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1
통증은 신체에 이상이 생겼을 때 몸 스스로가 보내는 신호다. 즉, 그것은 신체의 방어수단으로 치유과정 중 나타나는 반응이며, 원인과 발생 부위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절로 하품이 나왔다. 글로 읽는 통증은 그 본질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만히 굳은살로 뒤덮인 가운뎃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꼭 내 몸에 다른 생물이 기생하고 있는 것 같이 기묘한 모양이다. 몇 년 전 이 자리에는 가윗날이 만든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내 손가락을 점령하고 있었더랬지….
나는 손가락의 변화를 통해 세월을 감지한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가위 손잡이를 쥘 때마다 움푹 패는 검지와 중지는 누적된 시간만큼 두꺼워진다. 신문을 덮고 배꼽 근처까지 내려가 있던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렸다. 오랜 시간 통증을 견뎌낸 내 단단한 손가락이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에 비하면, 이런 글 몇 줄은 그야말로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2
어린 시절, 내 손에 제일 오래 머물렀던 것은 연필도 장난감도 아닌 가위였다. 비록 아버지와 나, 둘 뿐이기는 했지만, 한 가족의 식사 준비를 한다는 것은 어린 내가 맞닥뜨린 인생 최초의 난관이었다. 때문에 언제나 바빴던 나에게 어머니의 빈자리 같은 것을 느낄 여유는 별로 없었다. 나의 탄생과 동시에 숨을 거둔 어머니는, 그저 내게 다른 아이들보다 주방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존재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슬픈 것은 오히려 그쪽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어린 나에게 그 정도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 그 나이 대 아이에게 부모의 의미란 어떤 것인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식사 때가 되면 주방에 들어가 가위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식전에 행해지는 자연스런 일과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내가 가위로 인해 특별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내 손이 주방 가위와 익숙해지자, 김치나 고기를 능숙하게 자르는 것 따위에는 금세 싫증이 났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여군은 아니더라도, 여하튼 좀 더 멋진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인형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여덟 살의 나는, 인형의 금발을 조금씩 잘라내며 훗날 내게 머리를 맡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3
몸이 아파 시내 미용실까지 다니는 것이 무리인 할머니들이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게 된 것은 2년이 지나고 난 뒤부터였다. 맨 처음 아버지는 내가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짓 - 아버지는 나의 일을 그렇게 불렀다 - 을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동네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문동 귀염둥이’ 대접을 받자 이내 마음이 풀린 듯 했다.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눈치를 보아 하니 아무래도 아버지의 한의원에 단골손님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내가 대놓고 사람들의 옆구리를 찌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한의사 양반의 늦둥이라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전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아버지는 열두 살 생일날 내게 미용 가위까지 선물해 주었고, 이내 우리 집 앞마당은 미용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아버지와 나를 기술자 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술자. 사람들은 한의사인 아버지까지 기술자라 불렀다. 문득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이라는, 외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떠올랐다. 사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메쩬바움 대신 미용 가위를 들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가 어린이날마다 사다 준 마론인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선물 받은 인형이 분해가 가능한, 그러니까 보들보들한 털로 뒤덮인 곰이나 토끼 따위였다면 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하지만 미용사가 된 것에 대해 후회한 적 없는 걸 보면, 선택 가능했던 나머지 정답지는 이미 내 삶에서 아무런 위상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지금 와서 이런 생각 하면 뭐해. 나는 하품 때문에 촉촉해진 눈을 껌뻑이며 반으로 접은 신문을 화장대 위에 두고 자리에 누웠다. 역시 불면증에는 무언가 읽는 것이 제격이다. 생각의 고리가 점점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베개를 쓰다듬었다. 그이의 가슴팍을 떠올리며, 오늘은 도중에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4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왼쪽으로 돌아 눕다 골반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아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새어 나온 보라색 조명이 이불 속 어둠과 맞서 싸워준다. 그런데 한참이나 살펴보았건만, 아무것도 없다. 괜시리 불쾌한 기분에 쉽게 잠이 들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입을 삐죽이는데, 이상할 정도로 금세, 나는 다시 현실 너머의 다른 세계로 쭈욱 빨려들고야 만다.
