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

by 모란도 posted Jan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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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

 

열기가 식지 않은 잿더미 속에 손을 넣는다. 이리저리 헤집어 보고,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확인하며 다시 헤집는다. 뜨거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끼고 있으나 윤씨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콧구멍에 검은 잿덩어리가 맺혀 숨쉬기 힘들어졌다. 입으로 숨을 쉬니 목구멍과 혓바닥에 검은 재가 텁텁하게 맺혀 침을 삼키는 것이 힘겨웠지만 멈추지 못했다. 아이는 잘못이 없다. 차라리 재가 되어 손에 잡히질 않았으면 좋겠지만 바람은 바람처럼 불어와 윤씨의 몸을 감싸고 멀어져갔다. 주먹조차 제대로 움켜쥐지 못한 손이,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화마에 일그러져있는 얼굴과 다물지 않은 입이 윤씨의 눈과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이는 잘못이 없다. 처음 품안에 안아주었던 순간처럼 윤씨는 아이를 들어 올리다 행동을 멈추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아이의 몸이 부서졌다. 윤씨는 치맛자락을 찢어 아이를 감싸 품에 안아주며 자신의 젖을 물렸지만 아이의 입술이 깎여 나갔다. 윤씨의 턱에 검은 눈물이 떨어져 땅을 적셨다.

백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소문으로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이 승리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윤씨가 있는 곳은 황산벌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윤씨는 계백의 승리를 믿었고, 아이는 죽었다. 마을에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황산벌로 끌려갔다. 윤씨는 자신의 남편이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집에서 기다리려 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조금씩 아이가 흩어져갔다. 윤씨는 다 타버린 집터 한 가운데 아이를 묻고, 감싸주었던 치맛자락을 품에 안았다. 아이를 다 묻고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니, 그제야 입 밖으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구멍에선 시꺼먼 무언가가 넘어와 뱉어내니 검은색의 사리같아 보였다. 윤씨의 눈엔 그것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뱉어내었는지 몰라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가다 어느 순간부터 입속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오게 되지 않게 되었다. 마을 곳곳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죽었거나, 무언가가 불타올랐거나, 겁탈을 당한 이유 등으로 혹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서 울부짖었다.

 

밤이 낮을 걷어내고 지상위엔 어둠이 깔렸다. 융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달빛에 의존해 힘없이 발을 끌며 걷고 있는 몇몇의 무장과 자신을 따르는 조금의 무리뿐이었다. 계룡산이라는 말을 해가 산 뒤로 넘어가기 전부터 들었지만 어라하께서 세웠다는 신원사는 보이지 않았다.

산의 밤은 가까운 어둠이었고 그 어둠속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신라군이나 당나라군을 조심해야 했지만, 지친 이들은 발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무거운 짐을 여기저기에 몰래 버렸다. 유일하게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융이 구름사이로 가려진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구름에 의해 점점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융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융의 한숨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와 개구리 우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달빛은 구름에 완전히 가려졌고 빛이 없는 산 속에서의 이동속도는 더뎌져 갔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작은 물줄기 소리에 모두 소리의 근원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융의 일행을 이끌고 있는 늙은 길잡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물줄기 위로 쭉 올라가면 신원사가 나옵니다요.”

아무도 대답하진 않았지만 길잡이의 말은 잠시나마 모두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이내 멀리 빛이 보였다.

융의 일행은 조용히 신원사 안으로 들어섰다. 밤이 깊어 융을 맞이하는 이는 비구니뿐이었는데, 벙어리라 말을 하지 못했고 행동으로만 이들을 안내했다. 말을 못하는 비구니를 불편하게 느꼈는지 몇몇 이들은 불쾌하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몇몇은 비구니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빈 속으로 신원사까지 왔기 때문에 융과 일행들은 모두 허기져 있었다. 비구니가 이를 눈치 챘는지 조악하게 생긴 주먹밥을 공평하게 나눠 주었다. 융에게도 예외없이 공평하게 분배되자 융을 따르는 덕솔의 신하가 나서려 했으나, 융이 손을 들어 신하를 막았다. 비구니는 융 앞에서 합장했고, 융 또한 합장으로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공평함을 보이고 자비를 베푸시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말 할 수 있겠느냐?”

