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by 내젊은날의숲 posted Dec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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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도둑

미세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던 신경들이 한계에 이르렀는지 하나 둘 툭툭 끊어졌다. 신발장을 열고 무언가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수영은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오른손에 뭉툭한 망치가 들려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두통은 이제 너무 지겹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망치를 높게 들어 힘차게 자신의 머리를 내려쳤다. . 한 번. . 두 번. . 세 번. . 네 번. 두개골이 함몰됐고 그 사이로 붉은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시원했다. 지긋지긋한 두통보다는 이게 낫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

핸드폰 진동소리에 수영이 잠에서 깼다. 핸드폰 액정을 보기도 전에 지끈함이 눈 뒤에서 몰려왔다. 이 새벽에 누구냐는 욕지기도 하지 못한 채, 아찔한 통증에 묶인 채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안 와?"

퉁명스런 목소리. 그녀였다. 수영보다 7살이 많은. 남편이 출장 갔다며 모텔을 잡아 놓고 수영을 부른. 초등학생인 아들도 모른 채 하고 자신을 부른 그녀를 생각하자 머리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비현실적인 통증을 느끼며 수영은 차라리 꿈이 현실이길 바랐다.

수영은 취직을 하면서부터 두통을 앓았다. 경미한 열이 왼쪽 머리에 머물러 정신을 살짝 흐리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떤 때는 목이 경직되고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그리마가 수많은 다리를 머리에 박고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는데 그러면 수영은 화장실에 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두통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수영은 아버지와 은우를 떠올렸다.

"시간 없어. 빨리 와."

다시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449. 그녀의 말대로 섹스를 하고 출근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아 언제부터 삼류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불륜남이 되어버린 걸까. 수영은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에 곧 포기했다. 주연도 아니고 기껏해야 조연쯤일 자신의 모습이 역겨웠다. 차라리 섹스라도 하면 기분이 좋아질지 모른다고 수영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거니까 그냥 한번 쫙 빼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 사실 그녀의 몸은 기분 좋으니까. 수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영은 냉장고로 가 물을 마신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넘어가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머리는 아팠고 삶은 엉망이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시선을 느낀다. 책상 위에 있는 한 권의 노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붉은 노트가 마치 자신의 치부를 후벼 파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생각. 은우는 왜 하필 흐무적적한 붉은색을 고른 걸까.


"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은우의 노트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일어나기도 다시 잠자리에 들기도 애매한 시간. 수영은 그 노트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붙잡아 달라는 거야 뭐야? 나보고 어쩌라고."

수영은 혼잣말을 한다. 다시 지끈하게 울려오는 머리. 책상 서랍에서 타이레놀 두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두 알을 더 입에 털어 넣었다. 수영은 그제야 안도한다.

아 씨발. 가슴 큰 여자가 섹스해달라고 부르는데 내가 기껏 이딴 노트나 읽어야겠어?”

수영은 괜스레 성질을 낼뿐 이내 노트를 펼친다. 자신의 모습이 퍽이나 웃기다는 생각에 클클클 하고 웃는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성기를 딱딱하게 세운 삼십대 초반의 남성이 붉은 노트를 앞에 두고 새벽녘에 웃음을 흘리는 장면은 기괴하기만 하다. 노란머리 알버트와 호주로 가겠다는 나쁜 년. 은우가 혹시나 자신을 붙잡아 달라는 말을 남긴 건 아닐지, 뭐 이딴 걸 기대하며 수영은 심호흡을 한다. 그의 성기가 조금씩 작아진다.

 

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수영은 그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으레 그렇듯 은우는 청첩장을 건넸다. 청첩장 밑에는 붉은 노트가 같이 있었다.

"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수영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은우가 호주 사람을 만났고 그와 결혼을 한 후 호주로 떠날 거라고.

그날의 은우는 예뻤다. 하늘거리는 살구 색 원피스에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질끈 묶은 은우는 늘 그렇듯 단아했다.

"축하해."

수영은 커피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은우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 수영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은우야. 울림소리만 있는 이름이야."

