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꽃을 찾아드립니다
#1: 행복
선선해져가는 어느 가을 날, 여자는 어김없이 햇빛이 잘 드는 가게 창가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평일 오후의 꽃집은 언제나 한가하다. 이렇게 한가한 오후가 되면 커피 한잔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는 그 사람의 꽃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것이 그녀만의 취미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꽃을 가지고 산다, 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어떤 꽃을 가지고 사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달라진다고, 어느 누군가가 특정한 어떤 꽃을 좋아하게 되는 건 필연이고 그게 그 사람의 인생을 함께 할 꽃이라고. 저기 바쁘게 지나가는 남자의 꽃은 무엇일까, 예쁘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성이는 저 여자의 꽃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녀는 시선을 내려 식어가는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자 제 몸집에 비해 한참은 커 보이는 교복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가 보인다. 살짝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킨 여자가 물었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한참을 망설이던 여자아이가 힘겹게 입술을 떼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련, 살 수 있어요?
예쁘게 반달모양으로 휘어있던 여자의 눈매가 두어 번 깜빡여지고 난 후 동그랗게 커진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길목에, 봄철에나 잠깐 피는 목련을 무슨 사연으로 찾는 것인지 궁금해진 여자의 눈이 아이를 쭉 훑어 내린다. 여자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아이를 쳐다본다. 하필 왜 목련일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잔상들을 애써 지워내려는 듯 여자가 고개를 두어 번 가볍게 저은 후 아이와 눈을 맞춘다. 여자의 눈빛과 맞부딪힌 아이의 눈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곤 작은 손을 들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순간, 여자는 보고 만다. 헐렁거리는 교복 소매 끝이 올라가 보이는 가는 손목에 새겨진 여러 개의 흉터들을. 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내뱉은 말에 정신이 들고 여자는 천천히 손목에서 시선을 옮겨 다시 아이를 마주한다. 어느 새 그 아이는 어렸을 적의 그녀 자신이 되어 눈을 맞춘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여자는 얼어붙었고, 바깥에 제법 세게 불던 바람조차 잦아든다.
열여섯, 열일곱의 그녀 또한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멍한 눈빛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상처 가득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잡는다. 10년 전의 따뜻했던 봄, 거리에는 노랑, 분홍 꽃들이 피어났고 푸른 새싹들도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아름다운 계절에 여자는 처음 목련을 마주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던 봄바람이 목련나무를 한 번씩 간지럽힐 때마다 꽃잎은 아무런 저항 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무참하게 버려져 검은 흉터들을 하얀 꽃잎에 감싸 안은 채로 시들어가는 불쌍한 꽃잎들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여자가 이내 쓰게 웃곤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나랑 똑같구나.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하얀 꽃잎을 잠시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던 그 날부터, 목련은 여자의 꽃이 되었다. 새 출발. 분명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새 출발을 할 것이고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 거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그녀는 맑았고, 밝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렇게 피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갔고 항상 자리 잡고 있던 예쁜 볼우물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날부터 집에 함께 살기 시작한 새엄마라는 존재는 여자에게 새 출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 같았다. 차가운 말들이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날이 늘어갔고 그녀의 몸과 얼굴에는 분홍빛 생기 대신 푸르고 검은 멍들이 항상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음대로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던 그녀는 혼자 잠긴 방문 앞에 기대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떨궈냈다.
행복은 그녀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 사이에서 불행한 자신을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의 끝은 문제가 되는 것은 나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화를 낼 수도,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기에 괴로워했던 여자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을 해하는 방법 하나였다. 살고 싶다. 여자가 혼자 눈물을 삼키고 상처를 내다 지쳐 주저앉아 중얼대는 말이었다. 살고 싶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힘들었고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는 살고 싶었다. 피가 맺혀 엉망이 된 팔목을 내려다보며 언젠가는 이러다 스스로 자신을 죽이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여자는 두려워했다.