비구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융 또한 미소를 보이려 했으나 콧바람이 먼저 나왔다. 비구니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었고, 융은 손짓을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공평과 자비라는 말이…….”

비구니가 융의 말을 끊고 품에 안아주었다. 이를 본 신하와 병사들이 팽개쳐져 있던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융은 그것도 모른 채 비구니의 품안에 안겼다. 거부하기엔 비구니의 품은 아늑했고 달콤한 젖내가 났다. 융은 숨을 크게 마시며 비구니를 밀어냈다. 이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물리라 했다. 비구니가 융의 옆에 앉았다. 융은 웃음 터져 나왔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리고 넌 이곳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아 보이는구나.”

비구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융은 다시 크게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자신의 속에 있는 대화를 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비구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니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가끔씩 표정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융이 속내를 다 털어낼 쯤 융은 비구니에게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나라와 이 땅을 잃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너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이 남았느냐?”

갑자기 비구니가 입을 열었다. 입속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고통스런 비명 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구니는 한없이 울었다. 자신의 가슴을 부시는 듯 두드렸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며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우는 모습이 안타까워 융이 손을 내밀었지만, 비구니는 융을 붙잡고 입모양을 천천히 만들었다.

. . . . . . .’

융은 비구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비구니의 옆에 조용히 앉아 주먹을 쥐었다. 살을 파고드는 손톱에 핏물이 맺히다 못해 바닥을 적셨다. 울음을 그쳐가며 답답한 숨을 고르고 있던 비구니가 융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갔다.

구름에 가린 희미한 달빛이 다 타버린 불꽃처럼 보였다. 융이 먹던 주먹밥이 한 입에서 두 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조악하게 생긴 주먹밥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비구니가 다가와 융에게 너덜너덜한 천으로 손을 감싸주었다. 천은 연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구니의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섬세했다. 천을 다 감싸 주자 비구니는 융이 하룻밤 묵어야 할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융을 따르던 이들 대부분은 주먹밥을 먹자마자 잠에 들었다. 잠에 들지 않은 이들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과 몇 안 되는 신하들뿐이었다. 융은 방으로 들어서며 깊은 산중의 고요함을 이질적으로 느꼈다. 비구니는 융이 방안으로 들어가 장지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돌아섰다.

 

비구니가 융의 침소에서 삼십 보 걸어 나왔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 무언가가 비구니를 덮쳤다. 비구니는 몸부림쳤다. 비구니를 덮친 것은 백제 병사였다. 마른 체구의 병사는 비구니가 저항하자 주먹으로 복부를 강하게 내리쳤다. 배를 맞은 비구니는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병사를 밀어내려 했다. 병사는 비구니가 입고 있는 옷을 강제로 벗겨 내렸다. 비구니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오긴 했으나, 그 누구에도 들리지 않았다.

 

융은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몸은 수면을 요구하는데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신원사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내일은 어디로 이동해야 하며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가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마른 체구의 병사가 비구니의 위에 올라타 자신의 아랫도리를 벗었다. 비구니는 이 틈을 타 병사를 밀어 넘어뜨렸다. 아랫도리를 벗다가 넘어진 병사를 밀쳐내고 비구니는 융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으나 병사가 빠르게 일어나 비구니를 넘어뜨렸다. 비구니는 살결이 흙에 쓸리면서도 융이 있는 침소로 기어갔다. 병사는 혓바닥으로 비구니의 몸을 핥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비구니가 발버둥을 칠 때 멀리서 덩치가 좋은 병사가 달려들었다. 비구니는 그를 보며 팔을 크게 휘저었다. 덩치 좋은 병사는 덩치가 작은 병사를 강하게 밀쳐내며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니미럴 여기서 이러면 되겠냐! 일 보기 전에 뒤져버리겠네. . 때깔 좋네.”