은우를 처음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수영은 은우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돌아서는 은우의 뒷모습을 보며 수영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가서 붙잡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은우의 노트는 그해 겨울의 일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해 1, 수영과 은우는 암울한 마음으로 취업준비생이 되었고, 2월에는 쫓겨나듯 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가진 것도 갈 곳도 없었다. 12, 그들은 아무런 희망 없이 동네에 있는 허름한 독서실에 등록했다. 독서실 이름은 희망 독서실이었지만 ''자가 떨어져 멀리서 보면 '망 독서실'로 보였다. 외벽의 하얀 페인트는 다 벗겨져 있었고 일층은 창고로 쓰이는지 이상한 짐들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은 아직도 그곳에 독서실이 존재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독서실비가 만원이 싸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컴컴한 이층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곤 했다. 이층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맡게 되는 쾌쾌한 냄새, 결재를 하고나서야 불안하게 느껴지는 망 독서실이라는 간판의 이름. 겨우 만원 때문에 이러는 자신의 찌질함을 대면하고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까지 왔는지 깨닫곤 했다.


은우는 왜 자신과 그런 허접한 독서실을 다녔던 걸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수영은 알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그리마 한 마리가 머리 밖으로 기어 나와 가슴으로 내려갔다.

추운 겨울. 가장 맛있었던 컵라면. 달라붙는 트레이닝 복에 두근대던 가슴. 밥 먹을 때 슬쩍슬쩍 닿던 은우의 무릎. 가끔 툭툭 부딪쳐오던 은우의 어깨. 하하하 하고 크게 웃던 웃음. 기억의 파편들이 가슴에 조각조각 박혔다. 이미 지난 시간일 뿐이라고 수영은 되뇌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니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수영이 집에 갔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는 느낌에 등 뒤가 서늘했다. 애초에 이런 독서실에 백만 원이 넘는 자전거가 어울리기나 하냐고, 누가 훔쳐갈지 모르니 가지고 오지 말라고 수영에게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자전거를 타고 독서실에 오곤 했다. 안쓰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고, 화가 났다.

수영은 파랑이라 불리는 두꺼운 토익 책 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수영을 깨웠다. 수영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설 연휴가 끝나는 날이었기에 독서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날 독서실에 와서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는 그를 생각하니, 거기에 얼마 전 경비를 시작한 아버지가 졸업선물로 사준 자전거를 잃어버린 그를 생각하니, 그만 울고 싶어졌다.

 

붉은 노트엔 수영이 자전거를 잃어버린 날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은우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수영은 자전거 도둑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은우를 떠올렸다. 은우는 스산한 겨울밤의 골목을 자전거를 찾아 몇 시간이고 헤맸었다. 귀가 빨개진 은우의 귀를 비벼주고 싶었던 자신을,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던 자신을, 수영은 생각했다. 지금의 수영은 그때의 자신이 낯설었다.

 

독서실 총무는 늘 그렇듯 PMP로 미드를 보고 있었다.

"오빠, 독서실 안에 있는 CCTV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보자 빈정이 상했다.

"비싼 자전거가 없어졌어요."

"오늘 독서실에 온 사람 없는데."

"어찌됐든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총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인데……. 더 의심이 갔다.

"저랑 수영이는 나가서 좀 찾아보고 올게요. 준비 좀 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무작정 수영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수영과 흩어져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훔쳐간 자전거를 사람이 어떻게 쫓아가."

수영의 목소리엔 신경질적인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그럼 그냥 포기해?"

내가 닦달하는 게 그를 더 괴롭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찌됐든 한 번 찾아나 보자."

수영은 마지못해 찾아나서는 것 같았다. 여덟시쯤 독서실에서 나왔으니 세 시간은 돌아다녔나보다. 자전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수영과 만나 편의점에 들어가 콧물을 흘리며 캔 커피를 마셨다. 뉴스에서는 숭례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핸드폰으로 달력을 봤다. 41일이 아니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 공기마저도 나른하고 귀찮은 농도를 잔뜩 머금은 날, 거짓말처럼 그의 자전거는 사라졌고 숭례문은 불타올랐다.

 

- - -

수영의 전화가 울렸다. 핸드폰의 작은 흔들림이 공기를 살짝 흔들었고 그 공기의 파장이 수영의 몸을 휘감아 요동치게 했다. 자신의 인생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인생의 두 번째 시작점은 그 때일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그해 가을 수영은 대학교 교직원으로 취직했다. 지방에 있는, 그 지역 사람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는 아주 작은 사립 대학교였다. 그럼에도 급여는 그리 적지 않았고 여가 시간은 다른 직장에 비해 많았다. 그녀는 수영이 일하게 된 구매팀의 선임이었다.

