오면 죽여 버릴 테니 절대 나오지 말라고 소리를 냅다 지르고 슬며시 사라져 갔다. 전쟁은 원래 불공평하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누구나 목숨을 위협받을 땐 무엇이든지 포기한다. 동서고금 어느 전쟁에서나 이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전쟁이 끝나면 곧 잊혀 간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악몽은 망각 속에 묻어버린다. 상처받은 아픔도 세월이 가면 약이 되어 치유해주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인생은 또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집단 학살은 중 산간 지역에 국한하여 자행된 것이 아니다. 해안 마을인 북촌에서 가장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발단은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2개 소대쯤 되는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북촌 마을을 포위, 300여 채의 집들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 1,000여 명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차례로 인근 밭으로 끌고 가서 하나하나 총살하였다. 이 집단 양민학살은 그 다음 날도 계속되어 이웃 마을 함덕으로 도피한 주민이 다시 처형되었다. 결국, 이틀 사이에 북촌 주민 400여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은 양민들에게도 무서웠지만, 폭도들에게도 그 기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케 했다. 한라산에 숨어있는 한정된 수의 세력으로 전국을 상대하여 싸운다는 것은 어린 애가 봐도 무모한 짓이다. 그러면서 무장대의 세력은 급격하게 약화하기 시작했다. 마을로 내려와서 약탈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군정이 끝나고 새로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 4·3 마무리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토벌대가 5만여 명의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끌고, 산을 이 잡듯 구석구석 쓸어내리게 되자 쇠약했던 무장대는 궤멸이 되어버렸다.
정부의 승리가 확연히 눈에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했다. 대통령을 맞는 제주도민들의 열광은 대단히 뜨거웠다. 시골 산간 마을에서도 초등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나오고 면이나 읍, 시 단위 도시에서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모두 시내로 나와서 대통령을 환영했고 거리마다 플래카드가 걸려 축제 분위기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폭도들과의 싸움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예전처럼 엿사 엿사 하는 폭도들의 힘의 시위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폭도들의 출현이 사라지자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도 해체되고 1개 대대의 무장 병력만 남아서 만약의 사태만을 주시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무장대의 총지휘관이었던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폭도들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더는 반항할 여세가 없었다. 그러나 625 사변이 터지면서 사태는 또 예측불허였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조리 죽여 버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부에서는 전국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43 사건 관련자들은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에 낱낱이 처형시켜 버렸고 훈방되었던 사람들까지도 다시 끌어들여 학살해 버렸다. 죄목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아니면 ‘경찰과 다투었다.’ 아니면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3·1절 시위 발포 사건과 관련하여 총파업에 가담하였다.', '4·3 때 가족 중 누군가 죽었다. ' 등의 지극히 객관성이 모자란 감정적인 판단으로 연행하여 재판 과정도 없이 사살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4·3 사건에 연루된 세력들은 완전히 소멸하여 버린 셈이다.
더는 폭도 출현이 없어지고 산간지역이 평화스러워지자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폐지함으로써 4·3 발생 6년 6개월 만에 평상시 체제로 완전복구 되었다. 수만 명의 생명이 죽음을 강요당한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6·25 다음으로 희생이 큰 무력폭동이었다. 지금은 제주가 한국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세계의 7대 명승지로 손꼽히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어두운 시절 제주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오죽하면 예로부터 귀양지로만 쓰였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고 제주에서 태어난 것이 원통하여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꿈이기도 하였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땅이었고 야산에 자라는 소나무 한그루만 보더라도 왜 그렇게 곧게 못 자라고 잔가지만 무성한 잡목으로 자라는지 어디에도 희망이 있어 보이질 않았다.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 물도 귀해 강은 없고 하천이 모두 물 없는 개천이다. 비가 오면 냇물이 흐르지만, 비만 개면 물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말라 버린다. 그래서 논도 만들 수 없고 기껏해야 벼 대신 밭벼를 길렀다. 그때가 불과 5~60년 전의 일이다. 이제 4·3 사건 세대들도 하나씩 둘씩 모두 사라져 가고 그 후의 젊은 세대가 어찌 제주의 그 눈물을 알겠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질곡의 시대를 벗어나 이제 번영과 발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아직도 야산이나 길가에 묻혀 있을 그 시대의 억울한 원혼들께 뭐라고 해야 위로가 될는지…. 어두운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안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kang2004@gmail.co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