덩치 큰 병사가 비구니의 젖가슴을 만졌다. 비구니의 표정이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덩치 큰 병사는 서둘러 비구니를 어깨에 들쳐 메고 담을 넘어 신원사 밖으로 나갔다. 몸집이 장은 병사는 비구니의 옷가지와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덩치 큰 병사를 따라 담을 넘었다.

 

귓가에 작은 소리가 맺혀 융이 장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가까운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융은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산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부스스 떨리는 나뭇잎 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융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어둠속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이 자신과 같아, 얼른 방문을 닫고 누워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있는 사비성이 오늘 내일이면 내 발 밑으로 들어오는데, 그대가 이렇게 금은보화와 좋은 음식을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물며 만약 내가 백 번 양보하여 당나라군을 돌려 본국으로 돌아간다 한들, 백제가 신라를 막을 힘도 없는 주제에 한심하게 왕자가 이러고 있느니. 쯧쯧.”

융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소정방의 말이 옳았다. 당나라가 물러난다 한들 코앞에 있는 신라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꿇은 무릎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한탄스러움을 참기가 힘들었다. 소정방은 이런 융을 내려다보며 피식피식 웃다가 수염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대의 성의를 갸륵하게 여겨, 이것들을 놓고 간다면 내가 왕자에겐 특별히 여생을 편히 살다가 갈 수 있게 해드리리다.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항복을 약조한다면, 대국으로서의 예우와 함께 대국의 신하가 될 수 있는 명예도 드리지. 어떤가?”

소정방의 얇은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대 백제국의 왕자 나 융! 이 자리에 있는 귀물은 놓고 가겠소. 가져간들 어차피 소정방 당신 것이 될 테니까. 백제가 오늘, 내일 멸망한다 한들, 나 혼자 살겠다고, 나라를 팔진 않을 것이오! 백제가 멸망한다 한 들, 백제의 기상은! 이 땅 위에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융은 등을 돌려, 소정방의 막사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소정방의 부장들이 모두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으나 융의 기백에 눌려 검을 뽑지 못했다. 더불어 소정방의 입에선 온갖 욕설이 뿜어져 나왔다.

 

융이 눈을 떴을 땐, 장지문 밖으로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자신의 꿈자리가 사나워 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태로 밖에 나와 보니 아직 새벽닭이 울기 전이었다. 융이 밖으로 나오자 밖에 있던 이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융은 말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근원지로 이동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스산한 기운이 융의 몸을 감쌌다. 근원지로 이동해 보니 융은 한탄같은 웃음을 터뜨렸고 융의 호위무장이 입을 열었다.

순찰을 돌던 중 발견했습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병사 둘이 도망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둘이…….”

융은 작은 반동으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비구니는 누군가에 마음껏 겁탈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비구니가 입고 있었던 승복은 온데간데 없고 사타구니엔 아직 마르지 않은 묽은 핏물이 보였다. 융의 머릿속엔 전날 밤 공평함과 자비에 대해 얘기하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의 백제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구니는 벙어리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을 것이고 힘으로 저항한다 한들 힘으로 남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애써 저항한다 한들 헛되었을 것이다. 융의 시선이 어스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호위무장의 검을 뽑아 들었다가 이내 검을 내던져버렸다. 비구니가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융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포를 비구니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러자 융을 따르는 한 신하가 입을 열었다.

어찌 저리 미천한 것에 왕자님의 포를 덮어주시는 것인지 신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불가에 미천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융은 짧은 말을 던졌다. 신하는 뒤로 물러났고 융은 묵묵히 비구니의 곁에 앉아 움켜쥔 손을 폈다. 비구니의 손엔 흙과 잡초 그리고 뭉개진 붉은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숨이 끊어지기 전 저항을 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땅을 움켜쥔 것 같았다. 융은 머리 위로 꽃을 들어 올려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멀찍이 서 있던 길잡이가 입을 열었다.