얼마 전 출산을 했고 연이어 둘째를 낳은 거라 일주일 후에 출근한다고, 서른세 살이니 수영보다는 일곱 살이 많다고, 예쁘니 조심하라고, 일은 잘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수영은 그녀가 자신의 뒤에서 몸을 숙여 모니터를 응시할 때 맡아지던 원색적인 냄새가 힘겨웠다. 살짝살짝 스치던 풍만한 가슴에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가 오기 전에 들었던 말들보다 그녀의 몸이, 보이는 것들이 더 강하게 인식됐다.

그녀는 요령이 있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은 즉각적으로 처리했고 어떤 일이든 시키는 대로 했다. 반면 다른 부서와 협조하는 일이라든지 직위가 높지 않은 사람이 시키는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거나 늦게 했다. 그래서 그녀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남자 사원들과 놀아난다는 이유로 그녀는 모든 여직원들에게, 그녀와 놀아나지 않은 남자직원들에게 욕을 먹었다. 수영은 그녀가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그녀는 수영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수유 때문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는데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늘 파인 옷을 입고서는 수영 앞에서 몸을 숙였다. 수영은 처음에는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시선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슴을 볼 때마다 수영의 몸은 달아올랐다.

입사한 지 십 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수영에게 구매 과정에서 돈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최대한 아는 사람 없이, 거래처 직원 중에서도 과장 이상급과 이야기 해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부터 서류를 어떻게 조작하고 어떤 거래처가 이런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지에 대해 그녀는 꼼꼼히 이야기했다. 수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자신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구매 과정에서 몇 천만 원을 만들어내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랐다. 그녀는 자신의 몫과 수영의 몫을 따로 챙겼다. 그녀가 수영의 몫을 챙겨주던 날, 그녀는 수영을 데리고 모텔로 향했다. 그리고 둘은 몸을 섞었다. 수영은 자신이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은 2년 계약직 후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영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 헐떡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사정하는 순간, 돈을 건네던 거래처 직원의 비굴한 표정이, 돈을 건네받던 사무처장의 징그러운 미소가, 자신의 몫이라며 봉투에 돈을 따로 넣던 그녀의 탐욕스런 손길이 떠올랐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는 순간 수영은 모텔 천장에 붙은 거울에서, 그들과 똑같은 표정을 한 자신을 보았다. 욕망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배 위에 올라 타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처음이라고 수영이 말하자 그녀는 빙긋 웃으며 수영의 허리 밑으로 얼굴을 내렸다. 수영은 그녀와의 질펀한 섹스를 하는 것이 마음을 더 편하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수영은 은우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인생이 헝클어지는 날이 있다. 그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날이 있다. 수영에겐 그런 날이 두 번 정도 있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몸을 섞던 날이 그 중 하루였다. 그리고 다른 하루는…….

 

불타오르는 숭례문을 보면서 수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타닥타닥. 숭례문은 잘도 탔다. 수영은 그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수영의 모습엔 상실감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질적인 무언가가 묻어났다.

"자전거를 꼭 찾자."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비싼 자전거를 사줬을까?"

수영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넌 그랬던 적이 있어?"

난 그냥 바라봤다.

"중학교 때였을 거야. 나이키 신발을 갖고 싶었어. 그때에도 나이키 신발은 십만 원이 넘었어. 아버지에게 나이키 신발 하나만 사주세요, 했지. 아버지는 며칠 후에 신발을 하나 사가지고 오셨어. 나이키가 뭔지 잘 모르는 아버지는 자기가 볼 때 꽤 괜찮고 비싼 운동화를 사오셨어. 프로스펙스 거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썩 나빠 보이진 않았어. 다음 날 아이들의 반응을 조금은 기대하고 학교에 갔는데 아무도 내 신발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 그때 느꼈던 감정이 뭔지 몰랐는데 커서 생각해보니 그게 초라함이었던 것 같더라."

그 말을 하는 수영의 옆모습에 언뜻언뜻 비치는 차가움이 낯설었다.

"그나저나 숭례문 참 잘 탄다."

우리는 캔 커피를 마시며 숭례문이 타는 걸 봤고 터벅터벅 독서실로 돌아왔다.

뭔가 석연찮은 기분. 집에 돌아오기 전 독서실 총무를 찾아보았지만 "잠시 외출합니다."라는 종이를 사무실에 붙여놓았을 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수영과 함께 파출소에 갔다.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경찰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바쁜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의지를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냈다. 경찰은 어디서 어떻게 자전거를 잃어버렸는지 물었다. 국가기관이라면 이런 일쯤은 당연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약간의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차대번호를 적어주세요."

"차대번호는 몰라요."