양 팔을 크게 벌려 휘휘 저어 보아도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는 공허한, 넓고 긴 터널을 걷는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때문인지 팔에는 소름이 돋는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어.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터널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어떤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왼쪽은 긴 머리인데 오른쪽은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하는 단발의 여자아이. 그 기괴한, 그러나 웬일인지 낯익은 형상에 다가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아이의 다리가 구부러진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정신을 차려 보니 나 홀로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야, 간밤의 그 이물감이 골반 주변에서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팔을 뻗어 허리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다. 침대 밑으로 떨어져 버린 건지, 베개조차도 곁에 없어 휑하다. 나는 왠지 모를 무력감에 휩싸여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만다.
#5
“나 밤마다 너무 무서워. 우리 결혼 더 앞당길까?”
모닝콜이라는 핑계로 전화를 걸어 지훈 씨에게 새벽에 내가 겪었던 감정들에 대해 토로했다. 나는 통화하는 동안 줄곧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섞으며, 그가 나를 안쓰럽게 여겨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 나의 의도와는 달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작은 한숨 소리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농담이에요, 라고 말했다. 원래 결혼 앞두고는 남자들이 더 예민하대, 부케를 받기로 한 친구가 며칠 전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이도 그 ‘남자들’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
TV 위에 걸어둔 커다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만난 지 1년 째 되는 날 그가 건넨 선물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왼쪽 어깨에 올린 채 수건에 물을 적셔 액자 앞으로 갔다. 아주 작은 사진들을 수십, 아니 수백 장 모아 만든 커다란 나의 웃는 얼굴. 그 사진을 벽에 걸던 밤, 나는 그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청혼 같은 걸 스스로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날 밤 그와 함께 밤을 보내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은 오래 전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 상주 역할을 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얼굴에 대해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왜 하필 그 행복한 밤, 아버지를 생각했던 걸까. 이제는 지긋지긋해진 통증이 시작된 것도 그 날부터였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기억은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홀로 잠드는 밤이 두려워질수록 나는 그가 준 액자에 집착했다. 닦고 또 닦았다. 때문에 나의 웃는 얼굴은 매일같이 빛났다. 반짝이는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혹시라도 내가 빛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지훈 씨가 건넨 액자 덕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얹어주는 무게를 더해, 곧 그이가 나를 밝은 곳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불안감 또한 가중시켰다. 나는 줄곧 생각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본 그 날 밤, 아버지의 그림자가 내 몸 어딘가로 침입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내 것이 된 그 그림자가 우리의 빛나는 미래를 삼켜버리는 것이 아닐까.
필사적으로 그를,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내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이제 나에게 그이는…. 이를테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 순도는 99%,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꽉 찬 숫자, 빛과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에게 그런 특별함이 있는지에 대해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나는 결코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1%의 어둠은 내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그 작은 틈새로 내 모든 존재의 빛이 흡수되는 것 같았다. 지상의 모든 색이 섞이고 나면 더욱 더 짙어지는 어둠. 가장 지독한 건, 잠든 내가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밤마다 허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돌아갈 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매일 아침 나는 하루빨리 그와 결혼해 어둠을 걷어내고 통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길 기도했다.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어. 나중에 전화할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커다란 얼굴을 닦았다.