그 꽃은 이름이 없습니다요. 그냥 이맘때 산 아무 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입지요.”

융은 꽃을 다시 비구니의 손에 움켜쥐어주며 입을 열었다.

흔히 보이는 꽃이, 이름이 없구나. 언젠가 이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융은 오랜 시간 비구니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생각해보니 비구니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따끔거렸다. 비구니가 감싸주었던 천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어느덧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산바람이 내려와 융의 몸을 휘감고 돌았다. 비구니의 몸을 덮고 있는 포가 펄럭였다. 융이 움직이지 않자 융의 곁에 있던 이들 또한 조용히 융의 곁을 지켰다.

 

황산벌에서 계백이, 기벌포에선 의직이 전사하고 사비성 앞에서의 마지막 항전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땅이 꺼질 듯 한숨 쉬며 어라하가 말했다. 이때 태자 효가 입을 열었다.

어라하. 시기가 시기인 만큼 사비를 버리고 웅진으로 피신하여 훗날을 도모하시는 게 옳다고 생각되옵니다. 어라하께서 건재하신다면, 백제의 만 백성이 일어나 하나의 마음으로 당나라와 신라를 몰아낼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와 왜에서 원군이 올 것입니다.”

어라하는 작은 신음으로 반응을 보일 따름이었다. 이에 왕자 태가 큰 목소리로 고했다.

도읍을 버린다는 것은, 백제를 버리는 것이고 지금 이 시국에 웅진으로 피신을 간다 한들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나이까? 차라리, 이곳 사비에서 뼈를 묻겠다는 의지로 결사항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효가 앞으로 나와 반박했다.

항쟁? 무슨 수로? 우리에게 군사가 있나? 하물며 장수가 있나? 이미 기벌포와 사비성 앞에서 수만 수천이 죽어나가 병사도 지휘할 장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인가?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좀 하고 말하시게.”

태가 이를 갈며 무어라 반박하려던 찰나 어라하가 손을 들어 중재했다. 어라하의 시선은 융을 향했다.

네 생각은 어떠한가?”

융은 어라하의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애초 윤충과 흥수의 말을 들었더라면 계백과 의직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아버지 어라하를 원망하지만, 아무런 표현을 할 수 없었다. 힘이 없는 자신을 원망했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린 현실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비참함이 가혹했다.

네 생각은 어떠한가 물었다.”

어라하의 시선이 융에게 꽂혔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눈이 마주치자, 융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도가 있길 바라는 눈동자가 자신을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융이 입을 열었다.

어라하. 소정방은 탐욕이 많아 재물에 약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제 최고의 재물과 좋은 음식으로 제가 소정방을 설득해 보겠나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입을 불로 지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융은 더 이상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에 비통함을 느꼈다. 융과 눈을 마주쳤던 어라하의 눈동자는 빛을 잃어가며 눈을 감았다. 미간의 주름의 깊이가 더 깊어졌고 들어 올린 고개엔 마른침을 넘기는 목젖이 힘겨워 보였다. 효와 태는 융의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어라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소신료와 왕자들은 숨죽여 어라하를 올려다보니, 어라하는 짧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셋의 의견을 모두 듣겠다.”

 

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일이 눈에 아른거렸다. 또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겨웠다. 융의 시선이 호위무장으로 옮겨졌다. 호위무장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망친 병사를 잡아 오겠습니다. 도망은 곧 사형…….”

됐다.”

융이 짧게 말을 끊었다. 융은 터벅 걸음으로 법당 앞까지 다가갔다. 부처는 온화한 미소로 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융은 부처에게 희미한 미소로 답례하는 찰나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융은 부처를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렇게까지 하여야겠습니까?”