그래, 그때의 그녀는 그랬다. 처음 문구점에 들러 커터 칼을 샀을 때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면서 차가워진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집에 오는 길 주머니에 넣은 칼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걷는 내내 얼마나 많이 입술을 깨물어 짓이겼는지, 팔을 걷고 처음 칼을 손목에 가져다 댔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잊지 못했다. 그녀의 손목에 흉터가 하나 둘 늘어가고 여자의 감정 또한 메말랐을 쯤, 봄이 끝났다. 그리고 세 번의 봄이 지나고 나서 집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여자는 드디어 칼을 놓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이제 그만해도 돼. 난, 살아도 되는 사람이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한참을 삼켜왔던 울음소리를 터트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여자가 잠시 눈을 감는다. 집을 떠나고 난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아 항상 그녀를 아프게 했기에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잊으려고만, 피하려고만 했다.
그리고 지금,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툭, 여자의 발아래 규칙 있게 깔린 타일 위로 떨어진다. 당황한 듯 아이가 잠시 망설이다 여자의 팔에 손을 뻗어 천천히 쓸어내린다. 괜찮으세요, 서툴게 위로하는 한마디 말에 여자가 울어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들어 아이를 쳐다본다. 이 아이도 과거의 나일까, 살고 싶어 하고 있을까. 이내 가만히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아 의자로 이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곤 맞은편에 앉아 따뜻한 율무차를 밀어준 여자가 망설이던 입술을 연다.
-목련, 꽃말이 뭔지 알아요?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을 들어 여자를 쳐다보던 아이가 이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은 그녀가 이내 창밖으로 눈을 돌리곤 말을 이어나간다.
-고귀함이에요. 안어울리죠? 목련 지는 거 진짜 흉하잖아요, 나도 이해가 안돼서 엄청 많이 생각해봤었는데, 아무리 지저분하게 져도 다음 봄에는 다시 살아나서 하얗게 꽃 피우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잠깐 힘들어도, 항상 다시 살아나니까. 학생 생각은 어때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꼼지락대던 아이가 멈칫, 한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던 아이의 어깨가 들썩이고 여자는 고개를 돌려 아이의 손을 감싸 잡는다.
-꽃이 진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지나가는 계절일 뿐이지. 사람도 똑같아요. 지금 힘들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라는 거,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예쁜 꽃이라고 생각했어요, 팝콘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고. 근데 사람들한테 밟혀서 지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어요. 저랑,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한참 울던 아이가 힘겹게 꺼내놓은 말이었다. 학교에서 심한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만 같았다, 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생각조차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한 여자가 떨리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아준다. 아이를 달래주고 꽃집을 나서려는 아이를 붙잡은 그녀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활짝 웃어준 그녀가 말한다.
-목련이 없으니까 대신 주는 선물이에요. 메리골드, 꽃말 찾아오는 건 내년 봄에 목련 보러 올 때까지 숙제로 내줄게요.
망설이며 꽃을 받아 든 아이의 얼굴이 이내 꽃만큼이나 환해진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말과 함께 꽃집을 떠난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여자가 이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차갑게 식은 커피 잔을 들고 창밖을 쳐다보며 작게 웃음 지으며 중얼거린다.
-메리골드, 반드시 오고 말 행복. 너에게도, 나에게도.
#2: 쉼표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여자는 단순히 꽃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꽃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여자는 자신의 꽃집 앞에 작은 입간판을 내걸었다.