#6
미영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듯 미끄러져 나아가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찬란한 미소를 사람들은 경이로운 듯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 멈춰 서니 나는 왠지 모를 우쭐함까지 느꼈다. 미영은 만나자마자 예뻐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법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듣는 칭찬이 싫지 않아 미소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미영이 잘 안다는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길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내뿜는 붉은 빛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옅은 눅눅함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이 가을의 첫 날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봉골레 스파게티와 크림 풍기 파스타를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는 흰 소국이 피어 있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미영은 딸아이가 스파게티를 좋아해 이곳에 자주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해 오던 일상의 의식儀式인 듯 국화 앞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공기 정화 기능이 있대, 그녀는 한동안 먼지와 매연으로 더럽혀진 콧속을 씻어냈다. 내 친구와 그녀의 딸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 언제까지고 작은 화분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상상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미영이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나는 친구의 딸아이가 매우 궁금했지만, 결혼 준비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녀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영이 서운해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밝고 명랑하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여 이야기해보지 않으면 좀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거듭되는 유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려 애썼던 것, 그래서 홀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만 먹으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왔던 것, 하지만 그녀보다 더욱 순진했던 남편은 세 번의 유산이 스물아홉 살 여자에게 준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의 장애만을 탓하며 밖으로만 돌았다는 것 등등…. 어느 날 이혼녀로 나타난 미영은 그런 것들을 마치 오래 된 전설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나마 이혼 전에 아이를 입양하는 데 동의해준 건 정말 다행이라고, 하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으니 남편이 좀 더 믿음직한 가장 역할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자기의 오산이었다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 미소가 단단하다는 느낌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밝음은 아마도 내적인 강함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는 미영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옛날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7
꼬마 미용사였던 나는 결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발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나름의 철칙이라면 철칙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것이 일종의 위로 또는 치료 행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붙여준 기술자라는 칭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나이의 초등학생들에게 동정심 같은 것은 생길 리 없었다. 그러던 내가 미영의 머리카락을 잘라준 것은 그녀가 그 날 평소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전 날 밤 우리 집에 찾아온 미영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트레이드마크인 양 갈래 삐삐 머리도 하지 않고 온 미영은 내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나는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방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마당에 놓고 그녀를 앉혔다. 안방에 있던 큰 거울도 미영의 앞에 옮겨다 놓았다. 그 날 거울 속에 비쳤던 친구의 얼굴이 내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성숙한 20대 아가씨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미영이 사거리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8
“그러지 말고 오늘은 우리 집에 한 번 가 보자. 결혼하고 나면 영영 그럴 기회 없다 너?”
예정에 없었던 일이지만, 어차피 오래도록 바깥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나는 그녀를 따라 집으로 가기로 했다.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보조 미용사에게 오늘은 내가 못 나가니 아홉 시쯤 정리하고 퇴근하라고 말했다. 2주 전부터는 평일에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제법 많았지만, 오늘처럼 손님 많은 토요일에 가게에 나가지 않은 일은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결혼이 뭐 대수라고, 하며 장단 맞춰 내 욕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런 통보도 없이 오후까지 출근하지 않은 나에게 어린 미용사는 역시나 화가 났는지 까칠하게 네,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녀의 딸이 보고 싶었다.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미영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였지만, 이제 몇 분 뒤면 충분히 알게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묻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는 길에 작은 빵집에 들러 달콤한 맛이 나는 쿠키와 어린 시절 자주 먹던 우유식빵을 샀다.
#9
미영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양한 크기의 알록달록한 알들이었다. 예쁘다, 나의 개미만한 목소리를 듣고 미영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그녀는 ‘아이도 못 낳는 병신’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며 폭언을 퍼붓는 시어머니와 그 뒤로 숨어 있던 맥 빠진 남편에게 악착같이 위자료를 받아내 이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 사람, 아마 무지 놀랬을 거야. 미영이 쓸쓸히 웃었다. 본인의 말을 듣고 나서도 이 친구가 악을 쓰는 모습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사실 아이 가져보겠답시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아내를 뒤로 하고 허구한 날 이 여자 저 여자 주머니에 팁이나 꽂아주던 남편에게 그 정도밖에 받아내지 못한 것이 억울한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였던 시절에는 임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다른 일은 거의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미영은 주부들에게 알공예를 가르치며 바쁘게 생활해 나가고 있었다. 실과 시간에 몰래 인형을 꺼내 커트 연습을 하던 내가 선생님에게 걸려 벌을 서고 있으면 미영도 이내 내가 있던 복도로 끌려나오곤 했다. 넌 왜 걸렸어, 라고 물으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펼치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미영이 나중에 커서 유명한 화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구겨진 원피스 차림으로 잠이 덜 깬 여자아이 하나가 방문을 빠끔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다섯 살에서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처음 본 나를 경계하는 듯 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빵 봉지를 흔들어 보이며 안녕, 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쪼르르 제 엄마 쪽으로 달려가 무릎 위에 앉았다. 아이는 엄마의 휠체어를 의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영은 웃으며 딸의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점심 때 본 소국 화분이 떠올랐다.
“왜, 빵 싫어해? 다른 걸로 사다 줄까?”
내가 내뱉은 문장이 비눗방울처럼 느릿느릿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주변의 공기가 점점 농밀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나는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생각했다. 엄마의 품으로 점점 더 파고들던 아이의 코와 입이 움찔거렸다. 어, 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미영도 당황한 듯 했다. 아이는 여간해선 울음을 그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체념하고 두 모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의 우는 얼굴 위로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먼지 구덩이를 뒤집어 쓴 어떤 꼬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빵 봉지를 떨어뜨렸다. 미영의 휠체어를 밀어젖히고 그대로 현관문 쪽으로 뛰었다. 철컥, 등 뒤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지만, 뒤돌아볼 수 없었다.