융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호위무장과 병사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신원사의승려들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융은 등 뒤에 솟아있는 계룡산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러나 길잡이는 융의 옆으로 다가가 융의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 이끌었다. 길잡이의 태도에 호위무장의 검이 길잡이의 목으로 향하자 길잡이는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뭐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계곡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산신을 모시는 제단이 있고 그 옆에 작은 굴이 있으니까, 적어도 거기까진…….”

길잡이는 이내 말을 잊지 못하고 쇳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융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백제인은 아직 백제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백제의 왕자인 자신은 그만 포기하려 했기 때문이다. 융은 신원사 주지를 불러 말했다.

비구니의 장례 아쉽지 않게 치러주시길.”

주지는 합장했고 융 또한 합장했다. 융은 길잡이를 따라 산 위로 이동했다. 길잡이가 말한 곳은 멀지 않았고, 산신제를 올리는 제단엔 맑은 물 한사발이 올려 있었다. 융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길잡이가 말한 굴은 좁고 낮았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융이 말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백의 신라군이 숨가쁘게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호위무장이 융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저들을 유인하겠습니다. 왕자님께선 다른 곳으로 피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융은 신라군에 시야를 고정시켜놓고 대답했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이제, 이 백제엔 내가 도망갈 곳이 없는 듯한데…….”

융이 대답하는 사이 신라군은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호위무장과 병사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융은 말에서 내렸다. 신라군이 코앞까지 다가와 포위하자 융도 검을 뽑았다. 융이 검을 뽑아들자 신라군과의 긴장감이 극도로 달했다. 팽팽한 긴장감에, 누가 먼저 나서진 않았다. 수적 우위에도 신라군이 나서지 않음은, 황산벌에서 느꼈던 계백의 기백 때문이었다. 적은 수에도 신라의 대군을 네 번이나 패배시켰던 기백이 신라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의 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둔탁한 철 울림소리가 울려 퍼졌다. 융이 짧게 말했다.

이제, 그만 하자꾸나. 아무도 죽지 말고, 살자꾸나.”

융은 검을 내려놓았지만, 호위무장과 병사들은 아직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융은 신라군의 지휘관을 찾았다. 그러자 신라 지휘관이 앞에 대치중인 신라 병사들을 뚫고 나왔다.

내가 지휘관 김찬이오. 당신이 백제의 왕자 융이오?”

융은 두 발 앞으로 나서 김찬의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 내가 백제의 왕자, 부여 융이다. 우리가 순순히 투항한다면 아무도 죽이지 않을 수 있겠나?”

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김찬의 뒤에 서 있던 병사가 앞으로 천천히 나오며 소리쳤다.

백제 놈들이 내 아버지와 형님을 죽였는데, 그냥 살려주다뇨!”

신라 병사가 앞으로 뛰쳐나와 융을 목으로 창을 목으로 겨눠 달려들었으나, 김찬의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제지당했다. 융을 죽이려 한 신라 병사를 김찬이 크게 꾸짖었다.

이런, 멍청한 놈! 이제 이들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정녕 모르겠느냐! 또한 이곳에서 복수를 한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김찬의 호통에 병사는 속이 터졌는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융은 갑작스런 기습에 눈을 앙다물고 있다가, 김찬의 호통에 눈을 떴다. 김찬의 행동에 융의 호위무장과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융의 말이 갑자기 날뛰더니, 계곡 절벽으로 뛰어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모두가 융의 말이 뛰어든 마지막 자리만 바라볼 뿐이었다. 융은 다리에 힘이 빠쳐 휘청거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김찬의 표정이 변했다. 입 꼬리가 올라가며 웃었다. 융의 말이 뛰어내린 것에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융과 눈이 마주쳤다. 이어 뒤에 무기를 내려놓은 백제의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찬의 손이 하늘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융을 향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참 미안하게 됐소.”

하늘로 솟아있던 김찬의 손이 땅으로 내려가는 순간 융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두 목소리가 교차했다.

모두 도망치거라!”