‘당신의 꽃을 찾아드립니다’
생각보다 여자의 ‘꽃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여자는 그 덕분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이 너무 지쳐 힘들어하는 회사원에게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꽃말을 가진 시네라리아 화분을,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한 여고생에게는 ‘명랑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데이지를,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에게는 ‘영원한 사랑’의 리시안셔스를…. 많은 사람들이 여자에게 위로받고 미소를 되찾아 꽃집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행복했다. 더 이상 한가한 오후와 혼자 마시는 커피는 없었지만 대신 여자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이해하고 위로하는, 커피보다 따뜻한 날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여자의 꽃집 창문 밖에는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3: 사랑
그렇게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이 되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고 여자는 오랜만에 창가에 앉아 바깥을 보며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던 여자의 시선이 창 밖 길가 리어카를 끌고 박스를 줍는 할머니에게로 멈춰 선다. 여자가 처음 이곳에 꽃집을 열었을 때부터 눈이 오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항상 거리를 맴돌며 폐지를 주우러 다니시던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어깨와 머리에 쌓이는 눈과 지나가는 사람들과 달리 얇은 옷차림, 굽은 허리를 바라보던 여자의 눈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신사가 들어온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곤 겉옷과 따뜻한 커피를 챙겨 거리로 나가 할머니에게 커피를 건네 드릴 때 까지도 신사는 그 자리에 미동 없이 서있었다.
-아이고, 항상 고마워서 어째…. 젊은 아가씨가 복 받을 일만 하네 그래.
-아니에요, 이거밖에 해드릴게 없어서 죄송하죠.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라니까요.
차가운 손으로 커피를 받아들던 할머니의 손을 마주잡고 대화를 주고받던 여자가 할머니가 커피를 마시는 사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멀리서 할머니를 바라보던 무표정인 신사와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남자는 당황한 듯 황급히 자리를 떠버렸다. 별 일 아니겠지 하며 고집스레 할머니를 집에 들여보내고 나서야 꽃집에 다시 들어온 여자가 옷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난로 앞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상하게 그 중년 신사의 눈빛이 자꾸 잊히지 않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두어 번 가로 저었다. 짧아진 겨울의 해 때문에 밖은 벌써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고 거리에는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이제 그만 여자가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거라면 스토커인가, 아니면 사기꾼? 그것도 아니면… 범죄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나온 엉뚱한 결론에 자신도 모르게 여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별 생각을 다 하네, 하며 버스에 앉은 여자가 이어폰을 꽂는다. 이어폰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여자는 이내 남자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12월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 자신의 꽃집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아직… 영업합니까?
낮은 목소리로 망설이듯 물어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이내 미소지어보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꽃집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미안합니다, 늦은 시간에….
-아니에요,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 일단 여기 앉으세요. 밖이 많이 춥죠?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롯가에 남자를 앉힌 여자가 이내 따뜻한 커피를 남자의 손에 쥐어준다. 어색하게 웃어보이던 남자가 이내 커피를 홀짝이곤 꽃집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었다. 여자 또한 그런 시선을 알아채곤 시선을 내리곤 정리하던 꽃다발을 만지작댔다. 이윽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남자가 커피 잔을 내려놓곤 말을 건넸다.
-저어, 꽃집 앞에 입간판에 써져있는 글을 봤는데요.
-아, 네. 꽃 찾으러 오셨어요?
약간의 의심이 섞여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머뭇머뭇하며 말을 꺼내는 것을 주저하는 듯 했다. 말을 꺼낼 듯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쉬기를 여러 번, 이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앞 골목에서, 폐지 주우러 다니시는 할머니께서 제 어머니십니다.
뜻밖의 말에 여자의 눈이 커졌다. 여자의 반응을 확인한 남자가 뒷머리를 몇 번 긁적이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꽤 오랫동안 어머니를 못 보고 살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버리셨으니까요.
한참 정적이 이어지고 커피 잔을 든 남자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본 여자가 괜찮다는 듯 살짝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저는 입양되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의 부모님에게서 자랐고 제가 친자식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양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제게 친부모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그래서 저는 제 친어머니를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괴로웠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날 버려야만 했는지, 날 버리고 나서 얼마나 잘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멀리서나마 어머니를 보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제가 어머니를 미워할 수는 없다는 것을요. 다만, 저는 두려웠습니다. 어머니가 아직도 저를 반기지 않으실까봐…. 그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죠. 어머니를 잘 보살펴주는 것 같은 아가씨가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했지만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번 버림받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 아가씨, 내 부탁 좀 들어줘요.