#10
열네 살은 나의 ‘공식적인’ 사춘기 기간이었다. 만사가 귀찮아져 대답을 몇 번 걸렀을 뿐인데, 마침 생리통이 심한 날이라 짜증을 좀 부렸을 뿐인데, 어른들은 나의 몇 가지 행동만을 가지고 사춘기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누구도 나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않았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이란 다들 그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이미 종료되었음에도 “나 이제 괜찮아요!”라고 먼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고민. 덕분에 나는 그저 커트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힘없는 사람들은 그저 머리통을 갖다 댈 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비교적 시골 분위기가 나는 동네 덕분인지, 사람들은 특별한 머리모양을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욕심 없는 사람들 덕분에 마당은 언제나 고요했다. 어쩌다 서너 명씩 발이 엉켜 대기 시간이 엿가락처럼 잔뜩 늘어지는 일이 있어도 불평 한 마디 없었다. 모두가 가위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는 것 같아, 나는 머리를 자르고 있을 때만큼은 한껏 우쭐해질 수 있었다.
현지는 열 네 살의 나에게 찾아왔던 동네 꼬마들 중 한 명이었다. 유난히 주근깨가 도드라진 통통한 볼이 다람쥐 같아 친동생 삼고 싶었던 아이. 현지는 앞 손님을 커트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언제나 떼쓰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힐끔 현지 쪽을 돌아보면 생긋 웃어주기까지 하는 착한 꼬마였다.
#11
유난히 파리가 윙윙대 머리를 자르는 내내 신경이 곤두섰던 그 날도, 현지는 내가 잘라준 앞머리를 입김으로 후후 불어 넘기며 우리 집을 나섰다. 나는 마당을 쓸고 대야를 씻으며 허리를 두들겼다. 가위질을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목도 어깨도 허리도 점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될 지도 몰라. 아버지에게 가서 침이나 한 대 놓아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으므로, 자칫하면 아버지와 길이 엇갈려버리고 말 터였다.
서둘러 마당 정리를 끝낸 후 황새걸음으로 길을 재촉해, 평소대로라면 10분도 넘게 걸렸을 한의원에 5분 만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니 안쪽 불이 꺼져 있는 것 같았다. 퇴근하신 건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삑 하고 작은 쇳소리가 나며 문이 조금 열렸다. 아버지…. 내 작은 목소리는 느릿느릿 퍼져 나가다가 진료실 앞을 막고 있는 커튼에 부딪쳤다. 얇은 커튼으로 옅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아른거리는 듯 했다. 한약 냄새 대신 쾌쾌한 다락방 냄새가 나는 것이 왠지 불쾌해 더욱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찰나, 커튼 너머 진료실 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싫어? 다른 걸로 사다 줄까?”
혼잣말이라기엔 너무나 괴이한 내용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 기울여 보아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잠꼬대인가 싶어 손가락 끝으로 커튼 틈을 벌려 한 쪽 눈으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늦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앞에 앉아있는 환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귀여운 앞머리를 하고 앉아있는 것은 내가 아는 현지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현지를 진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한 손에는 하얀 공주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 다른 한 손에는 청으로 된 멜빵치마를 입고 있는 인형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손으로 집고 있던 커튼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호기심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제 그만 이곳에서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생리가 시작되었다.
#12
왜 그 순간 그 아이를 떠올렸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사실 현지의 얼굴 같은 건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꼬마들의 생김새는 엇비슷하기 마련이다. 현지 또래의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여기에서 현지를 찾아보세요.’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올바른 답을 찾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아이들 틈에서 현지를 단번에 알아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김새 따위가 아닌 다른 힌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공기의 질, 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현재의 살아있는 시간과 이미 지나간 시간의 터널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3
핸드폰 벨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미영의 것. 그녀의 지친 목소리로 가늠해볼 때 아마 아이는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 두 시간 정도는 더 울었나 보다. 미영은 나에게 괜찮냐 물었다. 그 물음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 화면을 보니 8분 42초라는 시간이 찍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 내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터리를 갈아 끼울 때가 되었는지 키패드 조명이 깜빡거렸다.
