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설화

by 진씨.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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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설화

 

 

 

  이 정도 어둠이라면 괜찮다. 아직 빛이 남아있어 글자를 읽거나 쓸 수 있다. 무언가를 쓰기에 좋은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아주 싫어한다. 어둠이 좀 더 짙어지면 난 두렵겠지. 어둠 속에서 등 뒤에 낯선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뒤를 돌아보면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것 같다는 상상. 그래도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면 다행히 아무 것도 없다. 불행히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고. 바람만 불었다. 나는 다시 글을 썼다.

낮엔 중고 서점에 책 스물 다섯 권을 팔았다. 나도 스물 다섯 살이다. 윤서는 나보다 세달 먼저 태어났지만 아직도 스물 네 살이다. 그 애는 나보다 삼 개월치는 더 어른이었다. 나는 책을 팔아 칠만 오백 원을 받았다. 밀린 아르바이트 비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아침부터 내 전화를 피했다. 나는 울었고 그때마다 윤서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때 난 그녀가 내게 모성애를 느끼길 바랐다. 그 문장을 옮겨 적으니 밤이 됐다. 저녁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내가 태어나던 날도 지금처럼 바람이 불었다. 나는 태어나기로 한 날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부랴부랴 태어났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잘못 태어났다고. 나는 그 순간 엉엉 울었다. 여느 아기들처 럼 응애응애 운 것이 아니라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무엇이 그리 슬픈지, 어느 날 갑자기 제 죽음을 목격해버린 영혼처럼 억울하게 엉엉 울었다.

 

 

 

 

  이제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둡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마저 쓸 순 없다. 가봤자 불을 켤 수 없다. 전기가 끊겨버렸으니까. 이 와중에도 빠져나가야 할 돈이 있다는 게 무섭다. 밀린 전기세 낼 돈도 없으면서 소설은 개뿔. 나는 이 문장도 유서에 적었다. 윤서가 보았다면 희미하게 웃어주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도 따라 웃을텐데. 

  바람이 분다. 시고 매운바람만 불뿐 언 뺨을 녹일 따뜻한 손난로도 없다. 바다는 넓다. 이 넓은 바다는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사람이 아무도 없어 기분이 이상하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다. 나는 문장을 끝마쳤다.

  글을 다 쓰고 모래사장을 지나 바다로 다가갔다. 누군가가 쌓은 모래성이 반쯤 부서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 눈이 따갑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물이 나왔다. 통증이 가시고 눈을 뜨니 내 옆에 낯선 여자가 서있었다. 낯설고 익숙한 얼굴이다. 여자가 누구였는지 알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는 뭐가 우스운지 웃었다. 나는 그녀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의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나는 웃지 않는 아이였다. 어릴 때 내 사진을 보면 항상 찡그린 표정이었다. 웃지 않는 아이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내게는 2살 차이나는 남동생이 있었고, 어른들은 남동생만 예뻐해주었다. 하루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숨을 쉬지 않으면, 그렇게 죽는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면 어른들이 슬피 울어줄까. 그게 궁금했다.

  그날 나는 죽겠다고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불도 켜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었지. 불을 켜지 않았어도 앞이 보였기에 아 저 여자가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구였을까? 남동생은 키가 작고, 엄마는 저렇게 날씬하지 않고, 아빠가 여장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녀는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는 분홍색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은 신고서는 머리를 올려 묶은 채 우리 집 거실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흰 스타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얼핏 본 얼굴은 너무 창백했다. 너무나도 창백해서 사람이니 귀신이니 하며 쳐다봤는데, 아름다웠다. 키가 크고 몸은 말랐고 얼굴은 예쁘지 않았지만 우아했다. 지나다니면서 한번 쯤 본 얼굴 같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홀렸었다. 그 얼굴에, 그 몸짓에, 그 표정에 홀렸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건 공포나 설렘이었겠지. 나는 멍하게 서서 여자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고요함 속에서 그녀는 홀로 음악을 듣고 있는 듯 가뿐하게 두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여자는 무용수를 연기하는 홍콩영화배우 같았다. 나는 두려움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아마 내 생애 첫 설렘과 첫 공포였으리라. 나는 죽지 않았고 그 섬뜩하고도 황홀한 경험 이후로 아이러니하게도 조금씩 웃을 줄 아는 아이가 됐다. 나는 그녀가 환상이나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꼭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물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물은 나를 집어 삼켰고 나도 물을 집어 삼켰다. 온 몸이 물방울에 갇혀 둥둥 떠다니는 소리가 귓구멍으로 쏟아지듯 들렸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물은 공기가 아니었다. 어지러워졌다. 콧속으로 들어온 물이 귓구멍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벌어진 입은 비눗방울 기계처럼 물방울만 만들어냈다. 헐값에 찍어낸 기계 같았다. 그나마 몸속에 남아있던 숨이 모두 빠져나가 이젠 물방울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몸이 더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제 나는 내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가 덜컥 모든 게 무서워졌다. 죽는다는 게. 이 어두운 집에 혼자 있다는 게. 겁이 났다. 자신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자신도, 꾸역꾸역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칼을 내려놓고 홀린 듯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어디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도서관은 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르는 사람들과 숨을 나눠 마시는 게, 내가 숨을 좀 쉰다고 아무도 눈치 주지 않는 게 나는 좋더라. 사람들은 생각보다 쿨하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웃었더라? 이런데서 소속감을 느끼는 게 우스워서? 아니다. 나는 그 애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웃었나봐. 하지만 헛것이겠지. 저 애가 윤서일리가, 내가 많이 피곤한가보다. 그 땐 그 앨 보고도 아무런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윤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행여 놓칠라 눈도 깜빡이기 싫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꼭 한 번 쯤은 저 앨 만나고 싶었다. 카페든 길거리든 어디서든. 나는 소설책 한 권을 골라 윤서 근처에 앉았다. 그 애가 읽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이다. 윤서는 이걸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 생각 없이 읽는대도 좋다. 그냥 그 애가 읽는 문장들을 따라 읽고 싶었다. 나는 윤서가 나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웃어주길 바랐다. 내가 좋아하던 그 웃음으로.