쏟아내듯 말을 마친 남자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편안함이 서려있는 듯 했다. 여자 또한 입가에 미소를 띠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어머니에게, 꽃을 드리고 싶습니다. 단 한 번도 드리지 못했던 꽃을요.
잠시 고민하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꽃을 두 송이 가져다주었다.
-예쁘죠? 이건 나팔수선화라는 꽃이에요. 당신은 나에게 오직 한 분뿐입니다, 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옆에 이 꽃은 천일홍,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어머니께 전하고 싶은 말을 이 꽃들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남자가 멍하니 꽃을 바라보았다. 이내 추억에 잠기는 듯 한참을 눈을 감고 얼굴에 미소를 띠던 남자는 이내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꽃다발을 예쁘게 포장한 여자가 남자에게 꽃다발을 내밀자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곤 여자 쪽으로 꽃다발을 밀었다. 의아한 듯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에게 힘겹게 말을 꺼내는 남자의 눈빛이 서글퍼 보였다.
-뜻이 참 예쁘네요, 제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담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가씨가 전해드렸으면 합니다. 저는 그저 어머니께 제 마음을 전하면 그뿐, 어머니와 마주할 용기는 없습니다.
한참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꽃다발을 받아들곤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꽃집을 나선다. 남자의 나이는 어림잡아 50대 중후반,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또 다시 버림받게 될까봐, 멀리서조차 바라보지 못할까봐. 앞에 놓여있는 알록달록 예쁜 꽃다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여자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여자가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했었는지. 성인이 되어 집을 나오고 난 이후부터 여자는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저를 싫어할까봐서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생각이 나 아버지에게 연락하려 전화기를 들 때면 망설이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겁내고 있는지, 왜 흔한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저만큼 나이가 들 때까지, 두려움에 무서움에 용기를 낼 수 없을까. 아무리 커도 자식은 언제나 부모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건가. 길게 늘어지는 생각들에 여자가 옅게 웃음 짓고는 가게 문을 닫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부랴부랴 난로부터 켠 여자의 발이 분주하다. 앞치마를 매고 물을 끓이고, 꽃들을 살피고 장미 꽃다발 주문을 두어 개 받은 후에야 여자가 난로 앞에 자리 잡고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제법 쌓여 하얗게 가게 지붕들을 소복이 덮었던 하얀 눈들이 사라진걸 보니 오늘은 눈이 오지 않으려나 보다, 생각하고는 겨울햇살이 쨍하게 비치는 밖을 바라보며 여자가 밝게 웃었다. 여자의 시선은 가게 한구석에 자리한 꽃다발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창 밖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얼마 되지 않는 박스를 주워 리어카에 싣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고정되었다.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던 여자는 이내 할머니를 꽃집 안으로 이끌었다. 결국 밀리듯 꽃집 안으로 들어와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하는 할머니와는 달리 여자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날도 추운데, 차나 한 잔 하고 가시라니까요, 편하게 계세요. 할머니.
-이거 참, 괜찮다니까…. 괜히 내가 민폐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곤란한 듯 낡은 모자를 손에 꼭 쥔 채로 이리저리 둘러보던 할머니의 눈이 예쁜 꽃들에 멈추어 서고 이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할머니의 미소를 마주한 여자 또한 활짝 웃으며 창가 자리에 커피 두 잔을 내어 할머니를 앉힌다. 이런 미소를 보는 것이 여자의 낙이다. 꽃, 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사람에게 웃음을 준다.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할머니는 입을 열어 커피 잔을 감싸 잡았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꽃집이 참 아늑하고 예쁘구먼, 가게도 주인을 닮았나보네 그려.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할머니는 조용히 항상 자신이 다니던 창 밖 거리를 바라본다. 그런 할머니의 거친 손과 눈빛을 조용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탁자에 놓인 수선화 화분을 조심스레 감싸 쥔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머니, 꽃도 다 이름하고 뜻이 있는 거 아세요? 이건 수선화인데요, 자기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래서 꽃이 참 좋아요. 가끔은 백 마디 말보다 한 송이 꽃이 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그러거든요. 누군가한테 힘이 될 수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잖아요. 할머니는 어떤 꽃이 마음에 드세요?