"죄송하지만 차대번호를 모르면 자전거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습니다."

"못 찾는다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겁니다."

"저기요, 백만 원이 넘는 자전거에요."

"천만 원이 넘어도 못 찾는 건 못 찾는 겁니다. 범행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없다면, 자신의 자전거라는 걸 입증할 수 없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경찰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사정해봤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적인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파출소를 나서는 수영의 뒷모습이 초라했다.

 

은우의 기록을 읽으며 수영은 그때를 떠올렸다. 빛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꿈이 있었던, 젊기에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던 시절. 수영은 자신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났기에 그때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수영은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겨울,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수영과 은우는 밥과 김치를 싸와서는 컵라면과 함께 먹었었다. 희망독서실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판자를 대어 만든 허름한 휴게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리 뜨겁지 않은 정수기 물을 받아 약간은 설익은 라면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애틋했다. 그때만큼 컵라면이 맛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컵라면 국물에 말아먹던 찬밥이 왜 그리 입에 착착 달라붙었었는지, 차가운 김치를 씹을 때 배추는 왜 그리 아삭했는지, 수영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전 내내 기다리던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나서 수영과 은우는 자판기에서 커피와 코코아를 한잔씩 뽑아 섞어 마시곤 했다. 그런 별 것 아닌 일들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들인데, 그때는 그런 일들로 인해 왜 그리 행복했는지. 천원짜리 점심을 먹고도 서로 보며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마가 한 마리에서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 가슴을 휘젓고 다녔다.

 

수영은 자전거 찾는 걸 포기한 것 같다.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지. 자전거 이야기를 할 때면 미묘하게 굳어지는 수영의 얼굴에 마음이 어렵다.

그날 사건을 정리해보면 간단하다.

우선 독서실에 나온 인원은 총 세 명이었다. 독서실 총무, 수영, .

수영이가 자신의 자전거를 훔칠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가 인지하기에는 분명한 사실이다.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1. 독서실 총무가 내가 집에 간 사이에 수영이 잠을 자고 있는 걸 확인한 후 자전거를 훔쳐갔을 가능성.

2. 그날 열람실엔 들어오지 않았지만 독서실에 다니는 누군가가 자전거를 훔쳐갔을 가능성.

3. 독서실 외부 인물이 수영의 자전거를 노리고 훔쳐갔을 가능성.

불행히도 자전거가 묶여 있던 계단에는 CCTV가 없었다.

그날 독서실 안에 들어오지 않고 누군가가 독서실 밖에서만 자전거를 훔쳐갔다면 내가 잡을 수 없다.

, 독서실에 다니는 누군가가 수영의 자전거를 훔쳤다면 독서실 안에 들어와 수영과 총무의 상황을 살피고 훔쳤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독서실 복도에는 CCTV가 있다.

총무와 혹은 그날 독서실에 왔을지 모를 누군가를 용의자로 보는 게 합리적 추리인 게 분명하다.

 

독서실 총무는 CCTV를 확인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왜 안 되냐는 내 질문에 그저 안 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독서실 총무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이를 예상해 보건데 한두 해 준비를 한 건 아닌 듯하다. 독서실에서 총무로 일을 하면서 독서실 비를 절약하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것 같다. 독서실 데스크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PMP로 미드를 보는 일 뿐이지만 자신이 곧 공무원 시험에 붙을 거라는 착각을 한 시도 잊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썩 제정신인 사람은 아니다.

독서실 총무는 CCTV 확인이 어렵다고 했지만 빈틈이 많은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독서실 총무가 자리를 지키는 시간은 오후 2시부터 새벽 2. 그러니까 CCTV를 확인하려면 총무가 나오기 전에 주인아주머니에게 확인하면 되는 거다. 내일 아침, CCTV를 확인할 참이다.

 

수영은 자신의 기억을 들추기 시작했다. CCTV를 확인했다고 은우가 자신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휘적이던 그리마가 하나 둘 등 뒤로 이동해서는 한줄기 땀으로 흘러내렸다. 뒷머리를 관통하는 섬광 하나가 수영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은우가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수영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CCTV는 확인할 수 없었다. CCTV를 확인해 달라는 내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건 녹화가 되지 않는 거라고 말했다.

좀 화가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 그래서인지 나도 내가 무슨 정신에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서실 총무에게

"오빠 왜 그랬어요."

라고 눈을 앙칼지게 뜨고 물어본 거다. 난 원래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의외성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 뭐가."

독서실 총무는 정말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그를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셨냐구요."