 

  처음엔 윤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못생긴 여자애. 스물 네 살인데 서른이나 마흔쯤으로 보이는 여자애. 그런 아이였다. 그 애가 무용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항상 묘한 감정을 느꼈으니까. 그것뿐이었다.

  아버지뻘 되는 매니저가 회식자리에서 “무용은 예쁜 애들이나 하는 거 아냐?” 라며 놀렸을 때 윤서는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그 애는 하루에 한 번 씩 자기 자신에게 반한다고 말했다.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보면 아름답고 완벽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길 잘한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 모두들 야유했지만, 나는 그 때 그 애한테 반했다. 누군가에게 반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그 애가 춤추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 애가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이 든 척 눈을 감고 윤서가 춤추는 걸 상상했다. 머리를 올려 묶고, 분홍색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을 신고 빙그르 도는 걸 상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유독 그 애가 예뻐 보였다.

  그 앤 키가 크고, 비쩍 말랐고 창백했다. 얼굴은 예쁘지 않았지만 우아했다. 살짝 튀어나온 광대뼈는 사랑스러웠다. 너는 홍콩영화배우 같다고 그 애에게 말해주면 윤서는 장난스레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좋았다. 눈가가 휘어져 쌍꺼풀이 얇고 작은 눈이 더 작아졌다. 눈 밑이 볼록 튀어나왔고 입가에 보조개 같은 주름이 생겼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입술이 누워있는 숫자 3같았다. 그 애는 만화에서나 보던 동물 캐릭터처럼 생겼다.

  나는 그 애의 웃음이 신기했다. 눈도 웃고, 입도 웃고, 얼굴 전체가 자연스레 웃는 게 신기했다. 노골적인 눈웃음이 아닌 진짜 눈웃음. 진짜로 웃고 있는 얼굴. 윤서는 가짜가 아닌 진짜로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윤서의 표정과 미소를 따라 지어봤다. 검지와 중지로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보았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너는 무얼 먹었기에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그 애처럼 웃을 수 있는 걸까? 네 웃음은 생각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한다.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목을 좌우로 돌린 후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 눈이다. 내가 좋아하던 그 눈. 가짜가 아닌 진짜로 웃던 그 눈. 나는 웃었다. 윤서는 웃지 않았다. 네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생각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문장 몇 개가 떠올랐지만 종이에 옮겨 적진 않았다. 이제 눈이 아프다. 그 앨 보느라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던 게 이제야 생각났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이 아파 눈물이 나왔다. 눈을 뜨니 윤서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인사도 없이 가다니 너는 여전히 재수가 없다.

 

 

 

  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해졌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나마 들리던 답답한 물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았다. 주위가 고요해지니 나는 더욱 무서워졌다. 입을 벌려 귀를 열기위해 애썼지만 물이 내 목구멍을 메워버렸다. 이제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물이 대신 채우는 것 같았다. 어지럽다. 갑갑하다. 주위가 온통 깜깜하다.

 

 

 

  윤서를 본 후 집에 돌아와서 나는 울었다. 태어났을 때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어둠이 무서워서 울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열 달이나 어둠 속에서 지냈는데도, 아직도 어둠이 무서워서 나는 울었다. 웃음도 눈물도 겁도 없는 아이였는데 말야. 희한하다. 나는 이제 웃음도 눈물도 겁도 많은 어른이 됐다.