여자의 말에 수선화 화분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시선이 이내 꽃집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여자의 뒤편 가게 구석에 있는 꽃다발에 자리 잡는다. 시선을 알아챈 여자가 몸을 일으켜 꽃다발을 할머니의 무릎에 안겨주었다. 당황한 듯 여자를 올려다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불안해 보이는 것을 눈치 챈 여자가 할머니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꽃다발, 누가 할머니 드리라고 저한테 맡기신 거예요. 할머니께 사랑한다고, 할머니가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신가봐요. 할머니 좋으시겠다.
꽃다발을 받아 든 할머니의 눈시울이 점점 촉촉이 젖어가고 떨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들어 코에 가져다대던 할머니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쉰다.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참 잘 컸어, 죽은 남편을 정말 많이 닮았는데 내가 어찌 못 알아보겠누. 못난 어미 보겠다고 찾아와서도 앞에 선뜻 안 나타나는걸 보면 내가 아직도 미운가보다 싶어서 나도 아는 척 못했지. 자식 버린 죄인이 어쩌겠소, 보고 싶어도 참고 아파도 내 죄다, 하며 사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예쁜 선물을 다 하고…이 못난 것도 어미라고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래 이렇게 나를 용서해주는구려. 내 옆에 있는 것 보다 좋은 집, 좋은 부모 만나서 조금 더 잘 먹고 잘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싶어 보냈는데,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지. 그 오랜 시간동안 내 새끼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미안해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았는지….
여자는 말을 끝내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쏟아내는 할머니를 그저 가만히 옆에서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가로수 길에서 옅은 미소를 띠고 꽃집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가 이윽고 꽃집 문을 열었을 때, 여자는 남자의 행복한 눈물을 보았다. 천천히 할머니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는 남자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다.
-어머니,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할머니 또한 너무 늙어버린 아들을 끌어안고 펑펑 한참을 우셨다. 미안하다고, 다시 찾아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고. 서로의 진심이 담긴 두 사람의 고백은 차가운 겨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 같았다.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여자가 흐르는 눈물을 막으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 새 그쳤던 눈발이 조금씩 거리에 하얀 융단이 되어 쌓이고 있었다.
-이거, 에델바이스 화분인데… 조그맣고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귀중한 추억, 용기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씩씩한 친구에요. 아저씨도, 이 화분 잘 키우시면서 항상 할머니하고 귀중한 추억 만드시고 용기 낸 오늘을 기억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드리는 제 선물이니까 받아주세요.
두 모자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꽃집을 나갈 때 여자가 둘을 붙잡아 에델바이스 화분을 내밀었다. 그윽이 화분을 바라보던 남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꽃집을 나섰다. 눈이 내리는 겨울은 추웠지만 처음으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아들과, 처음으로 아들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하게 녹아가고 있었다.
흰 눈 사이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오랫동안 누르지 못했던 전화번호를 누른다.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일까, 에델바이스 화분 때문일까. 여자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아버지? 저에요. 잘… 지내셨어요?
입술을 꾹 깨물고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던 그녀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피어날 때 까지도, 바깥에 내리던 함박눈은 조용히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4: 마침표
한 차례의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 새 꽃집에는 다시 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알록달록 색색 깔의 꽃이 가게 안을 물들였고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여자의 옆자리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여자의 아버지도 함께 웃음 짓고 있었다. 항상 혼자였던 그 자리에 여자는 비로소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앉힐 수 있게 되었고 아무런 방해 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따뜻한 햇살을 듬뿍 받으며 활짝 피어난 창가의 파란 수레국화 또한 ‘행복’ 하게 웃음 짓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꽃집에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을 때, 여자는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의 꽃을 찾아드리는 행복한 꽃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