조금은 더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물었다.

"... ?"

독서실 총무는 얼굴이 빨개지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쯤 되자 뭔가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주인아주머니에게 말씀 드려서 다 봤어요."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일그러지던 독서실 총무의 얼굴과 함께 내 양심도 조금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나? 순간의 자괴감. 하지만 쏟아낸 말은 돌이킬 수 없었고 그렇게 흘러간 분위기도 걷잡을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총무는 갑자기 일어나서는 급기야 도망치기 시작했다. 독서실 총무가 나가고 나서 한 5초 동안은 저 사람이 뭐하는 건가하고 멍하니 바라봤다. 내 앞에서 누군가 그렇게 도망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총무를 뒤쫓고 있었다. 한 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도로를 질주하는 남자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우리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쫓아가면서 그만 두자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헐레벌떡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물이 고였다.

총무가 점점 멀어질 즈음, 인도 턱에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총무는 다시 일어나려다 갑자기 짜증이 났는지 욕을 해대며 그 자리에 그냥, 주저 앉아버렸다.

"? ?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총무는 얼굴이 상기된 채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찬 공기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그의 어깨를 잡고는 한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찬 공기 때문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숨을 헉헉대는 나를 두고

"아무도 없으니까. 독서실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독서실 복도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어. 그게 뭐?"

라고 얼굴을 돌린 채 총무는 말했다.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

"아무도 없었다고요?"

"그렇다니까!"

"수영이는요?"

"수영이도 너 간 다음에 나갔어. 그러니까 그랬지."

난 총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수영이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만이 내 고막을 때렸다. 수영이는 그 사실을 내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왜 내게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그리고 왜 굳이 계속 자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던 걸까?

어느 책에선가 그런 말을 본적이 있다.

"완전 범죄는 없다. 완전 범죄는 명백한 증거를 명백한 의혹을 보려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또는 그 사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난 총무의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수영은 침을 삼켰다. 은우가 진실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진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수영만이 알고 있었다. 수영도 다다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숨길 수 있다면 마냥 숨겨두고 싶은, 자신의 생활 태도를 아주 미묘하게 약간 틀었던 날의 기억. 그날 미묘하게 뒤틀리지만 않았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그때 아주 조금 뒤틀린 결과가 지금의 자신이라는 걸,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수영은 알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아마도 그녀이리라. 수영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 그녀가 문 앞에 있었다. 그녀는 화를 내려다 벗은 수영의 몸을 보고, 발기된 수영의 성기를 보고는 더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럴 거면서."

그녀는 수영을 밀치고 들어와 허겁지겁 옷을 벗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 수영의 몸을 탐했다. 두 차례의 정사가 끝난 후 그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옷을 입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들 밥 차려줘야 해."

그녀의 말보다 하고 닫힌 파열음이 수영의 마음에 더 오래 남았다. 그 소리를 통해 수영은 지금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버려진 콘돔에서는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액이 흘러넘치고 넘쳐 이 방을 가득 채울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더러운 상상에 수영은 머리를 찡그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똥이 묻어 있는 변기에 대고 수영은 헛구역질을 했다. 위액만 게워내며 수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젠장."

수영은 울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영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830분이었다.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수영은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오늘 안 나갈래. 대신 잘 처리해줘.

수영은 핸드폰을 껐다.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수영은 은우의 노트 앞에 앉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더러운 몸으로 하지만 결연한 표정을 한 채.

 

수영이 그런 이유가 뭘까? 수영이 집에 다녀왔다면 자전거는 어디서 없어진 걸까? 이 일은 이제 내가 생각해서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있었다. 수영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도 되는 걸까?

 

그날 이후로 수영이 조금 차가워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수영은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우리가 과연 취직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게 지겹지 않아?"

내가 싫은 걸까? 구차한 것들이 지겨워진 걸까? 숭례문이 불타던 날 말한 초라함은 무슨 의미일까?

알 수 없는 물음들을 허공에 던진다. 알 수 없는 만큼 그와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어떤 사람이 궁금했었다. 궁금했기에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했고 관심이 갔던 거다.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갔다. 그렇게 짝사랑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 궁금한 때문에 짝사랑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그와 나를 멀어지게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노래가사 마냥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관계대명사를 공부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영의 자전거는 애초에 누군가 훔쳐간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고.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수영을 의심하기 전에 독서실 총무가 그날 거기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그날 이후로 날 껄끄러워 하는 독서실 총무를 불렀다. 그가 화들짝 놀라는 게 눈에 보였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 ?"