융을 제외한 백제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융은 다급히 등을 돌려 도망가려 했으나, 김찬의 손이 융의 목덜미를 잡았다. 융은 김찬을 뿌리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신라군이 융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당황한 백제의 병사와 신하들은 도륙을 당하기 시작했다. 하늘로 핏방울이 퍼졌고 땅으로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융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비명을 지르자 눈가에 피눈물이 고였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가축처럼 도륙당하는 것에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 안 된다. 이러지 말거라. 이러지…….”

융의 작은 외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융을 제외하고 땅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백제인은 없었다. 외마디 비명으로 죽어가던 이들의 시선이 융으로 향했다. 땅바닥에 처박힌 머리로 입에서 피를 쏟아내기 위해 뻐금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말을 전하려는 것이지 모를 입모양이 천천히 멈춰갔다.

 

융은 눈이 가려진 채 사비로 압송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 아늑함과 불안함이 공존했다. 간간히 들오는 비명소리와 곡소리, 무언가 썩은 내와 탄 냄새.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불안하지만 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조금의 아늑함. 속이 답답해진 융은 주위에 있을 김찬을 향해 말을 던졌다.

왜 그랬나. 왜 속였나?”

이에 김찬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당신이 아직도 왕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죽지 않은 것은 과거에 왕자였기 때문이지. 당신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리고 언제든 당신도 죽을 수 있다. 건방 떨지 마.”

융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고개를 숙였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바락바락 목이 쉴 때까지, 입 밖으로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발버둥치며 소리 질렀다. 융을 호송하는 주위 병사들이 웃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융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융의 발악이 끝날 무렵 김찬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문사가 투항했다. 태가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는군. 아무튼 사비성은 함락되었고. 남은 건 잔당뿐이지.”

융은 답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뚫고 들어왔다. 융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소정방이었다. 소정방은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고 온화한 미소로 융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소정방이 정확하게 시야에 맺히자 융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너무나 익숙한 백제의 대전이었다.

그대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군?”

융은 왕좌에 앉아 가느다란 눈으로 수염을 어루만지는 소정방이 눈에 거슬렸다. 융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정방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 선물은 잘 받았는가? 아무것도 안 보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가? 내가 특별히 그대만큼은 신경 써 줬다네. !!!”

소정방은 대전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융이 대답했다.

그것 참 고맙소.”

융의 대답에 소정방은 피식 웃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멍청한 백제인 같으니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정방은 지휘관들을 대전 안으로 소집했다. 이내 당나라 장수들이 대전으로 모여들었고, 장수들이 다 모이자 소정방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고향으로! 그리고 포로와 잡힌 백제인 들을 최대한 본국으로 압송한다!”

소정방의 외침에 당나라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치며 기쁨을 표현했다. 이에 융은 코끝부터 울려오는 서러움과 눈망울에 맺히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었다. 소정방은 다시금 손끝으로 융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자! 고향으로!”

융이 소정방에게 달려들었으나, 당나라 무장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짓눌렸다. 압도적인 힘에 짓눌렸기에 마치 철없는 아이가 어른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당나라 장수들이 크게 웃어댔다. 소정방이 융에게 다가갔다. 융은 당장이라도 소정방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으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움직이지 못했다. 소정방은 융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융은 소정방의 발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발버둥을 칠수록 오히려 발에 비벼지게 되는 꼴이었다. 소정방이 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내 손가락 한번 움직이는 걸로 결정나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 저번처럼 배짱있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융은 기세 좋게 소리쳤다.

나는 대 백제의 왕자 융…….”

융의 말은 소정방이 융의 머리를 세게 밟음으로써 끊겼다. 소정방은 다시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고, 융은 다시금 소리쳤다.

나는 대 백제…….”

소정방은 융의 머리를 짓밟으며 소리질렀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란 말이다! 패배자면 패배자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울며불며 살려 달라, 애걸복걸 하란 말이다! 이제 백제는 없다.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백제는 지워질 것이다!”