지훈 씨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하면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14
나는 한참 동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훈 씨는 우리의 짧은 관계가 끝난 뒤 그대로 아침까지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나는 그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뜨끈한 열기보다 그의 옆에 가만히, 오래도록 누워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은근한 온기가 더 좋았다.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이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고통 받지 않았으면. 잠드는 것 자체가 고역인 삶을 살지 않았으면.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나는 그와 함께 보내는 밤의 시간 동안만큼은 잠을 자지 않았다. 혹시나 그에게로 다가올지 모르는 어둠을 전부 빨아들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면 나는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15
아침의 세상은 언제나 시끌벅적해서, 눈을 감고 있어도 정지되었던 사람들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몸의 모든 흡수 기관들 중 귀만을 유일하게 열어놓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온갖 소리들이 동시에 입장한다. 순서도 없고 강약도 없다. 새끼고양이와 남자의 욕지거리, 자동차 엔진과 콜라 광고 음악이 한 데 뭉쳐진 덩어리가 내 몸을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밥에 한 번 입에 한 번, 찌개에 한 번 입에 한 번씩 숟가락을 가져다대고 있던 나는, 따뜻한 지훈 씨의 손이 내 팔에 닿자마자 9월의 둘째 날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스물아홉 살 된 여자로 복귀했다. 세수를 하고, 그를 깨우고, 식사 준비를 하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몸의 감각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었나 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는 그이의 말에 마땅히 할 대답이 없어 입 속에 넣어 둔 밥알을 씹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지훈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님 어머님 산소에 다녀오자, 언제 가보고 안 간 거지? 글쎄, 언제였더라, 그 날이 몇 월 며칠이었더라. 날짜는 쉽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거,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내 사춘기가 끝난 건 언제였더라.
#16
아버지의 이상한 진료를 목격한 후, 나는 현지가 찾아올 때마다 그 아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현지는 자주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은 원래 소변을 잘 참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어느 날부터 현지는 아랫도리를 긁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언니, 쉬야가 아파.”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웠다.
주말을 내 방 안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어른들은 내 사춘기가 너무 길다며 유난스러운 계집애라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끝내야 하는 것이 사춘기인지,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인지, 나는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건 정말 인형이었을까. 나는 책상 아래 놓여 있던 큰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여섯 살 어린이날부터 작년까지 아버지가 내게 선물했던 여덟 개의 인형. 머리 길이가 제각각인 인형들이 한 데 누워 있는 걸 보니 소름이 돋았다. 상자를 들고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집을 나섰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채 마냥 걷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한의원 앞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상자를 땅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현지네가 이사를 갔다.
#17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묻혀 있는 원주까지 지훈 씨의 차로 이동하면서 나는, 내 기억이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진실이면서도 또한 왠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아버지의 한의원 앞에 내려놓은 것은 추억이 서린 인형뿐만이 아니었다고,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내려놓고 싶었던 것은 사춘기라는 이름표였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더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18
상자를 내려놓은 후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았다. 약한 사람들은 변함없이 나를 찾아와 머리통을 들이밀었고, 나는 가위질에 점점 더 능숙해졌다. 아버지의 셔츠에서는 한약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고, 퇴근 후에는 별다른 잔소리 없이 금세 코를 골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더는 쉬야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현지를 잊어갔다. 어쩌면 약한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머리를 잘라주게 되었다는 나의 아름다운 역사는, 무언가를 덮어 놓기 위해 짜놓은 촘촘한 장막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며 불편한 기억들을 하나씩 제거해온 것이 아닐까. 구역질이 올라왔다.
#19
꼬일 대로 꼬인 내 머릿속 회로와는 달리 일요일의 하늘은 쾌청했다. 잘 닦인 차창 밖으로 넓디넓은 원주의 평야가 보였다. 멀리 콤바인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우리가 가을이라는 널찍한 방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주가 엄마 고향이래.”
“…많이 그리워하셨나보다.”