  나는 자주 혼이 났다. 매니저도 나를 혼냈고, 손님들도 나를 혼냈다. 그래도 나는 바보같이 웃었다. 웃다보면 뇌가 깜빡 속아서 기분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른이 돼서도 혼이 나야하는구나. 나는 바보같았다. 잔뜩 혼나고, 끊임없이 죄송해하다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으면 이제 지루할 법도 한데 윤서는 항상 내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실컷 울고 이제 어디 가서 기죽지마. 위축되지도 말고, 쫄지도 마. 화장하고 다녀. 화장 좀 해야 아무도 만만하게 안 보더라. 젊을 땐 많이 울고 찌질해도 돼. 괜찮아.”

 

  나는 그 애를 끌어안았다. 그 때 윤서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너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 사람이니까 당연히 심장이 뛰는 건데 말야. 그 때 그 애의 심장소리를 좀 더 들어둘걸 그랬다.

 

 

 

 

  이 곳은 어둡다. 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닷 속에도 눈이 쌓일 수 있을까? 낭만적이다. 여기도 겨울인가 보다. 내 다리 밑으로 낯선 물고기가 지나다닌다. 물고기라기보단 짐승 같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보니 무섭고 신기했다 그들에겐 내가 낯선 동물이겠지. 아니, 낯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주위를 더 돌아보려고 눈을 돌렸지만 눈이 너무 뻑뻑해서 돌아가지 않았다. 온몸이 뒤틀린 것 같다. 내 눈이 아닌 듯 눈이 감기지도 않았다. 졸렸다. 온 힘을 다해 눈을 감았다. 눈물이 삐져 나왔고, 나는 잠이 들어 꿈을 꿨다.

 

  내가 바퀴벌레가 득실한 집에서 살았을 땐 꿈에 항상 바퀴벌레가 나왔다. 하루는 한 마리, 하루는 여러 마리. 그래서 항상 생각했다. 우리 집이 꽃가게였다면 내 꿈엔 항상 꽃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루는 한 송이, 하루는 수 백 송이. 순수하고 낭만을 꿈꾸던 때였다. 나는 재미없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개 사료를 팔고, 개 옷를 팔고, 커피를 팔거나 빵을 팔고,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사람들에게 혼도 나고, 위로도 얻었다. 지지리 궁상이었다. 마음이 삐뚤어져 모든 게 싫었다. 지갑은 채워져 가는데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다. 나는 이제 어리지만 어리지 않다. 실수 같은 건 더 이상 귀엽지 않은 나이더라. 오늘 내 꿈엔 윤서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생각났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이나 전지전능한 어떤 존재였겠지. 그는 내게 자신의 언어로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너는 남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고 잡초나 구름으로 태어나는 편이 어떠하겠느냐.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고 나 역시 그 걱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나는 육체를,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인간이 되고 싶었다.

  우린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실컷 싸운 연인처럼.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세상이란 어떻게 생겼느냐며 허공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곳은 네가 육체를 얻어 삶이란 것을 살아갈 곳이라고. 이 좁고 어두운 곳보다 훨씬 넓고 빛이 있어 아름다우며 너와 닮은 존재들이 너처럼 삶을 살아가는 곳이라고. 또한 복잡하여 미로 같은 곳이기에 너는 머리가 나빠 한참을 헤맬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상상했다. 내가 살아갈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했다. 빛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는 이것저것 상상하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내가 속한 사회의 언어를 배우면서는 다 잊어버릴 나만의 언어로 ‘삶’이란 단어를 읊조렸다. 두근거리고 벅찼다. 내가 느낀 생애 최초의 감정이었다. 기대. 삶에 대한 기대 말이다. 나는 열 달을 외롭게 어둠 속에서 지내다가 기어코 태어났다.

 

 

 

  나는 눈을 떴다. 오래 누워있어 머리가 아파서 몸을 일으켰다.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을 빼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었다. 맨발로 침대에 내려오니 발이 차가웠다. 그 차가운 감촉이 나는 좋았다. 배가 고팠다. 아무거나 손에 닿는 대로 집어먹고 싶었다. 콜라를 마시고 싶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덥다. 어느새 날이 더워졌구나. 나는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싱싱하다. 낮이 길어졌다. 태양은 더욱 강하게 내리쬐고 언 강이 녹았다. 거리엔 온통 녹음이 졌다. 맨살은 뜨겁고 공기는 끈적거렸다. 바다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모래성을 쌓았다. 누군가가 그 모래성을 발로 차버렸고 무너진 모래성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지렁이가 숨을 쉬려 땅 위로 나오자 장마가 시작됐다. 더위에 목이 말랐던 나무는 손을 흔들며 비를 반겼지만 곧 지쳐 벼렸다. 장마가 끝나고 나는 다시 바다로 갔다.

  이제 어두워지고 있다. 아무도, 아무것도 안 보인다. 누군가가 쌓은 모래성이 반쯤 부서져 있다. 나뭇잎이 조금씩 흔들린다. 슬슬 바람이 불려나 보다. 붉게 물든 나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니 바람이 살랑 분다. 나는 바보같이 웃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바람을 반겼다.