소정방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전이 조용해졌다. 융의 얼굴은 눈가가 찢어지고 입술이 터졌으며,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소정방에게 융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에 소정방은 귀를 기울였다.

백제가 사라진다 한들, 백제인의 핏줄이 씻겨 나갈까.”

소정방은 융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옆에 있던 무장의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소정방의 얼굴을 융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피로 물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소정방은 칼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대전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소리쳤다.

당나라로 가면서 망한 백제를 보거라 그리고 울부짖어라. 찢어지는 고통으로 망국을 떠나게 해주마!”

소정방이 대전 밖으로 나가자, 이 상황을 어찌 할지 몰랐던 당나라 장수들이 우왕좌왕했다. 몇몇은 소정방을 따라 나갔고, 몇몇은 대전 안에서 눈치를 보았다. 융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맥없이 쓰러졌다. 융의 눈이 천천히 감겼을 때 비구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작은 입모양이 감기는 눈과 다르게 뚜렸히 들렸다.

. . . . . . .’

 

윤씨는 맨 발로 땅을 걷는 기분이 좋아 자꾸만 앞으로 걸어갔다. 땅은 부드러운 모래알로 가득했고,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은 싱그러웠다. 깊은 숨을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엔 양떼 같은 구름이 떠다녔다. 작고 기다란 구름은 줄을 지어 어디론가 멀리 멀어져 갔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속도가 더뎠다. 불어오는 바람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구름이 바람을 거스르려는 모습에 윤씨는 계속 바라보았다. 그래도 발걸음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서 아이와 남편이 걸어오고 있다. 윤씨는 아이와 남편을 보기위해 이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집은 아니지만 집처럼 편안한 느낌이 좋았다. 그래도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아이를 품에 안고 남편이 걸어온다. 기쁘면서 천천히 하늘로 가는 구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 잡히는 것이 없지만,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소리가 윤씨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구름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남편은 윤씨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윤씨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구름은 시야 밖으로 멀어져갔고, 하늘에서 하얀 깃털이 떨어졌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하늘엔 새가 없었다. 윤씨는 깃털을 주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매미소리만 요란했다. 사방에서 끓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더위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묵묵히 유왕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없는 발걸음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숨막히는 퀴퀴함에 누구하나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는 먼지는 멀리 퍼지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없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가라앉길 반복했으며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여기에 끓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마치 사람들을 지옥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람들은 흙먼지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들어갔다.

구드레 나루터에 우두커니 서있던 융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앞서 나간 나룻배가 점점 나루터에서 멀어져만 갔고, 융이 타야 할 나룻배의 사공은 고개를 숙인 채 힘껏 노를 움켜쥐었다. 사공의 조용한 흐느낌은 작은 물결이 되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융은 점점 멀어져 가는 나룻배를 바라보며 한탄같은 소리를 터뜨렸다.

이처럼 맑은 날 떠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앞서 나간 나룻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수레마냥 물길을 이동하던 수척의 나룻배가 융이 타려고 한 나룻배 뒤에 다닥다닥 붙자, 융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융의 뒤에서 융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융은 가까이 보이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깃발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융은 이해되지 않을 끄덕임을 하고선 고개를 돌리려다 자신을 따르는 행렬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탄식. 융의 탄식 같은 외마디에 모두가 융을 바라보았다. 융은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융의 주먹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융은 저 멀리 보이는 부소산을 바라보며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이제 나에게 의지하지 말거라.”

조금의 흐느낌. 그뿐이었다. 그 누구도 크게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융은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부소산을 바라보았다. 산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언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가. 아직까지 하늘 높이 치솟은 저 연기는 융에게 사비를 지키지 못한 혼의 의미 없는 마지막 저항처럼 보였다. 융은 자신도 모르게 부소산을 바라보며 예를 표하며 어금니를 세게 으득였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이 땅 위의 왕이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고 이렇게는 그 무엇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융의 입이 벌어졌다. 무언가를 뱉어 내고 싶었다. 속에 있는 것과 지금 당장 뱉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뱉어내고 싶었다. 뱉어내지 못한다면 지르고 싶었다. 이 사비 전체에 울려 퍼질 수 있을 만큼의 큰 소리를. 허나 그 무엇도 뱉지도 지르지도 못했다. 융은 천천히 자신이 타야 할 나룻배 앞으로 걸어갔다. 이어 발을 디디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린 사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 배는 어디로 향하는가?”