"그러니까 오빠가 수영이 자전거를 훔친 건 아니죠? 아무도 없다고 훔쳤다는 얘기는 아니었던 거죠?"

총무는 내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참 후에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 내가 니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그런 사람은 아니야."

총무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사과를 하고 돌아서는 내 뒤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봉호야. 이봉호."

 

그냥 독서실 복도에서 한 번 해보고 싶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친구에게 물어봤다. 녀석은 그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 왜 그러는데?"

녀석은 한참을 웃고서야 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

"도대체 뭘 한 건데?"

자꾸 묻자

"자아성찰 쯤이라고 해두자."

"?"

"은우야 그런데 있잖아."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녀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절대 범인이 아니야."

녀석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난 총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수영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웃긴 상황을 보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은우의 기록이 수영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수영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설령 그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독서실에서 나와 이십분쯤 걸었다. 꽤 긴 언덕을 오르자 그의 집이 있는 빌라가 있었다. 그는 4층에 살고 있다 했었다. 허연 콘크리트 외벽만 봐도 그 건물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언덕 위에 있는 빌라가 우리 집이야. 와 볼 생각은 하지도 마."

그가 단호하게 말하던 게 생각났다. 독서실에 등록하고 나오던 날 함께 집에 가며 말했었다. 금기를 깨는 철없는 왕비마냥 나는 그 허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건물이 마치 날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른 채,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며, 이건 스토커나 하는 짓이 아닐까 걱정하며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올랐다.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온갖 자괴감이 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럼에도 그 끝 모를 궁금함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성의 모든 걸 가져도 되지만 성의 끝에 있는 방만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기고야 마는 왕비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그의 집 앞에 묶여 있는 그의 자전거를.

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는데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한 아저씨가 경비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것 같았다. 피곤에 찌든 얼굴. 자전거 앞에 있는 나를 그 아저씨는 경계어린 눈으로 살폈다.

"뭐요?"

"아 안녕하세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니긴 지금 남의 자전거 앞에서 뭐하는 거요?"

"죄 죄송합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려서요."

술술 거짓말을 잘도 해댔다.

"경찰 부르기 전에 얼른 가요. 이건 내가 우리 아들 사준 거니까."

방문을 열고나서 왕비는 목숨을 잃었던가? 아니면 왕에게 버림을 받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난 수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수영은 모든 게 은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집에 가는 길에 은우는 말했었다. 작은 차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경비로 재취직을 한 아버지가 왜 그리 비싼 자전거를 사줬는지 수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치 월급을 탈탈 털어야 살 수 있는 자전거를 왜 사왔느냐는 질문에

"이거 타면 어디 가서 부끄럽지는 않을 거다."

라는 동문서답 같은 말을 하던 아버지를 수영은 기억했다.

겨울, 수영은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비싼 자전거가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자전거로는 은우를 태우고 다닐 수도 없었고, 손도 시렸고, 폼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은우 말 마냥 이런 독서실에 이런 자전거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춘기도 아닌데 수영은 사춘기 소년마냥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적의를 드러냈다.

은우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 수영은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가 경비로 일하는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전거를, 버렸다. 숭례문이 불타오르던 저녁, 은우와 자전거를 찾으러 다니며 수영은 아버지가, 은우가, 자신이, 못 견딜 정도로 미웠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던 수영은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이 버렸던 자전거가 그대로 묶여 있었다.

"자전거 잃어버렸냐? 아파트 단지에서 찾았다."

어떻게 된 거냐는 자신의 물음에 아버지는 그리 말했다. 그때 수영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운명인가 보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것에 화를 한 번 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운명에 수영은 화가 났다. 그때부터 수영은 변했다.

은우의 기록은 어느덧 마지막 장에 이르러 있었다.

 

수영이 취직을 했다.

 

취직을 한 후 수영은 내게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수영의 연락이 아예 끊겼다.

혹시 나 때문에 그가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그랬듯 그도 날 좋아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정말로 만약 그런 거였다면 그럴 것까진 없었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난 그의 옆에서 그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수영아, 행복하니?

 

은우의 질문이 수영의 머리에,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수영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한 동안 멍하니 있던 수영은 살짝 떨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됐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눈이 뽑힐 것만 같은 두통 때문인지 수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수영은 이 두통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수영은 어느덧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눈물이 고인 수영의 눈엔 은우가 쓴 마지막 말이 크게 보였다. 행복하냐는 은우의 마지막 말이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