전원 풍경이 주는 이유 모를 애잔함과 먹먹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동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물론 도시에서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러한 마음의 동요에 나약하다는 것도. 엄마의 고향.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그가 감상에 젖어 이곳에 자주 들르는 수고를 기꺼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저 엄마의 고향이자 두 사람이 함께 묻힌 묘를 잠깐 돌보러 가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슬픈 얼굴이 되어 마치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보내기라도 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이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멀미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추수 행렬에서 벗어나니 전선 위로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감전될 위험 같은 건 알지도 못한 채 유유히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면 얼마나 아플까. 나는 그이 옆에서 단 한 번도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와 결혼하면 정말로 어둠이 사라질까? 그러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까? 처음 하는 의심이 조금은 어색했다. 의심이라는 것에도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결혼식까지는 한 달. 앞으로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는 걸.”
지훈이 말했다. 나는 밤마다 걸었던 넓고 긴 터널을 떠올렸다.
#20
서울까지 2km.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며 미영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내 부모의 묘에 도착한 후, 나는 멀미를 핑계로 멀찍이 서서 지훈 씨가 벌초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 손은 줄곧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 날 내가 내려놓은 인형을 보았을까.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곤히 잠들어있는 지훈 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운동화에는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흙이 남아있었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카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풀을 뽑는 그를 지켜보면서 나는, 아마도, 무덤가에 들쑥날쑥 솟아 있는 이름 모를 풀들을 전부 가위로 잘라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허리에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등과 시트 사이의 작은 틈에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거기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님 너무 미워하지 마.”
언제 잠에서 깬 건지 지훈 씨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만큼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비밀을 들켜버리니, 조금 허탈했다.
사실 나는 자격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미워할 사람도, 해야 할 말이 있는 사람도 내가 아닐 테니까. 어느덧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21
문을 열어 준 아이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실에는 얇은 동화책 몇 권과 머그컵이 놓여있었다. 아이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를 보고 울지 않았다. 엄마는 아홉 시에 와요. 자세히 보니 눈 코 입의 오밀조밀한 모양새가 미영을 많이 닮은 듯 했다.
“스파게티 먹으러 갈래?”
나는 베란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휠체어를 보며 그녀의 딸에게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잠깐만요, 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드르르르. 들고 있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자가 떨어졌길래 다시 걸어놨어.’ 지훈 씨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망연히 서서 아이를 기다렸다. 다시 보니 미영이 만든 알공예 작품 중에는 사진이 박힌 보석함이 많았다. 미영의 어린 시절 얼굴이 붙어 있는 작은 알과 딸의 사진이 박혀있는 커다란 알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알 사이의 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가까웠을까. 미영이 자신을 닮은, 그리고 내 기억 속의 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아이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낸 건지 궁금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영이 놓아두고 간 휠체어가 어쩐지 신경 쓰였다. 내 옆에는 어느새 청 멜빵치마로 갈아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예쁘다.”
“엄마요?”
“엄마도 너도.”
그리고 현지도. 현지를 떠올리자 누군가 내 허리를 아주 얇고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가 불편한 걸 보니 무언가 깔고 앉은 것 같았다. 꾸깃꾸깃해진 것은 떨어져 나온 한 장짜리 신문이었다.
‘Dr. Lee의 생활의학상식'. 통증은 신체에 이상이 생겼을 때 몸 스스로가 보내는 신호다. 즉, 그것은 신체의 방어수단으로 치유과정 중 나타나는 반응이며, 원인과 발생 부위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어딘가 낯익은 글에 날짜를 확인하니 9월 1일, 어제 발행된 것이었다. 고개를 드니 아이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언제나 떼쓰지 않고 자기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현지 같았다. 하지만 상처 부위가 다 나았는데도 불구하고 통증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통증을 방치하면 만성통증으로 발전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의술이 발달하며 베일에 싸여 있던 통증의 원인이 점차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도 장막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그 때문에 통증은 꾀병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제 밥 먹으러 가요?”
허리의 통증이 멈추었다. 대신 그것은 굳은살이 박인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으로 옮겨가 있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몸을 일으키며 나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미영이 정성들여 만든 보석함 위의 사진에서처럼 생긋 웃어주었다. 나는 결혼 전에 할 일,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이 아이와 헤어지고 나면, 오늘 밤부터는 그이 곁에서 잠드는 연습을 해야겠다. 매일 밤 걸었던 긴 터널이 떠올랐다. 아직 한참이나 걸어야 하겠지만, 저 멀리 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 : 목지민
e-mail : bottle00@naver.com
연락처 : 010-4010-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