사공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것을 융이 보았다. 대답 없는 사공에 융은 깊은 숨을 뱉어내며 배에 한 발 디뎠다. 이어 다시 물었다. 나룻배가 잠시 한 쪽으로 기울었다.

이 배가 이 구드레를 떠나면 다시 구드레로 돌아오는 것인가?”

사공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흐느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무는데 입술엔 핏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공은 침을 삼키는 것인지 피를 삼키는 것인지 모를 꿀떡거림을 하고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 긴 시간 노를 저어야만 합니다요.”

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한 발을 나룻배에 디뎠다. 한 쪽으로 기울어졌던 나룻배에 중심이 잡혔다. 융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몇 줄기의 봉화가 피어올랐다. 망국의 유민과 신하는 이번 뱃길로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사공은 돛을 올리지 않고 천천히 노를 저었다. 융은 배의 모퉁이에 앉아, 한 팔을 뻗어 물속에 집어넣었다. 비구니가 감싸준 천이 젖어가며 물들었던 것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융은 백강의 강물이 유난히 차게 느껴짐과 동시에 포근했다. 이어 배 밑을 바라보며 백강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융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계속 물 가까이 대고 있다가, 이를 본 사공이 급하게 노를 손에서 뿌리치며 융에게 다가갔다. 융은 한 손을 뻗어 사공을 제지하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이상하게 말이다. 이 백강 속으로 들어가면 편안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구나. 눈으로 깊이를 알 수 없고 빛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 내려가면, 어쩌면 이 지독한 꿈에서 깰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다.”

수면 위에 비치는 융의 얼굴이 일렁이었다. 사공은 아무런 말없이 다시 노를 집어 들어 노를 저었다. 멈춰 있던 나룻배에 물살이 느껴지자 융은 물 속에 집어 넣었던 손을 꺼내 다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사공은 융이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자 검지를 빨아 바람이 부는지 확인했다. 사공의 이마에 맺힌 땀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순풍으로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사공은 돛을 바라보다가 곁눈질로 융을 바라보았다. 이어 코로 길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노를 저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 덕분에 융은 말없이 생각에 잠기거나 웃음과 슬픔이 담긴 표정이 나오거나 길거나 짧은 숨을 내쉬었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유왕산 가득히 사비의 유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나룻배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유왕산에 가까워져 갔다. 유왕산에 가까워질수록 떨리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융은 그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깊은 숨을 쉬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의 나룻배를 따라오던 뒷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융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사공에게 물었다.

저 소리를 아는가? 참으로 듣기 좋구나. 안다면 불러 주지 않겠나?”

아직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한 사공은 목청이 터져라 불렀다.

궁야평 너른 들에, 논두 많고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 동남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이 아니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건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 구룡포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와 벗님, 구국충성 다 못했네,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이그리 유정턴고, 매냔 팔월 십육일은 왼 아낙네 다 모인다…….”

사공은 노를 손에서 놓고 융 앞에 엎드렸다. 융은 사공을 일으켜 세워 노를 잡게 했다. 그리고 하늘높이 손을 뻗어 점점 멀어져가는 유왕산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산유화야!”

융은 힘껏 소리 지르고 비구니가 주었던 천을 강물 위로 날랐다. 이어 작은 목소리로 뱉어냈다.

왜 이리 허무하게 져버렸는가.”

사공은 천천히 노를 저었다. 어느덧 유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룻배가 일으키는 물결은 계속해서 부서져갔다.(*)


김범규(gwang315@naver.com/010-5372-3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